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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7대 불가사의에 하나가 바로 마야문명 입니다. 뭐가 그렇게 불가사의 한지, 세계 랭킹 7위면 꽤 대단한 거죠? 짧게나마 마야문명에 대한 불가사의를 3~4편에 걸쳐서 실어 볼까 합니다. ^^
마야문명은 중미 유타칸 반도 부근에서 BC2500년경에 시작되어
마야문명은 1839년 두 명의 미국인에 의해 [코판 유적]이 나타난 후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어 지금까지 많은 고고학자와 문자,언어 학자의 끊임없는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이 “마야”(maya)라는 말은 고대시기 마야인 스스로가 붙인 명칭은 아닙니다. 명칭 유래에서 보듯이 마야에선 전체를 통일한 정치 체계의 흔적이 보이지 않으며
융성기는 AD 250경~AD 900경 고전기이며 따라서 이렇게 보면 마야는 흔히 생각하는 초 고대 문명이 아닙니다. |
▣ 마야 문명의 4대 불가사의
마야 문명이 지니고 있는 신비로운 불가사의를 하나씩 살펴보죠 ^^
마야문명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문명보다도 신비롭고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를 안고 있습니다.
첫째 마야인들은 다른 어떤 문명과도 견줄 수 있는 뛰어난 문명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인간이 살기 부적합한 밀림 속에 도시를 건설했냐는 것입니다.
이들이 도시를 세운 열대 우림 지역은 풀과 나무가 무성한 밀림으로 덮여있고 표범, 멧돼지, 독사, 독도마뱀, 독거미 등이 우글거리며, 또한 축축한 습기와 더위로 전염병이 유행하기 쉽습니다.
고대 4대 문명의 발상지들이 강을 끼고 온대기후에 속해 기후가 좋고 비옥한 토지에서 발생했던 것과는 달리 마야문명은 무더운 밀림 속에서 이룩되었다는 점이 첫번째 입니다.
둘째. 마야인들이 세운 거대한 석조 건축물의 비밀입니다. 그들이 세운 건축물은 인근 어느 민족보다도 뛰어났고 규모도 컸습니다.
[아래 사진은 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재로 지정된 마야의 피라밋입니다.] |
이렇게 거대한 건축물을 건설하면서도 마야인들은 도시와 밀림을 연결하는 포장도로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또한, 수레바퀴의 사용법을 알고 있었음(무덤 속에서 바퀴 달린 장난감 출토)에도 불구하고 바퀴를 사용하지 않고 그들이 직접 그 많은 자재를 운반했다고 합니다.
셋째.
다른 고대문명보다 훨씬 앞선 역법, 천문학, 수학입니다. 그리스·로마 시대에도 사용되지 않았고 근세기에 들어와서 사용한 0(Zero)의 숫자를 마야인은 일찍이 실용화한 점이 특이 합니다.
카툰이란 단위로 시간을 측정했던 마야인들은 3세기경부터 이미 0 을 포함한 20 진법 숫자 체계를 갖고 계산했습니다. 0 의 사용은 인도보다는 3 백년, 아라비아 상인보다는 7 백년 정도 앞선 것입니다.
마야의 천문학은 매우 발달하여 그들은 1년이 365.2420 일이라고 밝혀놨습니다. 오늘날 정확한 과학조사로 밝혀진 날짜는 365.2422 일이니 불과 17.28초의 차이죠. 그들의 수치계산이 얼마나 정확했던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마야인들은 금성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갖고 있어 584일 주기의 금성력(金星曆)까지 만들었는데, 그들은 태양력의 8년 동안에 금성력이 꼭 0.4일 어긋난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넷째
찬란한 마야문명을 꽃피었던 마야인은 9세기 이후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고전기의 마야의 도시는 이카튼(7,200일)의 종료 때마다 기념비를 남겼는데, 790년에는 19개의 밀림도시의 모습이 사라졌고 810년에는 12개 도시로 줄었으며 830년에는 불과 3개의 도시만이 남았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흔적도 없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 흔적도 없는데, 그들은 문명의 후계자도 남기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전설 하나 남겨놓지 않고 사라졌습니다.
