그 길을 따르다(1) / 베들레헴
(김우현 감독)
최근 제가 소식이 없자 많은 분들이 어디 아프거나 무슨 일이 있는가 하고 걱정의 메일이나 카카오톡 등으로 물어 오셨습니다. 감기기운은 있었지만 1월의 이스라엘 여정을 앞두고 같이 가는 분들과 나누려고 예수님의 여정을 글로 쓰고 있었습니다. 걱정마시구요...이런 인사만 쓰기가 뭐해서 아직 다듬어 지지 않았지만 ....그냥 '베들레헴'편을 조금 올리면서 소식을 전합니다. 이 글을 쓰면서 주님은 '만유의 주'로 오셨다는 것을 더욱 실감하였습니다. 바울처럼 내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고상함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제자가 되고 싶어졌습니다. 모두 건강 챙기시고 구속하신 주님만을 꼭 붙드는 시간들이 되시기를.... -------- 어느 형제님(미국)의 주선(큰부담)으로 김우현 감독이 인솔하는 2012.1월(12-20)의 이스라엘 성지순례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광야원정대 영상을 볼 때마다 입버릇처럼 주님이 나신 이스라엘 땅을 가보고 싶다고 기도로 말씀드렸는데 응답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뜻밖에 일을 주선해 주신 형제님에게 주께서 갚아주시기를 기도드리며, 그리고 성도님들의 후원과 기도로 이루어진 소원이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다시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다만 9일간의 블로그 공백이 걱정이 큽니다. 또한 잘 걷지 못하는 건강이 큰 부담인데 기도해 주시기 바라옵고 주께서 지켜주실 줄 믿고 용기를 내어 다녀오려고 합니다. 김우현 감독님의 연관된 글이 있어서 겸하여 함께 올립니다. <우림과둠밈>
(전체일정) 1/12) 텔아비브공항에 저녁 8시40분도착 베들레헴 인터콘티넨털서 1박 1/13) 여리고 인터콘티넨털서 1박 1/14~15) 갈릴리 마간빌리지(리조트)서 2박 1/16) 나사렛프라자호텔 1박 1/17) 예루살렘 그랜드코트호텔 1박 1/18) 감람산 세븐아치호텔 1박 1/19) 오후 예루살렘출발, 욥바항구에서 저녁, 8시 텔아비브공항도착, 11시 출발 1/20) 오후 3시 반 인천공항도착
1. 이스라엘 땅에 순례를 떠난 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행입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곳이고 말씀이 선포된 곳입니다. 우리가 온 맘과 뜻을 다해서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그 땅에서 나셨고, 그 길들을 걸으셨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이 땅을 밟는 여행은 너무나 값지고 소중합니다. 십 여 년 전, 처음 갈릴리 호숫가를 걸을 때의 그 감동과 흥분이 아직도 손에 만져지는 듯합니다. 주님께서 걸으셨고 말씀하시고 기도하셨던 그 곳에 선다는 것은 제자로서 너무나 감격적인 일입니다. 비록 강원도 정도 넓이의 작은 땅이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눈동자'(슥 2:8)이며 수많은 믿음의 성현들의 행적이 스민 '거룩한 땅'입니다. 무엇보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흔적이 깃든 영광의 성지(聖地)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를 사도행전은 '그 도(道)를 따르는 자들'(행9:2)라고 표현합니다. '그 도'(the way), '그 길'을 따르는 사람들이 되어야 진정한 제자가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을 순종해야한다는 의미가 있지만, 주께서 걸어가신 그 길의 본질을 따른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요한은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라고 강조했습니다. 저는 진정 예수님 안에 거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행하신 것을 아주 세밀하고 깊게 알고 싶어 여러 차례 이스라엘 땅을 밟았습니다. 갈릴리나 여리고, 예루살렘에서 두드러진 그 행적만이 아니라 베들레헴, 나사렛, 감람산, 사마리아 같은 외진 땅을 밟으시고 아버지의 마음과 권능을 나타내신 그 이유들을 깊고 넓게 느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7-9)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고상한 지식'을 얻기 위하여 자기가 누리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저 또한 바울처럼 예수님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너무나 알고 싶었습니다. 진정한 예수님의 신부들은 모두 동일한 갈망과 사모함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성령님께 그 길의 의미들을 가르쳐 달라고 참 많이 구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깨달은 것은 예수님의 말씀만이 아니라 그 걸어가신 모든 여정, 행하신 모든 것들, 그 동선(動線)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요 1:14) 분이십니다. 여기서 ‘거하시매’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스케노센’(ejskhvnwsen), 즉 ‘장막을 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살아서 움직이는 하나님의 성막, 언약궤로서 이 땅에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그 진리가 예수님의 모든 삶 가운데 현시(現示)되어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연관 지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복음입니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부활하신 주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만난 제자들에게 성경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영적인 눈이 열렸고 그 가슴은 뜨거워 졌습니다. 