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임자체 운행일지 II
1999년 12월 29일 수요일(네팔 5일째, 캐러밴 1일째) 계획 : 루크라(2,840m) - 팍딩(2,610m) - 몬조((2,840m) 실제 : ″ 아침에 일어나니 온도계가 3도를 가르킨다. 싸늘한 날씨이다, 머리가 조금 아픈데 아스피린을 하나 먹을까 생각 중이다. 08시 55분 출발했다. 루크라를 지나 돌담길로 들어섰다. 마치 강원도 어느 오지를 걷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네팔의 아리안계는 힌두교를 믿지만 셀퍼족이나 다망족 티벳인들은 불교를 믿는다. 그래서 동네마다 룽다라고 하는 우리 나라의 푯대같은 것도 있고 불교경전을 의미하는 글을 돌판에 새기거나 적어서 길 복판에 모아두고 있는데 그 곳을 지나갈 때는 좌측통행을 해야 한다. 뭔지 모르고 오른쪽으로 갔다가 마주 오던 동네 노파에게서 책망을 듣기도 했는데 이후 루크라로 돌아올 때까지 대원 모두가 좌측 통행을 잘 지켰다.
어제 밤부터 내의를 입었다. 햇빛이 안드는 곳에는 얼음이 깔려 있고 싸늘한 편이다. 09시 35분 휴식중이다. 쉬는 시간에 라전에게서 네팔의 유명한 산노래 레솜필리리를 배웠다. 레솜필리리는 바람에 솜털이 날아간다는 뜻이라고 한다.
RESOM PILIRI resom piliri resom piliri ulera jamki dalema beosom resom piliri godo goleo meoki goleo dankoreko chaina peochi peochi nau boini monpareko chaina
resom piliri resom piliri gukureorai kutikuti bilarore suli dimro amlot maiyabilti dobadoma kuli resom piliri resom piliri ulera jamki dalema beosom resom piliri
우리와 음악적인 정서가 비슷한데가 있어 어느 정도 쉽게 배울 수가 있었는데 이어지는 가사가 굉장히 긴 듯 하다. 12시에 팍딩의 리버사이드 롯지에 도착해서 중식을 먹었다. 강물의 색깔이 초록색인 가운데 콸콸 흘러가고 있고 롯지 이름에 걸맞게 주변경관이 어우러져 있다. 바로 앞의 봉오리가 콩데봉이다 아니다를 두고 옥신각신하다가 원주민으로부터 콩데봉이 맞다는 소리를 듣고나서부터 아니다라고 지도를 펴놓고 주장하던 배대원이 조용해졌다.
하늘은 푸르고 날씨는 기차게 좋다. 그런데 카메라가 고장이 났다. 그것도 로라이 독일제 카메란데 난데없이 셔터가 내려가질 않는다. 수동이어서 건전지가 떨어질리도 없는데... 팍딩까지 거의 3시간 걸려서 왔다. 강가를 따라 어슬렁어슬렁 왔다. 오르막을 오라 오게 되면 이제 숨이 많이 차다. 햇빛이 비추는 곳은 따뜻하고 그렇지 않은 곳은 차갑다. 지금 온도는 10도 정도. 15시 40분 몬조 도착. 공지에서 사다셀퍼 기다리고 있다. 사다가 와야 숙소가 정해지기 때문에 꼼짝없이 기다린다. 햇빛이 사라지니까 막 추워졌다. 바람이 차다.
고도는 루크라와 같은 2,800m. 오르막 올라올 때는 몸이 천근같고 머리가 띵하다. 미간사이가 아픈 것이 아무래도 고소증세가 아닌가 생각된다. 뭘 할까하다가 깡통을 주워서 산에서 많이 하던 깡통축구를 손대원과 했다. 그 모습이 불쌍했는지 동네 아주머니가 테니스 공을 하나 주길래 더 열심히 했다. 결과는 5:3으로 손대원의 승리. 덕분에 추위는 사라졌지만 역시 평지와는 다르게 힘을 쓸 때마다 몸이 휘청휘청, 말을 듣지 않는다. 숨도 컥컥 막히고. 17시경
사다셀퍼가 야크와 함께 도착해서 인근의 카이라쉬 롯지에 여장을 풀었다. 손목이 거북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아까 내리막에서 미끄러지면서 생긴 부상이다. 안티프라민 로션으로 마사지를 했다. 모두가 조금씩 좋지 않은 상태. 롯지에 있는 홀의 난로 가에서 어기적거리면서 블랙티를(네팔의 고유엽차) 6잔이나 먹었다. 아직 우리 짐이 덜 왔기 때문에 라면에 밥말아 먹었다. 맛이 없었지만 배가 고파서 마구 우겨 넣었다.
