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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아카데미 창작 강의 2017년 1학기 제1강
어안 최상호/sumet@hanmail.net
010-3822-5218
시조는 우리 고유의 자랑스러운 정형시이다.
이는 소리글자인 한글이란 훌륭한 그릇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표기할 우리의 그릇이 없을 때는 한자에 그 뜻을 옮겨서 담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 그릇에 담겨진 형태와 노랫말이 달랐다. 한글에 담겨지면서 언문일치의 온전한 형태가 나타났다.
시조는 3장6구 12음보 45자1)로 이루어진 온전한 정형시를 정격으로 간주한다. 이는 시조부흥 운동기에 이병기와 이은상 등이 발표한 시조형식의 변화를 모색하는 여러 유형에 접하면서 조윤제가 학자적 입장에서 이를 조율하여 발표한 것이 현대시조의 모형이 되었다. 시조는 중등학교 교과서와 참고서에 실려 있고, 대학교재를 포함한 시조이론서에도 실려 있다. 그래서 오늘날 이를 정격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오늘날 파격을 주장하고 따르는 목소리가 높아 시조의 위기는 이제 그 정체성마저 의심케 한다. 물론 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이렇게 우리 시조가 오늘날 위기에 처해 있음은 여러 학자들의 글에서나 언론매체를 통해서도 감지한다. 그 위기는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는 위에서 언급한 형식적인 파괴이고, 또 하나는 시조 교육 부재이다. 이를 살펴보며 오늘날 시조가 처한 현주소를 진단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을 제언해 보고자 한다.
70여 년 전 일본의 어느 미대에서 한 교수가 강의를 마치고 내려가는데 학생이 느닷없이 이런 질의를 했대요.
“선생님, 여기 천하제일 가는 미인이 있다고 합시다.
그 미인에게서 표정을 빼내도 미인일 수 있습니까?”
기발한 질문이었어요. 교수는 즉답을 못하고 다음 강의 시간에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천하제일 가는 미녀의 표상이 비너스와 모나리자 상인데, 이것들은 예술품에 불과하다. 뛰는 심장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박물관에나 있는 것이다. 나는 심장을 가진 가장 못난 사람을 미인으로 취하겠다.”
입만 벌리면 ‘민족문학, 민족문학’ 하는데, ‘민족문학’이란 게 뭡니까. 그 민족만이 가지고 있는 문학이 민족문학 아닌가요. 중국에는 오언(五言), 칠언(七言)의 한시가 있고, 일본에는 단가, 하이쿠가 있고, 한국에는 시조가 있고, 서구에는 소네트가 있잖아요. 이게 민족문학인 것입니다.
수많은 나라가 명멸한 중국 6천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조를 ‘당송시대’라고 하는데, 이유는 당송시대에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가 났기 때문이에요. 그 시대의 위대한 문화가 당송팔대가를 배출한 것인지, 당송팔대가로 인해 그 시대가 위대하게 되었는지, 아무튼 유관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당송팔대가가 없었다면 당송의 문화는 창조될 수 없었다고 봐야 옳을 것입니다.
