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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호]
추리소설은 작가와 독자가 함께 즐기는 엔터테인먼트다
- 도진기의 소설을 읽다
임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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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미 본지 2010년 겨울호(통권 51권)에서 도진기의 작품에 대해 한 차례 이야기한 바 있다. 그 때 도진기는 느닷없이 두 편의 장편소설을 들고 나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다. 같은 해에 단편으로 등단한 작가가 한꺼번에 두 편의 장편을 또 출간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준비된 작가란 말이 된다. 더구나 본격추리소설의 기치를 내걸고 발표한 작품은, 이 땅의 토종 추리소설이 차지하는 척박하기 그지없는 환경을 생각했을 때 큰 의의를 지니는 일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부랴부랴 사서 읽은 도진기의 첫 두 권의 추리소설 붉은 집 살인사건과 라트라비아타의 초상은 기대한 만큼의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추리소설의 미래에 희망을 걸만한 작품이었고 작가였음은 분명했다. 다만 당시 나는 새로운 작가의 출현을 알리긴 했지만(나만 알린 건 물론 아니다.), 두 편의 장편추리소설에 대해 주로 부정적인 부분에 대해 많은 지적을 했었다. 그것은 그의 소설이 더욱 발전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였다. 칭찬이야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니,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는 것이 작가가 쓸 다음 작품에 도움이 되리라 나는 여겼다.
이 두 편의 소설 이후 나는 솔직히 한동안 그의 작품을 보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아무리 필력이 대단하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해도 한꺼번에 두 편의 장편소설을 출간했다면 정신적으로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더구나 그는 현직 판사여서 오로지 작품 창작에만 열중하기는 어려운 처지가 아닌가? 그렇다고 그가 판사직을 그만 두고 작품 쓰기에만 전념하라고 권유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지만 무모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도진기는 한 해가 지난 작년 정신자살(들녘, 2011년 7월 발간)이라고 하는, 분량도 450쪽에 이르는 장편을 내놓더니 급기야 올해는 또 두 권의 문제작을 출간했다. 추리단편집인 순서의 문제와 장편추리소설 나를 아는 남자(모두 시공사, 2012년 5월 출간)가 그것이다.
서점에서 이 두 권의 책을 봤을 때 나는 외국 소설을 번역한 것인 줄 알았다. 표지 디자인이 국내 작가의 작품이라기보다 외국작가의 작품을 번역한 책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니(작가 이름이 되게 작다) 익히 이름을 알던 작가였다. 나도 그 수준과는 관계없이 글을 빨리 쓴다고 자부하는 편이지만, 이 작가의 필력에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한 권은 7편의 중단편으로 이루어진 소설집이 아닌가? 그 자리에서 두 권의 소설을 사 들고 나와 차 안에서부터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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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는 작년에 나온 소설 정신자살을 진즉에 사 두었다. 당시 나는 이 소설을 백여 쪽 정도 읽다가 덮어버리고 말았다. 사건의 전개가 지리멸렬했고, 다음에 벌어질 사건에 대해 아무 궁금증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작가가 말하는 ‘정신자살’이라는 개념에도 도무지 공허해 공감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작가가 첫 두 권의 장편에서 보여주는 무모한 억지(?)를 여전히 버리지 못했다고 생각해서 읽기를 그만두었다.
그런데, 이번에 나온 두 권의 소설(집)을 읽으니 일 년 사이에 부쩍 발전한 냄새가 책갈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더구나 추리단편집을 냈다는 사실은 고무적이었다. 어쩌면 추리단편은 추리장편보다 훨씬 쓰기(특히나 잘 쓰기는)가 어렵다. 나는 지금까지 네 권의 장편소설을 냈지만 단편은 한 편도 발표하지 못했다. 쓰긴 했는데 워낙 수준이 낙후되어 내놓을만한 게 못된 탓이다.(작년에 두 편 썼다가 저주에 가까운 악평을 듣고 깨끗이 단념했다. ‘이 작품을 왜 썼냐?’고 물어올 정도니 말 다한 것 아닌가.)
그런데 도진기가 잡지에 발표하는 과정도 없이 전작으로 내놓은 7편의 추리단편은 속도감이나 재미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작품의 완성도마저 떨어진다고 하기 어려웠다. 그 중에서도 중편에 해당하는 <티켓다방의 죽음>같은 작품은 사건을 이끌고나가는 힘이나 구성, 거듭되는 반전, 인간 심리의 묘사 등은 탁월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즐거운 마음으로 두 권의 소설(집)을 읽었고, 내친 김에 작년에 못다 읽고 덮은 정신자살도 완독했다.
도진기는 고작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물경 5권의 장편소설을 쓰고 출간했다. 이 정도면 우리나라의 여느 작가에 비겨도 다작에 해당하는데, 판사라는 결코 한가할 수 없는 직업을 가지고서 이런 성과를 냈으니 경탄을 한다고 해도 지나친 찬사는 아닐 것이다. 이런 속도라면 도진기는 내년쯤에 또 두어 권(이런 신바람이라면 세 권까지도 가능할 듯하다)의 소설을 시크한 표정을 지으면서 내놓을지도 모르겠다.
