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김억은 장차 출판할 이 『오뇌의 무도』가
자기 삶의 가장 뜻있는 산물이리라 여겼지만,
한국문학의 역사에서도 그러할 줄은 짐작조차 못했을 것이다.”
최초의 시집이자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
100년 전, 그러니까 1921년 1월 25일, 김억은 원고 80여 편을 모아 시집을 출판하겠노라고, 그것이 자기 삶의 가장 뜻있는 산물이라고 유봉영에게 편지 한 장을 부친다. 그 후 한 달쯤 지난 비가 올 듯 흐린 2월 28일에는 시집의 출판이 가까웠다고, 인쇄소에서 교정을 보고 있다고 유봉영에게 급히 엽서 한 장을, 또 며칠 후인 3월 15일에는 교정을 마치고 인쇄할 것이라고 편지 한 장을 다시 부친다. 김억이 이토록 출판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 마음을 쏟고 있던 시집이란 1921년 3월 20일 광익서관에서 출판된 프랑스 시 64편, 영미 시 16편 등 모두 85편의 외국시를 수록한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였다.
이 『오뇌의 무도』는 김억에게든 당시 문학계에서든 단순한 번역시집이 아니었다. 이 시집에 서문을 쓴 이 중 한 사람인 변영로의 말대로 이 시집은 단지 김억의 첫 시집만이 아니라 근대기 조선의 첫 시집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문의 또 다른 필자인 염상섭은 근대 유럽인의 정서를 담은 이 시집이 폐허 같은 조선에 생명을 불어넣기를 바랐다. 이들의 환영이란 『오뇌의 무도』가 “프랑스풍의 아름다운 장정”임을 강조한 광익서관 광고 문안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유럽의 근대문학이 드디어 조선에서도 소개되었다는 감격에서 비롯했을 터이다. 또 이들의 바람이란 『동아일보』의 첫 서평 기사(1921.3.25)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오뇌의 무도』에 실린 프랑스를 비롯한 서양의 시를 당시 조선의 근대시 창작의 지침으로 삼고자 했던 욕망에서 비롯했을 터이다.
신시의 전범으로서 프랑스와 유럽의 현대시
사실 김억도 그런 바람, 욕망에서 이 『오뇌의 무도』를 출판하게 되었다. 일찍이 김억이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대학에 유학하던 시절(1914~1916), 그로 하여금 시에 눈뜨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 감격으로 신경쇠약에 걸리게 했던 것은 프랑스 시인 베를렌과 보들레르의 시였고, 그래서 이 두 시인을 소개하는 논설인 「요구와 회한」(1916)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후 1918년 김억은 『태서문예신보』 필진으로 참여하면서 베를렌의 「작시법」을 비롯한 서양 현대시 번역을 발표하는 한편 프랑스 현대시를 소개하는 논설 「프랑스 시단」, 또 장차 조선에서 창작해야 할 신시의 요건을 담은 논설 「시형의 음률과 호흡」을 연이어 발표하기도 했다.
(위) 1921년 3월 26일 자 동아일보 1면에 실린 『오뇌의 무도』 광고. / (아래) 김억의 첫 창작시집 『해파리의 노래』(1923).
그러나 이 정도로는 유럽과 멀리 떨어진 조선에 프랑스의 상징주의를 위시한 서양 현대시의 요체를 충분히 소개하기는 어려웠을 터이다. 그 가운데 『창조』와 『폐허』 등의 동인지들을 중심으로 일본의 상징주의, 구어 자유시 유행을 참조하여 조선만의 신시를 창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갔다. 김억으로서는 그러한 분위기가 답답했던 듯하다. 김억은 조선 신시는 보들레르와 베를렌은 물론 그들의 계보를 잇는 프랑스의 신상징주의 미학을 중심으로 한 유럽 현대시를 전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스핑크스의 고뇌」, 1920). 그래서 1920년 전후부터 김억은 후일 『오뇌의 무도』에 실릴 프랑스를 위시한 유럽의 현대시들을 홀로 번역했다.
창작적 무드의 번역, 사전과의 씨름
이 번역의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정작 김억은 프랑스 원시는 물론 그나마 가지고 있던 영국에서 출판된 베를렌, 보들레르의 영역 시집들마저도 수월하게 옮길 역량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억은 호리구치 다이가쿠의 『어제의 꽃(昨日の花)』(1918) 등 일본에서 출판된 프랑스와 유럽의 번역시집들을 저본으로 삼아 중역하고, 또 『오뇌의 무도』라는 번역시집의 형식, 체제의 모델로 삼았다.
그렇다고 해서 김억은 일본의 번역시를 그대로 조선어로 옮기지는 않았다. 김억은 일본어 번역시의 구문을 일일이 해체하고 다시 조합하기도 하고, 일본에서 출판된 조선어 사전, 영어 사전을 뒤져가며 낯선 일본어 어휘들을 자신의 조선어 감각에 맞게 고쳐놓기도 했다. 조선어로 도저히 옮길 수 없는 일본어 표현들은 아예 새로운 어휘들을 만들어 대신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억은 이 독특한 중역을 통해 자기만의 문체와 어법을 고안해냈다. 김억은 『오뇌의 무도』 서문에서 “창작적 무드”의 번역, “사전과의 씨름”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는데, 그로서는 마치 새로운 시의 창작과 다르지 않은 독창적인 일이라고 자부했던 것이다.
