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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존과 범천의 대화, 청원경(請願經)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처음에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시고 나서 우루웰라의 네란자라 강가의 언덕에 있는 아자빨라 니그로다 나무 아래에서 머무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홀로 고요하게 앉아계시는 중에 마음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일어났다.
‘내가 깨달은 이 법은 심오하다. 어렵게 보고 어렵게 이해하고 고요하고 탁월하다. 논리로 볼 수 없어 미묘하다. 오직 지혜로운 자만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감각적 욕망에 묶이고, 감각적 욕망에 붙어있고, 감각적 욕망을 즐긴다. 감각적 욕망에 묶이고, 감각적 욕망에 붙어있고,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사람들이 이런 경지, 즉 이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에 관한 연기를 본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또한 모든 형성된 것들의 멈춤과, 모든 집착을 버리고, 갈애의 소멸, 탐욕의 사라짐, 소멸, 열반, 이러한 것을 본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설령 내가 법을 가르친다고 해도 저들이 내 말을 완전하게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의 몸을 힘들게 하고 그것은 나를 지치게 하는 일이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법을 펴는 일에 대해 숙고하셨다.
범천(梵天)은 31개의 존재의 세계 중에서 선정의 세계인 색계와 무색계를 뜻하며 그곳에 사는 천신을 말한다. 인간이 살아서 선정수행을 하면 죽어서 그 선정세계에 태어나는 윤회한다. 이러한 색계 4선정의 세계와 무색계 4선정의 세계를 모두 합쳐서 범천이라고 한다. 범천을 빨리어로 브라흐마(Brahma)라고 하는데 힌두교에서는 바라문계급이라는 최상위 계급에 속한다. 브라흐마(Brahma)를 천상의 존재로 볼 때는 범천, 우주의 창조자, 신성한, 거룩한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경전에서 범천이라고 할 때는 색계, 무색계 중에서 어느 선정세계에 있는 천신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냥 범천이라고 한다.
다음에 아자빨라 니그로다(ajapāla nigrodha)는 염소치기 나무라는 뜻이다. 세존께서 깨달음을 얻기 전의 보살이실 때 이 나무아래서 수자타(Sujātā)가 올린 유미죽을 드시고 오랜 고행 끝에 기력을 회복하셨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는 정진을 하셨다. 세존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나무는 아자빨라 니그로다가 아니다. 세존께서는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으신 뒤에 몇 차례 이곳을 찾으셨다. 범천 사함빠띠가 세존께 법을 펴주시기를 청원한 곳도 염소치기 나무아래였다. 마라 빠삐만이 세존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직후에 바로 반열반에 드시기를 간청한 곳도 바로 이곳이다. 이때 세존께서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소멸한 아라한이 되셨기 때문에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붓다가 되시어 법을 펴는 의무를 다하기 위해 몇 가지 다짐을 하시고 그 결과를 이룬 뒤에 반열반에 드셨다.
아자빨라(ajapāla)는 염소를 키우는 사람이라는 뜻이고, 니그로다(nigrodha)는 벵골지방의 보리수로 인도의 무화과나무다. 이처럼 세존과 관계된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난 아자빨라 니그로다(ajapāla nigrodha)를 염소치기 나무라고 부르는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염소치기들이 이 나무의 그늘에서 쉬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브라흐마들이 나이가 들어 더 이상 브라만교의 경전인 베다(veda)를 암송하지 못하게 되자 염소가 있는 이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살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한밤에 염소들에게 의지처가 되었기 때문이다.
세존께서 염소치기 나무아래서 이와 같은 생각을 하신 것은 깨달음을 얻으신 뒤에 8주째 되는 날이다. 세존께서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난 뒤에 7주 동안 자신이 깨달음을 얻은 것을 다시 한 번 확실하게 돌아보셨다. 그런 뒤에 비로소 자신이 깨달음을 얻은 것이 확고한 진리라는 사실과 자신이 붓다가 된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셨다. 그리고 8주째가 되어 범천 사함빠띠의 청원을 받으신 뒤에 다섯 명의 수행자가 있는 곳으로 가셨다. 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법의 수레바퀴를 돌리셨다. 이때 약 10일 동안 걸어가서 다섯 비구에게 처음으로 법을 펴신 내용이 초전법륜경이다.
