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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 平 文 氏 남평문씨 약사 시조는 문다성(文多省 : 자 明遠, 호 三光, 시호 武成)으로서 그의 탄생에 관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전남 나주군 남평면 동쪽에 장자지(長者池)라는 큰못이 있고, 그 못가에 우뚝 솟은 큰 바위가 있었다. 어느 날 그곳 군주(郡主)가 그 바위 아래에서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위 위에서 오색 구름이 피어오르면서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은은히 들려 왔다. 이상히 여긴 군주가 바위 위에 올라가 보았더니 석함(石函)이 놓여 있었고, 그 속에는 피부가 옥설(玉雪)같이 맑고 용모가 아름다운 갓난아기가 들어 있었다. 군주가 아이를 데려다 기르매 나이 5세에 문사(文思)에 저절로 통달하고 무략(武略)이 뛰어날 뿐 아니라 사물(事物)의 이치를 스스로 깨닫는 총기가 있었다. 그래서 <문(文)>을 성으로 삼고 이름을 다성(多省)이라 지어 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나주군 남평면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서너 마장쯤 가면 장자지(長者池)라는 큰 못이 있고, 그 곁에 우뚝 솟은 바위가 있어 남평문씨 시조의 발상지로 유명하다. 바위 위에는 후손들이 <문암(文巖)>이라는 비석을 세워 놓아 문씨 시조의 탄강지임을 말해 주고 있으며, 장자지는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는 일이 없다고 한다. 그 못가에 장연서원(長淵書院)을 세워 시조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음력 9월 중정일(中丁日)에 향사하고 있다. 본관은 시조 문다성이 대장군(大將軍)을 거쳐 삼중대광 삼한벽상공신(三重大匡三韓壁上功臣)에 오르고 남평백(南平伯)에 봉해졌기 때문에 남평으로 관적하였다. 그러나 그 후 문헌이 실전되어 대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문공원(文公元) ‧ 문공유(文公裕)형제의 묘지명(墓誌銘)에 의해 고려 숙종 때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지낸 문익(文翼)을 중조(中祖) 1세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문씨는 고려조에서는 많은 인물을 배출하여 명문세족의 영예를 누렸으나 조선조에서는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이 절의를 지키고 은거불사(隱居不仕)한 영향을 받아 벼슬 열력이 고려조에 비해 적은 편이다.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61명, 공신3명을 배출했다. 경절공(敬節公) 문익은 남평문씨를 명문으로 끌어올린 중흥조(中興祖)이다. 그는 고려 숙종조에 우산기상시로 정계의 중추에 자리를 굳혔고, 그의 큰아들 충의공(忠懿公) 문공인(文公仁)은 고려 인종 때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ㆍ감수국사(監修國史) 등을 지냈다. 둘째아들 정경공(貞敬公) 문공원은 의종 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고, 의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으며, 셋째아들 문가관(文可觀)은 조계종 대선사(曹溪宗大禪師)가 되었다. 그리고 넷째아들은 고려조의 명필로 유명한 경정공(敬靖公) 문공유로 벼슬은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이르렀고, 작품으로 묘향산 보현사(妙香山普賢寺)의 창사비(創寺碑) 비명(碑銘) 및 음기(陰記)가 전한다. 충숙공(忠肅公) 문극겸(文克謙)은 공유의 아들로 문무(文武)를 겸전(兼全)하였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근검 충직한 현상(賢相)으로 유명하다.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에는 많은 문신들이 피살되었으나 그는 앞서 직언하여 좌천된 일로 해서 화를 면했고, 의종도 그의 말을 좇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벼슬은 권판상서이부사(權判尙書吏部事)에 이르렀으며, 명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의 두 아들 문후식(文侯軾)은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를 문유필(文惟弼)은 판예부사(判禮部事)를 지냈다. 남평문씨는 문후식의 8대손 문익점의 집안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문유필 집안의 문달한(文澾漢)이 고려말에 왜구를 무찌르는데 공을 세워 순평군(順平君)이 되었으며, 문근(文瑾)이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올랐다. 남평문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목화씨를 원나라에서 들여와 의류혁명을 이룩한 충선공(忠宣公) 문익점을 들 수 있다. 그는 공민왕 때 좌정언으로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올 때 당시 금수품으로 되어 있던 목화씨를 붓대 속에 감추어 들여와 우리 나라 목화 재배의 시초가 되게했다. 벼슬은 공민왕 때 우문관 제학(右文館提學)에 이르렀는데, 고려가 망하자 두문불출하였고, 조선개국 후 이성계(李成桂)가 친히 불렀으나 끝내 거절, 절의를 지켰다. 목화를 전파한 공으로 조선 태종 때 강성군(江城君)에 봉해졌으며, 세종 때 부민후(富民侯)에 추봉(追封), 세조 때 사당(祠堂)이 세워졌다. 그의 손자 정혜공(靖惠公) 문래(文萊)는 조부가 거둔 목화를 베로 만들기 위해 <물레>를 고안했는데, 처음에는 그것을 작방차(作紡車)라 부르다가 뒤에 그의 이름을 따서 <물레>라 불러오고 있다. 그는 이색(李穡)의 문인으로 성리학뿐 아니라 천문(天文) ‧ 지리(地理) ‧ 산수(算數) ‧ 율려(律呂)에 정통한 학자이다. 