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兇手였구나
천후는 담담한 신색으로 세 사람을 맞이했다.
"어서 오시오."
면사여인과 곰방대의 노인,
그리고 노부인은 조용한 몸짓으로 목례를 한 후 천후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면사여인!
국화향기 비슷한 청향이 풍기는 그녀의 자태는 실로 신비하기만 했다.
천후는 그런 면사여인의 면사 속의 두 눈을 유심히 살피다 말고 입을 열었다.
"세 분이 오실 줄 알고 기다렸습니다."
그 말에는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었다.
면사여인의 희미한 두 눈은 쉬지않고 천후의 얼굴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이런 밤중에 공자님을 찾게되어 불편하지는 않는지 모르겠어요."
그녀의 음성은 일부러 변성한 듯 탁했다.
"하지만, 황보세가에서 아무 말도 없이 헤어져,
서로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비밀을 서로 교환할 시간이 없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뵈었습니다."
"잘하시었소. 참, 소생은 천후라 하오만?"
"소녀는 강호에서 비봉(秘鳳)이라고 부르더군요.
그리고 두 분은 남해이선(南海二仙)이라고 합니다."
오오…비봉이라면?
무림오봉 중의 그 비봉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비봉(秘鳳)이 나래를 펴는 날, 삼천(三天)은 나타나리라.
비봉!
신비 속에 가려졌던 그녀가 나타났다.
그럼, 이제는 삼천의 진실한 모습들이 나타날 때가 된 것일까?
그때 남해이선이 지극히 맑은 시선으로 자신들을 소개했다.
"노부는 남해어옹이라 하오."
"노신은 남해선자라 해요."
천후는 내심 대경을 금치 못했으나 겉으로는 태연했다.
'이백 년 전의 기인들이다!
성격들이 뜬구름 같아 세속 일엔 전혀 관심이 없던 이들이 나타남은,
그만큼 저 비봉이란 여인이 대단한 지위를 지녔음을 암시하는 것!'
천후는 공손하게 남해이선에게 예를 올렸다.
움직이지 않았을 때는 태산 같으나 정작 가벼운 몸짓 하나라도 했을 땐
이미 장강의 거센 파도와도 같다.
그것은 인간에게 지닌 기도(氣道)라 할 수 있는 것이니…
남해이선의 맑은 눈 저 깊은 곳에서는 미미한 경탄의 빛이 스쳐가고 있었다.
천후는 세 사람을 향해서 가볍게 웃어 보였다.
"자, 이제 세 분의 용건을 듣고 싶습니다."
면사여인도 면사 속의 보석같이 깨끗한 치아를 내보이며 가볍게 웃고 있었다.
"그러지요. 먼저 소녀에 관해 말씀드리지요.
소녀는 비봉도(秘鳳島)의 도주(島主)이자 제마회(制魔會)의 통사(通士) 자리를 맡고 있어요.
그리고 이 두 분은 제마회의 좌우호법이자 비봉도주의 임시호법이지요."
"비봉도주와 제마회는 모두 아주 오래 전부터
무림의 세 분 성자(聖子)들에 의해 안배되고 길러진 일종의 맹(盟)이에요."
"공자님은 무림삼성자(武林三聖子)라는 분들을 알고 계시나요?"
"알고 있소. 그분들은 바로 소림의 망아대사와 무당의 일학자,
그리고 개방의 귀개가 아니오?"
"맞아요. 그 중 귀개성자는 공자님도 알고 계시는 분이에요."
천후의 두 눈에 일시 기광이 스쳐갔다.
"그걸 소저가 알고 있다니 기이하오. 하나, 나는 그분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소만?"
면사여인 비봉은 다시 하얗게 미소지었다.
"그분은 공자님과 함께 항주오기로 불리우던 취몽노인이세요."
"취몽?"
천후의 두 눈에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취몽!
취몽이 바로 귀개라면, 천후의 스승인 추곡선생과 함께 있었던 그 취몽은 누구인가?
'이럴 수가…그럼… 나는 또 다른 추측을 해야 하지 않는가?'
천후의 신색이 기이하게 변하자 비봉이 물었다.
"공자님, 뭐 이상한 거라도 있나요?"
"아…아니오. 단지 좀 괴이한 생각이 들어서…"
"그걸 저에게 말씀해 주실 수는 없나요?
저도 사실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어쩌면 공자님이 지금 느끼시는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말씀드리겠소.
사실 소생은 항주의 추곡선생을 스승으로 모신 적이 있소.
한데, 얼마 전 황보세가에서…"
천후는 서서히 황보세가에서 겪은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밀실!
예의 그 신비인이 황보웅과 화화공자, 그리고 금령매공자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
"비봉도의 계집이 천후에게 찾아갔다는 말이냐?"
"예! 조금 전의 일이었습니다."
"음…"
신비인의 음성은 자신도 모르게 착잡해져 있었다.
황보웅, 화화공자 등의 얼굴은 자연 긴장으로 휩싸였다.
하나, 금령매공자는 희미한 시선으로 창밖만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때 신비인이 그런 금령매공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평아야, 너는 알 것이다. 그들이 왜 천후를 찾아 갔는지…"
금령매공자의 시선이 신비인의 등으로 옮겨졌다.
