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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페르세폴리스"
팔레비 샤의 개혁 약속에도 불구하고 이란에서의 소요사태는 전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1979년 1월 21일, 제2도시인 마슈하드가 반군세력의 손에 들어가면서 이란 제국이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확해졌습니다. 혁명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투데당(공산주의)과 이란 민주운동(자유주의)의 양대 운동세력이 이란 자유운동연합(JAMA), 국민전선, 인민전사기구(MEK) 등을 매개로 타브리즈에 이란 민주공화국 정부를 수립할 무렵, 이슬람주의자들 역시 이스파한에 이란 이슬람공화국 정부를 세웠습니다.
다만 문제는 민주공화국 정부가 (원래 투데당의 일파였던) 쿠르드민주당을 다시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그들에게 폭넓은 자치권을 제안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는 이라크 내 쿠르드족 사회를 자극했고, 이들은 사실상 사담 후세인 부통령이 주도하는 이라크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중입니다. 이란 제국정부는 테헤란 근방 정도만을 간신히 지키는 상황이었지만, 후세인이 호메이니를 암살하고 팔레비를 지지하며 이란 상황에 전격 개입하는 비상사태 속에서 사태는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은 팔라비의 제국정부에 코가 꿰였고, 소련은 원래 우방국이던 이라크와 새로운 우방인 이란 민주공화국 정부가 자중지란을 벌이는 상황에서 고심 중인 모양입니다. 물론 그 덕분에 아프가니스탄 개입은 후순위로 미뤄졌지만 말입니다. 중국은 이 분쟁에서 중립을 지킬 지, 아니면 적극적으로 개입해 세계정세를 유리하게 만들 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이란의 상황은 꾸준히 좋지 않았습니다. 1978년부터 본격화된 반 팔라비 투쟁은 미군이 해병대 병력을 증파하면서 반미투쟁의 성격을 강하게 띄게 되었고, 서쪽에서 벌어진 무력충돌은 이란에게 향하는 관심을 줄이는 데 한몫 했죠. 시아파 근본주의 지도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이라크 모술에서 사담 후세인 부통령이 보낸 암살자들에게 잔인하게 암살당하자, 이란 내 이슬람주의 세력은 구심점을 잃고 우왕좌왕하기 시작했습니다.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가 임시 수반을 맡긴 했지만, 그의 오른팔 알리 하메네이와 일부 세력을 제외하고 그의 친위세력이라고 할 만한 이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스파한의 이슬람 공화국 임시정부의 파벌은 십수 갈래로 나뉘어 크고작은 반목을 지속했죠.
이슬람주의자 측이 내홍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면, 민주공화국... 즉 인민전선의 문제점은 조금 더 간단했습니다. 네. 그들은 힘이 없었습니다. 소련 접경지대와 북서부만을 간신히 장악한 이들은 소련의 적극적 개입 없이 자력으로 살아남을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급한 대로 쿠르드족을 끌어들이긴 했지만 이는 오히려 강군을 보유한 이라크의 침공을 불러왔을 뿐이었죠. 모든 지표가 이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소련 내 여론이 무장 개입 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을 때, 베이징에서는 이슬람공화국 내 자유주의자 및 사회주의자들을 끌어들여 조금이라도 지형을 유리하게 만드는 1안과 소련의 무장개입에 적극 호응하는 2안이 대두하고 있었습니다. 우선 화궈펑 주석과 덩샤오핑 총리는 후종밍 상장을 모스크바로 파견해 소련의 의중을 확인하는 한편 그들과의 소통을 맡겼습니다. 그때, 터키 모처에서 미국 대표단과 이라크 대표단이 비공개 회동을 가졌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에 류메이란은 '직접' 터키로 행차해 터키 내 이슬람주의 정당인 국민구제당원들에게 접근하기로 했습니다. 정보는 놀라웠는데, 바로 미국이 (원래 소련의 우방국이던) 이라크의 사담 정권과 결탁해 북서부의 민주공화국 세력을 타격, 정부군에게 활로를 만들고자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정보는 후종밍을 통해 고스란히 소련 측에 전달되었고, 안드로포프 서기장은 스페츠나츠 병력 약 34,000명을 이라크와의 전선에 투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중국 역시 지원단과 소수 군사고문단을 보내는 데 동의했습니다. 그 결과 민주공화국은 이라크군을 다시 국경 밖으로 밀어낼 수 있었습니다. 물론 남부에서 이슬람주의 세력이 북상해 몇몇 지점들을 뺏기고 테헤란 입성의 기회 역시 놓쳤지만 말이죠. 그러나, 언제나 활로는 있었습니다. 테헤란 코앞까지 이슬람주의자들이 당도하고 이에 고무된 테헤란 시민들이 황궁과 미대사관을 포위하면서 미국의 입장이 매우 다급해진 것이었죠.
2월 1일, 미 백악관 외교안보수석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를 필두로 한 미국 대표단과 소련 외무부 제1부서기 알렉산드르 베스메르트닉 등의 소련 대표단이 홍콩에 도착했습니다. 물론 이란 이슬람정부 대표 알리 하메네이와 민주공화국 대표 바흐람 아프잘리 제독도 함께였죠. 5인의 일행들을 포함한 중국 대표단 역시 중재역으로 참석했습니다. 미국은 하루빨리 이란에서 손을 떼고 소련과 이슬람주의자들이 뒤엉켜 싸우도록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미 대사관 직원들과 해병대가 여전히 테헤란에서 발이 묶였다는 점이었죠. 중요한 시점에 기민하게 행동하지 못한 탓이었습니다. 하메네이가 팔라비 국왕의 인도/모든 외국군의 철수라는 2원칙을 설파하고 있을 무렵, 중국 대표단은 비밀리에 소련 대표단에게 접근해 친소-친중 국가들의 공관을 먼저 민주공화국 영공을 통해 선제 철수시키자는 제안을 날렸습니다. 이 작전은 즉시 실행되었고, 소련, 중국, 인도, 폴란드 등의 대사관들이 일제히 철수를 시작했죠.
이렇게 되자 위기에 봉착한 것은 미국이었습니다. 놀랍게도, 황궁과 주테헤란 미대사관 사이에는 비밀 통로가 이어져 있었고, 팔라비 국왕은 이란인 노무직원으로 위장해 육로로 탈출할 계획이었습니다. 미대사관에 시위대가 진입하려 하자 미 해병대와 시위대 간의 교전이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재난에 가까웠습니다…. 미 대사관 직원들은 그대로 분노한 시위대에게 사로잡혀 살해당하거나 아직 철수를 준비중인 친소국가 대사관 문을 두드려댔습니다. 인도 대사관 등을 통해 안전하게 철수하는 데 성공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반 이상은 그대로 최후를 맞았습니다. 특히 대사가 사망했고, 팔라비 국왕 역시 그대로 끌려가 약식 혁명재판 끝에 M2 기관총의 일제사격을 받고 처참하게 사망했습니다. 전 세계가 경악했습니다.
