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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넘어 또 다른 시로 태어나는,
이 안
시와 동시?
동시와 시의 경계를 한 마디로 잘라 말하는 건 쉽지 않다. 누군가 이론으로 그 경계를 명확히 가를 수 있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를 이론가가 아니라 지적 사기꾼이라고 말하겠다. 원로 평론가 유종호는 “사실 동시와 보통 시를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훌륭한 동시는 모두 어엿한 시로 읽힌다. (…) 어른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동시야말로 정말로 훌륭한 작품이라는 뜻도 된다. (…) 다시 말해서 어른들이 외면하는 아동문학은 대체로 어린이에게도 외면받기 마련이다.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즐겨 읽는 아동문학이야말로 진정한 아동문학”1)이라고 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내가, 동시와 시에 아예 경계를 두지 말자거나 그런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게 낫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그 경계를 오가는 예들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으니, 그것을 통해 새로운 경계를 모색해 보자는 것이다.
나는 첫 시집2)을 묶으면서 동시 두 편3)도 함께 넣었다. 시로도 읽혔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동시집4)을 낼 때는 이 두 편을 다시 가져와 동시집에 실었다. 어린이 독자들이 읽어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송찬호의 네 번째 시집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문학과지성사 2009) 맨 끝에 실린 「산토끼 똥」5)은 처음에 동시로 쓴 작품이고, 그의 첫 동시집 표제작 「저녁별」6)은 다섯 번째 시집에 실을 계획이었다고 한다. 안도현의 경우, 시집 『그리운 여우』(창작과비평사 1997)에서는 「봄비」7) 「그 겨울밤」8) 「3월에서 4월 사이」9)를 동시이기도 한 시로, 동시집 『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실천문학사 2007)에서는 「여치집」10) 「눈사람」11) 「억새」12)를 시이기도 한 동시로 꼽을 수 있다. 이것을 단지 동시와 시에 대한 경계의식이 부족한 탓이라고 한다면 나로서는 할 말이 없다.
이번엔 좀 더 색다른 경우, 일테면 동시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아직 동시집을 내지 않은) 시인의 시집에서 고른 시13) 한 편과 시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아직 시집을 내지 않은) 시인의 동시집에서 고른 동시14) 한 편을 놓고, 그 둘의 동시됨과 시됨을 가늠해보자. 「집 앞」의 동시됨을 시비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 흔히 동시의 자질로 어린이(그 어린이가 몇 살의 어린이를 말하는지는 모르겠다. 시인에 따라, ‘평균의 어린이’에게 좀 더 높은 수준의 동시를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최승호가 아주 낮은 연령대의 어린이를 생각하면서 ‘말놀이 동시’를 썼듯이 말이다.)도 이해할 수 있는 쉬움, 단순함, 그림, 가락 등을 꼽는데, 이 작품이 여기에서 벗어나 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순하지만 제목과 함께 들여다볼수록 울림이 점점 커지는, 시로 읽어도 좋고 동시로 읽어도 좋은 작품이다.
「운명」은 일단 제목이 ‘동시답지’ 않다고 할는지도 모른다. ‘운명’의 뜻을 어린이가 선뜻 이해할 수 있겠느냐고 말이다. 이런 이의제기에 대해 거꾸로 나는, 과연 어린이가 ‘운명’의 뜻을 모를까, 묻고 싶다. 혹 모른다 쳐도, 왜 그 추상의 어린이 독자가 다 아는 말로만 동시를 써야 할까, 미처 모르던 것을 한 편의 동시를 통해 알게 된다면, 그래서 어린이 독자의 성장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바람직한 일 아닌가, 묻고 싶다. 만약 ‘동시다움’에 갇혀 이 작품의 제목을 ‘조개와 새우’ 이렇게 했다면, 이건 작품 전체를 주저앉힐 만큼이나 몹시도 왜소한, 심지어 나쁘기까지 한 작명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주아주 구체적인 어린이 독자는 이 작품을 어떻게 읽었을까. 쓴 대로 옮겨본다.
