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도 하나의 언어다. 아니 기호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림은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처음부터 애써 이해하려 하지 말고 느낌을 먼저 받아들이면 된다. 다만 자기 인식의 깊이만큼 다각도로 수용하는 것이다.
즉 이해되기 전에 읽혀지는 것이 그림이다. 보는 즉시 즉자적으로 우리의 감성과 반응하여 심금을 울려주어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힘을 얻는 그림의 역할이다. 색채가 가진 힘과 신체의 행위성을 화면에 고착시킴으로서 무정물인 캔버스와 질료에 생명을 불어넣고 보는 이에게 긍정적인 힘을 전달해주어 인간에게 유익한 존재로서의 회화의 가치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의 그림의 효용성이 아닐까?
서양화가 몽원(夢圓) 노춘석(盧春錫) 작가는 말한다. “나의 그림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고.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세상은 아무 이상없이 잘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내가 없으면 이 광활한 우주를 누가 느끼며 이 온 세상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철학적 질문이 대두된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는 온 우주적 관점에서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nothing) 나의 관점에서 볼 때는 모든 것(evrything)이며 우주의 중심이며, 우주의 주인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즉, 우리는 '모든 것'이면서 동시에 '아무 것도 아닌 것!' 이런 커다란 양면성과 음양의 모순세계에서 존재하고 있다. 다분히 하나에서 두 상반의 세계를 3까지 분화시켰다가 다시 하나로 수렴하는 우리민족의 4대 경전 중의 하나인 천부경의 이치를 천착해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그 모색 방법이 그림이라는 매개체다. 시루떡에도 하나의 밀착된 쌀의 견인력과 콩고물의 분산이 있어야 맛있는 떡이 되듯이 우리의 삶에도 그런 요소들은 얼마든지 있다. 인생에서 환상이나 착각, 신기루나 무지개를 제거해버리고 남는 실상은 또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재미없는 세상이겠는가.
“환상이나 착각도 사실은 인생의 중요한 한 요소이자 한 측면이라고 생각한다.”고 몽원은 설파한다. 결국, 전체는 실상과 허상의 한 덩어리인데 우리가 보는 것은 한 덩어리의 어느 한 측면일 뿐인 것이다. 나는 이러한 세상사의 양면성이나 전체성에 주목하고 그 실상과 허상을 관람객들과 함께 각성하고 공유하고픈 생각에 일련의 작업들을 펼쳐 보이고 있다"고 창작의도를 피력했다.
일단은 표면적인 요란함을 끌어와서 제시하고 다음으로는 그 이면의 눈에 보이지 않는 침묵이나 영원성을 일깨워 줌으로써 눈에 보이는 요란함이나 덧없음이 전부가 아니라, 그 이면에 잠재되어 있는 '적멸의 세계'를 동시에 감지하는 전체적인 시각 내지는 통찰력을 일깨워주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의 어느 한 측면에만 시선과 의식이 고정되어 편견에 사로잡히는 일 없이, 다시 말해서 어느 한 측면에 기울어져서 집착하거나 절망하거나 그로 인해 고통 받는 일이 없는 평정심을 유지하도록 도와주는 창구역할을 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방식은 몽원의 작품에서 주된 주제이자 표현의도이며 관람객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된다.
몽원은 어린 시절 인체를 모티브로 한 작품을 많이 그려 '인체작가'로 불렸다. 그 후 몽원은 다분히 철학적인 취향으로 흘렀다. 생에 대한 아픔이 없다면 예술은커녕 철학적인 인식을 갖지 못한다. 그만큼 몽원에게는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이 작품으로 현현되고 실제 생활에서도 그림을 배우는 후학들에게도 그림만이 아니라 철학이나 글에 대한 지도도 함께 하고 책을 선물해주기도 하는 의도도 간파된다.
작품을 통해 창의성과 자유를 구가하다
몽원의 작품은 현대 물질문명 속에서 퇴색해 가는 정신적, 육체적 건강성 회복을 역설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몽원 작가는 "이 세상의 삶이란 한 줄기 빛의 노래라고 생각한다"며 전시를 통해 "짧아서 아름답고 유한해서 더욱 소중한 생명과 존재의 기쁨을 만끽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지난번에 '빛의 노래'라는 주제로 열린 개인전에선 1000호 작품을 전시하는 등 500호 200호 등 일반 개인전에서는 보기 드문 대형작품을 선보였다. 이처럼 대작위주의 개인전을 펼쳐온 몽원은 인체나 말 그리고 나무, 꽃 등의 자연 이미지를 모티브로 해서 그 안에 내재된 힘과 에너지를 적극 표출하는 회화성 짙은 작업들에 몰두했다.
전시작품에는 신체의 행위성을 강조한 역동적인 작품, 매화와 목련을 표현한 작품, 인체를 세밀하게 표현한 작품 등을 통해 작가의 다양한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특히 인체의 아름다운 에너지를 섬세한 양각과 음각의 입체가 음양의 조화처럼 남녀의 사랑을 그림 속으로 끌어 들인다. 황금빛이 비치는 태양아래 사랑의 속삭임이 태양보다 더 빛난다. 또 품위 있는 백마의 자태가 우아해서 함께 나란히 걸고 싶을 만큼 매혹적인 작품이다. 말이라는 동물자체가 갖는 이미지는 에너지를 상징하지만 작가는 그 에너지를 과도하게 넘쳐 흘리지 않고 역설적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말의 여유로움을 표출한다. 이 백마는 우리의 삶과 같이 여유와 역동이 함께 공존하는 이야기가 내포되어 있다.
몽원은 화가이기 이전에 철학자, 집요하리만큼 사유하는 사람이다. 인간의 한계성으로부터 부딪히는 실존적 문제들을 작품 속에서 나마 넘어서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 엿보인다고 어떤 평자는 분석한다. ‘문명의 저편', '금지된 문', '비상', '생명의 빛', '힘의 장소' 등 그의 지난 전시 주제들에서부터 사유의 깊이가 표출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일련의 그는 작품을 보면 작품 활동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애초에 그가 얻고자 했던 자유를 얻어 영원의 세계로 접어든 것은 아닐까?
정노천 기자|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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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인사아트프라자3층특별관 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