지난 호에서도 말했지만, 도진기는 정통추리소설을 지향한다. 이 말은 사건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잡사들을 끼워 넣어 곁다리로 분량을 늘릴 건더기가 별로 없다는 뜻이다. 오로지 사건 자체와 범인을 확정하지 못하게 만드는 트릭, 또 그 트릭을 무너뜨려 범인을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만드는 놀라운 추리로만 이야기를 전개해야 한다. 그러니 작가로서도 피나는 고민과 구성의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 추리소설은 작가 자신의 싸움이자 동시에 독자와의 싸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독자가 도저히 상상도 못할 아이디어를 만들어내야 하고, 독자는 그런 완강한 작가의 방어벽을 부수고 들어가려고 한다. 그런 지적인 대결 때문에 추리소설은 훨씬 더 흥미로워지는 것이다.
우선 도진기의 소설은 이런 장벽 치기 싸움에서 번번이 승리를 거두었다. 첫 작품부터 단편들에 이르기까지 도진기는 독자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못할 트릭과 반전을 떡 주무르듯 구사하고 있다. 작가가 만든 트릭에 끈질기게 도전하던 독자는 결말에 이르러 작가가 내놓은 진상을 보고 경악할 수밖에 없다. 최소한의 암시나 복선도 없이 폭로하는 범인의 기이한 행적이나 심리는 때로는 독자를 얼떨떨하게 만든다.
이렇게 말하면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아, 도진기의 소설이 반드시 좋다는 말은 아니구나.” 하고 짐작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옳으면서도 오해다. 올해 나온 두 권의 소설은 확실히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음을 작품 자체가 보여주기 때문이다. 심하게 말하면서 작가의 환골탈태(換骨奪胎)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다.
나를 아는 남자와 순서의 문제는 우선 문체에서 진일보했다. 앞서의 세 작품은 비문에 가까운 표현도 보였고, 번역투거나 작가가 억지로 지어 만든 문장이 눈에 많이 거슬렸다. 비유라는 것도 거칠기 짝이 없어 안하느니만 못한 경우가 상당수였다.
그런데 이번 두 작품에서는 이런 껄끄러운 부분이 많이 줄었다. 아니 찾아보기 힘들다고 해도 될 만큼 표현이 생동감 넘치고 문장은 유려하다. 인물의 성격이나 상황에 맞는 지문이나 대사가 맛깔스럽게 구사되어 있다.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모래를 씹는 듯한 문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작가가 일 년 만에 이런 괄목상대할 변화를 가져오다니 놀랍기만 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두 책을 읽으면서 출판사든 누구든 작품을 윤문해 준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했다.(출판사가 들녘에서 시공사로 바뀐 것도 그런 의심을 들게 하는 데 한몫했다.) 그러니 문장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작품 속의 사건들이 훨씬 개연성 있게 전개되고 있다. 물론 다음 장에서 지적하겠지만, 사람이란 버릇을 하루아침에 고칠 수는 없는 법이라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부분도 적지는 않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터무니없거나 작가만의 주장으로 빠지는 그런 사건은 보기 어려웠다. 이런 점은 특히 중단편에서 두드러진다.
새로운 장편과 7편이 실려 있는 중단편집에는 기존의 세 장편에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어둠의 변호사’ 고진은 뒷전으로 물러나고 젊고 스마트한 탐정 ‘김진구’가 등장해 작품의 분위기를 일신하고 있다. 또 성마른 형사 ‘이유현’ 대신 생기 넘치고 톡톡 튀는 언행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매력적인(나만 그럴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는 경망한 여자라고도 할 것이다.) 여성 ‘주해미’가 김진구의 여자 친구로 등장해 작품에 활력과 웃음을 제공한다. 그래서 ‘고진’류의 칙칙한 맛은 가시고 20대 초중반 젊은이의 눈으로 풀어가는 상큼한 사건 풀이가 읽는 맛을 돋궈준다. 또 일련의 사건들을 여자 친구인 주해미가 물고 옴으로써 마치 ‘셜록 홈즈(김진구)’와 ‘왓슨(주해미)’ 두 전설의 콤비가 시대와 성별을 바꿔 출현한 듯한 느낌을 준다.(작품 속에는 김진구가 주해미를 ‘왓슨양’이라고 부르는 대목도 있다.)