이스라엘 땅을 밟으며 성령님께 그것을 경험하게 해달라고 구했습니다. 그 길들을 예수님과 동행하기를 소망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 모세(모세5경)와 선지자 등 모든 성경에 기록된 당신에 관한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특별히 구약은 그 중심적 흐름의 거의 대부분이 메시아이신 예수님에 대한 예언들입니다. 성경은 창세기의 시작부터 메시아를 집중적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복음은 선지자들을 통해 전해진 말씀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어간 모든 역사 안에도 계시되었습니다.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않은, 주목하지 않은 것에도 그 계시가 들어 있습니다.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이 성령님을 통하여 오묘하게 그 모든 것을 조성하시고 계시로 담아내셨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놀랍고 위대합니다. 이 진리의 여정은 바로 성경 모든 말씀 속에 계시된 '예수님에 관한 것'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주님께서 태어나시고 죽으실 때까지의 모든 하늘 여정을 세밀히 살피고 거기에 스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발견하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여 얻고자 하는, '댓가를 지불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우리 주님을, 그 마음과 길과 뜻을, 그 형상을 알고자 하는 깊은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의 성령님께 가르침을 구하는 기도의 자세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은 성령께서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 16:14)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말씀입니다. 성령님의 조명과 인도하심이 없으면 그저 외적인 성지순례에 그치고 피상적인 정보만 체득하게 될 것입니다. 진정으로 주께서 걸어가신 그 길에 스민 영광의 풍경을 발견하려면 진리의 성령님께 의탁해야만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진정 성령님의 조명이 없이는 그저 외적인 지식의 변죽만 울릴 뿐입니다. 그럼 진리의 성령님의 손을 잡고, 설레이는 마음을 담아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부터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깊은 영적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마 2:1)
예수님은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나셨습니다. 이것을 모르는 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왜 베들레헴에서 나셨는지를 깊이 아는 이들은 찾기가 힘듭니다. 당시 마리아와 요셉은 갈릴리 변방의 ‘나사렛’에 살았는데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예루살렘 부근의 ‘베들레헴’에 와서 극적으로 예수님을 낳게 됩니다. 그 모든 정황들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메시아가 그 땅에서 반드시 탄생하시도록 개입하시고 그 일을 만드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은 우리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지식이지만 의문이 생깁니다. 이스라엘에서 메시아가 와서 회복할 곳은 '예루살렘'입니다. 이미 모세를 통해서 그 땅을 계시하셨습니다.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신 12:5)
모든 제사와 번제와 예물을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그 계실 곳’은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가나안의 가장 막강한 여부스족이 지배하던 이 땅을 얻고자 목숨을 걸었고 거기에 성전을 세운 것입니다. 수많은 선지자들과 성경의 증거는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날'(메시아의 날)에 예루살렘이 회복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것이 아닌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일까요? 이것은 매우 독특한 관점입니다. 여기에 진지한 흥미를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이 땅의 구원자로 보내실 때 오랫동안 성경의 중심적인 구원의 상징인 예루살렘 성전과 연관되지 않은 변방의 작은 땅 '베들레헴'에 나게 하신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모스는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 3:7)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시는 것은 보통 사건이 아닙니다. 우주의 가장 큰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구속은 ‘만물의 회복’과 연결이 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메시아의 명칭은 ‘기묘자’요 ‘모사’입니다. ‘기묘자’라는 히브리어 ‘펠레’는 '경이, 비범, 영묘'라는 것입니다. 