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박경민글
어릴때부터 신문을 접했다.
친구들 집에 가 보면 신문이란 종자를 볼수가 없었다.
우리집은 신문이 쌓여 있었다.
도시락도 신문지로 둘둘말아 가방에 쑤셔
놓고 다녔다.
간혹 김치 국물이 새면 신문지가 먹어서 천만 다행이였다.
친구들은 보자기에다 묶어서 가져와 김치
국물이 줄줄샜다.
밥을 먹을때도 내동생과 나는 신문지를 펴놓고 먹었다.
신문지를 몇겹으로 해서 빳빳하게 딱지도 접고 종이 비행기도 접어 날렸다.
서천 개울에 나갈때는 신문지를 들고 나가 종이 배도 만들어 띄었다.
햇빛이 따가울땐 배트콩 마냥 뾰족하게 접어서 쓰고 다니기도했다.
신문은 그렇게 나와는 친숙한 존재였다.
영화 배우의 예쁜 사진도 오려서 모아 놓곤했다.
중학생이 막 되었을때 아버지께서 동아
일보 지국을 맡으셨다.
서울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는 마장동에서 양구가는 막차에 신문을 잔뜩 때려 싣고 도착하면 양구 터미널로 리어카를 끌고 나가
서 덩치큰 배달하는 사람이 신문을 받아서 끌고 오곤했다.
매일 밤이면 신문과의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생활 형편이 어려운 양구중고 학생들도 내 동창들도 동네 깡패같은 껄렁한 애들이 우리집 마당에 진을치고 있다가 각자 맡은 부수를 세어 갖고는 신문을 돌리러 나갔다.
내가 맡은 일은 각 면 단위 이장님댁, 면사무
소, 우체국, 단위농협, 각면의 초중학교로 신문을 돌돌 말아 누런 기름 종이에다 주소
를 써서 양구 우체국으로 가져가서 부치는 일이였다.
신문은 구문이 되어 그 다음날 도착을 하
곤 했다.
그래도 그나마 구문이라도 세상 돌아가는 정보를 알기에 신문이 도착 하기만을 눈이 빠져라 기다리기도 했다.
난 용돈이 궁하면 마루 한쪽편에 쌓여있는 구문을 내 힘에 들수있을 만큼 끓어안고는 중앙시장 두부 가게로 가져가 팔곤했다.
키로에 얼마인지는 몰라도 가게 아줌마는 신문을 짝짝 접어서 두부도 생선도 신문지
에 싸서 팔았다.
신문 배달이 끝나면 남는 신문은 구문이 되
어 폐지로 아버지가 한꺼번에 모았다가 어디
론가 누구에게 넘기시곤 했다.
하루는 중2때 담임 선생님께서 날 조용히 불
렀다. 집에 신문 남는거 있으면 1부만 가져
다 달라고 했다.
난 대답을 우렁차게 하고는 매일 아침이면 새 신문을 가방에 정성껏 접어 가져다 드렸
다.
아버진 정치 한다고 서울을 밥 먹듯이 다니
녔고 엄만 강남여인숙을 차려 눈코 뜰새없
이 집 치우고 하숙하는 군인들 밥 하느라 정
신이 없으셨다.
꼭두 새벽이면 중앙시장 뒷골목에 있는 두부
공장에 가서 두부를 사오는것 또한 내 일이
였다.
두부가 막 건져져 김이 모락모락 났다.
난 새벽에 일찍 일어나기 때문에 엄마의 바
쁜 일손을 도왔다.
내동생도 언니들도 오빠도 다 늦잠 꾸러기
들 이였다.
엄마가 수박을 한통 사다가 부엌 한쪽 귀퉁
이에 숨겨 놓으셨다.
난 밤에 몰래 일어나 부엌에 들어가 수박을 짤라 숟가락으로 벅벅 긁어 통째로 먹어치
웠다.
그래서 그만 새벽녁에 요에다 오줌을 싸버
렸다.
난 벌떡 일어나 내동생을 끌어다 눕히고는 신문 뭉치로 젖은 요를 꾹꾹 눌러 놓고는 문옆에서 쪼그리고 자는체를 했다.
내 동생은 바지도 안 젖었는데 오줌을 안 쌌다고 박박 우기고 난 모르는척 내슝을 까고 있었다.
그리하여 내 동생은 머리에 키를 쓰고 옆집 김천상회로 소금을 얻으러갔다.
하루는 엄마가 쌓여 놓은 신문이 자꾸 줄어
든다며 이상하다고 했다.
난 시치미를 뚝 떼고 책만 보는체 했다.
아버진 집에 계실때면 이 신문 저 신문을 뒤
적거려 오려서는 스크랩을 만들어 놓으셨다.
아버진 신문 지국장을 하시면서도 신문이 집에 차고도 넘치는데 다른 신문을 5개나 또 보셨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서울 작은아버지는
신문을 11개나 보신다고 하셨다.
