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누가복음20:38p132)
오늘 말씀은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우리 일상의 문제중 하나를 함께 알아보고 설명절 함께 모였을 때 그리스도인으로 흔히들 나타날 수 있는 종교적인 갈등 중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제사문제에 대해서 말씀 나누고자 합니다.
기독교인이면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왜냐하면 제사가 죽은 조상을 숭배하는 우상적 행위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에서 분명히 밝히십니다.
너는 나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말라.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이 성경의 구절로 사실 조상에 대한 제사가 우상숭배로 여겨졌고 기독교는 그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기독교는 본래 조상에 대해 거부하는 전통을 가지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믿음의 선조에 대해 존경의 내용들이 많이 나오고 늘 성경은 부모를 공경할 것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조상에 대해 호의적이며 배움을 가지는 기독교가 왜 제사에 대해서는 조상에 대한 섬김으로 받을 수 없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조상이 죽으면 그 영혼이 존재한다는 생각과 그영이 남아이있는 가족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즉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의 여럿의 생각들을 보면 조상의 혼이 살아서도 후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과 정면으로 다른 이해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더라도
하나님은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죽은 영혼을 독립적인 개체로 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죽은 영혼이 살아있는 인간의 길흉화복을 주장하는 모습은 그리 바람직한 모습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죽은 조상이 죽어서도 살아있는 후손들의 삶을 지배한다 할 때 사실 그것으로 나오는 두려움으로 복받기 위해 제사를 드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가 산자를 괴롭히는 것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과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역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어느교회 장로님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장로님 집에는 달력이라는 개를 키우고 있었는데. 장로님 집에서 꽤 사랑 받고 자라는 개였답니다. 그게 부러웠는지 옆집에서 어느 날 토끼를 사와서 키웠답니다.
어찌나 사랑으로 키우는지 목욕을 시켜서 털도 뽀송뽀송하게 하고 마당에 귀여운 토끼집도 만들어 주고 목에는 빨간색의 이쁜 리본까지 달아주었더랍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장로님이 구역예배를 마치고 밤 늦게 집에 돌아왔는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옆집에서 그렇게 지극 정성으로 키우고 있던 토끼가 그만...
뽀송뽀송했던 새하얀 털은 흙으로 범벅이 되어있고 빨간 리본은 구석에 나가 떨어져 있고
마당에 있더랍니다.
장로님 생각에 '이건 분명 우리집 개의 짓이다!! 생각하고 옆집에서 알면 어떻하나? 걱정에
장로님 식구는 모두 회의끝에 장로님의 가족 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장로님 부부는 죽은 토끼를 목욕 시키고 아들은 리본을 씻어서 다리미로 다리고
딸은 목욕을 마친 죽은 토끼를 정성껏 드라이를 해 어느 때 보다 뽀송뽀송하게 하고.
그런다음 몰래 다시 옆집 토끼집에 놓아두었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아니나 다를까 옆집에서 난리가 난겁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습니다. 토끼가 죽은것을 발견하고 놀라는게 아니라 토끼가 토끼집에 있는다는 것으로 옆집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이유인즉슨..
그 토끼는 원래 그 전날 죽어서 가족들이 마당 옆에다가 묻어 주었는데.
죽은 토끼가 땅속에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완전 목욕재개를 하고 살아있는 것처럼 돌아왔으니 소스라치게 놀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출처] 개와 토끼의 시간 |작성자 옥경이
사랑하는 여러분 죽은 것이 우리 일상에 돌아와서 영향력을 미친다면 이처럼 힘든일이 없습니다. 차라리 내 인생은 내가 움직인다는 것이 더 낳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실 제사의 의식은 조상에 대한 공경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또 제사를 준비하며 가족들이 모두 모여 음식을 나누는 모습 참 으로 보기 좋은 모습입니다.
굳이 내가 믿음을 가졌다고 그들을 정죄하는 것도 그리 좋은 모습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중은 기독교 신앙에 반대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제사중에는 초혼이라고 죽은 조상의 영을 부르는 의식이 있습니다.
죽은자의 영을 부르는 의식이 있음에 어쩌면 제사의식이라는 것이 기독교인에게는 거부감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요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초혼의식이 있는 제사의 모습이 진정 죽은 조상을 기리는 온전한 모습이라고 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죽은 자를 기리는 모임을 죽은 영혼을 믿고 숭배하는 모임을 만드는 것은 분명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산자와 죽은 자의 하나님은 한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제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로 조상을 기리는 신앙을 가지자는 것입니다. 또 조상의 삶을 추모하며 기리는 기독교적인 의식도 있습니다.
십계명에서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합니다. 출애굽기 20:12에서는 네 부모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에베소서6:2-3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분명히 성경에서도 부모를 공경하고 그들의 삶을 기리는 것이 전통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네~ 절대 기독교는 조상을 무시하거나 공경하지 않는 종교가 아니고 오히려 더욱 깊이 조상을 이해하는 종교이며 더 나아가 살아있을 때 그 사랑을 전하고 살아있는 생명의 종교라는 것입니다. 살아 있을때는 그렇게 불효하더니 죽어서 제사드리며 효도 해봤자 그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사동교회 설립하신 고 김진규 목사님은 과거 행자승으로 불교 스님의 길을 가던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한 청년으로 부터 시주바구니에 성경책을 받고 밤마나 성경을 읽고..