조선조의 인물로는 문익점의 손자 평익공(平翼公) 문빈(文彬)이 태종 때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으로 월천군(越川君)에 봉해졌고, 문달한의 아들 문효종(文孝宗)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를 지내고 치사(致仕)했다. 경숙공(敬肅公) 문상행(文尙行)은 태종 때 문과에 급제, 용담현령(龍潭縣令)을 거쳐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올랐으며, 문민(文敏)은 중종 때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으로 문원군(文原君)에 정해졌다. 창계(滄溪) 문경동(文敬仝)은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 ‧ 사성(司成)이 되었다. 문근은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신진사류(新進士類)로 중종 때 형조참판(刑曹參判)이 되었으나 남곤(南袞) ‧ 심정(沈貞)등의 무고로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의 처형을 통박하다가 삭직된 기묘명현(己卯名賢)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동생 문관(文瓘)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 장령(掌令)을 지냈다. 모계(茅溪) 문위(文緯)는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 김면(金沔)과 함께 왜군과 싸우다가 김면이 병사하자 뒷일을 맡아 처리했으며, 김옹(金顒) ‧ 류성룡(柳成龍)의 천거로 감찰을 거쳐 현감이 되었다. 풍암(楓庵) 문위세(文緯世)는 류희춘(柳希春) ‧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박광전(朴光前)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군량 조달에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는 읍민을 동원, 적의 퇴로를 차단하여 많은 왜군을 무찌른 공으로 목사가 되었다. 경암(敬庵) 문흥헌(文弘獻)은 임진왜란 때 진사로서 고경명(高敬命)을 따라 금산에서 싸우다가 패하자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를 좇아 진주성(晋州城)에서 분전(분전), 성이 함락되자 최경희와 함께 투신 자살했다. 이밖에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인물로는 형조좌랑 문덕교(文德敎)와 수문장 문기방(文紀房) 등이 있다. 문희(文晦)는 인조 때 진무공신(振武功臣) 3등으로 오천군(鰲川君)에 봉해졌고, 문재도(文載道)는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경상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근세 인물로는 호남 의병장으로 항일전에서 활약하다가 피체되어 대구 감옥에서 형장의 이슬이된 문태수(文泰洙), 최익현(崔益鉉)의 문인으로 의병을 일으켜 1906년 관군(官軍) ‧ 일군(日軍)과 최후까지 싸우다가 체포되어 12의사(義士)의 한 사람으로 불리운 문달환(文達煥), 상해(上海) 임시정부 수립 당시 국민의회 대표로 참여, 초대 교통총장(交通總長)을 지낸 문창범(文昌範), 재미동포 항일단체인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 회장을 지낸 문양목(文讓穆), 사학자이자 언로인이었던 문일평(文一平), 우리나라 최초의 사전인 《새국어사전》을 펴낸 문세영(文世榮) 등이 있다. 역대 중요 인물
문인위文仁渭 (高麗 ?∼1019(현종 10). 고려의 문신. 목종 때의 궁사(宮使). 본관은 장연(長淵). 오랫동안 천추궁(千秋宮:千秋太后의 宮)의 사(使)로 있었는데 성실하고 꾸밈이 없었다. 김치양(金致陽)의 무리가 숙청될 때 천추궁의 궁료(宮僚)가 많이 연좌되어 죽고 귀양갔으나, 문인위만은 강조(康兆)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였다. 1009년(현종 즉위년) 공부상서(工部尙書)가 되고, 2년 뒤인 1011년 우복야(右僕射)를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으며, 1019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타계하셨다
문정 文正 (高麗 본관 장연(長淵). 시호 정헌(貞獻). 문종 초기에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병부시랑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형부상서 ·참지정사(參知政事)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냈다. 1080년(문종 34) 행영병마판사(行營兵馬判事)로서 동여진(東女眞)을 정벌, 그 공으로 추충찬화탕구정새공신(推忠贊化蕩寇靜塞功臣)에 책록되었고, 검교사도 문하시랑평장사 판상서예형부사 겸 태자태부 상주국 장연현개국백(檢校司徒門下侍郞平章事判尙書禮刑部事兼太子太傅上柱國長淵縣開國伯)에 봉하여졌다. 선종 때 수태위문하시중(守太尉門下侍中)이 되었다. 만년에는 사학을 열어 12공도(公徒)의 하나인 정헌공도(貞獻公徒)를 세웠다. 선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문 익 文 翼(高麗 諡號 : 敬節 官職:右散騎常侍) 문종 때 문과에 급제, 1098년(숙종 3) 좌우찬선 대부를 거쳐 급사중에 이르렀다. 이듬해 고주 겸밀진사로서 원자 책봉을 청하려고 요나라에 다녀왔다. 1102년(숙종 7) 직문하성으로 서북면 병마사가 되고 1103년 우산기상시에 올랐다.
문과에 급제, 1115년(예종 10) 호부시랑으로서 사은 겸 진봉부사가 되어 송나라에 다녀왔다. 우부승선을 거쳐 1117년(예종 12) 전중소감ㆍ우승선 겸 태자 우찬선, 1122년 예빈소경ㆍ추밀원 지주사, 이 해 인종이 즉위하자 추밀원 부사가 되었으나. 최사전(崔思全)의 모함으로 권신 이자겸(李資謙)에 의해 충주로 유배되었다. 1126년(인종 4) 이자겸이 몰락하자 이듬해 이부상서ㆍ예부상서ㆍ지제고ㆍ동지추밀원사 등을 거쳐 1129년(인종 7) 지문하성사ㆍ판상서형부사ㆍ참지정사에 이르렀다. 1131년 판병부사를 거쳐 검교사도ㆍ중서시랑 평장사ㆍ감수국사ㆍ판국자감사 등에 오르고, 상주국 남평현개국 백에 식읍 삼천 호, 식실봉 삼백 호를 받았다.
