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 불교의 초석 『사성제』
프란시스 스토리 지음/재연스님 옮김
고요한소리
2564. 04. 24
‘고의 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 1
[滅聖諦 Dukkha Niroda Ariya Sacca]
부처님의 깨달음[大覺]은 세 단계로 이루어졌다. 이른 밤[初夜] 부처님께서는 이전의 존재 상태를 알 수 있는 지혜[宿命通]를 획득하셨는데 이러한 상기력想起力은 대단히 깊은 선정의 결실로 생겨난 것이었다. 다시 한밤중[中夜]에 그분은 존재들이 지은 바 업에 따라 한 존재 상태로부터 다른 존재 상태로 옮겨가는 방식에 관한 지혜[天眼通]를 얻으셨다. 그분이 고의 진리와, 업을 통해 작용하는 도덕적 인과율이라는 두 가지 진리를 분명히 파악하신 것이 바로 이 시점에서였다. 끝으로 밤의 마지막 부분에[後夜] 그분은 존재의 기저가 되는 원인들, 즉 연기과정에 관한 지혜를 확철하셨다. 그리고 곧 그분께서는 존재의 생기生起가 조건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그 조건들의 뿌리가 갈애와 무명이라는 것[集聖諦], 그리고 이 연기과정을 끝낼 수 있는 방법[道聖諦]에 대해서도 확연히 알게 되셨다.
그리고 동틀 무렵에 중생을 위한 자비심에서 마음을 연기에 집중하여 생성해 가는 순서[順觀]와 멸해 가는 순서[逆觀] 두 길로 이를 명상하다가[順逆觀] 해가 뜨면서 위없는 깨달음을 달성하셨다. 그러고서는 과거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님들이 하셨던 것과 같은 말씀, 승리의 말씀을 이렇게 발하셨다.
“헛되이 수없는 생을 윤회하며 헤매었구나.
이 집 짓는 자를 찾아서.
거듭 태어남은 실로 괴로운 일.
집 짓는 자여. 내 이제 너를 찾아내었다.
다시는 너 집을 지을 수 없으리.
너의 서까래는 모두 붕괴되었고 대들보는 무너져 내렸다.
내 마음은 조건에 매어 있지 않기에32) 이르렀다.
갈애는 소멸되었다!”
《법구경 주석서》, 《법구경》 게송 153~154
집은 몸이고, 짓는 자는 갈애, 서까래는 열정, 대들보는 무명이다.
“왜냐하면, 갈애[愛 Taṇhā]가 완전히 시들어 소멸됨으로써 존재에 대한 집착[取 Upādāna]이 소멸되고, 집착이 그치면 생성과정[有 Bhava]이 소멸되고, 생성과정이 소멸됨으로써 재생[生 Jāti]이 소멸되고, 재생이 소멸됨으로써 늙음[老]·죽음[死]·근심[愁]·비탄[悲]·고통[苦]·슬픔[憂]·절망[惱]이 소멸된다. 이렇게 해서 고의 무더기 전체의 소멸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느낌[受], 지각[想], 심적 형성작용[行], 의식[識]이 그치고 극복된다. 이것이 고의 그침이요, 병의 끝남이요, 늙음과 죽음의 극복이다.”
《상응부》 12 〈연상응〉 Ⅱ권 72쪽
고의 끝남이 열반Nibbāna이다. 산스크리트어로는 니르바나Nirvāna인데 원래 ‘불다’는 뜻을 가진 어근 vā에 부정접두사 nir를 붙여서 만들어진 어휘이다. 불교적 의미로는 열반은 생성 과정의 종식을 뜻하는 바 마치 연료 공급이 중단되거나 공기가 통하지 않게 되어 불이 한창 타다가 꺼지는 경우와 같다. 이 불이란 바로 탐욕·성냄·미망의 세 겹의 큰 불길인데, 연료가 떨어져서 더 이상 탈 수 없게 되면 생명을 약속하는 충동 역시 끝나 더 이상 재생이 있을 수 없게 된다. 이런 상태를 육체가 남아있는 열반[有餘依涅槃]이라 하는데 아라한이 그의 자연 수명의 나머지 기간 동안 경험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정신적 육체적 온들은 그대로 있지만 이 온들이 집착과는 더 이상 관계가 없는 상태의 열반이다. 그것은 절대적 평화·적정寂靜·완성이다.
여행을 끝내어 모든 근심에서 벗어난 그,
모든 슬픔의 원인에서 헤어난 그,
어느 모로나 완전히 해방되어
일체의 집착을 부숴버린 그에게
어떤 열뇌도 있을 수 없다.
……
대지와 진배없어 어떤 노여움도 품지 않고
마을 어귀의 솟대33)처럼 성품이 안정되고,
뻘 없는 깊은 못처럼 청정한 분,
그런 분에게 윤회의 헤맴이 더는 있을 수 없다.
마음이 고요하고
말도 행동도 고요하다.
올바른 무상지(無上智)로
완전히 해탈하여 평화로우신 그분께서는.
