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작품
구름의 가장자리 외 4편
전기철
허공에 봄이 걸려 있다. 가로수들을 데리고 길을 따라 걷는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어요 당신은 변장한 악마잖아요’ 몸에 맞지 않는 음악이 마음에서 흘러나온다. 감성을 펌프질해 본다. 몇몇 건물들도 들썩인다.
봄은 그렇게 떠내려가고 어느 새 구름은 빨간 우산을 쓰고 뛰어내리고, 세상에서 읽을거리를 찾지 못한 늙은 사내의 눈이 중얼중얼 한다. 얼른 집에 가서 넙치처럼 엎드려 지구를 껴안아야겠다.
하늘엔 어떤 이야기도 없는 구름이 지나가고 작달막한 사내는 손의 결혼식을 올리느라 여자의 손을 놓지 않는다. 중국인들이 ‘띵호아’ 점령하듯 돌아다녀 국경이 너덜너덜하다. 반도가 바짝 독이 오른 성기는 아닐까.
버거킹에서 햄버거를 주문한다. 알바 여자 아이가 엉덩이에 드레싱을 뿌린다. 커피 한 잔에 햄버거를 물어뜯는데, 언젠가 들었음직한 절간의 종소리가 물컹하다. 아뿔사, 마음이 너무 멀리 가 버린 것 같다.
서울 처용가
나는 백만 송이 밤 속을 걷는다.
출근할 곳은 없지만 퇴근해야 하는 밤
쫓기는 밤
꿈속인 듯 시커먼 사내가 따라온다.
멀어지다가 가까워지다가
처음엔 한 사람이었는데
두 사람, 세 사람, 일곱 사람, 일흔 일곱 사람,
그리고 다시 한 사람
백만의 도시 백만 송이 밤이다.
뒤따라오던 시커먼 사내가
앞서다가 어느 새 나란히 걷다가
머리 위로 날기도 한다.
숨었다가 나타나고 다시 숨고
커졌다가 작아지며
높은 빌딩에서 뛰어내리기도 하고
바닥을 기기도 한다.
나는 전쟁터의 겁먹은 병사처럼 허공에 공포를 쏜다.
하늘은 포연으로 가득하다.
한숨으로 연막을 치지만
다시 나타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 사람이었다가 일흔 일곱 사람이었다가
백만 송이 밤 속에서
사내는 나를 가장하고 집으로 갈 테지.
그리고
내 비밀을 고해바치고
아내의 베개를 뜨겁게 달구겠지.
일흔 일곱 사내가 아내를 안고 잘 테지.
내 마음이 아무리 아내의 가슴을 쿵쿵 쳐도
아내는 깨어나지 못할 테지.
아, 일흔 일곱 사내를 속이기 위해
나는 백만의 도시
백만 송이 밤 속을 떠돌며
제웅처럼 빼빼 말라간다.
문밖에서
문밖에서
일요일
창문 너머를 내다본다 일요일은 광활하다 광장 한가운데에서 바스락, 청소부가 일요일을 쓸어낸다
길 건너편 카페 <르몽드>에서 나온 사내가 일요일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저 멀리 개 한 마리가 일요일을 물어뜯는다 사내가 개를 쫓는다 일요일이 흔들린다
청색 하늘이 우수수 떨어진다 광활한 일요일 여기저기 서 있는 가로등이 창백하다 구름은 살이 쪄가고 나무들은 파랗게 촛불을 돋운다
저음으로 떨리는 파란 촛불의 현
금세라도 훌쩍일 것만 같은 일요일이 창가에 출렁인다
아침을 발라내는 나이프
아침이 발굴된다
날갯짓하는 어둠의 비명
방안이 부스스 머리를 풀고
잠자던 그림자들이 허리를 펴면
짐승 같은 잠이 꿈틀한다
자지러질 듯 우는
밤의 잔해들
적나라한 사물들의 풍경
리모컨, 휴대폰, 볼펜,
그리고
미쳐 소설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
바스락, 어둠이
사색의 금속성 소리를 내며
사물들에 부딪치고
향기 없는 생각들이 주렁주렁
잠에 매달린다
빛의 느린 시선에
금이 간 목소리들
난민처럼
술렁이는 굼뜬 그림자들
하루를 만들어내는
티브이 앞으로
시간의 검은 고양이
울음소리가 날카롭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역사를 빼앗긴 시대에 매달릴 정부도 직장도, 그리고 가정도 없다. 잃어버린 과거를 찾아 쏘다니다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에서 늙어가는 신문을 읽는다. 수북이 쌓인 시간을 읽는다. 주인을 잃은 상점이 앓는 소리를 낸다. 간판을 자주 바꿔 단 상점은 뇌성마비에 걸린 듯 헛소리를 멈추지 않는다. 병든 얼굴들이 미로에 갇혀 우왕좌왕 떠도는 골목, 섬뜩한 전체주의 도시의 풍경이 위태롭다. 국가가 무섭다. 직장도 무섭고 가정도 무섭다. 어리석음을 어깨에 메고 모자를 눌러쓴 채 기침으로 신문지에 구멍을 내고 허공에 긴 웃음을 발사하고 싶다. 나의 오래된 도시가 더 이상 망가지기 전에
<시 부문 수상소감>
내 생각이 나의 감옥이다
시는 운명이다. 시는 위안도 아니고 언어의 문제도 아니다. 목숨이다.
