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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미적 음률로 탄주되는 변주곡 : 서사와 단장 사이
삶―시간―세계란 두 대의 피아노 위에서 탄주되는 오묘한 불협화음이다. 슈베르트가 그렇고 차이코프스키가 그렇다. 만약에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 공간이 협화음으로 탄주된다면, 예술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술은 불협화음으로 휘어진 삶―시간―세계의 인간학적 음영 내부에 도사린 그 무엇인가를 미적 형식으로 치환시키는 지난한 작업이다. 한 음이 쇤베르크나 바르톡의 불길한 음계 위를 위태롭게 종주한다면, 다른 한 음은 비발디나 모차르트의 경쾌한 음표 위를 부드러운 터치로 날아다닌다. 두 음 사이의 거리에 미가 있고 예술이 있고 세계의 지난한 표정 또한 있다. 이를테면 인간학이란 압축과 전치 사이에서 파동치는 두 개의 음파로 수렴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예술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하나의 음파가 삶의 음영들이 기입된 인간학적 문양들을 하나하나 길어 올리는 저주파라면, 다른 음파는 삶―시간―세계를 넘어선 그 무엇인가를 예인하는 초음파이다. 따라서 모든 미적 형식들은 이 두 음파 사이를 가청주파수로 환원시키는 지점에서 현동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미가 형상화되는 지점이자 예술이 예술로 존재하는 所以然이다. 때론 지극히 현실적인 욕망으로 충실한 현실 공간의 부침현상을 첨예하게 그려내면서 때론 말해질 수 없는 말의 세계를 말로 언표하면서, 말―한계를 돌파하는 바로 그 지점에 예술이 존재한다.
따라서 모든 예술은 휨 작용이다. 아니 역으로 휨 작용이 없는 곳에 삶도 없고 예술도 없고 세계의 표정 또한 존재할 수 없다. 마치 현실이 휘어진 곳에 서사가 있고, 말이 휘어진 곳에 시말이 있듯이, 예술은 굴절면 위를 굽이치는 형식에의 운동이다. 나는 휜다, 고로 예술가다. 나는 예술가다, 고로 세계의 음영을 투시한다. 말하자면 미적 현실성은 두 개의 휨 작용이 만든 역동적인 운동인데, 그것은 바로 내용을 형식으로 휘어지게 만들거나 형식을 내용으로 새롭게 탄주하는 변주곡에 다름 아니다. 음이 포르테에서 갑자기 피아니시모로 넘어가기도 하고, 안단테 칸타빌레에서 프레스토로 급격히 변주되는 그곳이 세계의 서사적 흔적이 있고, 말―사태가 존재한다. 비록 서사와 단장 사이에 내파된 말의 문양 자체가 본질적으로 다르기는 하지만, 말이 언표할 수 있는 함수 값은 세계의 심연을 응시하는 존재의 문양이다.
1. 어느 가난한 예술가의 초상 혹은 자본의 이면
가난은 이 세상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에 대항하여 싸울 줄
알아야 한다.
-『체 게바라 평전』중, 장 코르미에
인간학이란 결핍의 운동이다. 예술은 결핍에서 시작해서 결핍으로 재귀하는 지난한 운동이다. 만약에 삶―시간―세계가 자족적이거나 완벽하게 구비된 그 무엇으로 표상된다면, 더 이상 인간에게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예술과 같은 그 무엇인가를 욕구하지 않게 된다. 미란 결핍에의 운동이다. 비록 모든 미적 욕구들이 진리와 선이 총체적으로 결합된 완전을 지향하지만, 그 완전은 항상 불완전으로 휘어져 새로운 미지의 형식을 추동하게 된다. 따라서 결핍 내부에 삶이 있고 예술이 있다. 인간에게 결핍은 항상 욕망으로 휘어져 미지의 세계에 당도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예술이고, 삶이다. 저 유명한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그렇고, 조르주 바따이유의 소모와 축적의 경제학적 지평이 그렇다. 그런데 이 수많은 교의적 테제에도 불구하고 인간학의 밑면을 지배하는 선험적 가정은 인간이 평등하지 않다는 점이다. 불평등은 생래적으로 주어졌을 뿐만 아니라, 해결이 불가능한 인간학의 심연이다. 왜냐하면 인간학의 앞뒷면에 욕망이라는 미정형의 실체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내부를 지배하는 욕망의 변증법적 운동은 타자성 위에서 현동하는데, 그것은 바로 나에 의한 너의 지배이거나 너의 힘에 의한 나의 굴복을 의미한다.
