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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아산UBF 특강 제 16 강 메시지(사무엘상15장,16장)
사울의 불순종
말씀 / 사무엘상 15장~16장
요절 / 사무엘상 15: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사무엘상 9장에서 사울은 말합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은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사울은 겸손하였습니다. 사무엘상 10장에는 사울이 순종의 사람이었음과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하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용모가 이스라엘에서 가장 준수하고 키는 다른 사람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습니다. 그랬던 사울이 오늘 말씀이후부터 몰락이 시작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인생의 비밀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15:1-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사울에게 다시 보내셔서 새로운 방향을 주셨습니다. 아말렉을 남김없이 진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말렉은 남녀와 소아와 젖먹이는 아이와 소와 양과 낙타와 나귀까지 모두 진멸하도록 하셨습니다. 아말렉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하나님을 심하게 대적하였습니다. 신명기25:17,18절에 아말렉의 죄악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말렉은 이스라엘의 뒤를 쳤습니다. 이스라엘의 뒤에는 이스라엘 대열을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린아이, 병자, 임산부, 노인, 부상자들이었습니다. 아말렉은 저항능력 없는 약자들을 잔인하게 살해하였습니다. 쫓아 따라다니며 악을 행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명하여 극악무도 아말렉을 지면에서 멸족시키도록 맹세 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에 기록된 아말렉에 대한 심판을 사울에게 맡겨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왕정국가를 이루고 권력 집중이 이루어진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준엄하게 이루도록 지시하셨습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여 철저하게 명령을 수행하여야 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도록 당부를 잊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을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사무엘은 분별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고 사울에게 간곡하게 당부하였습니다.
15:6-9절을 보십시오 사울은 이번에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9절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니라” 사울은 뜻을 가지고 불순종 하였습니다. 모르고 불순종하거나 실수로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불순종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울은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심판하시기로 하셨고, 그 심판을 이스라엘 통해서 행하고자 하시는데 사울이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하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이 사울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방민족들은 하나님을 비웃게 되었습니다. 반드시 진멸하겠다고 하셨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하나님의 백성들의 나라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행하지 않았으니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입니까? 사울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의 악이 가득하게 되든 하나님의 이름이 죄인들에게 가볍게 되든 관심 갖지 않았습니다. 그는 뻔뻔스럽게 전승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는 자기가 자기에게 상을 주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 결과가 어떠할지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의 불순종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그에게 무서운 재앙이 닥쳐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를 경멸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사울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시하였으므로 이제 하나님께서도 그를 경멸히 여기실 것입니다.
그는 불순종하고도 변명합니다. 양과 소를 살려 놓은 것은 하나님께 제사드리려고 했었다고.. 사울은 주의 종이 죄를 지적할 때 하나님께 제사드리려고 했었다고 변명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울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22,23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사술은 점쟁이, 무당의 마술을 말합니다. 구약에서는 점쟁이나 무당을 불러 묻는 자를 죽이도록 하셨습니다. 또 우상숭배를 일삼는 것은 하나님의 큰 진노를 사는 것입니다. 불순종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사술의 죄, 우상숭배의 죄와 동격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주의 종은 순종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울과 같이 불순종하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것도 맡길 수 없습니다.