세존께서 ‘문득 이런 생각이 일어났다.’라고 했을 때의 ‘문득 일어난 생각’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세존의 생각은 범부의 생각과 달리 항상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세존뿐만 아니고 역대의 모든 붓다가 똑같이 갖는 생각이기도 하다. 이때의 두 가지 생각을 아찐나(āciṇṇa)와 삼마찐나(samāciṇṇa)라고 한다. 아찐나(āciṇṇa)는 실천된, 실행된, 훈련된, 습관적인, 익숙한 버릇을 지닌 등의 뜻이 있다. 삼마찐나(samāciṇṇa)는 더 잘 실천된, 더 잘 훈련된 등의 뜻이 있다. 세존의 생각은 대상을 알아차려서 첫 번째 단계의 훌륭한 마음을 가진 뒤에 여기에 보태어 두 번째 단계로 다시 한 번 더 훌륭한 마음을 갖는 형태를 지닌다.
완전한 지혜가 나신 붓다는 이처럼 대상을 알아차림에 있어 하나의 마음만 갖지 않고 복수의 마음을 가져서 어떤 일이 있어도 완전한 지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범부의 생각은 망상에 속하지만 세존의 생각은 이상 두 가지로 잘 훈련된 마음이다. 이때 세존께서 일으킨 생각을 빠리 위딱까(pari vitakka)라고 하는데 이는 완전하게 일으킨 생각이라는 뜻이다. 이때의 빠리 위딱까(pari vitakka)는 초선정의 마음이 아닌 완전한 겨냥이라는 뜻이다. 붓다의 마음은 단지 작용만하는 마음이라서 원인과 결과가 끊어져 새로운 업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래서 선악을 초월한 상태로 오직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이라 아무런 걸림이 없다. 그러므로 붓다의 마음은 어떤 경우에도 치우침이 없이 있는 그대의 진리로 보는 마음이라 가장 위대한 가르침을 펴신다.
붓다께서 반열반에 이르신 뒤에 붓다의 가르침이 살아 있었지만 교단이 분열된 것은 붓다와 같은 가르침을 가진 분이 계시기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존재는 결코 믿을 것이 못되므로 오직 가르침만 의지처로 삼아야 한다. 가르침을 의지처로 삼아도 인간은 바른 길을 가기 어렵다. 누구나 아직 완전하게 깨달은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라한이라고 해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니다. 아라한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소멸한 것은 붓다와 같아 똑같이 윤회가 끝난다. 하지만 지혜의 깊이에 있어서는 아라한과 위없는 깨달음을 얻으신 붓다와는 차이가 있다.
세존께서 생각하신 ‘내가 깨달은 이 법은 심오하다.’라고 하셨을 때의 법은 담마(Dhamma)라는 뜻으로 대상, 진리, 가르침, 교훈, 사물, 현상 등 많은 뜻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의 법(法)은 세속을 초월한 진리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알아차릴 대상을 말할 때는 앞에 소문자를 표기하여 담마(dhamma)라고 한다. 그러나 진리라고 말할 때는 앞에 대문자를 표기해서 담마(Dhamma)라고 한다. 그리고 심오하다는 뜻은 출세간의 진리라 깊고 오묘하다는 뜻이다.
