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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羅沙, 回回國의 金髮美女
악양에서 동정호를 끼고 남하하면 장사성(長沙城)으로 이르게 되어 있다.
장사성은 남육성(南六省)의 교역의 중심부가 되는 곳으로 언제나 활발한 도시다
악양에서의 일은 모든 것이 그에게는 엉망진창이었다.
해서 뚜렷한 방향을 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저 악양을 멀리 떠난다는 기분으로
밤을 세워 장사성으로 향하는 길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동쪽에서 뿌옇게 밝아오는 새벽빛과 싱그러운 아침공기를 호흡하면서
냉검상은 밤새 우울했던 마음을 조금은 안정시킬 수가 있었다.
밝아오는 미명의 빛을 전신으로 받으면서 냉검상은 새롭게 자신의 마음을 다졌다.
희봉아에게 삼뇌천기 남궁천자의 말을 듣는 순간부터 이상하게 냉검상의 마음 속에서
그 인물에 대해 경쟁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한 감정은 그저 떠오르는 예감처럼 돌발적인 것이어서
냉검상 자신이 생각해도 얼른 이해되지 않는 감정이었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이상하게 자꾸 의식되는 남궁천자였다.
냉검상은 남궁천자란 인물에 대해 더 이상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듯 설청하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한데 그때 냉검상의 등 뒤에서 마차소리가 들려왔다.
냉검상은 새벽부터 급한 일이 있는 사람이려니 하고 마차에 대해 별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한데 마차는 점점 냉검상쪽으로 오더니 스쳐갈 듯 지나치다가 갑자기 속도를 느리게 했다.
그래서 마차와 냉검상은 마치 발을 맞추기라도 하는 듯이 나란히 전진하는 형태가 되었다.
냉검상은 그래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한데 무려 백여 장쯤을 전진하도록 마차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자신과 나란히 움직이자
슬며시 신경이 쓰이는 것이었다.
냉검상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옆눈질을 했다.
마차는 제법 화려했고, 마부석에는 산양 모양의 수염을 기른 청수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예사 마부로 보기에는 조금 의젓하고 신기(神氣)마저 느껴지는 청삼노인은
냉검상의 눈길을 의식한 듯 싱긋 호의적인 웃음마저 지어보이는 것이었다.
그 웃음이 더욱 냉검상을 신경쓰게 했다.
냉검상은 불쾌한 듯 말했다.
"이봐, 가려면 빨리 가지 않고 뭐하는 거야?"
마부석의 노인은 냉검상이 반말을 하는 데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되묻는 것이었다.
"대협의 존함이 혹시 냉검상이 아니신지요?"
냉검상의 표정이 약간 변했다.
상대가 자신을 알고 있다는 것은 지금의 행동이 의도적인 것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뜻이 아닌가?
"너는 누구냐?"
"노부의 성명은 좌빈(左賓)이라고 합니다. 노부의 주공께서 대협을 뵙기를 청하고 계십니다."
냉검상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좌빈이라고 밝힌 마부도 말고삐를 채면서 마차를 멈추었다.
냉검상은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너의 주공이 누구냐?"
좌빈은 담담하게 웃었다.
대협께서 만나보시면 알게 됩니다. 그러니 노부를 따라오시지요."
냉검상은 코웃음을 쳤다. 기분이 나빴던 것이다.
"일개 시종 따위가 꽤나 신비한 척을 하는군. 나는 그런 것을 제일 기분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인데.."
말을 하면서 냉검상은 회룡수(回龍手)라는 금나수법으로 좌빈의 완맥을 잡아나갔다.
그러자 좌빈은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는 듯이 나직한 웃음과 함께 말채찍을 휘둘러 방어를 하면서
동시에 공격의 효과까지 노린 손놀림을 보였다.
좌빈의 손놀림은 영활하고 신속하여
오히려 완맥을 잡아가던 냉검상의 우수(右手)를 채찍으로 휘감아 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채찍이 냉검상의 손과 부딪치는 순간 썩은 새끼줄처럼 토막이 나면서
좌빈의 두 눈 앞에서 냉검상의 손가락 두 개가 눈을 찌를 듯한 기세로 멈추어 있는 것이었다.