끝으로 트릭을 구사하는 능력이나 진폭이 아주 커졌다. 주해미가 물고 오는 사건들이 그녀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라 이야기의 진정성이 한층 강화되는 것은 당연하다. 사건들이 일상사의 범주에서 움직이니 트릭이나 수수께끼도 덩달아 현실성을 풍부하게 내포하기에 이르렀다. 이전의 장편들에서 보여주었던, 기이한 인물들의 기괴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파생되는 사건의 그로테스크함이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단편 하나를 쓸 때 필요한 트릭의 수자나 장편을 쓸 때 필요한 트릭의 수자는 같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니 7편의 단편을 쓰자면 최소한 7개의 새로운 트릭을 고안해야 한다. 하나를 제대로 만들기도 쉽지 않은데,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이전에 영미 소설과 일본의 추리소설에서나 접할 수 있었던 다양한 트릭들의 향연을 도진기는 단편들을 통해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도 이번 두 소설(집)의 미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런 미덕은 이렇게 도식화된 글을 통해서는 결코 맛볼 수 없다. 직접 작품을 읽음으로써 우리나라 추리문학계에 장래를 기대해도 좋을 또 한 사람의 작가가 나왔음을 확인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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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기는 짧은 기간 동안 다섯 권의 소설을 출간했지만, 필력筆歷으로 보면 여전히 신인이다.(작가의 나이가 몇인지는 모르겠다. 어디에도 안 나오니.) 신인은 패기와 새로운 상상력을 가지고 기존의 작가가 디디지 못했던 영역을 과감하게 도전한다. 한편 아직 충분히 무르익지 않은 기술적인 문제로 인해 미흡한 부분을 드러내기도 한다. 패기와 상상력이야 가만 둔다고 어디로 달아나지는 않을 터이니 혼자 발전시켜 나가면 되지만, 미흡한 부분은 그렇지 않다. 제 작품의 흠이란 방어적인 속성이 강해 스스로 발견해 고치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이를 변명삼아 이제부터는 도진기의 소설이 가진 약점이나 문제점에 대해 짚어나가려고 한다.
우선 세 번째 작품인 정신자살부터 다뤄보자.
앞에서도 잠깐 얘기했지만 이 작품은 독서에 상당한 인내력을 요구한다. ‘길영인’은 1년 전에 실종된 아내 때문에 괴로워하다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우연히 육체적인 자살 대신 자살 욕구를 가진 정신을 말살함으로써 사람을 죽음으로부터 구해낸다는 신기한 자살 방지책을 가진 정신과 의사 ‘이탁오’ 박사를 만난다. 3천 만 원이라는 거금의 치료비를 지급한 그는 1달 동안 최면 요법이 가미된 시술을 받게 되는데, 그 때부터 길영인을 둘러싸고 기이한 일들이 벌어진다.
한편 이탁오 박사와는 구원舊怨이 있었던 고진과 이유현 형사(그 사이 승진해서 이제는 팀장이다.)는 우연히 이탁오 박사의 ‘정신자살연구소’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 내막을 파헤치게 된다. 이런 일련의 사건이 결국 접점에서 만나 길연인과 이탁오, 고진, 이유현, 미모의 술집 마담 류경아, 실종된 아내 한다미와 그의 동생 한초록, 한다미와 불륜 관계에 있었던 의사 태정우와 태정우의 아내 천나영은 연쇄살인사건이라는 틀 안에 모여지게 되는 것이다.
소설이 긴 만큼 사건도 기묘하게 맞물리고, 하나의 살인사건에서 다음의 살인 사건이 파생되는 등 소설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진다. 표면적으로는 길영인이 누군가에 의해 태정우와 천나영, 나아가 아내인 한다미까지 살해한 피의자로 몰려 끝 모를 도피 행각에 빠지게 되는 과정이 중심 서사다. 당연히 추리소설의 특성상 길영인은 범인이 아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에게 살인 누명을 씌우고 있는 것인가?
추리소설에서 철칙이 있다면 범인은 등장인물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외계인이 납치해 죽였다거나 보도 듣도 못한 노숙자 또는 사이코패스 살인범의 소행으로 결말을 난다면, 이는 작가도 독자도 소설도 다 우롱하는 재앙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도 열심히 범인을 또는 합리적으로 이어질 만한 상황을 떠올리며 사건을 재구해 봤지만 도저히 결론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나는 작가가 장치해 놓은 놀라운 진상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 진상은 충격적이다 못해 나를 완전히 얼빠지게 만들었다.
혹시나 이 소설을 읽을 분들을 위해 그 진상이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겠다. 추리소설만큼 결과를 알고 읽으면 재미가 뚝 떨어지는 장르도 없기 때문이다.(그런 소설을 나는 두 번씩 읽었다. 읽으면서도 참 갑갑했다.) 그러나 그 진상은 외계인 범인설보다는 꽤나 합리적이었지만, 듣도 보도 못한 노숙자나 사이코패스가 범인인 것만도 못했다.
추리소설은 작가와 독자 사이의 지적인 싸움이란 말은 앞에서 했다. 그러나 칼자루를 쥐고 있는 쪽은 분명 작가다. 트릭이라는 칼끝을 재주껏 피해 작품의 진상을 알아내야 하는 독자는 항상 상처받기 마련이다. 작가는 정보를 제공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산발적이고 일관되지도 않으며 때로는 가짜 정보까지도 난사한다. 그런 불리한 전투를 벌이는데, 칼을 쓰다 선전포고도 없이 원자폭탄을 독자에게 날리면 살아남을 독자는 한 사람도 없다. 영문도 모른 채 재가 되어 사라져야 한다.
