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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적 층위의 수필 공학적 구조
- 눈재 한상렬 『미로찾기 4막 10장』 속으로
남홍숙
제 1장 : ‘미로찾기’에 들어가며
수필이 인생의 전부였다는 눈재 한상렬. 수필을 찾아 미로(迷路)찾기를 시작한 지 30년이며 50여권의 수필집과 수필평론집을 상재한 그가 “수필은 아직도 미궁이요, 미로찾기일 뿐”이라고 선언한다. 이는 평소에 그가 수필의 정체성과 삶의 진정성에 대해 얼마나 고심하는 작가인가를 밝혀주는 바로미터라 할 수 있다.
『미로찾기 4막 10장』은 표제에서 암시된 것처럼 소단락까지 희곡형식으로 분류되어있다. 그간의 수필집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생경한 목차부터 시작하여 머리글, 프롤로그, 에필로그에서 수필언어의 낯섦과 신선한 생동감을 부여하고 있다. “미로찾기는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그는, 현수필계를 선도하는 초답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의 수필이론에서, 언어의 낯설게 하기와 퓨전수필 수용을 마치 수필문학의 헌장처럼 내세우며, 인습으로부터의 탈출을 요구하는 수필가이자 평론가다.『미로찾기 4막 10장』에서는 그의 이러한 수필론을 근간으로 하여 “새로운 유형의 다양한 수필쓰기의 동시다발적 접근을 통한 변화”를 총체적으로 조망한 흔적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에 대한 실험이, 전통적 수필쓰기라는 한계를 최대한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시도하고자 하였음을 피력하고 있다.
눈재 한상렬, 그가 표제부터 이 책 곳곳에서,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 같이 혼돈과 무질서의 공간으로 표상하고 있는 ‘미로(迷路)’를 어떻게 재해석하여야 하는가.
작가 자신이 의미하는 미로(迷路)란 “해결책을 못 찾아 갈팡질팡하는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서 수필쓰기에 대한 겸허한 표현일수도 있으나, 사회와 문학의 부조리에 대한 탄식일수도 있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한 번 들어가면 다시 빠져 나오기 어려운 길”로 해석함이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 수필집의 착상단계부터 수필의 설계도를 준비한 듯, 곳곳에 언어의 퍼즐 조각을 숨겨 놓았다. 그리하여 그가 설정한 키워드를 찾지 않고는 갑갑하여 그의 수필집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도록 포석을 깔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 사회, 시대, 문화, 예술, 철학을 아우르는 무궁무진한 그의 수필광장을, 디테일하게 파고들어 키워드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은 작업이라는 아이러니도 함유하고 있다. 그만큼 그의 수필은 폭넓은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신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라는 2인칭 대명사를 주체로 하는 이 책의 프롤로그는, 작품 밖의 작가 한상렬이 작품안의 화자 한상렬을 구체화하여, 그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담담하게 적은 담론이다. 그는 인간이기에 앞서 수필작가이기에 보통사람이 아니다. 남들이 하루의 피곤을 풀고 있을 때, 그는 시계소리를 ‘지키고’ 있다. 밤중에 시계소리를 지키고, 물 흐르는 소리를 풀벌레 소리로 인식한다. 이는 그가 정치하고 예민한 촉수로써 세상 속으로 침잠하는 작가임을 대변해주며, 한국의 수필작가에게 고하는 간접적인 경종일수도 있고,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그의 집 택호는 ‘수필집’이라 할 정도로, 그는 수필집에 갇혀있기도 하고 수필을 파수꾼처럼 지키고 있기도 하다. ‘수필집’에서 “농부가 끌고 가는 손수레와 같은 작품을 쓰자”고 언명을 내리기도 하지만 그가 내린 소박한 단언만큼 그의 수필은 단층적이진 않다. 그는 이미 ‘낯설게 하기’라는 거대 담론적인 수필론의 선두에 서서, 수필의 미학적 변용을 시도하는 문제의식을 지닌 글을 상당수 발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 2장 : 수필언어의 입체적 공법
1막 1장은 「깨어있기」로 막을 올린다. 깨어있는 자는 삶의 기호를 건성으로 흘리지 않는다. 깨어있음으로써 「노란색 바라보기」에서 노란색 안에 깃든 대칭구조적인 운명과 고흐의 혼에 비추는 노란 빛의 의미작용을 의식한다. 노란색의 밝은 이미지 속에서 끝없는 어둠을 발견하며,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 나오는 식당의 노란색 테이블, 노란색 방, 노란색 커튼의 색채를 슬프지만 슬프지 않은 색감으로 의미화 할 수 있음은 그가 「깨어있기」 때문이다.