음보로 기용되고, 예종 때 문과에 급제, 인종 때 우정언ㆍ지제고에 발탁, 1130(인종 8) 전중시어사로 지어사대사 이주연(李周衍)과 함께 시폐를 상언하여 시정토록 하였다. 1135년(인종 13) 낭중으로 금나라에 가서 만수절을 축하, 1148년(의종 2)어사대부ㆍ지추밀원사ㆍ판삼사사가 되었다. 1150년(의종 4) 지공거로 전선을 관장, 참지정사를 거쳐 판형부사가 되고, 이어 중서시랑평장사ㆍ판이부사에 올라 수사공이 되었다. 1152년(의종 6) 서경유수가 되고, 그 후 문하시랑 동평장사로 치사했다. 의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문가관 文可觀(高麗 曹溪宗大禪師)
문공유(고려 字 : 亢迪 諡號 : 敬靖 官職 : 判三司事 문과에 급제, 1122년(예종 17) 합문지후로서 최사전의 모함으로 권신 이자겸에 의해 형 공인ㆍ가관과 함께 유배, 뒤에 복직되어 사신으로 금나라에 다녀왔다. 1133년(인종 11) 시어사로서 묘청(妙淸)의 도참설에 현혹된 인종에게 상소를 하다 충주목 부사로 좌천되었다. 1148년(의종 2) 시우산 기상시ㆍ보문각 학사ㆍ서북면 병마사를 거쳐 이듬해 시형부상서ㆍ판삼사사에 이르렀다. 1151년 지추밀원사ㆍ예부상서ㆍ형부상서ㆍ동북면 병마부사를 지내고 남평개국자에 식읍 3백호를 받았다. 글씨에 능하여 묘향산 보현사 창사비문을 썼다. 그의 서풍은 당송간에 드날렸으며, 서체는 북송의 4대가 채양(蔡襄)의 서풍을 바탕으로 하여 개성을 살렸고 해서 전성시대에 행서 비문으로 회유 가치가 있다. 남평의 장연서원(長淵書院)에 제향되었다.
문극겸 文克謙(高麗 字 : 德柄 諡號 : 忠肅 官職 : 平章事 음보로 산정도감 판관으로 있다가 의종 때 문과에 급제, 좌정언이 되어 환자 백선연(白善淵)을 탄핵 하다가 도리어 황주판관ㆍ진주판관으로 좌천되었으나 이는 언로를 막는 일이라는 유사의 상주로 합문지후로 전임, 전중내급사로 승진되었다.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앞서 좌정언으로 직언하여 좌천된 일로 해서 화를 면했고, 의종 역시 그의 말을 좇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한다. 이 해 명종이 즉위하자 우승선ㆍ어사중승이 되어 많은 문신들을 화에서 구해내고, 무신들로부터는 고사의 자문을 받았고, 용호대장군을 겸임, 후에 상장군까지 겸하여 문무 겸직의 시초가 되었다. 대부소경ㆍ예부시랑ㆍ추밀원 부사ㆍ태자태보를 거쳐 1183년 중서시랑평장사ㆍ판호부사가 되고, 1187년(명종 17)권판상서 이부사가 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명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남평의 장연서원에 제향되었다.
문후식 文候軾(高麗 諡號 : 忠烈 官職 : 兵馬使) 1177년(명종 7) 문과에 급제, 한림원 학사로 여러관직을 거쳐 합문지후ㆍ이부시랑ㆍ전중내급사를 역임하고, 1198년(신종 1) 대부경 동북면 지병마사가 되었다.
문정식 文廷軾(高麗 官職 : 左代言)
문효식 文孝軾(高麗 官職 : 司空左僕射)
문유필 文惟弼(高麗 諡號 : 孝惠 官職 : 參知政事) 명종 때 추밀원사를 거쳐서 고종 때 판삼사사가 되었다. 1221년(고종 8) 수사공 좌복야, 이듬해 지문하성사가 되고, 1227년(고종 14) 참지정사ㆍ판예부사를 지냈다. 남평의 장연서원에 제향되었다.
문득준 文得俊(高麗 諡號 : 毅安 官職 : 禮部尙書)
문양부 文陽夫(高麗 諡號 : 章淑 官職 : 大將軍)
문극검 文克儉(高麗 字 : 貞夫 諡號 : 靖烈 官職 : 禮部尙書) 충선왕 때 문과에 급제, 좌정언ㆍ좌사의를 지내고, 1314년(충숙왕 1) 판도판서를 거쳐 개성윤이 되었다.
문 근 文 瑾(高麗 官職 : 版圖判書) 문숙선 文叔宣(高麗 字 : 德芳 號 : 淸道 諡號 : 忠貞 官職 : 提學) 1351년(충정왕 3) 문과에 급제, 한림원 학사ㆍ좌정언ㆍ지제교ㆍ사간원 헌납으로 원종훈에 책론되고, 보문각 제학을 지냈다.
문달한 文澾漢(高麗 諡號 : 忠翊 官職 : 贊成事) 우왕 때 대호군이 되고, 동지밀직사사 때 추성익조공신이 되었으며, 지문하성사를 거쳐 1388년(우왕 14) 문하평이로서 양광ㆍ경상도 도체찰사로 왜구 1천여 명이 옥주ㆍ보령 등지를 침범하고 개태사에 침입, 계룡산 일대를 노략질하자 왕안덕(王安德) 등 여러 장수와 함께 적을 대파하였다. 후에 우왕의 비위에 거슬려 삭직되었다가 다시 문하평리기 되어 추충익대보조공신의 호를 받고 찬성사가 된 후 순평군(順平君)에 봉해졌다. 김제의 저산서원(楮山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재도 文載道(高麗 官職 : 平海郡事) 1382년(우왕 8) 왜적 수천 명이 영천지방에 쳐들어와서 사람을 많이 죽였다. 그는 아버지를 업고 산골에 가 숨었는데. 왜적이 찾아와 아버지를 쏘아 맞혔다. 곧 살촉을 뽑고 칼을 휘둘러 왜적을 베었더니 왜적들이 굴복했다. 이 일이 임금께 알려져 명정되었다.
문 구 文 龜(高麗 官職 : 監務)
문세봉 文世鳳(高麗 諡號 : 康獻 官職 : 判典農寺事) 문장과 도학이 뛰어났으며, 1375년(우왕 1) 나주 목사를 거쳐 판전농시사에 이르렀다.