《법구경》 아라한품 90, 95, 96 게송
아라한이 그의 삶의 끝, 생명과정의 최종적인 그침에 이르면 ‘육체마저 사라진 열반[無餘依涅槃]’을 성취한다. 다시 말하면 절대적 무조건의 열반으로 거기에는 개체적 인격요인 같은 것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렇다고 그것이 존재의 무화無化는 아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의미에서는 그 어느 존재도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과정만 있었기 때문이다. 열반은 그 과정의 종결, 이전에 생명 연속 현상을 일으키던 집착의 온들[取蘊]의 소멸인 것이다. 그것은 고(苦)가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는 유일한 상태인 것이다.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은 선언하신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의 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이다. 그 갈애를 완전히 끝내고, 포기하고, 버리는 것이며, 그 갈애로부터 완벽한 헤어남이며, 그것으로부터 완벽한 초탈이다.”34)
여기 부처님의 첫 법문에 나오는 열반에 대한 근본적 기술에서 우리는 의미심장한 윤리적 어휘들로 표현된 심리학적 세계를 접하게 된다. 그 어휘들은 세상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감각적 지각을 구성하는 내용물들을 대하는 태도와 주로 관련된 것들이다. 그러면 열반계Nibbānadhātu, 다시 말해 그 자체의 특성 면에서 고려할 때 열반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그런 면에서, 다시 말해 궁극적인 면에서의 열반은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운 것Asaṅkhatadhātu’이라고 정의된다. 즉 그것은 변화라든가 조건지움에 좌우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일원적이다. 모든 현상적 사물들처럼 복합된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다. 그러나 열반에 대해 확정적 어투로 정확한 개념규정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생각이나 의사소통에서 쓰는 의미표시 용어들은 모두가 조건에 매여 있는 세계에 속하는 사물이나 개념들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것과 비교·대조 되지 않은, 그래서 다른 것과 관련되지 않은 개념을 구성할 수단이 없다. 우리들의 경험 내용은 모두 다 관계성의 복합체인 것이다. 생각은 끊임없이 서로 상반된 것 사이를 오간다. 명·암, 열·냉, 선·악, … 이 모두는 서로 정반대 내지 어떤 정도의 대비를 표시하는 상대적 가치들이며, 이들 중 어느 것도 그와 같은 상대성과 분리되어서는 실질적 의미를 띠지 못한다. 감각적 경험세계에서는 어느 것도 다른 것과 관련되지 않고서는 어떤 성질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이 감각세계를 제대로 이해하자면 이를 순전히 상대적 실재의 영역으로 간주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세부 성질은 두 개인이 전혀 다르다는 것에 주목해야 하지만 분명히 이 세계는 어느 한 특정 수준의 알아차림의 분상, 식識이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그 분상에서는 분명히 진짜로 실재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명심해야 할 것은 그 세계의 세부적 성질에 관해서는 어떠한 사람이든 단 두 사람 사이에서도 똑같지가 않다는 점이다. 그러나 있을 수 있는 또 다른 식識의 차원들에서는 이 세계는 필연적으로 비실재적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니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물리학자는 이 우주를 전자력電磁力의 관점에서 보며 수학자는 수학 공식으로 환치시킨다. 이때 이 두 사람은 세계를 보통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 그대로를 실상인 듯이 다루고 있는 데도 한편으로 그들이 전문적 작업과정에서 그려내고 있는 그림은 일반인들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른 어떤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감각적 기능이 보고해 바치는 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감각의 세계를 살아야 하면서 또 그 감각의 그림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지성이 그려내는 또 다른 세계, 이 둘을 동시에 살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감각을 통해 받아들이는 정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궁극적 의미에서는 그것을 바탕으로 그려낸 그림은 감각의 요술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우리가 보고 감촉하는 ‘고체’라는 대상물들이 실제로는 물질보다 오히려 공간으로 더 많이 이루어져 있다. 이 사실은 지금 알려진 것 중 가장 작은 원자인 수소원자의 구조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수소원자는 핵으로부터 전자궤도까지의 거리가, 크기로 비례해 보면 태양과 지구간 거리의 두 배, 즉 9천 6백만 마일이 되는 셈이다. 이것은 ‘고체’ 물질이 우리 태양계보다도 더 많은 공간을 담고 있다는 말과 같다. 따라서 우리가 감관을 통해 인식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아니라 그것의 상대적 모습, 즉 우리 자신의 특정 의식 양태에 상대적으로 대응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 눈에 띄는 물질세계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말이다. 우리의 의식識에서 그것은 사실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현상계의 객관적 실재로서 실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오히려 진실에서 더 동떨어진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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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역주] 조건에 매어 있지 않기에 : 빠알리 원문에 해당하는 visaṅkhāra는 주석서에서는 열반과 동의어로, 한역에서는 ‘이행離行’으로 옮겼고, 빠알리어사전(PTS)에서는 ‘divestment of all material things’로 풀이함. 저자는 주석서를 따르되 열반과 동의어로 쓰이는 ‘조건에 매이지 않은asaṅkhata'으로 해석했다.(이 책 103쪽, 111쪽 참조)
33) [역주] 솟대 : 빠알리 원문은 indakhīla. 제석천의 기둥이란 뜻으로 도시의 입구에 세워두는 표식주標式柱. 견고하고 안정된 부동의 지혜를 상징한다. 도시의 입구에 세워 안정과 평화를 지켜주는 상징으로 삼았음. 솟대는 한국 삼한시대의 소도에 세웠던 큰 나무를 의미하며 신의 하강계단 및 그 주처 그리고 신역神域의 표시였음. 서로 뜻은 다르지만 목적이 비슷하므로 무리하나마 솟대로 옮긴다.
34) 소마 테라가 영역英譯한 《초전법륜경》(Bodhi Leaves No. B. 1.)에서 인용.
宗眞 寫經 合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