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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백제 양식 빼닮은 四天王寺 (시텐노지)
마지막 날 첫 코스를 아스카시대의 사찰 시텐노지부터 가보기로 했다.
지금의 오사카 시내 중심지인 그 옛날 구다라스(百濟州) 한복판에 우뚝 선 가람이 시텐노지(四天王寺)라는 절이다. 시텐노지가 있는 이 고장은 예부터 오랜 세월 행정 지명이 줄곧 구다라군(百濟郡)이었다. 그 후 1685년에 히가시나리군(東成郡)으로 바뀌었으며, 1889년 덴노지촌(天王寺村)으로 다시 바뀌었다. 현재 이 가람은 행정 지명 오사카시 덴노지구(天王寺區元町)에 속한다. 이 지역의 시텐노지는 오사카의 지하철 다니마치선(谷町線)을 타면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시텐노지의 드높은 오중탑은 특히 장관이다. 이 절은 백제시대 3번째 왕도였던 부여 땅 군수리 절터와 건축 양식이 똑같다. 즉 군수리 절터처럼 사찰의 중문과 오중탑 및 금당을 남북 일직선으로 하여 사방은 회랑을 네모로 빙 두르고 있다. 이 시텐노지는 쇼토쿠태자(574∼622)가 발원하여 593년에 백제 건축가 유씨(柳氏)에 의해서 웅장하게 일어섰다. 명공 유씨에게는 쇼토쿠태자의 생부인 요메이왕(585∼587 재위)이 생존 당시 곤고(金剛·금강)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 때문에 유씨 가문은 뒷날 오사카의 건축 전문회사인 ‘곤고구미(金剛組)’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 사세가 기울어 올해 초에 회사문을 닫았다고 전한다.
시텐노지는 불교의 수호신 지국천을 비롯한 사천왕으로 부르는 4신을 받들기 위해 쇼토쿠태자가 세웠다. 12세의 독실한 불자였던 홍안 소년 마구간왕자(뒷날의 쇼토쿠태자). 이 소년은 불교에 목숨을 걸겠다고 하리만큼 열정적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587년 7월 조정의 불교 반대파를 무찌르는 전쟁터에 몸소 참전했다.
왕실의 조신인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출생년 미상∼587) 대련(大連·그 당시 소가노 우마코 대신 다음의 벼슬)이 이끄는 이들 배불파는 급기야 왕실 전복을 모의하고 군사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른바 국신파(國神派)로서 고대부터 하늘 신을 받드는 신도 수호 세력이었다. 즉 구다라(百濟)로 부터 왜국 왕실로 불교가 들어와 날로 번창하자 모노노베노 모리야 등 일당은 그들의 지지 세력이 계속하여 약화하자 호시탐탐 불교 박멸을 획책하기에 이르렀다.
그 때문에 모노노베노 모리야 일당은 불교전쟁이 일어나기 2년 전인 585년 3월30일,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대신이 자기 저택 동쪽에 손수 세운 불전을 기습하여 함부로 불을 지르고 불탑도 쓰러뜨렸다. 그들은 백제에서 584년에 보내준 미륵 석불을 불타는 불당에서 끌어내어 저 멀리 구다라스의 호리에(掘江·지금의 오사카 시내 니시쿠의 작은 강) 강물에 던져버렸다. 말하자면 구다라(百濟) 불교가 정착하기까지 수난도 뒤따랐던 것이다.
모노노베노 모리야 일당 배불 모반 세력을 무찌르기 위한 장정 길에 나선 나이 어린 쇼토쿠태자는 참전 길에 숲을 지나가다가 붉나무(옻나무과)를 잘라서 ‘사천왕상’을 만들어 높이 받들면서 무릎 꿇고 사천왕에게 맹세하기를 “만약에 이번 전쟁에서 제가 적과 싸워 승리하게 해주신다면 반드시 사천왕님들을 받드는 절과 탑을 세우겠나이다”라고 다짐했다. 이때 총사령관인 소가노 우마코 대신도 “사천왕님들께서 우리를 승리로 이끌어 주신다면 절과 탑을 세우고 삼보(불, 법, 승)를 널리 위하겠습니다”라고 역시 굳게 맹세했다.