희미한 미소가 스쳐가는 입가는 몹시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그들은 회합(會合)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회합에서는 한가지 중대한 사실이 드러날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천존의 정체입니다."
순간, 신비인의 등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하나, 그의 음성은 전혀 동요가 없었다.
"그 이유는?"
"그건 간단합니다.
그들이 서로 입을 맞추다 보면
천존께서 너무나 자신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서로 깨닫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그들은 하나의 공통분수를 찾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까지도 모르고 있는 천존의 정체가 드러나게 되지요."
신비인은 그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은 여전히 신비하고 태산 같으나, 그때는 조금 가볍게 느껴졌다.
"너는 실로 무서운 아이다.
내 손으로 기르고 키운 자식 같은 너지만, 사실 본 존은 너를 두려워 한다."
순간, 금령매공자의 풍자적이던 두 눈에 처음으로 기광이 번뜩 스쳐갔다.
"고맙습니다. 천존께선 처음으로 저에게 진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천존이란 자의 몸이 미미하게 떨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런가? 본 존은 너희들에게서도 진실을 얻지 못했는가?"
자문(自問)과도 같은 독백이 스쳐간다.
화화공자와 황보웅의 두 눈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반면, 금령매공자의 두 눈은 이전과는 달리 날카롭게 번뜩이고 있었다.
천존이 입을 열었다.
"좋다. 나는 모든 계획을 앞당겼다
. 평아, 너는 지금 즉시 사중천의 사중고루혈마단(邪中血魔團)을 나에게 오라고 하라."
"예…"
"화화야, 너는 불사성의 정예 이백을 데리고 천후의 주위에 포진하라!"
"예!"
"환아야! 너는 황보운향과 남궁청운 등 그동안 감금해 놨던 그들을 즉시 사중천으로 후송하라!"
"예!"
천존은 각자에게 명령을 내린 후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그대로 있었다.
그런 다음, 서서히 일어나 사라지고 있었다.
비봉!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고 있었다.
"그… 그럼 추곡선생이 취몽노인과 사라지고 없었고…
서신에서는 불길하게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말인가요?"
그녀는 지금 필요 이상으로 격동하고 있었다.
천후는 그런 비봉의 전신을 예리한 시선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그렇소."
"아…그…그럼… 그분에게 무슨… 불상사가…"
"십중팔구…그랬을 가능성이 크오."
천후는 조금 냉정하다 싶을 정도로 쉽게 대답하고 있었다.
그때, 남해이선 중 남해어옹이 그런 천후가 못마땅한 듯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공자, 추곡은 그대의 스승이 아니었나! 한데, 그렇게 냉정하게 얘기할 수 있는가?"
남해어옹!
이백 년이 넘도록 살아온 일대기인인 그가 그렇게 말함은
그만큼 천후의 태도가 냉정했기 때문이리라.
한데, 천후의 태도는 더욱 이상해지기만 했다.
"그런지도 모릅니다.
하나, 그래도 나는 아직도 냉정을 잃지 않고 있는 저기 저 여인보다는 백 배 났소."
천후의 손가락 끝은 비봉의 얼굴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비봉의 가냘픈 몸이 부르르 떨렸다.
"고…공자님의…말씀은…?"
"소저, 아니 추사매! 그대는 아직도 나를 모른 척해야 옳으오?"
오오…이게 무슨 말인가?
추사매라면…?
천후가 사매라 부를 수 있는 여인은 추소연밖에 더 있겠는가?
순간, 비봉의 몸이 무너질 듯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
면사 속의 추수한 눈에는 수만 가지 복잡한 빛이 스쳐가고 있었다.
천후는 여전히 냉정했다.
"천하의 그 어떤 안배와 비밀이 있다 해도 혈육지정(血肉之情)에게는 미치지 못하는 법.
그대는 스스로 신비한 척하여 끝내 나로 하여금 스승님을 잃게 했소."
"고…공자님, 그것은…그것은…"
"닥쳐! 그대가 황보세가에서 아는 척만 했어도 나는 스승님을 안전하게 모실 수 있었어."
"으흐흑…"
비봉 추소연은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느새 그녀의 면사가 벗겨져, 아름답고 조용하며 우아한 그녀의 옥용이 드러나 있었다.
슬픈 빛을 담고 있는 얼굴이었다.
"들어봐! 내 비록 그대와 혈육지연은 없으나 자라올 때 형제자매처럼 자라왔다."
"흐흑흑…"
"한데, 그대는…신비한 비봉도주가 되어 나타난 후 어떻게 했는가?"
"그…그것은…천하장생을 위해…"
"천하 천하 하지 마라! 아무리 전대기인들의 안배에 의해 신분을 감춘다 해도
그것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야!"
"하지만…그때는 상황이 너무나 급박했어요."
"상황…"
"흐흑…사실 우리도 황보세가의 그곳이 수상하여 들어가서 지켜보고 있었어요
. 그런데 그때 사형이…나타나서…"
천후의 예리한 시선이 조금씩 풀려가는 듯했다.
추소연은 더 이상 말할 수 없는지 흐느끼기만 하고 있었다
그때, 남해이선 중 남해선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공자! 누구에게나 말 못할 사정은 조금씩 있는 법이오.
