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1392~1910)건국에서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519년 간에 걸쳐 27명의 왕이 있었다. 우리는 흔히 ‘태정태세문단세예성명중인명선’하고 외우고는 끝에 조나 종을 붙여 쉽게 이 시대의 왕들의 명칭을 외운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말하는 태조, 정종, 태종, 세종...등의 호칭은 원래 본인들은 들어보지도 못한 이름들이다. 그야말로 세상을 떠난 이후에 비로소 이름을 얻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이름들은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사용되는 호칭으로 묘호(廟號)라고 한다.
이 이름들은 왕의 재위시(在位時) 행적에 대한 평가인 동시에 추존하는 의미를 지닌다.
종묘란 역대의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셔두는 왕실의 사당이다.
종묘의 기원은 중국 순임금 때 시작되어 은나라, 주 나라 때까지는 각각7대조까지 모시는 7묘 제를 쓰다가, 명나라에 이르러 9묘 제로 바뀌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에 5묘 제를 쓰다가 고려시대에는 7묘 제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와서 다시 5묘 제를 사용하였다.
5묘 제를 쓸 경우 . 4대가 지나게 되면 영녕전(永寧殿)이라는 곳으로 신주를 모시도록 되어 있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 이를테면 시기가 뒤로 내려올수록 치적이 크다고 여겨지는 왕들은 4대가 지나도 옮기지 않도록 하는 관행이 늘어갔던 것이다. 조선초기의 경우 정전의 중앙에 시조(始祖) 격에 해당하는 인물의 신위 (추존한 4왕: 목종 익조. 탁조. 환조)를 모시고 서쪽과 동쪽에 번갈아 다음대의 왕의 신위를 모셨는데 이를 소목제도(昭穆制度)라고 한다.
이러한 종묘에 사용하게 되는 묘호(廟號)에는 일반적으로 조(祖)와 종(宗)을 끝 자에 붙여 사용하였다.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무열왕만이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고려시대에는 태조 왕건(王建) 이하 줄곧 사용하다가 원나라의 간섭이 심해진 이후는 쓰지 못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조종법이 후기까지 관철되었다. 그렇지만 연산군과 광해군만은 반정에 의해 축출됨으로써 왕자에게나 붙이는 ‘군(君)’의 호칭에 머물러야 했는데, 이는 왕으로써 인정을 받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반면에 덕종(성종의 생부), 원종(인조의 생부), 진종(정조의 양아버지), 장조(정조의 생부), 익종(헌종의 생부)등은 왕위를 누린 일이 없음에도 추존되어 왕의 대우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야말로 아들이 잘난덕에 죽어서 호강한 셈이라고나 할까. 그런가하면 조선시대에 살아보지도 못했으면서 조선의 추존 왕이 된 인물로는 이성계의 직계4대조가 있다. 목조, 익조, 탁조, 환조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 4명과 태조와 태종이 《용비어천가》의 ‘해동(海東)의 여섯용’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祖)와 종(宗)은 어떤 차이가 나는가? 이를 엄밀히 나누기는 어렵지만 창업(創業)을 한 왕(王)에게는 ‘조(祖)’자를 붙이고 수성(수성(守成))한 왕에게는 ‘종’자를 붙였다. 그 근거는 《예기(禮記)》의 “공(功)이 있는 자는 조(祖)가 되고 , 덕(德)이 있는 자는 종(宗)이 된다.”는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원칙적으로 격에 있어서 ‘조(祖)’와 ‘종(宗)’의 차이를 두지 않았지만 현실적으로는 ‘종’보다 ‘조’를 높게 받아 들였다. 조선 후기에 ‘종’에서 ‘조’로 맞바꾼 경우가 간간이 있었던 데서 이러한 점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27명의 왕 중 태조.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정조, 순조 등 7명만이 ‘조’자를 썼고, 왕 취급을 받지 못하였던 연산군과 광해군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종’자 묘 호를 사용하였다. ‘조’자 묘 호를 쓴 왕들을 살펴보자면 태조라는 칭호는 한 왕조를 세운 초대 왕에 대한 칭호로 흔히 쓰였다.
태조라는 묘 호는 주나라의 7묘 제도에서 중심 신위를 태조라고 하였고 이후 왕조를 건국한 왕 이를테면 북위, 송, 원, 명, 청의 경우 그 창업 왕을 모두 태조라고 불렀다.
태조가 창업군주에게 붙이는 칭호였다면 나머지 ‘조’자가 붙은 왕들은 중흥 군주로 인정을 받았거나 큰 국난을 극복하였거나 반정을 통해 즉위한 왕들이다.
세조는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된 비정한 인물이지만당대에는 대신들에게 눌렸던 단종의 왕권을 회복시켰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여 ‘조’자를 붙인 것으로 보인다.
선조와 인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극복하여 200년간 유지해온 사직(社稷)이 멸망할 위기에서 중흥을 꾀한 왕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선조는 원래 선종(宣宗)이었다가 추존(追尊)(광해군8년)되었다. 인조는 임진왜란 시 우리에게 은혜를 끼친바 있는 명나라를 받들고 금수의 나라인 청나라를 배격하는 것을 기치로 하여 반정을 함으로써 대의명분을 수호한 군주로 받들어졌다.
중종도 인조와 같은 반정으로 왕이 되었지만, 단지 성종의 직계왕통을 지켰다고 하여 굳이 ‘조’자 묘 호를 붙이지 않았다.
영조와 정조는 처음에 영종과 정종이었다가. 영조는 1889년(고종26) 정조는 고종 광무3년)에 가서 각각 추존 되었다. 순조도 처음에는 순종으로 묘 호가 정해졌다가 1857년(철종8)에서 순조로 추존 되었다.
이렇듯 ‘조’와 ‘종’을 나누는 기준은 애매 모호하여 묘호를 정하거나 고칠 때에 논란의 소지가 되었으며, 위의 사례와 같이 종에서 조로 바뀌는 경우가 나오게 된 것이다. 당시 ‘조’, ‘종’보다 격이 높은 것으로 인식되기는 했지만 그것이 엄정한 것은 아니고 당시의 정치적 형편에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었다. 적어도 순조가 세종보다 낫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은가?
청도신문 에 게제한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