왜 마야문명이 멸망했는가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우선 내부적인 요인으로 소수 지배계층에 대한 피지배계층의 반란을 들 수 있고 ,외부요인으로는 북쪽의 아즈테카 같은 강력한 종족의 침입을 들 수 있습니다.
다른 관점에서의 멸망의 원인으로는 지역적인 기후조건(열대 밀림지역), 토양의 생산성 부족, 문명 진보의 거부를 들 수 있습니다만,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습니다.
척박한 기후와 화전에 의한 토질 악화, 탐욕스러운 유럽의 정복자들과 전염병, 바로 이런 몇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멸망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까지 살아 있는 마야인의 후예는 약 100만 명에 이른다고 하지만 그들은 고대 자신들의 선조가 이룩했던 찬란한 마야문명과는 완전히 다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마야문명의 발달과 몰락
Chapter 1. 역사
* 마야시대의 연표
B.C 11,000 .첫 사냥꾼들이 마야의 고지와 저지에 정착함
1200-1000 올멕
1800-900 고전기이전의 마야
900-300 중기 고전기이전
300 B.C. - A.D. 250 후기 고전기이전
A.D. 250-600 고전기의 마야
A.D. 600-900 중기 고전기
A.D. 900-1500 후기 고전기
A.D. 1500-1800 식민지기간의 마야
A.D. 1821 멕시코로 독립
마야는 B.C 3000년경 멕시코 남부 치아빠스 주(chiapas)의 고원에 거주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B.C 1500년경 농경을 시작하게 되었다. B.C 8세기에는 멕시코 남부와 과테말라 중심의 중미 여러 지역에 거주하여 세력을 확장하였고 B.C 5세기에는 띠깔(tikal) ,와학뚠 (Uaxactun)을 중심으로 번성하여 A.C 300년경까지 문화가 발전하였다. 이때의 중심도시는 과테말라 북부 엘뻬뗀(EL PETEN)이었다. 마야는 크게 구 마야와 신 마야로 나눌 수 있는데 구 마야는 A.C 300~ 800년 을 말하며 과테말라에서는 띠깔과 와학뚠이 중심 도시였고 멕시코에서는 치첸이짜(chichen-Itza)와 빨렝께(Palenque)였으며 그들은 동일한 언어를 사용했다. 또한 달력과 문자, 천문학, 수학등에 능했으며 A.C 5세기 이후에 가장 번성했고 9세기 중엽 갑작스런 침묵의 시기를 맞게 되었다. 이 무렵에는 사람들이 대도시를 떠났으며 궁궐, 신전, 피라밋과 같은 위대한 축조물이 정글에 파묻히게 되었다. 이러한 마야인들의 행동에 대해서 여러 학자들이 많은 가설을 내놓았는데 그것의 내용은 이러하다.
1. 고지대였기 때문에 농토가 부족했을 것이다.
2. 갑작스러운 전염병이 창궐했을 것이다.
3. 지배계급인 제사장들에 대한 반기였을 것이다.
4. 외적이 침입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가설일 뿐 아직까지 정식으로 확인된 바는 없다. 그후 구 마야 시대를 지나 신 마야 시대로 접어드는데 신 마야시대는 A.C 800~ 1500년을 말한다. 이때의 중심도시는 유까딴 반도(Yucatan)였고 그들은 멕시코 북부 지역의 똘떼카 문화권과 국경지역에서 활발한 교류를 펼쳤다. 그 후 똘떼카족은 서서히 유카딴으로 진출하여 마야의 주요부족이 되었다.9세기 후엽 이짜족(Itza)은 치첸이짜(chichen-itza)에 자리를 잡고 피라밋을 건설하였다. 그들의 신앙은 꾸꿀깐(Cuculcan)이었다. 이들과 똘떼카족의 활발한 교류는 똘떼카 문화권에서 께짤꼬아틀이라고 부르는 깃털뱀으로 입증되고 있다. 그 후 9세기 후엽부터 12세기 후엽은 평화로운 시기였다. 치첸이짜(chichen-itza)와 우슈말(Uxmal), 마야빤(Mayapan) 이 세도시의 동맹때문이었는데 12세기 말 마야빤의 유까딴북부 정복으로 동맹은 깨어지고 마야빤이 12개도시를 중심으로 제국을 건설하고 15세기 중엽까지 통치를 하였다. 하지만 1450년경 신 마야제국은 제국의 구성원 마야족, 이짜족간의 전쟁으로 도시가 파괴되기에 이르렀고 1536년 스페인에게 정복당했으며 끼체족이 과테말라고원에서 맹위를 떨치기는 하였으나 이도 내란으로 붕괴되었고 곧 정복당했다.
