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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명종 탁상시계>
김장출
자명종 탁상시계가 돌연히 내 곁을 떠나가게 됐다. 그가 갑자기 멈춰 섰기 때문이다. 수년 동안, 아니 수십 년 동안 함께 했던 날들을 되짚어 보노라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정든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같이 어쩐지 가슴이 찡하고 무겁다. 내가 깊이 잠들 때도 내 맥박이 쉬지 않고 뛰고 있는 것처럼, 그는 낮이나 밤이나 쉬지 않고 찰칵찰칵 숨 쉬고 있었는데. 내가 새벽 단꿈에 흠뻑 빠져 천지 분간 모르고 잠자고 있을 때도, 새벽 말발굽 소리가 귓전을 때릴 무렵이 되면 그는 여부없이 나를 잠에서 깨워주었는데.
크게 생각하면, <그까짓 것 하나 새로 하나 사면 되지. 아니 그냥 사지 않더라도 요즘엔 손전화기가 만능박사 노릇을 하는데>라고 자위하면 될 테지만, 옛 속담에도 “옷은 새 옷이 좋고 사람은 옛사람이 좋다”란 말이 있는데, <새것이 좋겠지, 옛것이 좋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도 해 보다가 지난날 그와 함께했던 시절이 새롭게 떠올랐다.
내가 서울로 이사 온 지 일 년도 되기 전이였으니까, 아마 수십 년 전쯤 된 일이다. 밤중에 홍두깨라고, 시골 우리 교회 담임목사님이 후임도 청빙 해놓지 않고 퇴임하겠다는 전화가 왔다. 단도직입적으로 빨리 내려와서 교회를 맡으라는 것이다. 정년이 다 되어간 줄은 알았지만 어이가 없었다. 시무 장로로서 본 교회에서 그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가정 형편상 피치 못한 일이었다 하더라도, 서울로 이사한 나 역시 잘 못 된 처사라 할 수 있겠지만, 담임 목사님까지 이유야 어떻든 후임 목사님도 없는데, 교회를 비워두고 떠난다니 기가 막혔다. 하지만 장로라는 직분 때문에, 다른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답은 불문가지였다. 집사람과 함께 갈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만, 집사람은 그때만 하더라도 손자를 돌봐줘야 하기에, 부득불 열일 제백사하고 혼자 가방 하나 달랑 메고 내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정년퇴직하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시골집을 월세로 주고, 교회 행사나 절기 때 내려가면 이용하려는 심산으로, 작은 방은 빈방으로 남겨두었기 다행이었다. 간단한 주방 기구는 물론 이부자리, 간이 탁자까지.
교회를 담당한다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은 예견했지만, 애송이 장로가 직접 당하고 보니 정말 난감했다. 새벽기도회, 수요예배, 구역예배는 말할 것도 없고 주일 대 예배를 위하여 설교한다는 것은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그때 대 예배에 설교하기 위하여 애쓰고 애썼던 일들을 어찌 낱낱이 다 털어놓을 수 있으랴. 그건 그렇다 치고 문제는 새벽기도회였다. 설교가 문제가 아니라 시간에 맞춰 일찍 일어나 몸단속하고 교회로 나가는 것이, 하루도 이틀도 아니고 속된 말로 죽을 맛이었다. 어떤 때는 밤중에 일어나 기다리고, 어떤 때는 아예 잠을 설치고 밤을 새운 때도 있었다.
생각 끝에 자명종 탁상시계를 하나 사볼까 하고 시계점을 기웃거리다 때마침 아는 김 목사님을 만났다. 사정 이야길 했더니, 부활절 특별 새벽기도회 참석자를 위하여 선물로 사서 나눠주고 남은 여분이 있으니 하나 주겠단다. 몸통은 엷은 푸른색이고, 크기는 국그릇 정도, 동그랗고 하얀 바탕에 검은색 아라비아숫자가 선명한 자명종 탁상시계였다.
