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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의 역사
조선시대 거듭된 사화로 지방에 은거한 사림들은 개별적으로 서재, 서당, 강사, 정사 등의 이름을 지닌 교육공간을 마련하고 성리학의 심화와 후학 양성에 노력하였다. 점차 그러한 학문 사상적 기반이 두터워짐에 따라 자신들의 조직을 재생산하고 교육할 수 있었으며, 비로소 선배 유학자들을 기리고 제사하는 사당의 기능을 통합한 서원을 창설하기 시작하였다. 초창기 서원은 조선조 재지사림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교육거점이자 선현을 숭앙하는 제향처였다. 서원 건립 세력들은 바로 이러한 우주의 본질과 이성의 탐구, 즉 고도의 철학체계와 군자로서의 인격완성을 가르치는 내면적 학문연마에 주력하고자 서원을 건립하였던 것이다.
중국 강서성 여산세계지질유산에 자리잡고 있는 백록동서원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에 의해 최초로 백운동서원이 건립되고, 이황(李滉)에 의한 서원 보급운동과 함께 조선중기이후 향촌사족들의 사회적 활동역량이 강화되면서 전국적인 서원 건립도 보편화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국가도 서원장려책을 실시, 독려하게 되자 서원건립은 매우 활발해졌다. 명종 대에 17개소에 불과했던 것이 선조 때에는 사액서원만도 100개를 넘을 정도로 급증하였고, 흔히 서원 남설기로 지칭되는 18세기에는 전국에 700여 개소에 이르는 서원이 건립․운영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초창기 도학적 연원과 내면적 학문연마의 서원 기능은 점차 변화되었는데, 제향하는 선현과 서원 운영 주체들의 성격에 따라 학연, 당파, 정치적 성향, 그리고 19세기 이후에는 문중적 이해까지 담보하는 복잡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서원건립이 본격적으로 당파간의 정치적인 이해관계와 결부되기 시작한 것은 효종 대 이후 산림세력이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 부터이다. 서원은 이 시기 향촌유생들의 여론을 결집시그런가하면 서원이 특정 가문이나 정파의 이해를 대변하는 기구로 변화되자 향중 공론을 대변하거나 여론을 선도하던 기능마저 퇴색, 부정적 기구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이에 국가는 정책적으로 서원을 통제
하게 되는데, 영조는 1741년(영조 17) 약 300여개의 서원을 혁파하는 조치를 강행하였고, 철종 조와 고종 조를 지나면서 전국 47개 서원을 제외한 모든 서원이 훼철(1871년, 고종 8)되기에 이르렀다. 서원이 중앙정계와 지역 유림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중요한 매개체였으며 따라서 각 정파의 입장에서는 서원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본래의 교육적 기능보다는 향사의 기능이 위주가 되었으며, 경제적으로도 면세와 면역의 특권을 남용하여 국가 경제를 위축시키는 역기능도 생겨나게 되었다.
2. 서원의 역사문화적 성격
서원은 복잡한 성격변화를 거치면서 400여 년을 존속한 우리나라의 대표적 교육기관이다. 물론 발전과 변화과정상 여러 모습으로 변화하기도 하지만, 본연적으로 조선후기 서원은 성리학의 발전을 촉진시키고 향촌문화의 수준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 하였다. 또한 사설기관으로서 서원은 성현들을 모시는 사당 또는 사묘의 역할과 더불어 향약 등의 향촌 질서를 정하고 백성들을 계도하는 역할, 단순한 교육이 아닌 학문 연구와 발전을 선도했다.
유교문화는 인물과 사상, 철학과 정신, 학문과 가치관을 중시하는 정신사적 문화이다. 다시 말하면 서원의 가치는 유형의 건축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곳에서 생활하며 향유했던 사람과 정신, 그리고 문화적 시스템에 있다. 이는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문화이자 복합적인 가치로서, 서원문화의 본질이 바로 그것이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이밖에도 서원은 향촌 지성들의 집회소로서 다음에서 보는 바와 같은 다양하고 중첩적인 기능들을 지니고 있었다.