(흑... 이, 이럴 수가!)
좌빈은 대경실색한 표정이었다.
냉검상은 그런 표정이 재미 있다는 듯 빙글 웃으면서 싸늘하게 물었다.
"너의 주공이 누구냐?"
좌빈은 당황한표정을 애써 감추고 짐짓 태연한 신색으로 말했다.
"대협께서 만나보시게 되면 자연히 알 수 있을 것이오."
"그래? 좌빈이라고 했던가?"
눈 앞에서 치워지지 않고 있는 냉검상의 두 손가락을 보면서 좌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소."
"후후.. 내가 가장 싫어하는 종류의 인간 중에 하나가 바로 개뿔도 없으면서 있는 척하는 놈들이다
. 바로 너처럼!"
냉검상은 그대로 팔꿈치 돌려 좌빈의 턱을 돌려 버렸다.
퍽!우욱..."
좌빈은 마부석에서 나뒹굴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냉검상은 떨어진 그를 한 번 더 걷어차고는 몸을 날려 마차의 주렴을 걷으며 그대로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좌빈과 말을 나누면서 마차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냉검상이 불쑥 마차 안으로 들어가자 하나의 손이 놀란 듯 손을 쓴 것 같았다.
냉검상은 가볍게 고개를 젖혀 공격을 피해내며 동시에 흰 손목을 낚아 채었다.
부드럽고 유난히 가늘고 흰 손목이었다.
냉검상은 손목을 쥔 채 느긋하게 마차 안의 의자에 앉으며 맞은편에 있는 손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이었다.
면사를 코 윗부분부터 쓰고 있었는데, 두 눈이 보석처럼 푸른 빛을 발했고, 또 유난히 컸다.
눈에는 깊이 쌍꺼풀이 있어 더욱 커보였고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물씬 풍겼다.
또한 코 끝을 자극하는 체향도 중원의 여인들과 다른 독특한 것이었다.
냉검상은 뜻밖인 듯 잠시 면사여인을 응시하다가 가볍게 웃었다.
"후후.. 중원의 계집은 아닌 모양이군."
놀란 듯 크게 뜨여진 면사여인의 눈을 보면서 냉검상은 거침없이 손을 뻗어 면사를 벗겨내었다.
여인의 입에서 짤막한 탄성이 터졌다.
그러나 이미 면사가 벗겨진 그녀의 얼굴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
예상은 했지만면사가 벗겨지며 드러난 얼굴이 중원인이 아니라 냉검상은 흠칫했고
, 마치 조각을 해 놓은 듯 뚜렷하고 시원스러운 이목구비에
금발(金髮)과 금빛 눈썹이 어울린 충격적인 아름다움에 더욱 흠칫했다.
세상의 무엇이라도 빨아들일 듯이 강렬한 눈, 그 아래 손을 대면 베일 듯이 곧고 오똑한 콧날,
선이 뚜렷하면서도 열정을 감추고 있는 듯한 입술..
더욱이 당황한 듯 크게 뜨여진 눈의 모습은 이 이국적인 미녀의 아름다움을 화려하게 발산시키고 있었다.
"......"
냉검상은 아주잠깐 동안 아찔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중원의 여인들은 오밀조밀하고 조화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지만,
이 여인은 파격적이고도 시원스러운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여인이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며 왼손을 뻗어오자 냉검상은 흠칫 정신을 차렸다.
여인의 왼손에는 중원에서는 보기드문 반월형의 비수가 새파랗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냉검상은 가볍게 여인의 손을 쳐내며 비수를 탈취했다.
흐흥! 뜻밖이군.
이곳에서 회회국(回回國:페르시아)의 아름다운 계집을 만날 줄은 생각도 못했다."
금발미녀는 냉검상을 날카롭게 쏘아보다가 빠른 말투로 무어라고 지껄였다.
그러나 회회국의 언어라 냉검상은 얼른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성조 영락제(成組 永樂帝) 당시 대명제국의 위세는 팽창할대로 팽창하여
국외로도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해서 주변의 약소국가들은 중원을 대국(大國)으로 모시고, 해마다 사신들과 함께 조공을 보내고 있었다.
