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한 장으로 보는 역사
- 이북 성공회聖公會 이야기 (1) -
평양의 북쪽, 평안남도 순천성당
이북에도 성공회가 있었나요?
이 질문에 답은 옆에 있는 한 장의 사진 속에 다 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볼까요.
신랑과 신부가 결혼하는 사진입니다.
테두리에 예쁘게 꽃 장식을 하고 축 결혼(祝結婚) 이라고 선명한 축하 글씨가 보이는 군요.
앞에는 화동花童 둘이서 꽃 바구니를 들고 있구요. 신랑과 신부 좌우에는 들러리라고 하나요?
연미복을 차려입은 신랑의 친구들과 고운 한복에 꽃을 달고 있는 신부의 친구들이 서 있군요.
뒤쪽에는 신랑신부의 부모님이신 것 같습니다.
바닥에는 마당에 흰 천을 깔고 그 위에 방석을 놓고 올라서서 있는 모습입니다. 뒷줄
중앙에는 혼배성사를 집전해 주신 신부님(Priest)이 대례복을 입고 계십니다.
이 날 결혼잔치의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사진을 찍는 분은 이 사진을 찍기 위해 열심히 표정관리를 주문했을 거구요.
사진을 찍는 주변에는 많은 하객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신랑신부에게 축하의 덕담들을 해가며 축복해 주었겠지요.
얼마나 떨리고 설레였을까요. 신랑신부 말예요.
사진에는 신랑신부보다 들러리들이 더 경직되고 떨고 있는 모습입니다.
얼마나 큰 동네의 잔치였겠습니까?
분주히 음식을 준비해준 교우분들도 계실거구요.
교우들이 힘을 합쳐 성당에 혼배준비도 했겠지요.
혼배성사에서 신부님은 무슨 권면의 말씀을 해주었을까요.
또 두 분은 맹세했지요.
“하느님의 거룩하신 계명을 좇아 종신토록 안락과 곤고와 빈부와 유명과 무병을 막론하고 서로 사랑하며 보호하고 순종하기를....”
두 분의 결혼식에 있었던 유일한 기념사진 입니다.
이 사진은 현재 성공회춘천교회(성모 雪池殿)에 다니고 계신 문 경신(마리아,76세)할머니와 조선택(스테반,80세)할아버님의 56년 전 혼배성사 사진입니다.
마리아 할머니는 스무살에 시집오셨다고 합니다.
1948년 즈음이 되겠네요.
일제치하에서 해방을 맞이한 해가 되는군요.
마리아 할머님은 순천읍에서 좀 떨어진 선소면 간동리에 있었던 성공회 간동리 교회(1936.6.18 조선성공회 제 4대 주교이신 구세실( Cecil cooper )주교님 축성,성 부활성당)에 다니셨다고 합니다.
스테반 할아버지의 고향은 행정구역으로 평안남도 순천군 순천읍이셨는데 순천은 평양에서 조금 북쪽에 있습니다.
사진은 그곳 순천읍에 있었던 성공회 순천교회(성모마리아성당)로서 1937년 10월 9일에 새로운 성당을 짓고 마찬가지로 구具세실(Cecil cooper)주교님께서 축성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성당에 다니셨는데 그 당시에는 최태희(디모데)차부제(次副祭)님이 계셨고 옛 성당을 헐고 새로 신축한 것은 자산리 교회(1926.10.3 축성, 제령교회)에서 시무하시던 주장훈(바우로)신부님께서 순천교회로 발령받아 오시면서부터였다고 합니다.
자산리에 있던 면사무소를 헐게 되었는데 그 목재 자재가 너무 좋아 그걸 사셔서 순천성당을 새로 지으셨다고 합니다.
순천성당은 약 30평 정도의 한옥건물이었었고 당시 순천에는 성공회를 비롯해 감리교, 천주교, 장로교가 있었으며 성공회만이 유일한 한옥 건물의 성당이었고 교회 규모면에서는 네 교파의 교회가 모두 비슷한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사택이 별도로 있었으며 당시 성직자로는 주 바우로 신부님과 전도부인이 계셨다고 합니다.
자산리는 광석이 많은 지역으로 할아버지의 집안은 탄광일을 하셨다고 합니다.
스테반 할아버지는 구세실 주교님으로부터 영세를 받았으며 그 당시에는 12명 정도의 신도분들이 계셨고 결혼당시에는 30여명의 신도분들이 계셨다고 합니다.
한옥건물의 순천성당은 큰 종탑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혼을 하시고 불과 몇 년 후에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서로 헤어져 2년 정도 지내셨다고 합니다.
51년 에 남하하시면서 헤어지게 되신 거죠.
주바우로 신부님도 남하하셨고 인천에 주신부님 댁에서 1주일 정도를 지내신 후 경상남도 통영까지 가셔서 피난생활을 하셨다고 합니다.
마리아 할머님은 성공회평양성당에 계시다가 남쪽으로 내려 오셨다고 합니다.
이북에도 성공회가 있었나요?
분단의 아픔을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간직하며 살고 있는 우리에게 성공회가 이북에도 있었는가의 대한 질문은 그 아픔의 또 다른 한 면 일겁니다.
분단의 고착이 가져온 이데올로기적 경계에 대한 것을 전제로 이남과 이북을 나누는 질문이라는 생각 때문이죠.
여하튼 이북지역에 있었던 성공회 성당에 대한 선교역사를 보면 1893년부터 조선에서 1892년에 사제 서품을 받은 영국인 신부 워너(Leonard Ottley Warner, 한국명:왕란도)가 개성 근처인 백천百川지방에 전도활동을 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나중에 한국인 최초로 사제서품을 받으신 김희준 (마가)전도사를 개척교회를 위한 강습회를 몇 차례 실시한 후에 1908년 7월 제성성당(諸聖)으로 인사발령을 받습니다.
그러면서 1909년에는 188명에게 세례성사가 베풀어지는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백천전도구에는 8개의 교회가 연합되어 있었습니다.
1912년에는 ‘백천제성병원’이 설립되어 의료를 통한 선교를 충실히 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 이후에 선교지역의 확장은 황해도 지역과 평안도 지방으로 확대되어 갑니다.
결혼사진 한 장 속에 북한 지역에 있었던 여러 성공회 성당 중에 몇몇 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있고, 한 가족의 이야기가 있고, 가족사에 얽힌 한국 근,현대사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장의 사진이 가진 큰 힘이자 많은 이야기입니다.
분단의 비극으로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과 두고 온 고향 산천, 옛 친구들, 그리고 성당에 대한 기억. 그 모든 그리움의 대상이 늘 가슴 한 켠에 자리하고 계시겠죠.
건강하십시오. 문마리아할머니, 조스테반 할아버지, 그리고 고향 교회를 떠나온 모든 분들.......
글 옮김: 유재근 <성공회와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