꼬마 새우가 귀엽지만 불쌍하다. 조개한태 잡아 먹였겟다. 조개는 마음씨가 좋지는 않은 것 같다.(지승후, 충북 충주 대림초 2학년, 2009년 12월 28일)
새우가 따뜻할 거 같고, 새우가 곧 죽을 것 같고, 꼬막은 새우가 무거울 것 같고, 새우가 좀 불쌍하기도 하다.(김희원, 2학년)
새우가 꼬막 안에서 캑캑거리다 삶자 아 뜨거 아 뜨뜨 하면서 폴짝폴짝 뚜는 게 느껴진다. 조개는 속이 매스꺼운 게 느껴진다.(김보형, 3학년)
어린이 독자가 이 정도로 이해했다면, 동시로서 일단 성공이라고 하겠다. 그럼 이 작품을 좋은 동시이자 좋은 시라고 생각하는 나는, 이것에서 무엇을 떠올렸을까. 그건 바로, ‘운명’과 ‘인생’이다. 화자는 조개와 새우의 운명적 연결고리를 ‘이야기’에서 찾는다. 여기서 ‘이야기’는 사람을 매혹케 하는 모든 것을 함축한다. 그것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누군가의 삶의 방식일 수도 있고, 한 마디 말일 수도 있고, 지금 이 자리와 같은 일상의 이야기마당일 수도 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동시가 주는 어떤 매혹에 깊이 빠져 여기에 모여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고 어떻게 끝날지, 나로서는 조금도 짐작하지 못하겠다. 꼬막 조개의 ‘이야기’에 매혹되어 죽음의 자리에까지 함께한 꼬마 새우의 ‘운명’은, 벗과 연인과 부부와 불륜과 사제와 동지와 역사와……,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천상병)를 떠올리게 한다. 불과 다섯 줄로 인생과 운명의 비의를 환기하는 게 좋은 시가 아니라면 무얼까. 나는 승후와 희원이, 보형이가 언젠가 그 ‘운명’의 순간과 마주칠 것이라고 믿는다. 읽는 순간, 어린이에게 곧바로 백 퍼센트 이해되고 넘어가는 동시가 좋은 동시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이나 나쁜 동시일 수도 있다. 반복적 읽기에 무뎌지지 않으면서 읽을 때마다 새록새록 새롭게 다가오는 동시,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가슴에 하나의 의미로 온전히 안겨오는 동시, 그런 동시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경계의 현실
출판사 어린이책 편집자의 다음과 같은 고백은 우리가 관념적으로 동시의 경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다른 글을 볼 때는 그러지 않는데, 유독 ‘동시’라고 이름 붙여진 걸 볼 때면, 성분부터 따져 묻게 됩니다. 동심 몇 프로에 리듬 몇 프로, 어휘는 적당한지 내용 수준은 아이들이 이해 가능한지. 그런데 그 ‘적절한 비율’ ‘적절한 수준’ ‘적절한 내용’은 뭘까요? 누군가 묻는다면 스스로도 대답 못할 기준을 머릿속에 그려놓고, 동시를 읽을 때마다 그 틀 안에서 분류하고 때로는 틀 밖으로 몰아내기도 했습니다.” ― 조형희, 「어떤 말들이 노래가 되나」 『동시마중』 제7호
이러한 고민은 동시집 편집자뿐 아니라 시인, 평론가, 동시 관련 기획 ․ 편집자, 독자가 두루 마주칠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와 같은 고민을 풀기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이것에 답하기에 앞서 일일이 따져보아야 할 것이 무척이나 많다. 일테면 동심이란 무엇인가, 동시 독자인 어린이의 연령 ․ 시적 감수성 ․ 독서력을 어느 정도로 상정할 것인가, 동시가 다룰 수 있는 내용과 소재 ․ 표현의 수위는 어느 정도가 적절한가, 동시의 난해성을 어느 정도까지 수용할 것인가, 동시의 주인은 어른인가 어린이인가, 어린이가 읽을 수 있는 쉬운 시는 다 동시로 볼 수 있는가, 동시와 시의 경계를 의식하지 않고 쓰는 것과 동시의 경계를 설정해 놓고 그 안에서 쓰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더 좋은가……. 대부분 한 마디로 단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어쩌면, 이러한 질문에 까다롭게 답을 구하기보다는 ‘동시는 이러저러한 것’이라는 일반적 통념에 기대어 동시를 바라보는 것이 한결 수월할뿐더러 안전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런 태도야말로 새로운 동시의 출현을 오랫동안 억압해온 원인이기도 하다. 그것은 마치 교과서 동시에 익숙한 초등학교 어린이가 시를 썼을 때 그 틀을 벗어나는 작품을 쓸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동시에 대한 일반적 통념에 기댈 때 새로운 접근과 실험, 문제의식을 내장한 작품이 나오기는 어렵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의 우리 동시문학사에는 동시 문법에 충실하면서도 빼어난 동시가 적지 않게 제출되어 왔다. 그러나 만약 동시에 대한 일반적 통념에 도전하는 시인, 평론가, 기획 ․ 편집자가 더 많았더라면 우리 동시는 이제까지보다 더욱 다양한 모습의 동시를 가졌을 것이 분명하다.
