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시 적성면에 소재하며 양주시 남면, 연천군 전곡읍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높이는 해발 675미터로 조선시대에는 북악(北嶽), 송악(松嶽), 관악(冠嶽), 심악(深嶽)과 더불어 경기 5악의 하나로 불렸다. 일명 '감박산'으로 불려 지기도 했다. '三國史記' 잡지 제사조에는 소사(小祀)의 하나로 '감악(甘岳)'이라 쓰여 있는데 '高麗史' 나 '東國與地勝覽'에는 '감악(紺岳, 紺嶽)'으로 표기되어 있다. 감악산은 신라 때부터 명산이며 무속의 신산(神山)의 하나로 '太祖實錄'에 의하면 조선시대 궁중에서 이 산에 춘추로 별기은(別祈恩)을 지냈다고 한다. 산정에는 삼국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비(古碑)가 우뚝 세워져 있는데 지난 1986년 파주시 향토유적 제8호 '감악산비'로 지정됐다. 이 고비는 기단부, 비신, 개석을 갖춘 화강암 석비로 높이 170cm, 너비 70-79cm, 두께 15-19cm의 규모이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감악산 고비(古碑) 삼국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감악산 정상의 고비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간직한 신비스러움을 간직한 비이다. 이 비에는 전혀 글자가 확인되지 않고 있어 '몰자비(沒字碑)'라고 부르기도 하며 속전 기록에 '설인귀비' '빗돌대왕비'등으로 구전되어 부르고 있으며 최근 '진흥왕순수비' '진평왕비'일 가능성이 제기 되기도 하였으나 지금까지 이 비에 대한 실체가 명확히 밝혀진바 없으며 속전에 의한 기록만이 존재 할 뿐이다. 또한 일화에 이 비가 원래 양주군 남면 황방리에 세워져 있었으나 연월일을 알 수 없는 시기에 동리의 소들이 감악산 산정에 옮겨 놓았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기도 하다. ※감악산비 관련 문헌 기록들 송진사와 내가 감악을 유람할 때 저녁에 견불사에서 묶고 새벽에 깎아지른 듯한 정상에 올라 그늘진 벼랑에서 神井의 물을 길어 먹었다. 그 정상에 있는 감악사의 神壇 높이가 3장이었다. 그 단 위에 山碑가 있는데 아주 오래되어 글자가 마멸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설인귀 사당이 있는데 혹 王神祠라고도 하는 淫祠이다. 이 귀신은 능히 요사한 일을 일으켜 화복을 내리며 사람들에게 얻어먹고 산다. (<眉受記言>27, 산천감악산기) 감악산 고을 동쪽 25리에 있다. 허목의 '遊山錄'에 보면 "그 정상에 있는 감악산 석단은 높이가 3장 이었다. 그 위에 산비가 있는데 매우 오래되어 글자가 마멸되어 있었다. 그 곁에 설인귀 사당이 있으며 왕신사라고도 하는데 음사이다." 라 하였다.(<東國與地志>2,적성 산천조) 감악은 圻關의 경계에 있으며 서쪽으로 칠중성까지 20리의 거리에 있다. 바위로 된 절벽이 칼로 자른 듯 가파르게 높이 솟아 있고 소나무와 잣나무가 많다. 평지에서 산정까지 2,300장이나 되고 그 상봉에 감악사란 절이 있다. 절 안의 석단에는 산비가 있고 그 곁에 설인귀 사당이 있는데 음사이다. 그 곳 석굴에는 노자 석상이 있다.(<地行錄>지리부록, 감악) 감악산단은 신라때 산천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명산으로 小祀에 실려 있다. 고려조와 조선조에도 그대로 따랐다. 석단은 높이가 3장이다. 그 위에 고비가 있으며 곁에 설인귀 사당이 있다. (<大東地志>3,적성 단유조) 감악산묘 부근에 있다. 전하기를 설인귀 사적비라 하나 세월이 오래되어 글자가 없어졌으므로 고증 할 수 없다. (<積城縣邑誌> 고적조) 위 기록들을 보면 감악산비와 인접한 곳에 설인귀 사당이 있었다는 사실은 언급되어 있으나 감악산비와 양자간의 관련성에 대한 언급은 없다. 단지 설인귀 사당을 음사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설인귀비'란 명칭은 19세기 이후 비와 설인귀사당이 인접해 있고 '적성현읍지'에 '설인귀사적비'란 명칭과 '몰자비'란 명칭이 나타나면서 회자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17세기에 쓰여진 허목의 '감악산기'에 의하면 감악산 정상에 석비가 있다 하였으므로 동리의 소들이 이 고비를 산정으로 옮겨 놓았다는 조선말의 일화 역시 잘못된 것이다. 또 '빗돌대왕비'란 구전 명칭은 '비석대왕비'를 뜻하는 것으로 비석자체가 현지 주민의 신앙의 대상이 된 까닭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진흥왕순수비'설은 1982년 동국대 학술조사단에 의해 제기되었는데 그 외형과 규모가 북한산의 진흥왕순수비와 유사하다는 점, 적성지역이 삼국시대 전략적요충지로 특히 진흥왕대에 영토확장 정책에 따라 세력이 미쳤던 곳이라는 점등을 들어 제5의 진흥왕순수비일 가능성을 제기 하였다. 또 1992년 역사학자 이도학은 '양주군지'에서 이 비가 '진평왕비'일 가능성을 제기하였는데 즉, 603년(진평왕25)에 진평왕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북한산성을 공격한 고려군을 격퇴하였는데 이는 진평왕의 재위기간 53년중 유일한 친정(親征)이었고 또 승전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그것을 기념할 만한 비석이 세워졌을 가능성이 매우 크며 그 비로 감악산 고비가 가능성이 있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감악산 고비는 오늘날까지 명확한 실체를 확인 할 수 있는 증거가 발견되지 못한 채 신비의 베일 속에 가려져 있다. 감악산은 신산(神山)?
