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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창세기 5:1 ~ 32
제 목 : 죽음의 계보
본 문 : 창세기 5:1 ~ 32
1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 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 이라 하였고
4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6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 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9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10 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 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2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13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 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15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16 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 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8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19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 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 더라
25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26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7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
28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 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30 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31 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32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1. 관심사
모든 사람들은 각자만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관심사는 사람마다 모두 다르게 나타납니다. 결코 같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구촌에 70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 중 동일한 국적, 동일한 성별, 동일한 연령, 동일한 혈액형, 동일한 DNA, 동일한 성장 배경, 동일한 가족 환경을 가진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심지어 쌍둥이조차도 앞서 말씀 드린 여러 가지 조건이 일치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사는 모두가 다를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 인생을 머릿속에 얼핏 그려 보아도 우리의 관심사가 어떻게 변천되어 왔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장난감과 놀이, 초등학교 때는 친구, 중고등 학교 시절에는 학업과 이성 친구, 대학교 때는 취업, 취업 후에는 결혼, 그러다가 40대 때는 직장 및 자녀, 50대 때는 자녀의 결혼과 퇴직, 60대 이후에는 건강 등으로 주요 관심사가 변화됩니다. 이처럼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는 시대와, 나이와, 환경과, 개인사에 따라 모두 다르게 나타나고, 또 변하기도 합니다.
지난주 초에 아내와 함께 TV를 통해 영화와 드라마를 보는데, 이틀 연속 아내가 똑같은 말을 되풀이 한 일이 있었습니다. 영화 속 장면은 두 사람이 아파트 발코니 난간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었고, 드라마 속 장면은 건물 옥상 난간에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었습니다. 조금 위험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 장면이 저의 관심을 특별하게 끌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저 사람들 무섭지 않나? 금방이라도 떨어 질 것 같아.’라며 걱정을 하면서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영화나 드라마 속 내용에 집중해야지, 뭐 그런 상황에 관심을 두냐?’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목요일, 아내가 TV 속 두 장면에 유난히 민감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단양에 있는 고수동굴 관광을 갔었습니다. 우리들은 아주 오랜 기간 동안 형성된 자연의 신비한 모습에 취한 채, 정해진 코스를 따라 돌며 30여분 동안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동굴 밖으로 나와서 아내의 얼굴을 보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정말 미안했습니다. 미세한 고소공포증이 있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 차가운 동굴 속 환경 속에서도 식은땀으로 범벅이 될 정도로 고소공포증이 심할지는 미처 몰랐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미안한 생각이 다시 듭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제 아내의 경우처럼, 똑같은 TV 속 장면을 보더라도 사람의 상황에 따라 주요 관심사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도 유사하게 나타납니다. 각자의 처지나 관심사에 따라 느끼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조금 전 오늘 본문 창세기 5장을 모두 합독하며 다 같이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각자의 생각이 결코 일치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가뜩이나 두꺼운 성경책에 인명도 낯선 사람들을 그렇게 많이 나열할 필요가 있을까?’ 라고 생각하신 분도 계실 것이고, ‘그 사람들 정말 오래도 살았네. 그것이 가능할 일일까?’ 라며 의혹이 생긴 분도 계실 것이고, ‘옛날 사람들은 참으로 늦은 나이에도 자녀를 가질 수 있었나봐’ 라고 감탄하신 분도 계실 것이고, ‘에녹의 삶은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네.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있었나 보지?’ 라고 생각하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계보가 역대상, 마태복음, 누가복음에 나오는 계보와 과연 일치하는지 한 사람 한 사람 인명을 대조해 가며 차이점을 찾아내려는 정성을 기울이신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각자의 생각이 다른 이유는 각자의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에 관심을 가지느냐에 따라 동일한 내용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달라지고, 해석하는 것이 달라지고,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달라집니다. 여러 방면으로 생각도 해보고, 적용을 해보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겠지만, 자칫하다가는 본질은 놓치고 엉뚱한 곳에 매달려 시간만 낭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몇 번 말씀 드린 적이 있지만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관한 책입니다. 성경 처음부터 끝까지 이 사실은 결코 변함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만 하고, 성경을 대할 때 그 관계에 가장 많은 관심을 두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오류를 최소화 할 수 있고,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본질에 가장 가깝게 다가설 수 있습니다. 성경을 대할 때, 항상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다누림 가족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족보입니까?