배불 세력들의 모반은 요메이왕이 587년 4월 초에 병상에 누워서 신음할 때 발생하고 있었다. 어린 쇼토쿠태자는 옷을 입은 채 병석의 부왕 앞에서 부처님에게 분향하면서 쾌유를 기원하는 등 효성스럽게 여러 밤을 꼬박 새웠다. 요메이왕은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짐은 삼보에 귀의하려고 하오. 경들은 의논하도록 하시오”라고 명했다. 군신들은 조정에 입궐해서 논의하게 되었다. 이때 조신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과 나카토미노 가쓰미(中臣勝海·생년 미상∼587)는 감히 요메이왕에게 불교를 반대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우리나라 국신에게 등을 돌리고 남의 나라 신인 부처를 믿나이까? 도대체 전부터 그 까닭을 모를 일이옵니다”라고 반항했다.
이때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보칙을 내리신 대로 따라서 도와드리도록 해야 합니다. 다른 계책은 용납하지 못하겠소”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때 백제에서 왜나라로 건너온 도요쿠니 법사(豊國法師)가 조정으로 안내되어 들어왔다. 쇼토쿠태자는 크게 기뻐하며 소가노 우마코 대신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더니 “삼보의 묘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이설(異說)을 허망되이 생각하면서 사견(私見)을 좇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제 머리를 제 손으로 두드리면서 “전하의 성덕을 입어서, 삼보는 크게 일어나 번창할 것입니다” 하니, 이 말을 들은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은 거칠게 흘겨보면서 대뜸 노발대발했다. 쇼토쿠태자는 좌우를 살피면서 의젓하게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은 인과(因果)의 이치를 몰라. 이제 지도자로서 망할 것이니, 오호 슬프도다”라고 말하며 탄식했다. 이때 군신들도 수군대며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 등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들 말했다.
일이 여기에 이르자 군신들은 요메이왕에게 거역하는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 일당을 제거할 것을 신중하게 논의하게 되었다. 이미 그 자리를 멀리 떠난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 일파는 반란을 꾀하기 위해서 벌써 군사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제 나라 안에서는 전쟁이 벌어질 급박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 시기에 아스카에 살던 백제인 사마달등(司馬達等·6∼7세기)의 아들인 불공(佛供) 사마다스나(司馬多須奈·6∼7세기)는 병상의 요메이왕이 쾌유하도록 부처님에게 기원하기 위해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 사마다스나는 아스카 땅에 새로운 사찰인 사카다지(坂田寺)를 세우며 장육불상(丈六佛像)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보람도 없이 요메이왕은 4월9일 붕어했다. 향년 41세로 알려지고 있다.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은 그의 본거지인 구다라스의 아도(阿都·현재 오사카부의 야오시·八尾市) 땅으로 몰려가서 계속 반란군의 군사를 크게 모았다. 나카토미노 가쓰미도 전처럼 모노노베 대련을 곁에서 열심히 도왔다. 그러나 “나카토미노 가쓰미는 음모를 꾀하고 다니다가 쇼토쿠태자의 사인(舍人·호위관) 도미노 이치히(迹見赤)에 의해서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의 집에 다녀오던 길에 화살에 사살되었다”. 도미노 이치히는 명궁이었다.
요메이왕이 승하한 지 두 달째 되던 6월7일,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조카딸 가시키야 공주(뒷날의 스이코여왕)에게 청원해서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을 등에 업고 왕위 찬탈을 획책하던 왕실의 모반자였던 아나호베노(穴穗部) 왕자를 주살했다. 이로써 훼불 난동을 부리던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의 큰 날개 하나는 완전히 꺾였다. 드디어 소가노 우마코 대신과 나라를 지키려는 왕자들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모노노베노 모리야의 반군 거점을 향해 진군하게 되었다. 이들 왕자 속에는 어린 쇼토쿠태자도 끼어 있었다.
