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4.18 - 중랑구 묵동삼거리 먹골유래비 ... 글감수 안재식
먹골유래비 묵동삼거리에 건립
'묵동 · 먹골 지명' 도로명 주소로 바뀜에 따라
묵동삼거리(옛 묵동파출소자리 녹지대)에 먹골유래비가 최근 세워졌다. 지방선거로 인해 제막식은 생략했다.
중랑구가 주민들 및 구의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건립한 유래비는 묵동 · 먹골이라는 지명이 도로명 주소로 바뀜에 따라 사라지고 있는 이때, 먹골의 뿌리와 전통을 길이 후손에 남길 수 있게 되어 향토문화적 긍지를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다.
다른 지역에 비해 묵동은 전해지는 설화가 풍부하다. 유래비문은 중랑문화원이 중랑향토사7집으로 발행한 조선왕조 500년과 함께하는 <설화의 고향, 중랑(저자 안재식)>내용 중에서 ‘왕방연의 눈물, 먹골배’ 편 일부를 인용 발췌하였고, 중랑문학대학 소정 안재식 교수가 글감수하고, 수암 나익환 선생이 서각을, 구름한조각에서 먹골유래와 걸맞게 보령 오석으로 시공하여 건립했다.
먹골유래<비문> 글감수 안재식
먹골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이곳에서 먹을 만들었다는 데서 유래한 순 우리말 표기이며, 인근 봉화산 소나무 참숯으로 만든 먹은 품질이 좋아 궁중에 진상했다고 한다. 먹골은 대리(大里-큰말, 넘말), 중리, 후동, 왕방골로 나누어진다. 그중에서 대리는 큰골이라고도 했는데, 먹골 안에서는 제일 큰 마을로 현재 묵동3거리 일대가 된다.
묵동(墨洞)은 조선말까지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면에 속해 있었으며, 1914년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에 속했으나, 1963년 서울특별시로 편입 망우출장소 관할이었다가 1968년 동대문구에 편입되었고, 1988년 중랑구가 신설되면서 이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 세조때 금부도사를 지냈던 왕방연(王邦衍)이 단종(1441 ~ 1457)유배를 호송하고 사약을 전달한 것에 눈물로 후회하면서 관직을 그만두고 필묵과 벗하며 산 곳이 바로 봉화산 아래 ‘먹골’ 지금의 묵동이다. 어린 단종의 애절한 눈빛을 잊지 못해 왕방연이 심었던 배나무는 신내동, 중화동, 상봉동 뿐만 아니라 구리, 남양주 등지로 퍼져 이 일대에 대규모 배밭이 형성되었고, 먹골배의 원산지로 유명하다.
그 당시 먹골 근방에는 연적과 벼루를 닮은 언못이 있어서 그곳 마을을 연촌 혹은 벼룻말(노원구 월계동)이라고 했다. 또한 지금의 하계동은 필동 혹은 붓골이라 불렀으니, 이 두 지역과 묵동을 연결하면 문방사우(文房四友)중 3개가 삼각형 모양을 이루게 되는데, 이 안에서 훌륭한 인재들이 나올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글감수 소정 안재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