이제 그만 하시오. 지금은 그걸 가지고 다투고 있을 때가 아니오."
남해어옹도 끼어들었다.
"그렇소. 지금은 그 흉수가 누군지 빨리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오."
사실은 그들의 말이 맞았다.
천후의 안색은 서서히 풀어지고 있었고, 추소연의 흐느낌도 멈춰지고 있었다.
남해선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공자, 그대의 말을 들으니…
지금 전 무림을 어지럽히는 인물은 그대를 너무나 잘 알고 있고,
심지어 여기있는 도주까지도 훤히 알고 있는 자인 것 같은데… 어떻소?"
천후의 눈이 잠시 감겨졌다.
"그렇습니다. 그는 나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나는 철저하게 그에게 농락당한 기분이 듭니다."
남해어옹이 끼어들며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흉수는 매우 치밀하고 간교한 자요.
그는 지금 매우 막강한 힘을 지녔음에도 아직 정식으로 무림에 나서지 않고 있소.
그만큼 그는 침착하며 인내가 있는 자요."
"사실…소생도 그것이 궁금합니다.
지금 그의 세력은 엄청납니다.
불사성, 음양영생교, 황보세가 뿐입니까?
사루, 색혼전, 신선부 등등 이루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런 그가 왜 지금까지 마수를 드러내지 않는지…"
남해어옹은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공자, 그것은 그가 한가지 꺼리는 것이 있어서 그렇소."
"꺼리는 것이라뇨?"
"그것은 바로 우리 비봉도요!
아니, 비봉도를 안배한 무림삼성자들을 꺼리기 때문이오."
천후의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
"무림삼성자께서는 이미 백 오십 년 전,
천하십대기인의 실종사건 때부터 뭔가 심각한 움직임을 감지하여 비봉도를 세우고…
미래를 대비했소.
그래서 그분들 중 귀개성자는 강호에 나와 활동하여 인재와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소."
"하나, 흉수는 너무나 치밀한 자라서 쉽게 알아낼 수는 없었던 것이오."
"으음…
장내는 무겁게 변해갔다.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엔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때, 추소연이 조심스럽게 천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사형, 그자는 사형만이 찾을 수가 있어요. 사실은 그래서 오늘밤 사형을 찾은 거예요."
그녀의 말은 간곡했다.
천후는 말없이 그녀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자는 사형을 잘 알아요
. 그렇다면 사형도 그자를 잘 알 수 있어요.
이것은 몹시 중요한 일이에요.
소림선원에 계시는 망아스승님과 일학스승님께서도 그 사실을 굉장히 중요시 여겨요."
천후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소림선원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조금 전 그대가 말한 제마회는 무엇이며 그 회주는 누구지?"
그는 어느새 깊은 관심을 가지고 대화에 응하고 있었다.
추소연의 추수 같은 두 눈에 일순 기쁜 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행여 천후의 마음이 변할세라 급히 입을 열었다.
"소림선원이란…
소림사의 최고 기밀지로써,
그곳엔 전대 구대문파의 기인들이 좌선하고 계신 곳이에요.
그리고 그곳에서는 영웅탑을 관장하고 있어요."
"영웅탑? 그것을 소림선원에서 관장한다는 말인가?"
"그래요. 소림선원은 원래 소림사의 승려들이 참선하는 곳이었는데,
백 오십 년 전 천하십대기인들이 실종된 후
구대문파의 전대고수들이 모두 모여 있는 곳이 되었어요."
"한데…무림삼성자도 천하십대기인에 포함되지 않나?
그분들은 실종되지 않은 건가?"
"그분들은 당시 누구에겐가 속아 죽을 뻔했었어요.
서로서로 싸웠으니까요.
하나, 그것이 곧 오해로 판명 나자
그분들은 비로소 그 누군가가 천하를 노리고 음모를 펼쳤다는 것을 깨닫고."
"알겠군. 나도 그런 얘기를 누구에게 들은 적이 있다.
그럼 제마회의 회주는 그분들인가?"
"아니예요. 그분은 바로 사형이에요!"
"뭐라고 나?"
"그래요."
그것은 실로 뜻밖의 일이었다. 천후가 자신도 모르게 제마회의 회주가 되어 있다니…
천후의 의아해하는 모습에 추소연이 입을 가리고 일순 조그맣게 웃었다.
"그것은 나중에 자세히 알려드리겠어요. 지금은 우선 그 흉수의 정체부터 캐기로 해요."
천후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나, 역시 그답게 그것에 대해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흉수에 대해서는 내게 생각이 있다."
"그는 지금 이곳 군산에 있다. 그리고 조만간에 나를 찾아올 것이다."
"예엣? 그가 사형을…?"
"후후후! 이제야 모든 것을 알겠다.
그가 지금 무엇을 노리고 백년제일인지회에 참석하는지를…"
"그는 영웅탑을 노리고 있어.
그리고 그는 영웅탑을 소림선원에서 관장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대에게 할 일이 주어진 셈이야. 이건 제마회주의 이름으로 명한다.