진상을 알게 되었을 때의 그 허망한 기억은 아직도 잊혀 지지 않는다. 차라리 내용을 다 알고 다시 읽을 때가 더 즐거웠다. 최소한 황당무계한 충격을 받지는 않을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는 여러 명의 여성들이 등장한다. 남편을 교묘하게 완전범죄로 살해한 여성인 신재인을 추가해 모두 5명이다. 그런데 이 중 두 사람이 신분과 외모, 심리 상태를 속이고 등장한다. A인 줄 알았던 사람이 알고 보니 성형수술을 감쪽같이 한 B란 인물이라면, 사건을 오리무중으로 빠뜨리고 의혹을 심화시키며 범인의 정체를 감추기에는 아주 쉬워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 작품에 그런 인물이 둘이나 되면 이건 독자로서는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말기 암 상태다. 속수무책으로 작가가 알려주기만 기다릴 뿐 추리든 합리적 의심이든 관여할 틈이 없어진다. 독자로서는 짐작도 못할 트릭을 만들어내는 착상은 나쁘다 할 수 없지만, 억지도 이 정도면 도를 많이 지나쳤다.
남편과 간통한 친구와 따지기 위해, 서울 사는 여자가 같이 차를 타고 경기도 외곽에 있는 으슥한 펜션까지 찾아오고, 또 하룻밤 지내면서 오붓하게 식사를 하기 위해 과일과 채소 등을 잔뜩 사가지고 올 수 있을까? 도로 한가운데서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싸울 정도는 넘어선 교양과 품격을 가진 사람들이라 그랬는지 모르지만 나 같은 천박한 프롤레타리아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정말 작가에게 물어보고 싶다.) 오로지 이런 설정을 한 까닭이 트릭으로 과일과 채소가 다량으로 필요하기 때문인 것은 다 알고면도 그렇다.
또 하나 같은 장면에서 범인은 우발적으로 천나영을 칼로 찔러 살해한다. 그런데 범인은 천나영을 흉내 내며 살아 있는 것처럼 꾸민다. 그렇다면 범인은 이미 피로 물든 천나영의 옷을 입고 그녀 행세를 했다는 것인데,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 같다. 밖에서 지켜보는 펜션 여종업원의 눈을 속이려면(아무리 밤이고 추운 날씨라도 청맹과니가 아닌데, 그리 쉽게 속나?) 의상이라도 같아야 할 텐데, 피 묻은 옷을 벗겨 자신이 입었다가 다시 천나영에게 입혔다는 소리밖에는 되지 않는다. 아무리 눈먼 장님 같은 경찰 과학수사대라고 해도 그런 흔적까지 알아보지 못할까?
그밖에도 작가가 현직 판사라 법률 지식이라면 누구보다 해박할 텐데, 말도 안 되는 외과 수술 끝에 범인이 다른 사람과 한 몸으로 합쳐졌다고 해서 범인을 처벌하지 못한다는 법 해석은 도대체 어떤 판례와 법률을 근거로 했는지 모르겠다.(이것이 가능하다면 책에 법조문과 판례 정도는 주로 달아주는 친절이 있었어도 좋을 뻔했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두 사람의 동의 없이는 분리 수술이 안 된다니, 이것이 궤변인지 이 나라의 상식인데 나만 모르는 건지 내 자신의 정체성을 흔들렸다.
그리고 이 소설은 과도하게 장식적인 글이 넘쳐흐른다. 장식에 매몰되다 보니 앞뒤가 맞지 않는 묘사도 빈번하게 나온다. 하나만 예를 들자.
책 233쪽에 보면 고진과 이유현이 이탁오 박사의 집으로 찾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주변 묘사는 이렇게 되어 있다.
“하늘이 보이지 않는 흐린 오후. 언덕의 그림자에 가려 일찍 어두워져 있었고, 경사가 급한 눈 덮인 지붕과 자줏빛 벽의 대조가 층층의 어스름 속에서 기괴한 느낌을 주었다.”
쉽게 말해 구름은 잔뜩 끼고 날은 저물어 사방이 어두컴컴하다는 소리다. 그런데 박사의 집에 들어가니 맞은편 벽난로에서 장작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데, “창으로 비쳐드는 역광 때문에 실루엣만 시야에 들어온다.”고 묘사한다. 앞선 묘사로 보면 창문 밖에서 들어올 빛은 거의 없다. 오히려 실내에서 타고 있는 장작 때문에 실루엣이 아니라 정면이 불빛을 받아 눈에 들어와야 한다. 그러나 작가는 주변 상황을 불필요하게 긴장감이 넘치도록 묘사하려다 보니 앞뒤가 안 맞는 묘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배치해버리는 것이다. 이런 억지스런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이러니 내가 처음에 백여 쪽을 읽다 덮어버린 것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범인으로 확정되는 인물의 성격도 종잡을 수 없다.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인 범인치고는 이후 보여주는 행동이 너무 대범하고 치밀하며 계획적이다. 뿐만 아니라 이 소설에 나오는 5명의 여성들은 전혀 각자의 개성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 여자가 그 여자 같다. 그들은 자신의 개성과 판단에 따라 행동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만들어놓은 상황 속에 맞혀 말하고 행동한다. 그러니 연령이나 신분에 따른 차별적인 언행이 나오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물론 이것은 남성 등장인물에서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작가는 등장인물의 성격 창조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모양이다.