15장 1절부터 23절까지의 말씀에 나타난 사울의 죄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불순종입니다. 사울왕은 아말렉을 하나도 남김없이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왕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둘째 회개하지 않고 거짓말하고 변명하였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면서도 13절에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사무엘에게 거짓말 하였습니다. 15절에서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라고 하며 무리가 살려서 끌고 왔다고 불순종의 주체를 무리에게로 떠넘겼으며, 백성이 제사하려 남겼다고 불순종의 주체를 백성이라고 허위사실을 붙입니다. 사무엘이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또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17~19) 지적하자 사울은 세 번째 또 회개하지 않고 궁색하게 변명합니다.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사울의 죄, 첫 번째는 불순종이요, 두 번째 죄는 죄를 범하고도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서두에서도 밝혔지만, 사울이 처음부터 이러지 않았습니다. 그는 겸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자기고집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었고 순종하던 사람이 불순종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죄를 지은 후 회개할 기회를 주었지만, 거짓말하며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비겁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울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입니까? 사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불순종의 사람이 된 것입니까? 24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사울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변명하고 있습니다. 사실 아말렉 전쟁은 고대 전쟁의 성격과 완전히 다른 면이 있기는 합니다.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러시아가 용병회사를 고용하고 있습니다. 미국도 이라크 전쟁이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용병회사를 고용하여 전쟁을 치렀습니다. 돈을 주고 전쟁을 전쟁 전문회사에게 치르게 하는 것이 더 싸기 때문입니다. 미군은 병사가 다치면 병사에게 막대한 상이군인 연금을 죽을 때까지 주어야 하고 평생 그 병원비를 다 대야 합니다. 전쟁에 참여하는 군인들은 목숨 걸고 나오는 것이므로 군인들에게 보상을 반드시 해주어야 마음껏 충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대 전쟁에서 가장 일반적이고 확실한 보상은 전리품입니다. ‘금 은 보물, 화폐로 사용되는 가축 그리고 노예로 쓸 수 있는 사람까지 전리품으로 주겠다’ 보장을 해야 합니다. 이 보상이 없으면, 농사 짓던 사람들이 목숨 걸고 전쟁터에 나와서 싸워주지 않는 것입니다. 전쟁사를 보면 전투는 하지 않고 전리품 수집만 하는 군인들이 수없이 등장합니다.
아말렉 전쟁은 다 죽이는 전쟁입니다. 사람도 다 죽여야 하고 짐승들도 다 죽여야 합니다. 아까운 것은 화폐 대신 쓰여 지는 소와 양 가축들이었습니다. ‘이것들 다 죽여야 해요?’ ‘이것들 우리가 못 가져요?’ 백성들의 요구가 있었습니다. 사울은 사람들의 요구, 사람들의 요청을 분명하게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바라는 것을 거절하고 ‘이 전쟁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전쟁이다’ ‘이 전쟁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진멸하는 전쟁이다’ 분명하게 하나님을 드러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왕이 되고 나서 사람들의 섬김, 사람들의 존경, 사람들의 복종 위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높임 받고 사람들의 절대 복종과 사람들이 떠 받들어 주는 것에 마음이 넘어가 버렸습니다. 그는 권력의 달콤함을 알아버렸습니다. 사울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권력의 달콤함을 놓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한다는 계산이 그의 마음에 자리해 버린 것입니다.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마음이 빼앗기고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싶은 것이 그에게 비극을 몰고 온 타락의 본질이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점은 정다운 사람들과 떨어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셈족의 영역에서 함족의 영역으로 옮겨와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우상숭배 환경은 지금의 이라크 쿠웨이트 지역인 갈대아 지방 우르에서나 지금 터어키 땅인 하란에서나 아브라함이 정착한 가나안 지역이나 다 마찬가지로 어디나 성행했습니다. 다른 것은 주위 사람들입니다. 도와주고 섬겨주고 사랑해주는 셈족 사람들이 없는 곳, 함족계열 가나안 족속이 사는 곳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이집트 총리가 된 요셉은 아버지 집에서 아버지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요셉에게만 채색 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지극한 사랑을 받던 요셉을 하나님께서는 노예로 팔려가게 하셔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떼놓으셨습니다. 모세도 이집트 왕자로 많은 섬김과 사랑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미디안 광야로 쫓겨 가게 하시고 거기서 처가살이 하면서 일곱 명의 처제들에게 시달리고 빈들에서 양 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선구자 세례요한도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나 사람들이 귀하게 여겨주고 섬겨주는 환경을 떠나 광야에 거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곁에 나에게 따뜻하게 대해주고 나를 이해해주고 항상 내편이 되어주는 사람들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행복할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울은 키 크지, 잘생겼지, 성실하지, 책임감 강하지, 집안 좋지 게다가 겸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런 사람인데도 왕의 자리에 올라 사람들의 섬김, 사람들의 인정, 사람들의 존경, 사람들이 받들어 주는 것에 맛이 들자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보다 사람 중심, 하나님 뜻보다 사람들의 인기, 하나님 경외하기보다 사람들 요구에 민감한 사람으로 변해 간 것입니다. 