다음으로 ‘사람들은 감각적 욕망에 묶이고, 감각적 욕망에 붙어있고, 감각적 욕망을 즐긴다.’고 했을 때의 감각적 욕망을 알라야(ālaya)라고 한다. 알라야(ālaya)는 거처, 안식처, 선호, 경향, 집착, 애착, 감각적 욕망 등의 뜻이 있다. 우리가 말하는 사랑도 감각적 욕망 중의 하나다. 중생들이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을 즐긴다고 했을 때 알라야(ālaya)라고 한다. 이때의 감각적 욕망은 모든 대상에 대한 감각적 욕망을 포함한 말이다. 그래서 이때의 욕망은 욕계, 색계, 무색계의 세 가지 세계에 사는 모든 존재의 욕망이다. 그래서 알라야(ālaya)는 오욕락을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후대에 만들어진 유식(唯識)에서는 알라야(ālaya)에서 파생된 명사로 아뢰야(阿賴耶)로 음역을 해서 사용한다. 앞서 밝힌 것처럼 알라야(ālaya)는 욕망, 집착이라는 의미에서 달라붙는 것을 뜻하며 소유물, 의지처 등 다양하게 쓰인다. 이것을 유식에서는 원인과 결과가 있는 모든 생명의 최종적 의지처라는 뜻으로 알라야 윈냐나(ālaya viññāṇa)라고 한다. 이 말이 바로 아뢰야식(阿賴耶識)이다. 이런 유식이 갖는 오해 중의 하나가 마음이 여러 가지가 있는 줄 아는 것이다. 마음은 단지 대상을 아는 기능으로 하나밖에 없다. 이런 진실에서 벗어나면 오해로 인해 바르게 수행하기 어렵다. 그래서 잘못된 견해로 인해 자꾸 다른 마음을 찾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 마음이 미로에 빠지므로 주의해야 한다.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이란 다섯 가지 감각기관에서 일어나는 욕망을 말한다. 원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있어서 여섯 가지 감각적 욕망이라고 해야 하지만 일반적으로 마음의 감각기관인 의(意)는 빼고 오욕락(五欲樂)이라고 한다. 이는 법문을 듣는 대중이 마음의 감각기관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혜가 난 비구들에게 법문을 할 때는 여섯 가지 감각적 욕망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세존의 가르침은 법문을 듣는 대상에 맞추어서 설법하시기 때문에 처음부터 모든 것을 밝히는 법을 펴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진리를 말해도 상대가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세존께서 생각하신 내용 중에 ‘이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에 관한 연기를 본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라고 했다. ‘이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란 이닷빳짜야따(idappaccayatā)로 인과적으로, 서로 관계가 있음, 연기의 이치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는 것이다. 즉 감각적 욕망을 가진 사람은 무명과 갈애에 눈이 멀어 이것과 저것이 원인과 결과로 서로 관계가 있는 것을 알 수 없다는 말이다. 특히 고행을 해서는 이런 연기의 법칙을 알 수 없다. 오직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때만이 원인과 결과에 대한 지혜가 난다.
다음에 ‘연기를 본다는 것은’이란 12연기의 원인과 결과를 아는 것을 말한다. 연기(緣起)를 빠띳짜사뭇빠다(paṭiccasamuppāda)라고 하는데 연기, 조건적으로 함께 발생하는 것, 조건에 의한 발생, 연기의 법칙이라는 말이다. 원래 연기법은 24연기로 거꾸로 거슬러 가는 연기라는 뜻의 역관(逆觀)과 차례대로 가는 연기라는 뜻의 순관(順觀)이 있다. 보살께서 깨달음을 얻기 전에 12연기를 발견하셨는데 먼저 역관으로 죽음으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 무명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다시 순관으로 무명을 원인으로 행이 일어나는 것으로 시작해서 마지막에 생을 원인으로 죽음이라는 결과가 있다는 것을 아셨다.
이처럼 역으로 본 원인과 결과와 차례대로 본 원인과 결과를 모두 합쳐서 24연기다. 이러한 연기를 원인과 결과라고 하거나 조건에 의한 것, 또는 조건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원인과 결과와 조건 지어진 것은 같은 뜻이다.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위없는 깨달음을 얻으신 25분의 역대의 모든 붓다께서는 먼저 12연기를 발견하시어 원인과 결과의 이치를 아시고 모든 의문을 푸셨다. 여기서 연기는 인간의 탄생과 죽음에 관한 것과 업과 업의 과보에 의해서 살고 있는 존재의 실상을 여과없이 모두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생명이 태어나고 죽는 과정에서 근본원인과 직접원인이 모두 발견되었다.
이처럼 연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 연기법은 12가지 요소들이 원인과 결과로 진행되는 것이다. 그 시작은 과거의 무명이다. 처음에 무명을 원인으로 행이라는 결과가 일어난다. 이때 행이라는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어 다음 결과를 맺는다. 이것이 과거의 행을 원인으로 현재의 식이라는 결과가 일어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연기의 회전이 마지막 미래에 생을 원인으로 노사라는 결과가 일어나는 것으로 끝난다. 그래서 12연기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아우르는 원인과 결과다.