다음으로 올해 나온 소설 가운데 먼저 나를 아는 남자를 보자.
이 소설은 정신자살보다는 확실히 현실에 많이 닿아 있다. 청년 탐정 김진구와 여자 친구 주해미가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주해미가 잘 아는 언니(문성희)가 제 남편이 불륜을 저지른다고 의심해 내쫓고, 이혼 때 유리한 증거로 삼기 위해 김진구를 고용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남편 ‘박민서’는 성실한 증권회사 과장인데, 더구나 그의 주선으로 김진구는 그 증권회사에 아르바이트 사원이 되었다.
고액의 수고비를 주겠다는 말에 혹해 일을 맡은 김진구는 별거하는 박민서의 집이 비어있다는 말을 듣고 불륜 증거를 찾기 밤에 몰래 잠입한다. 그런데 거기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칼에 찔려 죽은 박민서였다. 김진구는 박민서를 경찰에 의해 살해한 범인으로 낙인이 찍혀 곤욕을 치르고, 누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사에 들어간다.
이야기는 아주 흥미롭게 흘러간다. 누가 박민서를 살해했는지 궁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또 김진구는 어떻게 누명을 벗어날지 따져보는 일도 묘미가 있다. 문체에는 현장감이 살아 있고 사건의 성격이 현실적이라 작품의 몰입도도 아주 높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진상을 드러내는 방식과 살인을 만들어낼 때의 일방 통행식 설정이다.
살인이 벌어지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깨끗한 매너 남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박민서의 엄청나게 추악한 성 편력, 그 과정을 꼼꼼히 기록하다 못해 관계한 여성들을 성적으로 평가한 내용까지(그것도 가장 천박한 방식으로) 자세하게 적어놓은 노트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의 거의 마지막 장면까지도 나는(어쩌면 이 책을 읽은 모든 독자가 아닐까?) 그런 반전이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 당황스러움이란 정신자살의 반전에 못지않았다. 이런 기이한 상상을 할 수 있는 작가의 내면을 한 번 들여다보고 싶어질 정도였다. 더구나 그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재판을 통해 정의를 실현해야 하는 판사가 아닌가! 그런데 소설에서는 이렇게 비겁한 반칙을 자행하다니!
작가는 어느 지점에서 어느 지점까지 이동하는 시간이나 그 거리감에 대해 대단히 아전인수적인 판단을 제시를 한다. 작품에 보면 박민서는 서울 금호동 연립주택에서 살해당한다. 그리고 범인이 사는 곳은 인천 송현동이다. 살인이 벌어졌던 날은 금요일 밤 11시부터 새벽 1시 사이다. 이날 밤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범인은 다섯 번을 오가는데, 편도로 오거나 가는 시간을 40분으로 잡고 있다.
나는 과연 40분만에 금호동에서 송현동까지 갈 수 있냐가 의심스러웠다. 더구나 이 40분은 택시를 타고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만이 아니라 연립에서 나와 걸어서 도로로 오고 택시를 기다리다 잡는 시간까지 다 포함된 것이다. 다행히 네이버에는 길 찾기 기능이 있어 대입해 넣어봤더니 어떤 경우에도 40분까지 단축되지는 않았다. 새벽 세 시쯤 도로가 전혀 막히지 않고 신호에 한 번도 걸리지 않는다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의혹도 의혹이지만 우선 나 자신이 궁금해 한 번 금요일 밤 9시쯤 금호동에서 택시를 타고 송현동까지 가볼 생각도 했다. 그러나 네이버 길 찾기에서 요금이 4만 원 가까이 나온다는 안내를 보고 포기했다. 이 글을 써서 받는 원고료도 아주 크진 않은데, 그런 데까지 돈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그 오가는 시간이 40분이어야 할 이유가 있다. 만약 오가는 시간이 더 길어지면 살인이 일어날 수 없거나 다른 상황과 중복될 소지가 생긴다. 왜냐하면 살인이 벌어지는 그 날 밤 박민서의 집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품에서는 서울 중구에 있는 방산시장에서 회현동 언덕까지 도보로 오가는 것을 옆집에 놀러갔다 오는 것처럼 쉽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길 찾기 검색을 해보니 편도 1시간이 걸렸다. 작품 안에서는 퍽치기를 당한 50대 후반 남자가 머리에 상처를 안고 비틀거리면서 그 거리를 가서 피해자를 데리고 다시 현장인 방산시장으로 돌아와 살해한다는 것인데, 이런 일이 실제로 가능한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작가가 된다니까 그저 그럴 줄 알고 따를 수밖에 없는 일이다. 판사님의 판결에 어찌 이의를 제기하겠는가.
그리고 결말에 사건의 모든 진상을 밝히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이 주어진 증거나 단서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천재적인 탐정 김진구의 놀라운 두뇌 회전 결과 얻어진 것이라는 점도 몹시 아쉬웠다. 역시 독자가 개입할 여지가 너무 없다.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나를 아는 남자는 정신자살보다는 문체나 구성, 또 트릭의 설정 등에서 장족의 발전을 한 것이 완연하게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가의 다음 소설이 기대되는 것이다. 그래도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치는 깜짝 쇼는 그만 일어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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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중단편집 시간의 문제다.
