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 이후 한 번도 마음 놓고 쉰 적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후일 임금이 되어 규장각을 세웠을 때, 정조는 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정조실록 13권 6년 5월 29일 실록의 기록은 정조의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게 해 준다.
“옷을 벗지도 못한 채 잠자리에 들었던 것이 몇 달이나 되었는지 알 수가 없으며 이제 생각하니 불안하고 고독했던 나날들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내가 세자로 있을 때 온갖 어려운 일을 겪었다. 처음 정치를 시작했을 때, 친척인 척리이면서 바르지 못한 자들을 숙청하여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는 것이 내가 가장 고심했던 일이었다. 이제는 척리와 내관을 뜻하는 두 글자만 봐도 신물이 난다.”
그래서 그는 어릴 적부터 자신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활을 쏘기 시작했다. 국궁은 인내심과 집중력, 민첩성과 결단성을 키우는 데 더할 나위 없는 무술이자 스포츠였다. 끊임없는 연습으로 최고의 궁수가 된 정조는 등극 후 문무백관을 불러 자주 활쏘기 시합을 벌였다.
정조는 50발을 쏘면서 49발을 명중시키고 화살 한 대는 일부러 하늘로 날려보내는 여유와 배려를 보였다. 무관들조차 정조의 실력을 넘을 수 없었으니 그야말로 힘으로 문무백관을 압도한 그였다. 이런 실력을 바탕으로 정조는 등극하자마자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 영조가 그토록 함구령을 내렸던 사도세자 이야기를 끄집어 낸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등극 일성으로 내뱉은 이 충격적인 웅변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가며 정조의 암살을 획책했던 무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당연히 철저한 응징이 진행되어 가담자들의 처벌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정조는 이후부터 탕평책으로 인재를 골고루 뽑아 쓰고 세종의 집현전처럼 규장각을 통해 나라를 이끌고 갈 ‘싱크탱크’들을 키워냈다.
이것은 불안한 왕권을 지키기 위한 인적 파워를 양성하기 위한 노림수이기도 했다. 또 북학파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을 등용해 그들의 실학사상을 수용하고 영조 때부터 자신에게 충성해 온 채제공을 정점으로 삼아 정약용 이익 유성원 등을 활용한 개혁작업에 착수했다.
강력한 친위부대로 정적 제압
정조는 영조 시절부터 계속돼 온 자신의 암살 모의를 이겨내기 위해 강력한 친위부대를 확대 편성했다.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수년에 걸쳐 확대 개편한 결과 기병과 보병의 규모가 모두 5천 1백 52명이나 되었다. 당연히 구 세력들의 입김과 견제가 약화되고 왕권은 크게 강화되었다.
그는 재위 18년 되던 1794년부터 2년 10개월에 걸쳐 채제공과 정약용 및 민과 군의 힘을 빌어 화성 건설을 완성하였다. 정조의 뛰어난 점은 도시계획의 우선 순위로 재정적 자립이 가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는 기득권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서울을 정점으로 한 기득권 세력의 경제권을 약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수원은 서울에서 벗어나 경제적 자립을 시도할 수 있으니 그런 면에서 기가 막힌 대안이 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정조는 수시로 화성을 방문, 공사를 감독하는 한편 화산으로 옮긴 아버지의 묘를 찾아 자주 원행을 나갔는데 재위 24년간 66회나 원행을 감행, 정적들에게는 덤빌 테면 덤벼보라는 정치적 시위를 보이고 백성들에게는 군주에 대한 존경과 조선 르네상스의 부활을 알렸다.
이는 또 백성들과 소통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조선조에 선비들을 제외하고는 임금에게 백성들 자신의 의견을 올릴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임금 앞에 직접 나와 호소하는 상언이라는 제도와 행차 중에 징을 울리고 나오면 볼기를 몇 대 맞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격쟁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정조는 이를 적극 활용해 무려 재임 중 3,355건의 상언과 격쟁을 해결했다. 이 격무로 인해 정조 스스로 수명을 재촉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는 백성들과의 소통을 중시했다. 이 원행으로 정조는 일거다득의 노림수를 기획했다.
친왕체제의 점검과 국도의 보수, 다리 건설, 군사 훈련, 방위체제 점검, 지방관아의 점검, 지방 인재의 발굴과 지원, 서울과 지방의 격차 해소, 정적들의 견제 등을 가져올 수 있었으며 나아가 백성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해 정치의 안정을 꾀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다양한 결실을 거두었던 것이다.
특히 1795년 윤 2월9일 을묘원행은 어머니 혜경궁 홍 씨의 회갑을 기념을 핑계로 과거를 수원에서 치러 지방 인재를 발굴하는 한편 장용영의 훈련된 병사들과 대규모 병력이동으로 군주의 강한 힘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이 행차는 무려 1km에 달했는데, 채제공을 비롯한 대소신료와 호위병까지 무려 1779명, 말은 779필이 동원됐고 현지에 미리 간 관료와 무사들을 합하면 6천 명이 행차에 참여했다. 지금 현재 청계천 둑방벽에 그려진 것이 이 행차의 그림인 반차도이다.
군주이면서 전술전문가로 자리매김
정조의 리더십은 이처럼 스스로 힘을 키워 갖춘 위기돌파 능력으로 성공을 거두게 됐다. 그는 한마디로 문신으로서도 무인으로서도 뛰어난 전략가였다. 24기를 기본으로 하는 훈련무예도통지를 만들어 이를 교본으로 장교와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한편 궁내에서 대신들과 장교들을 모아놓고 활쏘기 연습을 계속했다. 현장을 직접 나가보다 보니 그는 느끼고 깨닫는 것도 많았다. 정조는 이런 경험을 국방전략에 흡수하여 보병과 기병 포병 등 세 병과의 전법을 정리한 ‘병학통’, 군사의 조련을 요약한 ‘병약지남, 진법과 전차의 운용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악기도설‘ 등을 간행하여 전략전문가로서의 업적도 높이 쌓았다. 정조는 이처럼 힘을 바탕으로 한 개혁을 통해 정치적 규합과 조선의 부흥을 꿈꾸었으나 갑자기 서거하여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조선의 불행이자 백성의 불운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