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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마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12: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 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 하리라
우리는 도시가 하나님의 복음의 광채 속에서 부흥되기를 소망한다. 이것은 우리의 소망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이다.
도시의 문화와 정서를 보면서 도시가 사단에게 권좌를 내어 준 부분과 역사 속에서 그 일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는지를 밝혀 내야한다.
이와 같은 지식이 필요한 이유는 그 지역 안에 복음의 광채가 밝게 비취어 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부가적 이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그것은 그 도시를 향하신 하나님의 원래의 비전과 계획에 대한 이해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원래 계획이 이루어 질 수 있는지에 대한 전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성령의 계시를 구하며 겸손히 기다리는 중보자에게 주님은 계시하시고 그의 계획을 이루실 것이다.
지역을 보는 관점과 방법
지금부터 우리는 1896년에 태어난 광주를 하나의 인격체처럼 보도록 하자.
모든 인격체는 그의 조상, 가족, 출생, 성장기를 통해 영향을 받게되고 그 영향에 의해 사람의 성격과 가치관, 문화, 세계관등이 형성된다.
이것이 그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는 정신적 기준이 되기에 너무나 중요한 것이다.
이처럼 한 민족, 도시, 국가도 조상, 주변도시나 국가와의 관계, 그 지역만의 역사을 통해 도시 특유의 성격, 문화, 세계관이 형성된다. 개개인의 경우처럼 지역 특유의 역사 속에서 그 도시만의 문화와 가치를 창출하게 되는 것이다.
때때로 이 결과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특별한 의미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이스마엘의 자손이 아랍 문화권으로 형선되고,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이 되고, 청교도의 후손에 의해 미국이라는 나라가 형성되었고, 마피아들의 유흥 사업을 위해 카지노 도시로 개발된 라스베가스 등 우리가 사는 도시는 나름대로 어떤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만유의 주제이신 주님을 거역하기 위해 사단은 권세와 정사 그리고 여러 환경을 이용해서 도시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보기도를 통해 도시역사의 중심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한다.
이 글에서 광주의 탄생 전후와 성장기에 이르는 1980년대까지의 역사를 간략하게 기록하고 그 속에서 광주가 받은 축복과 아픔에 대하여 기록했다.
광주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그 계획을 왜곡시킨 사단의 전략을 분별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이다.
광주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한국의 모든 중보자에게 계시되기를 기도하면서...
광주는 ...
깨끗한 자연 환경, 광활한 농토, 교육기관에서 배출되는 많은 인적자원 등을 볼 때 광주와 호남은 한반도를 통틀어 가장 풍성한 자원을 소유한 땅이다.
호남은 임진왜란에서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을 지켜온 의병활동의 발원지이자 주 무대였다. 신분계급 타파와 개혁을 위해 일어난 동학 운동이 가장 꽃을 피운 지역이며, 우리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광주 학생 독립운동의 본고장이다. 그리고 5.18 민주화 운동으로 이 민족의 현대사를 밝힌 고장이기도 하다.
이토록 진리를 알고 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할 뿐 아니라 온화하고 풍부한 정서로 사람들을 섬기려는 마음 또한 특별한 땅이다.
하나님은 이 풍성함과 충성됨을 통하여 그분께 영광 돌려 지기를 원하셨다.
1896년 광주에 관찰부가 생긴 이후 일제의 식민 지배하에 고통받던 광주...!
하나님은 교회와 선교사의 피와 눈물로 이 땅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돌보아 주셨다.
그들의 가족이, 혹은 그들 자신이 죽어 가는 순간까지도 이 땅의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들의 생명을 이 곳에 산 제사로 기쁘게 드렸다.
이것을 시샘한 원수는 죄의 굴레로 이 땅을 묶고 상처와 낮은 자존감으로 결박하려했다.
A. 조상들의 죄들
-탄생 이전의 사단의 영향력들
광주는 1896년 이후에 도시로서 개발된 지역이다. 전남의 역사는 광주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광주가 건설되기 전에 전남 지역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죄들은 원수의 진으로 남아 있다.
이 지역-호남-의 전근대사에서 가장 강하게 나타난 원수의 진은 우상숭배, 자연숭배, 성숭배 등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그 시기는 삼한시대 이후부터 구 한말에 이르는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시기의 역사이다.
1. 불교문화와 불교숭배
전남/북 지역을 묶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영적 세력은 불교를 중심으로 한 사단의 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불교는 아직도 호남 제일의 종교이고, 그 역사적인 뿌리가 오늘까지 깊이 내려져 있는 것이다.
전남은 불교문화재의 보고라고도 일컬어진다. 수많은 국보·보물급 불교문화재와 중요 사찰들이 산재해 있고, 불교사상사적으로 볼 때도 장흥 보림사와 곡성 태안사로 대표되는 신라말·고려초의 선종, 고려시대에는 송광사의 수선사와 강진 백련사의 백련결사라는 두 결사조직이 큰 몸짓을 한 곳이 이곳이었다.
다른 지역의 경우도 거의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전라도 민중들에게 있어서 불교는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사상·종교적인 권위와 명맥을 면면히 지켜오고 있다.