초판의 파장과 재판의 출판
이처럼 김억에게 번역(중역)이 창작과 구분되지 않았던 사정은 훗날 첫 창작시집 『해파리의 노래』(1923)에서도 드러난다. 이 시집에 실린 김억의 적지 않은 창작시들이 사실 베를렌을 비롯해서 『오뇌의 무도』에 수록된 시들의 시상, 수사를 모방하거나 깊이 의식한 습작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김억에게만 일어나지 않았다.
『오뇌의 무도』 서평 기자의 바람대로 이 시집의 시상, 특히 김억의 문체와 수사는 당시 문학청년들에게 유행했던 것이다. 심지어 노자영은 김억이 번역한 베를렌의 시 「검고 끝없는 잠은」을 모방하여 「잠」(1923)이라는 시를 발표했다가 이를 본 염상섭이 표절이라고 비난했던 일도 있었다(「필주(筆誅)」, 1924).
김억의 오산학교 시절 은사 이광수에게 이러한 현상은 못마땅했다(「문예쇄담」, 1925). 못마땅하기는 이은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은상이 본 이 유행은 1920년대가 저물 무렵까지 계속되었고, 『오뇌의 무도』는 엄연히 조선 신시 창작의 교과서였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안서와 신시단」, 1929). 그래서일까, 『오뇌의 무도』는 1923년 8월 근대기 한국에서 최초로 재판이 출판되었다. 김억은 이 재판의 서문에서 초판의 잘못을 고치는 가운데에도 자신만의 필치, 즉 문체만은 고치지 않았노라고 했다.
『실향의 화원』(이하윤 편, 1933)과 『해외서정시집』(최재서 편, 1938).
확산하는 세계문학, 한국 근대시의 태동
그런데 김억이 저본으로 삼은 일본어 번역시집들이란 사실 20세기 초 일본의 프랑스 상징주의와 현대시의 유행, 유럽의 대표적인 현대시 선집 유행을 배경으로 출판된 것이다. 그중 호리구치 다이가쿠의 번역시 문체와 수사는 일본 근대시 창작, 특히 근대시 문체와 수사의 전범으로 평가받는다. 또 프랑스 상징주의와 현대시의 일본 유행은 19세기 말 메르퀴르 드 프랑스 출판사 등의 현대시 선집들의 경쟁적인 출판, 이에 자극받은 영국의 프랑스 번역시 선집의 유행을 배경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호리구치 다이가쿠 등의 번역자들도 바로 그 가운데 프랑스와 영국의 선집들을 통해 일본 나름의 세계문학의 정전을 구성했던 것이다.
그래서 『오뇌의 무도』 초판 광고에서 굳이 “프랑스식의 아름다운 장정”을 강조한 것은 흥미롭다. 이 번역시 선집이 프랑스와 유럽 현대시의 전 세계적 확산 현상의 일부이자 일본에서 구성된 세계문학의 정전을 모델로 한 조선만의 새로운 정전이었던 사정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억의 『오뇌의 무도』에서 『해파리의 노래』로 이어지는 한국의 근대시 역시 한편으로는 세계문학으로서 프랑스와 유럽 현대시의 전 세계적 유행을,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어 번역시집의 문체와 수사를 그 태생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고 하겠다.
『오뇌의 무도』와 한국 근대시의 100년
이것은 김억의 번역, 엄밀하게는 일본어 번역시로부터의 중역이 초래한 효과였다. 하지만 그 효과는 또 다른 형태로도 나타났다. 문학계에서 새로운 유파의 작가들이 등장하여 새로운 시 창작을 선언할 때마다, 베를렌과 보들레르를 번역하고 번역시 선집을 출판하는 일이 마치 하나의 패턴처럼 반복되었던 것이다.
예컨대 『금성』(1923~1925) 동인, 『해외문학』(1927) 동인, 『인문평론』(1939~1941) 동인들이 그러했다. 또 『해외문학』의 이하윤은 『실향의 화원』(1933), 『인문평론』의 최재서 등은 『해외서정시집』(1938)을 출판했던 것이다. 심지어 『금성』의 양주동은 자신의 직접 번역을 옹호하기 위해 김억의 중역을 추문화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양주동은 그토록 부정하려 했던 김억의 뒤를 따른 셈이고, 이하윤과 최재서 역시 『오뇌의 무도』의 구성을 따르면서, 수록된 작품의 범위만을 넓혀갔던 것이다. 그러니까 김억과 『오뇌의 무도』는 근대기 한국의 문학계에서 반복되었던 행동 양식의 한 기원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오뇌의 무도』야말로 한국 근대시, 아니 한국 근대문학의 진정한 기원이라고 하겠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오뇌의 무도』 출판을 앞둔 김억은 이 시집이 자기 삶의 가장 뜻있는 산물이리라 여겼지만, 한국문학의 역사에서도 그러할 줄은 짐작조차 못했을 것이다.
구인모
연세대학교 글로벌인재학부, 언어정보연구원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전공은 한국근대문학, 비교문학이다. 저서 『한국근대시의 이상과 허상』, 『유성기의 시대, 유행시인의 탄생』 이외 다수의 공저와 논문을 발표했다.
글 구인모│연세대학교 글로벌인재학부·언어정보연구원 부교수
사진 국립중앙도서관, 필자 제공
[출처] 희귀 자료 열람실 | 한국 근대시의 한 100년 김억의 『오뇌의 무도』|작성자 오늘의 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