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어린아이 정신으로.
임성욱
(시인/사회복지학박사)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일까. 단 한 번만이라도 뜻대로 살아본 적은 있을까. 날마다 각종 언론 등에 등장하는 정치인, 경제인, 관료, 유명 연예인들. 그들은 지금 잘살고 있을까. 한때는 권력의 꿀통에서 달콤함을 즐기던 자들. 지금은 감옥에서 영어의 몸으로 살아가고 있기도 하다. 과연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살아왔을까. 앞으로는 또 어떻게 살아갈까. 요즘 시류의 흐름을 지켜보면서 느껴본 상념들이다. 인생이란 참으로 부질없다는 생각도 문뜩 든다. 그래서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위버멘쉬’(Übermensch)를 내세웠을까. 과거에는 ‘초인’으로 번역했으나 지금은 어감상 적절치 않아 본래의 독일어 발음 그대로 ‘위버멘쉬’로 사용한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에서 “나 이제 너희에게 정신의 세 가지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정신이 어떻게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며, 사자가 마침내 어린아이가 되는가를”. 낙타는 참으로 인내심이 많은 동물이다. 끝없는 사막을 온갖 모래먼지 다 마셔 가면서 무거운 짐을 날마다 지고 오간다. 물론 스스로 원한 것은 아니다. 마치 숙명처럼 '마땅히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신은 낙타로는 만족할 수가 없다. 그래서 변신을 꾀한다. 사자로 변한 것이다. 사자가 된다는 것은 정신이 자유를 쟁취하여 그 스스로가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하기 위해서다. 사자는 자신이 섬겨온 주인은 물론 신에게까지 대적한다. 결국 신의 한 형태인 용과 일전을 벌인다. 드디어 이겼다. 이제 '나는 마땅히 해야 한다'가 아니라 '나는 하고자 하는 것을 한다.'는 사자로 변신한 것이다. 창조된 모든 가치를 아는 사자,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의 쟁취를 강탈하는 사자가 된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아니오' 라고 저항할 수 있는 백수의 제왕이 된 것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면서 왜 사자를 본받지 못하고 낙타처럼 나와 무관한 법과 제도, 윤리라면 무조건적으로 맹종하며 사는 것일까. 칸트의 말대로 내가 최고 목적적 존재인데 왜 세상은 나를 지배만 하고, 나는 아무 저항조차 못할까. 인간은 사자라는 것, 내가 내 뜻으로 정한 것이 아니면 ‘아니오’ 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인데도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강제적 의무의 수렁에 빠져있다. 심지어 자식을 키우는 것도, 사랑을 하는 것도 의무가 되었다. 억지로 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고통과 갈등의 불씨이고 사자는커녕 낙타의 신세조차도 타개할 수 없다. 역시 자신의 생각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어린아이의 순진무구와 망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어린아이의 삶 속에서 새로운 창조의 가치를 봤다. 얽매이는 규범적 삶이 얼마나 무상한가도. 니체는 삶에는 어떤 규약과 도덕이 있는 필연성이 없다고 본 것이다. 이런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존재를 ‘위버멘쉬’라 한 것이다. 권력을, 돈을, 명예를 쫒아 다니는 자들이여. 제발 이제는 ‘아니오’라고 해봐라. 주어진 시간을 부질없이 다 소비해버리면 그대 앞에 놓인 것은 죽음뿐이지 않는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아오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해 봐야 이미 때는 늦은 것 아닌가. 지금이라도 가고 싶은 곳 맘대로 가고, 사랑하고 싶은 사람 맘껏 사랑하고, 웃고 싶으면 맘껏 웃어라. 저 찬란한 태양, 살결을 스치는 바람결, 싱그러운 신록 향기. 느낄 수 있는 시간 그렇게 많지 않으니까. 니체의 말처럼 어린아이의 정신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