첫 장 첫 막을 올린 「깨어있기」는 막 전체를 아우르는 작품이라고도 볼 수 있다.
「깨어있기」에서 그가 차용한 수필의 형식적 기법은 4성 대위법으로 보인다. 4성 대위법은 바흐가 활동하던 바로크 시대에 유행하던 다성 음악의 한 부류이다. 하나의 멜로디가 진행되고 그 밑에 반주를 받혀주는 게 아니라 동시에 여러 개의 멜로디가 진행된다. 각각의 멜로디가 독립적인 의의를 가지면서도 전체적인 화성효과를 내는데, 이런 다성적 구조가 문학에서도 숨어있다고 『미학 오디세이 2』에서 진중권은 말한다.
한상렬은 「미로찾기」, 「공전과 냉소」, 「마녀사냥」, 「고백서를 쓰다」에서도 이러한 수법을 보이는데 이는 구성상으로 표현하면 두 가지 이상의 이야기를 합쳐서 엮은 복합구성이라 할 수 있다. 표피적인 외시의미로부터 수많은 함축의미를 끌어내어, 수필의 평면적 구조를 입체적 지평으로 확대하는 기법으로 볼 수도 있다.
「깨어있기」에서는 수필의 소재를 찾기 위해 깨어있어야 하는 화자의 노마드적인 영적 행로를 그리고 있다. 깨어있음으로써 낯선 풍경에 동화되고 낯선 풍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투사하기도 한다. 작품 각 단락의 내용이 독자적이어서 유기성이 없어 보이지만, 각각의 외시의미를 세밀히 따져볼 때, 이 작품은 수필을 짓기 위하여 정신을 고도로 긴장하고 있다. 그리하여 깊은 고뇌와 관조로써 무장해야함을 함축의미로 전하고 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깨어있기」를 순서대로 정리한다.
1) 나이아가라 폭포수 앞에서 지축을 흔드는 폭포의 진동을 발견한다.
2) 숙소로 돌아와 물소리의 환청을 듣고 눈을 감는다.
3) 아침에 일어나 사물의 미세한 움직임에 시선을 정박하고 그 내밀한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함을 자각한다.
4) 식기 사이에 던져진 것처럼 벌거벗은 채로 식탁 위에 누운 여체를 보면서 수필의 탄생을 스스로 예고한다.
5) 괴테의 환상과 파괴적인 “거대한 고백의 조각”에서 울림을 느끼는 화자에게 깨어있기는 진행형이 된다.
6) 평당 5천만원, 한달에 1억원이 뛰는 집값의 추세에 미친 세상을 절감하는 작가는 여전히 깨어있다. 진행형이다.
7) 육천만 관객의 기립 박수를 보내는 앞에서 만면에 미소를 띤 파바로티의 목소리는 마그마를 부르는 생명의 울림과 흡사하며 인간이 창출해 낼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느끼는 화자의 의식은 깨어있다.
8) 수필쓰기는 작가에게 참회록이 된다. 수필과 삶은 무명의 한 작은 별임을 고백하면서 그의 깨어있기는 완료형이 된다.