각 서원의 특별한 교육철학
현재 서원의 문화유산적 가치는 인물사와 고건축 분야에 국한되어 있고, 또한 서원 본연의 교육적 기능보다도 전통제례, 또는 원론적 유학의 본산 정도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서원과 사우가 지녔던 기능은 무엇보다도 교육적 기능이 중심이다. 서원의 고유 기능은 역시 지방교육의 상징적 기구로 강학과 장수를 근본으로 삼은 사학기구였다. 그리고 각 서원은 저마다 교육의 방식과 운영의 모습들이 약간씩 다르며, 이는 서원별로 특별한 교육방침이 엄연히 존재했던 개성적 공간이었다는 점이다. 지역별 학맥의 개성적인 특성은 서원의 운영과 교육방침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지성들의 집회소
서원은 조선시대 각 지방의 고급 인재들이 수시로 출입하고 접촉, 교류했던 상징적 기구였다. 서원 내에서 젊은 인재들과 그들의 선배들은 일방적 지식의 전수교육이 아닌 강론과 학문 토론의 장을 형성하였고 때로는 여론과 공론을 결집하는 집회소를 꾸리기도 하였다. 집회소로서 서원의 기능은 서원에서 배출한 인물들이나 서원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던 수많은 명칭의 각종 조직들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따라서 서원에는 당 시기의 지성사적 전통과 정신문화적 유서가 서려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서원을 문화적 길잡이로도 표현할 수 있겠다. 결국 이들 지성들 간의 유대와 결속력의 토대는 지연과 학연을 배경으로 하는 정치세력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다.
사회교육의 장소
조선초기 소학의 보급과 향약실시 등의 일련의 노력이 대부분 향교를 기반으로 정착되었다면, 조선 중기 이후에는 서원으
로 그 주도권이 넘어 왔다. 사족활동의 거점은 바로 서원이었고, 서원에서 이루어지 는 제향의례나 강학의례, 기타 여러 형태
의 생활의례들은 서원이 사회교육의 실현처 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부분이다. 이처럼 서원에서의 교육은 보편타당한 가치
관을 형성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이는 향촌사회의 교화에 크게 공헌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도서관과 출판기능
서원은 교육기관으로서 뿐만 아니라 도서의 보존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원생들의 교육을 위해 소장 된 도서에는 경서를
기본으로 유가, 역사, 전기가 주류를 이루었음은 물론이며, 특히 각 서원의 제향인물이나 그의 학맥을 잇는 인사들의 문집류
등의 자료들이 보존되었다. 또한 서원의 운영과 관련된 실무적인 고문서 자료들도 많이 보관되어 있는데, 당시 장서의 관리
와 점검은 서원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였다. 한편 여러 서원에서는 경쟁적으로 서적을 출판하기도 하였는데, 서원이 도서의
보존기능에 더하여 서적의 출판과 배포라는 새로운 기능을 겸하게 된 것이다. 이는 임진왜란 이후 상당량 소실 된 서적에 대한 보강과, 추배된 제향인물에 대한 유고나 문집 등을 간행해야 하는 사명에서 비롯된 것이다.
도덕적인 실천장소
서원은 유교문화의 대표적 공간임과 동시에 유학자 개인에게는 ‘천인합일’의 인과 ‘천리절문’의 예를 실천하는 장소이다. 서원에서 유학자들은 배우며 쉬고 노닐며 축적하면서 그들의 가치관ㆍ세계관ㆍ자연관을 체득 인식하고자 했다. 이에 적합하도록 서원 입지를 선정하고, 경관과 장소를 조성하였다.
서원의 입지는 대체로 연고(선현의 강학처, 유허지, 씨족마을)가 있으면서도 배산임수에 천석이 있는 경승지를 선택하였다. 자연전망을 통해서 천인합일을 체득 인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서원 전면에 생기 있는 안을 설정하였으며, 경사 있는 지연지형은 상승감을 주는 진입로로 활용하였다 누문과 강당에서 보이는 자연전망을 확보하고 주위 자연환경과의 조화(형국)를 각별히 중시하여 건물을 배치하였다. 예의 실천 장소로 서원 내부공간을 만들고자, 위계에 따른 당하ㆍ계하의 차별, 비움과 채움의 장소, 오행의순서, 우회로 활용 등으로 장소경관을구성하였다. 이처럼 서원문화는 한국 유교문화의 다양성과 특성이 집약된 문화유산이다. 서원은 저명한 성리학자를 추숭하고 제향하는 공간이자 지역의 교육, 의례의 거점 공간인 동시에 지성사적 문화전통을 대표하는 곳이었다. 즉 조선시대 선비의 학문성, 도덕적 실천성, 개성을 보여주며, 지역 문화의 역사성과 한국 문화의 정체성을 담고 있는 곳이 바로 서원인 것이다. 그리하여 서원은 유·무형의 다양한 문화유산(역사, 교육, 제향, 건축, 기록, 경관 등)들이 존재하며, 의례, 도서, 출판, 문화예술, 정치 등 복합적인 문화사가 이루어졌던 거점이었다. 서원은 한국 고유의 유교문화(‛한국식 유교문화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인 것이다.