문세린 文世麟(高麗 官職 : 少府尹)
문익겸 文益謙(高麗 諡號 : 忠惠 官職 : 殿中內給事)
문익점 文益漸(高麗 字 : 日新 號 : 思隱 又 三憂堂 諡號 : 忠宣 官職 : 提學) 초명은 익첨(益瞻), 경덕재에서 수학하였다.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병과로 급제, 직강ㆍ박사 등을 거쳐 좌정언으로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갔다. 원나라 순제는 최유(崔濡)가 추대하는 덕흥군을 왕위에 대립시킬 계획으로 공민왕 폐위에 가담하기를 권유하였으나 불사이군의 충절을 내세워 강경히 거절, 이로 인하여 운남성(交趾)으로 유배되었다. 원 순제는 후에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석방, 귀국케 하였는데 당시 금수품으로 되어 있던 목화씨를 가져와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고향에서 재배, 우리나라 의류 및 경제상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공민왕은 충의에 감복하여 중현대부 예문관 제학에 임명하였으며, 1375년(우왕 1) 좌사의대부ㆍ우문관 제학ㆍ동지경연사에 오르고 시무팔조를 상소하였다. 그 후 전제개혁에 이색(李穡)ㆍ우현보(禹玄寶)ㆍ이림(李琳) 등의 편을 들어 병을 핑계러 서명하지 않으므로 조준(趙浚)의 탄핵을 받아 사직, 낙향하여 삼우의 뜻을 품고 은거하였다. 고려가 망하자 9년간이나 두문불출하였고 이태조가 친히 불렀으나 굳이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효행 또한 지극하여 왕의 특명으로 효자비가 세워지고 그가 사는 동네 이름을 효자리라 명명하였다. 성리학에도 밝았다. 태종 때 참지의정부로 강성군(江城君)에 봉해지고 부조묘를 세웠으며, 1440년(세종 22) 영의정에 추증, 부민후(富民侯)에 추봉되었다. 1461년(세조 7) 사당이 세워졌다. 남평의 정연서원(長淵書阮), 산청의 도천서원(道川書阮)에 제향되었다.
문달한 文達漢 (高麗 우왕 때 대호군(大護軍)이 되고, 밀직사동지사 재임시 추성익조공신(推誠翊祚功臣)에 책록되었다. 1388년(우왕 14)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양광경상도도체찰사(楊廣慶尙道都體察使)로 나갔을 때, 옥주(沃州) ·보령(保寧) 등을 침략하여 계룡산 일대를 노략질한 1000여 명의 왜구를 왕안덕(王安德) 등과 함께 추격, 공주 반룡사(盤龍寺)에서 대파하였다. 사소한 일로 우왕의 미움을 사게 되어 삭직되었다가, 최영(崔瑩) 등의 노력으로 문하평리에 복직,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이어 탐학이 심하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합포 ·철원 등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 삼사우사(三司右使)가 되었다. 공양왕이 즉위하자 이림(李琳)의 일파로 탄핵되어 다시 유배되었다. 그 뒤 풀려나, 1392년(공양왕 4) 순평군(順平君)에 책봉되었다. 김제 저산서원(楮山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중용 文中庸(高麗 字 : 道甫 官職 : 獻納)
문중성 文中誠(高麗 諡號 : 純質 官職 : 諫議大夫) 1385년(우왕 11) 5월에 문과에 급제, 한림원 학사가 되고, 합문지후ㆍ간의대부로 사직했다. 창왕 때 병부상서에 임명됐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405년(태종 5) 강성군의 후예라 하여 나라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문중실 文中實(高麗 諡號 : 毅安 官職 : 諫議大夫)
문중계 文中啓(高麗 號 : 滄洲 諡號 : 成淑 官職 : 禮部尙書) 문과에 급제하고 예부상서가 되었다. 조선이 개국되자 은거, 1395년(태조 4) 조정에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문계종 文繼宗(朝鮮 官職 : 兵馬節制使)
문효종 文孝宗(朝鮮 諡號 : 胡簡 官職 : 判中樞院事) 음보로 등용되어 좌군총제를 지내고, 1425년(세종 7) 진향 겸 등극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판중추원사를 지내고 치사, 궤장을 하사 받았다.
문 화 文 和(朝鮮 字 : 養中 호 : 晩隱 諡號 : 景惠 官職 : 都承旨) 1397년(태조 6) 낭증이 되고, 승정원 도승지ㆍ예문관 직제학ㆍ상서원정ㆍ경연참찬관ㆍ춘추관 수찬관 등을 지냈다.
문 임 文 稔(朝鮮 官職 : 牧使)
문 빈 文 彬(朝鮮 諡號 : 平翼 官職 : 僉節制使)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대장군이 되고, 1401년(태종 1) 좌명공신 4등으로 월천군(越川君)에 봉해졌다. 1409년 풍해도 첨절제사를 지냈다.
문 래 文 萊(朝鮮 字 : 子蓬 號 : 理谷 諡號 : 靖惠 官職 : 學者) 경사에 통하고 천문ㆍ지리ㆍ음양ㆍ산수ㆍ척도등에 밝았으며, 물레를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문 영 文 英(朝鮮 號 : 海隱 諡號 : 襄敏 官職 : 直提學) 1393년(태조 2) 문과에 급제, 홍문관 교리를 거쳐 직제학이 되었다. 그는 베 짜는 방법을 창안해 냈는데, 베가 되어진 것을 문영(文英)이라 한 데서 「무명」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문 치 文 致(朝鮮 官職 : 副護君)
문 유 文 猷(朝鮮 官職 : 大司成)
문 영 文 榮(朝鮮 官職 : 兵曹參議)
문천봉 文天奉(朝鮮 字 : 以敬 官職 : 漢城判尹) 1400년(정종 2) 사복시 부정으로 방간(芳幹)의 난 때 태종을 호위한 공으로 포상을 받고, 한성판윤을 지내고, 개령군(開寧君)에 봉해졌다.
