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의 횡설종설] 너 자신을 알라
2014년 05월 16일(금) 00:00
너 자신을 알라.
무겁게 가라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서 둘째 아들을 데리고 산에 올랐다. 다들 무거운 마음을 이겨내고 다시 추스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실존적 각성을 담은 동작들이다. 지게를 지고 일어서듯이 웃고, 벽돌 한 장 한 장을 혀에 올려놓은 듯이 중얼거린다. 가끔 여기저기서 먼저 가버린 자식을 가슴에 묻어야만 하는 부모들을 안타까워하는 말들이 들린다. 우리는 이제 세월호가 남긴 짐을 아주 길고 긴 시간 함께 져야하는 운명을 공유해버렸다.
아무 말 없이 아들은 앞서 가 버렸고, 나는 그저 조금씩 높이를 올리며 걸을 뿐이다.
산모퉁이 저 쪽으로 보이는 계곡에 너 댓 명의 장년 남성들이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다가 산에 가려 이내 사라졌다. 모퉁이를 다 돌고 나니 그 사내들이 다시 나타났는데, 휴식을 끝냈는지 난간을 넘어 등산로로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바로 그들과 가까워졌다. 외양에서 풍기는 것만으로도 제법 배우고, 또 제법 그럴싸한 직업을 가진 품새다. 그 사내들은 난간 저쪽에서 나누던 말을 아직 끝내지 못했나보다. 그들의 말이 들렸다. “그러니까, 어려울 것도 없이 규정만 지켰으면 되었다니까!” “수많은 규정 가운데 몇 개만 지켰어도 그렇게까지 되었겠어?” 이들은 매우 화나 보였고, 또 진실로 안타까워하는 것 같았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떤 사람의 아이큐가 130이라면, 자기 자신을 볼 때는 아이큐가 13으로 떨어지고, 다른 사람을 볼 때는 아이큐가 1억3000정도로 상승한다는 생각을 평소 가지고 있었는데, 내 아이큐도 아주 급하게 상승하고 있었다. 저들 스스로는 왜 난간을 넘어서 계곡으로 가면 안 된다는 규정을 지키지 않았을까? 그 규정을 써 놓은 팻말이 북한산 계곡 옆 난간에는 수도 없이 붙어 있다. 자신은 규정을 지키지 않으면서도 규정을 지키지 않은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이 모습을 보면서, 나 자신도 덩달아 분열되고 있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산을 오르던 나에게서 분열된 또 자른 나는 규정을 지키지도 않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도 하지 않았던 세월호 승무원 자리에 가 있었다. 불행을 야기 시킨 시스템이나 구조보다는 분열되는 개인으로서의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매우 감상적인 접근으로 보일 수 있겠다. 하지만, 크고 작은 규정을 어겨보거나 가볍게 넘겨버린 적이 있던 나는 감상적이라고 비판받을 수 있는 이런 느낌을 넘어서지 못하겠다. 세월호의 침몰은 이런 ‘나’들이 만든 비극이다. 우리의 현주소이고, 우리의 수준이고, 우리가 자초한 일이고,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민낯이나 자화상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구조’나 ‘시스템’을 말하는 큰 사람들 앞에서 너무 초라해지는 걸까?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 소크라테스라는 철학자가 있었다. 직접 민주주의를 시행하던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패배하고 나서 스파르타가 세운 참주정권에 의하여 운용된다. 민주주의 황금기는 막을 내리고 이제 정치적 혼란기로 접어들었다. 정치투쟁은 끝도 없이 격렬해지고, 도덕적 해이가 극에 이르렀으며 이론으로 무장한 지식인들의 궤변이 횡행하였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크세노폰의 기억에 의하면 소크라테스는 다양한 질문들 마지막에 “국가라는 배는 누가 고쳐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한계에 이른 국가를 구조하려는 철학자의 간절한 희망이 읽혀진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평생 과제로 아테네인들의 혼이 최선의 상태가 되도록 돌보는 일을 하기로 한다. 그래서 원래는 델포이 신전에 적혀 있던 “너 자신을 알라!”라는 구절을 자신의 핵심 주장으로 만든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이 말을 사람 구실에 대하여 제대로 알아야 비로소 훌륭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뜻, 즉 인간으로서의 훌륭함을 이성과 언어의 문제로 봐버리기도 하지만 진정한 의미는 따로 있는 듯하다. 우리가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길은 논쟁이나 인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세계 안에서 자신의 주인으로 서 있어야 함을 아는 데서부터 출발한다는 의미이다. 인식은 항상 자신을 대상과 분리시킨다. 이 분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비판과 지적과 한탄을 한 후, 할 일을 다 한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자신이 자신의 주인으로 존재하고 있으면 지적에서 머물지 않고, 스스로 변화한다. 외부를 향해서 자기가 한 비판이 자기에게도 적용될 수 있게 할 줄 아는 자, 바로 자신을 아는 자이다. 자신을 또 다른 대상으로 놓고 분열된 상태에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하나의 덩어리로 놓고 바로 변화와 참여를 행하게 하는 자이다. 자신이 하는 일을 삶의 방편으로 치지 않고, 삶의 자세로 다룬다. 일과 자신을 일치시킨다. 이런 자는 다른 사람들이 규정 어긴 것을 비난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규정을 지키는 사람으로 변화시킨다. 개인적으로 적용되는 듯이 보이는 “너 자신을 알라!”는 경구를 가지고서야 국가를 구할 수 있다고 믿은 소크라테스의 뜻을 한 번 다시 생각해 본다. (최진석 교수/ 서강대)
첫댓글 "자기가 먼저 혁명되지 않고서는 어떠한 혁명도 불가능합니다" 『인간이 그리는 무늬』p250 -
"德은 모든 가치와 이념, 편견들로부터 해방된 자아입니다"「MBN 지식콘서트」 '참된 인간의 내적동력 德' 중에서-
"윤리적 사회는 윤리적 규정이 만드는 게 아니에요. 德이 있는 개별적 존재들이 많아질 때, 윤리적 사회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 집니다. 자기 삶을 일상에서 영위할 줄 아는 사람이 많아질 때, 윤리적인 사회가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념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구체적인 자기 일상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많아지면 저절로 윤리적인 사회가 됩니다."『인간이 그리는 무늬』p255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