그대는 이번 백년제일인지회의 우승자를 흉수가 만들어낸 앞잡이로 알고
그를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
제마회주의 명(命)이라면, 천후 스스로 그 자리를 인정하는 것이 된다.
더구나, 그 첫번째 명이 나왔다.
추소연과 남해이선은 일시 서로 마주본 후 급히 부복했다.
"우호법 남해어옹, 회주를 뵈옵니다."
"좌호법 남해선자, 회주를 뵙게되어 기쁘옵니다."
정중하고도 바른 예의였다.
천후는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곧 의젓하게 예를 받는다.
"잘 부탁하오. 그리고 나중에 자세한 내막을 묻겠소."
그러자, 추소연이 다시 묻는다.
"회주님, 조금 전 그 흉수가 찾아올지 모른다 하심은…?"
회주라는 말이 조금 어색했는지 천후가 씨익 웃었다.
하나, 곧 정색한 후 입을 열었다.
"그대는 고육지책이란 것을 알 것이다."
"……?"
"나는 얼마 전, 그자의 고육지책으로 많은 것을 잃었다.
나는 이번에는 그가 쓴 방법 그대로 그자의 가장 중요한 것을 알아낼 것이고,
거기에 전 무림의 안정과 내 가문의 혈겁을 보상받을 것이다."
"고…고육지책으로 말인가요?"
"그렇다. 그대는 그것만 알고 내가 지시한 것을 잘 이행하라.
그리고 혹시 나중에 제마회를 찾을 때는 어떻게 해야되지?"
"그건 개방을 찾아 소악이란 인물을 찾으면 됩니다."
"소악? 그는 혹시 귀여운 작은 친구가 아닌가?"
"맞아요. 그는 제마회의 무재(武才)로서 회주를 보필할 거예요."
"후후후! 재미있군. 그가 무재라…"
"그를 알고 계시나요?"
추소연의 두 눈에 알 수 없는 기이한 빛이 감돌았다.
그것은 여인만이 지니는 특유한 것이었다.
"알지…조금 알아…"
그때였다. 하나의 인영이 마치 유령처럼 실내의 천정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스스슥
"궁주! 한 명의 노인이 술에 취하여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순간, 천후의 두 눈이 무섭게 빛나며 급히 입을 열었다.
"막지 말라! 그리고 지옥마영대는 지금부터 내 신변을 그림자처럼 따르도록!
절대 누구에게도 발각되어서는 안된다!"
"옛!"
희끗한 몽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천후는 추소연과 남해이선에게 입을 열었다.
"그자인지는 확실히 모르나 드디어 마지막 승부가 시작되었다.
그대들은 즉시 가시오. 그리고 이후 나를 억지로 찾으려 하지 마시오.
또 한가지, 강호의 만통회를 세세히 조사해서 후일 보고 하시오."
천후의 급한 말에 추소연은 무엇인가 묻고자 입을 열었다.
"쉿! 어서 가시오. 그가 벌써 십 장이나 다가왔소!"
추소연과 남해이선은 할 수 없이 몸을 돌려 사라졌다.
스스슥
그들의 신형은 미풍처럼 가볍게 창문을 통해 사라졌다.
그때였다. 취기가 가득서린 늙수그레한 음성이 밖에서 들려왔다.
"어허라! 벗님네들, 내 술 한 잔 받으소!
세상의 무저영혼 하늘에 뜬 구름이요, 가인의 굳은 약속 아침의 이슬이니…"
그리고 지금 그가 읊조리고 있는 것은 한때 천후가 항주에게 즐겨 부르던 노래가 아니던가?
천후의 몸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두 눈은 파르르 경련하듯 떨고 있었다.
그때 다시 음성이 들려왔다.
"이봐! 작은 술귀신, 너는 나를 잊은 것은 아니겠지?"
천후에게 하는 말이리라!
그때, 천후의 두 눈에 반가움이 번뜩 스쳐가고 있었으니…
'만기(萬技)노인! 그래…천면후로 불리우던 만기노인이다.'
그와 동시, 그의 신형은 자신도 모르게 밖으로 쏘아져가고 있었다.
오오… 만기!
항주오기 중의 하나이자, 절세의 기인 천면후!
그가 아니던가?
* * *
만기(萬技)였다.
그는 틀림없이 만기였다.
천후!
그는 만기를 보는 순간 크게 웃으며 맨발로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만기노인! 오…틀림없다! 이럴 수가…이럴 수가!"
기쁨에 들뜬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철부지 어린아이였다.
만기, 아니 천면후!
그는 천후의 그런 모습에 크게 웃으며 술병을 요란하게 흔들었다.
"으하하핫! 이놈…천가(天家)야, 이 미친서생[狂書生] 놈아, 잘 있었느냐?"
만기는 술병을 홱 집어 던지며 천후를 얼싸안고 기쁨의 대소를 연발했다.
"하하핫! 만기노인!
내가 미친서생이면 당신은 사기꾼, 협잡꾼, 오입쟁이, 뭐 그런 것이 아니오?
그건 그렇고 어떻게 내가 이곳에 있는 줄을 아셨소?"
"크크크! 이놈아, 나는 네놈이 그 향기로운 계집, 화중화의 품에 안겨 있을 때도
네놈 옆에서 시중들던 사람이다.