두 번째 연기법은 무엇이나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는 이치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 연기법이 적용되지 않고 첫 번째 연기법만 있으면 윤회의 출구를 찾을 수 없다. 무명이 있으면 행이 있고 무명이 없으면 행이 없다. 이때 행이 없으면 업이 성숙되지 않아 태어날 조건이 성숙되지 않는다. 느낌이 있으면 갈애가 있고, 느낌이 없으면 갈애가 없다. 이때 느낌이 없으면 갈애가 없어 미래에 태어날 조건이 성숙되지 않는다. 이때의 이것을 돌리는 근본원인은 무명과 갈애다. 그래서 이것이라고 했을 때의 이것은 무명과 갈애다. 누구나 무명과 갈애로 윤회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는 세간의 진리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는 출세간의 진리다. 팔정도 계정혜 중에서 정은 세간의 진리고, 혜는 출세간의 진리다. 그러므로 정만 있고 혜가 없으면 연기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때의 정은 선정수행인 사마타고, 혜는 지혜수행인 위빠사나다.
반대로 무명과 갈애가 없으면 다시 태어나는 윤회가 끝나 해탈의 자유를 얻는다. 여기서 무명과 갈애를 소멸시키는 것이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이다. 그 시작은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갈애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이때 항상 갈애와 함께 있는 무명도 소멸하여 두 가지가 모두 소멸한다. 이것이 바로 사성제 중에서 도성제에 해당하는 위빠사나 수행이다. 그래서 두 번째 연기법은 윤회하는 세간의 법과 윤회가 끝나는 출세간의 법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12연기 안에 세간의 진리와 출세간의 진리가 모두 담겨있다.
이처럼 세존께서는 원인과 결과를 아는 연기의 지혜가 난 뒤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은 붓다가 되셨다. 붓다(Buddha)는 깨달은 자, 아는 자라는 뜻으로 스스로 깨달음을 얻은 자, 위없는 깨달음을 얻는 자로 불린다. 시작을 알 수 없는 오랜 인류사에 모두 25분의 붓다가 계셨다. 역대 붓다의 가르침은 연기법과 사성제로 모두 똑같다. 이런 붓다의 가르침이 있는 시대를 정법시대라고 한다. 언젠가 정법이 사라지면 미래에 새로운 붓다가 출현하신다. 붓다의 정법이 사라질 때는 벽지불이 출현하신다. 하지만 벽지불은 위없는 깨달음을 얻지 못해 세상에 출현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다음에 새로운 붓다가 출현하실 때는 벽지불이 태어나지 않는다.
이처럼 붓다가 되시어 깨달음을 얻도록 한 수행이 위빠사나다. 위빠사나 수행을 팔정도, 계정혜, 삼학, 중도라고 한다. 이때의 위빠사나라는 뜻은 무상, 고, 무아라고도 말한다. 이 세 가지가 생명의 특성을 꿰뚫어서 아는 통찰지혜다.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소멸한 열반에 이르신 것이다. 불교의 핵심을 세 가지로 나누면 연기법과 사성제와 무상, 고, 무아의 지혜다. 그러므로 깨달음의 시작은 반드시 연기법을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런 뒤에 사성제를 완성한다. 이때 사성제를 완성하는 지혜가 바로 무상, 고, 무아의 통찰지혜다.
다음으로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에 묶이고, 감각적 욕망에 붙어있고,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사람은 연기를 모르며 다음과 같은 것도 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또한 모든 형성된 것들의 멈춤과, 모든 집착을 버리고, 갈애의 소멸, 탐욕의 사라짐, 소멸, 열반, 이러한 것을 본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이상 여섯 가지는 세간으로부터 출세간으로 가는 해탈의 모든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
첫 번째 ‘모든 형성된 것들의 멈춤’은 과거에 형성된 행의 멈춤이다. 행을 상카라(saṅkhāra)라고 하는데 형성, 행, 의도, 현상, 조건, 조건 지어진 현상을 뜻한다. 이때의 행이 연기의 시작인 무명을 원인으로 행이 일어난다고 했을 때의 행이다. 이 행은 과거에 형성된 것이며 의도가 있는 행위이기 때문에 업이다. 또 조건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를 의미하는 연기의 과정이다. 연기에서 행을 원인으로 식이 일어난다고 했을 때 식이 태어남이다. 그러므로 나의 태어남은 과거에 행위를 한 업이 성숙하여 그 과보로 태어난 것이다. 이러한 행이 멈춘다는 것은 새로운 원인을 만들지 않아 태어나는 과보를 받지 않는 것을 말한다.