위의 담론에서는 뚜렷한 질서의식이 발견된다. 이는 화자가 수필을 쓰기 전에 이미 완성된 형태로서의 글을 머릿속에 지니고 있음이 감지된다. 즉, 1, 2, 3 단락까지는 수필쓰기의 착상단계가 되는 도입부에 해당하며, 4, 5, 6, 7 단락은 그가 보고 듣고 느낀 각기 다른 대상들을 구체적 언어를 통해 병렬시키고 있다. 그의 의식이 진행형으로 깨어있음은 수필을 쓰는 중이다. 이는 수필쓰기의 몸체인 본문에 해당한다. 8 단락은 화자의 자의식을 돌아보는 수필의 마무리 단계인 종결부가 된다. 소재로 취택된 나이아가라, 인형, 괴테, 집, 파바로티는 마그마와 같은 깊은 열정과 파괴성을 함유한다는 등가성을 지니고 있어, 내적 결속력을 갖추면서도 작품은 한층 깊고 확대된 층위를 형성하고 있다.
1막 3장에 배치된 표제작인 「미로찾기」도 이와 유사한 수필 공법을 보인다. 평자가 여기서 '공법'이라 표현함은 그가 수필을 무작정 쓰는 게 아니라 집을 짓는 설계도같이, 촘촘한 구도를 준비하고 쓰기 시작한다는 의미다.
「미로찾기」의 구조를 살펴보면,
1) 인파로 가득한 시내중심가는 마치 늪 속으로 유영하는 작가의 혼란처럼 느껴진다.
2) 정국의 혼란을 보면서, 메나르의 “역사는 진실의 어머니”라는 문장을 떠올린다. 3) 고갈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과욕과 맹신으로 미로를 헤매는 작가군에서 벗어나 작고 귀여운, 평범하지만 비범한 것에 관심을 가지도록 유도한다.
4) 산업화에 따라 가치관이 변모하고 미풍양속이 사라지며, 도덕과 문학의 불일치가 초래된다.
화소의 모든 게 미로다.
결국 이 작품에서도 그의 ‘미로’는 수필로 귀결되고 있어 그가 수필의, 수필에 의한, 수필을 위한 삶을 살아간다는 증표가 된다. 종결문장인 “진실로 문학의 미로찾기는 계속되어야 하는가?”라는 다소 냉소적인 표현에서는 출구 없는 부조리극이 연상되기도 한다. 그가 늘 깨어있더라도, 모순과 역설, 무의미, 불완전한 혼돈이 뒤얽혀있는 바벨의 도서관 같은 우리의 현실을 그린 「미로찾기」 속에는 인간의 고단한 실존이 거울 이미지처럼 담겨있다.
제 3장 : 이종(異種)결합으로의 변용
언술은 의미 있는 메시지를 창조하는 ‘개인적 행위’다. 즉, 규칙과 코드를 지닌 교칙이라는 틀에 고정된 교모가 어느 날, 멋을 내는 모자도 될 수 있고 운동모자로도 사용될 수 있도록 변용하는 것은 언술의 행위이다. 학생들은 요모조모로 교모의 변용을 발견하고 실천하며 즐긴다. 기호의 ‘선택’과 ‘조합’은 언술을 이루는 두 가지 기본 요소로서, 언술은 ‘개인’단위의 행위이기 때문에 기호의 변용은 천차만별로 일어난다. 그러나 기호의 변용은 융통성을 지니면서도 전적으로 자유로운 것이 아니고, 어떤 유형을 이루며 통상적인 틀로 변해가는 것이다. 굳어진 틀(Schema)에는 변용의 과거가 있다. 그 과거는 틀로 하여금 현재의 변용을 수용할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설명할 수 있게 해준다고 김경용은 『기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언술하고 있다.
푸코에 의하면 규율은 각 신체의 힘들을 다른 힘들과 조합하여 효과를 극대화한다. 규율은 여러 힘을 ‘조합’하여 효율적인 장치를 만드는 기술이라고 했다. 또, 철학자인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그의 저서 『나와 너』에서, 3인칭 대명사 ‘그것’의 세계가 그대로 방치된다면 즉, ‘그것’이 나와 관계를 맺는 ‘너’가 되는 것으로 변화되고 용해되지 않는다면, ‘그것’의 세계는 악령으로 화하고 만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했다.