이를 볼 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사방 모두 적으로 둘러싸인 곳, 이해해주는 사람 없고 편 들어 주는 사람 없는 곳에서 하나님만 바라보며 투쟁하고 사람들에게는 이해받기보다 이해하고 섬김 받기보다 섬기며 선을 쌓으며 긴 세월 인내를 배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도 모세도 엘리야도 이사야, 예레미야도 모두 어느 곳 하나 의지할 곳 없는 환경에서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고 사람들에게 고생하면서 오직 하나님만 믿는 연습을 하며 하나님만 의지하는 하나님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하여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니” 지금 사울왕에게 사무엘이 와서 죄를 지적하였습니다. 사울은 죄를 지적받음에도 불구하고 거짓말과 책임전가로 일관하여 끝내 준엄한 징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이런 말씀을 들었는데도 그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습니다. 회개 대신 하나님 말씀을 대신 전하러온 사람만 붙들고 있습니다. 27절을 보면, 사무엘을 붙잡고 늘어져 사무엘의 겉옷자락이 찢어졌습니다.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말씀을 주셨지만, 사울왕의 대답은 기가 찹니다.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현실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징계의 순간에도 왕으로써 정치적 입장을 세워달라고 하였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표현으로 하면 ‘몰락의 순간에서도 사람들 앞에 자기를 높여 달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드러내는 일에 무관심하고 하나님의 이름 드러내는 일에 열정 없는 사울은 망하는 순간까지 자기 이름을 소중히 하며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높여달라고 합니다. 사울은 사람의 시선을 더 중시하고, 자기의 이름 높이는 것은 열망합니다. 아말렉 전쟁에서 양과 소는 백성들의 보상 필요 때문에 죽이지 않았다고 하지만, 아말렉왕 아각을 살려서 데려온 것도 적국의 왕을 끌고 옴으로써 자기의 위대성을 백성들에게 자랑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불순종과 책임전가는 우발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그의 가치관과 마음 중심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습니다.
32, 33절을 보십시오. 사무엘은 사울이 살려놓은 아말렉왕 아각을 즉시 처형하였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을 사울의 눈치, 백성들의 눈치 보며 미루지 않았습니다.
34, 35절을 보십시오. 사울은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아 세움 받은 이스라엘 왕국의 첫 왕입니다. 그런 왕이 실패한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의 실패에 대하여 마음 아팠습니다. 하나님께 세움 받고도 마음 중심이 타락하여 하나님께 버림받게 된 사울왕의 영혼을 생각할 때 깊은 슬픔을 가졌습니다.
16장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하나님께서 슬퍼하는 사무엘에게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들레헴 이새의 집으로 가서 그의 아들 중에서 왕이 될 사람을 찾아 기름 부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사울 한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중단되지 않습니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만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할 뿐, 하나님의 생명역사는 하나님께서 이루어 흘러가게 하십니다.
2~13절을 보십시오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대로 베들레헴 이새의 집에 가서 그 아들 중에서 왕이 될 사람을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이새의 집에는 아들이 일곱명 있었습니다. 그 중 맏아들은 누가 보아도 큰 인물이 될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이 누구인지 일곱 명의 아들들을 차례로 나오라고 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집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식사하고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일곱 아들 외에 다른 아들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는 들에서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형들과 함께 거하지 못하고 홀로 들에서 양을 지키는 막내아들을 두고 성서학자들은 어떤 출생의 비밀이 있지 않았을까 하고 보는 분석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아버지와 형들의 천대와 멸시를 받았으며 인정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마음이 삐뚤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빈들에서 말 못하는 양들을 지키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며 하나님을 바라보는 소년으로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를 데려오자 하나님께서는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셨습니다. 소년 다윗에게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가정에서조차 쉼이 없었으며, 가족들이 가하는 무시와 멸시를 당하였습니다만 그의 마음중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소원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기도로 묻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양 지키는 어려움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양들의 생명을 사랑하는 소년이었습니다.