Chapter 2. 마야문명의 특징
마야인들은 교역을 하기도 했으며 통화의 개념도 있었다. 또한 근대적인 개념은 아니지만 장도 섰던 것으로 알려진다. 유카탄반도의 소금·벌꿀·목면 제품과 중앙·남부지방의 산물인 플린트제품, 카카오, 케찰섬의 깃털 등의 교역이 성행하였는데, 카카오 열매는 일종의 통화와 같은 구실을 하였다. 이 교역은 유카탄에서 타바스코지방에 이르는 해상로를 통해서 하였는데, 내륙지방에도 장이 섰으며, 또한 멕시코에서 오는 포추테카와의 접촉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야인들은 초가에서 살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거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취락에는 규율성이나 통일성이 없이 지형적 제한에 따라 마음대로 건물을 지어놓은 데 지나지 않아, 멕시코 중앙고원이나 잉카의 고대 계획도시와는 전연 그 성격을 달리한다.
이러한 취락으로 구성된 마야의 사회가 어떠한 구조로 이루어졌는가에 대해서 많은 주장이 있으나, 혈통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엄격하게 제한되는 종류의 계급사회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이며, 신관(神官)·군인·정치지도자·상인 등은 알메헨이라 불리는 귀족계층에 속하여 일반농민과는 구별되었다. 또한 일반평민 밑에는 주로 전쟁포로들로 구성된 노예계층이 있었고, 이 밖에 잉카의 야나코나와 비슷한 수장 및 귀족의 농노가 있었다. 정치권력은 에스파냐 사람들이 침입할 무렵 멕시코계의 군인 지배 계급에 의해 독점되었다.
또한 마야는 어떤 문명보다 발달한 역법을 가졌다. 그러나 그것은 귀족계층이 독점했을 뿐 일반평민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역법·신성문자들은 잉카의 경우와 비교하면 체계적·복합적이고 표기수단도 발달되어 있다. 또한 마야인은 일종의 윤회사관을 믿고 있었고, 세계를 4방향으로 나누어 각 방향마다 색으로 표시하여 구분하였으며, 천공에 13층, 지하에 9층의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여 천체의 운행을 여기에 들어맞게 하였다. 또한 천체의 위치를 길고 짧은 2개의 역으로 표시하고 이를 신성문자로 표기하였으며, 신들의 속성에는 각각 상반된 이원성을 부여하였는데, 이러한 것들은 멕시코의 톨테크 및 아스테크계 문화와 유사성이 있어 주목된다. 마야의 역은 260일의 단력과 365일의 장력에 의해 동시에 표현되어 이를 짝맞추는 것이 결정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사람의 운명은 이를 짝맞추어 나타나는 4개의 부호에 따라 정해진다고 생각하였고, 모든 의례는 이 역에 따라 시행되었다. 그리고 이에 수반해서 천체의 관측이 엄밀히 행하여져 태양의 방위, 달 및 별의 운행이 관찰되었으며, 금성·화성의 주기를 정확하게 산출하고 있었다. 의례는 한 해 동안 다양한 형태로 행하여진 것으로 보이는데, 톨테크계의 문화가 침투할 무렵에는 인신희생의 관습이 널리 퍼져 있었다. 역이나 다른 것을 표기하기 위하여 숫자와 신성문자가 발달하였다. 숫자 이외의 신성문자에 관해서는 극히 일부만 해독되었다.