위의 세 담론을 종합하여 수필문학의 관계망과 범주화에 적용해보면, 수필과 영화, 수필과 음악, 수필과 그림… 에서 관계가 성립되지 않으면 이들 예술의 관계는 3인칭인 ‘사물들의 세계’로 전락하고 만다. 타장르의 틀에 고정된 예술을 수필문학에 끌어와 기호의 선택과 조합으로 변용할 때, ‘의미와 가치의 세계’로 변하면서 예술의 미학적 효과는 극대화 되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눈재 한상렬은 “앞으로 우리 문학은 영상이나 음악, 미술과 손을 잡고 결합할 것으로 예측된다. 『장미의 이름』의 작가 움베르토 에코도 21세기에는 갖가지 문화가 뒤섞인 잡종적 혼합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퓨전은 미래의 비전(Future Vision)이 된다”고 조재은의 수필 평문에서 말하였다. 한상렬, 그는 이러한 자신의 수필론을 수필작품에 도입하여 실험하는 수필가이기도 하다. 『미로찾기 4막 10장』 제 2막의 전편에 이종 결합으로 쓰여 진 퓨전수필이 놓여 이를 입증하고, 3막으로 넘어가면 ‘키치를 넘어 낯선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2막에서 「보여지는 여자 - 뒤집어보기」,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에서 수필과 그림이 만나서, 포르노 같은 그림을 성화(聖畵)나 명화로 뒤집어 보여주고, 음악과 수필은 「화산은 살아있다」,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으며」에서 만나 파바로티의 마그마 같은 열정을 들려주며 브람스의 협주곡을 연주한다. 「지킬과 하이드」는 뮤지컬과 만나 선과 악 사이를 오가는 인간의 단면을 파헤치고 있다.
「보여지는 여자 - 뒤집어 보기」에는 세 편의 문제시 되었던 명화를 제시하고 있다. - ‘불은 젖을 아버지의 입에 물린 여인’ ‘관객을 노려보는 매춘부 올랭피아’ ‘나는 당신의 여자예요, 라고 속삭일 듯 다가오는 비너스’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의 눈에 핏발이 섰다. 마지막 숨을 헐떡이는 아버지 앞에서 무엇이 부끄러우랴. 여인은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가슴을 풀었다. 그리고 불은 젖을 아버지의 입에 물렸다. ‘노인과 여인’은 부녀간의 사랑과 헌신과 애국심이 담긴 숭고한 작품이다. 그래서 푸에르토리코인들은 이 그림을 민족혼이 담긴 ‘최고의 예술품’으로 자랑하고 있다.
- ‘노인과 여인’의 부분
그림은 한 장의 평면적 공간으로 보여주지만 수필은 그림의 이면에 숨겨진 스토리까지 포착할 수 있다. 관람객의 마음까지도 수필의 피사체가 된다. ‘노인과 여인’이라는 그림 앞에 선 관객은 “이런 싸구려 그림이 어떻게…”하면서 딸 같은 여자와 놀아나는 노인의 부도덕을 통렬히 꾸짖는다. 그 옆에는 화자도 함께 있다. 그러나 도입부에서 화자는 아직 과묵하다. 다만 “의아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며 에피소드에 흥미만 제공한다. 화자는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답을 유보하고 있다. 오히려 “도대체 작가는 어떤 의도로 이런 불륜의 현장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일까? 과연 이 그림은 3류 포르노에 불과한가?”라는 물음으로 서사의 극적효과를 고조시킨다.
결부에서 화자는 주제를 통찰하기에 이른다. “교만과 아집, 그리고 편견을 버려야만 세상이 보이게 마련이다. 그래, 보여 지는 대로 보아야하는가?”라는 자아성찰이 담긴 독백으로, 수필이 그림을 만나 서로가 서로를 변하게 하면서 단층적 사고를 입체적 사유로 전환시켜 준다.
「보여지는 여자 - 뒤집어 보기」에서는 마네의 ‘올랭피아’와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이라는, 표현기법과 당대의 사회적 반향이 대척점에 놓여있던 그림을 나란히 배치하고 있다. 두 그림의 묘사는 디테일하다. 그러나 화자의 내면은 결코 드러내지 않는다. 즉, 묘사만 할 뿐 설명은 생략되어 있다. 이는 독자에게 상상의 지평을 넓혀주기 위한 수법이 아닐까 한다.