아까 축구를 해서 그런지 고소증인지 온 몸이 살살 떨리고 머리가 아팠다. 다시 홀로 올라갔더니 유럽 애들이 메모지를 놓고서 책에서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다. 자식들 세미나하러 히말라야에 왔나? 아마도 자기들끼리 트레킹을 하면서 어떤 주제를 놓고 날마다 토론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주제로는 인류문명과 히말라야와의 관계쯤 되지 않을까? 내일은 목표가 남체 바자르니까 오늘보다는 여유가 있지 않을까 싶다.
지금 시각 21시 10분. 일찍 잠자리에 들어가 봤자 자꾸 깨어날 것 같아서 이렇게 늦게 잘려고 빌빌거리고 있다. 여기 롯지에는 그래도 뜨거운 물이 나오기에 손발에 이빨까지 닦고 양말하나 빨았다. 내선생님은 내일이 한국 출발일 인데 무얼 하고 계실까? 또 우리집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한국시간으론 지금 밤 12시가 넘은 시간이다.
식구들이 보고 싶다. 그동안 너무나 모든 일이 새롭고 신경쓸 일이 많아서 미처 생각을 못했는데... 더 좋은 남편, 더 좋은 아빠, 더 좋은 자식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큰 산이 하나씩 나타나서 그렇지, 아직은 한국의 산야와 크게 다른 점이 없다. 오히려 강원도의 동강이 더 정취가 있는 듯 하다. 그런걸 보면 좁은 우리 나라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히말라야 갔다온 사람들이 우리 산이 더 났다는 이야기를 조금 이해할 것 같다. 언제쯤 잘까. 9시반? 10시?
12월 30일 목요일(네팔 6일째, 캐러밴 2일째) 계획 : 몬조(2,840m) - 남체 바자르(3,440m) 실제 : ″ 06시 45분 기상. 가벼운 아침 운동후 사다셀퍼의 유쾌한 굿모닝이라는 인사와 함께 블랙티의 시간. 날씨가 흐리지만 아침엔 항상 이런 편이다. 그래도 루크라 보다는 따뜻하고 바깥엔 개스가 가득하다. 실내온도는 5도씨. 조식 후 양치까지 했다. 홀에 갔더니 난로주변에 독일어를 쓰는 애들이 가득하다. 08시 45분 출발. 사가르마타 국립공원 관리소에서 외국인이 허가 없이 캠코더 가지고 가면 걸린다면서 사다셀퍼가 나의 캠코더를 자기 배낭에 넣었다. 뭐 정식으로 허가 받으려면 200달러나 된다나.
군인이 인도제 자동소총을 들고있는 사가르마타 국립공원에서 입산료 1인당 650루피씩 내었다. 꽤 비싼 편이다. 이렇게 돈 받아서 누구한테 쓰이는지 사다셀퍼도 분개를 한다. 우리 나라에서 숱하게 옆길로, 뒷길로 넘나들던 실력을 여기서도 발휘를 해볼까 생각하면서 유심히 주변정찰을 해보지만 여기선 엄두가 안난다. 주변이 천혜의 요새이다. 빠질 구멍이 없어 보인다. 10시쯤 설악동 와선대쯤 되는 곳에서 건포도 씹어먹고 있다. 사다셀퍼만 우리와 행동을 같이하고 나머지는 몬조에서 짐을 기다리고 있다.
바람이 조금 있고 간간이 햇빛이 비추고 있다. 기온은 10도씨 정도. 아직까지는 키가 큰 소나무가 울창하다. 계곡물로 인해 등산로가 많이 무너진 상태이다. 세계제일의 트레킹이 우리 나라의 설악동이나 강원도 정선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결국 우리도 나름대로 경쟁력이 있다는 말씀. 12시 30분 남체 바자르 도착. 바자르가 우리 나라에서 곧잘 사용하는 어머니Bazar회와 같은 의미라는 것에 놀랐다. 유식한 손대원 말로는 인도말이라나. 소나롯지에 여장을 풀었다.
