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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Intensive English Program
다 아는 사실이지만 내가 미국에 올 때 미리 법대에 어드미션을 받은 것은 없고, 다만 영어공부를 하겠다는 명목으로 온 것이기 때문에 미국에 머무르기 위하여 나는 의무적으로 이곳에서 영어 수업을 들어야 한다.
이 프로그램은 이 대학의 정식 학과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고 외국 학생들의 영어교육과 학교수익을 위해 부수적으로 운영하는 것으로 이곳의 선생들도 교수는 아니고 모두들 임시강사에 불과하다. 처음에는 상당한 시간적 여유가 있는 것 같았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벌써 미국생활 한 달이 지나고 드디어 영어수업이 시작되었다.
가. placement test.
나는 이 프로그램에 등록하기 위하여 우선 나의 영어실력을 측정하기 위한 시험을 보아야했다. 이 프로그램에는 영어실력에 따라 모두 7level의 등급이 있으므로, 시험을 봐서 자기 실력에 맞는 등급에서 수업을 듣게 하기 위한 것이다.
1레벨에서 7레벨까지 등급이 높을 수록 영어실력이 좋은 것인데, 이 프로그램에서 미리 수업을 듣고 있던 박성욱교수 딸의 말에 의하면 1레벨에서 3레벨까지는 너무 수준이 낮아 거의 놀자 판이고, 4레벌부터 수업이 제대로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겠지만 이곳에서 확실히 확인한 나의 영어실력에 심각한 회의를 가지기 시작한 마누라는 내가 4레벨에도 속하지 못할까봐 걱정을 하는 것이다. 나 참 내 실력을 어떻게 보고... 참고로 경대 공대 1학년에 재학중이다가 이곳에 온 박교수의 큰 딸은 4레벨에 다니고 있었고, 과학고 2학년를 마치고 카이스트에 입학하여 역시 1학년에 재학 중이던 둘째딸은 6레벨에 다니고 있었다.
나는 2003. 8. 27. placement test를 보았다. 사법시험을 마지막으로 앞으로는 절대로 더 이상의 시험은 보지 않겠다고 맹세한 나인데, 어떻게 하다보니 이제 낮선 이국땅에서 자식 같은 애들과 함께 다시 시험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 크게 부담스러울 것도 없는 시험이지만 그래도 시험이라고 부담이 없지는 않았다.
오전 9시 3분전 쯤에 시험장에 들어가니 30 내지 40명의 학생들이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20대 중반의 한국학생들이 가장 많아 보였다.
9시 20분경에 시험이 시작되어 writing, listening, grammar, reading 순으로 진행되었다.
첫째시간 writing은 어떻게 하던 시험지 한장이라도 채우려고 노력하였다. 영어로 글짓기를 하라니 얼마전까지만 해도 언감생심 생각이라도 했던 일인가? 문법도 문법이지만 너무나 오랜 만에 갑자기 다시 시작하는 영어 공부이다 보니 spelling이 제대로 기억나는 단어가 별로 없어서 특히 고생을 하였다. 그래도 첫장 반장을 넘기고 나니 참으로 뿌듯하더라.
다음은 listening시간. 예상한 대로 제대로 들리는 것이 하나도 없더라. 지금까지 listening 공부는 해드폰을 끼고 했는데, 시험장에는 해드폰이 없다보니 더욱 들이지 않더라. 대충 찍었다.
grammar와 reading은 기본 실력으로 쳤고.
그리고 나는 2003. 8. 28. Intensive English Program(이하 IP라고만 함)에 등록을 하였다. 어제 본 시험결과에 따라 자기가 소속된 level에 수업료를 내고 등록을 하는 것이다. 마누라와 함께 가서 level표를 받아 보니 나는 5level에 편성되어 있었다. 예상보다 높은 level에 마누라가 놀라더라. 그럼 내가 기본실력이 있는데...
저녁에 만난 재순씨와 이변호사도 놀라더라 영어에 대한 기본 실력이 있는 것 같다고. 그리고 이곳 법대에 admission를 받고 온 사람도 법대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영어 실력을 보충하기 위해 이 프로그램에 등록을 하는 일이 있는데, 그 사람들도 보통 5 level에 등록을 한다고 하더라. 그러니 놀랄 수밖에.
사실 나도 좀 의아하였다. writing은 개발새발 썼고, listening은 들리는 것이 없었는데, 4 level이라면 모를까 5 level이라니. 그 의문은 나중에 이곳 책임자와의 면담시에 풀 수 있었다. 그때 내성적을 보여 주었는데, 내성적이 writing과 listening은 각 3 level이고(아흐!), grammar는 8 level(이곳 공식과정은 7레벨까지 밖에 없는데, 8레벨이란다), reading은 7 level이었다. 고로 이를 평균하면 5.25 level, 따라서 나는 5 level이라는 식이었다.
나. First Session.