두 번째 ‘모든 집착을 버리고’라고 했을 때의 집착은 네 가지가 있다. 첫째,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이다. 둘째, 견해에 대한 집착이다. 셋째,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이다. 넷째, 유신견에 대한 집착이다. 유신견(有身見)은 몸과 마음이 나고, 나의 것이라는 견해다. 이처럼 집착은 다양한 것들로 결합되어있어서 힘이 매우 강하다. 사성제 중에서 집성제가 괴로움의 원인인데 이때의 집성제가 바로 집착이다. 하지만 집착을 버리면 업을 생성하지 않아 다시 태어날 원인이 소멸한다. 집착은 갈애가 더 깊어진 것으로 연기를 회전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집착은 욕망과 같이 달라붙는 특성이 있어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넘어간다. 그러므로 집착을 원인으로 업을 생성해서 미래의 태어남을 만든다.
세 번째 ‘갈애의 소멸’에서 갈애는 몹시 목말라하는 갈망을 뜻한다. 갈애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가 있다. 둘째, 존재에 대한 갈애가 있다. 셋째 비존재에 대한 갈애가 있다. 여기서 갈애의 소멸은 존재에 대한 갈애의 소멸을 말한다.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바라거나 더 높은 지위를 얻기를 바라거나 자기 존재가 우월하기를 바라는 모든 욕망이 존재에 대한 갈애다. 이때 모든 갈애의 소멸이 아니고 존재에 대한 갈애의 소멸을 말하는 것은 처음부터 모든 갈애를 없앨 수 없기 때문이다. 선한 의도를 가진 열정까지 소멸시키면 극단이 되어 균형이 있는 바른 수행을 할 수 없다.
갈애는 무명과 함께 연기를 회전시키는 근본원인이다. 연기에서 느낌을 원인으로 갈애가 일어날 때 갈애가 일어나지 않으면 연기가 회전하지 않는다. 이때 갈애가 있어야 할 자리에 관용이 들어서면 갈애와 함께 있는 무명의 힘이 소멸해서 연기의 회전이 멈춘다. 이것이 사성제의 도성제며 깨달음이다. 이 길이 중도며 위빠사나 수행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통찰지혜 수행으로 네 가지 대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이다. 네 가지 대상을 사념처라고 하는데 몸, 느낌, 마음, 법이다. 세존의 가르침을 말할 때의 가르침이 바로 사념처 수행이다. 사념처 수행을 실천하면 지혜가 나서 행복하다. 나를 불행으로부터 보호하고 괴로움이 소멸한 해탈로 이끄는 유일한 수단이 사념처다.
네 번째 ‘탐욕의 사라짐’은 위라가(virāga)를 말한다. 위라가(virāga)는 사라짐, 색이 바램, 탈색이 됨, 탐욕에서 벗어남, 이욕(離欲) 등의 뜻이 있다. 이때의 탐욕에서 벗어남이나 탐욕이 사라짐은 완전한 소멸과는 차이가 있다. 소멸에는 순간적 소멸과 일시적 소멸과 완전 소멸이 있다. 차음부터 완전한 소멸을 기대하면 극단이 되어서 수행을 계속할 수 없다. 탐욕이 있을 때 탐욕을 알아차리면 일시적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알아차림이 약해지면 탐욕이 일어난다. 이런 현상은 매우 현실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탐욕을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어차피 범부는 탐욕의 힘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탐욕은 세간의 진리다. 탐욕을 계속해서 알아차리면 언젠가 통찰지혜가 나 해탈의 자유를 얻는다. 이때 탐욕이 완전히 소멸한다. 그러므로 탐욕의 사라짐은 탐욕의 완전한 소멸로 가기 전 단계다.
다섯 번째 ‘소멸’이다. 소멸을 니로다(nirodha)라고 하는데 억제, 제어, 파괴, 소멸, 지멸(止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빨리어는 단어가 서로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쓰임에 따라 의미가 조금씩 다르고 강도가 조금씩 다르다. 사성제 중에 멸성제를 말할 때 니로다 아리아 삿짜(nirodha ariya sacca)라고 한다. 이때의 멸성제가 열반에 이른 것을 말한다. 니로다 다뚜(niradha dhātu)라고 했을 때는 소멸의 조건, 소멸의 세계를 말한다. 이때의 소멸이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를 벗어나는 것을 말하는데 이 역시도 윤회가 끝나는 해탈을 의미한다. 니로다 삼마빳띠(nirodha samāpatti)라고 했을 때는 소멸의 성취, 멸진정을 의미한다. 위빠사나 수행은 번뇌가 소멸하는 수행이다. 그래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소멸한 것이 열반이다. 이때의 열반은 몸과 마음을 인식할 수 없어 살아있으면서 완전한 소멸의 상태다. 이것을 지고의 행복이라고 한다.