인류사는 정치사도 아니고 경제사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하나의 삶의 방편이지, 잘 살기 위해 구조를 만든 것이지 남기는 것은 아니에요. 인류사는 문화사인 것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이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을 남기고 갔느냐가 그 민족의 우열을 가리는 것이지, 어느 나라가 잘 살았고, 호사했느냐가 아닌 것입니다. 문화를 많이 남긴 민족이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인류 문명의 발상지인 5대 문화권을 찾아 답사하고 연구를 하는 것도 다 이 때문 아닙니까.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시조는 한국의 표정입니다. 한국문학에서 시조를 빼내 버리면 남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우리가 시를 쓰고 소설을 쓴다 하지만 이게 얼마나 됐어요. 백여 년 밖에 안 되었잖아요. 그러나 시조는 향가에 뿌리를 두고 있어 130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고려가요를 거쳐 그릇이 완성되었는데, 중요한 건 이것이 우연이 아니고 필연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입니다. 그 동안 모든 유입 문화를 소화해서 하나의 합일로 빗방울에 돌이 패이듯이 시조라는 그릇이 만들어진 거예요. 그런 점에서 시조는 우리의 맥박이고 내재율이고 표정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가꿔야 하는데 가꾸는 조건은 뭘까요. 일본은 1860년에 명치유신을 했어요. 당시 일본에도 서구문명이 해일로 덮쳤어요. 당시 각계에서 선구자들이 등장했는데, 그때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라는 가인(歌人)이 있었어요. 그는 “정치·경제 학문만으로는 이 거센 외풍에서 우리 일본을 구출할 수 없다. 서구 선진문명이 들어오면 정치·경제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일본 것이라는 것은 다 침몰하고 만다.”면서 시의 도반들로 9인회를 만들어 ‘일본 시(하이쿠, 俳句) 짓기 운동’을 펼쳤어요. 그 뒤 명치유신 100주년 되던 해에 일본의 평자들이 오늘의 일본을 일으킨 가장 위대한 사람을 뽑았는데, 어느 경제인, 정치인, 학자보다 이 마사오카 시키에게 가장 높은 점수를 줬어요.
오늘의 일본을 일으킨 사람은 정치인도 경제인도 아닌 바로 이 마사오카 시키가 일본을 살렸다는 평가였지요. 지금 일본엔 하이쿠를 쓰는 사람이 수천만 명이라고 해요. 일본의 신시(新詩)가 세계를 뒤덮진 못했지만 일본의 하이쿠는 내가 알기로 지금 캐나다, 프랑스 교과서에도 들어가 있어요. 하이쿠를 모르면 지성인으로 대우를 받지 못할 정도라고 해요. 그런데 우린 어떻습니까. 우리는 지금 시조라고 하면 낮게 보고 변방문학으로 몰아요. 문제가 크지요.
대학교수들이 시조를 한시처럼 기승전결에 갖다 붙이는데, 나는 아니라고 봐요. 시조는 3장이잖아요.
20여 년 전에 쓴 내 《시조창작법》에도 나오지만, 나는 시조를 ‘유(流), 곡(曲), 절(節), 해(解)’로 봐요. 태백산에 비가 내려 흘리고(流), 한 바퀴 감아 돌고(曲), 그 다음엔 가다 보면 낭떠러지 폭포를 만나요. 힘을 주게 되는 마디(節)지요. 폭포에 물이 떨어지고 나면 그냥 바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에요. 한 바퀴 돌아요. 소(沼)를 만들어 자정작용을 한 뒤 풀어서(解) 흘러가요. 한 번 흘리고 한 번 감아 돌고 한 번 마디 짓고 그 다음에 풀어내는 것, 시조 한 수를 나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나는 시조를 볼 때 시조만 생각하지 않고, 한국무용과 한국화, 판소리와 민요, 이런 것들을 합일해서 시조 창작에 연관 지어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시조에 합류돼야 좋은 시조라고 생각해요.
시조에서는 종장이 가장 중요한데, 종장을 어떻게 풀까 나는 늘 고민을 합니다. 글씨로 말하면 길 도(道)자 밑에 책받침처럼 풀까, 음악으로 말하면 ‘평사낙안(平沙落雁)’, 달밤 백사장에 기러기가 내려앉듯이 자연스럽게 풀까를 생각해 보는 겁니다. 팍 끌어올리고 싶은 것은 그림으로 말하면 ‘동산월출(東山月出)’, 동산에 달이 돋듯이 뽑아 올리고, 글자로 말할 때 ‘주마축지(走馬蹴地)’, 달리는 말이 뒷발로 땅을 세게 한 번 차듯이 할까.