샤오나이가 제안한 바에 따라, 미소중 3국은 즉시 안보리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안보리에서는 유엔헌장 제41조와 제42조에 의거해 이란 이슬람주의 세력에 대한 경제 및 군사제재안을 통과시켰고, 이란 상공이 비행금지구역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중국 역시 약 40,000명의 병력을 파견했고, 후종밍이 파견군 총사령관이자 주이란 유엔군사령부 간사로 나가게 되었죠. 그의 군사적 능력은 역시 발군이었습니다. 소련군 사령관 세르게이 소콜로프 원수와의 합동작전으로 북부를 양익포위해 단번에 이슬람주의자들의 주력을 포위섬멸한 것입니다.
한편 페르시아 만 일대에서는 미 인도양함대를 비롯한 서방 측의 함대가 호르무즈 해협을 장악하고 이란 해군을 '무'로 돌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대참사가 또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짙게 낀 안개, 변화무쌍한 날씨, 각 나라 군대 간의 협동 부재 등 갖가지 문제가 겹쳐 상륙작전이 처참한 실패로 끝나게 된 것입니다. 이 작전에서 나토군은 무려 6,400명 가량의 인명피해와 장비피해를 강요받으며 부랴부랴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페르시아 만 자유 작전이라고 명명된 이 작전은 그야말로 '페르시아 만의 치욕'이 되었습니다. 2차대전 이래 단일작전 최대 피해를 입은 미국에서는 곧바로 포드 행정부의 무능을 질타하는 일대 시위가 벌어졌고, 대사관 사건 이후 하원에서 통과된 포드의 탄핵안이 상원에서도 인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보도가 줄을 이었습니다. 결국 포드는 버티지 못하고 사임, 대표적인 공화당 진보파인 넬슨 록펠러가 대통령직을 인수받았죠.
이후 5월까지 전개된 작전에서 민주공화국군과 바르샤바조약기구군, 중국군, 파키스탄군 등은 남부 해안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해 곳곳에 공산주의 소조(지역소비에트)를 설립한 상태였습니다. 약속대로 '민주 선거'가 치러졌는데, 결과는 누구나 예상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미국의 노골적인 선거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민심 면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투데당 주축의) 이슬람사회주의통일당 측이 대부분의 의석을 장악했죠.
이란 내전의 여파는 실로 거대했습니다.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퇴진했고, 복수주의와 염전정서가 동시에 피어올랐습니다. 유가는 배럴 당 37달러까지 치솟았습니다. 많은 국가들이 경기침체에 시달렸죠. 이제 막 개혁의 첫삽을 뜬 중국 역시 이대로라면 타격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당 중앙은 샤오나이를 중동에 파견해 급하게 이집트에 원전수주를 조건으로, 시리아와 이라크에 저곡가 곡물공급을 조건으로 원유 수의계약을 체결했습니다.
문제는 소련과 함께 개혁을 진행하며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두고 있던 동구권 국가들이 세계적 경기침체로 직격타를 피할 수 없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수출상대국들이 전부 무역보호조치와 긴축조치로 일관하고 서구의 채권자들이 만기연장을 거부하는 상태에서 동구권 국가들은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불어난 채무통지서를 받아들어야 했습니다. 특히 폴란드에서는 경제난에 힘입어 자유노조의 지지율이 상승하고 공산당 정권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졌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동구권 순방을 선언하면서 가톨릭 세력의 준동 역시 걱정해야 했죠. 사면초가 상태에 놓인 폴란드 정부는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교황과 비밀 대담을 한 적이 있던 톰페티 라마를 국빈으로 초청했습니다. 카니아 서기장과 야루젤스키 부서기장 겸 국방장관은 톰페티로부터 놀라운 조언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어차피 기독교는 종교이기 이전에 전통문화이자 도덕윤리의 성격을 띄는데, 국가에서 적당히 '관리'할 수 있다는 것이었죠. 즉 폴란드 가톨릭계를 역으로 폴란드 공산정부가 장악해버리고서 미사를 허용하고 종교인들의 활동을 허용한다면 타격을 최소화할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종교에 대한 '기동방어'라는 아이디어를 야루젤스키는 몹시 흡족해했고, 이는 동구권의 대가톨릭 전략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지난 중동전쟁에 이어 이번 이란 사태까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의 지긋지긋한 싸움을 바로 앞에서 지켜본 류메이란은 신장위구르자치구에 대한 모종의 조치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에 다다랐습니다. 중앙에서 이들에 대한 가혹한 통치책을 사용하고 자생적 극단주의자들을 키우는 악순환이 벌어질까 염려했던 그녀는 우선 지역 내 극단주의자들을 솎아내는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이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하고 민족문화를 복원하는 일은 톰페티에게 맡기면 되었으므로, 일을 한결 편하게 할 수 있었죠. 국가안전부는 역정보를 퍼뜨려 이에 반발하는 극단주의자들의 명단을 확보했고, 가상의 '미끼용' 극단주의 단체를 설립해 그들을 유인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압둘 하킴 마흐둠을 비롯한 극단주의자들이 체포되거나 사살당했죠. 위구르는 일단 안전해졌지만, 보다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기고 말입니다.
10. 글라스노스트
중동의 모래바람을 맞으며 꼴통들과 싸우던 것도 어느새 옛 추억이 될 만큼 세월이 훌쩍 지났습니다. 혼란스러운 80년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농업 생산량이 순조롭게 증가하고 하방된 홍위병들 역시 “당의 지도대로” 목가적이고 평화적인 농촌의 정취에 흠뻑 빠져들었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한번 대차게 열을 냈으면 힐링도 하고 하면서 머리를 식혀야지요.
아무튼 당 중앙은 오늘도 열띤 토론에 빠졌습니다. 백화제방파의 사상적 거두 중 하나인 시중쉰이 주장한 광동성 경제자유지대 건설안은 일부 당원들에게서 놀라운 호응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다만 천윈을 필두로 한 반대파는 “새를 키우더라도 새장에서 키워야 한다”며 팽팽하게 맞서는 중이죠.
한편 모스크바에서 온 소식 역시 베이징을 뜨겁게 달궜습니다. 신사회주의파의 덩샤오핑은 소련의 소브레콤 개혁을 열심히 연구하면서, 해안에 서방 세력의 경제지대를 건설하는 것보다는 유라시아 경제권을 완성하는 것이 중국에 도움이 된다는 의견을 개진하고 나섰습니다.
화궈펑 동지는 오랜만에 백화제방파와 신사회주의파 사이의 의견대립 한가운데 서게 되었습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그만일까요? 아니면 새를 새장에 넣고 키워야 할까요? 두 의견 사이에 절충점은 없을까요?