3. 서원건축의 시작과 변천
우리나라에서 서원은 원래 사문(斯文)의 진흥과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강학 장소였다. 최초의 서원으로서 중종 38년(1543)에 세워진 백운동서원은 사묘의 부수적인 존재에 그쳤다. 그 후 퇴계 이황에 의해 강당과 사묘를 같이 갖는 형태를 취하면서 서원은 사자(士子)의 장수처(藏修處) 제공이 설립의 주된 목표가 되었고 사현(祀賢)은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
조선 중기에 들어와 서원이 형식화되면서 그동안의 서당학원과는 성질을 달리하게 된다. 그것은 선현선사를 봉사하는 사묘를 겸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선현선사를 봉사하는‘사묘’와 자제들을 교육하는‘제’가 결합 성립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서원’이라는 기록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삼국사기 권46 열전≫이다. 이 기록에 나타나는 “서서원(瑞書院)”은 관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헌에 나타난 당시의 관직으로 ‘지서서감(知瑞書監)’, ‘서서랑(瑞書郞)’이라는 명칭이 있어 일종의 행정기관 이었던 것 같다. 고려 성종 때에는 평양에 ‘수서원(修書院)을 설립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있다. 이 수서원은 전적을 모아 수장하고, 필사본을 만들어 사생(師生)교육에 편리하도록 하는 기관이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장서각이었던 것이다. 서원이 본격적인 교육기관으로 정착된 시기는 조선 중기이다. 조선 초기에 서원이 있기는 하였으나 ‘祀’의 기능이 생략된 일종의 서당과 같은 것이었다. ≪세종실록 18년 10월≫에 “평안도관찰사가 보고하였는데 함종현의 강우양이라는 생원이 사사로이 서원을 만들어 학도를 가르친다(平安道觀察使啓咸從縣人生員姜友諒私置書院敎授學徒)”라는 기록이 있다. 물론 이 서원은 제사기능 없이 학도를 가르치는 서당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 기록에 ‘서재(書齋)’, ‘사재(私齋)’와 같은 개인이 만든 강학처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조선초의 서원은 개인이 공부를 하면서 학도를 가르치는 서당의 기능을 넘지 않는 수준이었던 것이라 하겠다.
사묘는 서원의 기능과 달리 별개로 발전되어 왔다. 사묘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어왔고, 고려시대에 들어와 거의 일반화되다시피 많이 건립되었다. 고려말에 들어와 일반민가에까지 사묘가 만들어지게 된것은 주자학의 전래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서재와 사묘는 각기 서로 다른 목적으로 발전되어왔던 것이다.
사묘의 기능과 강학기능이 합쳐진 본격적인 서원은 조선 중종38년(1543) 풍기군수 주세봉이 중국의 백록동서원을 본받아 창건한 백운동서원이 그 효시이다. 그 후 명종때에 이르러 군수였던 퇴계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가에서 사액을 주는 사액서원이 생기게 되었다. 사액서원은 국가에서 서원 이름을 편액에 새겨 사사하면서 유지관리를 위하여 토지와 노비·전적을 내리고, 면역과 면세혜택을 주어 교화사업을 장려하려는 것이었다. 백운동서원은 ‘소수서원’이라는 사액과 함께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그 후 많은 서원이 창건되었고, 조선조말 대원군의 서원훼철이 있기까지 무려 1173개나 되었다. 이 중 사액서원이 270개나 되었다.
서원 중에는 강학기능만 지니고 있던 서당이 발전하여 서원으로 변한 것들이 많다. 대표적인 것으로 도산서원(경북 안동), 덕천서원(경남 산청), 필암서원(전남 장성), 돈암서원(충남 논산), 노강서원(충남논산) 외에 여러 곳이 있다. 초기의 서원건립 목적과 달리 후기로 내려오면서 서원의 본래 목적인 향사와 강학의 가능에서 강학기능이 작아져 심지어는 사묘만 건립하고 서원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경우도 있었다. 이와 같이 향사기능만 지닌 서원은 문중의 세를 과시하려는 의도로 건립된 경우도 많아 그 폐단이 매우 심각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렇게 많은 서원이 만들어지면서 각종 폐단이 현실적으로 나타나게 되자 영조때(1741) 한차례 규제를 하게 된다. 이 때 300여개의 사설서원을 없애는 정리가 이루어 졌다. 그 후에 창건되는 서원은 그리 많지 않았으나 서원의 폐해는 극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종8년(1871) 대원군은 극심한 서원의 폐해를 막기 위하여 전국에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모두 훼철하는 정리를 감행하였다.