동시와 시의 경계에 대한 발언 중 지금까지 가장 정확한 지점을 짚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오덕이 「동시란 무엇인가」15)에서 밝힌, “동시는 먼저 시가 되어야 하고, 그 위에 다시 동시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앞의 동시가 뒤의 동시로 가자면, 동시가 갖추어야 할 문학예술로서의 품격이 요구된다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이오덕은, 앞의 동시는 시로 부정되고, 시는 다시 동시로 부정되어야 한다고 했다. 옳은 말이다. 그곳이 바로 동시의 자리인 것이고, 그것을 통해 동시는 시와 부단한 접면을 형성하면서도 비로소 시와 별개로 존재하는 하나의 양식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시가, 동시에 의해 부정되어 비로소 동시로 되는 지점은 어디인가? 그 둘 간의 나노(nano, 1/1,000,000,000)적 차이를 한 마디로 말할 순 없을 것 같다. 다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겠다. ‘나는 동시다운 게 뭔지 안다.’
그럼 이런 경우는 어떨까? 그 경계를 굳게 지키지 못하고 시로 슬쩍 올라가 버렸거나 동시로 살짝 내려왔다면? 결과적으로 어느 쪽이든 잘된 것 아닌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동시로 쓰다가 시가 되어버린 것을, 혹은 시로 쓰다가 동시가 되어버린 것을, 시로도 동시로도 읽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 시가 동시집에 몇 편 실렸다면 어린이 독자로서도 좋은 일 아닌가? 그 ‘덜 동시다운’ 아슬한 맛에 문득 골똘해질 수도 있을 테니까. 대표적으로 임길택이나 남호섭이, 동시다운 게 무엇인지 몰라서, 동시의 안전한 경계를 몰라서, 그 경계를 오간 게 아니란 거다. 남호섭이 지난해 『어린이와 문학』(2010년 4월호)에 발표한 「이소선」과 「동주와 몽규」16)는 동시인가, 시인가? 분명한 것은 이 두 작품이 우리 동시의 경계를 한껏 확장해 놓았다는 점이다.
경계들
최승호는 동시에 대한 문제의식을 『말놀이 동시집』(모두 5권, 비룡소 2005~2010)에 다 풀어놓았다. 동시에 그만한 문제의식을 품고 그것을 뭉텅이로 전면화했다는 것 자체가 소중하다. 비룡소의 ‘동시야 놀자’ 시리즈 가운데 윤석중, 박목월, 최승호를 빼면 여덟이 남는다. 특정 연령대에 맞추어(추상의 어린이 독자 범위를 좀 더 좁혀서) 각 권마다 한 가지씩 주제를 정하고 시인들이 여기에 결합했다. 이 시리즈를 통해, 신현림 최명란 김기택 이기철 이근화 함민복 안도현 함기석 동시를 구경할 수 있었다. 누구는 성공했고, 누구는 평균이었고, 누구는 실패했다. 실패의 증거는 얼마나 뼈아픈가. 성공은 얼마나 기쁜 것인가. 그것으로 되지 않았나 싶다. 동시집도 읽어본 어린이가 읽는다. 최승호와 ‘동시야 놀자’를 통해 우리 동시가 적지 않은 독자군을 얻었으리라고 말하면 턱없는 소리일까.
“시골 할머니가 입고 있던 빨강내복처럼 몸에 착 달라붙어 있는 관습적인(?) 상상력에서 조금이라도 멀리 달아나” “울퉁불퉁 이야기가 있는 동시를 쓰고 싶었고 아이들보다 먼저 엄마 아빠에게 읽어 주고 싶었”17)다는 김륭의 도전이 앞으로 어떻게 이어질지 궁금하다. 그의 동시가 쉽거나 싱거워지지 않기를 바란다. 박성우가 금기와 미답의 영역에 도전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남호섭은 세 번째 동시집을 기다리게 한다. 기존 동시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그 안에서 충분히 자기만의 개성을 펼쳐 보이는 이들이 있다. 이정록, 유강희, 정유경, 성명진이다. 이정록에게는 자기만의 웃음과 재치, 해학의 코드가 있다. 그것이 앞으로 무엇을 만나서 어떤 모습으로 나오게 될지 기대를 갖게 한다. 유강희도 자기만의 동시미학을 보여주는 작품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정유경과 성명진에게는 흔히 볼 수 없는 독특한 아이 캐릭터가 있다. 정유경은 「비밀」18)에, 성명진은 「실눈이」19)에 그것을 담았다.
또 다른 경계는 없을까?