1979년 7월에 개최된 11차 공산당 4중전회에서 시중쉰이 제안한 '광동 경제자유지대'안은 순식간에 베이징을 토론과 정쟁의 장으로 뒤바꿔 놓았습니다. 또한 비슷한 때 국가계획위원회의 위안차이나가 영국 노동당 정권과 맺은 중영경제협력에 관한 양해각서 역시 이 논쟁의 뜨거운 화두가 되었습니다. 영국 노동당은 광부 파업을 강경진압하고 BP사의 절반을 중국에 매각했으며 금융규제를 완화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었고, 이는 중국과의 교역 확대 및 시장 진출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죠. 미국 대선에서 '우파' 민주당의 조지 월리스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세계 정세는 완연히 변해 있었습니다. 서구권은 오일쇼크로 인한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일제히 제조업 비중을 줄이고 금융부문을 확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이들은 적극적으로 저렴한 노동력을 사용할 수 있는 개발도상국에 아웃소싱을 준비하고 있었던 셈이죠. 그리고, 그 개발도상국의 대표는 중국이었습니다.
한편 소련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소브레콤, 그러니까 '현대공산주의' 개혁이 소기의 성과를 보이고 있을 때쯤 터진 오일쇼크는 소련에게 이득으로 작용했지만, 동유럽 국가들에게는 막심한 손해로 작용했습니다. 공산권의 안정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중국과 동남아시아, 파키스탄 등을 단일 블록으로 끌어와 거대한 유라시아 경제블록을 창설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소련의 실세인 로마노프 감찰위원장은 끊임없이 중국에 비정기 특사를 보내 코메콘 가입 의향을 물어봤습니다. 물론 위안차이나와 샤오나이를 필두로 한 재무-산업-개혁개방 라인은 연일 말을 빙빙 돌리며 대답을 회피하기만 했죠. 그러나 언젠가는 방침을 정해야만 했습니다.
1980년 11월에 열린 11차 5중전회는 이 지긋지긋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것을 천명한 상태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이 회의에서 주도권을 잡은 것은 적극적인 시장개방과 경제특구 설치를 주장하는 백화제방파였습니다. 화궈펑의 측근인 5명의 일행들 역시 제한적으로나마 경제특구를 설치하는 데 동의하는 입장을 취했죠. 분위기가 이와 같이 돌아가자 천윈은 류메이란을 조심스레 불러내 우려를 표했지만, 이미 대세는 거의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나마 지난 5년간 급속도로 진전된 소련과의 관계를 지나치게 해쳐서는 안된다는 일각(주로 신사회주의파)의 주장에 따라 류메이란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지선을 우루무치로 잇는 식으로 체면치레를 하자는 의견 역시 제시했습니다.
친소 신사회주의파와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후종밍마저 경제특구안에 찬동하는 모습을 보이자, 리셴넨을 비롯한 이들은 자잘한 부분에 태클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다롄에 특구를 여는 것은 후종밍의 개인 사리사욕을 위한 것이네, 샤먼은 대만령 진먼다오와 가까워서 안보위협에 시달릴 것이네, 하고 말이죠. 그러나 대세를 뒤집는 것은 사실상 불가했습니다. 샤오나이와 위안차이나는 칠판을 가져와 중국이 얻게 될 경제적 이익을 수치화하면서까지 특구 개방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결국 다롄, 푸동(상하이), 샤먼, 선전, 하이커우의 5곳에 경제특구를 개방하는 안이 통과되었습니다. 류메이란이 제안한 우루무치 TSR 지선 연결안은 톰페티의 내륙지역 균형발전론과 결합되어 칭하이성까지 확장되었죠. 그 외에 청두-라싸 지선의 부설, 우루무치-시닝-청두-충칭-우한-난징-상하이 대륙횡단철도 장기계획 역시 승인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소련 지도부는 실망감을 굳이 감추지 않았습니다.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외무장관이 직접 방송에 나와 중국의 친미적 외교방침에 유감을 표명했을 정도였습니다. 중국에서도 "상황이 안정되면 코메콘에 옵저버로라도 가입하는 것을 고려하겠다"며 최대한 달래보았지만, 그들의 상심은 쉽게 펴지지 않았습니다. 반면, 서방 측은 드디어 조그마하게나마 활로가 생겼다며 쾌재를 질러댔습니다. 월리스 행정부는 법인세를 인하하고 금융규제를 완화하는 한편 사회복지 역시 확대한다는 '증세 없는 복지'의 야심찬 꿈을 펼쳤는데, 경제특구의 개방과 해외투자의 활성화, 그리고 그로 인한 생산단가의 하락이 이 정책의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여주었습니다. 1년 전만 해도 중국이 얼마나 야속하고 야비한 국가인지 공세를 퍼부어대던 서유럽과 미국의 언론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공산당 식 리더십의 장점", "기회의 땅 중국", "중국몽: A Dragon Awakens"와 같은 특집방송들을 빵빵 틀어댔습니다.
그야말로 중국은 밀당의 달인이 된 것입니다.
11. Black Lives Matter!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은 전세계의 공분을 사고 있습니다. 피터 빌럼 보타 총리가 이끄는 국민당 정권은 인종별 의회를 개설해 화합을 도모할 의도로 삼원제 개혁을 제시했지만, 여전히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죠. 아프리카의 혁명전파사업이 성공을 거두면서 아프리카 민족회의는 에티오피아 등 사회주의권의 강력한 후원을 받고 있습니다. 중국 또한 남몰래 조금씩 지원했고 말입니다. 좌익세력이 우세한 민족회의는 만델라 석방, 민주적 개헌을 외치며 총파업을 예고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마지막 발악으로 핵개발마저 단행하는 비도덕적인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종말을 가져올 수 있을까요?
1981년 새해를 맞은 베이징은 모두가 긴 연휴를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당 중앙위원회는 하루도 쉴 수 없었습니다. 아디스아바바의 '자유 아프리카 라디오'를 감청하던 국무원 문화부의 한 관료가 상부에 심상찮은 내용을 보고하자마자, 긴급 정치국 회의가 소집된 것입니다. 내용인즉슨, 남아프리카 공화국 국민당 아파르트헤이트 정부가 유색인종들의 반발을 점점 감당하기 힘들어하고 있으며, 상황에 고무된 아프리카민족회의 강경파 일부가 총파업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국가안전부와 외교부에서는 남아프리카의 상황에 대한 조사에 돌입했습니다. 그리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판첸 라마 10세와 함께 참관인으로 정치국 회의에 들어온 톰페티는 평소의 인자하고 중후한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죠.
"지금 당장 나를 주남아공 중국 대사로 임명하여주시오. 이제껏 세계정세를 볼 일이 없었다지만 이런 잔혹한 일이 벌어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내가 날아가서 불쌍한 흑인들을 지원하겠소!"