그래야 속도가 붙어요. ‘경조탁사(驚鳥琢蛇)’, 불시에 뱀이 나타나 참새를 잡아먹으려 할 때 너무 놀란 참새가 제 죽을 줄 모르고 뱀 대가리를 쪼는 경지, 깜짝 놀라게 하는 방법이죠. 이처럼 시조의 종장을 어느 경지에다 어떻게 접목을 시킬까를 늘 생각해 보게 되는데, 그 안에는 무용도 있어야 하고 회화도 들어가야 하고 음악도 있어야 해요. 문학이 이를 다 합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야 내재율이 있는 좋은 시조가 되는 겁니다.
최근에 〈한세상 이야기〉를 연작으로 5편 써봤어요. 그 첫째 작품이 이래요. “우리가 서로 손 놓고 헤어지는 그날 밤은 / 궁금한 일 있더라도 돌아보지 말일이다 / 자꾸만 뒤돌아보니 달도 따라 오는 거다.” 종장에 해학을 담아본 겁니다. 인생을 이야기 해본 거지요.
두 번째 작품을 볼까요. “귀뚜리 울음소리도 창가에만 그냥 두면 / 하늘에 올라가서 서로 별이 되는 건데 / 사람이 데리고 다니니 자꾸 울게 되는 거다.” 왜 끌고 다니냐, 관심을 안 가지면 되는 건데. 도교사상을 접목해본 겁니다. 다섯째 작품은 이래요. “텅 비워둔 고향하늘 울고 가는 저 기러기 / 제 새끼 밥 지어주려고 물 길으러 간다는데 / 내 밥은 안 지어주고 울 어머니 어디 갔나.” 구십 먹은 자식이 칠순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리워요. 좋은 시는 눈물이 바닥에 많이 깔려야 좋은 시가 되는 것 같아요.
처음 시조를 쓸 때는 단수로 시작하는데, 단수로는 몇 마디 못하니 연시조를 쓰게 돼요. 그런데 쓰다보면 그게 또 길게 느껴져 생략하고 생략하다 보면 다시 단수로 돌아와요. 단수로 시작해서 단수로 끝나는 게 시조예요
시조에서는 제일 마지막 수의 종장이 가장 중요해요. 시의 윗부분이 수석이라면 시조의 종장은 수석의 받침돌이에요. 아무리 명석이라도 받침대가 좋지 않으면 명석이 될 수 없어요. 이 받침대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마지막 수의 종장입니다. 이 점을 생각하고 종장에서 위의 시를 딱 떠받쳐야 명시가 되는 거예요. -백수 정완영
2.
김대행은 2002년 경남시조 세미나 발표에서 파행을 일삼는 현대시조의 정체성에 대해 재 천명했다.
“전통은 ‘과거로부터 끼쳐진 것’이라는 역사성과 ‘오늘에도 작동하는 것’이라는 현실성을 본질로 한다. 그러기에 전통은 흘러간 과거라기보다 지금 이 시간에 살아 숨쉬는 과거일 때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시조는 이 점에서 전통의 양식이라 할 수 있다.“2) 라 하여 시조의 정형은 과거의 것이면서 오늘에도 살아 있는 형식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지켜 나감으로써 그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조의 일차적 조건은 그 형식적 특성에 있으며 이것이 시조의 유일한 정체성으로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생명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조의 형식적 특성은 지켜져야 한다. 이는 오늘날 시조 형식의 파행을 현대시조의 특권인양 또는 시조의 현대화를 위한 새로운 모색 내지 발전인양 하는 시조시인들에게 반성의 여지를 던져 주는 내용이다. 시조문학 연구자로서, 이론가로서, 학자적인 입장에서 오늘날 파행을 일삼는 시조시인들을 바라보며 일침을 가하는 진단이라고 본다.