정순목은 <한국 서원 교육제도 연구>에서 조선시대 서원의 변천과정을 3기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제1기는 16세기 중엽으로 이때를‘장수(藏修)우위시대’라고 한다. 이 시기의 서원은 본래의 기능인 학문 연구에 맞춰 건립하였다. 이에 따라 강학공간의 건물인 강당, 재, 장판각, 경각 등이 주로 건립되어 서원 내에서도 강학공간의 비율이 비교적 많았다. 대표적인 것으로 소수서원을 들 수 있다. 이 서원은 원래 불사가 있었던 자리에 건립하였다. 중심축이나 대칭적인 배치가 아니라 건물들이 산만하게 배치되어 있는 모습이다. 배치의 정형을 볼 수 없는 초기형태이다.
16세기 후반이 되면서 초기와는 달리 일정한 배치형태를 만들게 된다. 즉, 입지하는 장소는 배향인물이 강학하던 곳이나 또는 배향자와 관련 있는 위치에 점지하면서 공간의 중심성, 위계성을 엄격하게 유지하게 된다. 중심축선을 형성하거나 대칭적인 배치가 이때 나타나게 된다. 대표적인 것으로 도동서원, 옥산서원, 병산서원, 필암서원 등을 들 수 있다.
제2기는 17세기부터 18세기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때를‘향사(享祀)우위시대’라고 한다. 17세기 중엽부터 급격하게 늘어난 서원은 숙종조에 이르러서는 전국적으로 무려 427개나 창설되었다. 이러한 서원 남설은 결국 중요한 인재양성의 기능보다는 향사위주로 흐르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이 때문에 강학
공간이 부실하게 만들어지고 교육과 관련된 부속건물이 생략되기도 하였다. 이시기의 대표적인 것으로 덕양서원, 덕봉서원, 흥암서원 등이 있다.
제3기는 세기 이후의 시대로 서원의 남설로 인해 폐해가 나타나 결국 서원을 정비하게 된다. 이 시대를‘서원정비시대’라고 한다.
서원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향사, 강학의 목적이라기 보다는 피역(避役), 여흥의 처소로 변질되기도 하고 심지어 당쟁의 근거지로 변화되는 극심한 폐단을 나타내게 되었다.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하여 고종 8년에 전국 47개 서원을 제외하고 모든 서원을 철폐하는 령을 내리게 되었다. 19세기 말부터 훼철되었던 서원이 복원되면서 그 중에는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강학기능보다는 향사기능만을 복원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조선시대 서원은 이와 같은 몇 개 의 시기를 거치면서 변천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서원의 배치형식
서원의 배치는 크게 두가지 기능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여러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두가지 기능이라는 것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향사기능과 강학기능이다. 즉, 사당이 있는 구역과 강학을 하는 강당 구역으로 구분된다. 배치는 또한 지형조건에 따라 달라지는데 그렇다고 지형조건이 반드시 배치형태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형조건이 배치형태에 일반적으로 영향을 주는 요소라는 것이다. 배치형태는 향교에서와 같이 묘당공간과 강학공간의 위치관계에 따라 유형을 분리하게 된다. 가령 강학공간인 강당이 앞쪽에 있으면 전학후묘식 배치가 되고 사묘가 강당 앞에 있으면 전묘후학식 배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향교에서는 나주향교와 같이 전면에 사묘가 있고 그 후면에 강당을 배치하는 특별한 경우는 있지만 서원에서 사묘가 강당 앞에 배치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간혹 좌우 측면에 나란히 배치되는 경우는 있다.
병산서원 강당에서 바라본 만대루
서원의 공간구조는 크게 선현을 향사하는 ‘묘당 공간’과 자제를 교육하는 ‘강학 공간’으로 구분하는데 이와 같은 공간구조는 향교의 공간구조와 유사하다. 향교와 다른 것은 서원의 사묘에는 특정인물의 위폐나 영정을 봉안하고 향사를 지낸다. 향교의 사묘에는 어느 향교나 유사하게 중국의 공자를 비롯한 선현과 우리나라 유학자 18현을 봉안하는데, 이에 비해 서원에서는 특정한 인물을 배향하므로 서원마다 배향인물이 서로 다르다. 따라서 향교의 사묘 크기에 비해 서원의 사묘 크기는 작다. 향교의 묘당 공간 내에는 주 공간인 대성전 외에 동무와 서무가 배치되는 경우가 많지만 서원의 묘당 공간에는 부속건물이 거의 배치되지 않고 사묘만 두게 된다. 아주 특별한 경우 묘당구역 내에 전사청을 배치할 정도이다.
