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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창세기-사무엘상 난해구절
1. 창세기 1-11장의 난해 구절
“그 말씀” 1996년 7월호 원고. 김 경 래
온 지표면을 적신 큰 물덩어리 (창세기 2:6)
창세기 2:7에 “땅에서 에드 (ד)가 올라와 온 지표면을 적셨다”는 기록이 있다. 히브리어 에드 (ד)는 히브리어 구약 성경에 두 차례 나온다 (여기서와 욥기 36:27).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이를 ‘안개’라고 번역한 반면에 표준 새번역에서는 ‘물’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욥기 36:27의 경우, 개역은 역시 ‘안개’라 번역하고 표준 새번역은 이 낱말이 속한 문구 (ודל רטמ וקזי)를 ‘그것으로 빗방울을 만드시며’라고 번역하고 있다.
주전 3세기 경에 번역된 칠십인역은 창세기 2:7의 에드 (ד)를 보통 ‘샘’을 뜻하는 ‘페게’(πηγη)로 번역하고, 아람어 탈굼은 이를 ‘구름’을 뜻하는 ‘아네나’ (אננע)로 번역하고 있다. 이 낱말의 해석에 있어서 일치를 보이지 않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혹자는 이를 ‘수증기’ 내지는 ‘안개’로 보는가 하면, 혹자는 ‘샘’ 또는 ‘우물’로, 그리고 어떤 이들은 고대 근동 유사 언어들과의 비교를 통하여 ‘지하의 물줄기’로 설명하기도 한다.
창세기 2:7에서 묘사하고 있는 바를 해석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창세기 1장과 2장의 관계를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창세기 1장은 인간의 주소지인 지구를 중심으로 창조를 묘사하고 있는 반면, 창세기 2장은 그 초점을 인간 창조에 두고 있다. 이는 마치 전체 풍경을 촬영한 후, 다시 줌(zoom)을 이용하여 촬영자가 원하는 특정한 풍경을 보다 상세히 촬영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히브리 문학에서는 이러한 식의 대구적(對句的) 묘사가 비교적 자주 나타나는 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창세기 2:4 하반절에서 일반적으로 등장하는 ‘하늘과 땅’ (ץראו םימשׁ) 대신 순서를 바꾸어 ‘땅과 하늘’ (םימשׁו ץרא)이라고 말한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아울러 창세기 2:5-6은 창세기 1:2에서 말하는 바를 다른 문구를 통하여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창세기 2:5의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였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다”는 구절은 창세기 1:2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였다’ (‘토후 바보후’, וּה וּה)라는 표현을 달리 또는 부분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2에서 ‘테홈’ (םוֹה)과 ‘물’ (‘마임’, ם) 두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려진 ‘커다란 물의 집합체’는 2:6에서 우리의 관심사인 ‘에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온 지표면 (‘콜 프네 하아다마’, המדאה־ינפ־לכ)을 적셨다”라는 표현을 통해 볼 때, ‘에드’의 범위는 결코 식물의 생장에 필요한 만큼 땅의 일부분만 적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게다가 2:5에서 이미 비를 내리는 것과 식물의 생장을 연관시켜 언급하였으므로 2:6의 ‘에드’는 식물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치 않은 점은, 2:6의 에드 (ד)가 둘째날 하나님이 물을 가르기 전의 상태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물을 가르고 난 이후에 ‘궁창 아래의 물’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하는 문제이다.
에덴에서 발원한 강은 다만 그 안의 동산만을 적실 뿐이었다 (창세기 2:10). 그러나 2:6에서 언급하고 있는 에드 (ד)는 ‘온 지표면’을 적시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에드 (ד)라고 불리운 ‘물체’는 반드시 커다란 규모의 것이어야만 한다. ‘안개’나 ‘수증기’, 또는 단순한 ‘샘’ 같은 것들로는 이러한 역할을 해낼 수 없다. 창세기 1:2의 ‘테홈’과 관련된 ‘커다란 물 덩어리’ 말고는 이런 조건들을 모두 만족시켜 주는 물체를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생명체’로서의 인간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된지라”. 우리말 개역 성경에 등장하는 이 창세기 2:7에 대한 번역문은 일반 독자들이나 심지어는 설교자들에게 가끔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필자가 말하는 이 오해란 앞서 창세기 1장에서 다른 동물들을 단순히 ‘생물’이라고 부른데 반하여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생령’이라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고 보는 것을 가리킨다. 사실 우리말에 있어서도 ‘생령’(生靈)이라는 표현은 좀 어색할 뿐 아니라,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치가 않다.
‘생령’(生靈)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문구는 ‘네페쉬 하야’ (היח שׁפנ)인데, 이는 이미 창1:20, 21, 24, 30에서도 나오는 표현으로서 개역 성경은 그곳들에서 ‘생물’이나 (1:20, 21, 24) 또는 단순히 ‘생명’으로 (1:30) 번역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경우 분명히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네페쉬 하야’란 표현은 또 창세기 2:19; 9:10, 12, 15, 16에도 등장하는데, 이들 모두 인간 외의 동물계를 가리킬 때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 다른 동물과 동일한 ‘네페쉬 하야’인 우리 인간을 달리 표현하고자 만들어낸 ‘생령’이라는 표현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보다는 오히려 독자에게 그릇된 생각을 조장할 수 있는 것으로서,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번역문이라고 하겠다. 이 경우 오히려 표준 새번역의 ‘생명체’라는 번역이 훨씬 더 적합한 번역문이다. 왜냐하면 ‘생명체’라는 표현은 인간과 여타 다른 동물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페쉬 하야’ (היח שׁפנ)라고 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실제로 ‘살아있는 존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창세기 2:7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그 안의 ‘생령’이라는 번역문을 버리고, ‘살아있는 존재’ 내지는 ‘생명체’라는 번역문을 가지고 읽을 때 올바르게 접근할 수 있다. 인간은 다른 존재와는 달리, ‘하나님의 생명의 숨’이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생명체’가 되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생명체’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호흡’이 필요한 특별한 존재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조물주 하나님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의존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간은 죽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 (창세기 6:1-4)
창세기 6:1-4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학자들간에 쉽게 일치점을 찾지 못하고 신학계에 구구한 해석사를 남긴 성경 난제중의 난제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제까지 전해 내려오는 여러 해석중 어느 하나가 분명히 맞는 해석이라면, 이 구절은 하나의 난제라기 보다는, 오히려 많은 성경학자들의 그릇된 신학적 사고방식을 반증해주는 사실이 아닐까? 필자는 여러가지 견해를 이 지면에 소개하며 그것들을 하나하나 옹호 내지는 반박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는다. 우리 주변에는 그러한 류의 서적이 이미 충분히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히려 본문에 대한 철저한 고찰을 통하여 필자가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입장을 나름대로 정리하며 설명하고자 한다. 아마도 다른 훌륭한 학자들의 해석을 재현하는 내용도 없지않아 있겠으나, 국내의 독자들에게 어느정도 도움이 되리라는 확신으로 이 문제를 논하고자 한다.
우선 1절의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라는 문장에서 우리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대하게 된다. 이 낱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 ‘하아담’ (םדאה)은 정관사 ‘하’ (ה)와 명사형 ‘아담’ (םדא)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문장 끝에서 ‘하아담’ (םדאה)을 복수형 대명사 어미로 받는 것으로 보아 (‘그들에게서’; 히브리어로 ‘라헴’, םהל), 이것은 최초의 사람인 ‘아담’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요, 아담으로 시작되는 모든 ‘인류’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딸들”과 역시 같은 이들을 가리키는 2, 4절의 “사람의 딸들” (‘브노트 하아담’, םדאה תונב)은 인류, 곧 인간 사회에서 태어나는 ‘딸들’을 가리킴이 너무나 분명하다.
2절과 4절에는 이들 “사람의 딸들”의 상대방이 되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이것이 만일 인간 사회 안에서 늘 있는 선남선녀의 혼인에 관한 언급이라면, 이에 대하여 조물주께서 무언가 언짢은 반응을 보이시고 (3절) 또 이러한 혼인 관계로 유별난 사람들이 태어난다는 것은 (4절) 아무래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설사 경건한 가문의 아들과 불경건한 집안의 여자, 또는 귀족층 남자와 서민층 여자의 결합이라 하더라도 이 두 가지의 결과적 사실을 만족하게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 (‘브네 하엘로힘’, םיהלאה ינב)이란 히브리어 표현은 여기 말고 유일하게 욥기에 또 다시 등장한다 (욥기 1:6; 2:1; 38:7). 욥기에서 우리가 문맥을 통하여 분명히 아는대로, 이 표현은 우리 인간이 아닌 ‘하늘의 영적인 존재’, 소위 ‘천사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미 언급한 바대로 창세기 6:1-4의 본문에서 이들 “하나님의 아들들”은 인간 세상의 남자를 가리키기에는 곤란한 점이 많으므로 자연히 누군가 ‘인간 사회’ 밖의 존재이어야만 하겠고, 아울러 욥기의 도움을 얻어 얼마든지 ‘천사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언어 표현 자체와 전체적 문맥을 통하여 이런 식의 유추는 가능하지만, 다만 이러한 이해에 대한 신학적 걸림돌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이 해석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 학계의 현실이라고 하겠다. 특별히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 (마태22:30; 마가12:25) 때문에 학자들은 선뜻 상기한 해석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누가 20:34-36에서는 동일한 내용의 말씀이 좀더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지만 저 세상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는다. 그들은 천사와 같아서 이제는 죽지도 않는다. 그들은 부활의 아들들이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예수께서 부활 후의 사람들을 가리켜 “천사와 같다”고 하신 것은 그들과 천사들이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기’ 때문이 아니라, 누가복음에서 밝히 보는대로, ‘더 이상 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영광의 부활에 참여한 자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들’ (υιοι θεου)이라고 부른 것 역시, ‘하나님의 아들들’인 천사와 같게 변한 그들의 새로운 신분 때문이 아닐까.
다시 창세기 6장으로 돌아와, 칠십인역의 알렉산드리아 사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표현에 대하여 “하나님의 천사들”이라는 번역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 유대인들의 이러한 해석은 칠십인역 말고도 에녹서, 요세푸스 등을 통하여 찾아볼 수 있다. 아울러 신약 성경의 몇몇 구절도 창세기 6:1-4의 해석에 대하여 빛을 던져준다.
먼저 벧후 2:4-5에서는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신’ 일과 (4절)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홍수로 인간 세상을 멸하신 일’을 (5절) 나란히 언급하고 있다. 벧전 3:19-20의 기록 역시 이와 같은 문맥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 구절 (벧전3:19-20)을 ‘그리스도께서 고난 즉 죽음을 부활로 이기신 후, 전에 타락하여서 옥에 갇혀 있는 천사들에게 자신의 승리를 선언하신 것’이라고 본다. 옥에 갇힌 이들 천사들은 벧후2: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말고, 유다서 6절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에도 언급되어 있다. 특별히 벧전3:19-20과 벧후2:4-5에서 이들 천사들의 투옥과 홍수 심판 기사가 나란히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다름 아닌 이들 ‘타락한 천사’라고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필자의 글 “그리스도인의 고난: 베드로전서 3:13-22” 참조; 설교자를 위한 성경 연구, 1996년 5월호 12-22쪽에 실림).
특별히 유다서 6절에서 천사 타락을 언급한 후 바로 이어 나오는 7절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을 통하여, 우리는 천사 타락이 성적인 범죄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 신약 성경의 몇몇 기록은 창세기 6:1-4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름 아닌 “(타락한) 천사들”이라는 해석을 반증하기 보다는 오히려 변증해주고 있음을 보게 된다.
창세기 6:3의 “120년”은 아마도 하나님이 새로 정하신 인간의 수명을 가리킬 것이다. 그 동안 인류는 대략 900세 정도로 “오래도록” (히브리어의 ‘레올람’ םלעל은 ‘영원히’라는 뜻도 되지만, ‘오래도록’이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수명을 누려 왔었다 (창세기 5장의 족보 참조). 그러나 앞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수명을 120년 안으로 단축시키실 것이라는 뜻이 아닐까?
창세기 6:4의 ‘네필림’ (םילפנה)에 대한 언급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로 해석할 때 더욱 쉽게 이해된다. 우리는 더 이상 이들 ‘타락한 천사들’이나 그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 태어난 ‘네필림’의 존재에 대하여 궁금해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후자는 노아 홍수 때 이미 모두 멸망하였겠고, 전자는 신약 성경의 기록대로 (그리고 이사야 24:21-22 참조) 심판 때까지 옥에 갇혀 지켜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하여 필자와 견해를 같이하는 김 상복 목사님의 저서를 소개하고자 한다. 도서출판 횃불에서 간행한 (1993년 초판) 그의 저술 「잃어버린 왕좌」는 창세기 1-11장에 대한 강해집으로서, 창6:1-7에 대하여는 제16장에서 “타락한 천사들”이라는 제목으로 비교적 자세히 다루고 있다.
노아 세 아들의 연령별 순서
일반적으로 노아 세 아들은 셈, 함, 야벳의 순으로 일컬어진다 (창세기5:32; 6:10; 7:13; 9:18; 10:1; 대상1:4). 대부분의 성경 독자들은 이러한 배열로 인하여 그들의 나이 역시 같은 순서대로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과연 노아에게 셈, 함, 야벳의 순서로 아들들이 태어난 것인가? 우리는 성경 본문을 통하여 이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현대어 번역본들에 나타나는 성경 오역이 바로 그것이다.
개역 성경은 창세기 5:32을 “노아가 오백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 조그만 글자로 인쇄된 “된 후에”는 원문에 없으므로 문맥을 고려하여 번역문에 삽입한 것이다. 표준 새번역 역시 이를 같은 뜻의 “노아는 오백살이 지나서,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로 번역하고 있다. 창세기 5:32의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노아가 오백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이다. 이 문장을 통하여 우리는 세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1) 노아가 오백세 되던 해에 세 쌍둥이가 태어남, 2) 이들 세 아들이 노아가 오백세되기까지 차례대로 태어남, 3) 노아가 오백세 되던 해 첫 아들이 태어나고 그 다음에 차례대로 다른 두 아들도 태어남. 히브리어 어법상 앞의 두 가지 보다는 세번째 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개역과 표준 새번역 둘다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다음으로 고찰해야 하는 구절은 창세기 10:21이다. 우선 우리말 번역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개역은 이를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라고 번역하였고, 표준 새번역은 “야벳의 형인 셈에게서도 아들딸이 태어났다. 셈은 에벨의 모든 자손의 조상이다”라고 번역함으로써, 둘다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이들 번역문은 과연 히브리어 원문의 의도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일까? 여기서 “야벳의 형”이라고 번역된 문제의 구절을 원문 및 고대 번역문인 칠십인역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이 두가지면 이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데 충분하다고 본다.
창세기 10:21의 이 구절에 대한 히브리어 본문은 לודגה תפי יחא (‘앜히 예펱 하가돌’)이다. 맛소라 학자들이 고안해낸 엑센트와 모음 부호를 무시할 경우 이 히브리어 구절은 두 가지의 직역이 가능하다: 1) ‘야벳의 큰 형제’, 2) ‘큰 야벳의 형제’. 다시 말해서 ‘크다’ (‘하가돌’, לודגה)라고 하는 형용사가 ‘야벳’ (תפי)과 ‘형제’ (יחא) 중 어느 것을 수식하느냐에 따라 이 문구의 해석이 달라진다. ‘야벳’을 수식할 경우 야벳이 형이 되고, ‘형제’를 수식하면 셈이 형이 된다.
맛소라 학자들이 고안해낸 엑센트 부호의 기능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구둣점 역할일 것이다. 맛소라 성경의 엑센트는 여기서 ‘크다’가 ‘야벳’을 수식하고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맛소라 학자들은 야벳을 셈의 형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칠십인역 역시 맛소라 학자들의 견해를 지지해준다. 이 구절에 대한 칠십인역의 번역문 (αδελφῷ Ιαφεθ του μειζονος)에 있어서 명사 ‘야벳’과 형용사 ‘크다’는 동일한 2격 (소유격)을 취하고, ‘형제’는 3격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큰 자’는 셈이 아니라 야벳인 것이다.
셈이 야벳보다 더 어리다는 사실은 창세기 11:10을 통하여서도 찾아볼 수 있다.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셈은 일백세 곧 홍수 후 이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라는 이 기술에 의하면, 셈이 일백세가 된 것은 홍수 후 이년이 지나서의 일이었다. 노아가 600세 되던 해 2월 10일에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로 들어갔고, 그로부터 이레 후 곧 2월 17일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40일을 내렸으며 (창세기 7:9-12), 그들이 방주 밖으로 나온 것은 노아가 601세 되던 해 2월 27일이었으니 (창세기8:14-19), 노아 홍수는 햇수로 볼 때 2년이나 지속된 장기간의 대사건이었다. ‘홍수 후 이년’ (‘슈나타임 앜하르 하마불’, לובמה רחא םיתנשׁ)이란 히브리어 문구는 분명히 홍수 사건이 완전히 끝난 후 또 두 해가 흐른 뒤의 일임을 가리키고 있다. 사람들에게 노아 나이 600세와 601세의 두 해는 홍수해로 기억되었을 것이고, 그후 두 해 (노아 나이 602세와 603세)가 지나, 노아의 나이가 대략 604세가 되던 해에 셈은 나이 100세가 되어 아르박삿을 낳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셈은 노아가 504세가 되던 해에 태어난 셈이 된다. 이상 고찰한 바를 창세기 5:32 (“노아가 오백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과 묶어서 볼 때, 셈은 결코 노아의 맏아들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증거로서 창세기 9:24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 9:20-27은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여 벌거벗고 누워있을 때 그 아들들이 취한 행동에 따라서 축복과 저주를 내린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중에서 분명치 아니한 점은 도대체 함의 아들 가나안이 행한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본문에 의하면, 많은 독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저주를 받은 것은 함이 아니요 그의 아들인 가나안이다. 가나안에 대한 저주는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으로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창세기 15:16, 19-21 등 참조). 이 저주를 항간에 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흑인 전체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창세기 9:24에 기록되기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라고 하였다.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는 ‘작은’ (‘하카탄’, ןטקה)을 위하여 ‘둘째’라는 각주를 덧붙임으로써, 이 아들이 다름아닌 ‘함’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 함에 대한 저주가 없음을 고려할 때, 여기서 말하는 ‘그 작은 아들’은 아마도 함이 아니라 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볼 경우, 이 작은 아들이 ‘행한 일’은 무슨 저주받을 (25, 27절) 악한 행실이 아니요, 궁극적으로 축복을 받아 마땅한 (26-27절) 아름다운 행실을 가리키게 된다.
이상으로 우리는 야벳이 셈보다 먼저 태어났다는 사실을 고찰해 보았다. 노아의 세 아들중 다만 함의 연령상의 위치가 확실치가 않다. 창세기 9:24의 ‘작다’ (‘하카탄’, ןטקה)나 10:21의 ‘크다’ (‘하가돌’, לודגה)라는 형용사가 반드시 ‘막내’나 ‘맏형’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노아 집안에 대한 기록에 있어서 그렇게 이해하여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창세기 10장에서는 노아 세 아들의 가계를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야벳 (2-5절), 함 (6-20절), 셈 (21-31절)의 순서로 열거되어 있다. 아마도 이는 나이 순서대로 배열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상의 모든 고찰을 종합하여 가장 안전하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야벳은 노아 500세 되던 해에, 함은 노아 502세 되던 해에, 그리고 셈은 노아 504세 되던 해에 태어났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2. 창세기 12-50장의 난해 구절
“그 말씀” 1996년 8월호 원고. 김 경 래
이스마엘의 운명에 관한 예고 (창세기 16:12)
성경에는 사람이 출생하기도 전에 또는 출생 직후에 그 자신 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의 운명까지 예고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예언적 발언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에 의하여 언급되지만, 때로는 그 사람의 직계 조상, 곧 그 부친이나 조부에 의하여 언급되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역시 그 정보의 출처는 결국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러면 창세기를 통하여 이에 대한 두어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라멕은 182세에 아들을 낳고는 이름을 노아라 하면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다 (창세기5:28-29). 그후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한 의인으로서, 그와 그의 가족은 대홍수 심판 때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들이다. 그가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준비한 방주는 그의 가족뿐만 아니라 수많은 동물들을 위해서도 구원의 방편이 되었다.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 태어난 쌍둥이 아들인 야곱과 에서는 출생 전에 이미 그들 후손의 운명이 예고되었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창25:22-23). 각기 이스라엘 민족과 에돔 족속의 조상이 되는 이들 쌍둥이 형제의 운명은 지난 역사를 통하여 볼 때, 예고된 대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과 이집트 여종 출신의 첩 하갈 사이에 태어난 이스마엘의 운명 역시 출생 전부터 예고되었다. 그 일부 내용이 비유적으로 표현된 이 예언의 말씀은 창세기 16:12에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말 개역 성경과 표준 새번역 사이에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우선 이 두 번역을 아래에 옮겨보고자 한다.