김학성은 현대시조의 좌표와 방향에서 “현대시조는 현대 + 시조라는 명칭에서 드러나듯이 현대성과 시조성을 동시에 충족해야 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 즉, 현대성을 충족해야 역사적 사명을 다하고 사라진 고시조의 빈 공간을 메꿀 수 있는 존재이유가 되고, 시조성을 확고히 해야 자유시와의 경쟁관계에서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다.“3) 라 하여 시조의 현대성과 시조성 곧 전통시로서의 시조의 역사성을 명시하여 이를 현대시조가 안고 있는 문학사적 위상이고 좌표로 제시했다. 곧 현대성을 무시하고 시조성만 추구한다면 현대인의 미의식에 걸맞는 공감대를 획득하기 어렵고 반대로 시조성을 무시하고 현대성으로 과도하게 기울면 자유시와 경계선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양쪽으로부터 경계와 비판의 시선을 받는 것이 현대시조가 위치한 현주소라는 것이다. 이는 곧 詩意는 현대성을 추구하고 표출하되 시조의 형식은 정형시로서의 전통성을 고수해야 된다는 것이다.
임종찬은 [문장구조로 본 현대시조]에서 ‘장구한 세월을 겪어오는 동안 형태나 내용면에서 부분적인 변화를 겪어왔지만 시조가 정형시로서의 시조(단시조) 속성은 계속 유지되어야만 시조의 존재 이유가 확보된다’고하여 시조의 존재는 자유시와 확연히 구별되는 정형성에 있음을 진술했다.
신범순은 [시조의 현대적 의미에 대한 모색]에서 “시조의 고정된 형식을 변화시키려는 실험은 '시조혁신론'을 제기했던 가람 이병기 이후 계속 발전하여 오늘날 거의 자유시처럼 보이는 시조들을 만들어내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시조형식의 열림을 위한 실험은 그러나 이제와서는 도대체 이러한 실험적 시조가 과연 시조인가 아니면 자유시인가 하는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게끔 한다.“ 4)
라고 하여 시조의 형식 파괴는 시조혁신론을 제기했던 이병기 이후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오늘날 자유시처럼 창작되고 있음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와 함께 이에 대한 타당성 여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고시조에서 보는 ‘하여가’나 ‘단심가’ 등은 그 정갈한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역사적 배경과 더불어 길이길이 빛나는 명시조이다. 이는 우리말의 구조 자체가 시조를 쓰기에 적절하기 때문이다. 조금만 말을 다듬고 함축시키면 시조의 정격을 지킬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시조시인들이 지금도 그 정격을 지키면서 자유시와 차별화된 어려운 작업을 하고 있다.
시조의 고정된 형식을 변화시키려는 실험은 '시조혁신론'을 제기했던 가람 이병기에서부터이다. 하지만 도남 조윤제가 당시 여러 이론들을 종합하여 내 놓은 것이 시조의 정격이다. 그래서 그것이 학교 교과서(초,중,고)와 시조이론서(대학교재를 포함해서)에도 실려 있다. 그런데 일부 시조시인들이 가람의 영향을 받아쓰기 편한 대로 쓰다 보니 그 작품들이 읽기고 읽혀져서 보는 이마다 ‘이렇게 써도 되는구나’하고 쓴 것이 오늘날 자유시인지 시조인지 모른다는 말까지 나오게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시조 창작 교실을 운영하고 가르치는 시조시인조차 자유를 구가하며 형식을 파괴하고 있으니 그것이 큰 문제로 제기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시조 큰 상을 타는 수상작품까지도 정격이 아닌 파격 작품을 즐겨 뽑고 있으니 그것 또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시조형식의 파괴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중국의 정형시인 5언 7언 절구가 변화를 요구했으며, 일본의 하이쿠가 변화를 해서 세계화로 뻗어가는지 한 번쯤이라도 생각했으면 한다.
다음 글을 음미해 보자.
우리가 ‘시조(時調)’를 정형 율격에 안정된 시상을 담는 전통적 시 양식으로 인식하는 관행은 매우 익숙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시조에는 정격(正格)의 정서와 형식이 담기는 것이 가장 어울려 보이고, 그로부터의 파격(破格)을 꾀하는 해체 지향의 언어는 다소 불편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5)
이 글은 시조형식의 정격에 익숙해 있고 이를 선호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글이다. 그리고 시조시인들이 시조를 쓰면서 시조 고유의 율격을 해체하는 것을 일종의 자기모순으로 치부하고 있다. 현대 시조의 새로운 미학적 활로는, 전통적 형식과 현대적 감각을 결합하여 다가서는 데 달려 있다고 진술한다.6) 파격을 하고, 파격을 외치는 시조시인들은 한 번 더 되새김질하여 돌아 봐야 할 문제 제기이다.
