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몽골의 침입-2 : 침략 전야
04.09.18
칭기스칸이 몽골 초원을 통일했을 때 그는 전 군단을 95개의 천호로 분류했다. 95명의 천부장들이 각각 천 명의 병사들을 통솔하게 되는 천호제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을 근거로 추정해 본다면 몽골 통일 당시 전 몽골군의 숫자는 고작 9만 5천명에 지나지 않는다.
주변국인 서하(1227년 칭기스칸의 최후 원정 당시 서하가 동원한 총병력은 30만이었다), 금(여진족 기병대 12만, 한족 보병대 47만에 거란족까지 합치면 60만은 충분히 넘어 간다), 서요(전성기에 10만을 웃도는 기병대를 보유했다), 호라즘(캉클리, 타직, 투르크, 페르시아인으로 구성된 40만 병력)에 비하면 형편없이 작은 규모였다.
하지만 이 9만 5천의 초기 몽골군은 천호제의 영향으로 철저히 조직화 되고 효율적으로 운영되었으며 그 결과는 몽골 제국의 경이적인 팽창력이 그대로 말해준다.
이렇게 편성된 몽골군의 위력을 시험해 볼 겸 칭기스칸은 1209년, 직접 군대를 인솔하고 약 2백 마일의 고비사막을 통과해 서하 원정을 감행했다. 같은 해 8월, 몽골군은 서하의 명장 외명령공이 이끄는 서하군과 격돌해 대승을 거두었고 적장을 포로로 잡았다.
그 여세를 몰아 1210년, 수도인 흥경을 포위하고 댐을 쌓았다가 물길을 터뜨려 수공을 하니 흥경성내는 일순간에 물이 차올랐고 (비록 건축 능력의 부족으로 댐의 일부가 터져 몽골군의 진지도 침수되었지만) 1211년 1월, 견디다 못한 서하 국왕 이안전은 막대한 양의 낙타와 옷감, 비단, 매 등을 공물로 바치고 자신의 딸까지 내어주면서 항복하는 수 밖에 없었다.
서하를 굴복시킨 칭기스칸은 이제 몽골군의 말 머리를 금나라로 돌렸다. 이미 서하 원정 이전에 금의 사신과 학자들이 몽골로 투항해 왔고 그들로부터 금제국 내부의 사정에 대해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칭기스칸을 돕고 몽골 제국을 일으키는 데 빠질 수 없는 공을 세운 무슬림 상인들은 금국내에 칭기스칸이 파견한 첩자나 다름없는 역활들을 도맡아 해주었다.
금나라는 이미 북중국을 정복하던 당시의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고향인 만주에 남아 있었던 부족장들과 궁정 내부에서 중국화된 상부 계층간의 괴뢰, 중앙집권적 정책을 추진하던 황제와 귀족들의 갈등, 가혹한 차별과 핍박을 받고 있던 거란족과 한족 등 여러 요소들이 국가 내부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특히 그 중 거란족들은 민족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자기들과 가까운 사이였던 몽골인들과 동류 의식을 느꼈고 가혹한 압제자 여진족들에게 반기를 들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족들도 여진족들을 적으로 생각했고 그들이 약화되기만을 바랬다.
금나라는 남쪽으로는 숙적인 남송의 공격을 대비해야 했고, 서북쪽으로는 서하의 침입을 염려해야 하는 등의 이유로 군사력을 분산시켜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기스칸이 금과 전쟁을 하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금은 수적으로 몽골군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대군단을 보유하고 있었고 무려 6천만이란, 거의 고갈되지 않는 인적 자원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약화되었다고 하나 그들 여진족의 기병은 몽골 기병에 뒤지지 않는 용맹과 호전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칭기스칸은 모험에 나섰다.