(개역)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표준 새번역) “너의 아들은 들나귀처럼 될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과 싸울 것이고, 모든 사람 또한 그와 싸울 것이다. 그는 자기의 모든 친척을 떠나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창세기 16:12의 히브리어 본문은 사실상 어려운 구절이 아니다. 이를 영어로 더 잘 표현할 수 있으므로 미국의 유대인 학자들이 영역한 번역문 (TANAKH: A New Translation of the Holy Scriptures According to the Traditional Hebrew Text, The Jewish Publication Society, Philadelphia New York Jerusalem, 1985)을 여기에 적어보기로 한다.
(TANAKH) He shall be a wild ass of a man;
His hand against everyone,
And everyone's hand against him;
He shall dwell alongside of all his kinsmen.
이 영역문은 창세기 16:12의 히브리어 본문을 충실하게 번역하고 있다. 우리말 개역이나 표준 새번역의 경우 둘다 전반부는 비교적 충실하게 번역하였으나, 후반부에 있어서 문제를 가지고 있다. 개역의 “동방에서”와 표준 새번역의 “떠나서”는 히브리어 본문의 ינפ־לע (‘알 프네’)를 번역한 것이다. 이 문구는 일반적으로 ‘...의 위에, 앞에, 맞은 편에’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이 경우에 이 문구를 “동방에서”나 또는 “떠나서”라고 번역해야 할 하등 이유가 없다. TANAKH의 'alongside of'가 적절한 번역이라고 하겠다.
그러면 창세기 16:12의 본문 내용을 살펴보면서 이 예언이 정확히 무슨 뜻을 전달하는 것인지 알아보기로 하자. 이 예언은 세 가지 내용, 곧 이스마엘의 자유 분방한 생활 양식, 호전적 성격, 거주지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먼저 이스마엘의 자유분방한 생활 양식은 들나귀에 비유되어 표현되어 있다. ‘들나귀’를 뜻하는 “페레” (ארפ, 구약에 모두 10회 출현)는 비유적으로 ‘제멋대로 구는 사람’을 가리킨다 (창세기16:12; 호세아8:9; 욥기11:12). 욥기 39:5-8에 기록된 들나귀에 대한 묘사는 이 구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누가 들나귀를 놓아 자유하게 하였느냐. 누가 빠른 나귀의 매인 것을 풀었느냐. 내가 들로 그 집을, 짠 땅으로 그 사는 처소를 삼았느니라. 들나귀는 성읍의 지꺼리는 것을 업신여기니 어거하는 자의 지르는 소리가 그것에게 들리지 아니하며 초장이 된 산으로 두루 다니며 여러 가지 푸른 것을 찾느니라.” 성경은 ‘이스마엘이 장성하여 바란 광야에 거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창세기 21:20-21).
둘째로 이 예언은 이스마엘의 호전적인 성격을 묘사하고 있다. 그는 모든 사람과 충돌하게 될 것이다. 앞서 인용한 내용 중 ‘활 쏘는 자가 되었다’는 구절은 어느 정도 이 예언에 대한 성취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세째로 이스마엘의 거주지에 대한 언급에 있어서, 위에서 밝힌대로 우리말 개역과 표준 새번역은 잘못된 번역문을 제시해준다. “...의 맞은 편에 (ינפ לע) 거하다”는 표현은 창세기 25:18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 구절 역시, 창세기 16:12에서처럼 이스마엘 자손의 거주지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 자손들은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이르러 그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하였더라.” 여기서 특별히 “그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라는 구절은 창세기 16:12의 그것과 일치하는 표현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히브리어 원문상 동일한 문구를 (더군다나 동일한 인물을 언급하면서), 우리말 개역 성경 창세기 25:18에서는 “그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로, 그리고 16:12에서는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로 다르게 번역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ויחא לכ ינפ לע (‘알 프네 콜 에하브’)라는 이 문구는 이스마엘 자손이 그들의 형제 민족들 ‘곁에’ (또는 ‘가까이’) 거주할 것이라고 지리적 위치를 묘사하는 동시에, 아울러 그들이 아브라함의 다른 자손들, 특별히 이삭의 후예들과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살게 될 것이라는 관계적 위치를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이스마엘 자손은 지구상에 잠시 있다가 사라질 민족이 아니요, 오래도록 아브라함의 다른 후손들과 더불어 대립 관계 속에서 살 것이라는 예언인 셈이다. 이러한 해석은 앞서 언급한 이스마엘의 자유분방하고 호전적인 성격과도 걸맞는다고 하겠다.
에서에 대한 예언 (창세기 27:39-40)
쌍둥이 형제 야곱과 에서의 다툼은 어머니 뱃속에서 시작될 정도로 유명한 것이었다 (창세기25:22). 출생에서 뒤진 야곱은 속임수를 통하여 결국 장자권과 아버지의 축복을 에서로부터 모두 빼앗는다. 창세기 27장에는 이삭이 나이가 들어 눈이 어두워졌을 때, 야곱과 리브가의 속임수를 능히 깨닫지 못하고 자기가 원한 에서 대신 야곱을 축복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여 언급한 말은 27-29절에 적혀 있다: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그후 사냥에서 돌아와서 아버지의 축복을 빼앗긴 사실을 뒤늦게야 알게 된 에서는 방성대곡하며 자기도 축복하여 달라고 졸라댄다. 아버지 이삭은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공급하였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창세기 27:37)고 대답하지만, 그래도 에서는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운다 (38절). 마침내 이삭은 입을 열어 에서에 대한 예언을 늘어놓는다. 이 예언은 창세기 27:39-40에 기록되어 있다. 이 예언의 기록중 첫 발언 (39절)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견해 차이가 있으므로 이 문제를 다루어보고자 한다.
우선 이에 대한 몇몇 우리말 역본과 영역본을 여기에 옮겨 적어 보기로 하자.
(개역)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표준 새번역) “네가 살 곳은 땅이 기름지지 않고 하늘에서 이슬이 내리지 않는 곳이다.”
(공동 번역) “네가 살 땅은 기름지지 않은 땅, 하늘에서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땅이다.”
(KJV) "Behold, thy dwelling shall be the fatness of the earth, and of the dew of heaven from above."
(NIV) "Your dwelling will be away from the earth's richness, away from the dew of heaven above."
(NASB) "Behold, away from the fertility of the earth shall be your dwelling, And away from the dew of heaven from above."
(RSV) "Behold, away from the fatness of the earth shall your dwelling be, and away from the dew of heaven on high."
(TANAKH) "See, your abode shall enjoy the fat of the earth And the dew of heaven above."
이상에서 보는대로, 우리말의 표준 새번역과 공동 번역, 그리고 영역본중 NIV, NASB, RSV는 에서가 ‘땅의 기름짐과 하늘의 이슬’을 누리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번역하는 반면, KJV와 TANAKH는 이와는 정반대로 에서가 ‘땅의 기름짐과 하늘의 이슬’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개역은 약간 모호한 감도 있지만, 우리말 낱말 ‘뜨다’를 ‘자리를 비다’ (이희승 편 국어대사전)로 이해할 때, 역시 표준 새번역이나 공동 번역 등과 견해를 같이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아주 반대되는 견해 차이가 히브리어 전치사인 מ (“멤”)이라는 한 글자에 대한 해석 차이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는 사실을 알 때 독자들은 놀라움을 금하지 못할 것이다. 이 문제를 보다 깊이 다루려면 우선 야곱에 대한 축복 (27-29절중 특별히 28절)과 문제의 39절을 비교 분석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두 구절 모두 동일한 히브리어 표현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28절과 39절의 히브리어 본문을 나란히 소개하기로 한다. 만일 독자가 히브리어를 잘 모를 경우에는 이를 통하여 시각적으로라도, 또는 괄호 안의 한글 음역을 통하여 그 유사성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28절) ץראה ינמשׁמו םימשׁה לטמ םיהלאה ךל־ןתיו
(‘웨이텐 레카 하엘로힘 미탈 하샤마임 우미슈마네 하아레츠’).
(39절) לעמ םימשׁה לטמו ךבשׁומ היהי ץראה ינמשׁמ
(‘미슈마네 하아레츠 이흐예 모샤베카 우미탈 하샤마임 메알’)
위에서 보는 것처럼 야곱에 대한 축복과 에서에 대한 예언 모두에 ‘미슈마네 하아레츠’와 ‘미탈 하샤마임’이라고 하는 구절들이 등장함을 알 수 있다. 이들 두 구절 모두에서 전치사 ‘미’()를 동일하게 해석하느냐 아니면 달리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위에서 밝힌 바대로 번역상의 큰 견해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창세기 27장 28절과 39절에 나오는 전치사 מ (“멤”)을 서로 다른 뜻으로 해석한다. 전치사 מ (“멤”)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이들은 28절의 ‘미’()는 ‘...로부터, 중에서’라는 일반적인 뜻으로 해석하는 한편, 39절에서는 동일한 전치사 מ (“멤”)을 ‘...에서 떨어져’라는 전혀 반대의 뜻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경향의 해석이 대부분의 현대 번역본들에 반영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과연 이들의 해석이 정당한 것인가?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많은 학자들이 39절의 전치사 מ (“멤”)을 28절의 그것과 정반대로 해석하고자 하는 것은 창세기 27장의 전반적인 문맥과 이후 에서의 자손 (에돔 족속)이 실제로 살았던 척박한 자연 환경 때문이라고 하겠다. 에서가 방성대곡하면서 자기도 축복하여 달라고 졸라댈 때, 아버지 이삭은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공급하였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창세기 27:37)고 부정적으로 대답한다. 이런 점에서 에서는 비옥한 자연 환경을 뜻하는 ‘땅의 기름짐’이나 ‘하늘의 이슬’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며, 또 역사상 실제로도 그런 혜택을 받아 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 옮겨 놓은 히브리어 본문은, 이를 언어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들 학자들의 해석에 쉽게 동조하지 않는다. 먼저 28절 중 위에 적은 히브리어 본문을 우리말로 문자적으로 옮겨보면 “하나님이 하늘의 이슬로부터 그리고 땅의 기름으로부터 네게 주실 것이다”가 되고, 39절 부분은 “너의 거주지는 땅의 기름으로부터 그리고 위로 하늘의 이슬로부터 있을 것이다”로 옮길 수 있다. 28절과 39절의 차이점은 주어와 동사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28절은 “하나님이 네게 주실 것이다”요, 39절은 “너의 거주지는.....있을 것이다 (또는 ‘.....될 것이다’)”이다. 게다가 이 차이점마저도 사실은 동일한 의미를 다른 언어로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39절의 경우 어쩌면 이삭은 야곱에게 축복한 내용과 동일한 뜻을 함축한 다른 표현을 가지고 에서에게 말하였는지도 모른다. 창세기 36:6-8에 의하면, 에서 역시 야곱과 마찬가지로 소유가 풍부하여 결국 야곱과 함께 거하지 못하고 자기의 모든 소유를 이끌고 세일산으로 가서 거한다.
에서가 야곱과 같은 복을 받지 못한 것은 39절보다는 그 뒤에 계속되는 40절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칠십인역은 28절과 39절 모두에서 동일한 문구로 번역하고 있다. ‘미슈마네 하아레츠’는 απο της πιοτητος της γης (‘아포 테스 피오테토스 테스 게스’)로, 그리고 ‘미탈 하샤마임’은 απο της δροσου του ουραρου (‘아포 테스 드로수 투 우라누’)로 번역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이 경우에 칠십인역은 맛소라 성경의 히브리어 본문을 그대로 직역하고 있는데, 아마도 TANAKH과 KJV의 번역문과 동일한 해석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람어 탈굼 역시 칠십인역과 마찬가지로 맛소라 성경의 히브리어 본문을 그대로 직역하고 있다.
이상의 간단한 고찰을 통하여 필자는 창세기 27:39을 새롭게 긍정적인 언어로 번역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바이다.
요셉의 노예 정책 (창세기 47:21)
창세기 47:13-26에서는 7년 기근 동안에 요셉이 이집트 총리로서 시행한 정책에 관하여 기술하고 있다. 양식이 떨어지자 이집트 백성은 첫 단계로 돈을 내고 요셉에게서 곡식을 사먹는다 (14절). 백성의 돈이 몽땅 이집트 왕궁의 재산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돈이 떨어지자 이집트 사람들은 가축을 가져다가 요셉에게 바치고는 식량을 얻어간다 (15-17절). 돈도 떨어지고 집안의 가축도 거덜나자 이집트 사람들은 요셉에게 찾아와 이제 남은 것은 자기들 몸뚱아리와 토지 뿐이니 이를 받고 먹을 것을 달라고 하소연한다 (18-19절). 다른 말로 ‘땅과 함께 바로의 종이 되겠다’는 것이다 (19절).
20-26절은 이러한 거래의 결과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요셉은 이집트 백성으로부터 토지를 받아 바로의 소유로 돌리는 한편 그들을 바로의 종으로 삼는다. 그러나 바로에게서 녹을 받는 제사장들만은 이 일에서 제외되었다. 요셉은 이집트 백성에게 씨앗을 나누워주면서 앞으로 수확한 곡식의 오분의 일은 바로에게 바칠 것을 국법으로 정한다. 이 문단에서 한 가지 이상한 구절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바로 21절의 “요셉이 애굽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백성을 성읍들에 옮겼다”라는 내용이다. 이 구절은 전체 문맥에 잘 어울리지 않는다.
도대체 요셉이 행한 일은 무엇인가? 그는 과연 이집트의 인구에 대한 대이주 정책을 실시하였다는 것인가? 이집트 백성이 토지와 더불어 자기들의 몸마저 바로에게 팔 때에 그들을 성읍들 안으로 옮길 필요가 있었을까? 만일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맛소라 성경의 21절 본문은 문맥상 왠지 석연치 않은 물음들만 던지게 한다.
사마리아인들이 전수해온 사마리아 오경에서는 이 구절을 맛소라 성경과는 달리 읽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요셉이 애굽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백성을 그에게 종으로 삼았다”라는 내용이다. 그러면 21절 상반절에 대한 이들 두 사본 (맛소라 성경과 사마리아 오경)의 히브리어 원문을 적어보기로 하자.
(맛소라) םירעל ותא ריבעה םעה תאו (웨에트 하암 헤에비르 오토 레아림)
(사마리아) םידבעל ותא דיבעה םעה תאו (웨에트 하암 헤에비드 이토 레아바딤)
위에서 보는 것처럼 (히브리어를 모르는 독자는 괄호 안의 우리말 음역을 참조할 것) 맛소라 사본과 사마리아 오경 사이의 눈에 보이는 원문상의 차이는 아주 근소한 것이다. 먼저 맛소라의 ריבעה (‘헤에비르’)에 대하여 사마리아 오경은 דיבעה (‘헤에비드’)로 읽는다. “ㄹ” 발음의 히브리어 글자 ר(레쉬)가 사마리아 오경에서는 “ㄷ” 발음의 ד(달렡)으로 바뀐 것이다. ר(레쉬)와 ד(달렡) 사이의 혼동은 성경 사본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자주 나타나는 오류중의 하나이다. 맛소라 성경의 ריבעה (‘헤에비르’)는 “옮기다, 이주시키다”의 뜻이요, 사마리아 오경의 דיבעה (‘헤에비드’)는 “종으로 삼다, 종노릇 시키다”의 뜻이다.
맛소라는 םירעל (‘레아림’)으로 읽는데 반하여 사마리아 오경은 이를 םידבעל (‘레아바딤’)으로 읽고 있다. 여기서도 ר(레쉬)와 ד(달렡)의 차이가 있는 동시에 사마리아 오경에서는 히브리어 글자 ב(베이트)가 삽입되어 있다. 맛소라의 םירעל (‘레아림’)은 직역하면 “성읍들로”라는 듯이요, 사마리아 오경의 םידבעל (‘레아바딤’)은 “종들로, 노예로”라는 듯이다. 그리고 ותא의 경우 히브리어 글자로는 동일하지만, 맛소라 성경에서는 ‘오토’ (‘그를’이라는 뜻으로 결국 앞의 ‘백성’을 받는다)로 읽는 반면 사마리아 오경에서는 이를 ‘이토’ (‘그와 함께’ 또는 ‘그에게’라는 뜻이 됨)로 읽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에게’의 ‘그’는 바로를 가리키는 대명사인 셈이다.
독자는 사마리아 오경의 본문이 맛소라 본문보다는 문맥에 더 잘 어울린다는 점을 바로 감지했을 것이다. 한편 주전 3세기 경의 헬라어 칠십인역본 역시 사마리아 오경과 같은 내용의 본문을 담고 있다: κατεδουλωσατο αυτῳ εις παιδας (‘카테둘로사토 아우토 에이스 파이다스’). 헬라어 αυτῳ (‘아우토’ = ‘그에게’) 역시 사마리아 오경의 ותא (‘이토’)와 일치한다.
창세기 47:21에 나타난 이러한 사본상의 차이점을 학자들은 서로 달리 설명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맛소라 사본의 본문을 원문으로 간주하고 문맥에 걸맞지 않는 이 난해한 구절을 해석하느라고 백방으로 노력을 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맛소라 성경의 본문을 포기하고 사마리아 오경과 칠십인역의 본문을 받아들인다. 그럴 경우에 그들은 맛소라 사본의 본문을 오류로 간주하는 셈이 된다.
창세기 47:21의 맛소라 본문을 설명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아마 이것이 하나의 오류라면, 우리는 굳이 이를 힘들게 설명해보려는 시도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사마리아 오경이나 칠십인역의 저본(底本)에서 제공하는, 맛소라와 비슷한 글자의 새로운 히브리어 본문이 원본이라면 이 모든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필자의 소견에 따르자면 이 경우 아마도 맛소라 성경은 오류를 담고 있고, 사마리아 오경과 칠십인역에 그 원본이 보존된 것이 아닌가 한다.
요셉에 관한 예언 (창세기 49:22-26)
창세기 49:24의 우리말 개역 성경은 유다 지파에게서 태어날 메시야 (창세기 49:10 참조: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외에 또 다른 메시야가 요셉 지파에게서 태어날 것처럼 보이게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가 있다. 개역에 나타난 이 문제의 번역문은 이와 같다: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창세기 49:24의 히브리어 본문은 결코 쉬운 구절은 아니다. 그러나 개역으로 읽을 경우 오해의 소지가 있는 하반절의 히브리어 본문은 오히려 상반절의 그것보다 더 쉽다. 24 하반절을 우리말로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야곱의 전능자의 손으로부터. 거기로부터 목자, 이스라엘의 반석”이 된다. 이 구절에는 동사가 없다. 그러나 개역 성경은 “나도다”라는 동사를 삽입하여 문제를 유발시킬 소지가 있는 것이다.
창세기 49:22-26에는 요셉에 대한 축복이 야곱의 다른 아들들에 비해 비교적 길게 기록되어 있다. 문맥을 통하여 볼 때, 24 하반절부터 25 상반절까지에는 요셉을 도우시고 복을 주시는 원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 원천은 다름 아닌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24절의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 ‘목자’와 25절의 ‘네 아비의 하나님’, ‘전능자’는 모두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와같이 야곱은 여기서 하나님을 여러 가지 칭호로 언급함으로써 무서운 환난중에도 요셉을 지켜주신 하나님을 더욱 두드러지게 묘사하고 있다.
창세기 49:24 하반절에 대한 우리말 표준 새번역과 대부분의 영역본은 위에서 언급한 오해의 소지를 담고 있지 않다: (표준 새번역) “야곱이 섬기는 ‘전능하신 분’의 능력이 그와 함께 하시고, 목자이신 이스라엘의 반석께서 그와 함께 계시고.” 참고적으로 다음의 영역본들은 표준 새번역과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KJV) "by the hand of the Mighty One of Jacob,
because of the Shepherd, the Rock of Israel,"
(NIV) "because of the hand of the Mighty One of Jacob,
because of the Shepherd, the Rock of Israel,"
(TANAKH) "By the hands of the Mighty One of Jacob-
There, the Shepherd, the Rock of Israel-"
3. 출애굽기 난해 구절
“그 말씀” 1996년 9월호 원고. 김 경 래
이집트에 내려온 야곱 가족 (출애굽기 1:1-5)
야곱과 더불어 애굽에 내려간 야곱 가문 사람들의 숫자는 칠십인역에서 다섯 명이나 더 불어난다. 그리고 스데반 집사의 발언은 칠십인역과 일치한다 (행7:14):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 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그럼 먼저 문제의 출애굽기 1:5의 맛소라 성경 및 칠십인역 본문을 직역하여 아래에 옮겨놓기로 하자. 문맥을 볼 수 있도록 맛소라 성경의 1:5 앞에 1:1-4의 내용을 괄호로 묶어 기입해둔다.
