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말리는 둘째형. 그리고 박정희대통령
둘째형의 중학교 2학년시절. 우리가족의 아침식사는 5형제에 부모님까지 일곱 식구가 둥근 큰 상에 둘러앉아 아침밥을 먹었다. 아침밥을 먹을 때의 대화는 늘 둘째형이 주도했다. 둘째형은 언변도 좋았지만 사람을 웃기는 데는 일가견이 있어 우리가족들은 밥먹기를 마칠 때까지 몇 번이나 박장대소 하곤 했다. 어느 날 밥상머리에 앉은 둘째형은 얼굴에 슬픔이 가득했다. 사연인즉 담임선생인 전상렬시인이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짓기를 결심하여 교사생활을 그만두게 되었다는 것이다. 형은 전상렬시인을 담임선생으로 존경하였고 즐겨 그의 시를 집에서도 낭송하였으니 곁에 있던 나도 시의 부분 부분을 암기하였을 정도이다.
오월의 목장으로 목인 전상렬(1923-2000)
아직 바다로 가기에는 이릅니다
이 골목을 나서 이윽고 걸으면
밤나무 숲 사이로 언 듯 이듯 푸른 강물이
보이고
길게 뻗은 금모래 위를 한참만 걸으면
우리들을 무척 기다리는 나룻배가 놓였습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면 곧 내가 애써 닦아둔
푸른 향기 한없이 밀려오는 초원으로 가는 길이
. 있습니다
그 언덕으로
나의 목장으로 같이 가지 않으렵니까.
그곳 오월이 우리를 위해 마련해 둔
녹색 침대에 누워
아무런 마음 캥길 일 없이 그저
오고 가는 산마루의 흰구름을 보다가
그대로 잠이 들어도 좋지 않습니까(후략)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형은 곧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나 동네에서 그리고 집앞 봉산시장에서 본 화제꺼리를 자신의 생각을 곁들여 우리가족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야말로 영화 「벤허」를 보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실제 영화보다 더 리얼하게 더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집에 피아노가 없어도 피아노건반을 그려두고 연습을 하면서도 피아노를 곧잘 쳤고 따로 배운적이 없었지만 그림도 잘 그렸고 저녁무렵 동네입구에 들어서면 「돌아오라 쏘렌토로」 혹은 박목월의 「사월의 노래」를 온 동네가 울릴 정도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개선장군처럼 씩씩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는 자전거바퀴에서 빼낸 고무타이어를 집앞 전신주에 감아놓고 유도의 한 기술인 업어치기 연습을 했다.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유도를 시작해 불과 6개월도 되지 않아 유도공인 초단(1단)을 따고 이어서 이 삼년도 되지 않아 공인 3단을 따내어 고등학교시절에는 교내 유도부장을 맡았다. 형의 다재다능 중에서 단연 1위는 주먹이었다. 나는 여태 형보다 힘쎈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체격이 우람한 것도 아닌데 역도로 체력을 키운 것도 아닌데 그야말로 기운이 항우장사였고 술은 말술이라 술집에 가면 같은 집에 앉아 술을 마시며 2박 3일을 보냈다. 평범한 부모의 체력에 어디서 돌연변이가 날아온 것이다. 그래서 가끔 어머니는 「아마 너가 내 배속에 생길 때 말고기를 먹고 너를 낳았나 보다」 하며 웃던 기억이 난다. 말고기가 질기다는 속설에서 그의 강인한 체력을 비유한 것이다.
형은 공부빼고는 못하는 게 없었다. 실은 초등학교시절 공부도 곧잘 하여 고향에서는 명문인 경북중학교에 들어갔지만 초등학교시절의 혹독한 공부에 질려 중학교입학 이후는 아예 공부와는 담을 쌓았다. 또한 그의 의협심과 정의감은 하늘을 찔렀다. 청소년기에 그런 그의 성격에 매료된 동료들로 인해 수업을 끝내고 학교를 나서면 그의 뒤로 옆으로 친구들이 열댓명 따라붙었다. 그 당시만 해도 골목을 지키는 깡패들이 많았고 자신들의 구역이 있어 학생들이 지나가면 괜히 시비를 걸고 돈을 빼앗았다. 그런 경우에도 깡패들이 몇 명이든 형은 친구들을 멀리 다 보내고 혼자서 싸웠다. 형은 싸워서 지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그들의 세계에서도 소문이 퍼져 함부로 형을 건드리지 않았다. 우연스럽게 고향의 최고의 주먹이 집부근에 살았다. 그 주먹의 3형제는 너무도 악명이 높아 고향바닥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들과 형이 서로 마주치면 서로 으르렁 거리며 지나갈 뿐 섣불리 형을 건드리지 않았다. 불쌍한 사람 혹은 남에게 맞고 있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정의감으로 공연히 남의 일에 휘말려 교사인 아버지가 해명하러 다니는 힘들 경우도 많았다.