백제의 불교 유적들을 예로 보더라도 초기 불교의 유입은 고대 왕권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통일신라 이래 고려시대 말까지 불교사상은 집권층의 지배이념으로 군림하였고, 조선시대 이후 전라도의 민중불교 신앙은 다른 지역에 비해서 한층 강한 면모로 나타났다. 도시 초기의 역사부터 오늘날까지 기독교의 강한 도전을 받아온 광주를 제외한 호남의 다른 지역은 아직도 강한 불교적 전통과 사고들이 강한 진으로 남아있다.
관련 주요 지역- 충장사, 경렬사, 호남 불교대학
2. 농경문화와 자연숭배
삼한시대부터 농경문화가 정착 된 것으로 기록이 남아 있는 호남지역은 농경지역의 특징인 문화적 발전과 더불어 공동체적인 자연 숭배가 발달하게 되었다.
현대 광주의 대표적 산인 무등산은 광주시의 동편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광주· 화순· 담양사람들의 자연 숭배 제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적 신앙대상이 되어 온 산이다.
무등산 정상에 있는 바위인 서석은 천연신전으로 이 지방민중의 자연 숭배적 제단이었다
.무등산의 천제단은 한반도 이남의 유일한 천제단으로 國泰民安제와 기우제 등을 지내던 곳이다.
조선 후기까지 존재하던 무등산 신사는 신라시대 부터 조선시대까지 국가적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초자연적 현상이 나타나던 곳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처럼 전남의 자연숭배는 개인의 기복에서부터 가정· 지역의 풍요를 위한 기복의식과 무속으로까지 다양한 계층과 목적을 가지고 행하여 졌음을 알 수 있다.
관련 주요지역- 무등산일대, 무등산위 천제단
3. 호남지역의 성숭배
우리 나라 성에 대한 기록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은 2500-3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울산 반구대의 벽화에서이다.
우리나라 전역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성숭배는 사단의 중요한 속임수였다. 특히 농업경제권인 호남의 성숭배사상은 다양한 모습으로 호남문화에서 빠질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전근대 농경사회의 풍요를 위해서 생산력의 원천인 남아가 많이 필요했다. 이 필요는 필연적으로 성숭배 사상을 불러들여 그것을 발달시켰다. 성에대한 숭배사상이 문화 속에 뿌리내리고 이것이 종교화된 것이다.
성숭배의 대표적 예는 남· 여의 성적 특징을 닮은 조형물이나 자연석 등에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 행위라 할 수 있다.
한반도 이남의 남근석 중에서 약 60% 정도가 호남에 집중되어 있고, 무등산의 입석대가 가장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입석대는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이 지역사람에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제단으로 인식되어 왔다.
농경마을 특유의 장점인 공동체 의식이 두래·품앗이등의 좋은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지만, 공동체 문화 속에서의 성숭배는 마을 공동체의 축제와 마을의 종교의례 등으로 나타났다.
마을 종교의례로써의 성숭배의 모델은 마을 입구의 당산나무와 성기를 닮은 자연석이나 성기모양으로 조각한 조형물을 함께 배치하는 행위로 대표된다. 이곳이 마을사람들이 지내는 고사 등 마을 종교행사의 주요 장소이기도 하지만 마을공동체의 주요 의결장소로도 사용된 것을 생각할 때 성숭배사상이 공동체의 사고와 생활 안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짐작할수 있다. 사찰 안에 성기모양의 조형을 세우거나 불상의 뒷면을 성기모양으로 만들고 그것을 섬기는 행위, 사찰 내에 삼신당 등으로 대표되는 성숭배 제도 등 불교와 혼합되기도 했다.
관련 대표지역- 무등산 정상의 입석대
B. 광주의 탄생
- 부르심의 뿌리
(렘29: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렘29:12)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렘29:13)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그림 2 광주읍성도
구한말인 1895년 여름 당시 대한제국 정부는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 전국 8도를 13도로 개편하였다. 그때에 비로소 전라도는 노령 산맥을 중심으로 전라 남북 도로 분할되었다. 남도의 도읍은 원래 나주였다.
1896년 8월 20일 신분계급타파, 조혼과 아편의 금지, 단발령, 과부의 재혼을 자유의사에 맡김 등을 골자로 하는 갑오경장에 대한 반발로 전국에서 항거가 시작되었다. 그 중에서도 나주에서의 폭동은 관공서 습격, 친일관리 처형 그리고 관찰사가 쫓겨가고 후임 관찰사는 죽음을 두려워하여 부임조차 하지 못할 상황에 이르도록 그 정도가 심각했다. 조정은 전남에 대한 통제력을 사실상 상실하게 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궁여지책으로 두메산골이었던 "광주"를 관찰부로 선택하게 되었다. 이것이 광주의 태동의 역사였다.
이렇게 본다면 광주는 자연발생적이거나 사람들의 기대와 축복 속에서 태어났다기 보다는 지역통치권 확보의 수단으로 선택된 도시였다.