여섯 번째 ‘열반’이다. 열반을 닙바나(nibbāna)라고 하는데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번뇌가 불탄 것을 말한다. 열반의 또 다른 뜻은 해방, 평화, 적멸(寂滅), 지복(至福), 건강이라고도 한다. 세존의 가르침의 최종적 목표는 오직 열반에 이르는 것이다. 죽어서 태어나지 않는 열반에 이르면 괴로움뿐인 윤회가 끝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생명이 더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선업의 공덕을 쌓은 사람이 지혜가 나야 비로소 열반의 필요성을 느낀다. 그러므로 열반은 최종적 목표이지만 이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처음부터 열반을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존의 가르침이나 스승의 가르침은 모두 열반을 향하고 있다. 열반은 오직 붓다의 가르침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최종적인 깨달음이고 해탈의 자유다.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념처 수행을 해야 한다. 사념처 수행을 하면 칠청정과 16단계의 지혜를 거쳐 열반에 이른다. 이때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하면 일곱 생 이내에 윤회가 끝난다. 다시 사다함의 도과를 성취하면 한 번 인간으로 태어나서 윤회가 끝나는 아라한이 된다. 다음에 아나함의 도과를 성취하면 색계천상의 정거천에 태어나서 그곳에서 아라한이 되어 윤회가 끝난다. 마지막으로 아라한이 되면 이번 생을 마지막으로 윤회가 끝난다. 열반은 세 가지 종류가 있는데 몸과 마음을 가지고 체험하는 유여의 열반이 있다. 이때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소멸한 상태다. 다음으로 몸과 마음이 끝나는 무여의 열반이 있다. 이때는 오온이 소멸하는 열반이다. 오온이 소멸하는 열반은 붓다나 아라한의 열반이다. 마지막으로 사리열반이 있다. 사리열반은 말법시대가 되어 아라한이 없는 시대가 되면 붓다의 사리가 모두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 여섯 가지는 세존께서 세속의 삶에서 출세간의 열반으로 가는 일련의 과정을 요약하신 것이다.
다음에는 세존께서 생각하신 마지막 내용이다. ‘설령 내가 법을 가르친다고 해도 저들이 내 말을 완전하게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의 몸을 힘들게 하고 그것은 나를 지치게 하는 일이다.’ 이처럼 감각적 욕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아직 지혜가 나지 않아서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는 염려를 하셨다. 여기서 세속을 사는 범부의 입장에서 세존의 말씀을 오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스스로 깨달음을 얻으시고, 위없는 깨달음을 얻으시고,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을 지니신 세존께서 내 몸이 힘들고 지치기 때문에 법을 펴시는 것을 망설였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일 수 있다.
처음에 밝힌 붓다의 생각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일어났다.’고 했을 때의 ‘문득 일어난 생각’이 있다. 앞서 밝힌 것처럼 붓다의 모든 생각은 항상 두 가지 조건하에서 일어난다. 첫째는 아찐나(āciṇṇa)고 둘째는 삼마찐나(samāciṇṇa)다. 아찐나(āciṇṇa)는 알아차림에 의해서 훈련된 생각이다. 삼마찐나(samāciṇṇa)는 계속해서 알아차려서 더 잘 훈련된 마음이다. 그러므로 붓다의 생각은 일반 범부의 생각과는 다르다. 이미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소멸한 마음이며 그래서 원인과 결과가 끊어진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이므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떠난 마음이다. 어떤 것이나 단지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이기 때문에 분별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항상 훌륭한 마음에 더 훌륭한 마음이 하나 보태어서 생각을 한다. 그러므로 붓다가 말씀하신 내용은 우리가 판단하는 그런 뜻이 아니다.