따라서 세계를 지배하는 궁극적인 기제는 힘이다. 자본도 힘이고, 지식도 힘이고, 미에 관한 욕망도 힘이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그렇고, 서로우의 『지식의 지배』가 그것을 예증하고 있다. 그런데 욕망이 현동하는 힘 내부에 언제나 모순이라는 아포리아가 작동하고 있다. 모든 것이 떠밀린다. 힘에서 떠밀리고 삶이라는 거대한 바다로부터 떠밀려 나락으로 추락하게 된다. 역시 모순이 요동친다. 아니 소설가 김다은의 『쥐식인』은 자본주의 현실 내부에 도사린 모순적 현실성을 죽음본능으로 체현하면서 예술이 처한 현사실적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자본적 현실 앞에 예술은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모든 미적 가치들이 자본의 구조에 종속된 냉혹한 21세기를 어떠한 미적 기호로 건널 때, 가장 잘 살아낸 예술가적인 삶인가. 우리 모두는 지식인이 아니라 “쥐식인”이 아닌가. 생에의 형식을 시간이라는 미정형의 실체로 종주하는 한, 우리는 언제나 비루한 기식자에 다름 아니다. 설령 그것이 새로운 미적 형식을 추동하는 예술가의 삶을 살아간다손 치더라도, 일고의 생산력을 겸비하지 못한 예술가의 삶은 바로 소모적인 “쥐식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김다은의 신작소설 『쥐식인』은 문제적인 작품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김다은의 그것은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후기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예술가의 초상을 가감 없이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성 내부에 존재하는 예술가의 삶이란 어떤 의미이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작가는 어느 무명 예술가의 삶이 처한 현실적 지평을 가난, 즉 “배고픔”이라는 지극히 본능적인 욕망의 체계로 서술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디지털 혁명을 이룩한 후기산업사회의 모순적 현실에 다름 아니다. 풍요로움을 구가하는 21세기에 기아에 허덕인다는 것은 타당한가. 아니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 한편에서는 사치와 향락이, 그 다른 편에서는 기아에 허덕이는 이 모순적 현실을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물론 다니 라페리에르가 자신의 소설 『슬픔이 춤춘다』에서 가난이나 배고픔에 관하여 소설을 쓴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지만, 따라서 가난이나 배고픔은 특발적인 서사성을 지향하는 소설이라는 장르 내부에 그리 새로운 모티프로 작용하지 않는 것이기는 하지만, 작가 김다은은 한 예술가의 비극적 죽음을 통해서 미적 현실성 내부를 투시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인류 역사를 통해서 가난의 문제가 해결이 된 적이 한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헤겔이 『역사철학』이나 『정신현상학』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학을 표상하는 내면세계가 자기의식의 자장 내부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따라서 삶―시간―세계를 대변하는 인간학적인 형식이 욕망으로 표상되는 한, 이 세계 공간은 불평등으로 휘어지게 된다. 저 피터지게 싸우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인간학적 현실성을 대변하는 한, 우리는 절대로 평화의 세계를 맞이할 수 없다. 따라서 천년왕국도 기만이고, 유토피아도 가상이다. 우리는 그저 모순의 현실을 욕망의 체계로 건너면서 모순이 요동치는 비극적이고 부조리한 현실과 맞닥트리게 된다. 굻어 죽게 된다.