그녀가 지금 우리를 노려보고 있다. 아주 뻔뻔한 표정이다. 리얼리즘을 표방한 마네의 모델이다. 마치 그녀는 자신의 나신을 보이며 “그래, 볼 테면 봐라.”라고 말하는 듯하다. 몰래 그녀의 나신을 훔쳐보던 이들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명화(名畵) 속 여인은 보여 지는 것인가? 아니면 보여주는 것인가?
‘올랭피아’ 부분
아름다운 나신의 극치다. 여인의 누운 몸은 완만하다. 희어진 허리의 선, 배는 납작하고 엉덩이는 우리를 향해 잘 보이도록 배치되어 있다. 바싹 오그린 넓적다리가 아주 탄력 있어 보인다. 나른하게 들어 올린 팔은 풍만한 가슴을 더욱 돋보이게 하여 에로틱하기 그지없다.
‘비너스의 탄생’ 부분
독자는 마치 오르세 미술관에서 두 그림 앞에 서 있는 느낌으로 수필 속 두 여인을 번갈아가며 읽을 것이다. 그림은 드러냄과 감춤으로 대조되기도 한다. 삶의 진실을 드러내고 있는 올랭피아, 신화와 성경 속으로 감추고 있는 비너스의 모습이다. 이 수필의 결어 “올랭피아가 나를 쏘아보고 있는 듯하다. 그가 내게 답변을 유도하고 있는 성 싶다”는 담론은 화자의 비애어린 독백이기도 하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당시 프랑스 사회의 위선에 억눌려서, “죽을 때까지 올랭피아를 처박아 두고 살아야했던” 마네의 억울함과 올랭피아의 노려보는 눈빛에 심안을 다시 머물게 될 것이다.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더 많은 상상을 하게 된다고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남성들의 시선을 다소곳이 받아내는 카바넬의 여인과는 달리, 마네의 여인은 이렇게 관객을 도발적으로 쏘아 봄으로써 관계적 상황을 뒤집고 있다”라는 화자의 언술은 프랑스 철학자인 베르그송의, 우리의 의식에 의해서 전혀 다른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공간이 나란히 놓여지게 하는 - ‘공간의 병치’라는 용어를 떠오르게 한다. 그럼으로써 화자는 마네의 진정성에 입각한 사실주의 기법과 당시 삶의 한 계층으로서의 여자 올랭피아의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은 시간’의 초자연적 공간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 “기억에 힘입어 시간은 상실되지 않는다. 시간이 상실되지 않는다면 공간도 상실되지 않는다. 되찾은 시간과 함께 되찾은 공간도 있는 것이다”라고 한 프랑스 문학 평론가인 풀레(Georges Poulet)의 공언이 한상렬의 이 작품 안에 내장되어 있다.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으며」에서는 음악과 수필이 만난 퓨전수필로서, 기법상으로 특별한 변용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담론에 깔린 휴머니즘적인 감상에 있어 주목할 만하다. ‘깨어있기’를 거듭하고 ‘미로찾기’에 심취한 화자이지만 음악 감상에 있어서는 그의 특질인 이지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다. 사회, 정치, 문학의 담론을 펼치지도 않는다. 다만, 감성의 문을 활짝 열고 느낌 그대로 받아들인다. “선율 속으로 침몰하여, 흐느적거리던 심신도 하나 둘 일어나 생기를 찾고 움직이게” 한다.
여럿이 어울려 저마다의 소리가 혼일(混一)하여 조화의 아름다움을 보이는 창조의 세계가 더욱 좋아서이다. 그것이 어찌 음악의 세계뿐이랴. 문학이 그렇고 그 밖의 예술 행위가 모두 그러하다.
브람스의 교향곡 4번을 듣는다. 마음이 평안한 오후다. 여럿이 어울리는 조화의 극치다.