2003. 9. 1.부터 드디어 영어수업이 시작되었다. 시간표를 받아 보니 아침 8시부터 오후 1시 20분까지 50분 수업, 15분 휴식의 일일 5시간 5과목(writing, communication, grammar, academic skill, reading)수업이었다.
아침 8시부터 매일 5시간 수업이라니 이건 완전히 다시 중학생이 된 것이다. 첫날 아침 6시경에 일어나 일찍 감치 등교준비를 하여 학교로 갔다. 40줄에 새삼스럽게 낮선 외국인 선생과 자식 같은 classmate를 만나는 것 자체가 엄청난 부담으로 느껴지면서 내가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는가 하는 심정이 들기도 하였지만 각오를 새로이 하고서.
8시 writing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나를 포함하여 모두 9명의 학생이 도착하였다. 나이는 나 외에는 모두 20대로 보였는데, 남자 5명, 여자4명이었다. 여자는 거의 한국애들로 보였고, 남자는 확실한 서양애 하나 외에 머리를 빡빡깎은 일본애 하나와 수염을 기른 중국애 하나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수업이 시작되고, 각자 자기 소개를 할 때에 보니까 학생 9명 중 외국인은 러시아에서 온 유리와 대만에서 온 괴화 밖에 없고, 나머지는 모두가 한국인이었다.
비지니스를 공부하려고 하는 태현(남, 25세), 정치학을 공부하는 원희(남, 25세, 애는 이미 admission를 받고 이곳에 와서 전공학과에서 수업중인데도, 전공학과에서 영어시험을 본 후 영어실력이 부족하다고 판단되어, 학과에서 이 수업을 들으라고 하여 듣는다고 하였다.), 물리학을 전공하는 창희(남 29세, 애도 원희와 입장이 같았다), 러시아에서 온 고등학생 유리(애는 이곳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영어실력을 보충하고자 이곳에서 수업을 듣고 있는 것이다), 대만에서 잡지사 편집장을 하였다는 괴화(여, 29세, 기혼), 광주에서 피아노를 전공하러 왔다는 은영(여, 23세, 참고로 Indiana University는 특히 음대가 명문으로 유명하다), 성균관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언어치료학을 공부하러 왔다는 은희(여, 29세), 이화여대 음대를 졸업하고, 국립합창단에 있다가 성악을 전공하러 왔다는 소프라노 혜영(여, 25세)이가 나의 클래스메이트들이다.
미국 대학 영어 클래스에 9명의 학생 중 7명이 한국인이라니... 아! 얼마나 대단한 대한민국인가... 더욱이 유리와 괴화는 ip의 정식학생이 아니고 자기들의 필요에 의해 몇 과목만 골라듣는 계약 학생이다 보니 셋째 시간인 academic skill시간에는 전부가 한국학생이었다. 미국 땅 낮선 곳에서 체면 생각할 필요 없이 외국인들과 어울려 공부해 볼려고 이곳까지 왔는데, 이곳에서도 전부 한국학생들과 공부를 해야 하다니... 뭔 이런 경우가...
나에게 첫날 수업의 클라이맥스는 마지막 다섯째 시간 reading시간이었다.
강사가 들어오더니 우리들에게 설문지 비슷한 종이 쪽지 하나씩을 내어 주더라. 그곳에는 자기가 좋아는 꽃, 장소, 동물, 색깔 등을 묻는 항목이 있어서. 이 나이에 무슨 좋아하는 색깔, 꽃, 동물 나부랭이가 있겠냐. 그래도 적으라니 그저 영어로 적기 쉬운 것으로 골라 적었다. rose, home, dog(나 개고기 좋아하거든), red 등등.
그랬더니 모두 그 종이쪽지를 들고, 교실 앞으로 나와서 두줄 횡대로 마주보며 서라네. 자기도 서고. 그러면서 모두 자신이 적은 것을 들고 마주본 사람과 영어로 대화를 나누란다. 그리고 한 5분 정도 후에 다시 자리를 옮겨 대화상대방을 바꾸고 하는 식으로... 와! 얼마나 쑥쓰럽고 쪽 팔리던지...
너희들도 한 번 상상해 봐라. 내가 이 나이에 자식 같은 애들하고 마주서서 "좋아하는 꽂 혹은 색깔이 무엇이에요"하며 대화하는 모습을. 그것도 모두 외국인이라며 모르겠는데, 대부분 한국애들과....
어째든 나는 마지막으로 괴화와 마주 써게 되었는데, 괴화가 갑자기 나 보고 pilot이냐고 묻더라. 그래서 내가 아니라며 왜 그런 생각을 했느냐고 물으니, 아까 처음 소개할 때 내가 그러지 않았느냐고 하데. 그게 뭐 소리여 나는 그런 적 없는데... 그런데도 괴화는 내가 pilot라고 했다는 거야.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짐작되는 대목이 있더구먼. 나는 첫째 시간에 내 소개를 하면서 하루빨리 speaking 실력을 향상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쪽팔림을 무릎 쓰고 가능한 한 길게 이야기 하려고 노력하였는데, 그 과정에 내이름을 이야기 하면서 '담"자가 "불댕길담"이니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담"은 ignite 혹은 fire를 뜻한다고 소개한 적이 있는데, 괴화는 fire를 pilot로 알아 들은 것이다. 쯧쯧 그런 listening 실력으로 어떻게 영어 공부를 하려는지...