Chapter 3. 마야문명의 흥망과 몰락
마야를 정의하자면 고대 멕시코 및 과테말라를 중심으로 번성한 인디오 문명 및 이를 이룩한 민족의 명칭이겠지만. 이렇게 간단하게 말 할 수는 없다. 마야는 아직 알려진 것이 없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으로도 우리를 자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야는 AD 300년경에 이르러 고전기라 불리는 융성한 시대를 맞이한다. 마야문화의 고전기는 900년경까지 계속되는데, 600년을 경계로 그 이전을 전기, 이후를 후기로 나눈다. 고전기 문화의 중심지는 페텐지방의 북동지역으로, 티칼·와샤크툰·나쿰·나랑호 등의 거대한 신전도시가 이 시대에 잇달아 세워졌다. 아치와 비슷한 호 모양의 구조물을 떠받든 거대한 건조물, 역법, 신성문자, 특징적인 토기 및 석조각물 등은 모두 이 시대에 나타났고 이 마야 문화의 영향은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어 영향을 주었다.(마야문화의 영향은 이곳으로부터 서 우수마신타강 유역의 피메드라스 네그라스·야슈칠란·알탈드사크리피시오스·팔렝케 등으로 미치고 동시에 동 페리세지방의 벤케 비에호 및 푸시르하와 온두라스의 코판에도 자극을 주었다.
또한 고전 전기에는 멕시코고원의 테오티우아칸문화의 영향이 과테말라 고지에 미쳐 카미날퓨의 밀라프로레스기 문화가 창조되었는데, 티칼 및 유카탄지방에도 같은 영향을 받은 듯한 흔적이 약간 남아 있다.)
고전 후기의 300년 사이에 마야문화는 더욱 번성하여 페텐 및 우수마신타 지역의 신전도시는 장대화하는 한편, 북부의 유카탄지방에도 리오 베크·체네스 푸크 등의 건축양식이 생기고, 욱스말과 그 밖의 지역에는 거대한 피라미드와 신전 등이 건조되었다. 석조각·토기 등도 많이 만들어졌으나, 이와 함께 보남파크 신전에서 볼 수 있는 큰 벽화와 티칼·코판·키리과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조각과 신성문자를 새긴 대석주등도 만들어졌다. 이들 석주에는 마야의 역년이 새겨져 있는데, 900년 이후에 새로 세운 석비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아서 900년 이전에 고전 마야는 종식된 것으로 보인다. 고전 마야가 쇠퇴한 원인은 잘 알려지지 않고 내란설, 토양의 황폐설 등이 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었으며, 최근에는 타바스코지방에서 침입한 멕시코계 주민에게 정복되었다는 설도 대두되고 있다.
그리고..페텐 지방의 고전 마야문화가 쇠퇴한 후 유카탄 반도에서는 푸크 양식의 마야문화가 얼마 동안 계속되었으나 10세기가 끝날 무렵 멕시코에서 톨테크계(系)의 군사적 집단이 침입하여 마야족을 정복하고, 치첸이차를 중심으로 유카탄반도를 지배하였다. 이어 13세기에 들어서는 타바스코지방에서 이차족이 침입하여 마야판시(市)를 건설하고 코콤왕조를 세웠다.그러나 코콤왕조는 15세기 중반에 제국의 구성원 마야족, 이짜족간의 전쟁으로 도시가 파괴되기에 이르러 내란 때문에 무너지고 유카탄반도는 십여 개의 작은 수장국으로 분열된 채 16세기에 에스파냐에 의해 정복되었다. 그리고 과테말라 고지에도 11세기경 톨테크계 주민이 침입하여 키체족의 우타트란, 카크치켈족의 이심체 등 멕시코 양식의 신전도시가 이 시대에 건설되었다.
고로 정리를 하자면 AD 300년부터 고전기라 불리는 융성한 시대를 맞이하며 화려한 문화를 꽃피우던 마야는 900년 이전에 종식되고 학자들의 추측만 무성할 뿐 그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고전 마야문화가 쇠퇴한 후 한 때 발전을 하기도 했지만 10세기 무렵을 기점으로 서서히 쇠퇴하여 15세기 중반의 내란을 거쳐 16세기에 에스파냐에 의해 정복되었다.
Chapter 4. 마야 문명의 수학과 천문학
마야 문명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수학과 천문학이다. 그들은 0 개념을 알았으며,20진법을 썼고, 막대기와 점 모양으로 숫자를 나타냈다. 이렇듯 뛰어난 수학 실력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천문학을 발전시켰다.