교향곡을 들으며 “모든 생각들을 접어두고 오직 선율에 몸을 맡긴 채 침잠되어가는 (화자의) 자아”는 영화라면 신들린 듯 사족을 못 쓰던 학창시절을 회상한다. “감미로움에 젖으며 웅장한 서사시를 듣기도 하며 삶과 죽음의 계곡을 넘나들곤 했던 기억.” 그 기억의 편린들이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준다. 그가 짜증나고 분노에 떨 때 음악은 어느 정도 진정 시킨다. 그 틈새로 ‘닥터지바고’에 나오는 라라의 피맺힌 부르짖음’과 ‘에덴의 동쪽’ ‘피서지에 생긴 일’ ‘부베의 연인’ ‘사운드 오브 뮤직’…의 장면을 떠 올린다는 담론은 정보로서의 효력도 지니며, 함께 회억에 젖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도 손색이 없다. 「장충당 공원」 또한 학창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는 회고적 수필로서 인간적 친화감을 조성하고 있다.
제 4장 : 존재의 전인적 친화감
눈재 한상렬은 20년이 훨씬 넘는 고물 「선풍기」 한대를 가지고 있다. 세월이 흘러 녹이 슬기 시작하고 더 좋은 선풍기들이 줄지어 나왔지만 “애초 정을 준 그 녀석(선풍기)에게 정을 떼기가 힘들어 한동안 그 선풍기에만 매달린다”면서 선풍기를 마치 자신의 분신인양 의인화한 기법에서 휴머니즘적 면모가 다분히 풍긴다. 이순의 초입에 쓰는 「고백서를 쓰다」에서는 틱 나트 한의 “차를 천천히 마시라”는 잠언을 떠올리고, 생을 시처럼 살고 싶다는 내면의식을 표출하기도 한다. 괴테의 “좀더 빛을…” 하고 남긴 마지막 한마디가 그의 가슴을 울리기도 한다. 일찍 세상을 하직한 아우에게는 편안한 마음으로 세상과 이별했길 희구한다. 이로 볼 때 그의 감성의 문은 열려있으며 물신적 가치보다는 정신적 가치를 중히 여기는 미적 정서로 축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미로찾기 4막 10장』에는 그가 책을 읽고 경험했던 일들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복합적 예술’이 표상되어 있다. 이는 그가 “하나의 길을 선택하면 다른 길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것으로 볼 때, 그가 가지 않은 다른 길의 그리움을 다량의 독서와 다양한 경험의 축적으로 달래고 있음이다. 반면에 “「바다」소리 뒤 - 모든 것을 비우고 영혼으로 바다 소리를 들을 때 침묵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라는” 바다에의 감정이입은 그가 한때 「애옥살이」를 하던 때를 잊지 못할지라도, 종종 시인처럼 살고 있다는 증표로 인식된다.
수필은 존재의 문제를 규명하는 인간학이다. 존재는 자아 정체성을 바탕으로 하고 자아 정체성은 기억의 편집으로 이루어진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직조하는 기억이 사라진다면 우리의 정체성도 상실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 「꽃보다 아름다운」, 「때로는 자유인이 되고 싶다」, 「다빈치에서 일출을 기다리다」등의 수필에 표상된 그의 자아 정체성은 어떤 지평에 놓여있는가.
「꽃보다 아름다운」은 “제 이득에만 눈이 어두운 사람들이 하도 많은 세상에 자신도 어려우면서, 남을 돕는 아름다운 마음을 지닌 사람들에게” 시선이 머문 작품이다. “봉급의 아주 적은 부분을 덜어 보내며” 그들과 공동체적 삶을 살아가는 화자의 생의 한 단면이 엿보이기도 한다. “어쩌다보니 여러 사회단체에 돈을 조금씩 보내고 있다. 그러나 실상 부끄럽기가 그지없다”는 언술은 수필언어에 미감을 부여한다.
그가 느끼는 「꽃보다 아름다운」사람은 어떠한 모습인가.