덩샤오핑에게 가난은 국가적 죄악이고, 체 게바라에게 가난은 불평등이 자행되는 자본주의와 싸워 극복해야할 적이라면, 김다은의 그것은 궁핍한 예술가가 처한 미적 현실성이다. 그런데 김다은의 소설『쥐식인』이 의미 있는 것은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21세기의 척박한 현실을 예술가의 심혼으로 응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김다은의 그것이 한 시대의 정신성을 표상하는 예술가적 인간형을 “쥐식인”이라는 알레고리로 표현하기는 했지만, 따라서 작가의 그것이 예술계 전체가 처한 암담한 현실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여지기도 하지만, 기실 두개의 서사를 가로지르는 말의 운동은 문화산업 전반에 걸쳐 비판적 성찰을 감행하고 있다 하겠다.
‘예술가의 80%가 한 달에 백만 원 미만의 돈으로 살아간다.’는 이야기며, ‘보험을 들려고 했더니 시인은 폐병이나 우울증도 많고 위험직종이니 보험료가 휠씬 비싸서 가입도 할 수 없다’ 등. 어디선가 이미 들은 내용이었지. 마치 자신들의 이견처럼 말하고 있지만, 실상은 언론에 이미 나온 것을 입으로 옮겨놓은 것들뿐이었지. 예술가의 열악한 형편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들고 나오는 단골메뉴.
- 김다은 『쥐식인』에서
한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은 예술 일반이 처한 현주소이자, 더 이상 예술의 생산적 지평이 지극히 즉발적인 현실과 조응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예증하고 있다. 이제 문화산업 내부에서 예술은 투자의 대상이거나 잉여 자본의 먹잇감이다. 잉여가 더 큰 잉여를 낳고, 가난이 가난을 낳는다. 더 이상 예술은 정신적인 것을 표방하지 않는다. 자본이라는 마물을 통과한 미적 가치는 환원된 자본의 가치의 총량에 비례한다. 더 이상 예술은 미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미적 가치가 자본의 구조에 편입되어 있는 한, 예술성은 더 이상 문제의 중심에 위치해 있지 않다. 읽히지 않고 관객이 들지 않은 예술성은 그저 하나의 지루하거나 진부한 記號에 지나지 않다. 유일한 목적은 향유, 즉 소비의 嗜好이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말한 것처럼, 정신성을 표방했던 문화는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다. 그저 속물화된 키치나 가제트화된 현란한 이미지가 예술로 포장된다. 상품화가 가능하지 않은 예술은 더 이상 예술이 아니다. 유통의 구조에 편입되지 않는 예술은 더 이상 예술의 자격을 부여받을 수 없다.
그런데 김다은의 『쥐식인』은 소설가 지망생과 연극배우의 지난한 삶의 초상을 “배고픔”이라는 지극히 본능적인 차원에서 그려내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 예술계가 처한 현주소이다. 어느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 혹은 가난한 예술가의 초상. 우리는 무엇을 위해 예술계에 몸을 담고 있는가. 지식인으로 표상될 수 있는 예술가가 기식자와 같은 “쥐식인”으로 표상될 때, 예술은 이 세계에 존재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는가. 아니 아무런 생산력도 겸비하지 못한 예술가들을 “백수”로 취급하게 될 때, 진정 우리는 어떤 자존감을 지닌 채 새로운 예술을 정초해야 하는가. 참 쉽지 않은 문제다. 물론 『쥐식인』의 서사 구조가 어느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 내부에서 현동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문제는 “우울의 쓴맛”, 즉 “아! 배고파. 정말이지 배가 고파.”라는 당면한 현사실적 사태에 고스란히 응고되어 있다. 서사의 주체인 소설가 지망생 “나”도 굶주려 있고, 나의 친구이자 연극배우인 “성동”도 굶주려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예술의 저변에 굶주림이 깔려있다. 한 예술가의 죽음은 한 사회의 정신적 죽음이거나 속물화된 이 세계의 자화상이다. 자본의 구조가 점점 더 확대일로에 접어들어 유사 이래로 물질적 풍요로움을 구가하고 있지만, 정작 그 풍요로움의 반비례로 정신적인 가치는 고사위기에 놓여있다.