그 동안 시를 써 오면서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자신이 나의 감옥이라는 것이다. 내가 쓰는 말들, 내 주변 사람들, 그리고 내가 속해 있는 모든 것들이 나를 옥죄는 구속복과 같은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들, 내가 느끼는 것들을 쓴다면 그 시는 아마도 나의 감상이나 나의 대체물 정도일 것이다.
목숨처럼 시를 쓴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현란한 언어들이 시단을 휘젓고 다니는 시절에는 더더욱 그렇다. 우리 시는 지금 엔트로피 현상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점점 시가 일회용 소음으로 변해가고 있는 이때 나의 시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러한 고민 속에서 최근에 만난 게 ‘한 물건(一物)’이다. 육조 혜능의 “一切無一物이요 何處也塵埃”에서처럼 마음이 이미 공(空)한데 물건이 있고 없고가 어디 있겠는가. 여기에서 나조차도 없는 하심(下心)이 모든 창작의 원동력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하심을 통해 차별이 없는 평등심(平等心)을 깨달으면서 시, 아니 운명의 동력을 갖게 됐다.
시는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목숨이다. 이번 상도 이런 나의 삶의 문제에 실낱이라도 눈을 뜨게 하려는 방편이 아닐까 생각한다.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리며 목숨으로서의 시에 정진하라는 뜻으로 새기겠다.
전기철 | 1988년 <심상> 등단/ 시집 <누이의 방> 외 4권
<시 부문 심사평>
위독한 풍경과 높은 회복 의지
문태준
제20회 현대불교문학상 시 부문 수상자로 전기철 시인을 선정했다. 전기철 시인은 1988년 《심상》으로 등단한 이후 시집 『나비의 침묵』, 『풍경의 위독』, 『아인슈타인의 달팽이』, 『로깡땡의 일기』, 『누이의 방』 등을 펴냈다.
전기철 시인은 그동안 자본 사회의 패악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시들을 발표해 주목을 받아왔다. 거짓과 위선, 물질과 성적 욕망으로 가득한 인간 군상들의 분열된 영혼을 노래함은 물론 자본 사회의 위태한 형세를 꾸준히 지적해왔다. 그러면서 전기철 시인의 시적 모험은 예측불허의 어법과 해체적 사유를 동반하여 실천되어왔다.
제20회 현대불교문학상 시 부문 수상작인 「구름의 가장자리」 외 4편의 작품들도 기존에 시인이 실현하려한 시적 방향과 열정이 훌륭하게 승계되고 있다. 이 시편들은 삶의 불모성과 무잡해진 정신을 고요하고 맑게 회복하려는 의지를 한껏 드러내 높은 성취를 얻고 있다. 그의 시는 우리 시대의 속화된 골목을 배회하며 병들어 위독한 얼굴들을 만난다. 그의 시가 만난 도시의 풍경은 꾸며서 가장된 것이면서, 이리저리 떠도는 것이면서, 절멸할 위기에 놓여있는 것들이다. 그러한 헛것들과의 끔찍한 조우를 수술대 위에 옮겨놓음으로써 우리들 삶의 조건을 건강한 상태로 되돌려놓으려는 것이 그의 시의 처음이며 끝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시간과 공간을 싸늘하게 구분하는 기존의 관행을 무너뜨려 시간을 공간적으로 이해하려는 시인의 사유는 매우 독특한 것으로 앞으로도 각별한 관심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전기철 시인의 현대불교문학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더 큰 성취로 한국 시단의 영역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하기를 고대한다.
심사위원: 이승훈(시인), 문태준(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