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사시대와 고대
구석기 유물및 신석기시대 토기가 발견된 바 있으며, 청동기시대 대표적 유물인 고인돌 150여기 중 70여점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음.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에 강화로 천도함에 따라 강도(江都)로서의 강화 고려궁지(행궁)를 갖추었으며, 국난을 극복하자고 강화 선원사지에서 고려대장경이 제작하였음
고려시대 임시 수도로서 고려 왕릉(홍릉, 석릉, 곤릉, 가릉, (능내리석실분)이 축조되었으며, 충렬왕 12년(1286년) 문성공 안유가 유교를 전하였으며 공자상 봉안한 우리나라 최초의 향교설립(교동향교)
왕씨들 수장시킨 청지펄,
▶ 조선시대
강화도는 성·진·보·돈대·포대 등 국방유적이 많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왕실의 피난지로의 역할을 수행하며, 왕실족보 보관을 위한 선원보각과 실록보관을 정족산 사고(한양 춘추관의 중앙사고,무주적상산,봉화태백산,평창오대산) 및 외규장각(병인양요-프랑스)있었음. 신미양요(미국)를 겪음. 안산의 초지진은 효종때 강화로 옮김.
숙종 때에는 12개의 진보와 53개의 돈대가 설치. 김경징의 나문재풀(병자호란시 강도검찰사)
강화산성과 강화외성이 개축,
▶ 전등사
고려왕실은 전통적으로 같은 왕족끼리 근친혼.
충렬왕(25대)과 정화궁주사이에 3명의 자식있으나 원나라 제국대장공주가 정화궁주와 충렬왕을 만나지 못하게 별궁에 거하게함, 태자비노릇을 못한 답답함으로 불교에 심취하여 승려 인기를 송나라에 보내 대장경과 옥등을 가져와 절에 헌납,그후로 전등사라함.
전등사 대웅전은 조선 후기의 목조건축물. 전등사는 고구려 381년(소수림왕 11) 아도화상이 세웠다고 전하지만 고려 중기까지의 역사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이후 조선 중기 1621년(광해군 13)에 복원.
대웅전 건물은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장식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화려한 다포 양식
▶용흥궁 : 대군때의 사저
▶ 참성단
참성단은 단군을 숭배하는 종교로 일제강점기에 대종교(大倧敎)가 생기고 난 이후에는 민족의 성지가 되었다. 지금도 해마다 개천절에 제천행사가 거행되며, 전국체전의 성화는 이곳에서 태양열을 이용하여 붙이고 있다.
▶ 개항전후의 강화
수도의 관문에 위치하여 서구의 침략세력이 충돌하는 전장으로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양호 사건을 거치면서 항쟁과 개항의 중심이 되었으며 병인양요로 프랑스군에 의해 왕실의 의궤를 보관하던 외규장각 도서가 약탈되었고 개항 이후 (서양종교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의 수용.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해군사관학교인 통제영학당이 설립되었음.
▶ 특산물
: 인삼, 사자발약쑥, 화문석, 순무김치, 벤뎅이등등
김포’ 지명 유래
고려 공민왕 때 이야기다. 두형제가 주운 황금을 바닷물에 버렸다. 그 후로 그곳을 ‘금을 던진 포구’ 투금포(投金浦)라고 했고, 세월이 흐르면서 김포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애기봉’ 설화
병자호란 때 이야기다. 기생 애기는 평양감사와 사랑하는 사이였다. 북쪽에서 오랑캐가 쳐들어오자 감사와 애기는 임금이 계신 한양으로 떠났다. 감사는 오랑캐에 잡혀갔다. 애기는 홀로 강 월곶면 조강리에 머물면서 날마다 쑥갓머리산에 올라 감사가 끌려간 북녘을 향해 빌고 또 빌었다. 그러다가 그리움이 사무쳐 병이 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애기를 쑥갓머리산 꼭대기에 장사를 지내주었다. 그 뒤로 애기가 묻힌 봉우리를 애기봉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