네깐 놈 찾기는 식은 죽 먹기보다도 더 쉽다. 암!"
"하하하핫! 하긴…그럴 만도 하오.
아참, 내 정신이 없군. 자, 어서 들어갑시다.
내 방에도 술은 많소. 우리 밤새도록 마셔 봅시다."
"크크크! 이놈아, 밤새도록 술이나 마셔대면 내일 네놈은 어쩌겠다는 말이냐?
독서생(毒書生)으로 출전한 독회(毒會)는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야?"
"하하핫! 그걸 어찌 아셨소?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는데."
"크크크! 네놈의 천하제일 변용술인 무면환형요를 누가 전수했으며,
독술의 비법인 만독해용술을 또 누가 전수했느냐?
이놈, 너는 다 이 사부 덕분에
지금 가장 강력한 백년제일인의 후보가 되어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하핫! 그래서 내가 술을 대접하겠다는 것이 아니오?"
"싫다. 계집냄새가 풀풀 풍기는 네놈의 방은 싫다."
만기의 말에 천후의 눈이 치켜졌다.
"이런 제길…그것도 다 당신한테 배운 솜씨요
. 젠장, 괜히 계집 다루는 법까지 가르쳐 준 게 누군데?"
천후의 말에 만기가 크게 분노했다.
"이…이놈 봐라! 사부한데 말버릇 하고…
이놈아, 기껏 재미는 제놈 혼자 다 보고 이제와서 투덜대?"
부릅 뜬 두 눈은 하나도 무섭지 않다.
불끈 쥔 주먹엔 조금도 힘이 가해지지 않았다.
분노한 듯한 눈에는 오히려 따스한 정이 찰랑찰랑 넘치고 있었다.
천후가 어찌 그것을 모르랴?
"하하핫! 알겠소…알겠소.
그럼 비록 달은 없지만 저기 있는 봉우리 정상에 가서 신선놀음이나 해봅시다!"
천후의 손끝은 군산제일봉인 화열봉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천면후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크크크! 네놈은 역시 운치를 알아. 자, 그럼 즉시 가자!"
"좋지요!"
천후는 쾌히 응답한 후 즉시 천면후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화열봉을 향해 쏘아갔다.
한데, 천후와 천면후가 막 사라진 직후,
어둠 속에 숨어 있던 희뿌연 몽영들이 천후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르기 시작했다.
스 스스 스슥!
스스슥!
지옥마영대, 바로 그들이었다.
같은 시각, 설매란은 자신의 방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우아하고 청초하며 조용한 여인, 그녀는 바로 월미옥이었다.
설매란은 그녀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부여잡고 두 눈 가득 눈물을 담고 있었다.
"백련, 여인이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행복하면서도 괴로운 일이라는 것을 안다. 더구나…."
"한 남자를 두 여인이 사랑한다는 것은 더욱 괴로운 일임을 알고 있다."
'궁…주…'
"그러나 너와 나는 다르다.
우린 어릴 때부터 자매처럼 자라오면서
나는 조용하고 현숙하고 아름답기만 하던 너를 미워하기도 했었고 좋아하기도 했었다."
"우리는 그래서 자매 같았다. 나이는 같아도 나는 항상 네가 언니 같다는 생각을 했었단다."
'궁주, 저도…저도 그랬어요!'
월미옥의 고운 두 눈에도 어느새 찰랑찰랑 눈물이 고였다.
"그래… 우린 그랬어. 그리고 운명인지 우리는 또 같은 한 남자를 사랑하고 있어."
'그래요. 그러나 저는 언제든지…그분의 곁을 떠날 수도 있어요
. 그래서… 궁주의 사랑이 완전해질 수만 있다면…'
월미옥의 두 눈에 고였던 눈물이 주르르 흐르고 있었다.
설매란은 그런 월미옥의 눈물을 자신이 직접 닦아주며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야. 나는 알고 있어……그분이 누구를 제일 아끼고 사랑하는지를……. 그건 너야!"
'아니예요… 아니예요…그분은 벌써 두 번씩이나 나를 봤는데도 그냥 가버렸어요.
그렇다고 그분을 원망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흑!'
항상 조용하고 따스하기만 하던 이 여인에게도 이런 얇은 감정이 존재했던가?
여인은 또 한 번 난해해지기 시작했다.
설매란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야. 그는 그때 어쩔 수 없었대. 그는 결코 그럴 분이 아니야."
'알아요…그분은 그럴 분이 아니예요…죄송해요!'
"괜찮아, 사실…오늘 네가 스스로 찾아준 것이 얼마나 고마운 줄 몰라!
더구나 혀까지 잘린 네가 심어술(心語術)까지 익혀 내앞에 나타날 줄이야…
너는 정말 대단해."
설매란은 아름답게 웃으며 월미옥의 손을 꼭 쥐었다.
월미옥의 두 눈에 따스한 정이 흐르고 그 정은 그녀의 손을 통해 설매란에게도 전해졌다.
'궁주, 심어술은 서로 마음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는 대화가 성립되지 못해요.
저는 처음 궁주와 대화가 통하자 얼마나 기뻤는 줄 몰라요!'