비록 한 아기일지라도 그분 안에는 하나님의 경이로운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종들, 예언자들을 통해 계시하시지 않고 아무 예고 없이 아무데나 아들을 보내셨을 리가 없습니다. ‘베들레헴’은 아버지의 이 세상을 구원 하시고자 하는 뜻과 마음에 아주 중요한 땅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아버지의 깊은 사랑과 긍휼과 일하시는 길을 볼 것입니다. 베들레헴 탄생은 바로 ‘주의 길’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그곳에 태어나셨을 때, 멀리서 별을 보고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을 찾아서 왔습니다. 그것을 알게 된 헤롯왕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모아서 메시아가 어디서 나는지를 물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 5:2)
이사야와 동시대에 활동한 미가 선지자는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목자, 왕이 나올 것이라 예언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이 예언을 헤롯에게 고하였습니다(마 2:6,7). 그들은 성경을 집요하게 읽고 연구하는 자들이었기에 미가서의 예언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메시아가 왔음을 믿지 않습니다. 적어도 동방의 박사들이 그런 징조를 가지고 왔다면 관심을 가지고 살펴야 하는데 그들은 헤롯에게 정보를 주는 정도에서 멈춥니다. 자신들의 신변과 기독권의 문제가 사로잡혀 영적인 믿음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메시아를 갈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찾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송하나 그 마음의 깊은 중심이 진리의 언약을 붙들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방의 박사들이 메시아에 대한 열정이 더 깊습니다. 들판에서 양을 치던 이들이 먼저 주님의 오심을 알게 되는 축복을 누립니다.
참으로 이것은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것입니다. 미가의 예언은 ‘베들레헴’에 대한 가장 중요한 단서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미가를 통해서 유다 족속 중에서 가장 작은 그 땅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목자, 이스라엘의 왕이 나올 것을 예언하셨을까요? ‘베들레헴과 에브라다’가 무슨 영적인 의미가 있기에 그런 것일까요? 저는 그것이 무척 궁금했습니다. 물론 누가복음에서 천사들이 증거 하듯이 그 땅은 무엇보다 ‘다윗의 동네’(눅 2:11)입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의 의미를 충족시키는 답입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영원한 등불’의 언약을 주시고 그 자손(씨)에게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대하 21:7). 미가와 동시대 선지자인 이사야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사 11:1)라고 예언했습니다.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뿌리에서 여호와의 영을 받은 메시아가 나올 것임을 공포한 것입니다.
그것은 곧 ‘다윗의 자손’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온전히 회복되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렘 33:26).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크고 비밀한 일’(렘 33:3)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기 때문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유다지파의 작은 변방이지만 메시아의 계보가 이어지는 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종들에게 알리신 메시아의 비밀은 그가 이스라엘의 양떼들을 진정으로 다스리고 치유하고 회복하는 다윗과 같은 '목자'요 ‘왕’이라는 것입니다. 이 목자로서 오시는 메시아에 대한 가장 극적인 예언은 에스겔을 통해서 선포되었습니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내 양 떼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 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 떼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겔 34:4)
이 예언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의 목자들, 영적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미 에스겔 33장에서 강력하게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중심의 성전과 제사장들이 자기들의 배만 채우는 삯꾼 목자라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그들의 맡겨진 백성들을 먹이고, 치유하고, 회복시키지 않음으로 그 양떼들이 흩어지고 흩어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들짐승’인, 이방의 세력들(앗수르, 애굽, 바벨론)이 침략해서 그들을 흩어 버리고 삼켜 버렸습니다. 그 잃어버린 양떼를 아버지께서는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 낼지라”(겔 34:11,12)고 맹세하십니다.