물론 중국은 아직 남아공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전이었지만, 차오관화 외교부장은 그 대안으로 톰페티를 아디스아바바의 자유 아프리카 라디오 방송국에 파견하기로 했습니다. 로디지아의 카난 바나나 정권, 모잠비크의 공산정권, 탄자니아의 니에레레 정권 등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적대적이며 좌익 성향이 강한 국가들이 연일 아프리카 민족회의를 지원하는 가운데 중국이 남아공 유색인종들의 궐기를 적극 지지한다는 목소리를 낸다면, 제3세계와 반제국주의 진영의 대표인 중국이 정말 진정한 지도자로 거듭날 수 있게 된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톰페티가 에티오피아로 떠나고 나서, 베이징에서는 남서아프리카 신탁통치령, 즉 '나미비아'의 상황에 집중했습니다. 샤오나이의 외교부 국제경제사 시절 인맥들과 류메이란의 국가안전부 정보망을 동원해 조사한 결과, 이곳의 상황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처참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권은 남서아프리카 SWAPO 공산반군과의 싸움을 버거워하고 있었으며, 각종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행위가 자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상황은 이러했습니다. 중소관계가 급진전되며 중국은 앙골라 내전에서 우익 UNITA 반군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고, 그 결과 소련과 쿠바가 지원하는 MPLA 정부군이 반군을 코너에 몰아버렸으며, 이는 남서아프리카의 상황에도 크나큰 영향을 미친 것. 학살, 강제이주, 불임시술, 강제낙태, 심지어 생화학무기의 사용까지 의심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더 끔찍하고도 안타까운 사실은 이미 1979년에 UN 인권이사회에서 남서아프리카의 인권실태를 조사한 보고서가 발간되었음에도 서구 국가들이 무관심으로 일관했다는 점이었죠. 이 사실은 그대로 아디스아바바의 톰페티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국제사회의 조언조차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자랑스럽게 학살행위를 자행하는, 실례하겠습니다, 이른바 '미친 개'들이 턱 밑에 사는 것은 공포스러운 일이 아닙니까? 미친 개에게 다치지 않기 위한 방법은 두가지 뿐입니다. 원 주인에게 목줄을 채우게 하거나, 아니면 직접 걷어차서 다시는 덤비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후자는 너무 힘들며 귀국에서도 많은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 아닙니까? 제가 알기로 현재 개의 목줄을 놓쳐버린 주인은 목줄을 한 번 쥐면 다시는 이빨을 드러내지 않도록 잘 교육할 사람입니다. 그가 모진 고통 속에서 '의심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어서 도와야 합니다! 만델라를 석방하라! 학살 정권 물러가라!"
"아프리카인들에게 고합니다. 남서 아프리카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나미비아의 한 여아가 아비를 전장에서 잃고 어미를 군인에게 강간당하고 하루를 먹을 돈 이 없어 독가스에 중독되 초경조차 하지 않은, 그리고 하지도 못하게 된 몸으로 매춘을 강제당한다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남의 일이 아닙니다. 남의 집에 난 불을 끄지 않는다면 그 불은 곧 내 집에 옮겨붙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권리를 지킬 사람은 여러분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들께 아주 어울리는 말이 하나 있군요. 지배 계급들로 하여금 민주주의 혁명 앞에서 벌벌 떨게 하라! 흑인이 혁명에서 잃을 것이라고는 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전 세계다. 남아공의 흑인이여, 단결하라!"
인도 발음이 약간 섞인 영국식 영어 억양으로 진행된 이 방송이 전파를 타자, 남아공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남아공의 흑인들은 (국가안전부가 때마침 살포한) 환구시보와 인민일보를 애독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이를 아프리카너 민족의 정론지로 여기는 이들까지 적지 않았습니다. 서구 국가들은 환영하면서도 어딘가 미묘한 반응을 보였지만,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이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은 명확했습니다. 데스몬드 투투 주교와 - 심지어 - 교황마저 민족회의를 지지하고 남아공 정권을 규탄하기에 이르자, 보타 총리는 호주로의 망명을 택했습니다.
결국 후임자인 빌럼 데클라르크 산업부장관 겸 총리 대행이 민족회의 측에 항복의 의사를 전달하면서 남아프리카의 혁명은 완수되었습니다. 유색인종의 역사적인 첫 투표권 행사와 함께 처음 열린 총선에서 민족회의는 85% 이상의 의석을 점유했고, 넬슨 만델라 정권이 수립되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나라, 새로운 세계는 용서와 화해를 바탕으로 건설되어야 한다"는 말과 함께 남아프리카를 조용히 개혁해 나갔죠.
이후 중국에서는 아프리카개발원조기구(ADAO)를 설립해 샤오나이를 총장에 임명했습니다. 샤오나이는 '단계별 인프라 개발원조지침'을 수립해 교육-위생-지방행정의 산업화 이전 3대 기본충족조건을 설정했으며, 동남부 아프리카 일대에 성공적인 ODA를 실시했습니다. 친서방 노선을 견지하던 보츠와나는 친중노선을 타기 시작했고, 홀로 아파르트헤이트를 지지하며 주변국의 우익 반군을 후원하던 말라위의 헤이스팅스 반다 대통령은 측근이었던 마이클 음웨모 중령이 획책한 쿠데타로 실각해 결국 대세를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야흐로, 남아프리카는 아프리카인의 것이 되었습니다.
12.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1981년 8월 9일, 한국에서 비공개로 베이징에 대표단을 보냈습니다. 이들은 1986년 아시안게임, 그리고 1988년 올림픽 유치를 위한 중국의 협조를 원하는 듯 합니다. 대표단의 주요멤버로는 노태우 정무장관, 허문도 대통령문공비서관, 그리고 정몽구 현대그룹 이사가 있습니다.
현재 86 아시안게임은 한국의 개최가 거의 확실시된 상황이지만 88 올림픽의 경우 상황이 조금 복잡합니다. 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이 나름 성황리에 끝나면서 몇몇 동구권 국가들이 유치신청서를 제출했고, 동독과 체코슬로바키아가 드레스덴-프라하 공동개최안을 내밀며 동구권 표심이 이동하고 있다는 분석입니다. 물론 일본 나고야 역시 경쟁자입니다. 이 상황에서 아프리카 및 제3세계 표심을 좌우하는 중국의 선택이 몹시 중요해졌으며, 한국 측은 매우 적극적으로 회의에 임하려 합니다.
신임 문화부장으로 임명된 류메이란이 1981년 3월 문화교류 목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도착했을 때, 국가안전부의 뤄칭창 부장은 그녀에게 한 가지 사항을 부탁했습니다. 북한의 독단적이며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움직임의 징후가 보이니 그 지점을 파악해 달라는 부탁이었죠. 뤄 부장은 그 정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습니다. 메이란이 아는 뤄 부장은 정보의 처리에 대해서만은 매우 철두철미하며 아주 디테일한 부분까지 관여하려고 드는 성격이었기에, 그녀는 이를 정보 처리에 대한 '백지 수표'로 인식했습니다. 애초에 옛 부하였다지만 이제는 엄연한 부장이 된 메이란에게 이 일을 직접 부탁한다는 것은 모든 사항에 대한 일임을 의미했으니 말입니다.