오늘 말씀 5장 1절에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반면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이것은 아담 자손들의 족보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책에 따라 계보라고 표현하기도 했고, 족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계보는 어떨까요? [마태복음 1:1]도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라고 되어있고,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공동번역서에는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다음과 같다.’ 라고 되어 있고,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이것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책에 따라 계보 라기도 하고, 세계 라기도 하고, 족보 라기도 하면서 서로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도 저마다 다르게 번역하고 있는데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그리고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라도 하는 것일까요? ‘계보나 족보나 다 그게 그것이지, 뭘 고민해. 그냥 하던 설교나 계속 하시지요.’ 라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계보와 족보 중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너무나 극명하게 달라집니다. 그래서 선택이 아주 중요한 것이고, 그 중요한 것을 선택할 때,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관한 책’이라는 기준이 작동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오류를 범하지 않게 됩니다.
먼저, 결론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 창세기 본문은 족보가 아니라 분명히 계보입니다. 창세기뿐만 아니라 역대상, 마태복음,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모든 내용이 족보가 아니라 계보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 드린다고 해서 앞서 족보라고 표현한 성경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족보로 표현되었다고 하더라도 계보로 이해하여 주셨으면 좋겠다는 의미입니다.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기에 앞서 이해를 돕기 위해 족보와 계보의 개념부터 간단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족보는 ‘한 족속의 계통과 혈통 관계를 밝혀 놓은 책’입니다. 우리 집을 예로 들자면 저는 해주 오씨 정헌공파 22대손입니다. 우리 집 족보 책을 보면 시조 오인유 할아버지로부터 현재까지 태어나고 죽은 모든 사람, 그리고 현재 까지 살아있는 모든 사람, 그리고 우리 집안으로 시집 온 모든 여자, 그리고 다른 집안으로 시집 간 모든 여자들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족보입니다.
계보는 ‘학맥, 인맥, 사조 등이 과거로부터 전해 온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하게 기록으로 엮는 경우도 있지만, 엮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든지 그 내용이 더해 질 수도 있고, 빠질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의 바둑 계보를 살펴보겠습니다. 한국의 바둑 계보는 조남철 9단, 김인 9단, 조훈현 9단, 이창호 9단, 이세돌 9단으로 이어져 왔다는데 대체로 동의합니다. 그렇다고 그 다섯 명의 역사가 한국 바둑 전체의 역사는 분명히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서봉수 9단을 넣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다섯 명 중에 누구는 빠져야 한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국 축구의 스트라이커 계보도 있습니다. 이회택, 차범근, 허정무, 최순호, 황선홍, 안정환, 이동국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누구누구는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할 것이고, 누구누구는 빼야한다고 생각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 상황에 따라 한국 축구 스트라이커의 역사가 늘어날 수도 있고, 줄어들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이 계보입니다.
족보와 계보의 차이점을 기억하시면서, 오늘 설교를 따라와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저는 오늘 본문이 분명히 족보가 아니라 계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 첫 번 째 이유는, 하나님은 사람의 특정한 나라를 구분하시거나, 특정한 민족을 구분하시거나, 특정한 가문을 구분하여 역사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관심은 모든 사람, 즉 전 인류를 향하고 있기 때문에 족보 자체가 필요치 않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족보라면 그 내용이 성경책 어디에서나 일치해야 하는데 결코 일치하지가 않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족보를 편찬하시는데 실수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실수 하시는 분이 절대로 아니십니다. 따라서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의 오류가 아니라 족보가 아님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이유는, 이 기록이 족보의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족보라면 모든 사람의 내용이 기록되어야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5:4]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라고 되어 있고, 그 이후 다른 사람들의 기록도 동일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내용이 전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즉 족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족보라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인류의 역사가 고작 몇 천 년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과학이 밝혀낸 여러 가지 고고학적 사실과 연계하여 성경의 내용은 거짓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얼핏 들어서는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계산도 아마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성경의 내용은 족보가 아니기 때문에 그 연구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그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습니다. 성경의 권위에 아무 영향도 없습니다. 이런데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정작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정작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 내용을 제대로 알아야만 합니다.