“내 양을 찾고 찾아서”라는 아버지의 마음, 그 긍휼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 것이 베들레헴의 풍경입니다. 베들레헴은 바로 하나님의 양떼들을 기르던 곳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양과 목자의 풍경은 베들레헴으로 나타납니다. 시편 23편의 무대가 바로 그곳이고 성전에서 드려지던 흠 없는 어린 양이 길러지던 곳이 그 곳입니다. 이상적인 하나님의 목자상은 바로 베들레헴의 양치기였던 다윗입니다. 베들레헴은 잃어버린 양들을 찾는 아버지의 마음과 긍휼의 풍경이 있는 대표적인 땅입니다.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기는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없애고 정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겔 34:15,16)
이 예언은 '들짐승‘, ’앗수르‘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서 잃어버려지고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회복시킨다는 언약입니다. 그 하나님의 열심과 긍휼은 예레미야에게도 부어졌습니다.
“3 내가 내 양 떼의 남은 것을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4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잃어버리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6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3-6)
이 예언적인 그림은 우리를 베들레헴의 들판으로 인도합니다. 바로 앞부분에서 예루살렘 중심의 이스라엘 목자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그 양떼들을 우리에 돌아오게 하실 것인데 그것을 이루시는 분은 ‘다윗의 가지’에서 나오는 진정한 목자입니다. 베들레헴은 이런 영적인 고리를 가지는 땅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들을 종합하여 요한복음 10장에서 ‘선한 목자’로서 당신을 나타내셨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에스겔과 예레미야의 예언에 대한 성취입니다. 메시아가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나올 것이라고 한 미가의 예언도 이것과 깊이 연결이 됩니다.
"그러므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의 형제 가운데에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미 5:3,4)
주목할 것은 이것이 유대 땅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이스라엘의 목자가 나올 것이란 예언 바로 다음의 말씀이란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진정한 목자가 출현하는 것은 곧 ‘남은 자’가 돌아오는 것과 깊이 연관이 됩니다. 의로운 가지, 다윗과 같은 진정한 목자는 남은 자들을 회복시켜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목축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와 다윗부터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기 까지, 그리고 바벨론에서 예수님까지를 14대씩 나누어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바벨론의 포로로 사로 잡혀있는 이스라엘을 회복하기 위하여, 그 잃어버린 양들을 찾기 위하여 오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오는 그 회복과 베들레헴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마 2:17,18)
동방박사들로부터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탄생했다는 말을 들은 헤롯은 두려움 속에서 그 지경의 두 살 아래 아이들을 학살합니다. 마태는 그것이 예레미야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기록했습니다. 마태가 인용한 예레미야 31장의 예언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 갈 때에 들려온 ‘라헬의 통곡’입니다. 지금도 베들레헴의 초입에는 ‘라헬의 무덤’이라는 유서 깊은 회당이 있습니다. 이 회당은 지금의 위치가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가장 영적인 의미가 깊은 곳입니다. 바로 야곱이 가장 사랑한 라헬이 묻힌 곳이기 때문입니다. 에서와 극적인 상봉을 하고 벧엘을 지나 족장길을 가던 야곱은 ‘에브랏’ 근처에서 큰 위기를 겪습니다. 그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아이를 낳다가 죽게 된 것입니다.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창 35:18-20)
라헬이 베냐민을 낳고 죽은 곳이 바로 ‘에브랏’ 곧 현재의 ‘베들레헴’입니다. 후에 이스라엘의 왕족과 제사장들, 백성들이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끌려 갈 때에 바로 이 라헬의 무덤 부근을 지나서 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예레미야는 라헬이 그 무덤에서 통곡하는 소리를 영적으로 들었다는 것입니다. 라헬은 ‘이스라엘의 국모(國母)입니다. 그녀는 요셉을 낳고 베냐민을 낳다가 죽었는데 이제 더 이상 이스라엘의 자녀를 보지 못함에 대한 깊은 통곡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라헬의 무덤은 뿌리가 끊어지는 것에 대한 절망의 상징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것은 그 백성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라헬의 영혼이 여전히 그 무덤에서 포로로 잡혀가는 후손들을 위하여 통곡하며 울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라헬의 애통이 있는 무덤이 바로 ‘베들레헴 에브라다’에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이 라헬의 통곡과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은 깊은 연결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하늘의 눈물입니다. 예수님은 그 애통의 의미를 회복하기 위하여 그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에브랏에서 아들을 낳고 죽음 직전에 더 이상 그 아들을 볼 수 없음에 슬퍼한 라헬은 그 이름을 ‘베노니’(슬픔의 아들)이라 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을 당하시는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이름을 ‘베냐민’(오른 손의 아들)이라 바꾸어 줍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중요한 예표로서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 보좌에 앉으시는 영광의 왕을 상징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예수님의 말씀은 ‘베노니’의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가 놓치는 부분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스스로 죽으시는 이유가 바로 ‘잃어버린 양떼’, 잃어버린 이스라엘을 회복하기 위하여서라는 것입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 10:16)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요 11:51,52)