어쩌면 이러한 현상은 너무도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21세기의 지상과제들 모두는 자본적 가상이 통제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륜성을 표방했던 예술이나 인간학이 자본으로 시작해서 자본으로 재귀 순환하는 그 운동 내부에 물화되는 한, 우리는 물신적 자본에 종속된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자본 앞에 에미도 없고 애비도 없다. 21세기에 자본은 절대적 힘이다. 부익부빈익빈이 실현되고, 불평등이 자행된다. 정신적 가치를 표방하는 예술계 전반이 점점 고사되어가고 있다.
내가 왜 여태 소설가로 성공하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섬광처럼 깨닫게 된 거야. 너무나 간단하면서도 중요한 것을! 나에게 간절한 것. 인간에게 간절한 것을 여태 비켜나갔던 거야.
- 김다은『쥐식인』에서
소설가 김다은은 화자인 “나”를 통해서 프랑스의 권위 있는 메디치상 수상작가인 다니 라페리에르가 『슬픔이 춤춘다』에서 고민했던 기아문제를 소설의 역사가 “여태 비켜나갔던” 중차대한 문제라고 여기면서 “배고픔”의 “쓴맛”을 서사화하고 있다. 카프카의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리 잠자가 굶주려 죽기를 자초했던 것처럼, 죽음본능이 체현되지 않는 기아는 그리 극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술적이지도 않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굶주림을 소재로 하나의 서사를 추동했는가. 그리 자극적이지도 그렇다고 그렇게 극적인 것으로도 읽혀지지 않는 배고픔을 서사의 중심 모티브로 채택하게 되었는가. 모든 예술가에게 굶주림은 인생의 우울한 “쓴맛”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이 돈(도박과 알코올)을 벌기 위해서 씌어졌듯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여 위대한 소설을 탄생시키는 경우도 있다. 물론 도스토예프스키의 경우를 일반화하는 것은 무리가 따르기는 하겠지만, “작가의 허기증”, 즉 결핍은 예술이 태동할 수 있는 가능적 조건이라 하겠다.
다시 말해서 소설가 김다은에게 있어서 글쓰기란 “쓴맛”이 체화되는 가장 극적인 순간이자, 말이 존재하는 인간학적인 공간이다. 문학의 공간은 삶―시간―세계가 만든 “우울의 쓴맛”을 육화시킨 공간이자, “가난한 예술세계”를 견딜 수 있는 마성적인 공간이다. 발터 벤야민의 그것이 그렇고, 모리스 블랑쇼 또한 그러하다. 마치 김다은이 언표한 배고픔을 대리표상하는 “쓴맛”이 “영혼과 예술가의 생명력을 유지시켜줄 DNA”로 창조적으로 질적 전환이 된 것처럼, 문학의 공간은 지난한 고통 속에서 길어 올린 그 무엇인가를 말―공간에 안치시키는 행위라 하겠다. 말하자면 작가 김다은에게 있어서 굶주림으로 표상되는 배고픔이라는 본능은 일종의 예술적 엘랑비탈이 일어날 수 있는 “간절한 것”이다. 한 조각의 빵이 인간학적인 전회의 순간을 일으키듯이, 인생의 우울한 “쓴맛”은 삶이 되고 예술이 된다.
비록 『쥐식인』의 서사가 어느 전도유망했던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전개되기는 했지만, 따라서 사건의 중심이 한 가난한 예술가적 인간형의 죽음인 것처럼 보여지기도 하지만, 기실 서사의 중심이 되는 사건은 말이 육화될 수 있는 기아체험 내부에서 욕동하게 된다. 빌헬름 딜타이가 『문학과 체험』에서 말한 것처럼, 글쓰기의 공간은 체험이 육화된 공간이다. 마치 화자인 “나”가 굶주림이라는 고립의 공간 속에서 홀로 자기와의 싸움을 벌이는 것처럼, 소설의 서사적 전개는 “문”의 이쪽과 저쪽 사이에서 벌어지는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나는 결국 문을 열지 않았고, 가족 중의 누구도 내 방문을 열지 않았지. 이번 싸움도 무승부야. 문을 사이에 두고, 밖에는 식탁과 가족과 세상이 대치하고 있고, 안에는 배고픔과 나홀로와 소설이 대치한 채 말이야.