대신(大臣) 소가노 우마코가 이끄는 토벌군들은 반란군 모노노베노 모리야 일당을 섬멸하기 위해 반란군의 터전 아도(阿都)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반란군의 반격이 워낙 거세어 3번이나 후퇴하는 고전을 치러야만 했다. 모노노베노 모리야 반란군은 짚단으로 드높게 성을 쌓고 완강히 버텼다. 그러나 모노노베노 모리야도 끝내 도미노 이치히(쇼토쿠태자의 사인)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마침내 반란군은 격파되었고 산지사방으로 도망친 자들은 저마다 성씨를 바꾸어 숨어 살게 되었다. 538년 백제 제26대 성왕이 왜나라로 전파한 불교는 이때부터 비로소 서서히 융성하게 되었다.
쇼토쿠태자가 사천왕을 위해 건설한 구다라스의 시텐노지 대가람. 이 사찰에서는 해마다 4월22일 창건자 쇼토쿠태자를 위령하는 ‘성령회 무악 개법요’를 거행한다. 불교춤과 음악인 무악 행사는 경내의 대형 돌로 만든 ‘무대강(舞臺講)’에서 거행된다. 무대강(舞臺講)이야 말로 612년에 백제로부터 왜 왕실로 건너온 백제의 음악 무용가인 미마지(未麻之·6∼7세기)에 의해 고구려 사자춤과 탈춤이 전수된 유서 깊은 역사의 터전이기도 하다. 고구려에 가서 사자춤과 음악을 배웠던 명인 미마지는 왜 왕실에서 스이코여왕과 쇼토쿠태자며 소가노 우마코 대신의 큰 환대를 받았다. 그뿐 아니고 왕실 터전 ‘사쿠리이’에서 백제인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다시 구다라스의 시텐노지로 초청되어 자리를 옮겨 가서 역시 이 가람에서도 제자들을 키우기 위한 무대강(舞臺講)이 사찰 경내에 훌륭하게 건설되었던 것이다.
안내지에 소개된 사천왕사에 대해 자세히 살펴본다.
사천왕사는 1,400여 년 전 성덕태자의 서원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일본 최초로 막부의 보호 하에 있던 사찰이다. 경내의 건축물은 창건 이래 몇차례의 화재를 입었으나 사람들의 돈독한 신앙에 힘입어 거듭 복원되었다. 그 중 가마쿠라시대의 산문(이시노토리이, 石ノ鳥居), 에도시대 초기에 재건된 육시당(六時堂)과 원삼대사당(元三大師堂)은 화재를 입지 않아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중심가람은 전쟁 후의 발굴조사에 기초하여 아스카시대의 창건 당시 양식 그대로 복원된 것이다.
연중행사 중에는 성덕태자의 기재일법요가 있다. 그 기재일에는 무악(일본전통음악)과 법요가 합쳐진 성령회를 비롯하여 춘분`추분피안회, 여름의 백중행사 등 천년 이상의 전통을 오늘날까지 계승하고 있으며, 성령회의 무악은 중요무형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보물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성덕태자가 사용했다고 전해지고 있는 병자초림검, 칠성검, 헤이안시대의 곱고 화려한 선면법화경책자 등의 국보는 각 시대의 신앙심에 바탕을 둔 불교예술의 진수들이다.
현재의 사천왕사는 성덕태자의 '화(和)'의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와슈(和宗)'으로 독립하여, 교육`사회복지 등, 여러 가지 사업을 발전시킴과 동시에, 춘분`추분피안회의 활기참이 상징하듯 서민신앙의 사찰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고향이자 안식처로 정착되었다.
서문(西門) : 닌쇼화상의 발원에 의해 세워진 산문(이시노토리이)은 사천왕사의 신앙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그 현판에는 '석가여래 전법륜처 당극락도 동문중심'이라고 적혀있어, 사천왕사가 석가여래께서 설법하신 성스러운 토지이며, 극락정토의 동문에 해당함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산문을 지나 가람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문이 있다. 이것은 서대문으로서, 극락문이라고도 칭한다. 이 주변 일대는 예로부터 정토신앙의 성지로서 사람들의 신앙심을 불러 일으킨 곳이다.
사천왕사의 중심가람은 사천왕사식 가람 배치로서, 중문`오중탑`금당`강당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일직선상에 위치하고, 그 주위를 회랑으로 둘러싼 형식으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가람 배치로 일컬어지고 있다. 몇 차례에 걸친 천재지변과 전쟁으로 인하여 소실되고 파괴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오사카공습에서 전부 소실되었지만 1963년에 복원되었다.