예수님의 십자가 순종은 우리 개인의 죄를 구속하기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을 따라서 흩어지고 잃어버려진 이스라엘을 하나 되게 하시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복음의 이 중요한 본질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는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재합니다. 이 부분을 좀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마태가 인용한 그 라헬의 통곡은 그저 아픔과 눈물로만 그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은 슬픔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회복을 나타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울음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의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지경으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16,17)
하나님께서는 통곡하는 라헬에게 눈물을 멈추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양떼들이 그 대적(들짐승)의 땅에서 반드시 돌아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양떼들을 “찾고 찾아서” 돌아오게 할 것이라 맹세 하셨기 때문에(렘 23:3, 겔 34:15) 그 약속을 믿고 더 이상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목자인 메시아가 오셔서 아버지의 그 언약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위로와 회복의 본질을 ‘새 언약’으로 언약하셨습니다(렘 31:31). 우리는 ‘십자가와 보혈’을 ‘새 언약’으로 믿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언약이었습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렘 31:31).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새 언약’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집’에 맺어진 것입니다. 에스겔에서는 이 새로운 언약이 메시아가 오셔서 ‘에브라임(이스라엘)과 유다’를 한 막대기로 묶는 것으로 성취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예언한 이스라엘의 회복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말씀 하시는 ‘우리 밖에 있는 무리‘는 바로 흩어져버린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을 다시 회복하기 위하여 주님은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의 간구 가운데서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21)라고 ’하나 됨‘을 간구하셨습니다.
그것은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기 위하여 죽으실 것“(요 11:52)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당신의 보혈을 통해서 진정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이루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구속의 이 관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단순히 그 땅이나 유대인들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이며 신부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좀 더 큰,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시야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앞으로 이 부분은 더욱 더 깊이 다루고자 합니다. 이 ’새 언약‘을 말씀하신 것은 ’라헬의 통곡‘에 대한 응답이고 그 피눈물의 땅이 바로 ‘베들레헴’입니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며 베들레헴은 진정한 이스라엘의 회복의 본질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반드시 베들레헴에 탄생하셔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이루게 하시려고 모든 정치적, 환경적 상황을 조성하셔서 반드시 마리아가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을 낳게 하셨습니다. 앞으로 세밀히 다루겠지만 그 당시 로마의 정치적인 변화들, 사건들, 하늘의 징조들조차 예수님 탄생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들입니다.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려는, 남은 자들, 잃어버린 양떼들을 돌아오게 하시려는 아버지의 마음은 반드시 그 아들이 베들레헴 땅에서 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이 가지는 또 다른 중요한 의미는 바로 ‘보아스와 룻’입니다. 이들의 사랑 이야기는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통해서 이루실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계시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오순절’에 룻기를 읽습니다. 그것은 룻기의 시작이 나오미와 룻이 모압 땅에서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 온 때가 ‘보리추수 시작할 때’(룻 1:22)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순절에 처음 밀을 추수하여 만든 ‘떡 두덩이’를 제단에 바치도록 명하셨습니다(레 23:17).