- 김다은 『쥐식인』에서
문학의 공간은 대치의 공간이다. 문학의 공간은 너와 나의 분열이 일어나거나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다. 특히 소설 『쥐식인』은 치열하게 삶을 영위하는 세계 공간과 문학의 공간을 대비시키면서 진정한 예술가가 무엇인지를 성찰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문학의 공간 전체가 그리 안온하지 않다는 말과 같다. 문을 경계로 두개의 인간학적 문양이 대치하고 있다. 문의 저쪽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시간―세계의 다양한 문양들이 공존하는 공간이라면 문의 안쪽은 고독한 문학의 공간, 즉 “영양실조와 아사의 감정” 사로잡힌 작가의 존재론적인 공간이다. 마치 “아사 과정의 어두운 통로를 관통하고 나면 눈부시게 빛이 가득한” 새로운 소설의 공간이 현시되듯이, 화자인 나에게 문의 안쪽은 무의식의 심연에 자리한 미적 공간이자 새로운 서사가 현동하는 미지의 공간이다.
나는 굶는다, 고로 소설가다. 나는 배고프다, 고로 예술가다. 어쩌면 소설가 김다은이 『쥐식인』에서 언표한 서사는 예술가이면 누구나 직면하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를 총체적으로 건드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당면한 실존은 본질에 앞서기 때문이다. 비록 예술이 삶―시간―세계를 정신적 가치로 승화시키는 숭고한 성과물이기는 하지만, 한 조각의 빵이, 일용할 양식이 삶을 만들고 생을 지속시킨다. 이러한 현실적 문제에 직면한 화자인 나는 양가감정에 휩싸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문의 안과 밖의 정체이다. 따라서 문의 안쪽에 위치한 나는 스스로를 성찰하는 자이자, “쥐구멍”에 빠진 무기력한 기식자이다. 설령 그것이 새로운 문학의 공간을 정초하는 행위로 휘어져 있기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문의 이쪽과 저쪽은 전혀 다른 이질적인 공간이다. 삶과 꿈의 불일치 혹은 인간학적인 고뇌. 바로 이 지점이 소설 『쥐식인』이 위치하는 자리이자, 예술가라는 누구나 겪게 되는 존재론적 함정이다. 어쩌면 자본의 嗜好가 지배하는 21세기를 문학의 記號로 건넌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후기산업사회를 지배하는 문화적 표징 전체가 자본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본 앞에 우리 모두는 너나할 것 없이 비루하고 저열한 “쥐식인”이다. 우리는 점점 자본의 기식자가 되어간다. 정신적 표상이었던 문화도 죽고 예술가 또한 죽는다. 다만 굶어 죽어갈 뿐이다.
2. 단장 혹은 시간 속에 기입된 영혼의 흔적
시말엔 한계가 없다. 말이 지시의 한계에 부딪혀 말―함수 전체를 미궁에 이르게 하는 반면, 시말은 언제나 말―관계를 새롭게 정초하여 말―자유를 실현시킨다. 시가 위대한 이유는 그것이 지시로부터 무한히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금번 상재한 반영호 시인의 『허공의 집』은 시말이 가진 활소한 상상적 지평을 최대한 살리면서 시의 형식 내부에 말을 안치시키고 있다. 이를테면 반영호 시인의 그것은 시조의 종장만을 가지고 시말화를 시도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제까지 이룩된 시형식의 파괴적인 국면이거나 극도로 절약된 말의 진경이다. 비록 시말의 존재론적 국면이 압축이나 전치를 통해서 세계의 표정을 간접적으로 언표하기는 하지만, 반영호의 그것은 자서에서 말한 것처럼 “언어와 침묵을 공존”시키는 시말의 신기원이다. 따라서 시인에게 말은 고귀한 “진주”를 캐는 거대한 시말의 저장고나 진배없다. 때론 “순결을 범”(「첫눈」일부)했던 “사랑의 열병”(「산」일부)을 몽상하면서, 때론 “꽃잎 지는 슬픔”(「설화雪花」일부)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하면서, 시말은 “진실한 사랑”(「우물」일부)으로 휘어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반영호 시인이 지향하는 시말의 요체이자 『허공의 집』의 정체이라 하겠다.