문 민 文 敏(朝鮮 官職 : 判通禮門事) 1431년(세종 13) 호군을 거쳐 1441년 판서운관사, 이듬해 판통례문사에 이르렀다. 딸이 세종의 친선으로 세자의 승휘(承徽)가 되었다.
문 서 文 敍(朝鮮 官職 : 牧使)
문충세 文忠世(朝鮮 官職 : 右都知管) 1402년(태종 2) 세습되어 온 탐라국의 성주(星主) 고봉례(高鳳禮)를 좌도지관(左都知管), 왕자 문충세를 우도지관으로 삼았다.
문극충 文克忠(朝鮮 字 : 玉汝 官職 : 僉正)
문승서 文承瑞(朝鮮 字 : 顯照 官職 : 水軍節度使) 무과에 급제하고, 부승지로 공충도 수사를 지냈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녹훈되었다.
문치창 文致昌(朝鮮 官職 : 監察) 문종 때에 사헌부 감찰이 되고, 1455년(세조 1) 노산군(단종)의 화를 구하려다가 연폄되었다. 1461년(세조 7) 국형을 받았으나 충신의 후예라 하여 사유되어 구성으로 유배되었다. 저서에 ≪삼우당실기(三憂堂實記)≫가 있다.
문 찬 文 贊(朝鮮 號 : 明泉 官職 : 郡守)
문 완 文 琬(朝鮮 字 : 亨玉 號 : 敬菴 諡號 : 翊定 官職 : 禁府都事)
문 모 文 모(朝鮮 官職 : 牧使)
문여충 文汝忠(朝鮮 官職 : 郡守)
문여령 文汝寧(朝鮮 官職 : 監察) 1427년(세종 9)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 검열ㆍ사헌부 감찰을 지내고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황제로부터 의대를 상으로 받고 귀국 후 홍문관 교리ㆍ헌납이 되었다.
문 순 文 珣(朝鮮 官職 : 吏曹參議)
문 린 文 璘(朝鮮 官職 : 司諫)
문상능 文尙能(朝鮮 號 : 忍齋 官職 : 左承旨)
문상행 文尙行(朝鮮 諡號 : 敬肅 官職 : 禮曹參議) 생원으로 1411년(태종 11) 문과에 급제, 판관ㆍ주부를 거쳐 용담현령에 이르렀다. 뒤에 예조참의에 올랐다.
문사영 文士英(朝鮮 字 : 希賢 號 : 進明齋 官職 : 五衛都摠管)
문송수 文松壽(朝鮮 官職 : 正郞)
문몽원 文夢轅(朝鮮 字 : 仲吉 號 : 喚醒 官職 : 縣監)
문회지 文繪地(朝鮮 號 : 錐錁齋 官職 : 學者) 사마시에 장원하여 생원이 되었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가 피화되자 은거하여 도학에 전념, 실천궁행에 힘썼다.
문윤명 文允明(朝鮮 字 : 晦叔 官職 : 奉常寺副正)
문계창 文繼昌(朝鮮 號 : 養心亭 官職 : 牧使)
문서구 文瑞龜(朝鮮 字 : 長卿 官職 : 郡守)
문자신 文自愼(朝鮮 官職 : 牧使)
문익성 文益成(朝鮮 字 : 叔 號 : 玉洞 官職 : 府使) 1549년(명종 4) 사마시를 거쳐 1566년(명종 21)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 사헌부 지평과 성균관사예를 지냈다. 합천의 도연서원(道淵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소조 文紹組(朝鮮 官職 : 別坐)
문 치 文 致(朝鮮 字 : 思成 諡號 : 忠襄 官職 : 漢城判尹)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 정국공신 4등으로 문원군(文原君)에 봉해졌으며, 한성판윤 겸 지의금부사를 지냈다.
문 온 文 蘊(朝鮮 官職 : 府使)
문경도 文敬度(朝鮮 字 : 彦休 號 : 官職 : 直提學)
문자수 文自修(朝鮮 字 : 道叔 號 : 勉修齋 官職 : 縣監) 세종 때 생원시에 합격, 1454년(단종 2) 7월 장흥고 부직장에 이르고, 1455년(세조 1) 12월 녹사로서 좌익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이어 곡성ㆍ함열의 현감을 지내고 난향, 능주향교에다 사마재와 향사당을 세워 후학을 양성했다. 능주의 삼현사(三賢祠)에 제향되었다.
문구연 文九淵(朝鮮 字 : 永叔 號 : 月坡 官職 : 吏曹參議)
문우창 文佑昌(朝鮮 官職 : 牧使)
문 행 文 行(朝鮮 官職 : 都事)
문기우 文起佑(朝鮮 官職 : 僉正)
문승수 文承洙(朝鮮 官職 : 縣監)
문승사 文承泗(朝鮮 字 : 聖源 官職 : 成均館權知)
문후개 文後開(朝鮮 號 : 花峯 官職 : 學者 玄石門人)
문헌징 文獻徵(朝鮮 字 : 聖言 官職 : 郡守)
문 려 文 勵(朝鮮 字 : 子善 號 : 雲溪 官職 : 大司諫) 1553년(명종 8)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정원 정자가 되고,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와 같이 토적의 공으로 2등 공신이 되고, 왕을 호종하여 선무공신 1등에 녹공되었다. 헌납ㆍ교리를 거쳐 대사간을 지냈다.