이 두 개의 떡은 ‘이스라엘과 이방‘을 상징합니다. 이 베들레헴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열방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떡 집‘(베들레헴)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땅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보를 보면 그 땅이 가진 여러 영적, 역사적 의미들과 그 지명(地名)의 의미들과도 깊은 연관을 가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땅은 그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공생애 사역의 중심지였던 ‘가버나훔’은 ‘위로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위로’라는 의미를 가진 ‘나훔’선지자를 통한 이스라엘의 회복과 깊이 연결이 됩니다. 나훔은 이스라엘을 무너뜨린 앗수르의 심판과 멸망을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왜 갈릴리의 그 작은 마을을 ‘가버나훔’이라 한 것일까요?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처참히 유린하고 포로로 사로잡아 간 곳이 갈릴리 땅이기 때문입니다(왕하 15:29).
아버지께서는 이런 지역의 역사, 그 이름 하나에도 깊은 의미를 두십니다. 예수님의 사역들이 그렇게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 건너편은 이방 지역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신 것은 이방 지역으로 가신다는 의미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유대와 이방을 동시에 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갈릴리의 사역에는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역사가 축소판으로 집약되어 있습니다. 건너편에 있는 ‘데가볼리’에 가셔서 사역을 하셨는데 그것은 ‘10개(deca)의 도시(polis)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은 이방에 흩어진 ’이스라엘의 10지파‘에 대한 힌트를 줍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나타나는 ’열 처녀‘, ’열 명의 맹인‘, ’10명의 나병환자‘같은 것들은 앗수르에 멸망하여 흩어져버린 북 이스라엘의 ’10지파‘와 긴밀히 연결이 됩니다.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런 숫자나 지명들이 주님의 길을 영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실로 놀라우신 성령님의 역사로 베들레헴에서 일어난 룻과 보아스의 이야기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실 구원의 비밀을 예언적으로 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은 룻과 보아스의 이야기에 담으신 그 언약에 기도 합니다. 이방 여인 룻과 유대인 보아스의 결합 자체가 이 ‘떡 집’에 바쳐진 ‘두덩이의 떡’을 나타냅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임하셔서 세운 그리스도와 혼인하는 그 몸, 신부는 바로 이스라엘과 이방이 하나 되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그 언약을 담고 있는 아주 중요한 땅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진정한 신부를 찾아 구속(정혼)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의 아름다운 예표가 베들레헴 땅에서 룻과 보아스에게 그려졌습니다. 이제 그 영적인 퍼즐들을 찾아 가기로 합니다. 룻기의 마지막 부분은 아주 독특한 계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룻 4:18-20)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보는 단순한 가문의 족보를 넘어서는 신학적인 의미입니다. 마태복음이 그 시작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1:1)고 시작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마태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을 넘어서 ‘아브라함’에게 연결시킨 것은 유대인들에게 매우 중요하고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지루하기만 한 족보만 읽고도 유대인들 중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이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사무엘하 2장 7절에 따르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메시아는 ‘유다지파’에만 국한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생명처럼 순종하는 다윗의 왕위가 영원할 것이라고 약속하심으로(삼하 7:16) 그를 통해서 메시아가 올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다지파의 뿌리로 오시지만 그들만 구원하시는 왕이 아니십니다. 온 세상을 구원하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아브라함의 씨’인 메시아의 사역은 모든 열방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 22:18)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천하 만민’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그 계보로서 증거 하는 것입니다. 