여기에 빨리어 해석에 대한 오해도 생길 수 있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빨리어 번역을 여기서는 ‘나의 몸을 힘들게 하고 나를 지치게 하는 일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빨리어는 유사한 다른 뜻을 많이 가지고 있어 자칫 왜곡될 수 있는 내용이 있다. 다른 번역의 경우에는 ‘그것은 나에게 괴로움을 줄 뿐이고 나에게 성가신 일이다.’라고 한 경우도 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면 나만 피곤할 뿐이다.’라고 번역한 것도 있다. 이때 피곤하다는 번역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붓다가 피곤해서 법을 펴지 않겠다는 말씀에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같은 번역이라도 진실을 더 정확하게 해석하는 내용이 필요하다.
이때 붓다께서는 마음이 아닌 몸이 힘들고 피곤한 것이다. 이미 붓다의 마음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소멸했기 때문에 무슨 일이나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갈애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래서 범부와 달리 이미 마음고생이 끝나신 분이시다. 하지만 이런 마음에 비해 몸은 다르다. 붓다께서 생존해 계실 때 몸이 아파서 고생을 하시고 약을 드신 경우도 많았다. 마지막에도 몸의 병으로 반열반에 이르셨다. 더구나 6년의 고행끝에 죽음 직전에 이르러 깨달음을 얻으셨기 때문에 당시의 몸은 매우 허약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몸에 대한 염려가 생길 가능성도 있다.
이때 위빠사나 수행의 일 단계 지혜를 알아야 한다. 위빠사나 수행은 처음에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로부터 시작한다. 이때까지는 누구나 몸과 마음을 하나로 알고 있었지만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하면서부터 몸과 마음을 분리해서 알아차리기 시작한다. 수행자가 몸과 마음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면 몸이 아플 때 마음이 아프지 않다. 마음이 아플 때 몸이 아프지 않다. 이때 붓다는 마음은 이미 해결하신 분이지만 몸의 고통은 고스란히 겪어야 한다. 그러므로 붓다라고 해서 아픈 몸에 대해 달리 대응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여기서 ‘몸을 힘들게 하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아무리 붓다라고 해도 몸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붓다라고 해서 남다른 초인의 몸으로 생각하는 것은 붓다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다.
또 다른 오해가 있다. 붓다께서 몸이 힘들어서 전법을 펴지 않는다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위대하고 성스러운 붓다가 되어서 몸이 아프다고 설마 전법을 망설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몸 때문이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고 잘못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렇다면 몸이 아닌 마음이 힘들어서 전법을 펴지 않겠다는 것인데 사실 이것이 더 문제가 있는 생각이다. 붓다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초월한 상태의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을 가지셨기 때문이다. 특히 완전하게 무아의 통찰지혜가 나신 분이라 나의 마음이라는 것이 없다. 마음은 있지만 나의 마음이 아니라고 알면 이미 마음으로 인해서 생기는 모든 번뇌가 소멸한 상태다. 그러나 몸은 아직 받아야 할 업의 과보가 있어서 받을 수밖에 없는 것 또한 불가피한 현실이다. 그래서 붓다께서 직접 생각하신 몸이 힘들어서라는 말씀은 설득력이 있다. 사실 우리가 아는 이런 진실 외에 항상 또 다른 진실이 있기 마련이다.
이것으로 붓다의 생각에 대한 오해가 완전하게 풀린 것은 아니다. 범부의 생각을 뛰어넘는 지혜에 관한 문제는 주석서에 의존해서 이해해야 한다. 붓다께서 깨달음을 얻은 뒤에 범천 사함빠띠가 세존께 청법을 한다. 이때 세 번이나 거절을 하셨다. 이때도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는 염려가 이유였다. 그러나 주석서에 의하면 역대의 모든 붓다께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 반드시 범천이 법을 청하는 과정이 있다. 이때 세 번의 청법을 받으신 뒤에 법을 펴신 기록이 있다. 붓다께서 이런 생각을 하신 것은 범천 사함빠띠가 청법을 하시도록 한 것이었다. 사함빠띠의 청법에 대한 내용은 다음에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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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간 상윳따 니까야의 글을 옹달샘 우체통에 올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풀어서 본 상윳따' 게시판을 새로 만들어서 이곳에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12연기 내용이 이제야 조금 다가옵니다. 수행하며 알아가겠습니다.
많은 도움되어 감사드립니다.
사두 사두 사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