대학시절 둘째형은 ROTC로 군복무를 했고 졸업과 동시에 소위로 임관해서 강원도 전방으로 배치를 받았다. 문제는 훈련생활중 사격탄환의 재고관리에서 일어났다. 부대에서는 번번히 실제 사격훈련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격훈련을 한 것으로 보고 하였으니 탄환은 남았고 그 남은 탄환은 땅에 묻어버렸다. 그것을 목격한 형은 그것이 국가재산 낭비차원에서 부당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것을 시정해야한다고 상부에 보고했지만 윗선에서는 그게 관행이었는지 어쩐지 무시해 버리며 신참소위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형은 휴가를 얻어 친구들과 인사동에서 술을 마시다 말고 그 고질병의 정의감에 발동이 걸려 형은 그대로 청와대로 달려간 것이다. 청와대정문 초소에 들어선 형은 박정희대통령의 면담을 신청했다. 일개 소위계급장을 달고 술기운도 약간 있어 보였으니 얻어맞지 않고 순순히 돌아오기만 해도 다행인 것을 형은 완강하게 버텼으니 나중에는 경호실에서도 사람이 나왔다. 또 그들과 왈가왈부하는 사이에 때마침 박대통령이 탄 1호차가 정문을 통과하다가 이 모습을 보았다. 박대통령은 창문을 내리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아마 옆에 있던 경호원이 웬 소위가 하나 와서 각하께 면담신청을 하고 있다고 전했을 것이다. 이야기를 들은 대통령은 무시하고 창문을 올리려는 순간에 형이 소리쳤다. 「만약 북한과의 전쟁이 터지면 먼저 손봐줘야 할 사람이 있다」고. 이 말을 듣은 박대통령의 얼굴이 어둡게 변하더니 그냥 차를 청와대로 다시 돌리며 형을 들여보내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해서 형은 청와대로 들어간 것이다
접견길에 들어 선 박대통령은 대뜸
「뭐야」
라고 물었다. 형은 군부대에서의 일을 자초지종 얘기했다. 국가자원의 낭비아니냐고 덧붙여 말했다. 형의 말이 끝나자 무거운 침묵이 있었다. 한참의 순간이 흐르자 박대통령이
「너 아부지 뭐하시노」
라고 물었다.
「선생입니다」
형이 대답했다.
「아부지 성함이 뭐꼬」
라고 박대통령이 물었다.
「안병태입니다」
라고 답변했다. 또 몇초인 듯한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니가 안병태 아들이가」
「니 얘기는 알아 들었으니 내일 아침 당장 귀대 해라」
단호하게 이 한마디를 남기고 박대통령은 휑하니 나가버렸다.
(박대통령이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문경심상소학교에서 4년간 교사생활을 하였다고 하지만 아버지와 박대통령이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는 나는 잘 모르겠다)
그 사이 경호실에서 형의 소속부대로 연락이 가고 보고를 받은 연대장은 새파랗게 질려서 「이 새끼 부대에 돌아오면 당장 남한산성(군형무소를 지칭)으로 보내라」고 분노를 참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다음날 형이 막상 부대에 귀대하니 윗선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자신에 대해서 한마디의 문책도 없었다. 짐작컨대 청와대에서 아무런 언급이 없으니 부대의 최고 윗선에서는 섣불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 그냥 넘어가 버린 게 아닌가 싶다. 어쨌던 그때가 어떤 시절인데 불의라고 감히 청와대로 뛰어들어간 못말리는 둘째형이다. 남자 배짱 이 정도면 어디가도 굶어죽지는 않을 듯 싶다. 유난히 둘째형을 편애하였고 둘째형의 부탁이라면 뭐든지 해주려고 했던 어머니의 심정을 내가 나이가 들고보니 이해가 갔다. 부모는 그 자식에게서 비젼을 보았을 것이다. 이후 형은 오십초반 고향에서 굴지의 기업을 키워놓고 69세의 좀 이른 나이로 소천했다. 어딘지 모르게 좀 더 큰 일을 했을 것만 같은 참 아까운 사람이라고 나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멀쩡한 사람을 깔깔 웃게 만드는 참으로 희안한 사람이었다/
첫댓글 무슨 글이든 술술 잘 읽혀야 저는 좋습니다.
잘 읽히고 또 솔직하게 털어놓기 힘든 것도 있는데 저는 그런 점에서 배우고 싶습니다.
예전엔 이해하기 힘든 일이 많았지요.
그로인해 고생하거나 억울하기도 했을테구요.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가능한한 남의 눈치를 보지 않으려 합니다.기본에 충실하며 씩씩하게 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