3. 죽음의 계보
오늘 내용이 족보가 아니라 계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과연 무엇에 관한 계보일까요? 그리고 그 계보가 의미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아담의 계보는 바로 죄인의 계보입니다. 바로 죽음의 계보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죄가 무차별적으로 확산됨으로써 모든 사람이 죄의 결과인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5:1]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라고 기록되어 있고, [창세기 5: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지으심과 사람의 출생을 유사한 문장 형태로 대조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문장의 형태상 차이는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의미상의 차이는 정말로 어마 어마한 차이입니다.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이때의 아담은 정말 멋있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그리고 하와 앞에서도 당당하고, 떳떳한 존재, 벗었어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는 아무 흠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죄인이 되었습니다. 불쌍하고, 비겁한 존재, 모든 것을 가려도 부끄러운 존재로 변화되었습니다. 그 아담이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습니다. 여기에서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은 죄인의 속성, 죄인의 모습입니다. 즉 아담이 죄인의 속성과 죄인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이 내용이 5장 1절과, 5장 3절의 차이입니다. 정말 엄청난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담의 그 아들이 또 자녀를 낳고, 그 자녀가 또 자녀를 낳습니다. 죄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모습입니다. 죄인의 수가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성경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이런 구절이 눈에 띄게 되고,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보다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성경에서는 모든 사람의 결과, 즉 죄인의 결과는 동일하게 ‘죽었더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죽었더라’는 단순히 육신의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근본적인 생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사람이 생명 되시는 하나님을 거부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그것이 죽음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상태, 하나님으로부터 유리된 상태,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된 상태를 죽음 또는 사망이라고 표현하는 것이고, 그 결과로서 당연히 육체적 죽음이 사람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기에 모든 사람은 죄의 결과, 즉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오늘 본문 중 [창세기 5:5-11]을 다시 편집하여 읽어보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아담은 자신의 형상을 닮은 죄인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죄인의 상태로 지내며 죄인 된 자녀들을 더 낳았으며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죄인인 채로 죽었더라, 셋은 백오 세에 죄인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죄인의 상태로 지내며 죄인 된 자녀들을 더 낳았으며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죄인인 채로 죽었더라, 에노스는 구십 세에 죄인 게난을 낳았고 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죄인의 상태로 지내며 죄인 된 자녀들을 더 낳았으며 구백오 세를 살고 죄인인 채로 죽었더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 내용이 오늘 본문을 통하여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떠난 죄의 결과로서 모든 사람이 불행하게 태어나, 불행한 상태로 살다가, 불행의 씨앗을 뿌리고, 불행한 상태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죄가 세상 속으로 얼마나 빨리 확산되어 가고 있는지를 여과 없이 확증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사람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멸뿐입니다. 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죄인 된 사람이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법은 다른 죄인을 없애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갈등과 싸움과 저주와 살인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이제 사람은 스스로 망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대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스스로를 구해낼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에 살펴 볼 노아의 방주 사건이 창세기 6장에 바로 잇달아 나오는 것입니다. 즉 오늘 본문 창세기 5장은 단순히 아담의 가족사를 기술한 것이 아니라, 죄인의 계보로서 죄가 급속히 확산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며, 6장부터 이야기 할 노아의 방주 사건의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얼마나 재미가 있고 논리가 정연합니까? 예. 성경은 그런 책입니다. 동의하시면 모두 아멘하시겠습니다.
4. 에녹
창세기 5장을 본문으로 설교를 하는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내용이 사람의 역사가 확장되고 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즉 인류의 역사가 족장시대로 진입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반대하지 않습니다. 맞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 전개되고 있는 죄의 확산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만 합니다. 만약 그 의미를 빼버린다면 창세기 5장은 성경이 아니라, 문화인류학에서나 아주 가끔 필요한 참고 서적에 지나지 않습니다.
최근 들어와 많은 교회에서 ‘성경으로 돌아가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습니다. 참으로 좋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구호에 걸맞지 않게 때로는 엉뚱한 방향으로 모든 것이 전개되는 경우가 있어서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 라는 구호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아는 한 교회이야기입니다. 일주일 동안 성경 한 권을 선택해 읽어오게 합니다. 그리고 주일 오후 예배 후 ‘성경 골든벨’을 하고 우수한 성적을 기록한 성도에게 시상을 합니다. 그때 출제되는 문제가 이렇습니다. 오늘 우리 본문 창세기 5장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여러분께서도 한번 맞춰보시기 바랍니다.
1. 창세기 5장의 계보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정답 : 9백세 혹은 그 이상.
2. 창세기 5장의 계보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 가장 장수한 사람과 그의 수명은?
정답 : 므두셀라 969세.
3. 창세기 5장의 계보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 가장 단명한 사람의 이름과 나이와 그 이유는?
정답 : 에녹. 365세.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 하였기 때문에.