심어술(心語術)이란 말을 할 수 없는 경우에 상대의 눈을 통해
마음으로 전하는 높은 차원의 대화술이다.
설매란은 아름답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고맙다. 백련, 자…우리 그이에게 가보자. 그이도 주무시지 않을 거야!"
'아…아니예요!'
월미옥은 얼굴을 가볍게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분은 아직도 네가 아농인으로 변해
음회(音會)에 나간 것을 모르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어서 가서 너의 자랑스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아니예요…! 그럴 필요는 없어요!'
월미옥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한데 그때였다.
바로 창밖에서 그런 말소리가 들렸다고 생각되어지는 순간,
하나의 화려한 인영이 방안으로 스며들 듯 나타났다.
"두 분은 그럴 필요가 없소!"
스스스슥
바로 화화공자였다.
"두 분은 지금 그자에게 가셔도 볼 수가 없소!"
화화공자는 화사하게 웃으며 설매란과 월미옥을 유심히 살폈다.
설매란은 대경했다.
'이럴 수가…밖엔 본 궁의 정예들이 구름처럼 지키고 있다.
한데 이자는 마치 제집에 들어서듯 선뜻 들어섰으니!'
그녀의 등줄기엔 한줄기 냉기가 빠르게 스쳐가고 있었다.
"그대는 누구죠?"
겉으로는 비교적 침착한 모습으로 설매란이 물었다.
화화공자는 묻는 말에는 대답도 없이 희미하게 웃었다.
"과연…천상미인궁주와 화중화다운 용모이오다.
나는 화화공자라 하오. 놀랍소. 내 지금까지 많은 여인들을 알고 가까이 했으나…
당신들 같은…"
"닥쳐욧! 화화공자라면 알겠어요.
여인의 틈에 끼어…신선놀음을 하셨다는 풍류공자님이시죠?"
설매란의 말에는 조소가 가득 들어 있었다.
"후후후! 알고 있다니 영광이오."
"흥! 그런데 그대는 무슨 일로 이곳에 왔나요?"
설매란의 물음에 화화공자가 짐짓 탄성을 내질렀다.
"오! 그렇지…용건을 잊을 뻔했군.
소생은 천존의 명으로 검서생과 아농인을 처단하러 왔소!"
"뭣이?"
설매란과 월미옥의 두 눈이 크게 치켜졌다.
검서생과 아농인, 그들을 왜 이자의 천존이란 자가 처단하려 하는가?
의혹의 순간은 짧았다.
설매란의 두 눈이 일순 지극히 싸늘해졌다.
"역시, 예상대로군. 그대가 검서생과 아농인을 찾아왔다면 잘 찾아왔다.
그러나 그 전에 그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가늠하고 왔어야 했다."
실력이 있으면 해보라는 것이다.
한데 놀라운 것은 설매란이 스스로 자신이 검서생임을 밝혔다는 것이다.
검회의 최종결전에 나가게 되어있는 검서생!
음회의 최종결전에 오른 아농인!
그 두 사람이 바로 설매란과 월미옥이었을 줄이야…
그때, 화화공자의 두 눈에 희미한 조소가 어렸다.
"물론 알고 왔지. 그리고 내 실력도 이미 가늠한 지 오래야."
"좋아! 그럼 해봐라!"
설매란은 싸늘히 냉소를 날린 후 밖을 향해 소리쳤다.
"천상미인궁의 천상십팔빙혼녀(天上十八氷魂女)는 들으라!"
대답이 없다!
"십팔빙혼녀는 어디 갔느냐?"
"이럴 수가?"
설매란의 두 눈에 일순 당황함이 어렸다.
그때, 화화공자가 돌연 앙천광소를 날렸다.
"으하하핫!"
이어, 밖을 향해 소리쳤다.
"불사구존(不死九尊)! 이 소저가 그대들을 찾는다!"
"예!"
놀랍게도 몇 마디의 대답소리가 들리며 몇 개의 인영이 스며들 듯 나타났다.
스스스스슥
그들은 모두 지극히 사악해 보이는 노인들이었다.
모두 일곱 명이었다.
이들 중 한 명이 음산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공자, 색존(色尊)과 선존(仙尊)은 도저히 못참겠다고 하면서
계집 다섯을 제압해 데려갔습니다."
이게 무슨 소린가?
"후후후! 다섯 가지고 되겠나?"
"시간이 없다고 투덜대며 할 수 없이 제일 반반한 계집만을 골라서…"
"후후후! 나머지는?"
"모두 천국으로 보냈습니다."
오오……렇다면 이미…?
설매란과 월미옥, 그녀들은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는지 앙칼지게 소리치며 쏘아갔다.
"간악한 놈들!"
설매란의 옥수에는 어느새 한 자루 지극히 싸늘한 보검이 들려있었고,
월미옥의 손에도 새하얀 백적(白笛)이 들려져 있었다.
"후후후!"
화화공자와 불사구존 중 칠존의 얼굴에는 의미깊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소림의 제자 법공(法空)!
그는 소림의 후기지수 중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
이제 갓 스무살의 나이에 소림의 비기(秘技)인 백보신권(百步神券)과
금강반야대선공을 대성한 걸출한 기재였다.
