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위형님께서 대종회관의 현판을 썼고,
영일정씨대종회부회장 및 고문직의 소임을 맡아 하였다.
영천시 자양면 중귀미에 있는 모재공과 자언공의 재소(齋所)인 성산재와 추모당
매년 11월 첫째 주 일요일에 성자산의 모재공에 이어
자언공의 묘사를 지내고 있다.
마당지산의 김씨할매 산소의 묘사를 지내고 있다.
공의 휘는 일필(一鉍 22世)이고, 자(字)는 지언(持彦)이며, 호(號)는 자언(紫彦)이다.
1.가계(家系) : 시조공의 21세손이시며, 호수공 휘 세아(世雅 16世)의 6세손이고, 호군공 휘 수
번(守藩 17世), 삼휴공 휘호신(好信18世)의 현손이고 사과공 휘 시우(時羽 19世)은 증조부이고 통덕랑공 휘 석승(碩升 20世)는 조부이며, 아버지 휘는 중교(重喬 21世) 호는 모재(慕齋)이고, 어머니는 밀양 손씨(密陽孫氏) 한봉(漢鳳)의 따님인데 부덕(婦德)이 있었다.
2.생몰(生沒) : 공은 영조(英祖) 정미(1727) 3월 13일에 인구마을 집에서 태어났다. 순조(純祖) 병인(1806) 10월 27일 숙환으로 정침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80세이었다. 그해 11월에 중귀미 성자산 아버지 모재공묘 아래 정좌(丁坐)에 장사 지냈다.
3.면학(勉學) : 공은 자질이 특이하여 5.6세 때 이미 천자문(千字文)을 알았고, 8세 때 종숙인 인재공(忍齋公)에게 글을 배웠는데 가르치고 훈독 하는데 번거롭게 하지 않아도 스스로가 문장을 잘 깨닫고 사서(四書) 등의 깊은 뜻을 체득하고 대체의 뜻을 능히 통달했고, 형제가 없고 아버지께서 늙으셨기 때문에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독서에 더욱 뜻을 두어 동생(董生)註1)의 행실을 읽는 데 까지 이르렀고, 주경야독(晝耕夜讀)하였다.
o註1) 동생(董生) : 동중서를 부르던 존칭 동생(董生)이나 이름을 따서 ‘동생유(董生帷)’, ‘중서유(仲舒帷)’
같은 표현이 나왔다. 단단히 결심하고 공부에 열중하는 자세를 가리키는 성어로 널리 인용되었다.
4.효성(孝誠) : 웃어른을 갖추어 봉양하는 말을 두 번 세 번 되풀이 하여 읽고 번연히 깨닫고 말하기를 이것이 가난한 집 아들의 일이라 하고 결의하기를 힘써 농사짓고 부모를 극진히 봉양하기로 하였으며 남은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동네어른들에 까지 미치게 하였으니 이것이 대개 증자(曾子)의 웃어른을 봉양하는 뜻을 본받은 것이다.
그 후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는 매양 음식을 먹을 때에는 눈물을 지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옛날 어버이를 봉양 할 적에 뜻과 같이 받들어 봉양하지 못했는데 어찌 나의 몸을 위해서 음식을 먹겠는가” 하고는 일평생토록 좋은 음식 먹기를 꺼려하고 다만 소박한 음식만 먹을 뿐이였다고 한다.
5.성품(性品)과 자녀교육: 어지시고 종족이 빈곤하면 재물로써 구원하셨으니 향리(鄕里)에서 칭송함이 자자하였다 한다.
술을 즐기지 않으시고 항상 자질(子姪)에게 경계해서 말씀하시기를 옛날 하(夏)나라 우(禹)임금은 술 때문에 나라가 망 할 수 있다고 경계 하였다 하니 배우는 자는 더욱 마음속에 새겨야 되지 않겠나 하셨다 한다.
6.교우(交友) : 향당(鄕黨)에 어진 선배를 대우함에는 예(禮)로써 대접하고, 신의로 교우하였다.
7.배(配) : 배(配)는 영양최씨(永陽崔氏) 여림(汝臨)의 따님인데 부덕(婦德)을 어김이 없었고 안살림을 잘 다스렸다 계비(繼妃)는 경주김씨(慶州金氏) 주천(柱天)의 따님인 데 단정하고 정숙하며 옛 여성의 풍토가 있었다.
8.자손(子孫) : 4남 2녀를 두니 아들 하문 (夏汶)과 하신(夏澵)과 딸 장일민(蔣逸民), 남래환(南來煥)은 최씨에서 났고, 아들 하주(夏澍)와 하로(夏潞)는 김씨에서 났다.
o 하문(夏汶)의 아들 범휴(範休)이고 딸은 최윤해(崔潤海) 이한경(李漢慶)에게 시집갔다.
o 하신(夏澵)의 아들은 헌휴(憲休) 가휴(家休) 보휴(寶休)이고 딸은 남대건(南大楗) 신우성
(辛宇成)에게 시집갔다.
o 하주(夏澍)의 아들은 성휴(性休), 진휴(進休), 채휴(採休), 정휴(禎休)이며,
o 하로(夏潞)의 아들은 후휴(煦休) 서휴(書休)이고 딸은 서원 일(徐元一) 권찬운(權贊運)에
게 시집갔다.
o특히 하신 일 : 남성재지에 기록된 묘단재중건기(墓壇齋重建記) -
11세손 일찬(一鑽) 근기(謹記) 에 의하면
1.남성재(南城齋)의 소임을 맡아 여러 가지 일을 하였다.
1) 기축1769년 - 현령(縣令)에게 간청하여 수리안전답(水利安全畓) 5 두락(斗落)을
추가로 납입하고 영원불환(永遠不換)의 계약을 맺었다.
2) 갑진1784년-1785년에 걸쳐 허물어진 남성재(南城齋)를 19간으로 확장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또한 비각을 세웠다.
3). 1761년- 1787년 사이 13회나 묘사에 참사하였고, 1778년부터는 10년간 개근(皆勤)을
하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2.문중의 중요 송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 호수공종택고문적에 의하면
1) 을미1775년 5월- 영천군지의 정찬판공 주각상(註脚上) 본역의장 (本域義將) 4자를
삽입한 사실을 고소하는 글에 연기명(連記名) 하였다
2) 신축1781년 5월 10일- 권(權), 손(孫), 정(鄭)이 세덕사(世德詞) 무고(誣告) 사실을
변명하는 글에 연기명(連記名) 하였다.
3) 임인1782년 5월- 세덕사 피무(被誣) 사실을 변명하는 글에 연기명 하였다.
4) 을사1785년, 병오1786년 10월 - 원당의 외선조 묘소 인유장(人兪葬) 사건 소송에
연기명 하였다.
5) 갑인1794년, 정사1797년- 2회에 걸쳐 영일읍을 다시 시조 묘하 (墓下)로 옮기지 말라는
진정서에 연기명 하였다.
<참고문헌>
o자언처사정공묘갈명(紫彦處士鄭公墓碣銘) 7세손태식근찬(七世孫泰植敬撰)
o남성재지 o호수공종택고문적
<자료정리>
o8세손 병극(8世孫 炳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