원수는 광주가 급조된 도시, 혼란의 부산물이라고 속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광주가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탄생한 도시임을 믿음으로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광주가 호남의 다른 도시와 다르게 문화적 단절 현상 속에 탄생되지 않았다면 다른 지역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부흥의 역사와 전 도시적으로 확산되어 도시의 정신적 기반이 된 교회의 지도력은 그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구한말의 격변 속에 조상의 문화적 배경이 강력할 수 없는 신흥 도시 "광주"에서 일어난 복음의 부흥은 "광주"를 하나님의 땅으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관련 지역 - 도청,금남로,충장로일부등 1900년 당시의 광주읍성권
C. 하나님 나라와 어둠의 권세의 전쟁
1.일제시대 - 광주의 유· 소년기
(마13:25,39)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요10:10)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관찰부는 옮겨졌으나 도시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던 미숙한 광주는 곧이어 들어온 일본인들에 의해 도시의 기반이 세워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 도시를 축복하기보다는 일본을 살찌우기 위한 수탈과 통치 기반조성을 목적으로 하였다는 것이 문제이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 그 결과는 영적 정서적 물질적 파괴로 나타났다.
그러나 광주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는 광주에 교회를 세우시고 원수가 일제를 통해 광주를 어둠의 도시로 만들려는 시도를 막으셨다. 하나님은 광주가 진정한 빛고을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교회를 사용하셔서 광주에 영적 정서적 부흥과 함께 물질적 축복까지도 부어주셨다.
이 시기는 광주의 유소년기에 해당하는1900년-1930년대에 일어난 사건이다.
도시의 개척 단계인 그 시대에 있었던 영적전쟁은 현재의 광주의 모습과 영적 상태 형성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가. 복음의 광주 진입- 영적, 정서적 부흥과 물질적 축복
전주, 목포, 나주 등에서 교회 개척 사역을 하던 유진 벨 선교사는 나주 양반들의 거센 반대에 의해 선교부를 광주로 옮기게 된다. 그 당시 광주는 두매산골에 다름 없는 소촌 이었다. 1904년 선교사들의 집이었던 양림리 일대에는 밤이면 문앞으로 들짐승이 나타나고, 산수동에 호랑이가 나온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정도를 짐작 할 수 있다.
이미 광주 주변 도시에는 복음이 이미 전파 된 후였고, 초대 관찰사 였던 윤응렬에게 유진 벨 선교사는 생명의 은인과 같은 사람이었기에 광주에서의 복음 전파는 정치적인 차원에서도 거칠 것이 없었던 것이다.
특히 광주사람들은 다른 어떤 지방의 사람들 보다 유순하여 복음을 잘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림 3 유진 벨 선교사 가족
그 시대 광주교회는 광주시의 진정한 희망이었다.
1926년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의 광주시내인구(광주면)는 조선인 약 16,838명, 외국인 4,199명으로 21,037명이엇다.
당시 광주의 선교사는 20여 호, 60명에 달했고 양림동을 중심으로 병원, 학교, 고아원, 교회개척 사역 등을 하였다.
광주시내의 교회는 전국에서 최초로 도시의 중심부에 자리한 북문안 교회를 시작으로 4개로 성장하였고 한국인 목사가 교육, 성경공부, 구제 등의 사역으로 목회 하였고 성도는 2,000여명에 이르렀다.
당시의 불교는 무등산을 중심으로 몇 개의 암자가 있었다. 모두 6-7명의 승려가 있었고 모두 빈약한 절들이었다. 20년대 들어 확장된 교세는 부녀자만 약 100여명 정도가 되었다.
광주의 중요한 모든 일 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다 시피 하였다.
조선인을 위한 최초의 학교가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시작되면서 조선인의 희망으로만 그치고 있던 민족 교육의 길을 열었고. 조선인 문화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의료, 위생사역은 그 시대 광주사람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했었는데 특히, 엄청난 감염자가 있던 결핵, 나병, 매독 환자들에 대한 헌신적 사역으로 수많은 생명을 살려내었다.
병든 사람들, 일제의 탄압으로 농토를 잃고 거지가 되어 유랑하던 사람들,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던 사람들, 의복이 없어 추위에 떨던 사람들에 대한 교회와 선교사들의 봉사와 헌신은 전국적으로 추앙 받고 있었다.
전남, 조선의 제1 산업인 농촌 경제를 살리기 위한 농업 학교와 농촌을 살리기 위한 운동이 교회를 모체로 일어났고, 광주 최초의 수출 산업이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시작되었다.
교회가 항일 민족 운동의 주동 세력과 모체가 도면서 일제의 혹독한 탄압을 받기도 하였으나. 광주의 대소사 모든 일들에 교회의 지도자들이 앞장서야 할 만큼 교회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지금 광주시 양림동의 호남 신학대학교의 맞은편 동산에는 광주. 전남과 우리 민족을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며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사신 23분의 선교사들의 묘지가 있어서 오늘도 광주시가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분들이 오늘의 광주에 밑거름이 되신 분들이시다.