마태가 그리스도의 계보를 14대씩 세 번에 나누어 ‘42’대로서 나타낸 것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메시아닉 유대인들 가운데 이것에 대한 통찰력을 가진 이들이 있는데, 민수기 33장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서 요단강가의 모압까지 가는 여정에는 42번의 멈춤과 쉼이 있다고 합니다. 저도 그것을 세어 보았는데 정확히 42번 이었습니다. 이 여정은 모세가 인도하였고 그 다음인 모압에서 가나안은 ‘여호수아’가 인도합니다. ‘여호수아’의 헬라식 이름은 ‘예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심’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여정은 그 하나님의 구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합니다. 그래서 마태가 기록한 계보의 마지막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역사는 이스라엘의 여정을 압축하여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베들레헴에 나심으로 가나안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왕에 나눈 김에 ‘42’라는 숫자에 대하여 조금 더 언급하면 히브리어에서 ‘별’이라고 하는 ‘코카브’라는 단어는 그 숫자 값이 ‘42’입니다. 참으로 절묘하게도 모압의 제사장 발람은 모압 왕 발락의 요구에 의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되는데 오히려 ‘야곱의 별’에 대하여 예언을 하게 됩니다.
“내가 그를 보아도 이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고 또 셋의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민 24:17)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이 ‘후일’에 당할 일을 예언한다고 했습니다(민 24:14). 이것은 마지막 때를 의미하며 ‘메시아의 시대’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별’은 동방박사들이 보고 온 그 베들레헴의 별과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절묘한 것은 모압의 사람들이 어떤 의미로든 이스라엘의 장래와 메시아에 연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룻이 바로 모압 출신의 이방 여인(룻 1:4)으로 유대인 시어머니 나오미와 베들레헴에 와서 다윗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계보를 잇는 일에 모압 출신의 룻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셨습니다.
‘모압’은 소돔이 죄악으로 심판을 당할 때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롯과 그 딸들 간에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자식입니다(창 19:31-).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모압 왕 발락과 발람의 계략으로 모압 여인들과 음행을 하였습니다(민 25:1). 그 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염병을 보내셔서 무려 2만 4천 명이 죽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 일로 ‘모압 사람’은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는 저주를 받게 됩니다(신 23:3). 모압은 영적인 ‘땅 끝’, 가장 저주 받은 이방 민족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모압 출신의 여인이, 그것도 남편을 잃은 과부가 이스라엘의 언약 가운데 들어와서 온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의 계보를 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들레헴을 배경으로 하는 룻기의 이야기이며 아버지의 놀라우신 사랑, 대 반전의 구원 드라마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방 여인이던 룻은 베들레헴 출신의 유대인 시어미 나오미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언약에 들어갑니다. 유다지파의 계보와 계대(係代, 가문의 대를 이음)를 잇게 됩니다. 이방 여인이 끊어질 유다 지파의 한 가문을 살리는데 놀랍게도 그 계보에서 다윗이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룻기의 마지막에 기록된 그 족보를 베레스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창세기 38장에서 유다는 가나안 땅에서 방탕하고 이방 문화와 여인을 가까이 합니다. 그의 아들들도 그렇게 악을 행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당합니다. 결국 그들은 죽음을 당하고 이제 유다의 계보는 끊어질 위기에 처합니다. 만일 유다의 계보가 사라지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유다 지파의 자손을 통한 구속의 역사도 끊어지게 됩니다. 그 때, 그 위기를 구한 사람이 바로 이방인 며느리 ‘다말’입니다. 다말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창녀(히, 크데샤, 이방 성소의 창녀)의 복장을 하고 시아버지인 유다와 관계하여 아들을 가지게 됩니다. 그녀는 가문의 대가 끊어지지 않게 하려고 그런 극단 적인 행위를 한 것입니다. 오히려 야곱의 자손인 유다와 그 아들들보다도 더 하나님의 법과 언약을 잇는 일에 이방의 여인이 극한 열정을 나타냅니다.