약소국가들이 다투어 대명제국과 친선관계를 표명한 것은 역사의 흐름이었다.
그들은 진상품으로 기린(麒麟), 표범(豹), 사자(獅子) 등의 진귀한 동물을 비롯,
각국의 특산물과 희귀한 보석(寶石), 아름다운 미녀(美女)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영락제는 흡족한 마음으로 여러 약소국의 진상품을 받아들이는 한편 그들 나라와 교역 및 문화교류를 위해,
국자감의 원생들에게는 특별히 외국어를 배우도록 명하고 사이관(四夷館)이란 외국어 교육관까지 만들었다.
그 당시 주요 외국어 대상이 되었던 곳은, 달단(몽고), 여진(女眞), 서번(西番:티벳), 고창(高昌:위그르),
백이(百夷:타이), 면전(緬甸:버마), 서천(西天:인도), 회회(回回:페르시아) 등으로 집약될 수 있었고,
영락제 이후 대외정책이 비록 쇠퇴하였다 하지만 영락제가 만들어 놓은 발판으로
북경을 비롯한 중원의 대도시에 외국인을 보는 것은 드문 일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냉검상이 외국어를 배웠을 리는 만무했다.
단지 천산에서 있으면서 중요한 교역로인 천산북로를 관장했고 그 결과 여러 국가의 대상들을 상대하면서
능숙하지는 않지만 자연스럽게 몇 개의 외국어를 습득할 수 있었다.
회회국의 사람들은 드물지 않게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지금이 처음이었다.
냉검상은 노기띤 눈을 빛내며 빠르게 지껄이는 금발미녀를 가만히 바라보며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회회국의 언어로 말을 막았다.
"이봐, 나는 네 말이 빨라 알아듣기 힘드니 한어를 알면 한어로 말했으면 좋겠어."
금발미녀는 냉검상이 자신 나라의 언어로 말하자 놀란 표정이었다.
무척이나 의외인 듯, 잠시 냉검상을 뚫어져라 응시하더니 조용하고 차분한 회회국의 언어로 말했다.
"손을 놔주세요."
냉검상은 싱긋웃으면서 손을 놓았다.
처음 볼 때보다 보면 볼수록 독특한 아름다움을 풍기는 미인이었다.
냉검상이 이제껏 보아온 회회국의 인물들은 대부분이 몸과 얼굴에 누런 털이 가득한 야만인들이었다.
이렇듯 살결이 깨끗하고 어찌됐든 이국의 미녀를 만났다는 것이 냉검상에게는 유쾌한 일이었다.
이때 마차의 주렴이 걷히면서 좌빈이 고통스러운 얼굴을 쑥 내밀었다.
냉검상을 노려보는 눈빛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넌 꺼져!"
냉검상은 좌빈이 무어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칼자루로 다시 턱을 갈겨 버렸다.
좌빈은 다시 비명을 내지르며 나가 떨어졌다.
이번에는 타격이 심했는지 혼절을 한 듯 잠잠해졌다.
냉검상이 좌빈에게는 신경 쓰지 않고 금발미녀에게 한어로 물었다.
"네가 저 자의 주인인가?"
금발미녀는 냉검상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듯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또렷한 회회국의 언어로 말을 덧붙였다.
"아니예요.""그럼?"
"저 좌빈은 단순한 마부일 뿐이예요. 그와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그래?"
냉검상은 좀 느긋하게 등을 기대며 편안하게 자리를 잡았다.
금발미녀는 그런 냉검상을 잠시 묘한 눈빛으로 응시하더니 서툰 한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아라사(阿羅沙). 물론 한명(漢名)이죠. 원래의 이름은 따로 있지만..."
멋진 이름이다, 아라사."
금발미녀 아라사는 대화가 통하자 약간 편안한 마음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는 냉검상의 손에 의해 떨어진 면사를 집어 다시 쓰면서 말했다.
"제가 좌빈과 함께 온 것은 바로 당신을 초대하기 위해서예요."
"누가?"
아라사는 눈으로 웃었다. 그 웃음은 참으로 독특한 것이었다.
"물론 나의 주인이죠."냉검상은 의아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독한 호기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아름답고 화려한 회회국의 미녀를 종으로 삼을 수 있는 자에 대해서..