서서평(엘리자베스 쉐핑)선교사는 장례는 광주 최초의 사회장 이었다. 그녀는 1912년 32세의 나이로 광주에 파송 되어와서 "사랑의 사도, 광주의 어머니" 라는 이름을 얻을 만큼 헌신된 삶을 사셨다. 그녀는 조선인이 입던 치마 저고리에 등에는 고아를 업은 체로 다녔고, 그녀가 소천할 때 그녀가 가진 것은 한 움큼의 양식이 전부 이었다. 그녀의 장례식은 교회 장으로 치를 계획이었으나 광주의 지방유지들을 비롯한 비기독교인들의 주장에 의하여 광주 최초의 사회장(社會葬)으로 치렀다. 장례식은 12일장으로 1934년 7월 7일 양림 오원기념각에서 거행되었다. 장례식에는 많은 지방 인사와 기독교인들은 물론 전라남도 지사 아지마, 경찰 부장 사또를 비롯한 많은 일본인들도 예복을 입고 참석하였으며 서울, 평양, 부산 등 국내 여러 곳에서 식장이 가득 차게 사람들이 모여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슬퍼했다. 사회는 최흥종 목사가 맡았으며 시민 대표로 김신석 호남 은행 전무의 식사에 이어 김필례(여성대표), 최원순의 추도사가 있었다. 하얀 소복을 입은 이일 학교 제자들이 운구를 맡았고 그 뒤에는 13명의 양딸과 수백 명의 거지, 문둥이들이 따랐다. "어머니" "어머니" 하고 부르며 목놓아 우는 그들의 통곡 소리에 조객들은 모두 눈물 바다를 이루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자선과 교육 사업에 일생을 바친 빈민의 어머니 서서평양 서거" 라는 제목과 "재생한 예수" 라는 부제로 그의 죽음을 대서특필했고 친동기처럼 지냈던 최흥종 목사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의 어머니인 서서평을 회고할 때마다 홀로 눈물짓곤 했었다. 그녀는 지금도 양림 뒷동산에 묻혀 있으며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흔적으로 남아 있다.
최흥종 목사의 삶은 광주의 빛과 역사였다고 호남 신학교의 역사신학 박사 차종순 교수는 증언하고 있다. 최흥종은 1904년 광주 최초의 예배에 참석한 사람 중의 한 명이고 광주 최초의 장로와 목사 선교사로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2차례나 시베리아 선교를 다녀온 한국 파송 선교의 개척자이면서 광주 전남의 아비로써의 삶을 살았다. 그는 평생을 나환자와 부랑자들의 아버지로 살았다. 여수 애양원, 소록도 나환자촌이 그의 헌신에 의한 열매중 하나이며 일제시대와 해방 이후에도 그는 광주와 전남 사람을 대표하는 지도자로 봉사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삶으로 가득한 그의 일생과 업적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는 해방 이후 대한 민국 건국 위원회의 1인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광주 전남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으로 모든 사람에게 기억되고 있다. 그는 광주의 역사를 밝힌 사람이었다.
해방이후에도 모든 명예의 길을 뿌리치고 거지들과 함께 기거하다가 어느 식당의 조그마한 방에서 숨을 거둔 그의 장례식은 서서평 선교사의 죽은 이후 광주의 2번째 사회장으로 광주에서 거행되었다. 그것은 해방 이후 광주 최초의 사회장 이었다. 그의 장례행렬 뒤를 수많은 나환자와 부랑자들이 "아버지"를 부르며 따랐다.
이러한 그의 사회적 영향력은 그의 출신 성분이나 학벌, 인맥 등에 의해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광주 교회의 지도자로써 진리 안에서 사는 모범을 보였고 그것은 항상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그의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사랑과 헌신의 삶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복음과 삶이 일치되는 제자의 전형이라 할 수 있겠다.
그의 일대기는 광주 100년사의 중심이며 광주의 성장과 함께 한 모든 세대에게 참된 가치관과 인생의 본보기인 것이다. 진리에 헌신된 삶을 모델로 제시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원수가 일제를 이용해 오욕과 범죄의 진을 구축하는 동안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통하여 이 땅에 진리와 섬김으로 이 땅의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수 있도록 그의 나라를 확장하셨다.
하나님은 그의 교회를 통하여 열방을 축복하시는 그분의 원칙을 광주에서도 명확하게 보이신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광주의 어둠을 밝히시고 축복을 부어주셨다.
우리는 광주 초기의 교회사를 통해 광주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비전의 모델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선교사들과 함께 광주지역을 섬겨나가던 교회는 신사참배 문제를 계기로 선교사들과 교회의 분열을 경험하게 된다. 재정 자립도가 약했던 교회는 이 사건을 계기로 병원, 교육, 사회개발 등 도시를 섬기는 사역에 적극적이지 못하게 된다.
관련 지역- 호남신학교와 선교사 묘지, 대전 국립묘지, 기독병원, 수피아여고, 숭일고, 양림교회, 송정제일교회
그림 4 이호꼬의 초상
나. 일제의 광주진출- 영적, 정서적 파괴와 물질적 수탈
갑오경장 이후 광주의 도시적 기초를 닦은 사람들은 일본인들이다.