여러가지 혼란한중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을 구세주로 영접합니다.
그동안 아무리 해탈하고 노력해도 얻어지지 않는 겨험들이 예수님 믿고 경험되어지고...
이제 신학의 길을 가고 목회자가 되게 됩니다. 그런데 그분의 아버지도 스님이셨습니다.
목회의 길 가기전 아버지를 전도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으로 내려와 아버지 앞에 섭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업과 사상과 모든 것을 버리고 배교한 아들이 너무도 미웠던 아버지는
자식이 아니라며 나라고 합니다.
사실 나이가 들고 찾는 사람도 없고.. 쓸쓸이 산골 절간에서 죽을 지도 모를 일인데..
자식 창피해서 나가지도 못하고 집에서 홀로 지내는 것이 일이였을 것입니다.
사실 주변에 챙피한 일이죠. 스님의 자식이 목사가 된다는 것. 고개들지 못하고, 다행히 사람들이 신경도 안쓰고, 이런 저런 생각에 살다 죽으면 그만이지 아들이 찾아왔습니다. 화가나서 다리 몽댕이를 부러트리고 싶어도 자식이어서 그럴 수도 없는데..설상가상으로 매일 아들이 노래를 부릅니다.
부모님의 은덕을 어디 비하며
무어라고 그 은혜 칭송하리오.
하늘같고 바다같이 높고 깊은 것
부모님이 날 기르신 은덕이로다.
임신중에 열달동안 지나실때에
불편하고 어려우심 어떻했으며
해산할때 배아프고 고생하신일
일평생에 잊지못할 은공이로다.
오줌싸고 동사는것 가리지않고
마른자리 따뜻한곳 갈아뉘시며
감기하고 배탈나고 잔병할때에
눈물로써 구호하신 자정이로다
죽은아들 잃은딸이 한이되어서
받한술과 잠한잠만 전과달라도
놀라시고 걱정되어 할바모르는
자정으로 미처지는 부모님이라
나를업고 부엌에서 불을때시며
차운물에 빨래하며 손발트신일
무엇으로 드리어서 보답하리까
보배로써 갚지못할 은공이로다
책가방메고 학교갈때 잊을수없어
위험한길 조심하라 부탁하시고
책상앞에 공부하는 모습보면서
즐거워서 웃으시는 애정이로다
자기몸은 못잡숫고 못입으면서
좋은음식 좋은의복 준비하면서
자식만을 먹이시고 입히시려는
잊지못할 부모님의 희생이로다
부모님의 슬하떠나 고독한몸이
새벽마다 눈물흘려 기도할때에
부모님이 보고싶어 견딜수없어
목메이고 가슴아파 눈물만나요.
인생에 있어서 이런 사람이 어디 있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이벤트하기 하나 힘들고..
아무리 많은 불도를 그렇게 드려도 아무리 많은 수행을 해도 수많은 신자들 다 떠나는데..
나이 늙어 인생에 있어 마지막을 바라보며 허무함과 공허함만이 있을때...
아들은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겠노라. 아침점심 저녁 이노래를 불러댑니다.
자신의 부모님도 생각이 납니다. 나도 부모님 살아 계실적 그 부모님 잘 해드리지 못했는데. 이 자식이 이 못난 자식이 나도 부모라고 나에게 와서 이 노래를 부르네..
지금은 늙어서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데. 예수믿는 내아들이 나를 알아주네.
만감이 교차했을 겁니다.
어느날 아들에게 이야기 합니다. “기독교에도 이런 가치관이 있느냐?
이때 고 김진규 목사님이 말씀 하셨죠.. “불교는 유교는 죽어서 효도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살아 있을때 효도하는 종교입니다.” 이말을 들으니 더욱 확실해 집니다.
“너같은 것도 돌아오게 하는 것 보니 기독교가 괜찮은 종교다.”
“나는 젊을때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으나 지금은 나이 많아 찾지도 않고 내인생은 나이 많아 죽었는데 너는 새인생을 살게 되었으니 나이 많으면 자식따라 사는법 너가 잘되는 것이라면 나도 너따라 예수 믿을란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그어떤 것이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소중하면서도 특별하게 한사람 한사람이 그 사람만의 장점과 특징을 가지고
존중받아야 하는 소중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여러가지 상황에 놓여지고 힘들기도하고 슬프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하고 괴롭고 화도 나고 몸이 너무 아프기도 할때도 있습니다.
그러지만 그 인생의 테두리 안에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삶을 주관하십니다. 그분은 살아계셔서 세상속에서 살아있는 자들을 찾으시고..
죽은 자들을 살리시며... 삶과 생명을 사모하게 하시며..
그어떤 죽어있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을 지배하고 삶의 영향을 미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 삶의 주인공인 하나님은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셨고..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더욱 소중히 여기며 인생의 주인공이 우리가 되게 하시며 우리의 믿음과 생활을 통해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놀라운 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명절 조상의 헌신과 노력을 기리며 추모하는 기독교는 조상을 공경하는 위해한 종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주인공 되길 원하시는 하나님이 함께하는 여전히 살아있는 종교입니다. 올 명절이 여러분에게 큰 은혜와 사랑이 회보되는 주간 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