(맛소라 성경) (야곱과 함께 각기 권속을 데리고 애굽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 베냐민, 단, 납달리, 갓, 아셀.)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은 모두 칠십명인데, 요셉은 애굽에 있었다.”
(칠십인역) “그리고 요셉은 애굽에 있었다. 야곱에게서 나온 사람은 모두 칠십오인이었다.“
출1:5에 있어서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의 차이점이란 아주 간단하다. 첫째로 두 구절의 순서가 서로 바뀌었고 (칠십인역에서는 ‘요셉은 애굽에 있었다’가 절의 맨 앞에 나온다), 둘째 인원수 면에서 맛소라 성경에서는 ‘70명’, 칠십인역에서는 ‘75명’으로 서로 다르다. 여기서 사마리아 오경은 맛소라 성경과 일치한다.
이러한 차이점은 창세기 46:8-27에 나오는 보다 상세한 목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도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을 비교해보기로 하자. 창46:8-27은 내용상 1) 레아 소생 (8-15절), 2) 실바 소생 (16-19절), 3) 라헬 소생 (20-22절), 4) 빌하 소생 (23-25절), 5) 종합 (26-27절)으로 쉽게 나뉜다. 8절에서 19절에 이르기까지 표기상의 미미한 차이점을 제하고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은 서로 일치한다. 23-25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라헬 소생’ (20-22절)의 명단에 있어서 칠십인역은 맛소라 성경과 차이점을 보이며, 따라서 ‘종합’ (26-27절)에 있어서도 인원상의 차이점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제 독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의 20-22절 나란히 배열해보기로 하자.
맛소라
애굽 땅에서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요셉에게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요. 베냐민의 아들 곧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과 게라와 나아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훔빔과 아릇이니, 이들은 라헬이 야곱에게 낳은 자손이라. 합 십사명이요.
칠십인역
애굽 땅에서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요셉에게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요. 므낫세의 시리아 여자 첩이 그에게 낳은 아들들은 마길이요, 마길은 길르앗을 낳았다. 므낫세의 동생 에브라임의 아들들은 수델라와 다한이요, 수델라의 아들들은 에뎀이다. 베냐민의 아들들은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이요, 벨라의 아들들은 게라와 나아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훔빔이요, 게라는 아릇을 낳았다. 이들은 라헬이 야곱에게 낳은 자손이라. 합 십팔명이요.
칠십인역에는 몇몇 구절이 삽입되어 있다. 이들 삽입문에 대한 정보는 민26:35-36; 대상7:14; 8:3-5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목적은 아마도 창50:22-23 (“요셉이 그 아비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하여 일백 십세를 살며,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의 영향을 받아, 요셉의 자손을 한 두 대(代) 더 보여주고 아울러 부자 관계를 정확하게 밝히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칠십인역에는 다섯 사람의 이름 (마길, 길르앗, 수델라, 다한, 에뎀)이 더 들어 있지만 마지막에 ‘18명’으로 합을 낸 문제점이 보이기도 한다. .
26절에 있어서 칠십인역과 맛소라 성경은 완전히 일치한다: “야곱과 함께 애굽에 이른 자는 야곱의 자부 외에 육십 륙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나온 자이다.” 이 숫자에는 야곱 자신, 요셉, 및 요셉의 두 아들이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바로 다음의 27절에서는 20절에서의 차이점과 관련하여 칠십인역과 맛소라 성경 사이에 차이점을 보인다.
(맛소라 성경) 애굽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두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명이었더라
(칠십인역) 애굽 땅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일곱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오명이었더라
이상을 통하여 칠십인역의 ‘66명’을 설명하자면, 33 (레아의 소생과 야곱을 합한 수) - 1 (야곱) + 16 (실바의 소생) + 11 (베냐민과 그의 자손) + 7 (빌하의 소생) = 66이 된다. 그리고 ‘75명’은 66 + 1 (요셉) + 7 (요셉의 자손) + 1 (야곱)을 통하여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칠십인역 22절의 ‘18명’은 어쩔 수 없이 라헬의 소생 중 요셉을 제외한 숫자로 이해하는 수 밖에 없다.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의 가족수는 신명기 10:22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애굽에 내려간 네 열조가 겨우 칠십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셨느니라.” 이 절의 경우 칠십인역도 ‘75명’이 아닌 ‘70명’으로 일고 있다. 이 사실 하나만 두고 보더라도 창세기 46장과 출애굽기 1:5에 나타나는 사본상 차이점은 칠십인역의 의도적 편집 작업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맛소라 성경이 원래의 본문을 제공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맛소라 성경을 통해볼 때, 창세기 46:8-27의 기록은 몇 가지 특색을 지니고 있다. 우선 야곱의 아내들을 비롯하여 모든 며느리나 손주 며느리 등 여자들이 숫자 계산에 들어오지 못한 반면에 (26절 참조), 유일하게 레아의 딸 디나와 (15절) 아셀의 딸 세라 (17절)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들은 평생 결혼하지 않고, 다른 말로 가정을 이루지 아니하고 지낸 것이 아닌가 한다. 디나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도 있었다 (창세기 34장 참조).
둘째, 레아 소생을 계수함에 있어서 야곱 자신을 포함시켜 그 수는 모두 ‘33명’에 이른다 (15절).
세째, 야곱의 가족이 애굽으로 이주할 당시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자손들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연대를 계산해 볼 경우, 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 사이에 태어난 베레스에게 애굽으로의 이주를 즈음하여 두 아들이 (12절) 이미 생겨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이 무렵 베냐민에게 (민26:38-40; 대상7:6-7에 의거, ‘손자를 포함하여’) 열 명의 아들이 생겨났을 가능성도 전혀 없다. 이들은 틀림없이 애굽으로의 이주 후에 태어난 자손들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볼 때, ‘70명’ (또는 ‘75명’)은 애굽에 내려간 실제의 정확한 인원이라기 보다는 애굽에 들어와서 이스라엘 민족의 근간을 이루게 되는 야곱의 자손들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 (출1:5)이라는 문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이러한 히브리적 사고 방식의 타당성을 간접적으로나마 입증해준다고 하겠다 (히브리서 7:9-10 참조: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피 남편 모세 (출애굽기 4:24-26)
출애굽기 4:24-26의 난점은 히브리어 문장의 번역에 있는 것도 아니요, 또한 사본학적인 문제도 아니다. 짧으면서도 전후 문맥과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 간단한 문단은 그 역사적 상황과 그에 대한 배경을 설명함에 있어서 많은 이론들을 만들게 한 성경 난제중의 하나이다. 우선 그 본문 전체를 아래에 적어본다.
(24절)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 (25절)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26절)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
여호와께서 왜 그리고 어떻게 모세를 죽이려 하셨나? 이러한 일에 대한 명확한 설명은 문맥을 통해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너무나 돌연적이고 이상스럽기까지 하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후, 이미 장인에게 요청하여 그로부터 허락도 받고 (출4:18), 또 다시 여호와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는 (출4:19), 아내와 두 아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향하는 중이 아니던가 (출4:20)?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장차 애굽에서 있을 장자 재앙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출4:22-23):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이러한 일 다음에 기록된 내용이 바로 본문의 이상한 사건이다.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몇 가지 분명한 사실로는: 1)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 하심, 2) 십보라가 아들 (아마도 둘째인 엘리에셀)에게 할례를 행함, 3) 이때야 비로소 모세가 화를 면함, 4) 이 일로 십보라가 모세를 ‘피 남편’이라고 부름 등을 들 수 있다.
모세는 이때까지 자기 ‘아들’ (20절의 복수형과는 달리 여기 25절에서는 단수형으로 언급됨)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무슨 일로 왜 둘째인 엘리에셀에게 이제까지 할례를 행하지 않았는지에 대하여 성경은 아무런 언급이 없다. 물론 첫째인 게르솜의 경우에도 (출2:22 참조) 그가 과연 할례를 받았는지에 관하여 전혀 언급이 없다. 모세가 죽음에 직면했을 때 그의 아내 십보라는 그 이유가 아들의 할례에 있음을 깨닫고는 즉시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였을 것이다. 그 결과로 실제로 모세는 죽음을 면하게 된다.
이때 십보라가 모세를 향하여 ‘참으로 당신은 내게 피 남편이요’라고 내뱉는데, 이 말은 한편으로는 일종의 분노와 자포자기가 함축된 말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남편의 특별한 사명에 대한 새삼스런 자각과 확인으로 들린다.
본래 할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하셔서 그의 후손이 대대로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언약이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창17:9-11). 이 명령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창17:14)라는 준엄한 경고로 끝을 맺는다.
아브라함의 아들들에게만 해당하는 할례 예식은 틀림없이 남자들에 의하여 집행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출애굽기 4:24-26 본문에서 모세가 아닌 십보라가 그의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였다는 사실 역시 특이하다. 24절의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라는 표현은 아마도 모세가 중병에 걸리게 되었다든가, 아니면 그가 무슨 특별한 위험에 빠져있는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순전히 하나님과만 연관시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경우 모세는 아들에게 할례를 베풀 수 없는 상황이었겠고, 자연히 그의 아내인 십보라가 이 일을 집행하여야만 했을 것이다.
아울러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이 사건은 모세보다는 십보라와 관련이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모세는 한때 특별한 사명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지시에 대하여 자기는 부족하다면서 머뭇머뭇한 적이 있다 (출3:11; 4:10, 13 참조). 이러한 모세의 태도로 인하여 하나님이 모세에게 노를 발하신 적은 있으나 (출4:14 참조), 이런 일로 그를 죽이려 하신 것 같지는 않다. 더군다나 출4:24-26 본문에서는 모세의 위기에 대하여 할례가 주된 원인임을 암시하고 있지 않은가.
성경에서는 십보라에 대하여 별 기록을 담고 있지 않다. 아마도 십보라로서는 그녀의 남편 모세에게 부여된 특별한 사명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이행한다는 것이 모세 본인 못지 않게 어려운 일이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멀리 애굽에서부터 ‘굴러 온 복’을 어찌 하루 아침에 놓칠 수 있으랴. 두 아들과 함께 남편을 따라 낮선 땅 애굽으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너무나 처절하고 무거웠던 것이 아닐까? 남편이 구해야 하는 백성은 자기의 민족이 아니요 남편의 민족일 뿐이요, 애굽은 자기의 사랑하는 남편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위험한 곳이 아니던가.
성경은 애굽으로 향하는 모세의 가정, 아니 모세와 그의 아내 사이에 교차되는 감정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이처럼 유추해보는 수 밖에 없다. 두 아들은 그만 두고라도 아내 십보라의 마음 속에 있는 온갖 감정과 생각은 모세의 마음을 충분히 괴롭히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 모세와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들의 두 아들은 - 애굽으로 향한다.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준엄하고도 분명한 명령 때문에.
이때 길의 숙소에서 일어난 사건은 모세 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 십보라에게도 하나님이 내리신 사명이 얼마나 중요하고도 준엄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한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로서 십보라는 자기 남편이 죽음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할례의 집행을 통하여 하나님과 자기 남편, 더 나아가서는 자기 남편의 백성 사이의 언약의 중요성과 엄숙함을 재확인한다. 바로 이 언약 때문에 사랑하는 남편이 ‘사지’(死地)로 명령을 받아 떠나야만 하는 것이다. 십보라는 이 냉정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 자기 아들의 양피를 베어 피를 냄으로써. ‘참으로 당신은 내게 피 남편이요’라는 그녀의 외침은 그녀의 이러한 심경을 잘 대변해준다고 하겠다.
‘피와 죽음’이란 관계를 두고 볼 때, 이 사건은 성경의 다른 몇몇 기록과도 연관성을 가진다. 우선 앞서 언급한대로 바로 앞의 출4:22-23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장차 애굽에서 있을 장자 재앙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이 재앙은 출애굽기 12장에 묘사되어 있는데, 이스라엘 자손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 때문에 죽음을 면한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간접적이긴 하지만 모세의 아들의 피가 모세의 개인적인 재앙을 면하게 하였다. 모세의 둘째 아들 엘리에셀의 이름을 설명하는 구절에서도 또한 다소나마 이런 맥락과 관련된 내용이 담겨 있다: “하나의 이름은 엘리에셀이라. 이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바로의 칼에서 구원하셨다 함이더라” (출18:4).
출4:24-26에 기록된 사건으로 인하여 모세는 십보라와 두 아들을 장인에게로 돌려보내고 홀로 애굽으로 떠난 것 같다. 그래서 출18:2-6에서 우리는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가 돌려 보내었던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 두 아들을 데렸으니.....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의 아들들과 그 아내로 더불어 광야에 들어와 모세에게 이르니 곧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진 친곳이라. 그가 모세에게 전언하되 그대의 장인 나 이드로가 그대의 아내와 그와 함께한 그 두 아들로 더불어 그대에게 왔노라”라는 기록을 보게 된다. 아마도 모세는 이 일을 통하여, 자기에게 특별한 임무를 주신 하나님의 엄정(嚴正)하심과 그의 분명하신 목적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고는, 다시는 거역하거나 주저함이 없이 철저히 순종하기로 결심했던 것 같다.
유월절 어린 양을 잡는 시간 (출애굽기 12:6)
유월절 어린 양을 잡는 시간에 대하여 히브리어 성경은 해의 첫 달인 니산 월 14일 םיברעה ןיב (‘벤 하아르바임’)로 말하고 있다 (출12:6). 이 히브리어 표현의 뜻에 관하여는 몇 가지 해석이 있다. 그 중 하나는 םיברע을 쌍수(雙數)로 보고, 이 표현을 ‘두 저녁의 사이에’ 라는 뜻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해석이다. 이 경우 ‘두 저녁’은 14일 전날과 당일의 두 저녁 내지는 ‘해질 무렵과 어두워진 때’의 쌍으로 보는 것이다. 이와 관점은 비슷하나 다른 내용으로 해석한 예는 중세의 유명한 유대인 주석가 라쉬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에 의하면 ‘벤 하아르바임’이라는 표현은 정오에서부터 밤이 시작되는 때까지의 시간을 가리킨다.
우리는 고대 역본들이나 유대인 주석가들의 문헌을 통하여 다른 견해들을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칠십인역에서는 ‘벤 하아르바임’이라는 표현을 προς εσπεραν (‘프로스 헤스페란’)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 헬라어 문구는 다시 우리 말로 ‘저녁 무렵’ (toward evening) 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온켈로스의 아람어 탈굼에서는 이 히브리어 문구를 א ןי (‘벤 쉼샤야’) 라고 옮기고 있는데, 이는 ‘황혼에’ (at twilight) 라는 뜻이다. 칠십인역이나 아람어 탈굼이나 거의 동일한 시간대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이스라엘의 유대인 주석가 중 한 사람인 아모스 하캄은, 기본적으로 라쉬의 의견에 동조하면서 םיברע (‘아르바임’)이 쌍수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정오’를 뜻하는 םיירהצ (‘쬬호라임’)과 같이 지속되는 시간을 가리킨다고 하며, 또 ןיב은 ‘사이에’가 아니라 ‘가운데, ...중에’ 라는 뜻으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자신의 견해를 펼친다.
이상 간단한 고찰을 통하여 보더라도 םיברעה ןיב이라는 히브리어 표현의 뜻을 결정하기가 쉽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표현은 히브리어 성경에 모두 합하여 11회 출현하는데 (출12:6; 16:12; 29:39, 41; 30:8; 레23:5; 민9:3, 5, 11; 28:4, 8), 여섯 번은 유월절에 관한 문맥에 나오고 나머지 다섯 번은 다른 제사나 또는 분향과 관련된 문맥에 나타난다. 개역에서는 후자의 경우 ‘저녁때’ (출29:39, 41; 30:8)와 ‘해질 때’ (민28:4, 8)로 번역하고 있다.
아마도 이 표현의 정확한 뜻을 밝히는데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근거는 출애굽기 16:12-13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 םיברעה ןיב, ‘벤 하아르바임’)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저녁에는 (=ברעב, ‘바에레브’)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 있더니.” 12절의 ‘벤 하아르바임’과 13절의 ‘바에레브’는 메추라기 고기가 나타나는 동일한 시간을 가리킨다. ברעב (‘바에레브’)는 단순히 ‘저녁에’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결국 םיברעה ןיב (‘벤 하아르바임’) 역시 ברעב (‘바에레브’)와 마찬가지로 ‘저녁에’라고 볼 수 있게 된다.
이상의 고찰을 통하여 םיברעה ןיב이라는 표현은 ‘저녁 무렵에’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스라엘 자손의 애굽 체류 기간 (출애굽기 12:40-4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실제로 거주한 기간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일반 성경 독자들은 다음과 같이 몇몇 잘 알려진 성경 구절들을 통하여 이 기간을 보통 400년 또는 430년이라고 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창15:13);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사백 삼십년이라.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출12:40).
일찍이 이 지면을 통하여 간단하게나마 소개한 바 있는 (「그 말씀」 1996년 6월호) 미국의 유진 폴스틱 (Eugene Faulstich)은 이 문제에 대하여 독특한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Egyptian Chronology & The Torah, Spencer, 1989). 그는 이제까지 15년 가까이 자신의 전재산과 열정을 쏟아가며 성경 연대기 연구에만 몰두해온 사람이다. 그의 설명을 간단히 도표로 옮겨보면 아래와 같다.
<이스라엘 자손의 이집트 체류 기간: 폴스틱>
a b c d e
130년 (야곱고생)
70년 (우대)
230년 (이스라엘 학대)
40년(고생)
a: 1891 BC. 야곱 (=이스라엘) 출생.
b: 1761 BC. 야곱과 그의 가족이 이집트로 내려가다: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창47:9).
c: 1691 BC. 요셉 죽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 (출1:8).
d: 1461 BC.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를 떠나다.
e: 1421 BC.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에 들어오다.
폴스틱은 창15:13의 400년을 <130년 + 230년 + 40년 = 400년>이라는 고생기로 계산한다. 출12:40-41의 430년에 대하여는 <130년 + 70년 + 230년 = 430년>의 계산을 적용시킨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의 실제 이집트 체류 기간은 <70년 + 230년 = 300년>이 된다. 폴스틱의 해석에 있어서 독특한 점은 야곱 곧 이스라엘의 출생을 이스라엘 자손의 애굽 체제 기간과 관련된 연대 계산의 출발점으로 본다는 것이다.
칠십인역과 사마리아 오경은 이러한 해석에 대하여 어느 정도 빛을 던져준다. 출애굽기 12:40에 있어서 사마리아 오경과 칠십인역은 맛소라 성경과 약간 달리 기록되어 있다. 독자로 하여금 직접 비교해볼 수 있도록 우선 맛소라 성경의 출12:40-41을 적고, 그 다음에는 사마리아 오경과 칠십인역의 40절 본문만을 차례로 아래에 적어보고자 한다 (41절은 차이가 없음). 아래에서 밑줄친 부분은 맛소라 성경에는 없는 내용이다.
(맛소라 성경)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사백 삼십년이라.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사마리아 오경) 이스라엘 자손과 그들의 조상들이 가나안 땅과 애굽 땅에 거주한지 사백 삼십년이라.
(칠십인역)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거주한지 사백 삼십년이라.
출애굽기가 모세에 의하여 기록되었다고 볼 경우, 아직 모든 사람들이 생생히 알고 있을 애굽 체제 기간에 대하여 모세는 상세히 기록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출애굽기 12:40-41의 경우 이러한 원래의 기록이 전해 내려온 것이 맛소라 성경의 본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제2성전 시대 (에스라에서 주후 70년에 이르기까지의 시대) 에는 이스라엘 자손의 정확한 애굽 체제 기간에 대하여 일반 백성들은 서서히 잊어가고 있는 가운데, 서기관들은 이 기간을 익히 알고 있어서 그러한 정보를 성경 독자들에게 제공해주고자 하는 생각에 성경을 필사 또는 번역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조상들이 가나안 땅과” 내지 “(애굽) 땅과 가나안 땅”이라는 문구를 삽입시킨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유추가 사실이라면 애굽 체제 기간에 대한 폴스틱의 해석은 신빙성이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가축으로 인한 농작물 손상 (출애굽기 22:5)
출애굽기 22:5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22:4)에서는 사람의 가축이 이웃의 농작물을 먹을 경우 어떻게 배상할지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맛소라 성경만을 읽을 경우 이 법률은 이런 상황에 있어서의 한 가지 조건과 그에 따른 한 가지 해결책만 제시하고 있다: “사람이 밭에서나 포도원에서 먹이다가 그 짐승을 놓아서 남의 밭에서 먹게 하면 자기 밭의 제일 좋은 것과 자기 포도원의 제일 좋은 것으로 배상할지니라.”