사실 우리말의 언어구조는 시조를 쓰기에 아주 적절하다. 한 단어의 음절이 거의 2,3,4,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시조의 각 음보(마디)가 가능한 것이다. 두 음보가 짝을 이뤄 구를 이루고 각 구가 짝을 이루어 장을 형성하는 것도 그래서 가능하다. 영어로서 우리네 정서에 맞는 시조를 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한문으로도 불가능하다. 곧 정형시로서의 그 형식을 지킬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시조를 한문으로 옮길 때는 중국의 정형시인 절구에 맞추어 옮기는 것이다. 이렇게 각 나라에 맞는 고유의 시형이 정형시인 것이다. 중국엔 절구가 있고, 일본엔 하이쿠가 있고 유럽엔 소네트가 있듯이 우리에겐 시조가 있는 것이다.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각 나라마다 그 나라의 언어구조에 따라 고유시를 가지고 있다. 일본의 경우 한자(초서체)를 흘려 쓴 히라가나와 한자를 간략화한 카타가나는 헤이안(平安·794~1192) 시대에 만들어졌다. 때문에 하이쿠는 그것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라는 지적이다. 실제로 ‘하이쿠의 종장(宗匠)’ 바쇼는 두보, 이백, 소동파, 황산곡의 한시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쇼의 작품 외 몇 점의 하이쿠를 살펴보자.
①사람을 따라
절에 가니 파리가
합장을 하네. (바쇼)
(5,7,5 ->17자)
②오래된 연못
개구리 뛰어드니
물소리 퐁당! (바쇼)
(5,7,5 ->17자)
③도둑이 와도
들창에 걸린 달은
두고 갔구나. (료칸)
(5,7,5->17자)
④ 내 전생애가
저 나팔꽃 같구나.
오늘 아침은(모리다케, 생애 마지막으로 쓴 시)
(5,7,5->17자)
⑤너무 울어서
텅 비어 버렸는가
매미 허물은. (바쇼)
(5,7,5->17자)
⑥닭이 다투니
모이를 주는 것도
죄가 되는구나 (이싸)
(5,7,5->17자)
**편의상 우리글자수에도 맞춰진 작품을 택했다.
얼마나 깔끔하고 함축적이면서도 아름다운 표현인가. 이것이 17자로서 세계로 퍼져가는 일본의 하이쿠이다. 그 표현형식이나 내용상의 절제를 자유시와 비교할 수는 없다. 자유시는 자유시로서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시조는 45자 내외이다.[초장 3.4.4(3).4 중장3.4.4(3).4 종장3.5(7).4(3).3(4)] 정확히 말하면 43-47자 까지가 정격이다. 그래서 45자 내외라는 말을 쓴다. 곧 45자에서 2글자 가감을 허용하는 것이 정격의 형태로 인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것이 조윤제설로 각 시조이론서에 나와 있는 시조형식이다. 3장 모두 첫구 첫 마디(음보)는 3음절이다. 이 정격 형태를 공공연히 무시하는 것이 오늘날 일부 시조시인들이다. 시조 큰 상을 타는 작품에서도 이 3음절조차 무시한 작품들을 더러 본다. 이들의 작품이 퍼지고 퍼지면 ‘현대 시조는 이렇게 써도 되는구나’하며 너도 나도 파격의 시조를 선호하며 쓸 것이다. 그것이 오늘 날 시조인지 자유시인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위치에까지 온 것으로 본다.
다음에서 43-45자 정격을 고스란히 지키면서도 아름답게 읊은 시조 몇 편을 살펴보자.