생명은 멈추었어도
영혼은 꽃 피우지 「억새꽃」전문
순수한 하얀 마음이
세상을 평정했네 「첫눈」전문
파리는 부처 이마에 서슴없이 앉는다 「죄짓지 않은 자라면」전문
시인에게 언어란 일종의 무덤이다. 말과 세계 사이에서 고민하는 자가 바로 시인의 존재론적 위치이다. 말의 연금술사 혹은 말에 저당 잡힌 시인의 운명. 우리는 어떤 말―문양을 견지할 때가 가장 잘 살아낸 시인의 운명인가. 사실 이 문제는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닌데, 그것은 바로 시말의 존재적 위치가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시말은 본성상 가변태이다. 아니 시말이 노마드 식으로 유동적이지 않다면, 시를 쓸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시란 시대의 정신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영혼의 기호이기 때문이다. 문명적 삶이 도구적 이성에 길들여져 점점 편리함을 추구할 때, 시란, 시말이란 혼탁한 인간의 심혼에 다가가 영혼을 정화시키기를 요구한다. 분명 시말은 일종의 칸트적인 의미의 정언명령과 같은 그 무엇으로 휘어지지 않고서는 시말의 임무를 다했다고 할 수 없다. 삶―시간―세계가 점점 물질적 이념에 경도되어 갈 때, 혹은 인간학 전체가 가상적 이미지에 현혹되어 실재를 망각하게 될 때, 인륜적 좌표계로 작용하는 바로 그 지점에 시말이 위치해 있다. 따라서 시말은 존재의 원상을 되비추는 실재의 언어이다.
그런 의미로 볼 때, 금번 상재한 반영호 시인의 『허공의 집』은 존재의 언어로 응결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시인의 사살이 전체는 “맑은 눈망울”(「아침이슬」일부)에 비추어진 “웃음”(「들꽃」일부)이나 “빛”(「별빛」일부)과 같은 투명한 전언을 통해서 “상처 난 눈물자국”(「옹이」일부)을 위무하는 따스한 감성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하늘빛을 닮은 맘”(「호수」일부) 혹은 “노을로 진 그리움”(「첫사랑」일부). 반영호 시인의 시말길은 맑고 투명하다. 이를테면 시인의 시말은 직관적인데, 그것은 말―사태의 재현적 국면이 아니라, 대상의 본질직관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반영호의 그것은 현란한 말의 수사학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발하는 의미의 기호를 담백하게 표백하고 있다. 때론 아포리즘의 세계를 배회하면서 때론 사물의 배후에 작동하는 본질에 관하여 회의하면서, 시인은 이 세계 전체를 순백의 전언으로 물들이고 있다.
시인에게 시말이 은거해있는 삶―시간―세계란 그 자체로 영혼의 표백작용이 이루어지는 순백의 공간이다. 비록 시간의 선분 내부에 존재하는 생명 전체가 소멸로 정지하지만, 따라서 모든 인간학적 징후가 “후회”(「사랑, 그 뒤」일부)나 “침묵”(「강물」일부)으로 수렴할 때조차, 반영호의 시살이 전체는 “첫눈”과 같은 “하얀 마음”으로 온 세상을 부드럽게 감싸 안아 삶에 지친 영혼들을 위무하고 있다. 따스하고 안온하다. 어쩌면 반영호의 직관적 성찰의 태도가 옳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미지의 아포리아로 휘어진 미망의 덫으로부터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학적인 아포리아도 불구하고 반영호 시인의 시적 태도는 세계 공간 전체를 부정성으로 길항시키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시선으로 위무하고 있다. 너무도 바삐 돌아가는 이 세계를 여유롭게 좌망하면서, 사물의 현상 배후에 작용하는 인간학적인 본질을 시말 속에 안치시키고 있다.