후에 다말이 임신한 것을 안 유다는 대노(大怒)하였으나 그녀가 제시하는 담보물, 유다가 준 도장, 끈, 지팡이(이 모든 것이 메시아의 사역과 연관이 있습니다)를 보고 “다말은 나보다 옳도다”(창 38:26)라고 고백합니다. 많은 학자들은 유다의 이 말이 고대 법정의 언어라고 합니다. 법정에서 어떤 행위에 대한 정의, 공의로움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옳다’는 것은 히브리어 ‘체다카’, 즉 ‘의로움’입니다. 유다는 창녀의 복장을 하고서라도 가문의 계보를 이은 다말의 행위를 ‘의로움’으로 표현했습니다. 진정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 언약을 이루는 자를 의롭다 하십니다. 진정한 의로움은 오직 하나님의 언약을 붙드는 것입니다.
이 창세기 38장의 메시지는 ‘후일’에 유다(유대인)가 하나님의 언약, 율법을 어기고 타락할 것을 의미합니다. 그 때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 가운데서 그 끊어질 계대를 이방의 여인이 이어줄 것에 대한 예언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정 놀랍고 절묘하기만 합니다. 이사야는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 46: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시초’(베리쉬트, 창세기)부터 ‘종말’(메시아의 때)를 예고하셨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창세기에는 하나님의 구속의 프로그램들이 거의 계시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오묘함은 그런 것입니다.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의 레벨은 진리의 성령님의 기름부음을 통해서 열립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지 자신의 처지나 상황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 약속을 순종하려는 믿음에 의로움이 나타납니다. 어느 시대나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다말이 극단적인 희생을 통해서 낳은 쌍둥이 중에 하나가 ‘베레스’입니다.
그런데 이 유다와 베레스의 계보는 아주 독특한 것이 있습니다. 그 자손 중에 ‘나손’이 낳은 ‘살몬’이 있는데 그는 여호수아가 여리고 정탐을 보낸 두 명의 스파이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대의 전승에는 살몬이 여리고의 기생(이방 성소의 창녀로 알려짐) 라합과 결혼하였다고 합니다. 라합은 이방 여인으로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고 그 언약 가운데 들어 왔습니다. 특별히 그녀가 가족의 구원을 위해서 창문에 내걸은 ‘붉은 줄’은 이스라엘의 소망의 문(호 3:15)이 됩니다.
이 ‘붉은 줄‘을 히브리어로 ’티크바‘라고 하는데 그것은 ’소망‘(희망)이라는 뜻입니다. 현재 이스라엘 국가는 ‘티크바’인데 이것은 ‘이스라엘의 소망’을 의미합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고난당한 때의 구원자시여”(렘 14:8)라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주시기를 구합니다. 이것이 ‘티크바’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처음 나타난 것은 라합의 ‘붉은 줄’입니다. 이 세마포천을 붉게 물들인 상징은 ‘어린 양의 피’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방의 여인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계시하는 이 놀라운 역사가 유다의 가문에서는 계속 나타납니다. 라합이 살몬을 통해서 낳은 자손이 베들레헴의 유력자가 되는 ‘보아스’(룻4:21)입니다. 그 보아스는 다시 ‘모압’출신의 이방여인 룻과 만나 결혼을 합니다. 그리하여 거기서 이스라엘의 구속을 예표 하는 왕 ‘다윗’이 나옵니다.
|
출처: 우림과둠밈 원문보기 글쓴이: 우림과둠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