최초로 광주에 온 이오무라 이오꼬는 임진 외란 때부터 한국을 침략한 가문 출신의 여자 중으로써 광주 입성 당시 흑룡회 검객을 보디가드로 세우고 일본 불교 전파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그는 광주에서 일제의 식민 교육과 광주 정착 전략의 선봉으로 활약했는데 그가 광주에 입성한 이후 6개월만에 일본인이 600명이나 광주에 들어 왔다.
일본인들은 금남로를 중심으로 하여 금융, 상업을 독점하였고, 현 도청위치의 뒤편에 일본인 여행자를 위한 숙박업소, 고리대금업 등으로 광주 초기의 상공업을 독점하고 윤락 문화를 이 땅에 뿌리내리게 했다. 지금의 도청을 중심으로 윤락가 금융가 상가가 밀집된 것은 이 때문이다.
호남의 풍부한 자원은 광주와 목포를 통해 일본으로 수탈되어 나갔다.
광주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일제강점기는 광주에 많은 가라지가 뿌리내리게 된 시기이다. 원수가 일제를 이용하여 심은 강압적 권위의 정치, 수탈을 목적으로 한 경제구조, 향락 산업은 오늘까지 뽑혀지지 않고 있는 원수의 가라지이다.
일제는 2차대전의 패전으로 광주를 떠나게 된다.
관련 지역- 황금동 일대의 환락가, 충장로 일대의 상가, 금남로 일대의 금융가, 도청
원 수 |
하나님 | |
대리인 |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 |
주의 종인 선교사들과 교회 |
기본원칙 |
자국이익을 위한 억압과 수탈 |
생명과 풍성한 삶을 위한 섬김 |
주된영향력들 |
일본 불교 전파를 통한 우상숭배 |
교회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복음 전파 |
식민교육을 통한 열등감 조성 |
기독교교육을 통한 인간존중 | |
경제수탈을 위한 착취 |
경제 발전을 위한 수출, 기간 산업 육성 | |
윤락가 조성 |
소외된자를 위한 사역 | |
민족 자존감 말살 |
민족 자존의 토양 마련 | |
현재에 나타난 영향 |
1. 광주지역의 낮은 자존감 2. 현재의 윤락가, 금융가, 상가 형성의 기반이됨 |
1. 교회성장의 밑거름이 됨 2. 근대 교육과 민주운동의 기반을 닦음 3. 하나님과 복음에 대한 좋은 인상을 지역에 남김 |
* 광주의 종교 통계( 각 구청 통계/95년 12월 전체인구 약 1.300.000명 복음화율 약 15%)
개신교회 631개(비공식-780여개)/188.000명, 천주교회 34개/80.862명, 불교 121개/53.811명,
원불교 12개/1.217명, 기타종교 17개/22.090명
2. 한국의 경제성장기에서의 전쟁 -광주의 청소년기
(딤전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난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럿도다.
(딤전2: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이는 우리가 모두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그림 5 선교사 묘지
1960-1990년대 이 시기 광주의 교회는 꾸준히 성장했다. 그러나, 정치 경제적 사건들을 통해 또 한번 큰 시련을 당하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의 취임이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수립되고 공업입국의 깃발아래 한국은 경제적 발전을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농업을 주요 산업으로 하며 민족 역사상 가장 부요한 지역이던 호남의 경제가 쇄락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 이었다.
급격한 도시화로 70년대부터 80년까지 광주의 인구도 두배 이상으로 급성장하게 되어 광주, 호남 지역에 대한 교회의 지도력이 강화되지 못하게 되었고, 이 급격한 인구 성장에 의한 도시 빈민 문제는 5.18의 사회적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광주사람 또한 "잘 살아 보세"를 가장한 맘몬의 영에 붙들리기 시작했다. 돈이 광주의 우상이 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돈이 많이 없는 광주를 버리고, 다른 도시로 떠나기 시작했다.
역사적인 사건들 |
사람들의 반응 |
원수의 영향력들 |
경제 제일주의 |
도시를 사랑하지 않게 됨-돈을 사랑하게됨 |
낮은 자존감-맘몬의 영에 사로잡힘 |
5.18 학살과 억압 |
권위를 불신함-거절감을 느낌 |
거역- 거역의 영에 사로잡힘 |
원수는 경제제일주의와 권력지향주의를 이용해서 이 땅에 거절감과 열등감의 가라지를 덧뿌렸다. 우리나라의 현대사에서 호남 특히 광주는 언제나 어두움에 가려져 있었다.
※ 5.18 관련 피해자 상황 (미확인)
? 사 망 166명 ? 행방불명 47명 ? 상 이 자 2,710명 ? 기 소 자 505명
원수는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의 가치보다 권력과 성취를 선택한 지도자들을 이용하여 이 땅에 너무나 큰 상처를 주었다. 원수는 5.18을 이용하여 광주 땅에 거역의 영을 심었다.
5.18사건은 광주만이 아니라 우리민족 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아픈 기억이다.
광주의 아픔은 그 누구보다 더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십수년 동안 광주의 아픔이 치유되기는커녕 도리어 왜곡과 탄압이라는 한계 속에서 그 고통이 더해지고 있었다.