그는 내일 있을 장회(掌會)의 결선에 올라 있었다.
한데 그가 죽었다. 자신의 방에서 좌선한 채, 등에 검이 꽂힌 채 죽어갔다.
그를 호위하던 소림팔대금강과 혜선대사도 죽었다.
모두 검이 꽂힌 채!
상관우미(上官于美)!
그녀는 강호에서 여제갈(女諸葛)로 불릴만큼 지혜가 뛰어나다.
추곡선생과 더불어 강호이대현자로 불리는 호대선생의 딸인 그녀는
기문진식, 기관지학, 역리학 등에 달통한 재녀였다.
그녀는 이번에 야회(野會)에 참석했다.
야회에선 그런 학문과 지혜를 겨룬다.
한데, 내일 결선에 오를 그녀가 죽었다.
그것도 전라(全裸)인 채 죽었다.
아름답고 깨끗한 그녀의 몸은 수많은 이리떼에게 짓밟혀 처참하게 더럽혀졌다.
능욕을 당한 채 죽은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모두 밤에 일어났다. 그것도 결선에 오를 하루 전날 밤에…
군산제일봉(君山第一峯)!
일명(一名) 화열봉(火熱峯)으로 불리우는 그곳엔 오래 전에 있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화산(火山)의 화구(火口)가 있다.
한데, 밤은 깊었는데…늙수그레하고 낭랑한 두 마디 호탕한 대소가 터져나오고 있었다.
"하하하하핫!"
"하하핫!"
화열봉 정상, 그곳에 지금 일노일소(一老一少)가 마주앉아 대작하고 있었다.
이미 대작한 지 오래된 듯 주위에는 많은 술병이 있었다.
"하하핫! 이게 다요! 강호란 곳에 몸 담은 이후의 모든 것을 다 말했소!"
천후는 그렇게 말하며 술병째 입에 대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만기, 천면후는 그런 천후를 보며 대견하다는 듯 웃었다.
"크크크! 그놈, 과연 내가 눈은 있었구나. 너 같은 기재를 키워냈으니,
한데 네가 정말 무제의 손자냐?"
"그렇다니까요. 할아버지가 남긴 서찰을 잃어버리긴 했어도 나는 틀림없이 그분의 손자요."
천후는 말을 마친 후 다시 술을 들이켰다.
"놀랍군! 네가 무제 그 늙은이의 손자였다니…"
천면후는 놀랍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노인장도 할아버지를 알고 계시오?"
"그럼! 노부가 한참 무림에서 활약할 때 그 늙은이도 같이 있었어."
"같이 활약했다면? 친구 사이요?"
"아니야…친구라고는 할 수 없지…그저 몇 번 만난 적밖에 없으니까…!
한데 어느날 그가 사라져 버려서 궁금하다 했더니…
네 말대로라면 마곡(魔谷)이란 곳에 은거하고 있었구나…."
"한데…노인장은 마곡이 어디 있는 줄 아시오?"
"마곡? 그럼 너는 알고 있다는 말이냐?"
"이보시오. 내가 먼저 물었는데 딴 소리는…!"
천후는 웃긴다는 듯 눈을 치뜨고 천면후를 흘겨봤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 이놈아, 누가 아나 먼저 말하면 될 것 가지고 뭐가 어째?"
"뭐요? 그런 밑지는 장사를 내가 왜 하오?"
"싫으면 관둬라! 이제 보니 너는 모르고 있어.
그래서 내 입에서 먼저 말이 나오길 기다리는 것이 분명하다."
천면후는 게슴츠레 눈을 뜬 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예이! 관두시오. 어차피 이십 년 가까이 모르고 지내왔는데…
천후는 그렇게 말하며 벌떡 일어섰다. 그의 얼굴에는 약간의 격정이 일고 있었다.
천면후는 그런 천후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망할 자식! 그래도 제 혈육이라고 찾고는 싶어서… 이리 와라. 내 알려 줄테니!"
"저…정말이오?"
천후의 약간 우울하던 안색이 활짝 펴졌다.
"크크크! 사내 녀석이… 좋다!"
천면후는 그렇게 말하며 일어섰다. 술 때문인지 그의 신형이 약간 휘청거리고 있었다.
비틀
"이런…노인네가 몸도 이기지 못하면서 술은…? 이리 오시오. 내가 부축해 드릴테니!"
천후는 천면후를 부축했다.
"크크크! 그놈! 그래도 생각해주는 것을 보니 인정은 있구나."
두 사람은 같이 거의 부둥켜 안고 걸어갔다.
"저쪽으로 가면 가파른 벼랑길이 나온다. 저리 가자!"
천면후는 천후에게 무엇인가 연신 지시하고 있었다.
"저리로… 저리로… 아니야…그 옆으로!"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지시하고 한 사람은 따르고 하면서 한참을 갔다.
그러다 한 곳, 좁은 외길이 나타났다.
외길의 양 옆은 매우 가파른 벼랑길이었다.
두 사람은 그곳에 서서 왼편 벼랑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벼랑 아래는 매우 급한 급류가 흐르고 있었다.
"저기야…저 급류를 따라 쭉 올라가면 마곡이 나온다.