좁은 길에 늘어선 난장으로 인해 퇴근길에는 걸음을 빨리하기 버겁다. 보행에 지장이 있긴 하여도 사람 사는 세상의 모습이니 이를 어찌하랴. 하루 수입이 얼마나 될까 싶지만, 그들의 주름 잡힌 얼굴이 비록 고달픈 삶의 훈장처럼 보이지만 아름다워 보이기도 한다. 열심히 사는 모습을 읽을 수 있어서다.
현대의 물신주의로 탐닉된 정신적 편력을 그는 소박한 공간을 빌어 「꽃보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치환하고 있다. 이는 「미로찾기」에서 그가 밝힌 “농부가 끌고 가는 손수레와도 같은 작품을 쓰기 시작해야 한다”는 담론과 같은 맥락이기도하다. 그런 점에서 눈재 한상렬의 수필은 작은 소재로 큰 의미를 촉발하는 지평에 있기도 하다.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판잣집에서 자신의 육신을 거두는 일조차 힘든 사람들이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사랑의 화음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보는 시선은, 경제적 여유는 있더라도 마음의 틈새가 없어 허덕이는 현대인들에게 “돌아보면 부끄러운 일뿐임”에 공감대를 자극함으로써 자아성찰의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나는 때로 자유인이고 싶다」는, 존재의 근원적 강박의식과 탈주욕망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다. 「권태」라는 수필을 쓴 이상도 ‘일상이 새로운 느낌을 주지 못하여’ 권태로운 거라 했다. 「권태」의 결부에서 “암흑이 암흑인 이상 이방 좁은 것이나 우주에 꽉찬 것이나 분량상 차이가 없으리라”하였다. 그렇다. 아무리 넓은 곳에 있더라도, 반복되는 일상으로 살다보면 “자유인이 되어 아무 곳이나 훨훨 날고 싶은” 인간의 본성이 있다.
한상렬은 환경적인 외적요인과 자신의 내적요인으로 인해 강박의식을 느끼며 탈주욕망을 표출한다. 평생을 한 도시에 살았고, 오랜 동안 후학을 지도함으로 인해 “길거리에서 무수히 조우하는 여인네들을 보면서 가끔씩 행동의 제약을 받고 있다.” 또 내적요인으로는 “산에 올라도 넥타이를 매지 않으면 가지 못하는” 습관인데 이를 자신의 중병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화자는 혈압이 있어서 갑자기 추워지는 날씨에 민감하다. 어느 날, 두툼한 잠바를 걸치고 출근했다가 모임에 참석했는데 넥타이를 매지 않아 난감했다는 소회를 그는 이렇게 언술한다. “몇 푼 되지도 않은 내 꼬장꼬장한 성정이 이렇듯 쓸모없는 일에까지 신경을 곧추세우고 있으니 참으로 나는 구제 불능인가 보다”라고. 이로 볼 때, 눈재 한상렬은 자신에게 엄격하며 강한 윤리의식에 매여 살아가는 생활방식을 보여준다. 이러한 권태와 강박의식을 “일체의 구속에서 자유로은 해방”인 여행으로 해소하지만, “며칠 후 다시 구속되고 일상으로 돌아옴”이 두렵다. 그렇더라도 “여행이라도 떠나야 할 모양이다.” 여행은 외적 강박요인을 해결해주는 반면 그의 내적인 구속요인을 치유해주는 화소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만족할 리는 없다. 때로는 치솟는 울화를 삼켜야 하고, 내 인내를 시험하는 듯 참기 어려운 경우도 더러 있게 마련이다.
내가 배운 것이 있다면 그건 ‘바보 같이 사는 법’일 게다. 아니 ‘손해 보며 사는 인생‘ 그게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때로 자유인이고 싶다」는 작품에 표출 된 그의 심상이다. 수필문학 모임의 대표를 맡은 지 스무 해가 지나도록 우여곡절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는 울화를 잠재우는 방법으로 “손해 보며 사는 인생”을 선택한다. 윤리의식이라는 틀 속에 자아를 스스로 구속해 놓았지만 타인에게는 “바보 같이 사는 법”으로 살아가는 화자야말로 정작 군자에 가까운 인격이 아닌가한다. 지혜라는 명약이 화자의 심중에 내재되어 수필의 미적 수준을 끌어 올리고 있다.