사묘 주위는 반드시 담으로 둘러싸고 정면 중심에 묘문(또는 신문)을 설치한다. 묘문은 대부분 삼문이나 일각문으로 만든다. 이와 같이 주위를 담으로 둘러싸게 되면 공간의 분위기가 엄숙해지고 행사를 치를 때 경건함을 유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사묘의 명칭도 향교는 어디나 공통된 명칭을 쓰는 반면 서원에서는 서원마다 서로 다른 명칭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소수서원은 문성공묘(文成公廟), 도산서원의 사우는 상덕사(尙德祠), 옥산서원은 체인묘(體仁廟), 필암서원은 우동사(祐東祠)로 명칭이 서로 다르다. 어떤 서원에서는 사당에 서원의 이름을 붙쳐 서원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이와같이 사우의 명칭은 대개 ○○廟, ○○, ○○書院으로 구분되는데 이 중에서 ○○祠로 이름을 붙인 경우가 가장 많다.
서원의 두 번째 중요한 기능으로 강학기능을 들 수 있다. 강학기능은 서원내 강당과 동서 양재에서 이루어진다. 흔히 강학공간이라고 표현하는데 이곳에서 원장이 기거하거나 학생들이 기거하기도 한다.
규모가 큰 서원의 경우 강당과 양재가 같이 있지만 규모가 작은 서원의 경우 강당만 있거나, 혹은 동서 양재만 있는 경우도 있다. 조선후기가 되면 강학공간을 두지 않고 사묘만 두고 서원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경우와 같이 서원 남설이 심했던 시기도 있었다. 이런 것은 엄밀히 서원 이라기보다는 사당의 성격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서원내 강당의 위치를 보면 대개 사묘 앞쪽에 두는데 간혹 사묘의 좌우에 두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지형조건에 따라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가령 전후로 대지가 확보될 경우 앞쪽에 강당을 두고 뒤쪽에 사묘를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식 배치형태가 되지만 전후로 대지를 확보할 수 없을 경우 좌측이나 우측에 나란히 사묘와 강당을 두는 ‘좌묘우학’이나 ‘좌학우묘’식 배치가 되기도 한다. 사묘를 강당 앞에 두는 배치형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좌묘우학 식 배치로는 죽정서원(竹亭書院), 수암서원(秀岩書院)이 있고, 좌학우묘식 배치로는 수림서원(繡林書院)을 든다. 이는 대개 후기에 건립된 것들이다.
강당의 명칭은 향교의 명륜당과 같이 공통적인 이름을 쓰지 않고 ○○堂, ○○書院, ○○講堂과 같이 서로 다른 이름을 쓴다. 도산서원의 경우 전교당(典敎堂), 옥산서원에서는 구인당(求仁堂), 돈암서원에서는 응도당(應道堂), 무성서원에서는 무성서원(武城書院), 덕양서원에서는 덕양강당(德陽講堂)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 이 중에서 堂, 書院이라는 명칭이 가장 많이 쓰여지고 있다.
돈암서원 응도당 측면
서원 내 공간으로 전사청이 있다. 이 공간은 제향시 제수를 마련하거나 제기를 두기도 하는데 간혹 제기고로 겸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 전사청은 사묘구역 내에 두지 않고 사묘와 가까운 곳에 별도로 배치해 둔다. 간혹 사묘구역 내에 두는 경우도 있는데 함양의 남계(濫溪)서원에서 볼 수 있다. 전사청을 이렇게 두는 배치는 다른 곳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장판각도 서원에서 볼 수 있는 건축물이다. 간혹 경장각(經藏閣), 어서각(御書閣)이라고도 하는데 선현의 문집을 보관하거나 문집을 펴내기 위한 판각본을
보관하는 곳이다. 일종의 도서 수장고라고 하겠다. 이 건물은 서고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에 건물의 위치와 건축구조에 각종 조건을 고려하게 된다. 예를들면 습기가 적고 통풍이 잘되는 위치에 자라잡고, 구조적으로도 습기에 대응할 수 있도록 바닥은 마루로 만들고 창의 크기는 통풍을 고려해 만들었다.
이러한 조건을 고려하여 장판각 전후로는 가능한 다른 건물을 띄워서 배치하고 건물을 둘 경우 바람이 잘 통하도록 배치하였다. 배치형태의 기본은 전면에 강당, 동서 양재 등 강학공간을 배치하고 후면에 구릉지를 대지로 조성하여 묘당공간을 둔다.