하지만…너는 그곳에 갈 생각을 버려야 해?"
"무엇 때문이오?"
"그곳은 인간이 사는 곳이 아니다.
인간이 살만한 곳은 단 한군데 뿐. 나머지는 뜨거운 열류 때문에 모두 피폐해 있어!"
"뜨거운 열류?"
"그렇다. 그곳은 화산지대지. 인간은 물론 동식물도 못산다."
"그러나 나는 가야 하오."
"왜 가야 한다는 것이냐?"
"그건 내 뿌리를 찾고 싶어서 그렇소."
천후의 얼굴에는 일시 잔잔한 격정이 출렁이고 있었다.
천면후는 천후의 팔에 기댄 채 아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뿌리를 찾는다는 것은 중요하다. 매우 중요한 일이지."
"그러나 너는 그곳에 못간다. 평생, 아니 죽기 전까지는 못간다!"
순간, 천후의 몸이 흠칫 떨렸다.
"노인장, 그게 무슨 말이오?"
그때였다. 천면후의 신형이 돌연 천후의 가슴 앞으로 빙글 돌아섰다.
동시에, 천면후의 가공할 일 장(一掌)이 천후의 가슴을 정면으로 강타하고 말았다.
꽝
"아… 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천후의 입에서는 핏줄기가 길게 뻗어갔다.
오오… 이게 무슨 참사인가?
천면후가 천후에게 일 장을 암습하다니,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
천후는 무려 오 장이나 멀리 날아가 고꾸라졌다.
"으… 액!"
"왝!"
내장이 으스러진 듯 그는 연신 핏물을 토해내고 있었다.
천면후, 돌연한 괴변을 연출한 그는 그때 음산하게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크크크크! 어린 놈, 이제야 지혜보다는 견문(見聞)이 강호에서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알겠느냐?"
살기(殺氣)가 다가오고 있었다.
소름끼치는 살기가 천면후의 몸에서 물씬물씬 풍겨나오고 있었다.
천후는 고통 속에서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그…그렇다면… 당…당신이…바로 천존이라는 사람이오?"
"그렇다!"
천면후가 음산하게 웃었다.
"그리고 불사성주이고?"
"그렇다!"
"음양영생교의… 교주이기도…하고?"
"크크크…그래도 제법 알고는 있었군!"
"그…그럼…추곡선생님 처소의 취몽… 도…?"
"제법이야."
"알겠소. 당신이…우리 가문의…흉수…인 것 같군.
결국 당신이 바로 사중천의 천주겠지? 그렇소?"
일순, 천면후의 두 눈이 흔들렸다.
하나, 더 이상 알려줘도 괜찮다고 생각했음인가?
"크하하핫! 과연…과연…너는 천하제일의 기재답다."
그것은 시인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천후의 두 눈에 파란 불꽃이 인 것은 바로 그때였다.
하나 그는 다시 고통에 못이겨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해냈다.
"좋소! 한가지만 더 물읍시다. 만통회…으액… 만통회는 당신과… 무슨 관계?"
"크크크! 그래, 어차피 너의 내장은 제자리를 이탈해서 회생이 불가능한 몸! 다 알려주마!"
"만통회는 원래 나하고는 상관이 없다. 다만 귀제갈은 나였어."
"여…역시…"
천후는 고통 속에서도 생각이 맞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천면후는 이미 일 장 가까이 다가왔다.
"크크크! 자, 이제 가거라… 너는 나에겐 아무 필요도 없고 오히려 짐만 되니까?"
천면후는 그렇게 말하며 돌연 일 장을 다시 날렸다.
슈우우욱
섬뜩한 자색광채가 독사의 혓바닥처럼 폭사되어 천후의 두개골을 향했다.
절대절명의 순간
, 돌연 미동도 하지 못할 것 같던 천후가 빙글 몸을 돌렸다.
동시에 엄청난 광소와 함께 천후의 몸이 허공으로 일 장 정도 솟구쳤다.
번 뜩!
"으하하하핫!"
순간, 하나의 신형이 섬전처럼 땅속에서 솟아나와 천후를 잡아챘다.
혈랑이었다.
혈랑이 돌연 나타나 천후를 구한 것이다.
"크하하핫! 으왝! 내가 너에게 속아서 이곳에 온 줄 아느냐?"
천후의 낭랑한 대소가 터졌다.
"그것은 너의 진정한 정체를 캐기 위해 스스로 내 몸을 상한 고육지책이었다."
천후의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이제 됐다! 네놈이 흉수라는 것을 알았으니…내게 남은 것은 복수 뿐임을 알아라."
천후는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그것은 혈랑이 그를 데리고 피하고 있는 것이다.
천면후, 그의 두 눈이 일시 파르르 떨렸다.
"무서운 놈!"
무겁고 침중한 음성이었다.
하나 다음 순간, 그의 두 눈이 다시 시퍼렇게 변했다.
"그렇다고 해도 너는 살지 못한다.
그럴 줄 알고 네놈 앞길에 사중고루혈마단을 배치시켰으니까… 크크크…"
속고…속이고…꾸미고…또 꾸민다!
밤은 밤인데…
기분 나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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