고단한 하루의 해가 피 토하며 기우네 「황혼」전문
잣대도 필요 없단다
처음 없이 가는 세월 「인생이란」전문
초조한 늦가을 달이 밤길 더욱 재촉하지 「늙으막」전문
온다는 기별 없어도 어김없이 오더군 「순리」전문
삶 내부에 “핏물 진통”(「파도」일부) 그득한 고통도 있고, “샛서방”(「그림자」일부)을 그리워하는 “내밀한 추파”(「개화」일부)도 있다. 설령 인간학이란 것이 영혼의 기표작용으로 판명이 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지만,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시간의 주름 내부에 고스란히 기입되어 있다. 세계의 주체도 시간이고, 영혼의 주체 또한 시간이다. 시간이 항상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종국에는 시간 스스로가 인간학적인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인간학 내부에 항상 시간이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반영호 시인의 『허공의 집』은 영토화가 불가능한 시간의 단편들을 영혼과 육체의 작용 내부에 응고시켜 생을 성찰하고 있다. 시간 앞에 우리는 늘 타자다. 아니 탈영토화된 시간의 선부 내부를 질주하는 생에의 형식은 늘 들뢰즈의 운명적 삶으로 휘어지거나 알튀세르의 비극적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문제는 시간이 만든 늙음이다. 문제는 “인생”이 “황혼”으로 굽어져 늙음에 당하여 모든 생이 휘어진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운명에 순응하여야만 한다. 그게 바로 생이고 인간에게 허여된 시간의 형식이다. 어쩌면 반영호 시인이 단장 내부에 응고시켰던 시간에 관한 긍정적 태도, 즉 “순리”가 옳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학적 차이도 시간 내부에서 지워지고 숙명적 반복도 궁극에는 시간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영호 시인이 단장 내부에 언표한 시말운동은 “허공”에 지은 허망한 “집”이 아니라, 미망으로 휘어진 시간의 본질적 국면을 영혼의 형식으로 영토화시킨 숭고한 작업이라 하겠다. 마치 “사랑을 앓아본 이는 다/철학자”(「사랑과 철학」일부)가 되는 것처럼, 시인의 시살이 전체는 사색적이고 자기 성찰적이다. 아니 반영호 시인이 단장의 형식으로 시말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시인은 자이나교의 수행자이거나 철학자가 되어야 마땅하다. “나비들의 운명”(「가을 은행나무」일부)과 “창문 너머 여인”(「담쟁이덩굴」일부)의 애환이나 슬픔을 유미적으로 승화시키면서, 시인은 시말 전체를 인륜성으로 고양시키고 있다. 시인에게 말은 진리를 대변하는 하나의 도구다. 다시 말해서 시인이 『허공의 집』에 채워 넣은 것은 말이 조어해내는 다양한 말―문양들의 현란한 문채가 아니라, 인간이 살아낸 다양한 삶의 체취이다. 따라서 시인에게 언어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아니 시인에게 말은 삶―시간―세계를 대변하는 하나의 도구인 동시에 인간학적 사태에 기입된 삶의 흔적들을 진리의 문양으로 치환시킨 것이라 하겠다.
언어의 틈바구니를
오고 가는 바람아 「시를 쓰다가」전문
꽁지에 불이 붙었다
독 묻은 혀
떠난 말 「말」전문
시인에게 단장은 말의 작용이 표출하는 미적 효과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단장은 잠언적이고 금언적이다 못해 교훈적이기까지하다. 말이 말을 꼬드겨 말의 특발적인 문채를 형상화하는 것을 지향하지 않을 때, 말―사태는 인륜성으로 휘어지게 된다. 사실 이 대목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단장시조가 가진 장점과 단점을 고스란히 노정하고 있는데, 그것은 15자 안팎의 글자가 만들어낼 수 있는 순열 조합의 경우의 수와 적확하게 대응된다. 말이 극도로 절약되고 함축적이다. 물론 언어의 경제학적 지평으로 볼 때, 단장은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 반면에 말이 언표할 수 있는 다양성을 제약하는 단점 또한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반영호 시인의 시말운동은 한국문학사를 통해서 가장 독특한 시형식을 취하고 있다 점에서 상찬받아야 마땅하다. 3ㆍ5ㆍ4ㆍ3이라는 시조의 종장을 다양한 행 배치로 변주하면서 시말 내부에 인간에게 허여된 시간의 문양들을 인간학적 음영으로 치환시키고 있다.