문여량 文汝良(朝鮮 官職 : 漢城尹)
문손관 文孫貫(朝鮮 官職 : 司成)
문경동 文敬仝(朝鮮 字 : 欽之 號 : 滄溪 官職 : 司成) 1495년(연산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벼슬을 거쳐 비안현감ㆍ강원도 도사를 역임, 종부시첨정으로 승진, 춘추관 편수관을 겸했다. 1508년(중종 3) 양산군수가 되고 1510년 삼포왜란 때 왜적을 토벌하여 공을 세우고 사성이 되었으며, 예천군수ㆍ청풍군수를 지냈다. 시문에 뛰어났다. 영양의 창계서원(滄溪書阮)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창계집(滄溪集)≫이 있다.
문 걸 文 傑(朝鮮 初名 : 彬 字 : 彦章 官職 : 府使) 1480년(성종 1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의정부 사록, 회덕ㆍ영동의 현감, 헌납을 지내고 1499년(연산군 5) 양양부사가 되었다.
문 근 文 瑾(朝鮮 字 : 士輝 號 : 梅溪 官職 : 參判) 사마시에 합격, 1495년(연산군 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이 되고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여≪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여러 청환직을 역임하고, 김해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으며, 1508년(중종 3) 금산군수로 치적을 올려 상을 받았다. 1516년 대사간ㆍ동부승지를 거쳐 이듬해 도승지를 지냈고, 특히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신진사류로 중종의 신임을 받아 경상도 관찰사로 전직, 1910년(중종 14) 기묘사화 때 조광조의 처형을 통박하다가 파직되었다. 1521년 다시 참판에 기용 되었으나 또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용궁의 기천서원(箕川書阮) 제향되었다.
문 관 文 瓘(朝鮮 字 : 伯玉 號 : 竹溪 官職 : 掌令) 사마시에 합격, 1507년(중종 2)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검열을 거쳐 안음현감으로 부임하여 전임인 정여창(鄭汝昌)과 같이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이 전정(前鄭)ㆍ후문(後文)이라고 찬양했다. 지평을 거쳐 1518년 주청사의 검찰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장령ㆍ장악원 첨정을 지냈다. 용궁의 기천서원에 제향되었다.
문홍도 文弘道(朝鮮 官職 : 府使)
문 위 文 緯(朝鮮 字 : 順甫 號 : 茅溪 官職 : 縣監)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 김면(金沔)과 함께 왜군과 싸웠다. 후에 류성룡(柳成龍)의 천거로 동몽교관이 되고, 이어 선공감 주부ㆍ감찰을 역임, 광해군이 즉위하자 낙향했다가 인조반정 후 고령현감이 되었다. 거창의 용원서원(龍元書阮)에 제향되었다.
문덕교 文德敎(朝鮮 字 : 可化 號 : 東湖 官職 : 刑曹佐郞) 1585년(선조 18)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전적ㆍ형조좌랑을 지냈으며 문명이 높았다. 임진왜란 때 일가족이 왜적과 항거하다가 순절하였다. 함흥의 문회서원(文會書阮)에 제향되었다.
문 삼 文 參(朝鮮 字 : 汝魯 號 : 白草堂 孝子) 진사로서 형 벽(壁)과 함께 극효하더니 부모상을 당하여 3년 여묘할 때 근처의 초엽이 빛을 잃다가 3년 후에 복영하니 그 마을을 백초동이라 하였다. 장흥의 백동사(白洞祠)에 제향되었다.
문익주 文益周(朝鮮 字 : 仲陏 號 : 白蓮堂 孝子)
문홍운 文弘運(朝鮮 字 : 汝幹 號 : 梅村 官職 : 進士) 1612년(광해군 4) 진사가 되고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원종훈에 책록되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행의가 독실해서 유림의 추앙을 받았다. 합천의 임천서원(臨川書阮)에 제향되었다.
문홍원 文弘遠(朝鮮 號 : 慕杜軒 官職 : 內禁衛將)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 임해군이 역모죄러 정배당하자 내금위장으로서 궁내의 경비를 맡아보다가 3개월 만에 ≪불귀사(不歸詞)≫를 짖고 고향에 돌아가 은거하였다.
문경호 文景虎(朝鮮 號 : 嶧陽 官職 : 察訪)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와 더불어 창의하였다.
문광복 文光福(朝鮮 字 : 仲綏 號 : 奎軒 官職 : 習讀官) 명종 때 진사가 되고 음보로 훈련원 습독관을 지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호섭(虎燮)과 함께 금산성 싸움에 참가, 왜적과 싸우다가 적의 화살에 맞아 아들과 함께 순사하였다.
문상표 文尙彪(朝鮮 號 : 湖隱 官職 : 兵馬節制使)
문위세 文緯世(朝鮮 字 : 叔章 號 :楓庵 官職 : 牧使) 1567년(명종 22) 진사가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박광전(朴光前)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군량 조달 등으로 공을 세워 1595년(선조 28) 용담현령이 되었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읍민을 동원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많은 왜군을 무찌른 공으로 1600년(선조 33) 파주목사에 임명되었다. 그의 아들 원개(元凱)ㆍ영개(英凱)ㆍ형개(亨凱)ㆍ홍개(弘凱)가 모두 차의하니 충절의 모범이 되었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문장과 덕행이 뛰어났다. 장흥의 강성서원(江城書阮)에 제향되었다.
문홍헌 文弘獻(朝鮮 號 : 敬庵 官職 : 進士)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진사로서 고경명(高敬命)을 따라 금산에서 싸우다가 패하자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의 막하에서 진주성에서 집결한 의병장들과 합류하여 분전, 성이 함락되자 최경희와 함께강에 투신 자살했다. 능주의 포충사(褒忠祠)에 제향되었다.