마야인들이 만든 달력은 전체적으로 각 부분이 다른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치는 복잡한 구조로 만들어졌다. 또한 어떤 주어진 시간에 나타날 조짐을 계산하고, 특정한 행동이 적당한가를 결정하는 예언은 아주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져있다. 달력의 가장 기초가 되는 부분은 제례력이라고 부르는 260일 주기의 달력이다. 주로 종교적이고 예언적인 기능을 하는 이 달력은, 제례 활동의 날짜를 잡고 점을 치는 데 기초가 되었다. 각 날은 1부터 13까지의 숫자와 20세트의 이름 중 하나 등 두 개의 요소를 조합해서 만든 명칭을 가지고 있다.
이 숫자와 이름은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데 예를 들면 첫 날은 1이믹스. 둘째 날은 2익 이렇게 하여 이 순열이 두 번 계속되면 260개의 조합으로 된 주기가 생긴다. (1이믹스라는 명칭은 261일 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앞에서 나온 20개의 이름은 신과 연관되어 있는데 이 신은 그 이름에 해당하는 날에 특별한 중요성을 지닌다. 이런 신들은 다른 주기와 그 지역에 지정된 날을 종합해서, 매일매일 그 날의 징조를 결정하기도 하였다. 또한 유카텍에서 하압이라고 부른 둘째 달력 주기는 태양년과 일치했는데 이 달력은 20일로 된 18개월이 있고 여기에 5일이 추가되어 365일의 주기를 만든다.
마야인의 태양력에서 1년은 365.2420일,오늘날의 365.2422일과 비교해 오차가 거의 없다. 달의 운행은 29.5320일,금성의 주기는 580일로 계산했는데,지금과 비교해 오차가 겨우 0.00039일(달)과 0.08일(금성)이다.
마야의 달력은 서로 다른 날짜를 나타내는 그림 문자 20개로 되어 있다. 이것들은 다시 1에서 13까지의 숫자 기호와 조합되어 모두 260일을 만들어 낸다. 이것을 트졸킨이라 하는데,진짜 역년(曆年)과 구별되는 신성한 역년이다. 태양의 움직임에 따른 진짜 역년은 1년이 18개월로 이루어져 있고, 이것들은 한 달이 20일씩으로 되어 있어 모두 360일이다. 여기에 닷새밖에 없는 19번째 달이 덧붙어서 1년은 365일이 된다. 이 역년을 하아브라고 한다. 마치 우리나라의 60갑자(六十甲子)가 10천간(十天干)과 12지지(十二地支)가 맞물려 갑자·을축 등 60개로 조합되듯 트졸킨과 하아브가 서로 같이 출발해 똑같이 맞아떨어지는 데 필요한 날은 (260과 365의 최소공배수를 계산하면) 18,980일이다. 이것을 365일로 나누면 52년이 된다. 바로 이 52라는 숫자가 마야인들의 의식과 일상을 지배했다. 그들은 세상이 52년마다 한 번씩 끝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멕시코 땅에서는 52년마다 기존 피라미드 옆에 새 피라미드를 세웠고, 유카탄 반도에서는 52년째 되는 날 살던 도시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 새 도시를 세웠다.
마야의 모든 장식이나 조각들은 반드시 어떤 날짜와 관계가 있다. 어떤 건축물이든지 그 이마에는 생년월일을 복잡하게 써놓았으며, 일상 생활도 역법과 숫자의 신비에 따랐다. 그들은 그 엄청난 피라미드와 건축물들을 생활이나 예술을 위해서가 아니라 역법의 지시에 따라 정해진 날에 세웠다. 마야인들은 5년, 10년, 또는 20년마다 합당한 생일 날짜를 지닌 건축물을 세웠다. 가끔 피라미드 옆에 새로운 윤일(閏日)을 기억하려고 그때마다 피라미드를 세우기도 했다. 마야인들은 신관의 지시에 따라 어느 날 모든 건축활동을 딱 멈추고 한 사람 남김없이 도시를 버리고 떠나기도 했다. 수만명이 400㎞가 넘게 밀림 속을 이동해 다른 곳에 터를 잡고, 신관들이 시키는 날부터 새 도시 건설을 시작했다. 가장 뛰어났던 문명인들이 가장 어리석은 미신에 사로잡혀 스스로 판 함정에 빠진 것이 바로 마야인이었다. 이 복잡한 역법과 건축 설계술은 신관들만이 알았다. 그들은 일식과 월식 따위를 예언해 평민들로부터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오로지 천체를 관측하고 역법을 계산하면서 시간의 비밀을 풀고 그 해의 길흉을 점치면서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렸다.