역시 많이 배우고 똑똑하신 분들은 머가 달
라도 다르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스크랩 해 놓은것 중에는 서울 삼
촌이 신춘 문예에 당선돼 시인으로 등단해
신문에 기재된걸 붙여 놓으시기도 했다.
내가 나중에 작은아버지께 보여드렸더니 깜짝 놀라시며 귀한 자료라고 하셨다.
난 신문에 기재된 소설을 눈이 빠져라 읽었
다. 그래서 매일 매일 내용이 궁굼해 신문 더미가 도착해 미처 풀기도 전에 한장을 뽑
아 들고는 소설을 미친듯이 읽곤했다.
난 결혼을 했고 서울 살이를 시작할때에도 신문을 구독했다.
새벽이면 신문은 아파트 현관 앞에 놔져 있
었고 난 일어나면 신문 부터 뒤적이고는 제
목만 대충 훓어 보고는 애들 남편 아침을 준비하곤했다.
이사를 가도 신문도 따라 이사를 왔다. 신문은 나에겐 커다란 희망과 상상을 불러
일으켰다.
조중동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동아일보를 수년간 보다가 백화점 상품권을 준다며 아
파트 입구에서 현혹을 하길래 중앙일보로 바꿔치기 했다.
그렇게 또 수년간 중앙일보를 보는데 큰 딸
아이가 대학을 갔다.
대학생이 신문을 구독하면 반 값에 배달해 준다고 해서 한국경제로 갈아탔다.
큰아인 경제학을 전공하고 있기에 경제의 달
인이 되라고 한국경제를 보게 된것이다.
다행히도 신문 값이 반 값이니 횡재를 한 기분이였다.
큰아이가 졸업을 하고 직장을 다니자 이제는 대학생이 아니니까 신문 값을 제대로 받아야 한다는 전화가 왔다.
그리하여 둘째가 이대 대학원에서 석박사 과
정을 밟고 있으니 해당이 된다고 하여 도로 반값에 신문을 보고있다.
이젠 사실 신문이 필요없다.
인터넷에서 세상 돌아가는게 더 빠르다.
일 하라 집안 살림하랴 눈코뜰새없이 바쁜데 재활용 하러 나가는것도 일 이기에 사실 반
값이라고 하지만 티끌도 모으면 태산이 되지 않겠나,,,!!
그래도 난 티끌이 태산이 된다 하더라도 내 손으로 석유냄새 나는 신문지를 뒤적거리는
게 야릇한 쾌감을 얻기에 오늘도 바쁜 시간
을내서 신문을 흟어 보고있다.
그런데 옆집 손주 보러 광양에서 온 언니
는 딸의 아기를 봐주고있다.
내가 신문을 모아서 끌고 나가는것을 보고
는 신문 더미를 달라고 하셨다.
난 눈이 휘둥그레서 왜요,,??
했더니 사위가 고기를 좋아해서 하루가 멀
다하고 고기를 굽는데 신문지 깔고 구우면 기름도 안 튀고 냄새도 잡아 준다며 뺏다시
피 가져갔다.
그 뒤론 난 신문지을 차곡차곡 모아 옆집 언니한테 패스하는 재미로 산다.
아버지의 추억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유품이다.
아버지가 새벽부터 신문을 찾으면 난 벌떡
일어나 재털이랑 함께 신문을 갖다 드렸다.
아버진 성냥으로 불을 켜서는 담배에 붙이
시고는 재가 떨어지는것도 모르고 신문을 보셨다.
뒷장을 넘기시면 난 아직 다 안 봤다면서 담배 연기를 손으로 날리면 아버진 제목에 내용이 다 들어 있다고 하셨다.
난 어릴때부터 아버지를 좋아했다.
언니도 내 동생도 오빠도 아버지를 멀리
했다. 무슨 의논은 다 엄마하고 했다.
난 무슨 의논이든 아버지와 했다.
아버지가 장기 외출을 하셨다 오시면 그제
서 이것저것 케묻고 재잘거렸다.
엄만 내가 아버지를 닮았다고 구박을 했다.
아버지가 남긴 추억의 장을 넘겼다.
눈물이 쏟아져 젖을까봐 억지로 목으로 넘겼다. 난 아버지 유품을 누가 거들떠도 안 보길래 내가 보관하려고 가져왔다.
아버진 그러셨었다.
요즘 신문은 다 썩었다며 유신체제하에서
도 목소리를 냈는데 지금의 동아일보는 정
권의 앞잡이가 됐다며 혀를 차셨다.
신문 냄새에 아버지의 냄새가 배어있다.
《 박경민 프로필》
사상과문학으로 시인 수필등단
한국문인협회회원
세계시문학회회원
노원 강북 문인협회회원
23년 엄마달려 산문집출간
동인지 하나로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