"아라사의 주인이 어떤 자지?"
"취옥성의 삼공자(三公子)이신 냉곡 어른이세요."
"!"
냉곡이란 말을듣는 순간 냉검상의 표정은 자신도 모르게 굳어지고 있었다.
아라사는 냉검상의 표정에도 아랑곳 없이 서툴게 말을 이었다.
"당신은 초대에 응하시리라 믿어요."
* * *
놀라울 정도로화려한 대청이었다.
화려해도 너무나 화려했다.
어느 곳에 눈길을 주어도 부(富)의 냄새가 물씬물씬 풍겼다.
일단 벽(壁)을 보면 구경하기도 힘든 청라석(靑羅石)을 붙였고,
벽에 붙어 있는 촛대는 모두 황금촛대.
넓은 대청의 곳곳에는 거대한 고목을 연상케 할 만큼 굵은 기둥들이 솟아 있었는데,
그 또한 중원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서천(西天:인도) 산의 붉은 대리석에
기둥마다 명장이 영혼을 불어넣은 듯 십장생이 정묘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뿐인가?
바닥에는 회회국 특산의 양탄자가 발목이 빠질 정도로 푹신하게 깔려 있었고,
대청을 장식한 가구는 진귀한 목재에 사소한 물건 하나도 세상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값비싼 진품들이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이 엄청난 부에 그만 기가 질려 입도 뻥긋하지 못할 정도였다.
도대체 어느 누가 이처럼 화려하고, 어마어마한 대청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이 화려한 대청의 중앙에는 지금 겨우 중요한 곳만 가린 절색의 미녀들이 군무(群舞)를 추고 있었다.
오른쪽에는 열 명의 악사들이 군무에 어울리는 음률을 연주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리 천박하지 않으면서도 도도한 흥을 돋우는 것이었다.
미희들의 현란한 춤과, 악사들의 음악은 오직 두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대청의 정중앙에 약간 높은 자리에 위치한 상석에는
수정의 탁자에 온갖 산해진미와 명주(名酒)가 차려져 있는 가운데
냉검상과 이십대 후반의 청년 한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조용히 담소를 하며 술잔을 나누고, 간간이 미희들의 춤을 구경하기도 했다.
청년의 모습은특이했다.
그 어떤 여인보다 더 여리고 가냘퍼 보였으며 섬약한 느낌을 주었다.
파리할 정도로 창백한 얼굴에 두 눈은 실처럼 가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수하며
오래도록 권력을 행사해 온 인간에게만 느낄 수 있는 관록과 귀풍이 풍겼다.
하나 흠이라면너무도 섬세하여 오랫동안 중병을 앓아온 환자처럼 보였고,
냉검상에게 술잔을 채워줄 때는 손목에 푸른 실핏줄까지 드러나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냉검상은 그 연약한 손이 얼마나 무섭고,
그 가는 실눈이 얼마나 많은 음모를 품고 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청년의 이름은냉곡. 바로 취옥성의 삼공자라는 위치를 운명으로 지니고 있는 인물이었다.
취옥성의 백성들은 그를 가리켜 혈리(血狸), 즉 피의 이리라고 서슴지 않고 매도했다.
그러나 개의치 않고 오히려 혈리라는 별명을 즐겨 사용하는 인간이었다.
누구보다 생각이 깊고 심기가 무서운 인물이 바로 냉곡이었다.
냉검상은 과거십이년 전에 자신과 동생 냉유림을 제거할 음모를 꾸민 자가 세 명의 이복형들 중에
바로 냉곡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삼형제 중에 가장 무서운 심기를 냉곡은 가지고 있었다.
냉검상은 조용히 술을 들이키면서 걷잡을 수 없이 끓어 오르는 살심(殺心)을 억지로 누르고 있었다.
지난 십 년 이래 이처럼 인내해 보기는 처음일 정도로..
연신 온화한 미소를 띄우고 있는 냉곡의 등 뒤에는 완전무장을 한 열 명의 무사들이 일렬로 도열해 있었다.
한결같이 무심한 표정에 목석처럼 서 있는 모습으로 보아 상당한 수준의 고수들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냉곡의 호위무사들인 듯했다.