그리하여, 북한이 계획하던 모든 도발행위와 간첩 남파행위, 그리고 대규모 도발에 대한 징후가 탄로났습니다. 이는 일본 좌익 야당을 통해 대한민국의 야당 신민당에까지 흘러들어갔죠. 신민당의 김영삼 총재가 긴급히 북괴 규탄 기자회견을 열어 "어떻게 간첩 잡는 안기부가 일개 야인들보다 국가안보에 무지할 수가 있냐"며 성토를 퍼붓자, 국가안보를 정권유지의 수단으로 써먹던 전두환의 신군부 정권은 정치적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국풍81이나 아시안게임, 올림픽 등으로 여론을 돌리려는 계획이 이제 실행되기 일보 직전이었기에 타격은 더욱 뼈아팠죠. 신군부 정권은 이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올림픽을 유치해야 했습니다.
한편 북한 역시 정보유출 사태를 직면하고 한 차례의 대격변을 겪었습니다. "공화국 수뇌부 안에 두더지가 있다"는 말이 나돌았고, 김정일은 이 때를 틈타 정치국의 위협세력과 학자, 예술가, 언론인 등을 무차별적으로 숙청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 북한 정권은 중국과 소련의 명목상 외교관 - 즉 화이트 요원 - 들에게 줄줄이 페르소나 논 그라타 처분을 선사하며 중국이 이전에 지원을 중단했던 아시아 각지의 마오주의 반군들과 친밀한 관계를 쌓기 시작했습니다. 베이징과 모스크바는 매우 격분했죠. 이제 한반도 정책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베이징에 도착한 한국의 협상단은 1) 중국 경제특구(구체적으로는 주로 다롄과 상하이)에의 한국 기업 진출, 2) 한중수교, 3) 올림픽 개최 지원의 세 가지 의제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협상에 돌입했습니다. 중국 입장에서 한국과 친하게 지낸다는 것은 그리 나쁜 일이 아니었습니다. 대만의 거의 마지막 남은 주요 수교국인 한국이 중국과 수교한다는 것 역시 높은 상징성을 지녔죠. 올림픽 개최권 역시 서울이 가져가도 그리 나쁜 일이 아니었습니다. 소련과의 관계 악화를 걱정했지만, 위안차이나와 류메이란이 알아본 결과 소련도 동독과 체코슬로바키아가 어려운 형편에 올림픽까지 개최한다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상황이었죠. 협상은 급진전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조건이 맞추어진 상황에서 마지막까지 조율에 조율에 거듭했던 건은 바로 한중수교의 안건이었습니다. 대만과의 단교는 신중하게 결정해야 했기에, 한국 측 협상단은 이리저리 말을 돌리며 즉답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정작 대만의 국민당 정권은 고속성장을 경험하는 한국에 은근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어 올림픽 유치전을 뒤에서 사보타주하고 있었지만 말이죠. 결국 미국과 영국, 일본이 그랬듯 우선 교류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몇 년 내에 한중수교를 마무리하며 대만과도 단교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식으로 협상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윽고 바덴바덴에서 열린 IOC 총회는 서울을 1988년 하계올림픽의 개최지로 선정했죠.
이 협상으로 인해, 한국은 중국과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아마 10년 내로 한국은 안보적으로 미국과 가까이 지내더라도 경제적 손실을 우려해 중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중국이 먼저 한국을 협박하거나 힘으로 찍어누르려 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1.
- 이름: 류메이란(刘梅兰)
- 플레이어: 렌지파일
- 생년월일: 1942년 3월 16일
- 성별: 여성
- 민족: 혼혈
- 모국어: 중국 보통화
- 사용가능언어: 러시아어, 영어(약간)
- 능력치:
통솔(8)/체력(10)/지능(10)/지혜(10)/매력(17)
- 기술:
지휘(0)/관리(0)/사격(1)/격투(0)/조사(3)/연구(0)/설득(3)/토론(1)/기만(2)/협박(0)/선동(2)/심문(1)/매혹(3)
- 트레잇:
#Fake News / 집단 간 갈등을 증폭시키고 이간시키는 데 +1 모디파이어.
- 잔여포인트: 1
- 배경:
충칭 태생의 류메이란은 (아마도) 백계 러시아인인 아버지와 (역시 아마도) 치앙족(서하인의 후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모든 게 추정인 이유는, 메이란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군의 공습으로 부모님이 사망하였기 때문이며, 메이란은 충칭에서 암약하던 공산당의 간부인 류한이라는 여성에게 입양되었습니다.
중국의 적화 후 충칭 시장이 된 덩샤오핑과 군부의 실력자 양상쿤과 함께 손을 잡은 류한은 류메이란을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키웠습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노선을 자주 비판하는 등 '이상한 징조'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어머니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메이란은 1962년 중인전쟁에 자원하여 인도군과 맞서 싸우기까지 했습니다. 당시 메이란은 모병포스터의 모델이 될 정도로 유명세를 끌었으며 촉망받는 청년당원이 되었습니다. 공청단의 간부가 되기도 했죠.
그러나 운명의 그 해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고 양상쿤과 덩샤오핑 모두 위기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메이란의 양모인 류한의 과거도 밝혀졌습니다. 류한은 과거 28인의 볼셰비키를 비롯한 소련 유학파를 지지하던 당간부로써 대장정의 대참사에 책임이 있었고, 그래서 양상쿤과 친분이 있었으며, 그 과거가 30년을 돌아 다시금 닥쳐온 것이었습니다. 혁명의 배신자라 낙인찍힌 류한은 조리돌림을 당한 끝에 음독자살하였습니다. 혁명가의 딸에서 반역자의 딸이 된 메이란은 1년 동안 수감되었고, 그 이후에는 장시성의 석유기계 공장에서 천윈의 밑에서 일하며 친분을 쌓았습니다.
메이란은 마침내 천윈과 덩샤오핑이 1973년 저우언라이에 의해 복권되면서 함께 복권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음독자살할 때 마오 주석도, 덩샤오핑도, 양상쿤도 도와주지 않은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중국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만을 추구해야 하며 다른 모든 노선은 수정주의에 불과하다고 믿는 류메이란은 천윈의 충복입니다. 하지만 다른 그 누구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2.
- 이름: 위안차이나(袁彩䛔)
- 플레이어: dear0904
- 생년월일: 1939년 9월 1일
- 성별: 남성
- 민족: 한족
- 모국어: 중국 보통화
- 사용가능언어: 영어, 노어, 프랑스어(약간)
- 능력치:
통솔(17)/체력(10)/지능(12)/지혜(10)/매력(9)
- 기술:
지휘(0)/관리(3)/사격(0)/격투(0)/조사(0)/연구(4)/설득(2)/토론(2)/기만(0)/협박(0)/선동(0)/심문(0)/매혹(0)
- 트레잇:
#웃는 사자 / 당원 및 동지들에 대한 설득과 매혹에 +1 모디파이어.