시인에게 시말은 하나의 신념이나 이념이다. 아니 금번 상재한 『허공의 집』 전체는 아포리즘에서 시작해서 아포리즘이 종료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말의 예인이 아니라, 인생의 예인이다. 때론 말 내부에 잔존해 있는 인간학적인 “바람”을 섬세하기 읽어내면서 때론 말이 곧 “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가 가면서, 시인은 말―함수 전체를 철학적이고 담론적인 사유로 승화시키고 있다. 『허공의 집』은 언어의 집이 아니라 존재의 집이다. 극도로 축약된 “언어의 틈바구니” 속에 시간이 만들어낸 삶의 흔적들 저며 넣으면서 존재론적 깨달음의 영역에 당도하고 있다.
굽거나
고사목 없는
산과 숲은 없더라 「완벽 혹은 조화」전문
바람이 산을 흔들랴 바위를 움직이랴 「항심恒心」전문
마음의 바닥에 고인 진실한 사랑 깊이 「우물」전문
허공의 집은 조화의 집이다. 거기엔 삶도 있고 죽음도 있다. 거기엔 생성 옆에 소멸이 있고, 소멸의 뒤쪽에 새로운 신생이 꿈틀거리고 있다. 허공의 집엔 없는 것이 없다. 자족적이고 자기완결적인 공간이 바로 허공이고 집이다. 마치 시 「완벽 혹은 조화」에서 말한 것처럼, 삶―시간―세계란 그 자체로 차이와 반복의 절묘한 조합의 운동이 동일성으로 끊임없이 재귀한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모든 것은 “완벽”하다. “고사목”도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고, 바람의 전언도 조화롭다. 세상에 조화 아닌 것이 없고, 또 그 자체로 완벽하지 않은 것 또한 없다. 휨도 완벽이고, “없더라”도 조화다. 어쩌면 반영호 시인이 『허공의 집』 내부에 채워 넣은 것은 노자의 무위사상과 같은 경지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반영호의 그것은 공간 전체를 허허로운 여백으로 남겨 놓으면서 모든 것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상생의 의식을 시말 공간 내부에 안치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恒常心 혹은 不動心. 허공의 집은 능산의 공간이자 소산자가 공존하고는 오묘한 공간이다. 빈 것은 채워지고 오밀조밀하게 촘촘한 것은 성기게 된다. 허공의 집은 동시다발적으로 개연적 사태들이 일어나는 공간이기도 한데, 모든 것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순리에 따르는 상생의 공간이다. ‘逆天者는 亡하고 順天紫는 興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반영호의 시말운동은 맹자의 그것처럼, 역천이 아니라 순천의 태도를 일관적으로 그려내면서 삶―시간―세계가 만들어내는 문양들을 담백하고 정갈하게 문면에 안치시키고 있다. 때론 “진실한 사랑”의 “깊이”를 헤아리면서 때론 마음이 물굽이 치는 존재의 심연을 통찰하면서 『허공의 집』 전체를 순백의 공간으로 고양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궁이 몰아닥친다. 다시 “왜”라는 물음이 인간학적 심연에서 고동치고 있다. “왜 하필” “그때”, “그 자리”에 존재하는가? 우리는 다시 푸코가 『지식고고학』 서문에서 고민했던 인간학적인 아포리아 빠진 채 생에의 형식 전체를 미궁에 빠트리게 된다. 설령 반영호 시인의 그것이 순백의 전언을 아포리즘적 사유로 고양시켰을 때조차, 우리는 다시 “왜” 앞에 절망하고 그 “왜”라는 존재론적인 물음을 통해서 새로운 생을 욕동시키게 된다. 그게 생이고 삶을 살아가는 이유이다.
왜 하필 그때였을까
왜 그 자리였을까 「시공時空」전문
**김석준: 충남 아산. 1999년 《시와시학》(시), 2001년 《시안》(평론)
저서: 시집 『기침소리』.
평론집 『비평의 예술적 지평』『현대성과 시』『감히 시인에게 말을 걸다』『무덤 속의 시말』
『박찬일 시세계의 본질-상징에의 저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