냉곡은 잠시 무희들의 춤을 보다가 냉검상의 술 잔이 비어 있음을 발견하고는 술병을 들었다.
"실로 냉대협의 소문은 내가 취옥성을 떠나면서 귀가 따갑게 들었소이다."
냉곡은 가느다란 웃음을 보였다.
힘이 없어 보이는 웃음이었지만 창백한 얼굴과 어울려 어쩐지 섬뜩함을 느끼게도 하는 웃음이었다.
"솔직이 무척 궁금했소. 대체 천산마도가 어떤 인물이기에 그토록 대단한 위명을 떨치는지 말이오
. 더욱이 나와 같은 종씨라 왠지
친근감까지 느끼면서 말이오."
냉곡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가 권하는 술은 북경 최고의 명소라는 안락원에서조차 맛보기 힘든 명주 중에 명주였다.
냉검상은 그저담담하게 말했다.
"입방아를 찧기 좋아하는 세인들이 붙여놓은 이름이오. 헛소문만 풍성할 뿐이지 실속은 없소."
냉곡은 나직한웃음을 흘렸다.
"지나친 겸양이오. 냉대협의 소문이 헛것이라면
십이비천신마의 이름은 그야말로 쓰레기통에나 처박아야 할 것이 아니겠소?"
냉곡은 가는 눈을 더욱 가늘게 뜨면서 냉검상을 보았다.
그러나 냉검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냉곡은 술잔을 들어 입술을 축이는 시늉을 하고는 다시 말했다.
"원래 악양제일루에서 냉대협을 모시려고 했으나
, 세인들의 눈이 의외로 많아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다가 냉대협의 뒤를 은밀히 따라와
이렇듯 무례하게 모시게 된 것이오."
냉검상은 억양의 변화가 없이 말했다.
"취옥성의 고귀하신 삼공자께서 일개 무인을 이렇게 대접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소."
냉곡은 차분하게 말했다.
"내 비록 무인(武人)은 아니지만 지난 십 년 동안 무림의 영웅호한들과 긴밀한 사귐을 계속해 왔소
. 이는 내가 워낙 기인이사(奇人異士)들을 좋아하고 사귀기를 원하는 뜻에서 이니 공연한 부담을 갖지 마시고
편한 마음으로 즐겨 주신다면 이 냉모의 바람은 더 없소이다."
냉검상은 속이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네놈은 나를 사귀고 싶은지 몰라도 나는 이 자리에서 네놈을 두 쪽으로 갈라놓고 싶은 마음 뿐이다!)
냉곡은 말을 이었다.
"원래 이 산장(山莊)은 장사성 지부대인의 소유로 되어 있는 별장이오.
그러나 내가 냉대협을 모실 요량으로 지부대인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빌린 것이오.
그러니 냉대협은 이곳에서 아무런 부담없이 즐겨 주시면 되는 것이오
. 단지 본인의 뜻을 이해하여 기탄없이 대화를 나누고 친분이 두터워진다면
이 냉모가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소이까?"
말을 한 냉곡은 어울리지 않게 제법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냉검상은 대답대신 술잔을 들어 술을 마셨다.
이어 냉곡을 향해 미묘한 웃음을 지어보이고는 한참 흥에 겨워 있는 무희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 * *
자하산장(紫霞山莊).
냉검상과 냉곡이 운명처럼 만나 술잔을 나눈 대청이 아니라도 이곳은 무척이나 넓고 모든 것이 아름다왔다.
장사성 지부대인 개인소유의 별장이라지만 웬만한 제후의 별장보다 그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이 능가할 정도였다.
뜻이 있는 자라면 크게 개탄할 일이지만 그런 것을 개탄하기에는 냉검상은 어울리지 않았다.
냉검상은 마음 속에 칼을 갈면서 냉곡의 뜻대로 이곳에서 마음껏 즐기고 마음껏 마시고
며칠째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 *
인간에게는, 특히 인간 중에서도 남자에게는 몇 가지 좋아하는 것이 공통적으로 있다.
일단 남자로 태어났으면 누구라도 재물을 원한다.