신관들은 또 노예나 평민을 신에게 제물로 바쳤다. 산 사람의 가슴을 돌칼로 가르고 뜨거운 심장을 꺼내어 신에게 바치는 잔인한 의식이었다. 신관들은 사람 제물을 많이 구하려고 포로를 잡기 위한 전쟁을 자주 부추겼다. 마야의 전쟁기록에는 어떤 사람을 얼마나 잡았다는 기록만 있을 뿐 어떤 도시나 땅을 빼앗았다는 기록은 아무 데도 없다.
마야 문명의 또 한 가지 약점은 잉카와 마찬가지로 쇠붙이를 쓸 줄 몰랐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 복잡한 그림문자를 돌에 조각할 때 돌칼을 썼다. 그뿐이랴. 짐수레가 없었으며, 심지어 밭을 가는 쟁기와 가축도 없었다. 그런데도 맨손으로 돌을 날라 밀림 속에 피라미드를 쌓고 도시를 건설했으니 노예와 평민의 고통이 어떠했을까.
Chapter 5. 마야시대의 언어
Ahau 마야 어로 신 또는 고귀한 왕
Ah kin 고귀한 성직자
Atl-atl 던지는 창(槍)
Balche 강한 포도주
Cenote 물 웅덩이. 세노테의 물은 석회암을 거쳐 여과되어 마야 식수의 원천이 되었다.
Chicle 사포딜라라는 나무의 즙. 껌을 만드는데 쓰임
Chilan 예언자 또는 매개물
Chultun (pl. Chultunob) 병 모양을 한 물 탱크로 마야 지하에 건설되었다.
Haab 세 개의 마야력 중 하나로 우리가 쓰는 것과 가장 비슷하다. haab는 고고학자들에 의해 Vague year라고 알려짐
Halach Uinic 지도자, 왕
Huipel 마야 전통의 두르는 면옷
K'awil 생계의 신 이름. 그 신에게는 피, 정액, 수액, 옥수열매, 가루반죽 또는 고무같은 가치있는 물질이 봉납되었을 것이다.
Ladino 마야와 스페인의 혼혈인
Manta 정사각형의 옷으로 망토나 담요로 쓰였고 오늘날도 여전히 입고 있다.
Maya 마야는 B.C 2600년에 시작되었고 오늘날의 멕시코, 과테말라, 벨리즈, 온두라스, 엘살바도르에서 A.D 250년경에 찬란하게 꽃을 피웠다. 천문학이 고도로 발전했으며 달력이나 상형문자 건축술, 석공술에서는 뛰어났으나 철을 사용할 줄 몰랐다. 마야 문명은 A.D 900년경에 쇠퇴하기 시작했다.
Milpa 옥수수밭
Nacom 마야군인 지휘자
Peten 과테말라 북부지역.
Pok-a-tok 마야의 공놀이
Pom 코팔나무의 진액, 마야에서는 고무로 사용되거나 츄잉껌이나 향으로 사용되었다
Sacbe 하얀길
Uayeb 마야의 haab력에서 365일 중 운이 없는 5일.
Xibalba 마야하층민이 죽었을 때 가는 곳.
Yucatan 첫 번째 마야의 본거지. 여기에서 그들은 과테말라 벨리즈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그리고 다른 멕시코지방으로 퍼져나갔다. 마야인들은 유카탄을 칠면조와 사슴의 땅으로 부른다. 왜냐하면 그곳은 먹을 수 있는 야생동물이 많기 때문이다.
Chapter 6. 이집트 문명과 관계
중앙아메리카(아스테카·마야)와 남아메리카(잉카) 대륙에 세워진 피라미드는 혹시 이집트 문명과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을까? 세계적인 탐험가 소르 헤위에르달은 잉카 문명과 이집트 문명이 서로 닮은 점이 많은 까닭을 밝히려고 1970년 고대 이집트에서 쓰였던 갈대배를 옛날 방식으로 만들어 대서양을 건넜다.