문희성 文希聖(朝鮮 號 : 止軒 官職 : 知中樞府事) 1594년(선조 27) 무과에 급제, 1597년 정유재란 때 전공을 세웠고, 광해군 때는 광주목사를 거쳐 방어사로서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요동 싸움에 출전하여 강홍립과 함께 후금에 투항했다. 화의 후 돌아와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문재도 文載道(朝鮮 字 : 戒器 號 : 休軒 官職 : 左水使) 1597(선조 30) 정유재란 때 백의로 관군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하여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한 공으로 3군 수령을 거쳐 경상좌도 수군절조사가 되었다.
문기방 文紀房(朝鮮 官職 : 守門將) 무과에 급제, 수문장을 지내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남원에서 싸우다가 적에게 포위되어 격전 끝에 전사했다. 남원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문희현 文希賢(朝鮮 官職 : 判官)
문석생 文石生(朝鮮 號 : 竹溪 官職 : 義兵)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도원수 장만(張晩)의 막하에서 싸우다가 강도(江都)에서 순절했다.
문 회 文 晦(朝鮮 字 : 自明 官職 : 義禁府事)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을 고변하여 진무공신 3등으로 오천군(鰲川君)에 봉해졌다. 동지의금부사를 지냈다.
문상례 文尙禮(朝鮮 官職 :將軍)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의주 서성의 장군으로서 역전 끝에 전사했다. 구암사(龜巖祠)에 제향되었다.
문덕겸 文德謙(朝鮮 官職 :敎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왜병이 동래를 침공하자 부사 송상현(宋象賢)과 함께 역전하다가 성이 함락되자 순절했다.
문존도 文存道(朝鮮 號 : 退亭 學者)
문이창 文以昌(朝鮮 字 : 義仲 號 : 五松 丙子胡亂義士 )
문희순 文希舜(朝鮮 號 : 太古亭 官職 :副護軍)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여 여산까지 갔다가 강화가 이루어지자 분개하여 고향에 태고정을 짓고 은거하였다.
문성흠 文聖欽(朝鮮 官職 :都摠管 ) 무과에 급제,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공을 세웠고, 벼슬을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이르렀다.
문수빈 文守彬(朝鮮 歌人) 숙종 때 김수장(金壽長)ㆍ김천택(金天澤) 등과 함께 경정산 가단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해동가요(海東歌謠)≫에 그의 시조가 전한다.
문천두 文天斗(朝鮮 字 成七 號 : 睡村 學者)
문영후 文榮後(朝鮮 字 : 仁卿 官職 : 察訪)
문징후 文徵後(朝鮮 官職 : 察訪)
문익빈 文益彬(朝鮮 字 : 有文 官職 : 府使)
문덕구 文德龜(朝鮮 字 : 子夏 官職 : 禮曹佐郞)
문덕린 文德麟(朝鮮 字 : 聖休 官職 : 通禮)
문재중 文在中(朝鮮 字 : 吉甫 官職 : 縣監)
문계동 文啓東(朝鮮 號 : 筌窩 學者)
문동도 文東道(朝鮮 字 : 聖源 號 : 敬菴 學者) 일찍이 성리학을 강마하여 학행으로 문명을 떨쳤다. 숙종 때 후릉참봉과 세자익위사 부솔에 임명되었으나 불취하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했다. 행의와 문장이 뛰어났다. 합천의 용연서원(龍淵書阮)에 제향되었다.
문복형 文復亨(朝鮮 字 : 來陽 官職 : 察訪)
문형중 文衡中(朝鮮 字 : 邦彦 官職 : 佐郞)
문도신 文道新(朝鮮 字 : 聖甫 官職 : 節制使) 영조 때 무과에 급제, 나숭대(羅崇大)의 반란이 있자 동생 도환(道桓: 구례현감)과 같이 토평, 그 공으로 부산 병마절제사를 지냈다.
문봉수 文鳳壽(朝鮮 官職 : 典籍)
문오채 文五采(朝鮮 字 : 天素 官職 : 典籍)
문시룡 文始龍(朝鮮 字 : 賢之 官職 : 戶曹佐郞) 1753년(영조 2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 교검을 거쳐 예조좌랑ㆍ호조정랑ㆍ춘추관사가 되었다.
문약연 文躍淵(朝鮮 字 : 淵天 官職 : 典籍)
문찬규 文燦奎(朝鮮 字 : 光五 號 : 泮菴 官職 : 都正)
문극효 文極孝(朝鮮 官職 : 都事)
문봉익 文鳳翼(朝鮮 字 : 德徵 官職 : 禮曹參議) 1798년(정조 2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전적을 거쳐 예조참의가 되었다.
문봉기 文鳳岐(朝鮮 字 : 聖遇 號 : 竹友堂 官職 : 典籍)
문응규 文應奎(朝鮮 官職 : 五衛將) 1811년(순조 11)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 공을 세워 그 공으로 오위장이 되었다. 의주의 학봉사(鶴峰祠)에 제향되었다.
문범룡 文範龍(朝鮮 字 : 洪瑞 號 : 安谷 官職 : 成均進士)
문기호 文基浩(朝鮮 號 : 養吾 義士) 1811년(순조 11)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정주에 가서 홍경래를 설득하려고 성에 들어가 난군을 초유하려다가 살해되었다. 의주의 학봉사에 제향되었다.
문경애 文慶愛(朝鮮 官職 : 判尹)
문동벽 文東璧(朝鮮 字 : 瓊叔 官職 : 掌令)
문학천 文學天(朝鮮 字 : 明普 號 白雲處士 學者) 천성이 고명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친상에 삼년여묘할 때에 호랑이가 엄호했다. 이어 둔적하여 결초암(백운암)을 세운 후 비바람을 무릅쓰고 종신토록 조석으로 성묘를 했고 학문에 힘썼다. 정재규(鄭載圭)ㆍ정의림(鄭義林)과 종유, 개탄시가를 지었으며 행의로 이름이 높아 세인이 백운처사라 일컬었다. 저서에 ≪백운집(白雲集)≫이 있다.