두 콤비 김진구와 주해미가 함께 풀어나가는 일곱 개의 사건들은 상황 설정부터 사건의 내용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른 소재들을 담고 있다. 때문에 결코 지루할 수 없다. 남의 설명만 듣고 사건을 풀어가는 안락의자 탐정 스타일의 <대모산은 너무 멀다>란 단편도 있고, 자살로 판명 난 사건을 보험금을 받아내기 위해 생으로 타살로 둔갑시키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다룬 <티켓다방의 죽음>이란 중편도 있다. 소설집에서는 맨 끝에 나오지만 두 콤비가 처음 만나 인연을 이어가게 되는 사건을 다룬 <환기통>도 트릭을 찾아내는 긴장감이 짜릿하다. 시간의 알리바이를 조작해 경찰의 눈을 속이는 범인을 다룬 <순서의 문제>도 치밀한 구성이 돋보이다. 지구가 둥글다는 평범한 사실에 착안해서 심리의 맹점을 꿰뚫고 있는 <막간:마추피추의 꿈>도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음악을 빛깔로 인식하는 어린이의 특이한 상황을 바탕으로 사건을 해결한 <신 노랑방의 비밀>도 분명 재미있다. 시간의 알리바이를 활용해 법의 심판에서 벗어나려던 범죄자를 그린 <뮤즈의 계시>도 착상이 좋았다.
이렇게 한 편 한 편 소개한 것처럼 순서의 문제에 실린 중단편들은 우리나라 단편추리소설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고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신선하고 창의적이다.(다른 작가들의 단편들을 폄하할 의도는 없다. 한 작가에 의해 짧은 시일 안에 이런 수준의 추리단편이 한꺼번에 나오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더구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지역이 모두 대한민국 공간 안에 있다.(<막간:마추피추의 꿈>은 남미가 등장하긴 하지만) 범인의 정교한 알리바이 구축과 이를 깨나가는 탐정의 분투가 충돌하는 장면들도 흥미진진하다. 특히 우리나라 추리소설에서 작품이 모두 한 탐정에 의해 해결되는 연작소설적인 구성을 가진 예는 나로서는 처음 접한다. 이런 여러 점이 이 작품의 성취를 높이 평가하게 만드는 것이다.
칭찬은 이 정도로 하고 의구심이 드는 작품에 대해 짚어보자.
<순서의 문제>에서 가장 의문을 지울 수 없는 것은 경기도 양주 와부읍 근처 한강, 한겨울에 완전히 결빙된 얼음을 깨고 그 속에 시체를 넣으면 이 시체가 얼음 아래 강물을 따라 흘러 30시간 뒤면 강화도 해변에 떠오르느냐 하는 점이다. 시체가 소형 잠수함이라서 모터 장치가 되었다면 가능하겠지만, 그냥 밀어 넣는다고 해서 그대로 흘러갈 것 같지는 않다. 한강이 결빙되었다고 해도 얼음 아래쪽이 균질하게 결빙되었을까? 그리고 위치에 따라 유속의 차이가 있을 테고 강바닥과 얼음 사이의 거리도 일정하지 않을 텐데, 시체가 어디에 걸리지 않고 그것도 서해 바다로 훌쩍 나가지 않고 발견되기 쉬운 해변에 딱 안착할지 딱 부러지게 수긍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한강은 수영장처럼 쭉 뻗어있는 게 아니다. 휘어 흐르기도 하고 강폭이 넓어지거나 좁아지기도 한다.
이를 해결할 가장 쉬운 방법은 한강이 결빙되었을 때 구멍을 뚫고 시체를 한 번 넣어보면 된다. 그러나 이런 실험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 같지 않다. 또 한 번의 실험으로는 경우의 수가 너무 적다.(이건 돈이 드는 일은 아니니 올 겨울에 한강이 결빙되면 내가 직접 실험해보려고 한다. 가장 난감한 문제인 실험에 쓸 시체만 구한다면 말이다.) 결국 사건을 전개하기 위해 너무 편의적인 적용을 했다는 말이다. 시체가 얼음 밑을 흐르다 걸려 다음 해 봄에나 발견된다면 완전범죄는 완전히 물거품이 된다.
<티켓다방의 죽음>은 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 가운데 가장 완성도가 높다. 일반적인 추리소설은 사건이 벌어지거나 피살자가 생겼을 때 그 진실과 범인, 또는 범인의 트릭을 깨는 과정이 중심 서사가 되는 데 비해, 이 소설은 멀쩡한 자살자를 타살당한 피해자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미 발상 자체가 기발하다. 김진구가 타살 정황으로 만들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분투하면서 짜내는 정황들과 그 증거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방식들이 이 소설의 주된 흥밋거리다.
그러면서 자살 정황은 점차 타살로 와전되는데,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엉뚱한 사건들이 개입되면서 추리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경찰이 김진구의 현란한 말솜씨와 증거 조작에 현혹되어 멀쩡한 자살에 의혹의 불을 댕기는 모습은 진실보다는 이미지에 쉽게 유혹되는 현대인의 맹점을 은연중에 보여주고 있다.