그러나 칠십인역과 사마리아 오경은 이 절의 한 가운데에 동일한 내용의 문구가 더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의 본문을 우리 말로 옮기면 “사람이 밭에서나 포도원에서 먹이다가 그 짐승을 놓아서 남의 밭에서 먹게 하면 자기의 밭에서 그 소산물을 따라 배상하라. 그러나 밭 전부를 먹었을 경우에는 자기 밭의 제일 좋은 것과 자기 포도원의 제일 좋은 것으로 배상할지니라”가 된다. 밑줄친 부분이 바로 맛소라 성경에는 없으나 칠십인역과 사마리아 오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두 가지 조항을 담고 있는 이들의 보다 긴 법조문은 내용상 아주 적절한 것이라 하겠다.
아마도 맛소라 성경에서는 서기관의 실수로 인하여 원본에 있었을 밑줄친 부분이 빠지고, 그 결과로 두 개의 조항으로 구성된 원래의 법조문이 하나의 조항만을 담은 법조문으로 바뀌게 된 것 같다. 쿰란에서 발견된 고대의 필사본들중 4QpaleoExodm과 4Q366도 칠십인역과 사마리아 오경의 본문을 지지해준다 (보다 자세한 내용에 대하여는 필자의 히브리 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인 Studies in Relationship Between the Samaritan Pentateuch and the Septuagint, 1994, Jerusalem, p. 87을 참조할 것).
4. 레위기 난해 구절
“그 말씀” 1996년 10월호 원고. 김 경 래
양과 염소에 대한 통칭 (레위기 1:1-17)
레위기 제1장은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 코르반) 중 번제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다. 다른 예물이나 희생 제사에서도 그렇거니와 희생물로서 사용되는 동물은 제한되어 있다. 동물의 분류 내지 명칭에 있어서 히브리어는 우리 말과 약간 다르기 때문에 우리 말 성경 독자에게 있어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점을 지적해보고자 한다.
번제용으로 사용될 수 있는 동물은 크게 ‘가축’(המהב)과 ‘새’(ףוע)로 나뉜다. 가축중에는 ‘소’(רקב)와 ‘양떼’(ןאצ, ‘쬰’)가 가능한데 (1:2), 다같이 ‘흠 없는 수컷’이어여 한다 (1:3, 10). ןאצ (‘쬰’) 중에는 다시 ‘양 (םיבשׂק)과 염소 (םיזע)’가 가능하다 (1:10). 이런 분류는 레위기 3:1, 6, 7, 12; 5:6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독자는 레위기 1:2, 10; 3:6; 5:6 등의 ‘쬰’(ןאצ)은 1:10; 3:7의 ‘케쎄브’ (בשׂק)와는 달리, 양과 염소를 모두 포함하는 낱말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성경에 일반적으로 ‘양(羊)’이라고 번역되는 낱말 ןא (쬰)은 히브리어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양과 염소 떼를 두루 가리키는 집합 명사이다 (「그 말씀」 1995년 10월호에 실린 필자의 “신약성경 번역상의 몇 가지 문제점”, 145-151 참조). 한편 השׂ (‘쎄’)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항상 단수로만 사용되고, ןאצ (‘쬰’)은 항상 복수로서 사용된다. 따라서 ןאצ은 השׂ의 복수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창30:32은 단수와 복수로서 이 두 낱말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떼 (ןאצ, ‘쬰’)로 두루 다니며 그 양 (השׂ, ‘쎄’) 중에 아롱진 자와 점있는 자와 검은 자를 가리어 내며 염소중에 점 있는 자와 아롱진 자를 가리어 내리니 이같은 것이 나면 나의 삯이 되리이다.”
히브리어 ‘쬰’ (ןאצ)과 우리말 ‘양떼’의 의미 영역이 서로 다른만큼, 자연히 역에는 번역상의 어려움이 뒤따른다. 예를 들어서 우리말 개역 성경을 읽을 경우, 레1:2에서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라고 읽은 독자는 레1:10의 “만일 그 예물이 떼의 양이나 염소의 번제이면.....”이라는 구절에 이르러, 혹시 염소가 추가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상 10절의 ‘떼’는 2절의 ‘양’과 더불어 다같이 히브리어 ‘쬰’ (ןאצ)을 번역한 것이요, 한편 10절의 ‘양’은 히브리어 ‘케쎄브’ (בשׂק)를 번역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번역상의 난점은 출애굽기 12:3, 5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출12:3에서 히브리어 낱말 השׂ (‘쎄’)에 대하여는 개역과 표준 새번역 공히 ‘어린 양’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뒤의 5절을 통하여 볼 때, 이 낱말은 여기서 ‘어린 양’과 ‘어린 염소’를 다 포함하는 뜻으로 사용된다. 우리 말에 양과 염소를 다같이 가리킬 수 있는 단어가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이 번역을 택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확한 의미는 문맥 (이 경우에는 출12:5)을 통하여 파악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우리말 개역의 경우 3절과 5절 모두에서 השׂ (‘쎄’)를 ‘어린 양’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반하여, 표준 새번역의 경우 3절에서는 ‘어린 양’으로 5절에서는 ‘짐승’으로 서로 달리 번역되어 있다. 필자에게도 무슨 묘한 해결책이 없기 때문에, 개역이든 표준 새번역이든 번역문만을 읽는 독자들에게 오해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제사에 있어서 하나님과 제사장의 몫 (레위기 1:9, 13 등)
히브리어 구약 성경 중에 때로는 현대인에게 있어서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 표현들이 존재한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다는 목적으로 성경 번역자나 주석가들이 이러한 표현들을 나름대로 적절하게 변화시키는 일은 사실상 성경 기록의 본래 뜻과 의도를 왜곡시키는 결과만 초래할 뿐이다. 아울러 성경의 전반적 문맥에 대한 이해의 결핍으로 번역자들은 때때로 특정한 단어에 대한 무모한 해석을 적용시키는 경우도 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로서 레위기서에 종종 출현하는 האּ (‘이쉐’)를 들 수 있다.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는 האּ (‘이쉐’)를 자동적으로 ‘화제 (火祭)’로, 그리고 표준 새번역에서는 ‘살라 바치는 제사’로 번역하고 있다. ‘불’을 뜻하는 히브리어 낱말 שׁא (‘에쉬’)와 연관을 시켜 이처럼 번역한 것이다. 물론 개역 성경에서의 이러한 입장은 영문 흠정역 (King James Version)의 ‘an offerng made by fire’라는 번역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표준 새번역 역시 이런 종류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우가리트어와 같은 고대 근동 언어에 대한 연구의 도움으로 학자들은 히브리어 האּ (‘이쉐’)가 ‘불’을 뜻하는 히브리어 낱말 שׁא (‘에쉬’)에서 파생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이와 유사한 다른 우가리트어 낱말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어원학적 접근에도 한계와 문제점이 있기 때문에, 결국 가장 좋은 방법은, האּ (‘이쉐’)라는 단어가 히브리어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만큼 (총 65 회), 그 용례들을 통하여 의미를 분석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האּ (‘이쉐’)는 ‘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단순히 제물중 ‘하나님께 바쳐진 몫’으로 이해함이 가장 적절하다고 본다. 먼저 ‘불’과의 무관성은 ‘불’과는 상관없는 제물도 ‘이쉐’라고 불렸다는 점을 들어 입증할 수 있다 (민15:10; 레7:30, 35-36; 24:7, 9). 그리고 제단 위에서 태워짐에도 불구하고 결코 ‘이쉐’라고 불리지 않는 제물이 있다 (출29:13; 레8:16; 23:1, 19; 민28:15; 29:38). 이상의 구절들만 살펴보더라도 האּ (‘이쉐’)는 ‘불’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요, 다만 ‘이쉐’ 중에는 불로 살라 바치는 종류도 있다고만 말할 수 있다.
오히려 האּ (‘이쉐’)는 ‘빵’ (우리 문화권의 ‘밥’에 해당)이나 ‘음식’을 뜻하는 םחל (‘레헴’)과 연관되는 경우가 있다. 레3:11, 16의 “제사장은 그것을 단 위에 불사를지니 이는 ‘이쉐’로 드리는 식물 (食物)이요......”에서 ‘식물 (食物)’은 히브리어 םחל (‘레헴’)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레21:6 (“.....그들은 여호와의 ‘이쉐’ 곧 그 하나님의 ‘레헴’을 드리는 자인즉 거룩할 것이라”); 레21:21 (“제사장 아론의 자손 중에 흠이 있는 자는 나아와 여호와의 ‘이쉐’를 드리지 못할지니 그는 흠이 있은즉 나아와 하나님의 ‘레헴’을 드리지 못하느니라”); 민28: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나의 예물,나의 ‘레헴’되는 ‘이쉐’, 나의 향기로운 것은 너희가 그 정한 시기에 삼가 내게 드릴지니라”) 등은 모두 האּ (‘이쉐’)가 하나님께 바쳐진 םחל (‘레헴’)과 거의 같은 개념임을 전적으로 입증해주는 구절들이다.
이와 같이 האּ (‘이쉐’)를 ‘하나님께 바쳐진 음식 내지 제물 (祭物)’로 올바르게 이해할 때,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 그 수고에 대한 댓가로 하나님의 ‘이쉐’ 중에서 자기 몫을 받는다는 성경 구절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더불어 제사장의 소득은 여호와의 ‘이쉐’중에서 일부를 할당받은 것이기 때문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라고 불린다 (2:3, 10; 6:17 {히브리 성경에서는 10절}; 7:6). 여기 ‘지극히 거룩한 것’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표현 םישׁדק שׁדק (‘코데쉬 코다쉼’)은 히브리어 성경에 자그마치 79회나 출현하는 표현으로서, 때로는 ‘지성소’를 가리키기도 하고 (출26:33, 34 등), 때로는 성막이나 성전의 여러 기구나 물건 등을 가리킬 때 사용되고 (출29:37; 30:10, 29, 36 40:10 등), 또 때로는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로서 일반적으로 제사장에게 돌아가는 몫을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한다 (레2:3, 10; 6:17, 25; 7:1; 10:12, 17; 14:13; 21:22; 24:9; 민18:9, 10; 스2:63; 느7:65; 겔42:13 등).
필자는 האּ (‘이쉐’)에 대한 우리말 번역문으로서 단순히 ‘제물 (祭物)’이라는 낱말을 제시하는 바이다. 개역의 ‘화제’나 표준 새번역의 ‘살라 바치는 제사’ 대신에 ‘제물’을 넣어서 읽을 때, 우리는 보다 쉽고 올바르게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레1:9, 13, 17; 2:2, 9에서 우리는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로 바치는 제물 (= 이쉐)’로서의 번제와 소제를 발견하게 되고, 레2:2, 16에서는 ‘소제 중에서 기념물로서 불살라 바치는 제물 (= 이쉐)’을 보게 된다. 그리고 레3:9-16을 통하여 우리는 화목제의 희생 중에서 여호와께 돌려지는 제물 (= 이쉐)은 “그 기름 곧 미려골에서 벤바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임을 알 수 있다. 이것들은 단 위에서 불에 살라짐으로써 향기로운 냄새가 되어 하나님께 바쳐지는 음식 (‘레헴’), 곧 제물 (= 이쉐)이 된다. 이제 더 이상 한국 교회에서 האּ (‘이쉐’)에 대한 오해나 엉뚱한 해석이 없기를 바란다.
나답과 이비후의 죽음 (레위기 10:1-2)
레위기 8장에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 대한 제사장 위임식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모세의 주재하에 열리는 이 위임식은 7일 동안 물로 씻기고, 옷을 입히고, 관유를 바르고, 속죄제와 번제와 위임제를 바치고, 피를 뿌리고, 식사하는 일 등이 반복된다 (레8:6-34). 레위기 9장은 7일 동안의 위임식이 끝난 후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여 제8일에 처음으로 시행하는 일종의 취임식에 대한 기록이다. 따라서 이날 행사는 아론의 주관하에 거행된다. 그리고 이 날의 행사에 대한 구체적인 절차는 8장의 위임식과는 달리 이전에 명령을 받은 바가 없고, 새롭게 명령을 받은 것이다. 이 날 취임식을 위한 준비가 마친 후, 아론 자신을 위한 속죄제 (8-11절), 아론의 아들들을 위한 번제 (12-14절), 백성을 위한 각종 제사 (15-21절)가 집행된다. 그리고는 아론의 축복과 하나님의 응답이 뒤따른다 (22-24절).
레위기 10장은 위임식 제8일, 곧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여 식을 행하던 날, 모든 제사를 마치고 제사장 응식을 먹기 전에 일어난 일이다. 성경은 아론의 두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죽임당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으나, 그들의 죽음에 대한 이유나 그 상황 설명이 그리 명료하게 묘사되어 있지는 않다. 먼저 레10:1-2의 기록을 여기에 옮겨 놓기로 하자 (개역):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여기 ‘다른 불’이란 히브리어 표현 ה שׁ (esh zara)를 옮긴 것이다. 이 표현은 역시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고 있는 민3:4; 26:61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 본문들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향로에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하여 많은 주석가들은 ‘불을 번제단에서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화를 입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번제단 위에서 피운 불을 향로에 채워서 분향하라’는 (레16:12) 지시는 사실상 이 사건 이후에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레16:1 참조). 그리고 역시 이 사건 이후, 고라 무리의 반역이 있었을 때, 모세는 아론에게 “향로를 취하고 (번제)단의 불을 그것에 담고 그 위에 향을 두어 가지고 급히 회중에게로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고 명한 적이 있다 (민16:46). 이 두 경우 외에 “단 위의 불을 가져다가 향로에 담는 장면”은 마지막으로 신약 성경의 계시록 8:5에 기록되어 있다.
이상의 기록들을 고찰해 볼 때,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이유를 단순히 ‘다른 불’, 곧 일부 주석가들이 말하는 바, ‘번제단이 아닌 다른 곳에서 불을 취하여 분향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 시원한 대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에 대한 원인을 ‘비합법적인 분향’ 때문이라고 한다. 출30:9의 “너희는 그 [= 분향단] 위에 다른 향 (ה ת)을 사르지 말며 번제나 소제를 드리지 말며 전제의 술을 붓지 말라”는 명령은 이 사건 이전에 있었던 지시이다. 이 견해에 동조하는 학자들은 (예를 들어, Keil & Delitzsch, Levine) 출30:9와 레위기 10장 본문 사이의 연관성을 지적하면서, ‘다른 향을 살라 바치는’ 행위를 얼마든지 ‘다른 불을 드리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위의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는 나답과 아비후가 죽게 된 데에는 단순히 이들 두 가지중의 어느 하나나 또는 두 가지 이유 모두로 인한 것 이상으로 더 복합적인 원인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레16:1에 “아론의 두 아들이 여호와 앞에 나아가다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니라”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이어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아론에게 지시하신 말씀이 적혀 있다: “성소의 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아론이 성소에 들어오려면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레16:2-4). 이 말씀을 통해 볼 때에, 아론의 두 아들은 위임식 제8일, 곧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여 식을 행하던 날, 방자하게 지성소로 들어 가려다가 (또는, 들어갔다가)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볼 수도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지시는 올바른 분향 방법에 대한 말씀으로까지 계속된다: “향로를 취하여 여호와 앞 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두 손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채워 가지고 장 안에 들어가서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우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음을 면할 것이다” (레16:12-13).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 사건 이후에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술에 관한 지시를 내리셨다는 사실이다: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영영한 규례라” (레10:9). 우리는 이 구절만 가지고는 이 날 과연 나답과 아비후가 술을 마시고 회막에 들어간 것인가 하는 여부를 판가름할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날의 사건을 계기로 하나님께서는 아론과 그의 후손에게 술에 관하여 엄명을 내리셨다는 점이다. 나답과 아비후의 음주 여부는 그만 두고라도, 적어도 이 날 두 사람은 회막 안에서 무언가 경망된 짓을 하였기에 죽음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경망된 행동이 혹시 음주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 보게 된다.
아울러 이 일 후에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고 하신 여호와의 말씀은 (레10:3), 하나님의 택함을 입어 그에게 가까이 할 수 있는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백성의 자세와 태도가 얼마나 조심스러워야 하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나답과 아비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두 사람이 회막 안에서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일을 저질렀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호와의 불’은 그분께 가까이 하여 그분이 원하시는대로 제사하는 이들의 제물을 사름으로써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환희를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레9:22-24 참조: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필하고 내려오니라.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 동일한 ‘여호와의 불’은 그분 앞으로 방자하게 나아오는 자는 가차없이 불살라 처벌하기도 한다. 이와 유사한 종류의 형벌은 고라 무리의 반역 사건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민16장).
유출에 대한 규례 (레위기 15장)
레위기 15장은 몇 가지 유출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다.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 ‘유출병’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ב (zav)는 의학적으로 정확하게 어떤 종류의 질병을 뜻하는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우선 레위기 15장의 줄거리를 살펴보기로 하자. 1-12절에서는 남자에게 있는 유출병과 그로 인한 부정(不淨)함에 관하여 기술하고 있다. 13-15절에서는 유출병 있는 남자가 그 병에서 나았을 때 행하여야 하는 정결 예식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16-18절에서는 남자에게 있어서 설정(泄精)으로 인한 부정(不淨)함에 관하여 기술하고 있다. 19-24절에서는 월경 중에 있는 여자의 부정(不淨)함에 관하여, 그리고 25-30절에서는 월경기 외의 이상 유출에 따른 부정(不淨)함과 그 유출이 끝난 후의 정결 예식에 관하여 기술하고 있다. 31-33절은 이상에 대한 결론적인 문구이다.
레위기 15장에 대한 줄거리 관찰을 통하여, 두 가지 경우는 각기 남자와 여자에게 있는 생리적인 유출에 관하여 다루고 있고 (16-18절과 19-24절), 나머지 두 가지 경우는 비정상적인 유출, 곧 모종의 유출병에 관하여 다루고 있음을 (1-12절과 25-30절) 보게 된다.
레위기 19장에는 ‘살’ 또는 ‘몸’을 뜻하는 히브리어 낱말 רשׂב (‘바싸르’)가 여러 번 등장한다 (2, 3, 7, 13, 16, 19절). 일부 주석가들은 2절과 19절의 רשׂב (‘바싸르’)는 ‘살’이나 ‘몸’이 아닌 ‘성기 (性器)’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2절의 ‘바싸르’는 남자의 성기를 가리키고, 19절의 ‘바싸르’는 여자의 성기를 가리키게 된다. 우리말 표준 새번역에서는 2절의 경우 이러한 견해를 반영하여 ‘어떤 남자가 성기에서 고름을 흘리면.....’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표준 새번역의 19절에서는 이러한 견해와는 상관없이 ‘그것이 그 여자의 몸에서 흐르는 월경이면’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설명으로서 그들은 2절과 19절의 רשׂב (‘바싸르’)는 수사학적으로 완곡어법 (euphemism)에 해당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남녀의 성기를 직접 그 단어 그대로 말하는 것을 피하고 그 대신 전체 ‘몸’을 뜻하는 ‘바싸르’로 돌려 말하였다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19절의 유출, 곧 여자의 월경은 성기로부터의 유출이다. 그리고 레위기 15장의 전체 문맥을 두고 볼 때, 2절에서 말하는 남자의 유출 역시 성기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구약 성경의 히브리어는 문학적으로 볼 때 그 표현 면에서 아주 원색적인 언어이다. 레위기를 기록한 사람이 굳이 완곡어법까지 동원하여 성기를 ‘바싸르’라고 표현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 설사 레15:2, 19의 ‘바싸르’가 ‘남녀의) 성기’를 의도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보통 뜻대로 ‘몸’이라고 번역한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전혀 없다.
레위기 15장에 있어서 더 중요한 문제는 3절에서의 사본학적 문제이다. 먼저 맛소라 성경에서는 “그 유출로 인한 그의 부정함은 이러하다. 유출로 인하여 그의 몸에서 흘러 나오든지 또는 그의 몸이 유출로 인하여 엉겼든지 그는 부정하다”라고 읽고 있다. 그런데 칠십인역과 사마리아 오경은 이 경우에 맛소라 성경 본문보다 더 긴 구절을 가지고 있다: “그 유출로 인한 그의 부정함은 이러하다. 유출로 인하여 그의 몸에서 흘러 나오든지 또는 그의 몸이 유출로 인하여 엉겼든지 그는 부정하다. 그의 몸에 유출이 있거나 또는 그의 몸이 유출로 인하여 엉겼든지 그 모든 날 동안에 그는 부정하다”.