성경을 읽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 이유는 성경에 기록된 사실을 알아서 나의 지식으로 삼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물론 기록된 사실을 아는 것이 모르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 담겨진 진리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성경을 읽은 효과가 전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조금 전 골든벨 문제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창세기 5장에서 설교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 에녹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365세라는 나이로 가장 단명하기도 하였지만, 24절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라는 말씀과, 히브리서 11장 5절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말씀 때문입니다. 찬송가 430장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4절에서도 ‘옛 선지자 에녹같이 우리들도 천국에 들려올라 갈 때까지 주와 같이 걷겠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과 찬송가 가사를 근거로 성도들이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 것을 많은 교회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죽음의 고통을 받지 않고 천국을 가게 된다고 말을 합니다.
성경에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과연 그런 의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에녹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에녹 역시 죄인입니다. 에녹 역시 죄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죄인으로 태어나, 죄인으로 살다가, 많은 죄인들을 태어나게 하고, 죄인으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 된 다른 모든 이가 평균 900세 이상을 살 때, 에녹은 365세만을 살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즉 죄인으로 불행한 삶을 살면서, 또한 죄인들을 낳아야 하는 기간을 하나님께서 단축시켜 주셨습니다. 에녹으로 인해 죄가 확산되는 것을 최소화 시켜 주신 것입니다. 에녹이 죄의 씨앗을 뿌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최대한 막아주신 것입니다. 에녹이 신실해서도 아니고,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해서도 아닙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에녹에게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라고 표현해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물어 오실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겨졌잖아요?’라고 이야기 하실 수도 있습니다. 성경의 표현에만 그대로 매달리니까 이런 질문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쭈어 보겠습니다. ‘그 사람 돌아가셨어’, ‘그 사람 운명하셨어’, ‘그 사람 소천하셨어’, ‘그 사람 하늘나라 가셨어’, ‘그 사람 하나님이 데려 가셨어’, ‘그 사람 천국 가셨어’. 이 말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그 사람 죽었어.’입니다.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에녹 역시 죽은 것이고, 성경에서 표현을 조금 달리 해준 것뿐입니다.
그런데 왜 오늘날 교회에서 에녹을 많이 강조할까요? 그 이유는 성도를 교육하기에 좋기 때문입니다. 성도를 교육하여 성도의 섬김과 헌신을 이끌어 내기에 에녹이 아주 좋은 본보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는 어디로 갔지요? 내가 수고하고 애쓴 만큼 하나님으로부터 결과가 임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과연 어디에 있지요? 교회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을 왜곡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교회의 이익을 위해 진리를 왜곡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우리 다누림교회는 그 어떤 일이 닥친다 해도 하나님과 진리만은 살아있는 그런 교회인 줄 믿습니다. 모두 믿으시면 아멘 하시겠습니다.
5. 생명의 계보
오늘 본문과 비교하여 꼭 하나 살펴보고 싶은 것이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계보입니다. 1절과 2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로 시작하여, 16절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로 끝이 납니다. 오늘 창세기 본문의 각 절이 ‘죽었더라’로 끝나는데 반해 마태복음의 각 절은 ‘낳고’, ‘낳고’로 끝이 나고 있습니다.
사람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죄인 된 이후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결코 쉬지 않고 일하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리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일을 하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결코 변화되지 않았고 늘 죄 앞에 무릎 꿇고, 죄와 타협하며, 죄와 더불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16]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입니다. 죄의 종으로 살고 있는 사람을 구원하여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의 계보는 생명의 계보입니다. 창세기 5장의 계보가 죽음의 계보라면, 마태복음 1장의 계보는 생명의 계보입니다. 복음입니다. 기쁜 소식입니다.
죄의 종으로 살고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 마침내 사람을 죄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성육신 하셔서 스스로 십자가에 매달려 ‘다 이루셨다’고 선포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람의 죄를 깨끗이 씻겨주셨습니다. 사람을 죄에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죄의 종이었던 사람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성도로 변화시켜 주셨고, 창조 때의 아름답고, 행복하고, 당당하고, 떳떳했던 모습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 회복된 사람들이 바로 여러분과 저, 성도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주시어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기쁘고,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죄인인 것조차도 몰랐던 우리에게, 아무것도 행할 수 없었던 우리에게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우리가 구원받은 존재가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되어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오늘 말씀을 시작할 때 사람들의 관심사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기독교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성도의 삶 속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요구한 것이 없는데, 우리가 아무것도 행한 것이 없는데 우리에게 이루어져 있는 일, 즉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그 하나님의 은혜를 누려보기도 전에,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자고 합니다. 아직 젖도 안 뗀 아가에게 말을 해보고, 걸어 보라고 요구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알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 속에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늘 성경을 가까이 하시는 다누림 가족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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