결국 이 소설은 무엇이 진실이고 왜곡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처해 타살로 결말이 내려지는데, 그 결과 유족들은 보험회사로부터 거액의 보험금을 수령할 수 있게 된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도 이미 충분히 재미있는데, 작가는 한 번 더 반전을 꾀한다. 타살로 만들어줄 경우 지급하겠다던 성공 보수를 못 주겠다고 유족 측이 버티자 마지막 준비해둔 비장의 카드를 꺼내듦으로써 사건은 원점으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작은 욕심 때문에 유족은 결국 보험금 자체도 수령하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급할 때는 지푸라기라도 잡지만 목적을 이르면 손쉽게 배신하는 인간성의 왜곡된 측면을 이 작품은 실감나게 폭로하고 있다. 물욕에 눈이 멀어 빈손이 되고 마는 유족들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독자는 묘한 복수심과 통쾌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신 노랑 방의 비밀>도 상당히 재미있는 구성과 의혹을 제시하는데, 다만 너무 특수한 상황을 일반적인 정황으로 밀고나간 점은 쉽게 수긍되지는 않는다. 그 결말이 어처구니없는 정도는 아니지만, 결말을 위해 상황을 견강부회했다는 찜찜한 기분을 없애지는 못한다.
<뮤즈의 계시>에서 아쉬운 점이라면 이런 것이다. 여기서는 시간의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똑같이 생긴 대포차를 이용한다. 두 대의 차가 혹사함으로써 증인은 범인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상식으로는 대포차는 거래 조회가 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그래서 범죄에 대포차를 쓰는 게 아니겠는가?) 그런데 김진구는 거래 조회를 해보면 범인이 구입한 사실이 확인되리라고 했다. 내 상식이 잘못된 것인지 작가의 세심함이 부족한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판단할 길이 없는데, 이 글을 읽는 분도 판단해 보시기 바란다.
이 작품의 더 큰 의혹은 다른 데 있다. 범인은 창밖에 세워둔 차 트렁크에 피해자를 기절시켜 둔다. 그리고 적당한 때에 창문(격자형의 보안창이 설치되어 있다.)을 통해 대걸레 자루 끝에 칼을 묶고 트렁크를 연 뒤 트렁크에 누워있는 사람을 찔러 살해했다. 전혀 불가능한 방식은 아니라고 여겨지지만 너무 작위적이라는 느낌은 영 지워지지 않는다.
마지막 작품 <환기통>에도 기발한 트릭이 등장한다. 아파트형 공장 건물 1층에 입주한 보석공장을 털기 위해 범인은 환기통을 통해 현장에 접근하는 묘수를 짜낸다. 그러나 성공 직전에 관리인에게 발각되고, 범인은 환기통을 통해 빠져나가려 한다. 그런데 덩치가 “곰 같이 단단한 체구를 자랑하는”(393쪽) 관리인 김창회가 환기통으로 기어들어와 범인을 쫓는다. 달아나던 범인은 기발한 방법으로 관리인을 살해하는데, 문제는 경찰이 그 살해 수법을 증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절도 미수는 확인되지만 살인 혐의로 기소하기에는 불충분하다.
김진구는 이런 난관을 한 번 현장에 와보고 범인을 면회함으로써 간단히 뚫어버린다. 그런데 그 해결했다는 살해 방식이 나로서는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호리호리한 체격의 범인도 어렵게 통과한 환기통(작품에서는 그 크기는 가로 세로 약 60-70센티라고 알려준다.)이니 거구의 관리인이 가다 몸이 걸린 것은 이해가 된다. 그런데 범인은 들어왔던 환기통 입구로 나갔다가 범행 현장인 공장 사무실로 들어와 거꾸로 환기통에 들어가서 움직이지 못하는 관리인의 몸을 타고 올라가 드라이버로 목을 찔려 살해하고, 뒤로 몸을 빼 빠져 나간 것도 아니고, 죽은 피해자의 몸을 타고 넘어가 빠져나갔다고 주장한다. 범인의 몸이 아무리 홀쭉하다 한들 넙치가 아닌 다음에야 거구로 환기통에 몸이 끼어 움직이지도 못하는 관리인을 타넘고 갈 수 있을까? 그리고 피해자는 제대로 항거 한 번 하지도 못하고 피살당할까? 관리인은 한때 조폭으로 잭나이프의 귀재라 했고, 그 장면에서도 잭나이프를 뽑아들고 추적 중이었다.
물론 억지를 부리면 그럴 수도 있다. 정말 범인이 운이 좋다면 말이다. 그러나 완전범죄를 기획한 범인이 결과를 운에 맡기고 시도한다면, 이 소설이 온전한 추리소설이라 할 수 있을지는 심히 의심스럽다.