14~2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사울이 어떻게 몰락하고 있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내면에는 악령이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이름을 스스로 높이고자 하고 사람들에게서 유익을 구하는 그의 내면은 늘 번뇌로 가득찼습니다. 신하들은 그를 진정시키고자 수금 악기를 잘 연주하는 사람을 구하여 사울의 곁에 둘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사울왕이 이를 받아들여 소년 다윗이 수금 연주자로 발탁되었습니다. 다윗이 사울 곁에서 수금을 연주할 때, 사울은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갔습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1:10절에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예레미야 2:13절에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일 수 있습니다. 그 본성을 따라 살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의 인정과 칭찬은 사라지는 신기루와 같습니다. 오늘 ‘존경한다’, ‘훌륭하다’ 찬사를 보내던 사람이 같은 입으로 ‘그럴 줄 몰랐다’ ‘실망이다’ 비난하는 일은 얼마든지 벌어집니다. 사람들에게서 만족 얻고자 하는 것은 터진 웅덩이를 파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땅에 계실 때, 사람들의 인기가 높을 때 오히려 사람들을 떠나셨습니다.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 삼겠다고 찾아다녔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식사할 겨를도 없이 백성들을 위하여 섬기는 일을 하시자 밥도 안먹고 일하는 것을 보니 귀신들렸다고 사람들의 비난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자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 지폈다는 비난을 사람들에게서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서 높임받고자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에 힘쓰셨으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자기 생명을 아낌없이 대속제물로 드리셨습니다. 그랬을 때, 예수님을 높여 만왕의 왕, 만유의 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높임 받으려 하는 일,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일은 허망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 일이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의 가장 우선되는 존재 목적입니다. 사람에게서 기쁨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여 주십니다.
사무엘상 2:30 후반절에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존중히 여겨주실 때, 막을 사람이 없습니다. 진정으로 존귀하게 되는 길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존귀하게 하는 구체적인 내용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오늘 말씀에 나오는 사울왕이 행한 것을 반대로 하면 됩니다. 사람들의 요구가 있고 상황이 불리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굳게 지키는 것입니다. 어떤 손해가 따르더라도 하나님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상황윤리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때는 맞았고 지금은 틀리다’ 사람들의 요구를 따르고 눈앞의 상황을 따르면 지혜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 그런 사람은 큰 일 할 수 없습니다. 큰 낭패를 겪는 날이 옵니다. 상황이 어렵고 손해를 보더라도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지혜입니다.
다음으로는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죄 짓지 않고 살겠습니까? 죄와 싸우지만 우리는 또 허물을 보이고 약점이 나타나며 죄를 짓습니다. 죄를 짓더라도 진실하게 회개하고 그 죄를 다시 반복하지 않고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울왕은 죄 짓고도 순종했다고 거짓말하였습니다. 순종했다고 거짓말을 거듭하다가 더 거짓을 말할 수 없게 되자 백성 탓 하였고 제사드리려 하였다고 핑계를 댔습니다. 그는 불순종한 죄 위에 회개할 기회를 스스로 거부하는 잘못을 더 얹었습니다. 그는 돌이킬 기회를 스스로 놓쳤습니다. 사무엘하 12장에는 심각한 죄를 지은 다윗이 나단 선지자로부터 죄를 지적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똑같이 하나님의 종으로부터 죄를 지적받았지만, 다윗은 사울과 같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죄를 인정하였고,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나가 금식하며 엎드렸습니다. 이때 다윗이 회개하는 시가 시편 51편입니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죄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자기 이름을 사랑하고 사람들의 인정을 구하는 것은 자기 영혼을 파멸로 이끄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삶입니다. 그런 인생을 하나님께서 존중히 여기십니다. 하나님께서 존중히 여겨주시는 인생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산 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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