- 잔여포인트: 1
- 배경:
위안차이나는 후난성 출신 관리 위안졔치(袁解奇)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전쟁시기의 혼란기중 몇몇 군벌의 눈에 들어 입신양명할 많은 기회가 있었으나,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사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조금은 후회되었기에, 자식에게는 그러지 말라는 뜻에서 "비단줄을 붙잡으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위안졔치는 아들을 훌륭한 관리로 키워 내었습니다.
칭화대학 농대를 졸업해 허난성에서 대약진운동의 폐해를 수습하는 농경제진흥소조 관료로 일하던 차이나는 1971년 우연한 기회를 잡았습니다. 9.13 사건의 수습과정에서 마침 고향이자 정치적 기반이었던 후난성 지역혁명위원회를 지도하던 화궈펑 정치국위원에게 조언할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화궈펑은 그의 답변에 감명을 받아 위안차이나를 정식 공산당원으로 추천했고, 이내 자신의 측근으로 삼았습니다.
이제 '사람좋은 관료' 화궈펑은 국무원 총리가 되었고, 마오 주석의 후계자로 낙점되었습니다. 위안차이나는 '주군'의 말도 안되는 성공에 매우 기뻐했으나, 그 책임감은 어느 때보다 무겁습니다. 그의 이름은 주석과 함께 할 것입니다.
3.
- 이름: 샤오나이(肖奈)
- 플레이어: 카라멜 마끼아또
- 생년월일: 1942년 10월 1일
- 성별: 남성
- 민족: 한족(북방계)
- 모국어: 중국 보통화
- 사용가능언어: 헝가리어, 영어, 독일어, 러시아어
- 능력치:
통솔(12)/체력(10)/지능(12)/지혜(10)/매력(12)
- 기술:
지휘(0)/관리(3)/사격(0)/격투(0)/조사(3)/연구(1)/설득(2)/토론(2)/기만(0)/협박(0)/선동(0)/심문(0)/매혹(0)
- 트레잇:
#데이터 사이언스 / 현 상황의 파악과 조사에 +1 모디파이어.
- 잔여포인트: 4
- 배경:
샤오나이는 중국 공산당 수뇌부인 샤오즈푸의 자식으로 태어나 공산당 수뇌부의 일원으로 자랐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샤오즈푸는 마오쩌둥의 최측근으로 정강산 시절부터 공산당의 자금 수급과 재정 관리를 도맡아 했으며,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는 재정부 부장과 상무부 부장을 역임했습니다.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데다, 다른 형제들이 하나둘씩 전란에 휩싸여 죽고 그만 유일하게 남은 터라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습니다. 별 탈 없이 초중고를 졸업한 뒤. 대학도 국내에서 다닐까 했으나. 해외에서 더 많은 경험을 쌓아보면 어떻겠냐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동유럽으로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가 선택한 유학지는 헝가리였습니다.
부다페스트 칼 마르크스 대학에서의 유학생활은 그에게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1956년 헝가리 혁명과 소련군의 잔혹한 진압을 대학 친구들에게 듣자, 그가 태어나고 자랐을때 생긴 가치관에 조금씩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1968년 프라하의 봄 무력 진압 이후부터는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믿음마져 무너져내리기 시작했습니다.(비록 내색은 안했지만) 그리고 굴라쉬 사회주의로 만들어진 헝가리의 (다른 공산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는 그의 가치관을 크게 변화시켰습니다.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석사, 박사 과정을 거친 후 경제학 교수로 취직했습니다. 1966년 약혼녀인 베이웨이웨이(贝微微)와의 결혼을 위해 잠시 귀국한 것을 제외하면 칼 마르크스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며 헝가리에서 지내다가. 저우언라이의 부름을 받아 1975년 11월에 중국으로 귀국했습니다.
그렇게 샤오나이가 해외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을때. 조국의 모습은 매우 처참했습니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인해 경제는 파탄 직전이었으며, 반우파 투쟁으로 인한 국내의 대대적인 숙청. 그리고 문화대혁명이라는 실로 경악할만한 사건으로 인해 중국은 그야말로 인외마경이 따로 없었습니다. 귀국 이후 샤오나이는 재정부에 들어갔고, 그의 탁월한 업무능력 덕분에 고속 승진을 하여 재정부 내에서 상당히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공산당과 함께라면 신중국을 건설할 수 있다"는 말에 의구심을 품습니다. 진정한 신중국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자신의 지식을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
4.
- 이름: 라싸더챠오(拉萨的橋) (본명:톰페티)
- 플레이어: 하일레 셀라시예
- 생년월일: 1910년 10월 4일
- 성별: 남성
- 민족: 티베트족
- 모국어: 티베트어
- 사용가능언어: 중국 보통화, 영어, 산스크리트어, 힌디어
- 능력치:
통솔(7)/체력(8)/지능(18)/지혜(7)/매력(13)
- 기술:
지휘(0)/관리(1)/사격(0)/격투(0)/조사(0)/연구(0)/설득(5)/토론(5)/기만(0)/협박(0)/선동(0)/심문(0)/매혹(0)
- 트레잇:
#미소짓는 부처 / 성적인 상황을 제외한 모든 상황에서 매혹에 +1 모디파이어.
- 잔여포인트: 0
- 배경:
포달랍궁에서 전대 달라이 라마의 시중을 들던 톰페티는 영특한 두뇌를 가져 달라이 라마의 총애를 받으며 원하는 학문을 마음껏 공부하며 자랐습니다. 그는 성인이 되어 티베트 불교내에서도 알아주는 뛰어난 라마가 되었으나 1959년 티베트의 대규모 봉기와 중공의 탄압이 벌어지고,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를 떠나며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고통스러워하는 티베트인들을 불쌍히 여긴 톰페티는 차마 라싸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달라이 라마를 비롯한 많은 승려들이 인도로 망명을 가거나 투옥되어 죽는 가운데 남아있는 승려들을 규합하여 티베트인들을 안정시키고 공산당과 티베트 독립세력간의 의견차이를 좁히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평화와 공존을 위한 그의 오랜노력 덕에 티베트인들에게 대대적인 지지를 받게 될 무렵 시찰을 나온 저우언라이와 만나게 되었고 긴 설득 끝에 독립운동을 확실히 막기 위해서는 더욱 큰 자치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을 납득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후 저우언라이의 도움과 함께 몇년간 라싸의 시장으로 있으며 티베트를 발전시키고 강경파를 회유하던 톰페티는 공산당 인물들에게 '라싸강경파들과의 대화창구'라는 뜻에서 '라싸더챠오(라싸의 다리)'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자치권을 얻기 위해서는 단순히 저우언라이에게 기대며 티베트에 있을 것이 아니라 스스로 권력의 핵심에 들어가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고 저우언라이의 요청에 따라 자신을 따르는 젊은 승려들 몇을 데리고 베이징에 도착했습니다.