수직사는 한쪽 측면에 치우쳐 배치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전학후묘식 배치라 하겠다. 이러한 전학후묘식 배치로는 안동 도산서원, 고산서원, 장성 필암서원, 논산 노강서원 등이 있고 전면에서 약간 치우쳐 있는 것으로 논산 돈암서원, 연기 합호서원 등을 들 수 있다. 강학공간을 묘당의 전면에 두지 않고 중심축에서 벗어나 배치되는 경우 즉, 묘당의 좌측이나 우측에 강당이 배치되는 것을 ‘좌묘우학(左廟右學)’, 또는 ‘좌학우묘(左學右廟)’식 배치라 한다. 강당을 두지 않고 사묘와 재실만 두는 경우도 있다. 재실이 강학기능을 지니고 있기에 강학공간이라고 할 수 있지만 서원으로서 완벽한 공간구조라고는 할수 없을 것이다. 강당과 동·서 양재 건물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건물 내에 두는 배치형태도 있다. 서원중에는 강학공간을 두지 않고 사당만을 배치한 경우도 있다. 이것은 물론 조선후기에 들어와 서원이 남설되면서 강학기능이 현저하게 축소되어 향사만을 위한 사당에 서원이름을 붙인 경우가 된다. 그 중에는 조선말에 훼철되었다가 복원하면서 강학공간이 필요 없어지자 사당만 복원한 경우, 원래 사당만 있었던 것을 그대로 복원한 경우, 새로 창건하면서 사당만 건립한 경우이다.
4. 서원 건축물의 가치
서원의 건축사적 가치는 조선시대 왕조시대의 시대상과 역사성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비록 현대사회가 되면서 서원의 기능은 상실되기는 했지만 건축은 원형을 지속적으로 보존하고 있다. 동북아 유교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나라들 중 서원건축의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고 있는 곳은 우리나라이며, 그 중에서도 조선조말 훼철을 면한 47개 서원은 건축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서원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제외할 수 없으며, 어떠한 역사적 인물이든, 역사적 사건이든 반드시 그 시대의 역사와 연결되어 있기에 매우 중요한 장소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이런 측면에서 서원의 건축사적 가치는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서원건축의 기술사적 가치와 양식사적 가치 또한 매우 높다. 우리나라 서원 중에는 조선 중기 의 건축양식을 보존하고 있는 사례를 비롯하여 조선말까지 각 시대에 따라 건립된 사례가 현존하고 있다. 서원의 건 축양식을 통해 당시의 기술수준과 미학사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서원의 건축사적 가치는 더욱 중요해 지는 것이다. 서원 건축의 양식사와 기술사는 그 시대의 건축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면서 또한 그 시대의 문화사, 경제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서원건축은 시대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볼 수 있는 한 분야가 된다. 서원건축의 가장 큰 가치는 완전성과 진정성이다. 현존하는 서원 중에는 국가지정문화재와 시도
지정문화재가 있다. 지정된 서원은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고, 지속적인 관리가 이루어져 건축적으로 완전성과 진정성이 다른 서원에 비해 특히 잘 유지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문화재보호법이 지정문화재에 대해 특별한 관리를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문화재로 지정된 서원의 건축사적가치는 다른 서원에 비해 특히 높다고 할 수 있다.
5. 서원 경관의 입지적 특성
서원에는 유교가 추구하는 가치인 ʻ천인합일(仁)ʼ을 체득하고 ʻ천리의 절문(禮)ʼ 을 구현하는 경관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서원 경관을 해독하는 주요 경관 요소는 다음 여덟 개 부문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서원 입지 ②天人對待의 전망 경관 ③前低後高의 풍수적 위요경관 ④위계적으로 분절된 禮경관 ⑤서원의 연못 경관 ⑥비움과 인간적 규모의 안마당(中庭) 경관 ⑦간략한 식재 경관 ⑧서원 주위의 자연적장소경관 등이다.
입지경관
자연성
우리나라 서원 입지의 가장 큰 특징은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있는 곳에 입지한다는 자연성이다. 전면에 경지·강, 그리고 산이 있어 개방적이고 시원한 전면 경관과 여기서 마을에 다가오는 푸른 산색과 반짝이며 굽이쳐 흐르는 물색에서 생의를 깨닫고 마음을 넓히며 지혜를 함축하도록 하는 아름다운 산수경관이 서원의 필수적 입지 요소이다.