동시의 경계를 어떻게든 기존 동시 관념 안에 가두려는 주장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보다는 차라리 더 많은 농담과 무책임이 유익할 수 있다. 모처럼 찾아온 활기를 좁은 틀에 서둘러 가두려 하기보다는 더 많이 열려 있는 자세로 제대로 맞이하는 게 낫다. ‘이런 것이 무슨 동시야?’가 아니라, ‘이런 동시도 있을 수 있구나!’ 하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동시에서 화자를 어린이로 할 것인지, 어른으로 할 것인지는 권위적 기준이 될 수 없다. 작품의 특성에 따라 시인이 자유롭게 선택하면 될 일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사라진 동시가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것은 문화적 후진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만 남아 있는 행복한 문학 유산이자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가능성이다.
시가 아니라 동시이기 때문에 가능한 지점들에 예민하게 주목하고 그것에 가까이 다가서려는 노력을 통해 동시는 시의 이상(理想)에 이를 수 있다. 그것은 “아이들이 읽으면 동요가 되고, 젊은이들이 읽으면 철학이 되고, 늙은이가 읽으면 인생이 되는 그런 시”(괴테)의 상태가 아닐까 한다. 그 난해성으로 하여 좋은 시가 모두 이런 역할을 해낼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좋은 동시는 이 역할을 해낼 수 있다. 동시는 어린이부터 청소년, 노인까지를 독자층으로 한다. 이것이야말로 시보다 넓은 동시의 경계이자 가능성이다.
어떤 동시는 동시이면서 시로 올라가고 어떤 시는 시이면서 동시로 내려온다. 둘 다 진경이다. 동시로 보자면, 동시가 시와의 경계를 넘어 또 다른 시로 태어나는 순간이다. 그 지점을 보고 싶다.
이안
1999년 『실천문학』 시부문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동시집 『고양이와 통한 날』 시집 『목마른 우물의 날들』 『치워라, 꽃!』을 냈다. 격월간 동시 전문지 『동시마중』 편집위원.
1) 유종호, 「어엿한 시」(『동시마중』 제2호)
2) 『목마른 우물의 날들』(실천문학사 2002)
3) “도둑고양이 / 발자국 까맣게 / 오시네 // 넉 점박이 열두 점박이 / 천만 점박이 // 도둑고양이 / 발자국 하얗게 / 오시네” ― 「첫눈」 전문.
“어젯밤 꿈에 고향엘 갔는데 / 집 앞 냇물에 / 버들치가 아주 여러 마리 놀고 있어. / 어찌나 반갑고 고맙던지 / 가까이 가 웅크리고 앉았지. /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 그건 버들치가 아녔어 / 버들치 그림자였지. / 더 신기했던 건 / 두 손으로 손바가지를 만들면 / 이 그림자 물고기들이 고대로 들어와서 / 곰실곰실 노니는 거라. / 할머니 보여 드리려고 / ‘어머이, 이것 봐유, 이 물고기 좀 봐유!’ / 소리치며 집으로 달려가다가 그만, // 잠이 깼지 뭐냐! // 지금은 충주댐 / 물에 잠겨 갈 수 없는 아버지 / 고향 이야기 / 곰실곰실 손이 가려워지는 / 꿈 이야기” ―「아버지 고향」 전문.
4) 『고양이와 통한 날』(문학동네 2008)
5) “산토끼가 똥을 / 누고 간 후에 // 혼자 남은 산토끼 똥은 / 그 까만 눈을 / 말똥말똥하게 뜨고 / 깊은 생각에 빠졌다 // 지금 토끼는 / 어느 산을 넘고 있을까?” ― 「산토끼 똥」 전문.
6) “서쪽 하늘에 / 저녁 일찍 / 별 하나 떴다 // 깜깜한 저녁이 / 어떻게 오나 보려고 / 집집마다 불이 / 어떻게 켜지나 보려고 // 자기가 저녁별인지도 모르고 / 저녁이 어떻게 오려나 보려고” ― 「저녁별」 전문.
7) “봄비는 / 왕벚나무 가지에 자꾸 입을 갖다댄다 / 왕벚나무 가지 속에 숨은 / 꽃망울을 빨아내려고” ― 「봄비」 전문.
8) “한숨 자고 / 고구마 하나 깎아 먹고 // 한숨 자고 / 무 하나 더 깎아 먹고 // 더 먹을 게 없어지면 / 겨울밤은 하얗게 깊었지” ― 「그 겨울밤」 전문.