5.
- 이름: 후종밍(胡中明)
- 플레이어: 세르게이 비테
- 생년월일: 1930년 8월 8일
- 성별: 남성
- 민족: 한족
- 모국어: 중국 보통화
- 사용가능언어: 러시아어, 진어
- 능력치:
통솔(18)/체력(9)/지능(9)/지혜(11)/매력(7)
- 기술:
지휘(5)/관리(5)/사격(0)/격투(0)/조사(0)/연구(0)/설득(0)/토론(0)/기만(1)/협박(0)/선동(0)/심문(0)/매혹(0)
- 잔여 포인트: 0
- 트레잇:
#물은 답을 알고 있다 / 적에 대한 심문에 +1 모디파이어.
- 배경:
후종밍은 인민해방군의 고위 장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후챠오밍은 국공내전과 조국해방전쟁에서의 공로로 북부전구의 동원국장과 육군 정치위원직 등을 역임하였고, 현재 지난의 북부전구 육군 사령원으로서 북부전구 내에서의 상당한 영향력을 보유하였습니다. 후종밍은 그러한 아버지의 위세를 덕에 청소년 시절부터 저명한 군사 전문가들에게 개인 훈련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로 중국인민해방군군사학원에 1대 입학생으로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중국인민해방군군사학원에서 재학하는 동안 북부 전구 지역 출신의 생도들과 파벌을 형성하였고, 수석으로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북부 전구의 장교로 임관하여 고속 승진한 그는 아버지의 입김을 빌려 중국인민해방군군사학원 재학 시절 자신이 형성하였던 북부 전구 출신의 파벌원들을 북부 전구의 주요 요직에 앉히며, 북부 전구에서의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대륙 전역을 휩쓰는 과정에서 챠오밍-종밍 부자는 적절한 처신으로 오히려 입지를 더욱 강화할 수 있었고, 그 과정 속에서 대외적으로 중앙정부에게 능력있고 당에 충성하며 비교적 젊고, (마오 주석이 만든 군사학원의 초대 졸업생)장교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킨 후종밍은 사십 대의 나이로 북부 전구의 부사령원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마오 주석이 사망하고 정국이 혼란스러운 지금, 그는 겉으로는 당에 충성하는 면모를 보이며 최대한 당을 자극하지 않고 있지만, 은밀히 공청단과 접촉하고, 북부 전구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등 면종복배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할 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그는 상당히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중국의 상황.
※미국과의 관계: 5(원만함)
※소련과의 관계: 6(우호적임)
※당내 계파의 세력분포:
- 백화제방파(후야오방, 31%)
: 이들은 제11차 당대회에서의 과감한 '사고 이행'을 열렬히 환영한 이들로, 1950년대의 쌍백방침의 복구를 지지합니다. 일부 급진파들은 다당제를 비롯한 큰 폭의 민주화 개혁을 주장하지만, 모두가 그에 찬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후야오방이 재건한 공청단 출신의 젊은 당원들을 주축으로 합니다. 주요 멤버는 후야오방, 자오쯔양 등이 있습니다.
- 쇄신파(화궈펑, 36%)
: 화궈펑은 당정쇄신론을 내세우며 마오 주석의 과감한 격하를 이루었지만, 많은 대중들이 바라는 대로 민주화의 수호신이 되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중국의 체제를 과감하게 개혁해야 한다는 점은 동의하며, 개인차는 있지만 자본주의의 방식을 일부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습니다. 주요 멤버는 화궈펑과 5명의 주요 측근들이 있습니다. 그 중 후종밍과 류메이란은 실질적으로 '신사회주의파'와 가까운 입장입니다.
- 신 사회주의파(덩샤오핑, 29%)
: 이들은 대부분 원래 개혁파 내지 중도파를 이루던 '왕년의 반 마오주의자'이자 '문혁의 피해자' 그룹입니다. 11차 당대회 이후 당의 분위기가 180도 전환되고 '민주의 벽' 사건이 발생하자, 이들은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이들은 아무리 개혁개방을 하더라도 사회주의의 기본 틀은 지켜내야 한다는 입장이며, 특히 대외정책 면에서 소련과의 긴밀한 관계를 추구합니다. 주요 멤버로는 덩샤오핑, 예젠잉, 리셴넨, 차오관화, 천윈 등이 있습니다.
- 보수파(왕둥싱, 4%)
: 일명 양개범시파입니다. 이들은 어떤 형태로든 급격한 개혁에 우려를 표합니다. 마오 주석의 급격한 격하 움직임에도 꾸준한 우려를 표하고 있으며, 특히 민주주의를 도입하자는 주장에는 큰 반감을 표출합니다. 주요 멤버로는 왕둥싱, 천시롄 등이 있습니다.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상무회 현황:
1. 화궈펑
- 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
-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2. 예젠잉
-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 중화인민공화국 전국인민대표자회의 상무회 의장
3. 덩샤오핑(사실상 서열 2위)
-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 중화인민공화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4. 후야오방
-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수석부총리
5. 천윈
-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국가발전개혁평의회 의장
6. 리셴넨
-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 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제1서기
7. 자오쯔양
-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부총리
※포괄적 경제협력기구(CEPO) 가맹국:
중화인민공화국,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 라오 인민민주주의공화국,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타이 입헌왕국, 파키스탄 공화국, 남아프리카 민주공화국, 이집트 이슬람공화국.
다음 메인이벤트는 12월 25일(토요일) 저녁 6시에 시작합니다.
반반입니다. 불쾌하게 보는 쪽, 그리고 지금이라도 빨리 태도를 바꿔서 아프리카 투자에 가담해야 한다는 쪽.
그리고… 상카라는 이런 연방국가를 편성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름하여 서아프리카 연방공화국!
모리타니가 78년에 쿠데타 나기전엔 친소국가였고 서사하라 문제가 있는데 될지궁금하네요 ㅋㅋ
*후종밍의 메인이벤트.
상무회 서열 4위, 제복군인의 최선임, 유력한 차기 지도자 후보. 후종밍은 54세의 나이에 이 모든 것을 가진 남자입니다. 그러나 그의 대외적 인지도는 그다지 높지 않습니다. 외국 언론에 몇번 등장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뭐, 그래도 인지도는 쌓으면 되는 겁니다. 덩샤오핑 총서기의 안배로, 후종밍은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등 대도시들에서 ‘군 모병 장려’를 명목으로 사실상의 정치연설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모병이야 알아서 될 거고, 후종밍의 대민 인지도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어떤 전략으로 뭇 사람들의 마음을 끌 수 있을까요?
후종밍, 그는 대중들의 마음은 듣기만 좋은 포퓰리즘적 감언이설로는 움직일 수 없음을 아는 남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굉장히 위험한 발언들을 쏟아냄으로서 대중들을 휘어 잡으려 합니다.