수업이 시작되고 나서 며칠 후에 우리반에 추가로 3명의 학생이 더 들어왔다.
일본에서 사회학을 공부하러 왔다는 치카(여, 21세), 연세대 음대를 졸업하고 첼로를 전공하러 온 경연(여, 23세), 이화여대 음대를 졸업하고 바이올린을 전공하러 온 남희(여, 26세)가 그들이었다.
너희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 설명을 하자면 우리반의 여학생들은 모두 다 이뼜다. 요즈음은 성형술이 발달해서 그런지 공부를 잘 하는 애들이 얼굴도 다 이뿌더라. 그러나 그 중의 킹카는 당연 치카였다.
치카는 텔렌트 이경연(이름이 맞나, 와 옛날에 검사와 결혼하려고 하다가 텔렌트라서 못했다는 이야기가 나온 아이가 있는데, 요즈음이라면 검사가 좋아라고 결혼했을 텐데, 특히 변검사라면)이가 가장 이뻣을 때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나이도 제일 어린 것이 백옥 같이 흰 얼굴로 해맑게 웃는 모습을 보면 힘든 수업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일순간에 날릴 수 있었다.
나는 유창한(?) 일본어 실력(나의 유창한 일본어 실력에 경탄과 놀람을 감추지 못하던 치카의 순진무구한 모습은 지금도 내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을 바탕으로 치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 별 관심은 없었지만 지나가는 말로 애인이 있느냐고 물어 보게 되었는데, 치카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있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애인이 한국애고 그 애 고향이 부산이라네. 애인이 지금은 어디 있냐고 하니까 또 조금도 망설임 없이 지금 이곳에서 같이 살고 있데.
허 참!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그렇지 결혼을 안한 것은 물론이고, 머리에 쇠똥도 안 마른 것이 남자와 같이 산다는 말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태연하게 할 수 있는지...그것이 현재 일본여성 성도덕관념의 현주소인지.
그리고 나중에 알고 보니 치카의 애인도 우리 IP의 학생이었어.(치카는 이곳에 오기 전에 오하이오 주에 있었는데, 거기서 만났다네) 내가 원래 딸 같은 애에게 무슨 불순한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니 애인이야 있든 없든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고, 아뭏튼 나는 치카로 인하여 훨씬 즐거운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다.
우리 반 애들은 유리와 괴화를 제외하고는 하루 5시간의 수업을 모두 같이 듣다가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쉬는 시간에는 음식도 나누어 먹는 등 서로 상당히 친해 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중 한국애들은 정말 요즈음 애들 같지 않게 모두가 예의도 바르고 너무나 착했다. 내가 조국에서 온 어른임을 알아 보고는 모두가 먼저 인사를 할 뿐만 아니라 그룹활동이 많은 수업시간에는 내가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세심한 배려도 해 주었다. 그래서 비록 영어는 덜 늘었겠지만 나는 개들로 인하여 훨씬 쉽게 ip수업에 적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수업이 시작되고 나서 며칠 후부터 한국애들은 나의 호칭에 관하여 고민을 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같은 classmate이니 편하게 부르라고 하였는데, 자기들 끼리 한 참 고민을 하더니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기로 했단다. 같은 classmate끼리 "선생님"이 무엇냐고 내가 극구 말렸지만, 그 뒤로 한국애들은 나를 "선생님" 또는 "이선생님"이라고 부른다. 허 참! 자연스럽게 풍기는 위엄과 권위는 내가 아무리 억제를 하더라도 어쩔 수 없나봐.
우리는 주로 중앙도서관에서 수업을 받았는데,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 현관으로 나와 서로 헤어질 때 이곳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진풍경이 벌어진다. 한국애들은 일제히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혹은 "선생님 내일 뵈요"라며 나에게 인사를 한다. 그러면 나는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오른손을 들고 "그럼 내일봐"라며 인사를 받는다.
그런데 바로 이때 내 등뒤에서 당돌하게도 "담"이라며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하다못해 "담씨"도 아니고 "담"이라니. 누가 감히 나를 그렇게 부른다 말인가. 돌아보면 치카가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 오른손을 들어 흔들면서 "bye-bye"라고 인사한다. 그러면 나도 얼른 근엄한 표정을 감추고 순진하게 웃으면서 "bye-bye"하며 답례를 하고는 내 갈길을 간다. 한국애들한테 는 왠지 미안한 감을 가지면서...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