전저후고의 경사지형
우리나라 서원의 다수는 앞이 낮고 뒤가 높은 전저후고의 경사지형에 입지한다. 평지에 세워진 서원도 배산구조를 하기 때문에 예외 없이 전저후고 지형의 서원과 같이 강당을 앞에 두고 사당을 뒤에 두는 입지구성을 취한다. 이는 성균관이나 나주향교에서 볼 수 있는 일부 향교의 전묘후학의 입지구성과 다르다. 이러한 서원의 전저후고의 입지경관은 첫째 안에서 외부를 조망할 때 개방적 자연 경관시계를 확보함으로써 다양한 장소에서 ʻ천인합일ʼ 을 정감적으로 체득하는 것이 우리나라 서원의 중요한 특성이고 장점이다. 자연적 지형 경사를 따라 자신의 신체조건에 맞추어 올라가는 방식으로 서원에 진입하도록 하고 앞에서부터 외삼문-안마당-강당-사당의 순으로 건물을 배치함으로써, 진입과정에서 느끼는 상승감이 존경 경관에 대한 외경심과 자연스럽게 결합될 수 있다.
전저후고의 대표적인 서원인 도동서원
개방성
입지적 성격 때문에 우리나라 서원은 공공적 종교적 시설에서 흔히 나타나는 폐쇄성과는 반대로 매우 개방적이다. 낮은 담장과 벽 없는 기둥으로 외부와 차단되지 않는 마루 공간, 자연지형 지세에 순응하는 상대향과 복합적 축선 등으로 나타난 개방성과 자연성은 높은 담과 회랑으로 둘러져 있는 폐쇄적인 중국 서원과는 다르다. 또한 이는 수행 기도 도량을 벽으로 구획하고, 내향적인 불교사찰과도 다르다. 풍수적 자연관과 관련된 위요경관도 시각적·심리적으로 장소를 내부화하는 것이지 출입을 통제하거나 시계를 제한하기 위한 위요경관이 아니다. 즉 서원 주위의 사신사, 서원의 안마당 등 둘러싸인 경관도 그 본질이 폐쇄를 통한 내부화에 있지만, 완전히 둘러싸서 막는 모습이 아니다.
전망경관
전망 경관은 서원의 문루나 강당에서 전면의 대자연을 내다보는 경관으로 인간과 대자연이 마주보는 천인대대의 경관이다. 풍수에서는 안대라고 하고 유교적 관점에서는 자연과 생의를 감통 감응함으로써 천인합일의 경지(仁)를 마음과 정신으로 느끼고자 하는 경관이다. 서원의 구체적 입지 유형과 서원 창설자들의 지향하는 바에 따라 천인감통을 느끼는 방식이 다양하다. 서원 문루의 이름과 기문이나, 관련된 인물의 시문을 통해서 전망 경관의 유형을 아래와 같이 분류할 수 있으며,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전저후고의 위요경관
• 필암서원 : 廓然大公의 필암서원은 탁 트여 시원하게 펼쳐진 평야 경관이다.
• 남계서원 : 風詠樓는 경주 평지에 자리 잡아 낮은 산과 들이 평온하게 생기 있게 보이는 경관이다.
• 병산서원 : 翠屛晩對의 병산서원은 생기 충만한 푸른 山色을 마주하며 生意체득이 뚜렷한 경관이다.
• 도동서원 : 秋月照寒水의 도동서원은 가을 달 찬 강물에 비추는 군자의 마음을 느끼는 경관이다.
• 구연서원 : 끊임없이 흘러오는 물에서 자강불식하는 성인의 마음과 물의 지혜를 읽는 경관이다.
■ 한국 전통건축에서 담장은 주로 돌이나 흙 혹은 돌과 흙을 섞어 울타리를 두르는 방식이다. 서원의 담장은 돌과 흙을 섞어 만들되 기와를 얹었다.
■ 서원 내부에서 외부 자연경관을 관망하는 서원의 개방성을 훼손하지 않도록 만들어진다. 낮은 담장을 통해서 서원 외부의 자연 경관을 끌어들이면서 서원의 인위적 경관을 담장 너머 대자연과 합일시킨다.
■ 서원을 비롯한 한국 전통건축의 위요 경관은 내부를 완전하게 폐쇄적으로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 상징적으로 둘러싸서 내부자(insider)라는 지각적 효과를 추구하는 것이므로 산과 담장은 높지 않고, 안마당을 둘러싼 건물도 틈새가 크다.
인위적으로 분절된 예경관
예란 인을 이루고 인을 어기지 않기 위한 실천이다.예는 구체적이고 사회적 상황에 적절하게 인을 실천하는 절도의 아름다움, 곧 절문이다. 절문의 절은 등차이고, 문은 문채이다. 예를 실천하는 서원경관은 서원의 내부 경관 구조에서 자연스러운 차별화가 느껴지도록 개별 장소로 분절된공간이다. 전저후고의 경사 지형을 활용하여, 아래 그림처럼 서원의 장소들은 상승 축을 따라서 좌우 대칭적 구조에 기능별로 분절적으로 배치함으로서, 입구에서부터 지형경사를 따라 차례로 보다 높은 권위를 가진 장소로 진행하도록 한다.
