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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프롤레타리아 연극
1930년대로 들어서면서 프롤레타리아 연극은 카프의 볼셰비키화에 영향을 받아 한층 활발하게 전개된다. 대구의 [가두극장](1930. 이상춘 중심), 개성의 [대중극장](1931. 민병휘 중심), 해주의 [연극공장](1931. 송영 중심) 등이 조직되었으나 공연은 없었던 것 같다.
카프 산하의 대표적 극단은 [이동식 소극장]이다. [이동식 소극장]은 1931년 8월 추완호, 김유영, 석일양, 이엽, 최정희 등이 [시대공론]에 모여 조직한 것으로 각본부에 이효석, 유진오 등이 있다. 이들은 1932년 6월 [메가폰]으로 개칭하였고, 1932년 7월에 다시 [신건설사]로 이름을 바꾸면서 계속적인 활동을 하였다. [신건설사]는 기관지 {연극운동}을 발간하는 등 어려운 당시 상황에도 불구하고 연극을 통한 문화운동에 힘을 기울인다.
카프의 '연극대중화' 논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지는데, 그 하나는 임화를 중심으로한 카프 중앙 문인의 입장으로, 카프의 지도하에 전국적인 프로극단을 연계하여 공연활동을 벌이자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신고송을 비롯한 전문 연극인의 입장으로 검열하에서의 공연을 포기하고 소인극 운동에 힘을 기울이자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합법적 극장공연이 노동자·농민과는 거리가 있는 소부르조아 관객을 위한 공연이라는, 카프지도부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민병휘에 의해 제시되었다. 신고송은 이를 더욱 심화시켜 카프 지도부가 소인극에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한다. 이에 대하여 카프의 지도부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 후 카프 지도부는 객관적 정세의 악화로 합법적 공연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소인극에로의 관심을 표명한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카프의 지도역량이 쇠진한 후여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신건설사 사건'을 계기로 카프는 해산되고 만다.
만일 카프 지도부가 좀더 일찍부터 소인극운동에 관심을 보여 집중적 역량을 투여 했더라면, 카프 해산이후 프로극작가들이 상업극단으로 흡수되거나 연극계를 떠나지 않고서도 지속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해방이후의 진보적 연극운동이 소인극에 상당한 비중을 부여하고, 관심을 가진 것은 바로 일제강점기하의 모색과 경험이 밑바탕을 이루었기 때문으로 보아야 하겠다.
프로작가군의 주된 관심은 20년대와 마찬가지로 노동문제이며, 농민에 대한 관심은 동반자 작가라 할 수 있는 유진오, 전일검에 의해 발표되었을 뿐이다. 30년대에 활약한 프로극작가는 송영, 김남천, 이북명, 한설야, 이기영등으로 합법적인 공연을 염두에 두어 우회적인 방법을 선택한 것이 특기할 사항이다.
프로극은 이동극 외에도 슈프레히콜을 실험하였는데, 이에 해당하는 작품으로는 백철의 <국민당 제26로군>, <재건에>, <수도를 걷는 무리>, 박세영의 <橋> 등이 있다. 슈프레히콜은 독립적인 공연이라기보다 선전·선동을 위한 부수적인 공연이었으므로 노동자·농민들의 행사와 결합되었을 때, 제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30년대 프롤레타리아 연극은 대중속으로의 활동을 위해 나름의 노력을 꾸준히 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3. 대중극
1930년대 전반기의 대중극은 신파적 색채가 농후했고 관객들의 말초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데 급급했다. 이러던 것이 1935년 11월 [동양극장]이 생기면서 대중극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동양극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 전용 상설극장으로 쟁쟁한 스텝진과 배우진을 갖추고 기술적으로 잘 만들어진 연극을 대량공급한다. 동양극장의 설립은 연극 종사자들에게 전문적인 직업인의 위상을 갖게 했다는 의의를 지닌다. 또한, 동양극장의 연극은 초기 신파에 비해 많은 변화를 가져왔는데, 연기면에서 신파조를 지양하고 사실적인 무대를 표방했다. 동양극장에서 가장 많은 수의 공연을 연출한 홍해성은 일본 축지 소극장에서 신극교육을 받은 자로 신파극의 질적 향상을 꾀하였다. 동양극장 외에도 [중앙무대], [아랑], [고협] 등의 대중극단이 사실주의와의 절충을 표방하며 활동하였다.
그러나 30년대 대중극은 그 소재면에서 여전히 화류비극이나 가정비극이 주류를 이루었다. 동양극장 최고의 레파토리인 임선규 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와 이서구 作 <어머니의 힘>은 그 단적인 예라고 하겠다. 따라서 대중극에서는 식민지 치하라는 정치적·역사적 배경은 찾아 보기 힘들다. 대중극에서는 가능한한 이러한 것이 배제된 개인적 욕망에만 주목하고 있다.
대중극은 비록 기술적인 면에서는 자신감이 있었으나 그 이면에는 신극에 대한 선망과 호감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 시도가 [중앙무대]의 '중간극' 이론이다. [중앙무대]는 카프 해산 이후 동양극장에서 활동했던 극작가 송영, 박영호와 배우 박제행, 남궁 선, 서월영 등이 주축이었고, 여기에 [극예술연구회] 출신의 맹만식, 이원근이 가세하였다. 그들은 창립 성명서를 통해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실현하고자 함을 제시한다.
그러나 실제 공연에 있어서는 종래의 대중극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이들의 신극과 흥행극의 결합시도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중앙무대]의 해산을 맞는다. 이후 이러한 노력은 [고협] 등에 의해 계속 진행되는데, 뚜렷한 성과를 거두기 전에 40년대 국민극 시대를 맞게 됨으로 하여, 신극의 전문화와 대중기반의 확보라는 숙원은 해방 이후로 미루어 진다.
30년대의 대표적인 대중극 작가로는 이서구, 임선규, 박승희, 김건, 최독견, 김춘광 등과 카프 해산 이후의 송영, 박영호 등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