눈물에 대하여/김준
자기와
자기 아닌
또 다른 자기와의
치열한
갈등에서
마지막 속삭임이
마침내
가슴에 닿아
그지없는
이 환희. (43자)
사랑.Ⅱ/이우종
살아서
숨쉴 때만
손목을 잡아 주고(14자)
피어서
있을 때만
꽃이라고 부르지만(15자)
사랑은
무덤에서도
떠오르는 불길인가.(16자)->45자
가을산/조 규 영
기분이 좋았던지
뒷산도 저 앞산도(14자)
술 한 잔 마시고서
술기가 오르는지(14자)
빨갛게 물이 들면서
술기운이 돕니다.(15자)->43자
적막한 봄/정완영
산골짝 외딴집에 복사꽃이 혼자 핀다(15자)
사람도 집 비우고 물소리도 골 비우고(15자)
구름도 제풀에 지쳐 오도 가도 못한다.(15자) ->45자
봄날이 하도 고와 복사꽃 눈멀겠다(14자)
저러다 저 꽃 지면 산도 골도 몸져눕고(15자)
꽃보다 어여쁜 적막을 누가 지고 갈 건가.(16자)->45자
가을 산책/김석철
수줍은 코스모스
서리 아침 들국화도(15자)
눈 시린 쪽빛 하늘
머리 위에 받쳐 이고(15자)
저마다
저린 사연을
그려 내고 있나니 (15자)->45자
울밑의 귀뚜라미
저문 뜨락 낙엽들도 (15자)
계절의 깊은 뜻을
온몸으로 그려 내며(15자)
밤새껏
푸른 달빛에
부대끼고 있나니 (15자)->45자
해오라비난.1 /전선구
이 밤에 풍겨오는 몽롱한 그대 향기 (14자)
꿈 깰가 두려워라 그윽한 살 냄새여 (14자)
사르르 채질을 한다 꿈속에서 아련히.(15)--43자
만추단상(晩秋斷想)/조 희 식
등산길 능선 따라 수림 속을 걸어간다(15자)
늦가을 황량해져 잎이 지는 허전함에(15자)
단풍진 누른 잎들이 지난 세월 그린다.(15자)->45자
상강도 지났으니 늦가을의 그리운 정(15자)
물든 잎 바라보며 무슨 꿈에 잠겼나를(15자)
나대로 상념에 잠겨 더듬대며 걷는다(15자)->45자.
내 맘도 이맘때니 막바지의 인생길이(15자)
다그는 겨울철에 오육칠정 잠재우고(15자)
지난날 되새기면서 지는 잎과 견준다.(15자)->45자
교육 입안자들은 시조가 우리 고유의 자랑스러운 문학임을 자각하고 우리의 귀한 문화유산에 자긍심을 갖고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나 우리 한글을 사랑하듯 우리의 시조(時調)문학을 사랑할 것이다.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나 우리의 고유시가 있음에 긍지를 갖고 시조 한 두 수쯤은 애송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그 토양도 조성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주체적 민족문학인 시조가 세계로 향하여 뻗어가게 해야 할 것이다. 문화의 21세기를 부르짖는 현 시점에서 그 첫 번째 열매를 시조에 둔다는 각오로 시조시인들은 창작에 임하고 교육입안자들은 시조의 저변 확대는 물론 후진 양성에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시조는 아무리 내용이 문학적이고 예술성을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정형을 무시하면 시조로서의 가치를 상실한다. 정형을 일탈한 시조는 이미 시조가 아니다. 따라서 자유시로서 평가를 받을 수는 있을지언정 시조작품으로 평가를 받아서는 안 된다.
시조는 3,4조의 율격과 3장 6구 12음보를 기본 정형으로 한다. 이에 더하여 종장 3.5.4.3의 변화를 의무화 하고 있다.
시조시인이나 심사위원, 평론가, 학자는 물론, 등단지망생과 시조를 공부하는 학생들 까지도 이런 시조정형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시조문예지에는 시조정형을 제대로 갖춘 작품을 찾기 어렵다. 수 천 편에 달하는 출품작에서 골라 뽑은 신춘문예 당선작 중에서도 정형과 내용을 제대로 갖춘 시조를 만나기가 어렵다.