" 10여 년 전 유엔 총회는 유엔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모든 권리를 회복시키기로 결정하고,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대표가 유일한 중국임을 인정해 결의 2758호를 압도적 다수로 통과시켰습니다.
이는 중화 인민의 승리이자, 세계 만국 인민의 승리이며, 이를 통해 대만은 국제사회에서 국가 지위를 박탈 당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대만은 중화 민족의 영토이며, 대만의 독립은 조국 통일의 가장 큰 장애물이자 민족 부흥의 심각한 위협입니다. 허나, 우리는 아직 서방세력들에 비해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키워나가 그들에 맞서 대항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 여러분들이 서있습니다. 조국의 몰락을 지켜만 볼 것인가! 아니면, 조국의 부흥을 제 손으로 도울 것인가!
그 것은 모두 여러분들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
.
(중략)
.
.
ㅗㅜㅑ…!
미국을 포함한 서방세력들 중 그 누구도 중국 인민의 국가 주권과 영토 보전을 지키는 굳은 결심과 확고한 의지, 강한 능력을 과소평가 하였다가는
중국 인민 10억 명이 피와 살로 쌓은 강철같은 만리장성 벽에 머리를 부딪쳐 피를 흘리게 될 것입니다.
그 것을 위해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인 여러분들과! 우리 중화인민공화국 공산당과! 군이 필요한 것입니다 ! "
그는 북경, 상해, 청두, 선양, 우한, 광둥 등 대도시를 돌아다니며 이러한 반미, 반서방, 대만통일야욕에 관한 연설을 하였으며,
노골적으로 중화패권주의를 드러내었습니다.
선동 굴림…! 기준은 11, 모디파이어는 +1입니다.
1/4/5 +1 = 11.
대중들 일부는 환호하며 후종밍의 이름을 연호하지만, 나머지 일부는 약간의 무서움을 느낍니다. 에이블 아처 83 훈련 때 전세계가 우발적 핵전쟁의 공포에 시달린 직후였고, 대만을 차지해야 하는 것은 맞으나 핵공격까지 감당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품는 중입니다.
다만 이 연설로 후종밍이 국내외에서 “논쟁적 인물”로 떠오른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포린폴리시 지를 포함해 세계의 유수 시사 월간지들은 후종밍에 대한 특집기사를 뽑아내고 있고, 그는 차이니즈 로마노프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갑자기 궁금해졌는데 대만의 반응을 알 수 있을까요?
음… 확인 안해도 엄청 빡쳤을 건 자명합니다. 장징궈는 실제로 양안의 일국양제 통일을 지향했었는데, 대체 이 후종밍이라는 사람은 무슨 생각이냐고 길길이 날뛰고 있습니다.
시진핑이 요즘 대만 건드린거랑 비슷하려나요?
대만 정계 영향크긴 하겠네요
일단 더 하실 건 없으실까요?
국가원수급은 아니지만… 그만큼 워딩이 쎄긴 하죠.
아마 지금쯤 장징궈가 민진당 용인해주고 민주화 협의하고 그럴 때인데, 음… ㅋㅋㅋ
그럴경우 반중세력 집권에 반중 성향 강화등까지 계산해야하니까...
네 일단 없습니다.
이벤트 종료. 2포인트가 지급됩니다. (3)
그런데 이번 개인이벤트 까지해서 이번화는 끝인가요, 아님 더 있나요?
일단 한번 끊고 가야 할 것 같네요. 내일은 일정이 꽤 바쁜데…
그럼 다음 글 쓰고 계시는 중인가요?
네 작업중입니다.
Interlude: “지금 크렘린에선…”
그리고리 로마노프 서기장:
“흠, 흠. 새로운 얼굴들이 많이 보이는군. 정치국에 온 걸 환영하오, 모두들. 리즈코프 동지는 승진 축하하오.”
니콜라이 리즈코프 국가계획위원장:
“감사합니다, 동지.”
로마노프:
“우선 첫 번째 안건. 우리 친애하는 미국인들이 로스앤젤레스에서 불꽃축제를 한다는군. 어떻게 생각하나?”
류드밀라 솔제니치나:
“체육부장관 류드밀라 이바노브나 솔제니치나입니다. 4년 전 미국인들은 고의적으로 우리의 올림픽을 훼방놓기 위해 별도의 대회를 연 바 있습니다. 우리도 똑같이 갚아주는 건 어떻겠습니까?”
로마노프:
“흠, 동지는 이름이 낯익은데. 부친께서 혹시…”
솔제니치나:
“예, 이반 솔제니친 원수가 제 아버지 되시는 분입니다.”
로마노프:
“허, 그런데 전략에 대한 이해는 그 분을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구만. 저들이 예상하는 그대로 행동하면 바보 취급 말고 더 당하겠나? 다른 의견?”
보리스 푸고 내무장관:
“내무장관 보리스 푸고입니다. 보이콧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로마노프:
“보이콧이라… 고민은 해 봐야겠군. 다른 의견은?”
드미트리 야조프 국방장관:
“어렵게 생각할 게 뭐 있습니까. 그냥 참가합시다. 참가하는 것도 모자라, 아예 최상급으로 선수단을 맞춰서 출전시키시지요.”
푸고:
“무슨 소립니까?”
야조프:
“켕기는 짓을 해봤자 그건 우리의 부족함을 자랑하는 것 말고 더 되겠소? 일단 그렇게 참가하면 친애하는 우리 월리스 각하의 재선은 확실해질 것 같은데 말이오.”
로마노프:
“월리스와 웃으면서 악수하는 사진 몇장 남겨도 좋겠군. 그가 재선에 성공하면 우리는 시간을 버는 셈이니 말이야. 의외로 답은 가까운 곳에 있었군. 솔제니치나 장관?”
솔제니치나:
“네, 서기장 동지.”
로마노프:
“선수단한테 평화를 상징하는 장식 하나씩 돌리고, 유니폼도 아주… 보기만 해도 총을 내려놓고 싶어지는 그런 평화로운 걸로 준비하게.”
솔제니치나:
“네, 빨간색은 절대 쓰지 말라고 당부하겠습니다.”
로마노프:
“이제야 좀 말을 알아듣는구만! 하하!”
-fin.
소련 입장에선 미국에서 윌리스 파벌이 계속 정권을 잡는 걸 바랄수도 있겠네요(...) 민주당이 포퓰리즘, 공화당이 자유주의로 돌아가는 막장사태가 계속될듯.. 누가 이어서 해먹을까요? 필 그램이나 리처드 셸비..? 21세기까지 계속되면 조 맨친? 아니면 역시 로버트 버드..?
아니면 공화당 보수파랑 민주당 리버럴들이 서로 자리 교체할 수도 있죠. ㅋㅋ
민주당이 링컨 찬양하는(...)일은 사라지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