5.18 희생자에 대한 현황 파악과 보상시비는 아직도 광주의 어두움으로 남아있다.
5.18 사건이 광주의 교회에 끼친 영향은 아래와 같아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1. 미국과 기독교를 구분하지 못하는 대중에게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관점 발생
2. 교회의 역할에 대한 부정적 사고 형성-청년 청소년들의 교회이탈
광주의 아픔과 정치 경제적 빈곤을 미국과 약소국의 대립구조(마르크스 레닌주의의 핵심인 계급 투쟁)에서 원인을 찾는 유물론자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며 기도하는 교회를 비난하기 시작했고 교회의 지도력에도 큰 어려움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런 유물론자들의 5.18에 대한 해석은 6.25이후 유물론 교육의 영향력을 받고 자란 한국의 젊은 세대에게 수용되어지게 되었다. 그들은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거역과 투쟁을 가르기 시작했고 이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많은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세상을 사랑하시는 자신의 의지를 광주 땅에 나타내기 원하셨지만 원수는 정치적 두려움과 경제적 빈곤감(맘몬의 영) 그리고, 무신론자들의 거역을 이용해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며 이 땅을 교만과 거역의 땅으로 만들어 가고있었다.
80년 이후 두려움과 억압이 광주를 장악하고 있을 때 교회는 진리의 빛으로 광주를 밝히고 있었다. 하나님은 진리와 공의를 원하신다는 교회의 메시지는 이 땅의 현대사를 밝히는 강한 빛이었다.
처음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온 이후 교회는 사단의 방해를 막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 왔다. 그 싸움의 결과로 교회도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상처를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한 다. 이것은 사단과의 전쟁에서 생긴 영광의 상처이기 때문이다.
관련지역- 도청앞 5.18광장, 망월동 5.18묘역, 전남대, 조선대, 광주 중앙교회, 호남신학대학교
결론의 말
삿 2:7 -12
백성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계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사랑을 가진 도시 광주
지금 광주의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통해 이 땅에 보이신 사랑을 알지 못하고 있다. 마치 사사시대의 한 장면처럼 60-70년대의 도시화의 파도와 80년대의 억압을 지난 광주에서 더 이상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광주가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죄이다.
왜냐하면 한국의 어느 도시도 민족의 역사와 문화적 연속성이 그만큼 단절된 상태에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복음에 의한 영향력 안에서 성장한 곳을 한국의 다른 곳에서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은혜에 대한 망각이 다른 지역에 비해 더 큰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100년 전 하나님은 이런 전남의 역사 속에서 가장 작은 성읍 중 하나였던 광주를 전남을 대표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도시로 새롭게 지으시면서 전남지역의 영적 출애굽을 위한 역사를 시작 하셨다. 조상, 우상, 불교 숭배의 깊은 뿌리로 어느 지역 보다 더 복음에 대항하던 전남의 모든 우상들을 뒤로하시고 일제의 식민 지배로 가장 많은 아픔과 고통 속에서 이재 막 시작된 신생 도시 "광주"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양육하셨다.
두매 산골 광주를 호남 최대의 도시, 한국 현대사의 한 획을 그은 도시로 만드신 하나님의 목적은 여기서 찾아야 할 것이다.
광주는 우리 민족이 수천 년간 저질러온 우상 숭배의 범죄와 복음에 대한 거역과는 무관한 도시인 것이다. 하나님은 하얀색 도화지를 이 땅위에 새로 펴시고 그의 뜻을 그려내셨던 것이다.
비록 원수에 의해 왜곡되고 우리가 망각해 버렸을 지라도 하나님의 그 뜻은 이 도시의 밑그림으로 분명히 남아있다.
전남의 부흥과 하나님의 계획을 위한 거룩한 도시로 광주를 부르시면서 성경적인 기초 위해 광주를 새우신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100년 전에 이 땅을 위에 그리셨던 그 비전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 기초 위에 이 땅이 새롭게 지어져야 한다. 거역과 분노가 아닌 겸손과 섬김의 도시로 다시 새워져야 한다.
하나님은 광주에 주신 영적적 유업과 충성됨, 섬김을 통해 세계에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복음의 빛고을"로 우리의 도시를 사용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광주가 더 이상 아픔과 수치심 속에 머물러 있기 원치 않으시며 치유와 용서를 통해 북한의 문을 열 뿐만 아니라 한국 땅과 열방을 축복하는 도구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주께서 이 땅에 배푸신 첯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어디에서 떨어 졌으며 잃어 버렸는지 돌이켜야 한다. (계2:4-5) 처음 행위를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당신이 이제 응답할 때이다. 광주를 향하신 하나님의 이 같은 열심은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으로 이어 질 것이다.
주님은 광주의 교회를 통해 열방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왜곡되어진 하나님의 축복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이 땅을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가로막앗던 무너진 담들을 치워야 한다.