9) “산서고등학교 관사 앞에 매화꽃 핀 다음에는 / 산서주조장 돌담에 기대어 산수유꽃 피고 / 산서중학교 뒷산에 조팝나무꽃 핀 다음에는 / 산서우체국 뒤뜰에서는 목련꽃 피고 / 산서초등학교 울타리 너머 개나리꽃 핀 다음에는 / 산서정류장 가는 길가에 자주제비꽃 피고” ― 「3월에서 4월 사이」 전문.
10) “여치를 잡아 / 여치집 속에 가뒀더니 // 여치 소리만 뛰쳐나와 / 찌릿찌릿 찌찌 찌릿 / 풀밭에서 우네” ―「여치집」 전문.
11) “눈썹 검다 눈사람 / 눈물 없다 눈사람 / 눈이 왔다 눈사람 / 눈길 간다 눈사람 // 눈에 묻혀 사라진 / 길을 연다 눈사람” ― 「눈사람」 전문. 이 작품엔 다음과 같은 주가 달려 있다. “2연은 한국전쟁 전후 지리산 빨치산 대원들이 불렀다는 노래에서 따옴.”
12) “억만 군사들이 모두 / 칼을 쥐고 있다 // 꺾으면 / 손을 벤다” ― 「억새」 전문.
13) “얼마나 먼 곳까지 헤매다 왔는지 / 문턱에 툭 떨어져 / 벌벌 기어 / 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꿀벌” ― 정용주, 「집 앞」 전문. (『인디언의 女子』 실천문학사 2007)
14) “꼬막 조개 속에 / 꼬마 새우 한 마리가 들어가 앉았네 // “야! / 무슨 이야기 듣다가 /
여기까지 따라왔어?”” ― 김환영, 「운명」 전문. (『깜장 꽃』 창비 2010)
15) 『창작과비평』(1974년 겨울호)
16) “동주와 몽규는 두만강 건너 아름다운 명동촌, 명동소학교부터 단짝이었다. 중학생 동주는 축구 잘하고 재봉틀로 옷도 고쳐 입을 줄 알았던 멋쟁이. 나라 빼앗겨 말도 빼앗긴 시절 홀로 밤마다 우리말 시를 썼다. // 몽규도 중학생 때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임시정부 김구 선생 찾아가 군사훈련까지 받은 소년 독립운동가. 대학생 돼서도 둘은 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가장 든든한 동무면서 맞수였다. // 일본에서 공부할 때 몽규는 일본 경찰에 끌려 갔다. 나흘 뒤에 동주도 잡혀 갔다. 그들에게 붙여진 죄명은 치안유지법 위반, 조선독립운동 혐의였다. // 그리고 같은 감옥에서 둘은 죽었다. / “저놈들이 강제로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다가 이 모양이 됐어요. 동주도……” // 시체를 찾으러 온 동주 아버지를 만나 몽규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그도 십구일 뒤에 죽었다. 여섯 달 뒤면 해방이었다. // 동주와 몽규는 사촌이었다. 아름다운 명동촌 같은 고향집에서 세 달 간격으로 태어나 스물아홉 해를 살았다. 둘이었으나 꼭 하나로 살았다.” * 동주 : 윤동주(1917-1945) / * 몽규 : 송몽규(1917-1945) ― 전문.
17) 김륭 동시집,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문학동네 2009)의 머리말 「눈사람의 윙크」.
18) “동네에선 알아주는 싸움 대장 / 수업 시간엔 못 말리는 수다쟁이 / 동수 장난이 하도 심해 혀 내두른 아이들도 / 수십 명은 되지, 아마? / 난 도무지 이해가 안 가, 그런 동수를 / 좋다고 쫓아다니는 여자애들. /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 참 한심해. / 좋아할 남자애가 그리도 없나? / 아!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 ― 전문.『까불고 싶은 날』(창비 2010) 이 작품의 각행 첫 글자를 세로로 모아 보면, ‘동수동수난좋아 참좋아!’가 된다.
19) “내 눈은 실눈, / 내 별명은 실눈이. // 듣기 싫어도 실눈이, 애들한테 항의해 봐도 실눈이, / 속상해 미치겠다. / 엊그제 전학생이 왔다. / 제일 먼저 눈에 띈 건 작은 눈, / 어찌나 작은지 벌써 실눈이라고 / 부르는 애들이 생겨났다. // 별명을 잃게 돼 다행인데 / 참 이상하다. / 은근히 아쉬운 거다. / 잃고 싶지 않은 거다. // 얘들아, 내가 진짜 실눈이야. / 저 애에겐 다른 별명 붙여라. / 여치눈이나 모기눈.” ― 전문. 『축구부에 들고 싶다』(창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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