연못경관
수경관은 동아시아 주거 입지와 경관 구성에 핵심적 요소이다. 서원경관에서 수경관은 풍수적 취수 집수 기능과 유교적 관조의
대상이라는 상징적 성격이 중복된 연못으로 나타나며, 형태는 사각형(方形)이 많다. 서원 연못은 풍수적 맥락에서 보완경관 으로
서 의미가 있다. 시골에서 많이 볼 수 웅덩이는 습지의 일종으로 지하수면을 상승시켜 우수시 토양유실을 완화시키고 오염물질을
분해시키는 마당 생태계 균형자의 역할을 한다. 서원의 연못도 취수, 집수, 수구로서 우기 때 집수 장소가 되어 서원 내 배수를
원활하게 하여 마당 토양의 유실을 막아주고 오염물질을 분해시키며 화재 때는 수원의 역할을 한다.
안마당경관
서원 내부는 가능에 따라 많은 분절된 장소가 형성된다. 서원의 중심, 곧 강당 앞에는 보통안마당(중정)이 만들어져 있다. 안마당은 비움의 공간으로 황토로 채우고 화초나 수목을 심지 않는다. 비움으로써 마당은 양기를 충천하는 장소가 되고, 수양의 성찰을 돕도록 침묵의 공간이 된다. 비워진 마당은 여름에는 서원 후면의 숲으로부터 바람을 유도하여 강당을 시원하게 하고 겨울에는 마당의 복사열이 강당과, 동·서재에 반사되어 따뜻하게 하는 미기후 조정 기능이 있다. 서원을 포함한 전통 건축에서 안마당(중정)은 인간적 규모의 반 개방적 사각형 마당으로 설명된다.
즉, 사람들이 편안하게 느끼는 일정한 범위의 공간규모로 제한된다고 하여 ‘인간적 스케일’로 부르기도 한다. 그 규모는 첫째, 중정은 건물사이 거리가 대부분 20-25m 정도이다. 이는 건너편 건물에 있는 사람의 얼굴 표정을 읽고 육성으로 대화할 수 있는 간격이다. 둘째, 마당 폭과 건물높이 사이의 비례는 2-3 배이다. 중정에서 건물이 사면을 둘러싸 자신이 보호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면서 답답하지는 않을 정도의 가장 편안한 폐쇄감을 느낀다. 셋째, 마당한쪽 끝에서 반대편 건물 꼭대기를 바라보는 시선의 앙각은 18-27도이다. 바라보는 사람이 편안하게 느끼는 앙각이다. 넷째, 중정의 사면을 막는 건물들 사이 모서리는 연결되지 않고 벌어져 있는데, 그 각도는 20-25도이다. 중정 사면의 공간은 개방성과 폐쇄성 사이에 적절한 균형감을 느끼는 크기이다.
수목식재 경관
서원은 산수가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입지하므로 의도적 수목 식재는 제한적이다. 식재 수종의 특성을 서원 경외는 진입 공간과 담장주위, 서원 내는 강학공간과 제향공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서원 경외의 진입과정의 공간의 공통적인 수목은 소나무와 느티나무 그리고 행단과 관련된 은행나무가 대표적이고 노거수가 많다. 느티나무와 은행나무는 유식 여가장소인 정자나무 역할을 한다. 담장 주위와 서원 뒤에는 소나무와 대나무가 대표적이다.
경내에 식재되는 나무는 강학공간에는 은행나무, 매화나무, 배롱나무 등 이 대표적이다. 강학공간은 안마당이 중심장소가 되기 때문에 비어 있어 나무나 초본의 식재가 적다. 제향공간은 상대적으로 수목식재가 많은 편이다. 목백일홍(배롱나무)과 무궁화 및 모과나무, 단풍나무, 향나무, 측백과 회화나무(槐木) 등이 있다.
서원주위 자연공간
서원 주위에는 서원창립자의 삶의 자위가 남겨진 많은 장소들이 있고 아름다운 산수가 있어 자연과 합일하려는 서원 창설자의 사상이 바위글자로 새겨져 있다. 의미 있는 장소들을 유교적 가치와 관련된 이름이 부여되고 九曲 등으로 경영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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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방대하고 중요한 자료 감사합니다.
내용중에
1. 서원의 역사중 끝에서 4번째줄 끝부분에 ....키는 ...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무슨뜻인지와
5 서원경관의 입지적 특성 중
전저 후고의 위요공간에 예를 든 서원이 전항의 것과 동일합니다.
한번 살펴봐 주십시오
그러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