감악산은 무속신앙에서 매우 중요시 돼 온 신산이다. 기록에 보면 감악산은 신라때부터 명산이며 신산(神山)의 하나로 '태조실록'에 보면 조선시대 궁궐에서 이 산에 춘추로 향과 축을 내려 제사를 지냈다고 되어 있다. 중부지방 무속의 열두거리굿 가운데 산마누라거리 무가(巫歌)에서 '감박산 천총대왕'이라는 산신 이름이 나오고 문헌에는 당나라 장군 설인귀(薛仁貴)가 죽어서 산신이 되어 감악산 정상에 설인귀 사당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감악산에는 예로부터 감악사(紺岳祠)를 비롯하여 운계사(雲溪寺), 신암사(神巖寺), 봉암사(鳳巖寺)등의 당과 절이 있었는바 중부지방의 중요한 신앙처의 구실을 해 왔다. 특히 주변의 양주, 포천, 고양, 적성, 파주, 교하, 연천지방에서는 이 산을 신산으로 여겨 신앙하는데 봄, 가을로 무당에게 의뢰하여 이 산의 산신을 맞아 굿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가르쳐 '산을 쓴다'고 표현 한다. 산을 쓰면 자식이 없는 사람은 자식을 낳을 수 있고 또 자식이 있는 경우에는 무명장수 한다고 믿었다. 굿을 할 때 산신을 맞는 제차(祭次)는 산정에서 하지만 자식의 무명장수를 비는 제석(帝釋)거리는 산정에서 약 30미터 아래의 우물이 있는 우물당에서 한다. 그래서 우물 근처에는 공양밥을 지은 흔적과 명태 등이 발견된다. 그렇다면 감악산이 신산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여러 자료에서 확인되고 있듯이 '설인귀'라는 인물을 감악산의 산신으로 삼게 되면서부터 감악산은 설인귀 신을 모시는 신산으로 전해져 내려온 듯하다. 설인귀 인물은 한국 무(巫)의 신령중 대표적으로 받들어지는 장군신인데 원래 중국 강주(絳州) 용문(龍門)에서 태어난 인물로 당나라 고종 때의 장군이었다. 그는 고구려가 망한 뒤 평양에 설치된 안동도호부의 도호로 부임하였다가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중국에서 죽은 인물이다. 이러한 중국 장군이 어떻게 한국 무의 신령으로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다만 '東國與地勝覽'의 적성현 사묘조에에 이르기를 "감악사는 민간에서 전하는바 신라가 당나라의 설인귀를 그 곳 산신으로 삼았다.(紺岳祠諺傳新羅以唐薛仁貴山神)"라는 기록이 보인다. 산신은 그 지역의 평안을 지켜주는 기능을 가진 것으로 믿어지는데 설인귀의 위용이 높이 숭배되어 감악사의 산신이 된 듯하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한양경계의 명산대천에 작위를 내리고 봄, 가을로 향과 축을 내려 그 곳 신령들을 제사지냈는데 그 중 감악산 설인귀 사당인 감악사와 개성 덕물산 최영 사당은 특히 영험이 크다 하여 한말에 이르기까지 궁에서 사람을 보내 기도를 올렸으며 무당의 치성과 굿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신앙적 요소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현재에도 감악산 주변에는 무속인 들이 대거 집거하여 무속행위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설인귀 인물은 분명 당태종을 도와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하는 싸움에서 큰 공을 세운 장수로 우리민족의 역사적 정서와는 맞지 않는 부분임에도 당의 집요하고 치밀한 우리민족에 대한 분열술책과 허위선전으로 설인귀가 마치 고구려 유민출신의 당나라 장수라고 선점한 점과 조선후기 설인귀의 무용담을 실은 중국소설이 번역되어 우리나라에 쏟아져 들어옴으로 해서 마치 설인귀가 우리민족 출신의 영웅처럼 동일시했던 정서가 잔존해 온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이러한 왜곡된 정서로 인해 옛사람들은 설인귀에 대한 비뚤어진 자긍심을 갖게 되었고 감악산의 산신으로 설인귀를 모셔 국가적인 제사까지 지내 온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러한 영향은 감악사 인근의 감악산 고비의 이름까지 '설인귀비'로 속전한다는 기록을 남겼으며 지금까지도 설인귀비라는 명칭이 항간에서 불러지고 있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