이 긴 구절에 있어서 칠십인역과 사마리아 오경 사이에 하나의 미세한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사실상 서로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쿰란에서 발견된 사본 중 11QpaleoLeva라고 일컫는 사본도 레15:3에 있어서 칠십인역과 사마리아 오경을 지지해준다. 이 경우 맛소라 사본은 3절의 원본 안에 중복되어 나타나는 문구를 실수로 건너 뛰어 읽음으로서 (이런 식의 사본학적 오류를 가리켜 homoioarcton이라고 함) 그 사이의 문구를 빠뜨리는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보인다 (보다 자세한 내용에 대하여는 필자의 히브리 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인 Studies in Relationship Between the Samaritan Pentateuch and the Septuagint, 1994, Jerusalem, p. 152을 참조할 것).
이스라엘 자손이 섬기던 수염소 (레위기 17:7)
레위기 17:7에 “그들은 전에 음란히 섬기던 수염소에게 다시 제사하지 말 것이니라. 이는 그들이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라는 지시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 ‘수염소’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낱말 םי (‘쎄이림’ = ‘싸이르’ רי의 복수형)은 문자적으로 ‘수염소’를 뜻한다. ‘음란히 섬긴다’는 표현은 구약 성경에서 ‘우상 숭배’에 대한 묘사로서 무수히 등장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전에 ‘수염소들’을 음란히 섬겼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틀림없이 레17:7의 ‘싸이르’는 단순히 동물로서의 ‘수염소’가 아니라, 우상 내지는 귀신의 일종임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은 ‘싸이르’ 숭배를 이집트에서부터 배워온 듯 하다. ‘싸이르’는 일반적으로 황량한 지역에서 거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사13:21; 34:14).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 거하는 동안 이미 그들은 ‘싸이르’를 섬기기 시작하였다 (수24:14; 겔20:7; 23:3, 8, 19, 21, 27). 후에 북왕국 이스라엘의 첫 왕이 된 여로보암 역시 수염소 숭배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여로보암이 여러 산당과 수염소 우상과 자기가 만든 송아지 우상을 위하여 스스로 제사장들을 세움이라” (대하11:15).
오멜 절기 (레위기 23:9-14)
처음 난 것으로서 하나님께 구별하여 바친 것은 비단 사람이나 짐승 뿐만은 아니다. 율법은 식물의 첫 열매도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칠 것을 명하고 있다 (출23:19; 34:26). 여기서 토지 소산이라 함은 각종 곡물과 과일 및 올리브 기름 등 일체의 농산품을 가리킨다 (민18:12 참조). 레위기에서는 특별히 이스라엘 자손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 후 그 땅의 소산을 먹기 전에 첫 이삭 한 단 (= ר, ‘오멜’)을 여호와께 바칠 것에 대하여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레23:10-14).
칠칠절 곧 오순절의 날자는 이 첫 이삭을 바치는 날에 달려있다. 15-16절에 의하면 칠칠절은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칠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제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십일을 계수하여” 결정된다. 물론 해마다 기후나 기타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하여, 그리고 지역에 따라서 첫 이삭을 거두는 날이 달라지는 것이 사실이다. 유월절은 대략 우리가 쓰는 그레고리력의 4월에 떨어진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의 곡물 (주로 보리와 밀) 추수는 유월절과 오순절 사이에 거의 이루어진다. 이 사실은 첫 이삭 단을 바치는 날이 유월절 또는 무교절과 시간상으로 밀착되어 있음을 설명해준다.
‘오멜’을 흔드는 날, 곧 레23:11, 15의 ‘안식일 이튿날’ (תבשׁה תרחממ)에 관하여는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학자들간에 논란이 많다. 필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생애를 통하여 이 ‘첫 이삭 한 단’이 무엇이며, 또 그것을 흔드는 시기가 언제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찌기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암시적으로 말씀하시기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12:24)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유월절 기간에 죽으시고 안식후 첫날에 다시 살아나셨다. 죽은지 사흘만에 살아나셨으므로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은 무교절 한 주간 중의 일요일이 될 것이다. 레위기 23장에서 ‘오멜’을 굳이 ‘안식일 이튿날’ (이 표현은 민33:3과 수5:11의 ‘유월절 다음날’ חספה תרחממ과는 구분됨)에 드리라고 한 것은 이 구절이 다분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상징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이것이 사실이라면 레23:11의 ‘안식일 이튿날’은 무교절 중의 ‘일요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가리켜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하였다 (고전15:20). 바울이 사용한 ‘첫 열매’라는 낱말 역시 구약 성경의 냄새를 물씬 풍겨준다. 과거 바리새인으로서 율법 연구에 혼신의 노력을 쏟았던 바울인지라 율법의 구절구절이 그의 머리 속에 담겨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 말을 언급하면서 율법의 첫 소산에 대한 규례를 염두에 두었음에 틀림없다. 이상의 관찰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을 레위기 23장의 ‘오멜’과 관련시킬 수 있고, 또 그 날자까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본다.
‘오멜’ 절기가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이듯이 (레23:14), 예수님의 부활은 영원히 기념할 날이다.
5. 민수기 난해 구절
“그 말씀” 1996년 11월호 원고. 김 경 래
이스라엘 중에 섞여사는 무리 (민수기 11:4)
민수기 11:4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중 ‘섞여 사는 무리’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낱말 ףספסא (‘아사프수프’)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여기서만 딱 한 번 출현한다. ‘모이다, 모으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어근 ףסא가 두 번 겹쳐서 만들어진 이 낱말은 ‘어중이떠중이’란 뜻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말 개역에 ‘이스라엘 중에’라고 번역된 것은 사실상 직역하면 ‘그 가운데’ (וברקב)이다.
민11:4에 있어서 우리말 개역 성경은 다분히 이들이 ‘이방인’임을 시사하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표준 새번역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섞여 살던 무리들이 먹을 것 때문에 탐욕을 품으니, 이스라엘 자손들도 또다시 울며 불평하였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사실상 이들은 출12:38에 언급된 바 있는 ‘중다한 잡족’ (ב ב, ‘에레브 라브’)과도 같은 무리로 보여진다: “중다한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그들과 함께하였다.” 그리고 어쩌면 이스라엘 사람과 이방인 사이에 태어난 사람도 아마 이런 부류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레24:10-11 참조).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 온 백성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의 부류는 ‘너희 곧 너희 두령과 너희 지파와 너희 장로들과 너희 유사와 이스라엘 모든 남자와 너희 유아들과 너희 아내와 및 네 진중에 있는 객과 무릇 너를 위하여 나무를 패는 자로부터 물 긷는 자까지 다’라고 열거되어 있다 (신29:10-11). 민11:4의 ‘아사프수프’나 출12:38의 ‘에레브 라브’는 아마도 여기 ‘네 진중에 있는 객(ר, 게르)과 무릇 너를 위하여 나무를 패는 자로부터 물 긷는 자’라고 묘사된 이들과도 거이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일 것이다.
구약 성경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사는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가장 일반적인 용어는 ר (‘게르’)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에 거주할 때부터 이미 서서히 유입되기 시작한 이방인의 무리는 광야 시기에도 모세의 장인 족속인 미디안 사람들이 유입되고 (민10:29 참조),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로는 거기 남게 되는 가나안 땅 원주민들이 대거 스며들어 오기 시작한다. 이후 다윗과 솔로몬이 통치하던 시대처럼 이스라엘이 강성할 때 이들은 흔히 부역에 동원되었지만 (대상22:1; 대하2:17-18 참조), 이들중 일부는 다윗의 군대에서 종사하며 충성을 바치기도 하였다 (삼하8:18; 왕상1:38 참조).
모세 율법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들 ‘게르’에 대하여 신분과 권한상 약간의 차이는 두고 있지만 학대는 금지되어 있다. 오히려 그들은 보호와 사랑의 대상이요, 종교적으로도 여러가지 면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동등한 의무 및 권한을 부여받았다. 따라서 이들 일반에 대한 전 민족적 차별감정이란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출12:38의 표현은 결코 이스라엘 자손을 따라 이집트를 떠나는 이방인들에 대한 인종 차별적 언사가 아님을 먼저 밝힐 필요가 있다. 그러나 민11:4에 있어서 히브리어 낱말 ףספסא (‘아사프수프’)가 주는 뉴앙스는 약간 다르다. 이들은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이방인으로서, 자기들이 품고 있는 탐욕을 이스라엘 자손 무리에게까지 번지게 한 장본인들이다. 따라서 민수기 저자는 이들을 가리켜 출12:38의 ב, (‘에레브’)와는 달리, 썩 좋지 않게 들리는 ףספסא (‘아사프수프’)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민11:4의 이 표현은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얼마든지 ‘어중이떠중이’ 내지는 이와 유사한 류의 우리말로 번역할 수 있다고 본다.
모세와 아론의 중대한 잘못 (민수기 20:1-13)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해달라는 모세의 간곡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오히려 진노하시며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허락하지 않으신다 (신3:23-26). 아론 뿐만 아니라 모세까지도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은 므리바에서 일어난 한 사건 때문이다. 도대체 어떤 사건이었기에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 대하여 크게 진노하시고 이 위대한 영도자들의 가나안 입경을 막으셨는가?
지명을 빌어 ‘므리바’ 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사건은 민수기 20장에 기록되어 있다. 마실 물이 없어서 시작된 이 사건 외에도 식수로 인한 불만과 그에 따른 조처는 출애굽기 15:22-25 (마라에서), 출애굽기 17:1-7 (맛사 또는 므리바에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출애굽기 17:1-7의 기록과 민수기 20:1-13의 기록을 동일한 사건으로 혼동하는 사람도 있는데, 사실 두 사건은 별개의 것이다. 전자는 ‘신’ (ןי) 광야를 떠나 르비딤에 도착하여 (출17:1) 발생한 사건에 대한 기록이요, 후자는 ‘찐’ (ן) 광야의 가데스에 이르렀을 때 (민20:1) 거기서 발생한 시건을 기록한 것이다. 또 출애굽기 17장에서는 ‘호렙산의 반석을 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지만, 민수기 20장에는 ‘그 반석에게 말하여 (히브리어 동사 רבד) 물을 내게 하라’는 하나님의 지시가 있다.
이처럼 장소와 세부 사항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자들이나 성경 독자에게 오해와 혼동이 있는 것은 우선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 서로 다른 지명인 ‘신’ (ןי)과 ‘찐’ (ן)을 다같이 ‘신’으로 음역하여 혼동을 불러일으켰고, 둘째는 출애굽기와 민수기에 다같이 ‘므리바’ (이는 단순히 ‘다툼’이라는 뜻임)라는 이름이 나오기 때문이며, 마지막으로는 이 메마른 광야에서 40년 방황하는 동안 수없이 있었을 법한 식수 사건을 지나치게 단순히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 민수기 20:1-13에 기록된 사건을 별도로 떼어 낼 때, 왜 하나님이 크게 진노하셨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는 물로 인하여 불평하는 백성이 보는 앞에서 단지 ‘바위에게 말함으로써’ 물을 내게 하시고 또 그 일로 영광을 받고자 하심이었다 (8절). 그러나 모세가 취한 조치는 하나님의 의도에 따른 구체적인 지시를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모세는 불평하는 백성에게 분을 발하며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고 말하면서 자기 지팡이로 그 반석을 두 번 친다. 물론 물은 솟아 나왔다.
이 과정에 있어서 모세와 아론에게 절대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었던 것이 결코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진노와 열정은, 아무리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결과일지라도, 하나님의 의도와 지시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단순히 자기의 기분에 이끌려 하나님의 영광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할 때, 결국 하나님의 분노를 산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므리바에서 모세와 아론의 실수는 그들 본인에게 치명적인 것이었다. 성경은 여기저기서 이 사실을 상기시킨다 (민20:12, 24; 27:14; 신32:51; 시106:32 등).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통한 구원 계획에 대하여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고 하면서 열심히 간한 베드로에게 떨어진 예수님의 대답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였다 (마태16:21-23). 하나님을 믿는 자가 이처럼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자기의 열성과 분노를 따라 행동할 때, 그는 얼마든지 ‘사탄’의 경지로도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홀로 사는 민족 (민수기 23:9)
한때 고독을 즐긴다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으나, 실상 인간은 누군가의 말대로 사회적 동물인지라 고독을 싫어하는 존재라고 하겠다. 그렇지 아니하고야 어찌 죄수를 일반 사회와 격리시키는 감옥이 형벌의 장소가 될 수 있겠으며, 그중에서도 독감방에 두는 것이 중한 형벌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서 고독 내지 고립은 때때로 지적 및 정신적 성장에 아주 중대한 요인이 됨을 경험하게 된다.
구약 성경을 통하여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실중의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립 내지 격리이다. 일찌기 하나님이 아브라함더러 그가 태어나 자랐던 갈대아 우르 땅을 떠나라고 명하신 일은 달리 보면 아브라함을 그의 혈연 및 지연적 뿌리로부터 격리시키고자 함이었다. 아브라함은 순순히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자신의 뿌리를 끊어버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지시에 따르는 새로운 삶의 과정에 들어간다. 그의 아들 이삭은 아버지의 독특한 삶의 자세 때문에 자칫 희생이 될 뻔했던 위기를 겪은 바 있으며 (창세기 22장), 나이 마흔이 되도록 장가를 가지 못하고 아버지 아브라함의 조처를 기다려야만 했다 (창세기 24장; 25:20). ‘들에서 배회하는’ (창24:65) 이삭의 모습은 그의 고독을 대변해주는 듯하다.
야곱의 일생 역시 그의 고립 과정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쌍동이 형 에서와의 마찰로 사랑하던 부모와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야곱, ‘에서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만 외삼촌 집에 피하여 있으면 곧 사람을 보내어 야곱을 불러 오겠다’(창27:44-45)는 어머니 리브가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20년 험한 세월을 객지에서 보내야만 했다. 그뿐이던가? 딸 디나의 일로 주변 거민들을 더욱 경계하며 살아야만 했던 일 (창세기 34장), 더 나아가서 야곱은 애지중지하던 아들 요셉마저 잃게 되어 그의 슬픔과 고독은 극에 달하게 된다: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창37:35). 그는 자그마치 20년동안 요셉이 죽었다고 믿으면서 속아살게 된다.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요셉의 삶 역시 고독의 과정을 보여준다. 열 일곱의 꽃다운 나이에 형들에게 팔려 먼 타국으로 노예가 되어 끌려가는 요셉, 애매한 누명으로 인한 수년간의 감옥 생활 등은 그의 고독과 고난을 잘 설명해준다. 요셉은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고 애굽 여자와 결혼하여 자식을 얻은 다음에야 고의 고독을 어느 정도 삭힐 수가 있었다. 그러기에 첫 아들을 낳고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고 고백하며 그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불렀던 것이다 (창41:51). 하지만 그의 고독은 잠시 잊혀졌을 뿐이지, 영원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요셉은 죽음에 임박하여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고 친족들의 다짐을 받은 것이었다 (창50:25).
이스라엘 자손이 처음으로 민족다운 형태를 이룬 것은 그들이 모세의 영도하에 애굽을 빠져나와 광야에 이르렀을 때였다. 애굽에서 약속의 가나안 땅에 이르는 가장 가까운 길은 ‘블레셋 길’이라고 불리웠던 시나이 반도 북쪽 지중해변의 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이 가까운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광야 길로 그들을 인도하신다 (출13:17-18).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타민족과 접촉하여 충돌(전쟁)하기 전에, 그들을 별도로 고립된 장소에 모아서 특별한 훈련을 시키고자 하셨던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의 40년 광야 생활은 그들이 하나의 선민으로서 발돋움하는데 필연적인 기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일찌기 메소보다미아의 브돌 사람 (신23:4) 발람은 모압왕 발락의 부름을 받고, 광야에 진을 친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하러 산에 오른 적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자기 입에 주시는 말씀 외에는 한 마디도 할 수 없다’는 자신의 말대로, 발람은 이스라엘 자손을 높은 곳에서 바라보며 말하기를 “이 백성은 홀로 처할 것이라. 그를 열방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고 하였다 (민23:9). 어찌보면 발람의 이 예언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의 특성을 한 마디로 가장 적절하게 나타내준 표현이라고 하겠다.
발람이 지적한 바, 이스라엘 민족의 고립성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손 곧 유대인의 지난 2000년 역사 가운데서도 잘 입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은 지구 위 어디를 가든지 현지에 사는 족속과 어울리지를 못한다. 겉으로는 어느 사회에든지 잘 적응하여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도 오르고 왠만한 경제력도 갖추는 것 같지만, 내면적인 세계에 있어서는 철저히 타민족에의 동화를 거부하고 자기들의 종교 전통과 문화 유산을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고 고집하며 사는 것이 유대인의 특성이라고 하겠다.
소수 민족으로서 자신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절대 다수 민족에의 동화를 거부할 때 간혹 생기는 불행한 일이 바로 미움과 질시와 더 나아가서는 핍박 및 민족의 집단 학살이다.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유대인처럼 이러한 비극을 강도깊게 당한 다른 민족이 없다는 사실은 바로 이웃에 동화되지 못하고 자신의 것을 고집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생활 방식을 영위해나가는 그들의 근성이 얼마나 뿌리깊은 것인지를 잘 드러내준다고 하겠다.
이러한 유대인의 고립성은 어느정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끌어내어 광야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주변 이방 민족의 삶과 구별되는 ‘거룩한 삶’을 요구하셨다. 그리하여 광야에서 성막을 세우라는 명령을 내리시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들이 지켜 행할 율법을 주신다. 하나님은 당시 우상 숭배가 만연하고 도덕적으로 부패하였던 세대에 이스라엘 자손을 택하셔서 따로 불러 내시고 그들에게 독특한 율법을 주시어서 주위의 타민족과 구별되는 거룩한 삶을 살라고 명하신 것이다.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레19:2)는 명령은 비단 광야 생활을 다룬 레위기의 주제일 뿐만이 아니라, 구약 성경 전반에 걸쳐 심도깊게 흐르는 주요 사상중의 하나이다. 후기 왕국 시대에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형식에만 치우친 ‘거룩함’을 신랄하게 비난하신다. 하루하루의 삶에 아무런 반영없이 지나치게 가식적이고 종교화된 ‘거룩함’은 하나님이 뜻하시는 ‘거룩함’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는 ‘외식, 가증’이라는 것이었다.
지난 2000년간, 아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퍼지기 전부터 이미 유대인들은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자신들의 독특한 생활 방식을 통하여 주위 민족들에게 색다른 깊은 인상을 심어주고 좋건 나쁘건 간에 큰 영향을 미쳐온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도 여전히 유대인은 지상 어느 민족보다 더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소유하며, 타민족의 구설수나 미움의 대상으로서 쉽게 오르내림을 보게 된다. 오죽하면 일찍부터 ‘반유대 감정’이라는 표현이 서구 사회에 퍼졌겠는가.
유대인 역사의 독특성은 간접적이나마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 계시며,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공상이나 허구가 아닌 진정한 사실임을 입증해준다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유대인은 역사의 마지막 시점까지 ‘열방 중의 하나로 간주되지 아니하고 홀로 처하는’ 민족으로 남을 것이다. 유대인을 선택하시어 그들을 격리시킨 것은 역사의 주인이신 조물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일이기에 그들의 독특성이나 모남이 우리 이방인들에게 기분나뿐 일로 간주되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일찌기 이스라엘 민족을 열방으로부터 구별하여 내시고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은 역사의 마지막 시점에 다시금 그들을 부르시고 모으셔서 그들을 위한 대대적인 구원 작업을 펼침으로써 또 한 번 큰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러기에 발람은 고백하기를 “나는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고 하였다 (민23:10).
하나님의 후회에 관하여 (민수기 23:19)
성경 독자들이 던지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은 후회하시는가, 그렇지 않은가?’이다. 개역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후회하지 않으신다’는 주장은 대표적으로 민수기 23:19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발람의 입을 통하여 나온 이 말은 많은 성경 독자들을 당혹하게 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후회하시는 경우를 몇 번 씩이나 접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 보는대로 하나님이 후회하시는 경우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창6:6)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신32:36)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고 그 종들을 인하여 후회하시리니 곧 그들의 무력함과 갇힌 자나 놓인 자가 없음을 보시는 때에로다.”
(삼상15:11)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삼상15:35)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로 이스라엘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삼하24:16 = 대상21:15)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 곁에 있는지라.”