혹자는 시조는 융통성이 있는 정형시이므로 어느 정도의 파격은 허용된다고 한다. 한두 자의 가감은 무방하다는 것이다. 물론 음보율이 맞으면 자수율만으로 재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음보율은 한국어의 의미마디, 발음 및 호흡이 맞을 때 무리가 없는 것이지 억지로 짜 내어 음보율을 주장하면 정형의 파괴로 이어진다. 한두 자 가감도 어쩌다 부득이한 경우에 예외로 허용되는 것이지 음보마다 무제한 가감하는 것은 이미 시조정형이 아니다.
<고시조 알아두기>
한 손에 막대 들고 또 한 손에 가시 들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우탁/고려말 학자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고려말 문신
까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소냐
겉 희고 속 검은 짐승은 너뿐인가 하노라
-이직/조선초 문신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방원/조선 3대 임금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임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놋다
-왕방연/조선 초기 무인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 운산에 어느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서경덕/조선 중기 문신
꽃들이 진다하고 새들아 슬허마라
바람에 흩날리니 꽃의 탓 아니로다
가노라 휘젓는 봄을 새워 무삼 하리오
-송순/조선 중기 문신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유수는 어찌하여 주야에 긋지 아니한고
우리도 그치지 마라 만고상청 하리라
-퇴계 /조선 중기 문신
감장새 작다하고 대붕아 웃지 마라
구만리 장천을 너도 날고 저도 난다
두어라 일반비조니 네오 제오 다르랴
-이택/조선 중기 문신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님 오시는 밤이여든 굽이굽이 펴리라
-황진이/조선 중기 기녀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양사언/조선 중기 문신
짚방석 내지 마라 낙엽엔들 못 앉으랴
솔불 켜지 마라 어제 진달 돋아온다
아희야 박주산채일망정 없다말고 내어라
-한호/조선 중기 서예가
십년을 경영하여 초로 한 간 지어내니
반 간은 청풍이요 반 간은 명월이라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김장생/조선 중기 문신
말하기 좋다하여 남의 말 말을 것이
내 남 말하면 남도 내말 하는 것을
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작가 미상/ 조선 중기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자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이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홍낭/조선 중기 기녀
내 벗이 몇이나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섯 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윤선도/조선 중기 문신
내해 좋다하고 남 싫은 일 하지 말며
남이 한다 하고 의 아니면 좇지 말라
우리는 천성을 지키어 삼긴대로 하리라
-주의식/무신
잘 가노라 닫지 말며 못 가노라 쉬지 마라
부디 긋지 말며 촌음을 아껴 쓰라
가다가 중지 곧 하면 아니 감만 못하리라
-김천택/조선 후기 가객
나비야 청산 가자 범나비야 너도 가자
가다가 날 저물거든 꽃에 들어 자고 가자
꽃에서 푸대접하거든 잎에서나 자고 가자
-작가 미상/청구영언
오늘도 좋은 날이요 이 곳도 좋은 곳이
좋은 날 좋은 곳에 좋은 사람 만나 있어
좋은 술 좋은 안주에 좋이 놂이 좋아라
-작가 미상/청구영언
부채 보낸 뜻을 나도 잠깐 생각하니
가슴에 붙는 불을 끄라고 보내도다
눈물도 못 끄는 불을 부채라서 어이 끄리
-작가 미상/고금가곡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 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황진이/조선 중기 기녀
높으나 높은 남게 날 권하여 올려두고
이 보오 벗님네야 흔들지나 말으되야
나려져 죽기는 섧지아니되 님 못 볼까 하노라
-이양원/조선 중기 문신
말없는 청산이요 태없는 유수로다
값없는 청풍이요 임자 없는 명월이로다
이 중에 병없는 이 몸이 분별없이 늙으리라
-성혼/ 조선 중기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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