부(富)의 힘이 얼마나 사람을 비참하게도 만들고
, 화려하게도 만든다는 것을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절실하게 깨닫기 때문이다.
물론 청빈한 사람도 있지만, 귀신조차 부린다는 돈을 싫어하는 남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부와 함께 남자들이 또한 추구하는 것은 권력이다.
권력이란 놈이 남자들에게 풍기는 매력은 실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이다.
남자의 심리 속에는 끝없는 도전과 성취욕이 있고,
누구라도 남의 밑에 있는 것보다는 남의 위에 올라서고 싶은 욕망이 있기 마련이다.
이를 테면, 하나의 산을 정복하기 위해 숱한 난관을 거치며 급기야 산상에 오르면
그 산을 굽어보고 있는 하늘까지 정복하고 싶은 것이 남자들이다.
하늘! 그것은 바로 힘(力)과 통하고 힘의 요체는 권력이다.
이러한 권력을 싫어할 남자들이 있을까?
남자들이 또 좋아하는 것이 있다.
여자(女子), 바로 여자다.
세상의 이치는음양(陰陽)의 원리로 이루어져 있고
, 어둠이 있음에 밝음이 있고, 나비와 벌이 꽃을 탐하듯 남자들은 본능적으로 여자를 원하게 되어 있다.
여자 중에서도 아름다운 미녀를 남자들은 원한다.
아름다운 미녀를 싫어하는 남자라면 병신과 성인(聖人) 밖에는 없을 것이다.
또 하나 모든 남자들의 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술(酒).
술은 모든 남자들이 다 좋아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다수가 좋아한다고 할 수 있다.
한 잔의 술에 취흥을 돋우며 야심만만한 꿈을 키워보는 것도 오직 남자만의 독특한 세계가 아닐까?
냉검상에게 있어서 권력과 재물은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미인과 술, 특히 아름다운 미인이라면 누구보다 좋아하며
절대로 사양하지 않는 것이 바로 냉검상의 특징이었다.
이곳 자하산장에는 많은 여인들이 있었고, 많은 여인들은 대부분이 빼어난 절색이었다.
냉검상은 근 열흘 간을 이곳에 머무르면서 아예 미녀들 속에서 빠져 있었다.
냉검상의 행동은 가히 광란에 가까운 것이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는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았다.
한꺼번에 여섯 명의 미인을 침실에서 밤새 희롱한 것이 어제인데,
오늘은 아침부터 네 명의 미인을 발가벗겨 놓고 술을 마시고...
누가 있든 없든 마음에 드는 미인이 있으면 대낮에도 방사를 즐기는 것이 바로 냉검상이었다.
이곳 자하산장에 있는 미녀의 숫자는 칠십여 명. 열흘 동안 냉검상의 손을 거치지 않은 여인이 없을 정도였다.
제아무리 석불이라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로 눈 뜨거운 음란행위를
냉검상은 아무렇지 않게 행하는 것이었다.
정사(情事)라는 행위가 신비하고 성스럽다는 것과는 다른 차원인 쾌락을 추구하는데
냉검상은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자하산장의 임시총관인 서문수 이하 냉곡이 거느리고 있는 호위무사들은 아예 냉검상에게 질려
그에게 어떤 제동도 걸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도몰랐다.
끓어오르는분노! 하늘조차 녹여버릴 만큼 그 무서운 분노를 다른 곳으로 폭발시켜야 하는
사내 냉검상의 원한은 그 누구도 모르고 있었다.
* * *
어제는 서리가내렸다.
서리 속에 피어난 국화(菊花)는 그 향이 진하지 않아 좋고
, 담백한 모습이 조용한 가운데 굳은 기상을 느끼게 한다.
아침의 햇살이잔잔하게 이마에서 부서지는 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 냉곡은 화원에서 노란 국화를 코에 대고
그 담담한 향기를 음미하는 듯 즐기고 있었다.
꽃의 향기를 탐하는 것은 그의 오래된 습관 중에 하나였다.
냉곡의 옆에는자하산장의 임시총관인 서문수가 조용히 서 있었다.