광주 사람과 교회의 교회가 사사기(삿 2:7 -12)의 교훈을 기억해야 한다. 이 땅에 자리 잡은 우상과 죄악을 파하며 주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또 이 도시와 교회 속에 물들어 있는 무신론자들의 속삭임을 끊어 버려야 한다. 하나님 없는 자들의 역사의식으로 광주의 본질이 왜곡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상처들..
경제적 상실감은 이 지역 정서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 압제라는 부분도 결국 경제적 결과로 나타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 5.000년 역사상 가장 부유했던 지역인 호남, 그렇기에 가장 많은 수탈과 경제환경의 격변기를 격은 지난 100년의 역사는 다른 수만은 원인들과 함께 상대적 빈곤감을 다른 지역 보다 더 크게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지는 5.18의 아픔과 무신론적 투쟁의식은 지난 20년을 빛고을 광주를 그늘진 도시로 만들어 갔다.
광주의 정체성
5.18 민주화운동을 승화시켜 광주를 인권과 민주의 도시로 만들려는 계획은 분명 광주를 향한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에 의해 해석되고 잇는 5.18과 광주의 역사관 위에서는... 진정한 인권과 민주의 꽃은 피어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어려운 관계의 원인과 해법을 갈등과 반목, 투쟁이라고 가르치는 이 가치관은 이 땅을 더럽게 하고 원수 맺는 일의 본거지로 삼으려는 원수의 속임일 뿐이다.
그리고 , 부르심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위에 이 도시의 정체성을 다시 세워야 한다.
진정한 인권과 민주의 도시는 십자가에서 자기를 찌르는 자를 용서하시던 바로 그 분을 본받아 나를 찌른 사람을 먼저 용서하는 믿음 위에서 세워져야 한다.
100년전 인권과 민주의 사각 지대에 있던 광주사람들을 위해 자기 몸을 내어주던 그분들의 유업을 본 받아 사는 삶에서 시작 될 것이다.
제주의 4.3, 북한, 동티모르, 미국의 인디언, 소말리아, 유고 등에서는 정치적 압제와 인종 청소의 희생양이 된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그들의 아픔과 눈물을 씻어 주기 위해 기득권과 비기득권 사이의 투쟁의 정당성(유물론적 세계관)을 가르칠 것인가?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소외된 자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처럼 그들을 섬길 것인가?
영적 유업의 회복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들을 섬기려면 우리가 먼저 우리를 찌른 자들을 용서해야 한다. "용서"는 믿음의 결단일 뿐 아니라 우리를 거역과 분노의 종으로 만드는 원수의 결박을 끊는 무기이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이 도시의 정신적 기초를 세운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2001년인 지금 이분들의 정신과 삶을 본 받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분들을 기억하는 분들은 모두 노령이 되셨고, 그 삶의 기록들은 도서관 깊은 곳에 들어가 있다. 교회가 하나되어 그분들을 기념하기에 분열의 골은 깊이 남아있다.
이 시대의 광주 사람들은 어떻게 그 유업을 본받아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를 수 있을 것인가!
이분들의 일생이야말로 이 땅의 뿌리이며 가슴에 새겨야할 지표가 아닌가?
이제 광주의 교회가 일어나서 우리의 영적 조상들을 다시 기억해야 할 때라고 믿는다. 다시 그분들과 화해하고 그분들의 유업이 우리를 통해 후대에 전해지도록 축복의 통로가 되어 주어야 하겠다.
광주의 모든 지역마다 남아 있는 우리의 영적 조상들의 유적을 발굴하고 광주를 聖市化 하자.
도서관의 서가에 있는 분들의 삶과 영향력에 대한 기록들을 모든 시민들이 함께 볼 수 있도록 자료를 새로 만들어 내자. 인터넷이라는 좋은 통로도 있지 않은가?
5월이 되면 무신론자들과 교회를 비방하는 자들이 부끄러울수 있도록 이 땅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높이며 찬양하자. 그리고, 광주 성지 순례를 하며 그분들의 유업을 되새기자.
그렇게 될 때, 광주 사람들이 불러야할 노래, 들어야할 깃발을 분명히 알게 될것이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을 따르게 될것이다.
광주인이기에 가졌던 수치심이 변하여 기쁨이 될 것이고, 그 고통이 변하여 찬송이 될 것이다.
고통 받는 자에게 자유를, 흑암에 앉은 자에게 빛을 전하는 광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교회를 통해서 이 꿈을 이루시기 원하신다.
광주를 위한 중보기도로의 부르심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사 40:9
1.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
하나님은 광주를 사랑하시고 광주를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이 도시를 만드셨다. 광주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섬기는 지도자들의 헌신이 도시의 정신적 기초가 되었다.
이제 광주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찬양 받으셔야 하며 광주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을 위하여 지음 받은 땅인 것을 인하여 우리는 즐거워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감사하며 기도하자
1. 이 땅과 이 땅의 백성을 사랑하셔서 보여 주신 사랑을 인하여 감사 드립니다.