이제 상기한 구절들을 히브리어 차원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창6:6의 ‘한탄하다’는 동사형 ם을 번역한 것이다. 이는 동사 םחנ의 니팔형에 해당한다. 마찬가지로 삼상15:11, 35; 삼하24:16 (= 대상21:15)에서도 동사 םחנ의 니팔형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신32:36의 ‘후회하다’는 동사형 ם을 번역한 것으로서, 이는 동사 םחנ의 히트파엘형에 해당한다. 한편 민23:19에서는 신32:36과 동일한 히트파엘형 ם이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민23:19의 ‘하나님이 후회하지 않는다’고 하는 주장과 ‘하나님이 후회하셨다’는 다른 구절들 사이에 ‘후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만 두고 볼 때, 별 차이점이 없음을 알게 된다. 다만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히브리어의 םחנ과 우리말 ‘후회’가 주는 뉴앙스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히브리어로 성경을 읽는 것보다는 우리말로만 읽을 경우에 오해의 소지가 더 많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 서로 상반되는 주장으로 보이는 구절들에 대하여 전후문맥을 가지고 그 이해를 위한 접근을 시도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실제로 홍수 직전 사람들의 죄악상을 보고 땅에 사람 지으셨음을 슬퍼하셨고,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일을 한탄하셨고, 다윗 때에 백성에게 재앙 내리신 일을 마음아파 하셨다. 이상의 기록들은 모두, 구약 성경에서 자주 그러하듯이, 마치 피조물인 인간에 대하여 기술하듯이 (anthropomorphism, 신인동형론), 하나님에 대하여 묘사한 것들이다. 성경 기자들은 하나님을 마치 아무런 감정이 없는 로보트인 양 묘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민23:19에서 의도한 바는 다르다. 발람은 절대자로서의 하나님의 속성을 언급하고 있다. 민23:19-24에서 강조하는 중심 내용은 이스라엘의 선택과 지위에 대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섭리이다. 하나님은 피조계를 다스리시고 섭리하심에 있어서 후회하심이 없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에는 변함이나 후회하심이 없다. 아마도 민수기 23:19의 발언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문구는 신약 성경 로마서 11:29의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가 아닌가 한다.
도피성과 대제사장의 죽음 (민수기 35장)
살인 행위는 피를 흘리는 일이기 때문에 반드시 피흘림으로써 갚도록 되어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9:5-6 참조). 그런데 일부러 죽인 것이 아니고, 실수하여 살인한 경우에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 중에 도피성 제도가 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약속의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 도피성을 두어 실수로 살인한 자들을 보호하도록 하게 하는 제도이다. 도피성은 어디서든지 쉽게 도달할 수 있도록 교통이 좋은 곳에 위치하여야 한다 (신명기 19:3 참조). 그리고 실수로 살인한 자들을 영접하여 그들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
도피성에 피하여 죽음을 면하게 된 살인자는 우선 회중의 판결에 넘어간다. 그리하여 그가 실수로 살인한 것이 판명되면, 그는 다시 도피성에 돌려 보내져서 거기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그는 도피성 안에서는 보호를 받을 수 있으나, 도피성 밖으로 나가는 순간부터 일체의 보호 권리를 상실하고 만다. 따라서 피살자의 가족이나 친척이 그 살인자를 도피성 밖에서 발견하고 원수를 갚을 경우 이는 정당한 행위로 간주되어 전혀 법적 제재를 받지 아니한다 (민수기 35:22-27).
이 살인자가 도피성을 빠져 나와 안전하게 고향으로 돌아가서 살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있다. 그것은 바로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이 죽게 될 경우’이다 (민수기 35:25, 28). 이스라엘에서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당대의 책임을 맡은 대제사장은 오직 한 사람 뿐이었다. 이 오직 한 사람,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이 죽어야만 도피성에 갇혀 나갈 수 없는 비운의 살인자가 그 성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설명한 도피성 제도는 우리 인간의 진정한 모습을 잘 그려주고 있다고 하겠다. 인간은 마치 실수로 살인한 자와도 같다. 살인 자체는 분명히 죽음을 면치 못하는 죄이다. 그러나 이 엄중한 죄가 애초에 본인의 의도로 저질러지지 않았다는 데에 그에 대한 형벌을 재고할 필요성이 있게 된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의 원죄가 모든 인류에게 전가되었다는 신학적 설명은 왠지 속시원한 설명같아 보이지 않는다. 그의 죄를 온 인류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좀 억울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류의 책임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아담의 범죄를 통하여 세상에 들어온 죄의 종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 5:12 참조). 그리고 죄의 값은 결국 죽음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인간의 입장은 실수로 살인하여 죽음의 위험에 처해 있는 자의 입장과도 유사하다고 하겠다.
하나님은 이들 죽음에 직면한 인간에게 율법을 주시었다. 율법은 마치 도피성과도 같이 그 안에 피하러 들어온 사람을 보호하는 구실을 한다. 그러나 율법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어서, 그 보호 범위를 벗어나는 자를 죽음에서 구해낼 수 없으며, 그리고 보호받으러 그 안에 들어온 자일지라도, 진정 그의 문제를 해결한다기 보다는, 그를 임시로 죽음에서 보호할 뿐이지, 결국은 그의 자유를 빼앗는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 안에는 진정한 자유가 없다. 율법 안에 사는 한, 인간은 자신의 죄를 늘 기억하게 되며 (로마서 3:20), 율법이 제공하는 ’보호‘라고 불리우는 부자유 속에서 평생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도피성에서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찾을 수 없듯이, 율법 안에서는 죄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이 있을 수 없다. 율법은 일시적인 보호만을 제공해줄 뿐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대제사장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문제가 쉽게 해결된다는 점이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임)의 죽음이 인간의 죄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여 온전한 자유를 주는 것처럼. 예수의 죽음은 율법에 갇힌 인간을 풀어준다. 진정한 자유를 그에게 준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머물고자 고집하고 있다. 거기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자 안간 힘을 쓴다. 율법도 ‘하나님의 의(義)’임에는 틀림이 없다 (로마서 3:21). 그러나 그것은 ‘대제사장의 죽음’이 있기까지 인간을 죽음에서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이제는 이미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 도피성을 나와도 안전한 때가 이른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너무나 오랫 동안 도피성 (=율법)에 머물러 있으면서, 도피성 밖에는 죽음이 있다는 강박 관념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죽었으므로 이제는 안전하다는 ‘복음’을 믿으려 하고 있지 않다. 이들은 아직도 도피성의 노예로 안주(安住)하고자 하는 것이다. 유대인은 이제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죽으신 것과 또 이 일을 통하여 그들이 이제까지 안주해온 도피성 곧 율법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율법이나 또는 특정 계명에 안주하고자 하는 경향은 유대인 뿐만이 아니라 일부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나치게 제도화된 교회의 틀에 묶여서 교인 노릇하는 이들은 도피성에 갇혀있는 자와 다를 바가 없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 복음 8:32).
6. 신명기 난해 구절
“그 말씀” 1996년 12월호 원고. 김 경 래
십일조에 대하여 (신명기 12:6-19; 14:22-29; 26:12-15)
십일조에 대한 모세 율법의 규정은 레위기 27:30-33과 민수기 18장, 그리고 신명기 12, 14, 26장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언뜻 보기에 이 기록들은 서로 어긋나거나, 아니면 서로 다른 종류의 십일조를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이에 대한 의견도 많고 오해도 많다. 그러면 이 기록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십일조에 대하여 생각해보도록 하자.
우선 레위기 27:30-33에 십일조에 대하여 짤막하게 언급된 내용을 살펴 보도록 하자. 레위기의 부록인 27장은 전체적으로 서원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서원물로서는 사람 (1-8절) 자신을 비롯, 생축 (9-13절), 집 (14-15절), 밭 (16-25절) 등을 들고 있다. 27장 26절 이하 33절까지에서는 세 가지 특별한 조항을 들고 있다. 첫째, 생축의 첫새끼인데, 그것은 이미 여호와의 것이므로 서원물로 쓰일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26-27절). 둘째로, ‘아주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거룩하기 때문에, 사람, 물건 할 것 없이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아주 바친 것’이란 표현은 히브리어 ‘헤렘 (םרח)’을 번역한 것으로서, 그 존재를 죽이거나 불에 살라서 완전히 소멸시켜야 하는 것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서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을 치기 직전에 그 성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헤렘’으로 선언한다 (여호수아 6:17-19). 셋째가 십일조에 대한 규정이다. 본문에서는 ‘땅의 소산과 가축중 그 십분일이 여호와의 성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농사와 목축을 주업으로 하던 당시 사람들로서는 땅의 소산과 가축이 그 전체 소득이 되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이들의 전체 소득 십분일이 자기 것임을 여기서 처음으로 밝히신 것이다.
따라서 레위기 27장 전체를 통하여 우리는 사람이 서원하여 바친 것들과 더불어, 첫 태생, 헤렘, 십일조는 하나님께 거룩한 것이므로 사람이 그것을 건드릴 수 없음을 배우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의 것이다. 천지의 ‘주재’ (=소유주) 되시는 하나님께서 (창세기 14:19 참조) 이처럼 우리에게 주신 것의 일부만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심은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에 대한 자신의 최소한의 소유권을 주장하시는 행위라고 간주할 수 있다.
선지자 말라기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말라기 3:8-9)고 외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하나님의 이러한 주장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십일조는 사람이 과연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느냐 아니하느냐에 대한 좋은 시금석이 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십일조가 자신의 것인만큼 그것을 자신의 의사대로 쓰실 권리가 있다. 민수기 18장은 과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자신의 소유인 십일조를 어떻게 쓰셨는지에 대하여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이 바치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주라고 명령하셨다 (18:21). 레위인은 모든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하나님의 회막에서 봉사하였기 때문이다.
레위인은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특별히 성막에서의 봉사를 위하여 구별된 지파이다. 그들에게는 특정한 기업이 분배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위한 생업 활동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수기 18장에서는 전체적으로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돌아갈 댓가 (=응식, 應食)를 설명하고 있다. 대부분의 성물 (聖物)이 제사장에게 돌아가는 반면, 십일조만은 레위인에게 주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레위인은 그 십일조중의 십일조를 다시 제사장에게 드려야 한다.
민수기 18장에서는 백성에게 십일조를 내라는 명령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스라엘 백성이 바친 십일조를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문제를 다룰 뿐이다. 따라서 민수기 18장에 언급된 십일조가 자원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법적 명령에 의한 것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그러나 ‘거제 (擧祭)로 드리는 십일조’ (24절)라는 표현을 통하여 볼 때, 여기서 말하는 십일조는 자원에 의하여 바쳐졌을 기능성이 크다 (‘거제’는 히브리어로 ‘트루마’인데, 문자적으로 ‘들어 올린 것’이란 뜻이며, 본문에서는 ‘헌물’의 뜻으로 쓰였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십일조를 강요하지 아니하시고, 자원하여 헌물로 바치는 것을 원하심을 엿볼 수 있다. 이렇게 하여 모아진 십일조는 그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성막에서 수종드는 레위인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후에 하나님의 이러한 뜻이 제대로 실천에 옮겨지지 아니하자, 뜻있는 지도자들은 강권력을 발동하여 이를 실천에 옮긴다. 히스기야왕은 대대적 종교 개혁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칭찬을 들은 왕이다. 그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무를 재정비하고, 그들의 봉사 활동에 지장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백성에게 명을 내려, 그들의 댓가를 주도록 하였다 (역대하 31:4-19). 포로 이후 시대의 느헤미야 역시 이 일이 제대로 실천에 옮겨지지 아니 함으로써 종교상 문제가 발생하자, 백성과 언약을 세우고 십일조를 거두어 레위인에게 주도록 하였다 (느헤미야 10:37-38; 12:44-47).
신명기는 전체적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예배의 중심지가 설정된 후에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광야에서와는 달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곳’ (12:5, 11, 14, 18, 21, 26; 14:23, 24, 25 등 신명기 여러 곳에 이 표현이 나옴)에서 희생 제물을 드리며, 거기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또 그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며 즐길 것 등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제사장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이 거룩하다고 확산하여 가르쳐 주며, 하나님께 드리는 성물을 일반 백성도 먹을 수 있도록 기회를 넓혀 준다.
십일조에 관한 신명기의 기록은 12:6-19; 14:22-27; 14:28-29; 26:12-15에 산재하여 있다. 레위기 27장에서 모든 십일조는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어서 거룩하다고 규정한 반면에, 신명기에서는 다른 여러 제물과 더불어 십일조 역시 각자가 좋은 뜻으로 사용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민수기 18장에서 헌물로 바쳐진 십일조는 레위인에게 일한 댓가로 줄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반하여, 신명기에서는 십일조를 떼는 사람들더러 레위인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는 형편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최소한의 소유권인 십일조를 특정인에게만 돌리신 것이 아니라, 이제는 모든 백성이 그 혜택을 누리고 즐길 수 있도록 가르치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서 십일조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과 상치되는 것도 아니요, 또한 레위인에게 십일조를 일한 댓가로 주시겠다고 한 약속이 취소된 것도 아니다.
신명기에서는 소득의 십분일을 떼어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하여 두 가지 경우로 가르쳐 주고 있다. 첫째로 각 사람이 매년 자기 소득의 십분일을 떼어 가지고,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곳’으로 가서 거기서 그 십일조를 가족과 더불어 먹으며,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면서 이를 즐기는 것이다. 이때 자기 동네의 레위인을 저버리지 말 것을 가르치고 있다. 레위인에게는 분깃이나 기업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족이 먹고 누릴 수 있는 십일조에 대한 사항은 신명기 14:22-27과 12:6-19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 개역 성경의 번역상 오류를 하나 지적하고 넘어 가고자 한다. 14:22에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는 “십일조를 떼어”라고 수정하여야 한다. 여기서 필자가 ‘떼어’라고 번역한 낱말은 ‘열’을 뜻하는 히브리어 명사를 동사화한 것이다. 그리고 이 동사는 십분일을 ‘떼다’ 또는 ’갈라내다‘라는 뜻이 된다. 여기서 십분일을 드린다는 의미는 결코 내포되어 있지 않다.
둘째로 14:28-29과 26:12-15의 기록에 의하면, 매 3년 째의 십일조는 각자가 이를 떼어 성문에 내놓고,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나누어 주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하나님께서는 가난하고 외로운 자들을 위하여 이처럼 명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이렇게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에게 복을 베풀겠다고 약속하신다.
첫 번 째의 경우 반드시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곳’에서 이를 시행하여야 한다. 자기 동네나 집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조건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곳’, 다시 말해서 성전이 서는 곳으로 십일조를 가져와 거기서 이를 먹고 즐기라 함은 다분히 예배적 요소를 의미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레위기 27:30). 그래서 “십일조를 먹으며.....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신명기 14:23)고 말할 수 있기도 하다.
현대 우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상황은 신명기에서 그리고 있는 상황과 가장 비슷하다고 하겠다. 비록 그것이 예루살렘의 성전이라는 특정의 장소 개념에 있지는 않지만, 성전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요한 복음 2:20-22 참조)를 중심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창세기 14장과 28장, 그리고 레위기 27장에서 가르치는 원리 원칙을 근거로 하고, 신명기에서 가르치는 구체적 실천 방법을 토대로 하여 현대 교회의 십일조 방법론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자 한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다. 우주 만물이 모두 하나님의 것이되 하나님께서는 십일조를 통하여 자신의 최소한의 권리를 주장하고 계시는 것이다. 오늘은 과거와는 달리 산업의 형태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경제 유통 구조가 돈이라고 하는 하나의 상징에 의존하기 때문에, 성경의 원칙에 근거를 두되 기술적으로 약간 다른 방법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농업 사회에서 한 해에 한 차례 십일조를 뗀 데 반하여, 우리는 모든 소득에 대하여 매월 또는 매주 단위로 십일조를 뗄 수 있으며, 그리고 물품이 아닌 돈으로 십일조를 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성전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여 예배할 때에 미리 준비한 십일조를 거두어, 그 돈으로 교회가 다 같이 즐기며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배우며, 자기 생업을 갖지 아니하고 하나님 일에 전념하는 이들을 보살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교회가 다 같이 즐기며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배운다 함은, 교회의 제반 예배 및 전도 활동 및 애찬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운용될 십일조는 매 3년 중 2년으로 하기 보다는, 현대의 상황을 고려하여, 모든 십일조 중 삼분이로 정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리고 매 3년 째의 십일조를 다 떼어 가난한 이와 외로운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였으니, 다시 오늘의 실정에 맞게, 모든 십일조 중 삼분일을 구제 사업과 교회 일꾼들을 위하여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구제 사업에 있어서 믿는 이웃이 첫 번 째 대상이 됨은 두 말 할 나위도 없다. 한 가지 덧붙여서, 오늘 교회의 일꾼 (소위 말하는 교역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레위인이 객과 고아 및 과부와 더불어 보살핌의 대상에 속해 있다는 사실은 재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의 많은 수가 구제 사업의 명목은 있되 실제 운용면에 있어서 매우 빈약하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십일조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쓰지 못하면서 어떻게 다음과 같이 기도할 수 있겠는가: “내가 성물을 내 집에서 내어 가난한 자와 외로운 자들에게 주기를, 주께서 내게 명하신 명령대로 하였사오니, 내가 주의 명령을 범치도 아니하였고 잊지도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참된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십일조를 떼어 이 일을 행하였사오니, 원컨대 하늘에서 저희를 보시고 한국 교회에 복을 주옵소서” (신명기 26:13-15 참조).
참고적으로 십일조에 대한 성경 최초의 기록은 창세기 14장에 담겨 있다. 아브람(후에 아브라함으로 개명)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그를 영접하였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소개된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제사장다운 말투로 아브라함을 축복하였다: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이 축복의 말을 들은 아브라함은 노략품 중 좋은 것을 골라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모든 사람들을 대표한다. 그는 제1호 선민 (選民)인 것이다. 그리고 왕 겸 제사장인 멜기세덱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한다 (시편 110편; 히브리서 7장 참조). 그리스도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분이다. 그러나 그는 선택 이상의 자격을 갖추신 분으로서,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에 계시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백성은 영원하신 제사장,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축복을 받으며, 또 그에게 자기 모든 이득의 십분의 일을 감사함으로 드린다. 이것은 모세 율법 이전의 사건으로서,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 하겠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드린 십일조는 율법의 요구에 의한 복종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감사의 표현인 것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주재’라고 번역된 낱말은 히브리어로 ‘코네’인데, ‘얻다’ 또는 ‘구입하다’를 뜻하는 동사 ‘카나’에서 왔다는 점이다. 따라서 명사 ‘코네’의 일반적인 뜻은 ‘사는 이’, ‘구입자’, ‘소유주’가 된다. 그래서 ‘천지의 코네’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다 소유하신 분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하늘과 땅을 소유한다고 할 때, 그 안에 있는 것도 모두 포함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멜기세덱은 이 진리를 아브라함에게 가르쳐 주었으며, 아브라함은 그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자기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렸을 것이다. 그의 깨달음과 깨달은 진리의 실천은 거기서 멈춘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물품은 네가 취하라’는 소돔왕의 제의를 깨끗이 거절한다. 불의한 인간을 통하여 부자가 되기보다는, 천지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더욱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천지의 코네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손을 들어, 불의한 자의 재물을 결코 취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이었다.
천지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진정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는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올바른 재물관이 세워질 것이다. 그는 모든 소득에 대하여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감사의 표시를 할 줄 아는 사람이요, 재물 때문에 불의와 타협하는 일을 멀리 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는 십일조를 통하여 우주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을 간접적으로나마 선포하는 것이다.
성경 기자의 설명문구 (신명기 13장)
본래 히브리어 성경 사본이나 인쇄본에는 인용을 나타내는 어떠한 부호도 없고, 또 간단한 추가 설명이나 덧붙이는 말등을 위하여 필요한 괄호 같은 부호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 번역자이나 주석가들에게 혼동을 초래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사실이 대부분의 경우 별 큰 문제를 초래하지는 않지만, 때로는 그릇된 번역이나 해석을 통하여 번역본만으로 성경을 읽는 독자들에게 더 큰 혼란을 초래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그 예를 신명기 13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명기 13장은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라고 꾀는 ‘선지자나 꿈꾸는 자’ (1-5절), ‘가족이나 친구’ (6-11절), ‘성읍’ (12-18절)이 있으면 그들을 반드시 죽이라는 명령이 기록되어 있다. 먼저 신명기 13장중 2, 6-7, 13절에 대한 우리말 개역 성경 본문을 아래에 옮겨보기로 하자. 잘 알다시피 개역 성경에는 문장 부호가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다.