문익형 文益亨(朝鮮 字 : 安之 號 : 無㦖堂 學者)
문재인 文在仁(朝鮮 字 : 聖則 號 : 又南 孝子)
문채오 文采五(朝鮮 字 : 順汝 號 : 耕讀齋 孝子)
문봉휴 文鳳休(朝鮮 字 : 明直 號 : 心巖 官職 : 都正)
문장봉 文章鳳(朝鮮 字 : 良淑 號 : 德菴 孝子)
문 후 文 後(朝鮮 字 : 行先 號 : 練江齋 孝子)
문달환 文達煥(朝鮮 字 : 德卿 號 : 遯齋 義士)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의 문인. 그는 스승을 따라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킨 후 1906년 6월 관군ㆍ일군과 격전 끝에 패전하자 최후까지 스승을 따르다가 체포되어 12의사로 칭송되었다. 그 후 감옥에서 풀려나와 은거생활로 학문에만 전심, 1982년 독립유공자로 포상이 내려졌다. 능주의 부춘사(富春祠)에 제향되었다.
문태수 文泰洙(韓末 義兵將) 1908년(융희 2) 함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덕유산을 근거지로 영남ㆍ호남ㆍ호서 일대에서 활약, 호남 의병장이 되었다. 이듬해 지례군ㆍ안의군ㆍ용담군ㆍ남원군 등지에서 일본군을 무찌르다 피체되어 사형당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문병현 文炳鉉(韓末 字 : 士日 抗日鬪士) 국운이 쇠퇴하여지자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켜 덕유산 원통사를 거점으로 군사를 양성하고, 박춘실(朴春實)을 선봉장으로 일본군과 싸워 큰 전공을 세웠다. 후에 체포되어 경성미결소에서 죽었다 문석환 文奭煥(韓末 字 : 英伯 號 : 雲樵 抗日鬪士)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의분을 참지 못하여 참판 민종직(閔宗直)과 더불어 창의하여 홍양에서 의거, 일본군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경성 감옥에서 대마도로 이송되고, 최익현(崔益鉉)과 옥중생활을 같이 하였다. 경술합방이 발표되자 울분으로 병을 얻어 죽었다.
문양목 文讓穆(韓末 獨立運動家) 미국에 건너가 대동보국회 회장으로 있다가 1908년(융희 2) 한국정부의 외부고문 스티븐스가 귀국하여 기자회견에서 일본의 보호정치를 찬양하자 이에 격분하여 재미 애국단체와 화합하여 진상규명 총대 4명의 한 사람으로 뽑혀 그를 방문, 여전히 일본의 보호정치를 지지함에 격분하여 구타했다. 이 해 장인환(張仁煥)ㆍ전명운(田明雲) 등이 스티븐스를 살해하자 그들의 변호비용으로 의연금 7백 달러를 모금한뒤 판사 전담위원이 되었다.
문용기 文鏞祺(韓末 獨立運動家) 군산 영명학교 교사로 있다가 3ㆍ1운동이 일어나자 이리역 광장에서 개최된 익산군민대회에서 연설, 궐기할 것을 호소하다 왜경의 칼에 찔려 순국했다.
문창범 文昌範(韓末 獨立運動家) 시베리아에 망명한 후 1917년 쌍성에서 전로한족중앙총회를 결성하고 그 회장이 되었다. 1919년 4월 임시정부 수립 당시 국민의회 대표로 참여, 초대 교통총장이 되었다가 5월 25일 개각 때 사임하고, 그 후에도 계속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문창수 文昌秀(韓末 獨立運動家) 유학자호 학문을 닦다가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항일투쟁을 전개, 나중에 일본군에 체포되어 악독한 고문을 당한 끝에 눈알을 뽑히면서도 끝까지 항쟁하였다.
문창숙 文昌淑(韓末 獨立運動家) 3ㆍ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에 참가하였고 나중에 만주로 망명, 신흥무관학교를 수료하였다. 그 후 서로군정서에 들어가 부사를 거쳐 중대장이 되었고, 1923년에는 부하 하순경(河舜卿) 등 5명을 거느라고 평북 강계에 잠입,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본의 밀정 홍종락(洪鍾洛)을 암살한 후 돌아갔으나, 재차 국내에 잠입하다 체포되어 사형당하였다. 1977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문창학 文昌學(韓末 一名 : 彦俊 獨立運動家) 일본 헌병보조원으로 있다가 전향하여 3ㆍ1운동에 참가하고 만주에 망명, 서로군정서에 가입,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국내에 밀파되어 신건원(新乾阮) 주재소를 습격하다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문명훤 文明烜(韓末 獨立運動家) 3ㆍ1운동 때 맹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 1920년 임시정부 내무서기사 되고, 1921년 미국에 갔다가 1923년 귀국하여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3년간 복역했다.
문일평 文一平(韓末 號 湖巖 史學者) 1910년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 정치학부를 중퇴, 상해로 건너가 대공화보사에 근무했다. 뒤에 귀국하여 중동ㆍ중앙ㆍ배재ㆍ송도 중학에서 교편을 잡고 중외일보 기자로 있다가 1933년 조선일보 편집고문으로 취임, 7년간 논설을 집필하고, 국사연구에 정진하여 많은 논문을 남겼다.
문세영 文世榮(韓末 號 : 靑嵐 한글학자) 배재교보를 졸업, 뒤에 배재고보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윤재(李允宰)와 함께 사전 편찬 사업에 종사했으며, 1939년 최초로 국어사전인 ≪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을 간행했다. 이듬해≪수정증보조선어사전(修正增補朝鮮語辭典)≫을 출판하고, 1954년 국어사전간행회에서 ≪수정증보국어대사전(修正增補國語大辭典)≫으로 다시 개편하여 출판, 그 밖에도 여러 권의 국어소사전과 이와 유사한 사전을 간행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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