이렇게 몇 편의 단편 속에 나오는 의혹들을 알아보았는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지도 모른다. 글쓴이가 너무 꼬투리를 잡으려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작품 안에서 그게 된다고 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으며, 그 사실을 탐정이 알아내지 않았는가? 그런데 뭐가 문제인지 자신은 모르겠다. 이렇게 작가를 위해 항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신의 영역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사건에 대해 의혹이 없는 해명을 하는 것은 작가의 도리다. 도진기는 이 점에 대해 약간 직무유기를 했다는 인상이 나는 든다.
사건의 수사가 다 끝나고 탐정이 관련자들을 모아놓고, 진상을 설명하면서 범인을 지목하는 방식은 이미 여러 소설에서 익숙하게 본 바다.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도 그랬고, 아가사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이나 포와로 형사 또한 그렇게 한다. 그러나 이들은 확실한 증거와 함께 누구나 수긍할 사실을 들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의 김진구는 증거나 단서보다는 자신만이 가진 놀라운 직관의 힘으로 이 문제를 주로 해결한다. 사람의 눈은 속여도 하늘의 눈은 못 속인다 했으니, 기진구가 그런 탁월한 직관 능력을 신에게 부여받았다면 더 할 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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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추리소설의 현실은 참담할 정도로 열악하다. 추리소설 마니아라고 하는 사람도 외국 작품에는 열광하고 열심히 사서 읽지만 우리 소설에 대해서는 외면하면서 구입도 하지 않는다. 이래가지고서야 작가들이 좋은 작품을 쓸 기분이 들겠으며, 여력이 되겠는가. 다들 목구멍 풀칠하기에 바쁜데 소설 창작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이치다. 현직판사인 도진기는 이런 점에서 복을 받았다.(물론 스스로 노력해 얻은 것이니 복이란 말은 가당치 않지만) 공무에 바쁘면서도 이렇게 많은 작품을 짧은 시간 동안 쏟아내는 것도 안정된 수입원이 있기 때문도 약간은 작용했을 것이다.
외국 작가의 작품이 뛰어나고 수준이 높은 것은 나도 잘 안다. 그러나 우리의 작가들도 그를 따라가고자 많이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도진기와 같은 기대가 되는 작가들도 하나 둘 등장하는 것이다. 독자들이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고 격려한다면, 우리나라 스포츠 선수들이 해외에 나가 또는 국제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처럼 외국의 작가들과 어깨를 겨룰 날도 머지않아 찾아올 것이다.
도진기의 소설 얘기를 우리 계간 불교문예에 소개할 만하다는 사소하지만 중요하달 수도 있는 이유는 한 가지 더 있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느낀 것인데, 작가는 불교 신자이거나 불교에 대단한 관심 또는 호의를 가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어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작품 안에 녹아 있는 여러 조각들을 맞춰보면 아주 그른 짐작은 아닐 것이다.(혹시 아니라면 작가에게 미리 용서를 빌겠다.)
아울러 여담이지만, 개인적으로 섭섭한 일이 있다. 나를 아는 남자와 <티켓다방의 죽음>에는 악역이라 할 인물이 하나씩 나온다. 범인을 가리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물건을 훔쳐 협박해 금품을 뜯어내려다 살해당하는 ‘임재엽’과 자살을 타살로 둔갑시켜 주면 성공 보수로 보험금의 2할을 주겠다고 했다가 성공하자 쌩을 까버리고, 결국 김진구가 놓은 덫에 걸려 보험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마는 ‘임홍숙’이 그들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두 사람의 성씨가 모두 임씨다. 이 글을 쓰는 나도 임씨기 때문에 솔직히 읽으면서 썩 마음이 달갑지는 않았다. 작가가 임씨에 대해 무슨 억하심정이 있는 것은 분명 아닐 테고 우연의 소치겠다. 그러나 다음 작품에도 악역이 등장한다면 기왕이면 임씨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끝으로 도진기의 작품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살펴보다가 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아니 자주) 찾아가 볼 만한 블로그를 하나 발견했다. 이 블로그는 다양한 문학 작품에 대한 리뷰가 달려 있지만, 우리 작가들이 쓴 추리소설에 대한 리뷰가 특히 많다. 내 작품도 두 개나 올라가 있고,(영광스럽다) 도진기의 작품 평도 읽을 수 있다.(최근에 나온 두 작품은 실려 있지 않지만 내가 쓴 글보다 블로그에서 평한 글이 솔직히 더 나아 보인다.) 블로그 주소는 ‘서책권장書冊券藏 http://blog.naver.com/crinkim?Reedirect=Log&logNo=100039385637’이다. 처음에 한자 블로그 이름을 읽을 때 “서권을 낱권으로 잘 보관해두었다.”는 뜻으로 붙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만히 다시 읽으니 “서책 읽기를 권장한다.”는 뜻도 된다. 이것만 봐도 이 블로그의 주인장이 얼마나 위트와 유머가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이 글을 읽으셨다면 당장 한 번 들어가 보시기를 권한다. 장담하건대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머지않아 나올 도진기의 후속작을 기대하노라니 연일 계속되는 무더위와 열대야도 그리 괴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 임종욱/ 한문학자 ․ 소설가. 『동양 문학 비평 용어 사전』 장편소설 『이상은 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