(2절)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 (6-7절) 네 동복 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너와 생명을 함께하는 친구가 가만히 너를 꾀어 이르기를 너와 네 열조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 곧 네 사방에 둘러 있는 민족 혹 네게서 가깝든지 네게서 멀든지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있는 민족의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할지라도 / (13절) 너희 중 어떤 잡류가 일어나서 그 성읍 거민을 유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한다 하거든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직접 인용문과 간접 인용문이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설명 문구가 아무런 표시없이 삽입되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위의 개역 본문에 직접 인용문 부호를 달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아마 독자들 중에는 ‘이르기를’ 다음부터가 꾀는 자들의 말에 해당한다고 보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표준 새번역도 2절에서는 이런 견해를 반영하였으나, 6-7절과 13절에서는 약간 변화를 가미하여 번역을 시도하였다. 사실 이러한 난점은 성경 기자가 설명하고자 덧붙인 말에 해당하는 문구만을 괄호 안에 묶어두면 쉽게 해결된다. 2절에서는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을, 6-7절에서는 ‘너와 네 열조가 알지 못하던’과 ‘네 사방에 둘러 있는 민족 혹 네게서 가깝든지 네게서 멀든지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있는’을, 그리고 13절에서는 ‘너희가 알지 못하던’을 괄호로 묶어두면 이 본문은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가나안 땅에서의 유월절 (신명기 16:1-8)
유월절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출애굽기 12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특별히 이집트 땅에서 지킨 최초의 유월절에 대한 설명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주석은 「설교자를 위한 성경 연구」 1996년 9월호에 실린 필자의 “유월절의 제정과 그 의미”, 24-36쪽을 참조할 것). 출애굽기 12장에 따르면, 이스라엘 회중은 정월 10일에 각 사람이 양이나 염소 중에서 흠 없고 일년 된 수컷을 취하여, 그달 14일까지 간직하였다가 그날 해질 때에 그 양을 잡는다. 그 피는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날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못하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어야 한다. 먹을 때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어야 한다. 그 고기 중에서 남은 것은 아침까지 남겨 두지 못하고 만일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태워버려야 한다. 이것이 이집트에서 지킨 최초의 유월절이다.
신명기 16:1-8 역시 유월절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유월절이기 때문에 이집트에서 지킨 최초의 유월절 행사와는 내용면에서 차이점이 있다. 우선 이집트에서는 각 사람의 집에서 지켰으나,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서는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 (2, 5-7절)으로 제한하고 있다.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진 이후, 그곳이 바로 유일한 유월절 행사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절에 ‘양과 소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 유월절 제사를 드리라’고 한 구절에 대하여 ‘양이나 염소’만을 잡도록 한 출애굽기의 유월절과의 차이점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지만, 이는 하나의 오해로 보인다. 여기 ‘양’ (ןא, 쬰)과 ‘소’ (רקב, 바카르)는 각기 ‘양이나 염소’ 그리고 ‘모든 소떼’에 대한 통칭이다 (「그 말씀」 1995년 10월호에 실린 필자의 “신약성경 번역상의 몇 가지 문제점”과 「그 말씀」 1996년 10월호에 실린 필자의 “레위기 난해 구절”을 참조할 것). 3절에 “유교병을 그것과 아울러 먹지 말고 칠일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아울러 먹으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것’에 해당하는 2절의 ‘양과 소’는 1월 14일 밤에 먹는 유월절 어린 양의 고기 외에도 무교절 기간 1주일 내내 먹는 고기를 포함하는 것이 분명하다. 1월 14일 밤에 먹는 ‘유월절 희생을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라’는 지시 (4절; 출애굽기 12:10; 23:18; 34:25 참조) 또한 이 사실을 입증해준다고 하겠다.
신명기 16장에서는 유월절 희생물로서 양이나 염소 외에 소를 추가시킨 것이 아니다. 2절의 ‘양과 소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 유월절 제사를 드리라’는 문구 중에서 ‘유월절’은 1월 14일 저녁만이 아니라, 한 주간 계속되는 보다 넓은 의미의 유월절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민수기 28:16-25에서 언급한 바 번제와 속죄제 등이 아니라, 역대하 30:22-24; 35:7-8에 언급한 바 화목제물을 가리키는 듯하다. 화목제물은 하나님의 몫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에게도, 바치는 사람에게도 각기 몫이 있어서 모든 사람이 즐길 수 있는 제사이다. 이에 반하여 4절 (“또 네가 첫날 해 질 때에 제사드린 고기를 밤을 지내어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며”)과 5-7절 (“유월절 제사를.....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가 애굽에서 나오던 시각 곧 초저녁 해 질 때에 드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그 고기를.....”)에서는 특별히 1월 14일 밤에 먹는 고기만을 언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히스기야와 요시야 왕 때 지킨 유월절 행사는 신명기 16:2-3의 기록을 반영해준다고 하겠다: “히스기야는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 통달한 모든 레위 사람에게 위로하였더라. 이와 같이 절기 칠일 동안에 무리가 먹으며 화목제를 드리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 감사하였더라.....유다 왕 히스기야가 수송아지 일천과 양 칠천을 회중에게 주었고 방백들은 수송아지 일천과 양 일만을 회중에게 주었으며 성결케 한 제사장도 많았는지라” (역대하 30:22-24). “요시야가 그 모인 백성들에게 자기의 소유 양떼 중에서 어린 양과 어린 염소 삼만과 수소 삼천을 내어 유월절 제물로 주매, 방백들도 즐거이 희생을 드려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주었고 하나님의 전을 주장하는 자 힐기야와 스가랴와 여히엘은 제사장들에게 양 이천 육백과 수소 삼백을 유월절 제물로 주었고” (역대하 35:7-8). 더욱이 역대하 35:7과 35:8에서 ‘유월절 제물’에 해당하는 낱말이 단수형 חספ (‘페쌐’)이 아닌 복수형 םיחספ (‘페쌐힘’)으로 기록된 사실도 신명기 16:2의 ‘유월절’을 1월 14일 저녁만이 아니라, 한 주간 계속되는 보다 넓은 의미의 유월절로 이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신명기 16:1-8의 기록에서 논의되어야 하는 다음 문제로는 7절의 וּ (‘우비샬타’)라는 문구가 있다. 여기 나오는 동사 לשׁב (‘바샬’)은 출애굽기 12:9에서 ‘삶다’는 뜻으로 번역되었다 (개역과 표준 새번역). 만약 신명기 16:7에서도 이 피엘형 동사를 ‘삶다’는 뜻으로 이해할 경우 출애굽기 12:9에 기록된 지시와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신명기 16:7에 기록된 지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그 고기를 삶아 먹고.....”) 의견 충돌을 보이게 된다.
히브리어 동사 לשׁב (‘바샬’)은 ‘익다’는 뜻을 가진다. 과일이나 곡식이 ‘익는’ (또는, ‘익은’) 것을 가리킬 때도 이 동사가 쓰이지만 (창세기 40:10; 요엘 3:13), 보통은 음식이 ‘익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따라서 이 동사의 피엘형 ל (‘비셸’)은 일반적으로 ‘(음식을) 익히다’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출애굽기 12:9의 경우 ‘물에 익히는’ 것이므로 얼마든지 ‘물에 삶다’로 번역할 수 있다. 그러나 역대하 35:13에서는 이 동사가 ‘불에’라는 문구와 결합되어 있어서 (שׁאב חספה ולשׁביו, ‘와예바슐루 하페쌐 바에쉬’) 자연히 ‘불에 삶다’로는 번역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개역과 표준 새번역 모두 이를 “유월절 양을 불에 굽고”로 번역하였다. 이처럼 역대하 35:13은 출애굽기 12:9와 신명기 16:7 사이에 아무런 모순이 없음을 잘 입증해준다.
이상의 관찰을 통하여 우리는 유월절과 관련하여 신명기 16:7과 출애굽기 12:9에 다 같이 등장하는 히브리어 동사 לשׁב (‘바샬’)을 ‘익히다’라는 뜻으로 번역할 때 어떠한 문제의 소지도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명기 16:7에서 이 동사를 개역과 표준 새번역 다같이 ‘(고기를) 구워(서)’로 번역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 이유도 없다.
7.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난해 구절
도피성에 대한 개역 성경의 오역 (여호수아 20:6, 9)
히브리어 성경은 때때로 그 간략한 묘사 방식으로 말미암아 주석가나 번역자의 오해를 사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문맥과 내용에 밝고 구약 성경을 비롯 고대 히브리어 문헌의 특징을 이해하는 이라면 이런 문제는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 우리말 개역 성경은 여호수아 20:6, 9에서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이 문제란 번역자의 이해 부족으로 일어난 오역을 말한다. 먼저 이 문제의 개역 본문을 옮겨보기로 하자.
(20:6) “그 살인자가 회중의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나 당시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가 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그 성읍의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 (20:9) “이는 곧 이스라엘 모든 자손과 그들 중에 우거하는 객을 위하여 선정한 성읍들로서 누구든지 부지중 살인한 자로 그리로 도망하여 피의 보수자의 손에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며 그는 회중 앞에 설 때까지 거기 있을 것이니라.”
여호수아 20장은 도피성에 대한 기록이다. 도피성에 대하여는 이미 「그 말씀」 1996년 11월호에서 다룬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다만 번역상의 문제점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개역의 6절과 9절 (특히 6절)을 통하여 우리는 실수로 살인한 자가 도피성을 나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두 가지 조건을 보게 된다. 첫째는 ‘그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는’ 경우요, 둘째는 ‘당시 대제사장이 죽는’ 경우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이해는 민수기 35:24-25 (“회중이 친 자와 피를 보수하는 자 간에 이 규례대로 판결하여, 피를 보수하는 자의 손에서 살인자를 건져 내어 그가 피하였던 도피성으로 돌려 보낼 것이요, 그는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거기 거할 것이니라”)의 기록과 상충한다.
도피성에 피하여 죽음을 면하게 된 살인자는 우선 회중의 판결에 넘어간다. 그리하여 그가 실수로 살인한 것이 판명되면, 그는 다시 도피성에 돌려 보내져서 거기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 (민수기 35:22-27). 그는 재판을 위하여 임시로 나오는 것뿐이지 아주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가 도피성을 빠져 나와 안전하게 고향으로 돌아가서 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바로 대제사장이 죽게 될 경우이다 (민수기 35:25, 28).
이처럼 도피성에 대하여 보다 상세히 언급한 민수기의 기록은 실수로 살인한 자가 언제 도피성을 나와 자유롭게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 있는지 분명히 말하고 있다. 게다가 여호수아 20:6, 9의 히브리어 본문을 우리말 개역에서 번역한 것처럼 해석하여야 할 언어학적 이유도 없다. 다만 여호수아 20장에서의 도피성에 대한 묘사가 매우 간략하기 때문에, 도피성에 대한 전체 문맥을 잘 모르는 이라면 얼마든지 6, 9절을 오해할 소지도 있다고 본다. 이 두 절에 대하여 공동 번역이나 표준 새번역은 올바른 번역문을 가지고 있다. 아래에 표준 새번역의 여호수아 20:6, 9 본문을 옮겨보기로 한다.
(20:6) “그 살인자는 그 성읍에 머물러 살다가,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은 다음, 그 당시의 대제사장이 죽은 뒤에야 자기의 성읍, 곧 자기가 도망 나왔던 성읍에 있는 자기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20:9) “이 성읍들이,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나 그들 가운데 살고 있는 외국인 가운데서, 누구든지 실수로 사람을 죽였을 때에, 그 곳으로 피하여 회중 앞에 설 때까지, 죽은 사람에 대한 복수를 하려는 사람의 손에 죽지 않도록 하려고, 구별하여 지정한 도피성이다.”
다락방과 발을 가리우는 행위 (사사기 3:15-25)
왼손잡이 사사 에훗이 모압 왕 에글론을 은밀히 만난 장소는 ‘서늘한 다락방’이었다 (사사기 3:20). 사사기 3:20, 24, 25의 ‘다락방’ 또는 ‘다락’은 ‘알리야 הילע’라는 히브리어 낱말을 옮긴 것이다. 본문 이해를 위하여 먼저 ‘알리야’라고 불리는 고대 근동 지역의 건축 구조물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에 대하여는 초막과 관련하여 「그 말씀」 1994년 9월호에서 “초막에 얽힌 이야기” (93-100쪽)라는 제목하에 서술한 바도 있다.
‘알리야 הילע’는 어근 ‘알라 הלע’ (=‘올라가다’)에서 파생한 명사형 낱말로서, ‘지붕 위에 지은 건물 내지는 방’, 즉 ‘옥상 주택’ 내지는 ‘다락집’을 뜻한다. 이스라엘은 여름철 뜨거운 햇볕이 가옥 구조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다. 과거 건축 재료도 변변치 못하고, 전기를 이용한 냉방 설비는 전혀 꿈꾸지도 못했을 무렵, 여름철 가옥의 벽들은 아침부터 햇볕을 받아 온기를 담고 있다가 오후 시간부터는 방안으로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게 됨으로써 집안에 있는 것이 오히려 밖의 그늘아래 있는 것보다 견디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비록 강한 햇살 때문에 집밖에서 햇볕 아래 오래 활동하는 것이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오후에 가끔 부는 시원한 바닷 바람은 옥외에서 활동하는 사람을 달래주기도 한다. 이런 기후로 인하여 과거에 사람들은 지붕 (이스라엘 집들의 지붕은 강우량이 적은 관계로 일반적으로 평평하였다) 위에 초막을 들이든지 아니면 바람이 통할 수 있는 방을 들여서 여름철 오후 시간 이후에 더운 아래의 집안보다는 바람이 잘 통하고 그늘도 있어서 시원한 이곳 ‘옥상 주택’ (=‘알리야’)에서 보내는 경우가 있었다.
이와 같은 ‘옥상 주택’ 또는 ‘다락집’ (우리 한글 성경에 대개 ‘다락방’으로 번역됨)은 성경에서 귀한 손님이나 높은 신분의 사람들과 연관되어 자주 등장한다. 엘리야 선지자는 시돈의 사르밧이라는 마을로 가서 그곳의 한 과부 집에 머물 때 이와 같은 다락집에 묵고 있었다 (열왕기상 17:19). 수넴의 한 부잣집 부부가 엘리사를 위하여 준비한 방 역시 담 위에 증축한 ‘알리야’였다 (열왕기하 4:10). 아하시야왕은 지붕 위의 초막 (알리야) 난간에서 떨어져 결국은 죽게 되었다 (열왕기하 1:2).
이러한 기록들을 통하여 볼 때 지붕 위의 방은 일반적으로 부유층의 전유물인 듯한 인상을 준다. 하긴 가난한 사람들의 경우 좋은 건축 재료를 살 수가 없어서 집지붕이나 담이 그 위에 별도의 구조물을 받치기에는 부적합하였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다락집을 가지고 있어서 높아진 부잣집들 사이에 위치한 가난한 집은 시원한 바람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환경적인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부자들을 경고하지 않았을까?: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불공평으로 그 다락방 (알리야)을 지으며.....자에게 화 있을진저” (예레미야 22:13). 가난한 사람들이 하루 종일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수고하며 제대로 쉬지 못하는 반면에 부자들은 오후 시간이면 서늘한 지붕 위의 초막에서 한가하게 낮잠이나 자는 모습을 얼마든지 연상해볼 수 있다.
에훗이 모압왕 에글론을 칼로 찔러 죽인 곳은 바로 이러한 다락집 안에서였다. 에훗은 모압왕을 죽인 후 그 방문을 닫았고, 그 후 에글론의 신하들은 그 방문이 닫힌 것을 보고 그 안에서 왕이 ‘발을 가리우고’ 있을 거라고 간주하여 감히 문을 열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사사기 3:20-25). 히브리어로 ‘발을 가리우다’라는 표현은 하나의 완곡어법 (euphemism)으로서 ‘긴 겉옷 자락으로 하체를 가리고 똥을 누는’ 동작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표현은 사무엘상 24:3에 또 한 번 나타난다: “길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그 발을 가리우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뜰이나 건물 1층이 아닌 옥상 주택, 곧 ‘알리야’ 안에 용변보는 시설물이나 물건이 있다는 점이 어색하기는 하나, 아마 모압인의 왕이라는 높은 신분이기에 특별히 마련된 공간이나 용변기가 있었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알리야’의 기능상 가장 중요한 특색은, 무더운 여름철 더위를 피하게 하며 남들로부터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편히 쉬거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시원한 공간이라는 점이다.
전차 부대와 싸워 이긴 보병 (사사기 4:7, 13; 5:20-22)
구약 성경은 각종 전쟁에 대한 많은 기록을 담고 있다. 대부분 여호와 하나님의 간섭과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백성이 승리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이스라엘 땅의 지리적 환경을 통하여 이해에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살펴보고자 하는 전쟁은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로 활동하던 때 있었던 가나안 사람과 이스라엘 자손 사이의 전투이다 (사사기 4-5장).
이 전투에서는 가나안 왕 야빈의 군대 장관인 시스라가 지휘하는 철병거 900승 및 그의 모든 군대와 (4:13 참조) 드보라와 바락이 임시로 소집하여 이끄는 일만명의 이스라엘 장정들이 (4:6, 10, 14 참조) 대결한다. 오늘날의 개념으로 바꾸어 말하자면, 전차 900대를 갖춘 기갑 부대를 주축으로 한 대규모 정규군과 향토 예비군 수준에 불과한 일만명의 보병이 싸움을 벌인 것이다. 삼척동자라도 전자의 승리가 뻔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전투는 후자의 완전한 승리로 끝을 맺는다.
하나님은 이 전투가 있기 이전에 이미 드보라를 통하여 바락에게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 병거들과 그 무리를 기손강으로 이끌어 바락에게 이르게 하고 그를 바락의 손에 붙일 것’을 말씀하셨다 (사사기 4:7). 이스르엘 평야 서쪽에 위치하여 하나의 산맥을 이루고 있는 갈멜산 (길이 32km, 최고폭 14km, 최고봉의 높이 546m) 아래 평야 지대로 흐르는 강이 있는데, 이를 기손이라고 부른다. 현재는 경지 정리의 결과로 조그만 또랑으로 남아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겨울 홍수 때만 되면 물이 범람하여 넓은 강줄기를 이루고 주위 평야 지대는 완전히 진창으로 변하고 만다.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마침내 ‘시스라는 모든 병거 곧 철병거 구백 승과 자기와 함께 있는 온 군사를 이방 하로셋에서부터 기손강으로 모은다’ (4:13). 전차 부대를 이끈 시스라로서는 이스라엘 보병이 집결해 있는 다볼산 (4:6) 같은 산악 지대 보다는 전차전에 유리한 기손 강 근처의 평지를 택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군대나 말이 마실 수 있는 물도 충분하였을테니 기손강 일대는 최적지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은 여름 건기중에나 또는 겨울 우기중에라도 비오지 않는 화창한 날이여만 충족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땅에서는 겨울 우기라고 해서 날마다 비가 내리는 것은 아니다). 추측컨대, 시스라가 기손강 일대에 자신있게 배진한 것으로 보아, 때는 겨울철 어느 날, 비가 내리지도 또 내릴 기미도 없던 날이 아닌가 한다.
바야흐르 시스라의 대규모 전차부대와 바락의 보병이 접전할 무렵에 갑자기 큰 비가 내려 기손강 일대는 완전히 진창이 되었을 것이다. 드보라와 바락의 보병 일만명이 가나안왕 야빈의 대규모 전차 부대를 능히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사사기 4:7,13; 5:21; 시편 83:9) 그때가 마침 겨울 우기여서 기손강에 진을 친 시스라의 군대가 급작스럽게 내린 비로 말미암아 진창이 된 이스르엘 평야에서 꼼짝달싹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이런 추측은 드보라와 바락의 승전가 중 “기손강은 그 무리를 표류시켰으니 이 기손강은 옛 강이라 내 영혼아 네가 힘 있는 자를 밟았도다” (5:21)라는 표현으로 잘 설명된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하여 기상과 천문 모든 것을 이용하시는 분이시다.
입다의 딸은 번제물이 되어 죽었나 (사사기 11:34-40)
사사기 11:37-40에 대한 한글 개역 성경과 공동 번역 및 표준 새번역 등의 번역문은 번역 과정에서 역자가 나름대로의 특정한 해석을 본문에 가미시켜 번역함으로써 원문의 의도를 왜곡시킬 수 있는 위험한 요소를 담게 된 대표적인 예이다. 필자는 이 주제를 이미 「그 말씀」 1995년 7월호 (195-200쪽)에서 상세히 다룬 바 있다. 여기서는 우리말 번역본들의 부당성만 지적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사사기 11:37-40에서 우리말 개역과 표준 새번역 공히 입다의 딸이 죽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러한 해석적 입장을 번역문에까지 반영하였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 본문중에 입다의 딸이 죽는다는 표현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 고대 역본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개역에서는 “죽다”라는 단어를 조그만 글자로 삽입시킨 것이다. 그러나 표준 새번역과 공동 번역에서는 이런 식의 구분도 없이 아예 입다의 딸이 죽은 것으로 간주하여 이 단어를 번역본문 안에 그대로 반영시켰다.