1211년 3월, 몽골 초원의 케룰렌 강변에서는 대규모 쿠릴타이가 열렸다. 몽골 제국 내의 부족장과 장군들, 그리고 복속국인 위구르 왕국의 국왕 바르축과 카를룩족의 칸 아르슬란이 참석한 가운데, 칭기스칸은 금 제국의 정복을 결정했다.
칭기스칸은 만에 하나 있을 지 모르는 서하의 배신과 부족민들의 반란에 대비하여 옹기라트 부족 출신 장군인 타후차르에게 3만의 군대를 주어 몽골 본토에 남도록 한 뒤, 5월에 출정하였다. 이 때 그가 이끈 군대는 좌,우,중군 세 군단을 합쳐 고작 6만 5천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이 숫자는 투항해 오는 각 세력들을 받아들임에 따라 점차 늘어나게 된다.
5월이 끝나가기 전, 몽골군은 금의 변경 수비를 맡고 있던 옹구트족이 지키고 있던 변경의 방위선에 이르렀으나 그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고 부족장인 알라후시는 칭기스칸에게 복속하는 증표로 1만명의 지원군을 보내주었다.
칭기스칸이 이끄는 본대는 차하르 지방으로 진격해 칼칸 근처의 선덕부와 부주를 점령했고 주둔 금군 수비대를 가볍게 깨뜨렸다. 위녕성의 방위를 맡던 금의 장군 유백림도 몽골군에 투항해 왔다.
이에 놀란 금의 황제인 완안영제(역사에서는 흔히 위소왕이라고 불린다. 몽골의 침략을 제대로 막지 못한데다 나중에 신하인 호사호에게 시해되는 등 무능한 행태를 보여 왕이라 격하되는 것이다)는 협상을 위해 거란인 장군 석말명안을 사신으로 보냈으나 그는 오히려 칭기스칸에게 귀순하고 자신의 동족인 거란족들에게 금에 반기를 들 때가 되었으니 봉기하라는 내용의 선동을 했다.
여기에 자극받아 석말명안과 마찬가지로 거란족 출신 금의 무장인 야율아해가 투항해 왔고 그는 금제국의 국영 목장이었던 군목감을 습격하여 많은 수의 말들을 탈취했고 동시에 그곳을 지키고 있던 거란족 수비병들까지 포섭해 버렸다.
칭기스칸은 이처럼 많은 수의 거란족들이 투항해 오자 그들을 즉시 몽골의 사회조직인 천호제로 편입시켰다. 1206년 95개의 천호로 출발한 몽골의 천호는 이들 거란족으로 말미암아 129개로 늘어났다. 약 3만 4천명이 투항해 온 것이다.
예전에 요나라를 세워 2백년간 중원을 통치한 경험이 있는 이들의 합류는 신생 몽골제국에 큰 힘이 되었다. 위구르가 문화, 경제적인 부분을 제공했다면 이들은 군사, 정치적인 요소를 담당했다. 거란족은 몽골제국이 중원을 제압하는 추진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방에 위치한 또 하나의 거란족 집단인 서요를 흡수 합병할 수 있는 용이한 조건이 되어 주었다.
금의 변방 방어선을 돌파한 몽골군은 금나라가 자랑하는 천혜의 요새인 야호령으로 육박했다. 이곳에는 금의 최고 사령관인 완안승유가 이끄는 40만의 정예군단이 대기하고 있었다.
몽골, 거란의 연합군과 금나라의 40만 정예군단은 회하보에서 각자의 국운을 건 대격전을 벌였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금나라가 그토록 자랑스러워 했던 정예군단은 전멸되었다. 회하보의 패전은 금의 지배층과 그들의 휘하에 있던 거란족과 한족 모두에게 엄청난 공포와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1211년 9월, 몽골군은 금의 수도인 중도(지금의 북경)에서 180리 떨어진 곳까지 도달했다. 거란족을 흡수하고 금나라의 정예군단을 섬멸한 칭기스칸은 이 때부터 군대를 셋으로 나누었다. 칭기스칸과 막내 아들 톨루이가 이끄는 본대는 하북과 산동으로 향했고 대칸의 동생 카사르가 이끄는 좌익군단은 동쪽 해안을 따라 여진족의 발상지인 요동으로 향했다. 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가 이끄는 우익군단은 서쪽인 산서 지방의 대동으로 진격했다.