「다빈치에서 일출을 기다리다」는 일출이 유명하다하여 정동진과 가까운 ‘다빈치’라는 숙소에서 해뜨기를 기다린다. 설악으로 갈 발길을 여기에서 머물기로 돌린 것 같다. 그러나 시계바늘이 20분을 지났는데 해가 올라 올 생각을 않는다. 화자의 “아내는 (아직) 잠을 잔다.” 자는 아내를 배려하여 화자는 베란다로 조용히 나가 잠시 회억에 잠기다 들어오니 “아내가 눈을 뜬다.” 화자는 해가 뜨지 않는 이유를 아내에게 묻는다.
“아니 해가 저기 떠 있지 않아요?” 한다. 아뿔싸, 나는 그 동안 창밖으로 훤히 내다보이는 바다의 정면만을 응시하며 왜 해가 뜨지 않느냐고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단 말인가. 정면에서 각도를 조금만 트니 썬크루즈 옆으로 해가 한 뼘이나 드러나 있다. 어찌나 눈이 부신지 차마 볼 수가 없다.
누구나 실수를 하고 살지만 타인의 허점을 목격하면 실소를 금치 못하는 게 인생의 묘미가 아닌가 한다. 남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일도 보시라 하지 않았는가. “해 뜨는 방향도 미처 헤아리지 못한 우둔함”을 자책하는 화자의 모습에 어린 휴머니즘적 면모는 재미있는 한편의 해학수필을 건져 올렸다.
제 5장 : ‘수필집’을 나오며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에 이런 구절이 있다. “A라는 책을 찾기 위해서 먼저 A가 있는 장소를 지시하고 있는 B라는 책을 참조한다. B라는 책을 찾기 위해 C라는 책을 참조한다. 그리고 그렇게 영원히…. 이러한 모험들 속에서 나는 나의 인생의 시간을 탕진하고 낭비했다. (중략) 단 한 사람, 설사 그게 몇 천 년 전일지라도 - 이래도 좋으니 그 책을 들춰보고, 그것을 읽어 본 사람이 있기를 기도했다. 만일 영광과 지혜와 행운이 나의 것이 아니라면 그것들이 다른 사람의 것이라도 되게 하소서.”
눈재 한상렬 - 그가 수필의 진리를 찾아 끝없이 미로 찾기를 하지만 끝내 ‘완전한’ 진리에는 도달하지 못함을 알고 있다. 완전한 음악, 완전한 미술, 완전한 문학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르헤스도 진리를 찾기 위해 “영원히 책을 뒤져야하는 모험들 속에서 시간을 탕진하였다”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눈재 한상렬에게 있어 수필의 미로 찾기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깨어있기’에서 ‘미로를 찾고’ 있기에, 그는 「어리석음에 대하여」도 다음과 같이 통찰한다.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아무도 알아주지 않거나, 그가 어떤 사람이더냐는 물음에 그저 ‘나는 몰라’라 한다면 어찌 슬픈 일이 아니랴, 그래 사는 날까지 그저 최선을 다해 자그만 흔적”이라도 남기기 위해 그는 현재 진행형으로 미로찾기의 주체로 서 있는 것이다. 그는 “다수가 믿을 때 그것이 옳고 현명하다고 인정하는 지식의 집단적 본능”에 얽매여 있지 않고, 선두에서 개척하고 창조해야 하기 때문에 더욱 고단한 작업이지만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깊은 권태’에서 헤어 나오는 방법이 ‘실존’이라 했다. 실존은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기획하고 그것에 따라 살아가는 ‘기획투사’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자신의 존재가능성에 스스로를 던져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자기 자신을 새롭게 구성하는 본래적 자기로 살아간다’는 존재에 대한 키워드를 눈재 한상렬, 그는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있는듯하다.
그의 미로찾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실존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아’와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실존, 그 자체가 그에게는 미로찾기이기 때문이다. 꽤 많은 시간을 통과한 훗날에도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미로찾기는 내게 있어 운명 그 자체”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