고대 이집트와 잉카 사람이 탄 갈대배는 재료와 모양이 같았다. 두 민족은 거대한 신전과 피라미드를 세워 태양신을 섬겼다. 죽은 사람을 미라로 만들고,뇌를 수술할 줄도 알았다. 왕족이 집안끼리 혼인하는 풍습도 두 문명이 똑같았다. 헤이에르달은 남아메리카 문명이 이집트에서 건너왔다는 가설을 세우고, 이를 증명하려고 옛 갈대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보인 것이다. 그러나 아메리카 문명의 독자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멕시코와 이집트 피라미드의 유사성은 겉모습뿐이라고 주장한다. 피라미드를 세운 목적만 보아도 양쪽은 너무 달랐다. 이집트 피라미드는 파라오의 시신을 둔 방 주변에 돌을 쌓아올려 만든 거대한 ‘무덤’이다. 반면 멕시코의 피라미드는 밀림 위로 솟은 사원을 지탱하고, 그 사원에 위풍당당한 규모와 높이를 제공하기 위해 지은 계단식‘구조물’이다.
기능이 다르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었다. 실제로 멕시코에 있는 피라미드 가운데 어느 것에서도 무덤으로 쓰인 자취가 발견된 적은 없었다. 가끔 피라미드 내부에서 작은 방이 발견되기도 했지만, 다 비어 있었으므로 무덤으로 쓰였다고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1949년 멕시코인 고고학자 알베르토 루츠가 피라미드 내부에서 비어 있지 않은 작은 방을 발견함으로써 ‘기능 차이론’은 설득력을 잃고 말았다. 루츠는 팔렌케에서 사원을 발굴할 때 그냥 언덕처럼 보이는 곳을 파들어갔다. 한참을 파내고서야 그는 그곳이 8층 피라미드라는 사실을 알았다. 꼭대기 단 위에 세워진 사원 안에는 계단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었다. 마흔다섯 계단을 내려가자 약간 넓은 곳이 나타났다. 스물한 계단을 더 내려가니 벽으로 가로막힌 수평 통로가 나타났다. 장애물을 제거하자 널찍한 장소에 주전자·옥세공품·진주들이 바닥에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시신과 함께 넣은 부장품이다!’루츠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 물건들은 이집트 피라미드에서 나온 부장품들과 아주 흡사했다. 그의 짐작은 맞았다. 곧이어 예닐곱 사람의 유골이 나타났다.‘순장된 사람들이다!' 뒤쪽으로 뚫린 방으로 들어가 보니 가운데에 제단으로 보이는 석조물이 있었다. 석판을 들어내자 안에 50세쯤 된 남자의 유골이 놓여 있었다. 옥 장신구, 마야 상형문자가 새겨진 귀고리, 왕관, 비취 가면, 구슬 목걸이, 열 손가락마다 끼워진 반지. 거기에 두개골 양쪽에 놓인 거대한 진주. 루츠는 마야 왕의 시신 앞에 서 있었다.
마야와 이집트의 유사성이 발견된 사례는 또 있다. 1947년 미국의 영화 제작팀이‘마야의 역사’라는 영화를 찍으러 치아파스의 보남파크를 찾았다. 그곳에서 머무르며 영화를 찍는 동안 길레스 힐리는 원주민의 호감을 사서, 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채색된 벽화’를 보았다.
신이나 종교적 대상을 그린 종전의 마야 벽화와 달리 채색 물감으로 칠해진 벽화는 고대 마야인들의 일상 생활을 묘사한 것이었다. 그것은 고고학자들에게 그들이 몰랐던 것을 많이 일깨워 주었다.
어떤 서열에 의해 배치된 것이 분명한 다양한 인물들. 종교적 의미에 따라 결정되었을 다양한 의상, 의미를 알 수 없는 상형문자들. 모든 것이 수수께끼였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한 가지가 눈길을 끌었다. 놀라우리 만치 이집트를 연상케 하는 그림의 형식이 그것이었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가로로 배치되어 있었고, 그들의 머리와 발은 완전한 옆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마야문명에 대한 다른 참고 글]=> http://blog.daum.net/naganchun/17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