사십대의 나이에 말수가 적어보이며, 두터운 눈까풀을 습관처럼 간간이 깜박거리는 이 인물
은 조금은 능글맞을 정도로 차분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조금은 풀어진 듯 방관한 눈빛 속에 노련하고 교활함마저 풍기는 서문수는
냉곡의 오랜 심복 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 자의 행동은 마치 광인(狂人)과 같습니다. 소문 이상으로 여자를 탐하고 있습니다.
그 자에겐 도무지 절제란 것이 존재하지 않고 타인의 눈길 따위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
도대체 평범한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의식구조가 다른 인간인 것 같습니다."
서문수의 말에냉곡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실같이 가는 그의 눈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반짝 빛을 발했다. 냉곡은 가파른 턱을 쓸어 내렸다.
"참으로 뜻밖이야. 내 비록 무공은 모르나
색(色)에 빠지게 되면 무(武)의 진정한 경지에 도달하기 어렵다고 했거늘.
나 역시 간간이 혼란을 느낄 때가 있어."
서문수는 말했다.
"미랑(美郞)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 자의 방중술은.."
냉곡은 서문수의 말을 자르며 입을 열었다.
"훗.. 최고란 말이겠지."
"그렇습니다."
"여자를 다루는 기술이 좋다는 것은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야.
그건 그렇고 그 자의 출생에 대해서 조사를 해보았나?"
"예.""어떻던가?"
서문수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출생에 대해서는 무척 애매합니다.
천산(天山) 출생이라고 하는데 그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왕씨 형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 자는 분명 천산의 출신이고,
천애령이란 곳에 자리잡은 아르히타카족, 즉 푸른 번개족의 부족장으로서
천산 일대에서는 거의 신화적인 인물이라고 합니다.
푸른 번개족을 이끌고 천산 일대의 비적단의 총두령 역할에, 푸른 번개신 가이샤를 믿는 천산 일대
모든 인물들의 종교적인 교주로 그에 대한 평가는 실로 쉽게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거의 신(神)과 동일하다고 합니다.
아무튼 생각보다 천산에서는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냉곡은 고개를끄덕였다.
"그 나이에 대단하군..."
"그렇습니다. 또한 특이한 점은 그가 천산에서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중원으로 나온 적이 없다는 점입니다.
아주 어릴 적에 부족장이었던 소찰력이란 인물의 양자로 들어가
그가 죽은 후 부족장으로 올랐다고 합니다."
냉곡의 눈빛이미미하게 흔들렸다.
"아주 어릴 적에 소찰력의 양자로 들어갔다고?"
"그렇습니다."
냉곡은 다시 말을 끊고 노란 국화의 꽃잎 한 개를 떼어내 손바닥에 올려놓고는 후우 하고 불었다.
"더 이상은 없는가?"
"그 외 그 자에 대한 습관이나 취미 등은 서류로 꾸며 공자님의 집무실에 놓아두었습니다."
"음... 그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지."
"왕씨 형제들 외에 다른쪽의 조사는 조금 미온적이라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냉곡은 고개를끄덕였다.
"알았다. 조사는 그만 해라. 그 방면에서 왕씨 형제들의 능력은 가장 뛰어나다.
다른 자들이라 해도 그들이 알아낸 이상의 것을 알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냉곡의 가는 눈은 심유한 빛을 일렁였다.
(아주 어릴 적이야. 아홉 살 때만 아니라면 별다른 문제점은 없다.
냉씨란 성이 그리 희귀한 성(姓)도 아니고, 동명이인이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니까..)
냉곡은 자신의생각을 확신이라도 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십 이 년 전 그 겨울..살인적인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검상과 유림은 분명히 죽었다.
인간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도저히 살아날 수는 없다!)
이때 서문수가조심스럽게 물었다.
"공자님, 그 자의 무공을 시험해 봐야지요?"
냉곡은 고개를돌려 서문수를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자네는 때때로 너무 어리석은 질문을 해."
"예?"
"공연히 그 자의 성질을 건드릴 필요가 있나?
십이비천신마까지 당할 정도라면 우리측의 누구도 그 자의 적수가 아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서문수의 안색이 변했다.
"아, 알겠습니다."
"됐어.. 좋은 아침이야..."