2. 광주와 광주의 교회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
3. 이제 이 땅의 사람들이 잊어버린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기억하며 이 땅을 지으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여 주십시오
2. 영적 전쟁(삿 2: 7,10)
풍성한 자원과 인력으로 부유한 농경 문화를 누리던 광주 ,전남은 수탈과 압제, 급격한 도시화와 80년대의 고통스러움으로 인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땅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을 이용하여 원수는 이 땅에 견고한 진을 구축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부흥을 막으려고 노력하였다.
용서는 영적 전쟁이다. 용서하지 못한 자는 쓰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용서하자.
이제 우리는 원수의 견고한 진을 파하며 부흥을 위해 기도하자. 선포하자.
1. 60년대 후반부터 상대적 빈곤감을 통해 형성된 거절감, 열등감의 진은 무너질 지어다. 하나님은 이 땅을 축복의 통로로 지으셨다.
2. 이 땅을 거역과 투쟁의 본거지로 장악하려는 원수의 계략은 무너질 지어다. 하나님은 광주를 섬기는 지도력의 땅으로 부르셨다.
3. 광주지역에 뿌리를 내리려는 우상의 진들은 파하여 질 지어다. 광주 100년 역사에 가장 큰 영향력과 영적 축복을 가져온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4. 지금까지 광주를 수치스럽게 했던 모든 말들을 대적하고 이제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광주"를 노래하며 축복하자.
5. 이 땅 사람들이 보상 보다 용서를 먼저 결정하게 하소서. 먼저 용서 함으로 이 땅을 묶으려는 모든 거역과 분노의 속임에서 자유케 되게 하소서
3. 회복을 위한 기도(고전 11:1)
하나님은 광주의 태생부터 지금까지 그의 교회들을 통해 광주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보여 주셨다. 광주 최초의 한국인을 위한 학교, 최초의 병원, 지금은 애양원과 소록도 등으로 옮겨진 나환자들을 위한 죽음을 넘는 희생들을 통해 최흥종 목사님은 광주의 아버지이셨고, 서서평 선교사님은 광주의 어머니이셨다. 우리는, 아니 광주의 모든 사람들은 섬기는 지도력으로 이 땅에 복음의 빛을 비추어 주셨던 그분들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 그분들도 우리에게 강권하고 계신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도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우리의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기도합시다.
1. 께어진 관계의 회복을 위하여
1) 이 땅의 영적 조상들과 아름다운 관계가 회복되게 하소서
2) 그들을 본받고 그들의 삶을 기리는 운동이 일어나게 하소서
3) 이 땅에 상처를 준 사람들(일제와 군부)을 용서함으로 이 도시가 치유되게 하소서
2. 광주의 정체성을 5.18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위에 세우게 하소서
3. 이 땅의 교회가 가난한 자들,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복음의 빛을 비추기 위해 헌신하게 하소서.
4. 광주가 성시화 되도록 그분들의 유적과 유업이 발굴되며 다시 빛을 발하게 하소서.
참고자료
1. 영상자료
5.18 민주화운동 기록 비디오/5.18 홍보위원회
광주 100년 기념 대 토론회/ KBC 광주 방송국/ 1996년 제작
광주100년사 제 1편 "최흥종 목사편" KBC 광주방송
5.18관련 방송 보도 녹화물
2. 서적
양림교회 90년사/ 기장 광주양림교회
5.18광주 민중 항쟁/ 광주시 5.18사료 편찬 위원회
5.18민중 항쟁 화보집 "5월 光州"/ 천주교 광주 대교구 정.평.위
광주 1백년 1.2.3권/ 금호문화사/ 박선홍저
2011년 광주도시기본계획/ 광주광역시/ 1995년 3월
1997년 광주 시정 주요 통계/ 광주 광역시
호남 지도 대사전/ 성지문화사 /1996년
빛과 소금 1997년 5월호/ 두란노 서원
95" 광주 통일 미술제 화보집/ 추진 위원회
95년 광주 직업별 전화 번호부/ 한국 통신 전남 본부
95년 시정 주요 통계
호남 교회 춘추/ 95년 4월 창간호/ 역사 연구지
빛고을 광주/ 향토 사료문집/ 광주문화원/ 1992년
호남 선교/ 호남 선교 화보사
School of Practical Warfare/ 광주리서치 보고서
기타 자료
http://www.city.kwangju.kr - 광주 광역시
인터뷰
정기복 목사/ 도곡교회 / 전남 화순
차종순 교수/ 호남 신대/ 역사신학
송정 중앙교회/ 박덕기목사/ 설교
송정풍성교회/ 설교
송정제일교회/ 박관석목사/ 설교
김종천 간사/ 예수전도단
김형준간사/ 상동
김종만간사/ 상동
황신실간사/ 상동
정성훈/ 호남신대 4년
Jack Winter 목사/ 화요모임 설교
오대원목사/한국예수전도단 설립자. 선교사
현장 땅밟기 및 중보기도
선교사 묘지/ 양림동 호남 신대 경내
5.18 신·구 묘역/ 망월동
금남로 충장로 도청앞
화요모임
무등산 전망대
공동생활집과 그 주변- 매일수차례/ 찬양 중보기도 영적 전쟁
이 보고서가 나오기까지 함께 기도해 오신 수많은 기도의 동역자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습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