입다가 서원대로 자기 딸을 죽여서 번제로 바쳤을 거라는 해석은 우리 한글 번역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초대 교회 이후 많은 기독교 주석가들은 그만두더라도, 주후 1세기의 유대인 사가 요세푸스 역시 사사기 11장의 내용을 재기술하면서 입다의 딸이 이때 죽은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유대 고대사 5권 7장). 그러나 이러한 견해가 한글 번역문에서 히브리어 원문에도 없는 ‘죽는다’는 단어를 세 번씩이나 삽입시키는 것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한글 성경은 이 구절들을 달리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다. 사사기 11장을 통하여 볼 때, 어쩌면 입다의 딸이 이때 번제물이 되어 죽은 것이 아니요, 아버지의 서원을 이루고자 평생 처녀로 보냈을 가능성도 크다. 성경을 번역할 경우 아무리 그럴듯한 해석이라도 함부로 본문에 그 내용을 삽입시켜서는 안된다.
삼손의 수수께끼 풀이 일정 (사사기 14:12-18)
사사기 14장에서는 삼손과 블레셋의 첫 번 째 충돌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이 충돌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수수께끼 사건은 12-18절에 담겨 있는데, 그 날짜 계산에 있어서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으므로 여기서 밝히고자 한다.
12절에 의하면 삼손이 내는 수수께끼를 푸는 기간으로 ‘잔치하는 칠 일’이 주어졌다. 14절에서는 ‘그들이 삼 일이 되도록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였다’고 하였고, 이어 15절에 의하면 ‘제 칠 일에 이르러 그들이 삼손의 아내에게’ 협박하여 말하기를 “너는 네 남편 을 꾀어 그 수수께끼를 우리에게 알리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와 네 아비의 집을 불사르리라 너희가 우리의 소유를 취하고자 하여 우리를 청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냐”고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6절에서는 삼손의 아내가 수수께끼 답을 알아내고자 삼손을 조르는 광경이 묘사되었고, 이어서 17절에서는 기록하기를 (개역) “칠일 잔치할 동안에 그 아내가 앞에서 울며 강박함을 인하여 제 칠일에는 그가 그 아내에게 수수께끼를 풀어 이르매 그 아내가 그것을 그 민족에게 고하였다”고 하였다. 마침내 블레셋 사람들은 ‘제 칠일 해지기 전에’ 수수께끼의 답을 삼손에게 말한다 (18절).
이상에서 보듯이 15절과 16-17절 사이에는 일종의 모순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15절에 의하면 블레셋 사람들은 6일 내내 조용히 있다가 제 7일이 되어 다급해지자 삼손의 아내를 위협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17절에 의하면 삼손의 아내는 7일 내내 남편을 조른 것이 아닌가. 애초부터 그녀에게 협박이 없었다면 왜 그녀는 7일 내내 삼손을 졸라야 했을까? 우리는 여기서 날짜 계산상의 문제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사기 14:12-18의 본문을 우리말 개역이나 표준 새번역으로 읽을 경우 이와 같이 날짜 계산에 있어서 어색함을 보게 된다. 이 본문을 히브리어로 읽는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생각을 쉽게 떨구어 버릴 수 없다.
이러한 문제점에 대한 해결 방안으로서, 공동 번역은 15절의 본문에서 ‘제 칠 일에 이르러’라는 문구 대신에 ‘나흘째 되던 날’이라고 읽고, 그대신 각주에 <히브리 성서에는 “칠일째 되던 날”>이라고 밝히고 있다. 물론 공동 번역의 ‘나흘째 되던 날’이라는 문구는 단순한 추측이나 임의적인 읽기는 아니다. 표준 새번역의 각주에서도 밝히듯이, 이러한 읽기는 칠십인역과 시리아어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 두 고대 역본에 나오는 15절의 ‘나흘째 되던 날’은 성경 원본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 옛날의 번역자들 역시 사사기 14:12-18 본문에서 날짜 계산상의 어려움을 감지하였기 때문에, 15절의 ‘제 칠 일에 이르러’라는 본래의 문구를 전체 문맥 (특별히 14절의 ‘삼 일’)과 조화시킨다는 취지하에 ‘나흘째 되던 날’이란 문구로 바꾼 것이 아닌가 한다.
어떤 주석가들은 ‘3’ (שׁלשׁ)과 ‘6’ (שׁשׁ) 두 숫자의 유사점을 들어, 14절의 ‘3일’을 ‘6일’로 고쳐 읽는 것을 선호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아무런 사본학적 증거도 없을 뿐더러, 설령 그렇게 고쳐 읽는다 하더라도 17절을 설명하기가 여전히 쉽지 않다. 이런 문제점에 대한 해결 방안으로 이들 주석가들 중 어떤이는 14-15절이 후에 삽입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G. F. Moore).
또 다른 해석은 삼손의 아내가 단순히 호기심 때문에 7일 내내 남편을 졸라 수수께끼의 답을 알려달라고 하다가 대답을 얻지 못하였으나, 제 7일에는 블레셋 사람들의 협박으로 인하여 더욱 강경하게 요구하여 마침내 답을 얻어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C. F. Keil & F. Delitzsch). 이런 해석은 본문에 아무런 변경을 가하지 않고 설명한다는 이점이 있긴 하지만, 삼손의 아내가 단지 호기심 때문에 7일 내내 졸라댄다는 설명은 왠지 석연치 않은 감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맛소라 성경의 히브리어 본문을 다시금 주의깊게 읽음으로써 사사기 14:12-18에 우리가 생각하던 날짜 계산 상의 문제가 없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필자는 아래에 개역의 번역문을 기초로 하되 거기에 약간의 변화를 가하고 필요상 본문 안에 괄호 부호를 삽입하여 15-17절에 대한 새로운 번역문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로써 독자는 사사기 14:12-18의 히브리어 본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5바야흐르 제 칠일이 되었다. (한편 그들은 삼손의 아내에게 “너는 네 남편을 꾀어 그 수수께끼를 우리에게 알리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와 네 아비의 집을 불사르리라. 너희가 우리의 소유를 취하고자 하여 우리를 청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냐”고 말하였었다. 16삼손의 아내는 그의 앞에서 울며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치 아니하는도다. 우리 민족에게 수수께끼를 말하고 그 뜻을 내게 풀어 이르지 아니하도다”고 하였다. 삼손이 그녀에게 대답하기를, “보라. 내가 그것을 나의 부모에게도 풀어 고하지 아니하였거든 어찌 그대에게 풀어 이르리요” 하였다. 17그녀는 칠일 잔치 동안에 그 앞에서 울어댔다.) 제 칠일이 되어 삼손은 자기 아내의 압력에 못견뎌 결국 수수께끼를 풀어 알려주었다. 그녀는 그것을 자기 민족에게 고하였다.
15절의 “바야흐르 제 칠일이 되었다”와 17절의 “제 칠일이 되어”라는 문구는 둘 다 동일한 히브리어 문구 יעיבשׁה םויב יהיו를 옮긴 것이다. 이 동일한 두 문구 사이에 있는 내용 전체를 그간의 상황을 설명하는 문구로 이해하여 그것을 괄호로 묶어두면 우리는 사사기 14:12-18의 날짜 계산에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런 식의 이해를 돕고자 15절의 주동사를 대과거 시제로 번역하였다 (‘말하였었다’). 이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첫 날 부터 삼손의 아내를 협박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리고 17절에서 개역 (‘울며 강박함’), 표준 새번역 (‘울면서 졸라댔다’), 공동 번역 (‘매달려 울면서 조르는 바람에’) 등 우리말 번역본들과는 달리,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이들 두 동사가 서로 떨어져 각기 다른 문장의 동사로 사용되었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 경우 필자의 ‘울어댔다......압력에 못견뎌’라는 번역은 히브리어 본문을 그대로 반영해준다.
이러한 해결책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석연치 않은 점은 14절에 왜 ‘6일’이 아니고 ‘3일’이냐는 점이다. 이것 때문에 앞서 말한 것처럼 칠십인역과 시리아어역은 15절의 ‘제 7일’을 ‘제 4일’로 바꾸어 조화를 꾀한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가능한 추측은, 아마도 제3일이 지나면서부터 초조해진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아내를 더 협박하였는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모압 여인 룻과 유력한 사람 보아스 (룻기)
룻기의 저자는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인 보아스를 소개하기를 ‘유력한 자’ (개역)라고 한다 (룻기 2:1). 이는 ליח רובג שׁיא (‘이쉬 기보르 하일’)이라는 히브리어 표현을 번역한 문구인데, 표준 새번역은 ‘재력이 있는 사람’으로, 그리고 공동 번역은 ‘유력한 재산가’로 번역하고 있다. 히브리어 명사 רובג (‘기보르’)와 ליח (‘하일’) 모두 폭넓은 의미 영역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표현을 번역하기란 쉽지가 않다. 따라서 이 표현의 의미는 언어학적인 고찰보다는 오히려 보아스의 가문을 살펴봄으로써 그에 대합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보아스는 유다 지파 사람으로서 그의 아버지는 살몬이요, 살몬의 아버지는 나손이요, 나손의 아버지는 아미나답이다 (룻기 4:18-20). 아미나답은 모세의 형이자 최초의 대제사장인 아론을 사위로 삼는다. 아미나답의 딸이자 나손의 누이인 엘리세바가 아론의 아내가 된 것이다 (출애굽기 6:23). 나손은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를 나올 때 유다 지파의 족장으로 선발된 사람이다 (민수기 1:7; 2:3; 7:12, 17; 10:14). 나손은 이집트에서 나온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광야에서 죽었을 것이다.
살몬에 대하여는 구약 성경에서 이름과 가족 관계 외에 언급하는 바가 없다. 단지 신약 성경을 통하여 그가 여리고의 기생 라합과 결혼하여 보아스를 낳았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마태 1:5). 그가 광야에서 죽지 않고 가나안 땅에 들어와 라합과 결혼한 점을 미루어 그는 이집트에서 태어나지 않고 광야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혹시 그는 여호수아가 보낸 두 정탐 (여호수아 2:1-24) 중의 하나가 아닐까? 여호수아서에 두 정탐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살몬은 유다 지파 족장을 지낸 사람의 아들로서 얼마든지 정탐으로 뽑힐 가능성이 크며, 또한 라합과 결혼한 점을 통해 보더라도 여리고에서 그녀가 자기 목숨을 살려준 일을 계기로 그후 그녀와 결혼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승승장구하는 여호수아 군대를 따라 서진하여 마침내 베들레헴에 정착하였을 것이다. 집안 조상들의 배경이 이 정도라면 보아스는 얼마든지 ‘유력한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룻은 모압 여자이다. 룻이 속하는 모압 족속은 그들의 조상인 모압에게서 유래되는 명칭이다. 모압은 소돔 고모라가 망한 후 죽음을 모면한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롯 자신의 큰 딸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창세기 19:37). 모압 사람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떡과 물로 그들을 길에서 영접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그들을 저주케 하려 하였었다’ (신명기 23:4). 에돔 사람이나 애굽 사람의 삼대 후 자손은 여호와의 총회에 허용된 데 반하여 (신명기 23:7-8), 모압 사람은 롯과 그의 작은 딸 사이에 태어난 벤암미(창세기 19:38)의 후손인 암몬 사람과 더불어 ‘십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못박음으로써 (신명기 23:3), 십대 이후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도록 허용될 수 있는 사생자보다도 (신명기 23:2) 못한 대접을 받은 셈이다.
룻은 이러한 명령이 떨어진지 불과 네 세대도 지나지 않은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다. 물론 룻은 여자였기 때문에 남자 보다는 쉽게 여호와의 총회 곧 이스라엘 백성의 틈에 끼여 들어가기가 쉬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가 모압 사람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일 또한 간단한 일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압 여인 룻은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기 1:16)라는 굳센 다짐과 고백으로 여호와의 총회에 대한 그녀의 집념을 굽히지 아니하였다. 시아버지도 남편도 잃고 시동생도 없던 룻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가기를 바란 것은 결코 남자에 대한 애착 때문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보아스는 룻의 이러한 집념을 간파하고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룻기 2:12)는 말로 그녀를 축복할 뿐 아니라, 후에 친히 그녀를 아내로 취하여 자신의 축복을 현실화시킨다.
보아스와 룻의 이러한 관계는 후에 유대인 예수님과 로마인 백부장 사이에 있었던 일에서 그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여도 자기 하인이 낫겠다’는 백부장의 믿음을 기이히 여기시고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칭찬하신 예수께서는 연이어 말씀하시기를,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쫒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시었다 (마태 8:10-12).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많은 유대인들이 믿지 않고 버림을 당하는 반면 도리어 이방인 중에서 많은 이들이 메시야이신 예수를 믿어 구원에 이르리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을 택하신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을 또한 염두해두셨다. 아니, 이스라엘을 택한 그 일 자체가 바로 이스라엘 뿐 아니라 또한 이방인을 위한 구원의 문을 열어두기 위하심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선택에 있어서 시간적 한계선을 그어 둘 이유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은 예수께서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택함’이라기 보다는 ‘청함’이라고 표현함이 더 적절할 것이다 (마태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옛적에 보아스를 통하여 모압 여인 룻이 진정한 의미에서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유대인 이방인을 막론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과거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일과 메시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후로 이방 교회를 세우신 일은 결코 서로 대치되는 일은 아니다. 이러한 일은 모든 일을 순서대로 질서있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시간표에 의한 결과이다.
우리는 아직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나라의 본 자손들’ 곧 유대인들중 대부분이 자기들의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옛날 이방 여인으로서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와 ‘현숙한 여인’이라고 (룻기 3:11), 그리고 ‘외로운 시어머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라는 (룻기 4:15) 칭찬을 들었던 룻과 같이, 오늘날도 하나님께 신실한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본 백성 유대인의 칭찬을 들으며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시기의 대상이 될 것이다 (로마서 11:11.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8. 사무엘상하 난해 구절
사무엘은 레위 지파 사람 (사무엘상 1:1)
‘사무엘이 어느 지파에 속하는가’ 라는 질문에, 일반적으로 독자는 사무엘상 1:1에 근거하여 ‘에브라임 지파’라고 대답할 것이다. 사무엘상 1:1에서 이 책의 저자는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를 י (‘에프라티’) 라고 소개하고 있다. 우리말 표준 새번역은 이를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숩의 자손 엘가나라는 사람)’으로 번역함으로써, 엘가나와 사무엘 부자(父子)를 에브라임 지파 사람으로 규명하고 있다. 개역 성경과 공동 번역에서는 이를 ‘에브라임 사람’으로 번역하였는데, 이러한 번역 역시 표준 새번역과 똑같은 효력을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히브리어 낱말 י (‘에프라티’)는 구약 성경에 모두 합하여 다섯 번 출현한다. 먼저 길르앗 사람들과 에브라임 지파의 싸움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는 사사기 12:5과 북왕국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여로보암의 집안 배경을 기술하고 있는 열왕기상 11:26에서 이 낱말은 의심할 여지 없이 열 두 지파의 하나인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다는 의미로 ‘에브라임 사람’를 뜻한다. 그러나 다윗과 그의 조상 엘리멜렉을 소개하는 사무엘상 17:12과 룻기 1:2에서 이 동일한 히브리어 낱말은 ‘에브랏 사람’, 즉 ‘베들레헴이라고도 불리는 에브랏 (ת) 마을의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이 두 구절에서는 모두 보다 큰 지명 내지 지파 이름인 ‘유다’와, 그리고 ‘에브랏’의 다른 이름인 ‘베들레헴’과 (창세기 35:16-19; 48:7; 룻기 4:11 참조) 더불어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이라고 적고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사무엘상 1:1에서 히브리어 낱말 י (‘에프라티’)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밝히기란 그리 쉽지 않다. 앞서 언급한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이라는 문구와는 달리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 낱말은 베들레헴의 별칭인 ‘에브랏’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없다. 따라서 사무엘상 1:1의 ‘에프라티’는 ‘에브랏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
참고적으로 사무엘의 아버지가 살았다는 ‘라마다임소빔’은 유일하게 사무엘상 1:1에만 출현한다. 사무엘의 고향인 ‘라마다임소빔’은 사무엘상 나머지 전체에 걸쳐서 나오는 ‘라마’와 동일 명칭이다 (1:19; 2:11; 7:17; 8:4; 15:34; 16:13; 19:18, 22; 25:1; 28:3). 단순히 산봉우리와 같은 ‘높은 곳’을 가리키는 ‘라마’ (ה)라는 지명은 이스라엘에 흔한 이름으로서, 구약 성경에 기록한 바에 따라 대략 다섯 곳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각기 베냐민 지파에 속한 한 성읍 (여호수아 18:25; 사사기 19:13; 열왕기상 15:17, 21, 22; 역대하 16:1, 5, 6; 에스라 2:26; 느헤미야 7:30; 11:33; 이사야 10:29; 예레미야 31:15; 40:1; 호세아 5:8), 에브라임 산지의 한 성읍 (사사기 4:5), 납달리 지파에 속한 한 성읍 (여호수아 19:36), 아셀 지파에 속한 한 성읍 (여호수아 19:29), 길르앗의 한 성읍 (열왕기하 8:29; 역대하 22:6) 들이다. 사무엘상에 언급된 ‘라마’는 모두 위의 다섯 곳 중에서 ‘에브라임 산지의 한 성읍’을 가리킨다.
이제 사무엘상 1:1의 ‘에프라티’가 ‘에브라임 사람’을 뜻한다고 단정내리기 전에 사무엘의 족보를 추적하여 그의 출신 지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사무엘상 1:1에서는 엘가나의 조상을 여로함 (ם), 엘리후 (אוּהי), 도후 (וּח), 숩 (ףוּצ)의 순서로 거슬러 올라가며 소개하고 있다.
역대상 6장에 ‘사무엘’이라는 이름이 또 나타난다. 역대상 1-9장은 이스라엘의 족보를 다루고 있는데, 그중에서 6장은 레위 지파의 족보이다. 레위에게는 게르손과 그핫 (=고핫)과 므라리라는 세 아들이 있었다 (역대상 6:1). 이 세 아들중 아론과 모세의 조상도 되는 (출애굽기 6:18-20 참조) 그핫의 후손 가운데 사무엘이라는 이름이 있다 (역대상 6:28, 33, 34). 역대상 6:34-38에서 사무엘의 조상은 엘가나, 여로함, 엘리엘, 도아, 숩, 엘가나, 마핫, 아마새, 엘가나, 요엘, 아사랴, 스바냐, 다핫, 앗실, 에비아삽, 고라, 이스할, 그핫, 레위, 이스라엘의 순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소개되고 있다. 한편 6:25-27절에서 사무엘의 조상은 엘가나, 여로함, 엘리압, 나핫, 소배, 엘가나의 이름 순으로 열거되고 있다.
이제 사무엘에서 숩 (또는, ‘소배’)에 이르기까지 6대에 걸친 이 집안 계승자들의 이름을 표를 통하여 비교해 보기로 하자. 아래의 도표에서 보여주듯이 이름 표기상 비록 근소한 차이가 있긴 하지만 결국 같은 집안의 족보임이 분명하다.
삼상1:1
사무엘
엘가나
여로함 (ם)
엘리후 (אוּהי)
도후 (וּח)
숩 (ףוּצ)
대상6:34-35
사무엘
엘가나
여로함 (ם)
엘리엘 (לי)
도아 (וֹתּ)
숩(ףיּצ/ףוּצ)
대상6:26-27
사무엘
엘가나
여로함 (ם)
엘리압 (באָי)
나핫 (ת)
소배 (יוּצ)
이뿐만 아니라 사무엘에게 요엘과 아비야 두 아들이 있다는 기록에 있어서도 사무엘상 8:1-2과 역대상 6장 (28, 33절)은 서로 일치한다. 참고적으로 ‘다윗이 여호와의 집에서 찬송하는 일을 맡게 하여,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울 때까지 회막 앞에서 찬송하는 일을 행한’ 레위 사람들 중의 하나인 헤만은 사무엘의 손자요, 요엘의 아들이었다 (역대상 6:31-34).
이상의 족보 고찰을 통하여 사무엘은 레위 지파의 한 사람임에 틀림없음을 알 수 있다. 역대상 6:66에 의하면, 레위 지파의 한 가문으로서 사무엘이 속한 ‘그핫 자손의 몇 족속은 에브라임 지파 중에서 성을 얻어 영지를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호수아 21:4-5, 20 참조). 이 사실은 사무엘의 부친 엘가나가 레위인으로서 왜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살았는지 설명해준다. 이런 점에서 사무엘상 1:1의 י (‘에프라티’)는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사람’ (표준 새번역 참조) 이라는 뜻이 아니요, 단순히 ‘에브라임 지역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이런 결론을 바탕으로 필자는 사무엘상 1:1에 대하여 “에프라임 산지 라마타임 쪼핌에 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엘카나인데, 그는 에프라임 지역 주민으로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토후의 증손이요 쭈프의 현손이었다”라는 새로운 번역문을 권하고 싶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