금제국의 각지로 흩어진 몽골군은 곳곳을 휩쓸며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이들의 목표는 화북과 요동 전역을 휩쓸어 금의 수도인 중도를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몽골군은 공격을 멈추고 1211년 겨울, 본토로 귀환했다. 1211년은 금의 백성들에게 끔찍한 악몽으로 기억되었다.
1212년 가을 몽골군은 칭기스칸의 인솔하에 다시 침공을 개시했다. 그러나 돌연 중단되었는데 서경(대동)을 공격하던 칭기스칸이 화살을 맞고 부상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1213년 8월 전투는 재개되었다. 이 해 벌어진 몽골군의 침략은 [금사]에 금나라 병사들의 시체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온 나라의 산야를 물들였다고 기록될 만큼 참혹했다. 중도를 수호하는 최후의 방어거점이자 요새인 거용관도 몽골군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었다. 중도에서 북방으로 100km떨어진 이 요새를 함락시킨 장군은 수베테이와 더불어 몽골군 최고의 용장으로 알려진 제베였다.
거용관이 함락되자 중도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무능한 황제 완안영제는 장군 호사호의 칼날에 시해되었으며 금 세종의 손자인 선종 완안순이 등극하였다. 쿠데타의 주역인 호사호도 부하 장군인 출호고기에게 몽골군에게 당한 패전의 책임을 물으려다 오히려 살해되는 등 금의 지배층 내부는 몽골 침략의 충격으로 말미암아 내분이 격화되고 있었다.
또한, 몽골군의 압박으로 금의 지배력이 흔들리게 되자 그동안 강권으로 억눌러 왔던 피지배민족들의 불만이 폭발하였다. 금 군부 내에서 조정에 불만을 품고 있던 장군들이 속속 몽골군에 투항해 왔고 (당 말기 안사의 난을 진압한 명장 곽자의의 후예 곽보옥, 거란족 이츠네얼 등) 멀리 요동에선 거란족 야율유가가 10만명의 민중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요동을 점령하고 스스로 요왕이라 칭하고 독립을 선언하였다.
경악한 금은 장수 포선만노에게 군사를 주어 진압케 했으나 몽골군이 합세한 야율유가의 거란군에 패배했고 문책을 두려워한 나머지 남은 군대를 모아 대진국이란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황제라고 참칭해 버렸다. 거용관을 함락시킨 몽골 장군 제베가 몽골군을 이끌고 요동으로 밀려오자 그는 재빨리 시세를 파악하고 항복해 버렸다. 몽골군이 철수하자 포선만노는 야율유가의 세력과 금의 공격에 겁을 내 멀리 동쪽의 간도로 달아나 동하란 나라를 세웠다.
이때, 야율유가가 이끌던 거란족 내부에서 다툼이 일어나 야율유가가 쫓겨났다. 그는 몽골에 도움을 요청했고 칭기스칸은 야율유가를 지원하여 그를 몰아낸 거란족들을 적대시했다.
이무렵 금나라는 고려에 사신을 보내 거란족이 살길을 찾아 고려로 몰려 들면 잡아서 금나라로 보내고, 자국의 군사를출동시켜 이들을 공격하는데 양식과 말이 모자라니 빌려달라고 요구했으나 고려는 일체의 회답을 거부하고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드디어 1216년(고려 고종 3년) 8월, 몽골군에 쫓긴 반 야율유가파 거란족 유민들 9만명이 압록강을 넘어 고려로 들어왔다. 거란인들은 처음엔 고려 정부에 양식과 살 땅을 요구했으나 들어주지 않자 침입을 시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