휑하게 텅 빈 방에 혼자 있다가 친구가 하나 생긴 것이다. 한밤중에 잠들었을 때도, 일어나 일 할 때도, 내가 묵상기도하고 있을 때도 그는 자지도 않고 어느 때나 나를 지켜주었다.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면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아침 먹을 때가 되면 아침 식사 때라고, 점심 먹을 때가 되면 정심 식사 때라고, 저녁이면 저녁이라고, 잠잘 때가 되면 잠잘 때라고, 새벽기도회에 갈 때가 되면 깊은 잠결에도 들을 수 있게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종을 울려주었다. 그는 가만히 있는 것 같으나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말도 걸어보고 싶기도 하고, 품에 안아보고 싶기도 하고, 손으로 만져 보고 싶기도 했다. 혼자 설교 연습을 하면서. 혼자 찬송을 하면서 혼자 이렇게 저렇게 살아가도 외롭지 않고 넉넉히 견디어낼 수 있었던 것은 탁상시계가 내 옆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여름밤, 바람을 쐬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먹 장 같은 밤하늘에 노란 별이 총총했다. 어린 시절 누이와 함께 멍석에 누어 별을 헤아렸던 때가 생각났다. 유성이 멀리 꼬리를 흔들며 날아갔다. 교회 십자가 불빛이 아무도 없는 밤을 밝혀주고 있었다. 내 곁에는 이 밤 아무도 없다. 가족을 떠나 혼자 있다는 것, 낙심천만이었다. 그러나 이는 <나를 위한 일이 아니니까. 하나님을 위하고 성도들을 위한 일이니까.>라고 속으로 자위했다. 쏟아진 별빛을 밟고 서서 일진 청풍에 땀을 식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허탈한 마음으로 방으로 들어서면 연이나 탁상시계가 나를 반겨주었다
날이 가고 달이 가고 세월은 말없이 흘러갔다. 시골로 내려온 것이 늦은 봄이었었는데, 벌써 초겨울 되었다. 휘영청 밝은 달빛이 혼자 산 창문에 을씨년스럽게 빛을 던져주고 있었다. 교회를 떠맡은 지 6개월쯤이 됐을까? 어려움도 많았지만 때로 기쁨도 많았다. 그 동안 교회 재정도 많이 좋아졌다. 교회인들은 내가 그만하겠다고 할까 봐 안절부절 초조해했다. 하지만 이 일은 내가 끝까지 해야 할 일은 아니란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담임 목사님을 모셔오기로 하고 중직 자들께 내 뜻을 구구히 설명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을 확실히 알게 심어줬다. 그렇게 마음을 결정하고 나니 무거운 돌 짐을 내려놓은 것과 같이 심신이 홀가분 해졌다. 얼마후 다임 목사님을 모시고 취임예배를 올릴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서울로 올라오면서 옷 가방 속에 탁상시계를 챙겨 가지고 왔다. 그러나 사람의 일이나, 세상일이나 모든 일은 예측할 수 없는 것. 서울에서도 시골에서처럼 항시 내 침실 머리맡을 떠나지 않고 늘 지키고 있던 탁상시계가 예고도 없이 멈춰 서버렸다. 약을 가라 끼어 보기도 하고, 이리저리 살펴도 봤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고장이 난 것이 아니라 수명이 다한 것이다. 그는 내 곁을 떠나갔지만 나는 그를 보내지 못하고 있다.
<자명종 탁상시계>
자명종 탁상시계가 돌연히 내 곁을 떠나가게 됐다. 그가 갑자기 멈춰 섰기 때문이다. 수년 동안, 아니 수십 년 동안 함께 했던 날들을 되짚어 보노라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정든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같이 어쩐지 가슴이 찡하고 무겁다. 내가 깊이 잠들 때도 내 맥박이 쉬지 않고 뛰고 있는 것처럼, 그는 낮이나 밤이나 쉬지 않고 찰칵찰칵 숨 쉬고 있었는데. 내가 새벽 단꿈에 흠뻑 빠져 천지 분간 모르고 잠자고 있을 때도, 새벽 말발굽 소리가 귓전을 때릴 무렵이 되면 그는 여부없이 나를 잠에서 깨워주었는데.
크게 생각하면, <그까짓 것 하나 새로 하나 사면 되지. 아니 그냥 사지 않더라도 요즘엔 손전화기가 만능박사 노릇을 하는데>라고 자위하면 될 테지만, 옛 속담에도 “옷은 새 옷이 좋고 사람은 옛사람이 좋다”란 말이 있는데, <새것이 좋겠지, 옛것이 좋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도 해 보다가 지난날 그와 함께했던 시절이 새롭게 떠올랐다.
내가 서울로 이사 온 지 일 년도 되기 전이였으니까, 아마 수십 년 전쯤 된 일이다. 밤중에 홍두깨라고, 시골 우리 교회 담임목사님이 후임도 청빙 해놓지 않고 퇴임하겠다는 전화가 왔다. 단도직입적으로 빨리 내려와서 교회를 맡으라는 것이다. 정년이 다 되어간 줄은 알았지만 어이가 없었다. 시무 장로로서 본 교회에서 그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가정 형편상 피치 못한 일이었다 하더라도, 서울로 이사한 나 역시 잘 못 된 처사라 할 수 있겠지만, 담임 목사님까지 이유야 어떻든 후임 목사님도 없는데, 교회를 비워두고 떠난다니 기가 막혔다. 하지만 장로라는 직분 때문에, 다른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답은 불문가지였다. 집사람과 함께 갈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만, 집사람은 그때만 하더라도 손자를 돌봐줘야 하기에, 부득불 열일 제백사하고 혼자 가방 하나 달랑 메고 내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정년퇴직하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시골집을 월세로 주고, 교회 행사나 절기 때 내려가면 이용하려는 심산으로, 작은 방은 빈방으로 남겨두었기 다행이었다. 간단한 주방 기구는 물론 이부자리, 간이 탁자까지.