사천왕사의 금당에는 성덕태자의 본지불인 구세관세음상이 봉안되어있으며, 그 주위에는 사천왕을 모시고 있다. 그리고 벽화에는 나카무라가쿠료 화백이 불전도(부처님의 일대기)가 있다. 중문에는 인왕상, 강당에는 아미타여래상과 십일면관음상, 오중탑에는 석가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강당 벽면에는 고우쿠라센진 화백의 불교동점도, 오중탑에는 야마시다마키 화백의 사불정토도가 그려져 있다.
중심가람의 북쪽, 거북이연못 옆에는 육시당(六時堂)이 있다. 약사여래가 봉안된 이 육시당(六時堂)은 텐쿄우대사 사이쵸우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히에이산 대웅전을 모본으로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매년 4월22일에는 육시당(六時堂)과 그 앞의 석무대(舞臺講)를 중심으로 하여 성령회무악대법요가 거행되고 있다. 현재의 육시당(六時堂)과 석무대(舞臺講)는 둘 다 에도시대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서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사천왕사 안뜰 정원은 극락정토의 정원으로 중국의 승려 선도가 말한 '이하백도(二河白道)'를 바탕으로 조성된 것이다. '이하(二河)'는 인간이 가진 분노와 탐욕을 불과 물의 강으로 표현한 것이다. 불교를 믿고 이 강에 끼인 좁은 길 '백도(白道)'를 지나면 극락정토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정원에는 벚꽃, 철쭉, 연꽃, 수선화 등 사계절 꽃들이 피어 흐트러져 극락정토를 연상하게 한다. 그리고 화송암, 임지정 등의 다실도 있다.
시텐노지(四天王寺) 왓소(ワッソ)마쯔리
시텐노지 왓소마쯔리는 고대 동아시아 나라들의 국제교류를 영웅 위인들의 모습을 통해 우아하게 재현한 것이다. '왓소(ワッソ)'라는 말은 한국어의 '왔다'라는 의미로, 일본에서 마쯔리를 할 때 가마를 메고 '왓쇼이(ワッショイ)'라고 힘찬 구령소리를 내는데, 이것이 한국어의 '왔소'가 어원이라고 한다.
행사는 11월 3일 문화의 날(文化の日)에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수천명의 행렬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마쯔리는 신라 백제 고구려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각 시대의 인물로 분장한 수천명의 다니마치거리에서부터 시텐노지까지 행진하는 것이다. 행진은 성덕태자에게 불교를 전해 준 고구려의 고승 혜자를 선두로, 가야의 우륵, 일본에 문자를 전해 준 백제의 왕인박사, 삼국을 통일한 김춘추 등 각 시대의 위인들과 영웅들을 비롯하여 발해, 중국의 남북조를 통일한 수나라의 배세청, 조선시대의 세종대왕, 그리고 조선통신사의 인물들이 행진한다. 장대한 행렬은 성덕태자를 비롯한 일본을 대표하는 문부대신, 만요시인 카기노모토히토마로 등의 영접을 받으며 시텐노지에 도착하면 끝난다.
시텐노지 왓소마쯔리의 심볼은 길이가 12미터에 이르는 일본 최대의 배 수레이다. 이 배 수레는 고대 동아시아를 향해하는데 사용된 것을 재현한 것이다. 또한 사물놀이패가 등장하여 행렬의 화려함을 더해 주는 것은 물론, 우주만물의 리듬을 자유롭게 조절하여 듣는 사람들의 육체와 영혼을 고대의 세계로 인도한다.
조선통신사와 관련된 마쯔리로는 쓰시마섬의 아리랑 마쯔리가 있다. 8월 중순경에 열리는 이 마쯔리는 조선통신사가 쓰시마섬을 경유하여 일본 본토에 상륙하였던 것을 기념하여 당시 통신사의 행렬을 재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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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세계 삼대축제중 하나인 마쓰리축제의 기원을 일으킨 일본인의 저력에 감탄하고 우리도 좋은것은 본받는 풍토가 필요함을 느끼게 함과 한성 백제의 축제가 대신하는 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라에 역사와 일본에 문화를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