냉곡은 더 이상 서문수에게 관심이 없는 듯 느릿하게 화원을 거닐며 국화향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서문수는 냉곡의 등을 향해 예를 취했다.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냉곡은 대답대신 다시 한 송이의 국화를 향해 허리를 구부렸다.
서문수가 사라져가는 발소리를 들으며 냉곡은 문득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취옥성의 후계자 정도라면 내가 이렇게 힘든 노력을 할 필요도 없지.."
문득 냉곡의 눈빛이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문제는 왕위(王位)다. 절대 그것은 포기할 수 없다
. 아무리 황제가 서자에게는 왕위를 내줄 생각이 없다 해도 홍무제가 전한 단서철권(丹書鐵拳)이라면
황제라도 왕위를 인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단서철권--!
"왕위만 얻게 되면 그 후에는.."
냉곡의 입가에흰선이 그어지면서 나직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창백한 얼굴에 떠오르는 그 웃음은 소름끼칠 정도로 건조하고 하얀 웃음이었다.
* * *
하나의 촛불만이 위태스럽게 흔들리는 방(房).
극도의 무심(無心)한 표정이 불빛에 반쯤 음영(陰影)이 진 얼굴로 냉검상은 칼을 닦고 있었다.
천산에서 내려온 이래 미인혈을 손질하는 것은 실로 처음이었다.
창 밖은 어둠의 시간.
노을이 질 무렵부터 자하산장의 미녀들도 마다하고 방으로 들어온 냉검상은
벌써 한 시간째 고요한 자세로 칼을 닦고 있었다.
소리없이 타오르는 촛불은 어둠을 밀어내고 냉검상의 주위로 타원형의 빛그물을 만들었고,
그 속에 갇힌 듯 미인혈을 손질하고 있는 냉검상의 모습은 마치 수도하는 고행자처럼
경건하면서도 신성함마저 느끼게 했다.
평소의 그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다.
깨끗하게 흑의장삼을 입은 모습은 화강암처럼 완강해 보였고,
장삼의 가슴 부위에 달려 있는 금빛 단추는 불빛에 반사되어 날카롭게 빛났다.
스슥...
기름종이로 미인혈을 손질하는 냉검상의 손길은 지극히 진중했다. 미인혈은 칼이다.
칼은 병기이고, 그러나 미인혈은 병기 이상의 그 어떤 의미가 있었다.
적어도 냉검상에게는..
지난 십여 년 간 냉검상과 함께 숨을 쉬어온 미인혈은 단 한 번도 냉검상을 실망시키지 않았고
, 언제나 요사하리만치 극렬한 광채를 뿜어내며 냉검상과 더불어 빛을 발해왔다.
미인혈은 바로냉검상의 정신(精神)이었다.
칼은 닦아나갈수록 미인혈에 붉은 선으로 그려져 있는 여인의 모습은 섬뜩하리만치 요사하게 빛났고,
요즘들어 미인혈은 더욱 더 차가운 살기(殺氣)를 갈무리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지났을까?
한동안 진중하게 칼을 손질하던 냉검상은 문득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 느긋한 동작으로 미인혈을 들어올렸다.
미인혈에 새겨진 여인은 갓 잡아올린 은어처럼 생동감 있게 파닥거리며 움직일 것만 같았다.
그 여인을 불빛에 투영시키면서 냉검상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올랐다.
흐리게 나타난 그 웃음은 점점 진하게 변하면서 음산하고 잔혹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입가에 맺혀진 웃음과는 다르게 냉검상의 두 눈은 암울한 묵청빛 바다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세 이복형제들...그들에게는 불행한 일이겠지만, 사랑하는 아우 유림아. 이 형은 결심했다.
한 순간의 충동이 아니다. 지난 열흘이란 시간 동안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냉검상은 미인혈의 칼면을 수평으로 누이면서 천천히 입술을 대고
미인의 나신을 애무하듯 훑어내리기 시작했다.
(유림아.. 이 형은 취옥성으로 간다!)
입술에서 느껴지는 차디찬 금속성의 감촉처럼 냉검상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웃음은
더욱 잔혹하게 변해 있었다.
계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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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봅니다.
감사합니다
즐독
감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드립니다
즐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