교회를 담당한다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은 예견했지만, 애송이 장로가 직접 당하고 보니 정말 난감했다. 새벽기도회, 수요예배, 구역예배는 말할 것도 없고 주일 대 예배를 위하여 설교한다는 것은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그때 대 예배에 설교하기 위하여 애쓰고 애썼던 일들을 어찌 낱낱이 다 털어놓을 수 있으랴. 그건 그렇다 치고 문제는 새벽기도회였다. 설교가 문제가 아니라 시간에 맞춰 일찍 일어나 몸단속하고 교회로 나가는 것이, 하루도 이틀도 아니고 속된 말로 죽을 맛이었다. 어떤 때는 밤중에 일어나 기다리고, 어떤 때는 아예 잠을 설치고 밤을 새운 때도 있었다.
생각 끝에 자명종 탁상시계를 하나 사볼까 하고 시계점을 기웃거리다 때마침 아는 김 목사님을 만났다. 사정 이야길 했더니, 부활절 특별 새벽기도회 참석자를 위하여 선물로 사서 나눠주고 남은 여분이 있으니 하나 주겠단다. 몸통은 엷은 푸른색이고, 크기는 국그릇 정도, 동그랗고 하얀 바탕에 검은색 아라비아숫자가 선명한 자명종 탁상시계였다.
휑하게 텅 빈 방에 혼자 있다가 친구가 하나 생긴 것이다. 한밤중에 잠들었을 때도, 일어나 일 할 때도, 내가 묵상기도하고 있을 때도 그는 자지도 않고 어느 때나 나를 지켜주었다.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면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아침 먹을 때가 되면 아침 식사 때라고, 점심 먹을 때가 되면 정심 식사 때라고, 저녁이면 저녁이라고, 잠잘 때가 되면 잠잘 때라고, 새벽기도회에 갈 때가 되면 깊은 잠결에도 들을 수 있게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종을 울려주었다. 그는 가만히 있는 것 같으나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말도 걸어보고 싶기도 하고, 품에 안아보고 싶기도 하고, 손으로 만져 보고 싶기도 했다. 혼자 설교 연습을 하면서. 혼자 찬송을 하면서 혼자 이렇게 저렇게 살아가도 외롭지 않고 넉넉히 견디어낼 수 있었던 것은 탁상시계가 내 옆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여름밤, 바람을 쐬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먹 장 같은 밤하늘에 노란 별이 총총했다. 어린 시절 누이와 함께 멍석에 누어 별을 헤아렸던 때가 생각났다. 유성이 멀리 꼬리를 흔들며 날아갔다. 교회 십자가 불빛이 아무도 없는 밤을 밝혀주고 있었다. 내 곁에는 이 밤 아무도 없다. 가족을 떠나 혼자 있다는 것, 낙심천만이었다. 그러나 이는 <나를 위한 일이 아니니까. 하나님을 위하고 성도들을 위한 일이니까.>라고 속으로 자위했다. 쏟아진 별빛을 밟고 서서 일진 청풍에 땀을 식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허탈한 마음으로 방으로 들어서면 연이나 탁상시계가 나를 반겨주었다
날이 가고 달이 가고 세월은 말없이 흘러갔다. 시골로 내려온 것이 늦은 봄이었었는데, 벌써 초겨울 되었다. 휘영청 밝은 달빛이 혼자 산 창문에 을씨년스럽게 빛을 던져주고 있었다. 교회를 떠맡은 지 6개월쯤이 됐을까? 어려움도 많았지만 때로 기쁨도 많았다. 그 동안 교회 재정도 많이 좋아졌다. 교회인들은 내가 그만하겠다고 할까 봐 안절부절 초조해했다. 하지만 이 일은 내가 끝까지 해야 할 일은 아니란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담임 목사님을 모셔오기로 하고 중직 자들께 내 뜻을 구구히 설명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을 확실히 알게 심어줬다. 그렇게 마음을 결정하고 나니 무거운 돌 짐을 내려놓은 것과 같이 심신이 홀가분 해졌다. 얼마후 다임 목사님을 모시고 취임예배를 올릴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서울로 올라오면서 옷 가방 속에 탁상시계를 챙겨 가지고 왔다. 그러나 사람의 일이나, 세상일이나 모든 일은 예측할 수 없는 것. 서울에서도 시골에서처럼 항시 내 침실 머리맡을 떠나지 않고 늘 지키고 있던 탁상시계가 예고도 없이 멈춰 서버렸다. 약을 가라 끼어 보기도 하고, 이리저리 살펴도 봤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고장이 난 것이 아니라 수명이 다한 것이다. 그는 내 곁을 떠나갔지만 나는 그를 보내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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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모처럼 시 아닌 수필을 오렸습니다. 선처해 주시고 부족한 점이 있으면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