루크라에서 만났던 일본의 트레킹 팀을 여기 롯지에서 또 만났다. 얘들은 사다셀퍼 없이 자기팀의 대장을 따라 움직이고 있고 롯지가 아닌 롯지앞 공지에서 막영하면서 칼라파타르까지 가는 알찬 트레킹을 하고 있었다. 막영도구와 장비는 야크를 이용해서 네팔포터들이 수송을 하면서 식사만 롯지를 이용하니까 훨씬 저렴하게 히말라야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실제 이런 형태를 유럽 애들도 많이 하고 있었다. 우리 나라도 이런 식으로 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중식 후 남체 위에 있는 동네 샹보체(3,720m)에 고소순응차 올라갔다가 그쪽 롯지에서 블랙티 사먹으며 1시간 30분동안 개기다가 내려왔다. 더 오래 있으면 좋으련만 날씨가 좋지 않아서 구름이 휙휙 지나가는 산등성이 길을 버리고 다이렉트로 내려왔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의 고소증은 4천은 훨씬 넘어야 오지 않을까 하고 나름대로 계산을 하고 있었다. 왜냐면 1987년에 마터호른 북벽을 올라갈 때 정상(4,478m)에서 그런 증상을 그것도 조금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웬걸 여기 남체에서, 겨우 3,440에서 나의 몸에 이상이 나타났다. 머리가 무겁고 몸이 오슬오슬 떨렸다.
19시경에 식사를 하는데 모두들 밥맛이 없어 다 먹지를 못한다. 나는 꾸역꾸역 밀어 넣고 남이 남긴 밥까지 모두 먹어 치웠다. 그래도 머리 무거운 것은 가시지 않는다. 코도 꽉 막히고. 일본사람들은 식사후 회의중이다. 칼라파타르까지 가니까 우리와 일정이 비슷하다. 젊은 여자 애들도 2명이 있다. 일본 팀의 리더는 몸집이 작고 깡마른 할아버지인데 우리의 목표인 아일랜드 피크도 올랐다면서 우리에게 등정사진을 보여 주었다. 설악산과 인수도 와보았고 한다. 인천의 어느 산악회와 자매결연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영어도 유창하고 하여튼 통솔력이 대단하다. 다른 롯지와 달리 형광등 불빛이 좋지만 머리가 아파서 아무 것도 하지를 못했다.
12월 31일 금요일(네팔 7일째, 캐러밴 3일째) 계획 : 남체 바자르(3,440m) - 텡보체(3,860m) 실제 : ″ 06시 30분 기상. 죽었다가 살아났다. 맥박이 간밤에 106번까지 올라갔었고 지금은 80번 정도로 내려 왔다.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으면서 잠을 잤다. 이러다가 심장이 터져 버리지 않나 싶을 정도로 쿵쾅 거렸다. 온갖 개꿈은 다 꾸고... 코가 특히 마르고 공기자체가 마시면 따가워서 숨쉬기가 곤란했다. 열은 없었던 것 같고 이상하게도 밤만 되면 고소증세가 오는 듯 하다. 대원들의 컨디션을 봐서 남체에 하루를 더 머물던지 아니면 전진할 예정이다.
조식 후 회의를 가졌는데 모두가 진행하자는 의견이다. 남체에서 2∼3일 머무는 등반 팀도 많다는데 우리 팀의 저돌성에 나도 놀랐다. 09시 35분 출발. 바람이 차다. 계속 오르막이어서 파일자켙을 벗고 운행을 했다. 다이나목스라고 알펜투어 사장님이 주신 고소약을 하나 먹었다. 한번 먹게되면 5일 연속 먹어야 약효가 발생되는 약이다. 11시에 고도 3,800m 도착해서 쉬고 있다.
13시 50분 푼키텐가 계곡 물에 머리를 감았다. 여기는 거의 설악산 수준이다. 이제 음지에는 얼음과 눈이 깔려 있다. 중식을 위해 길가 롯지에서 쉬고있고 계곡이 우리와 너무 흡사해서 이런 생각이 났다. 구태여 돈 들여서 여기까지 올 필요가 있을까? 라고. 물론 산이 크다 보니까 어프로치에 시간이 많이 걸려야 하겠지만 트레킹이 등반의 주된 요소가 될 정도로 진짜가 아닌 것에 아까운 힘을 모조리 소비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다가 맨날 똑같이 되풀이되는 시골집, 시골길, 야크며 풍광, 먼지...여긴 인건비가 저렴하니까 셀퍼나 포터가 짐을 나르지만 우리 나라 트레킹은 차량을 이용한다는 것이 뚜렷한 차이점이라고 할까.
멀리 로체, 에베레스트, 아마다블람이 보인다. 너무 멀리 있어 상대적으로 작아 보인다. 또 아직 본격적인 설산에 이르지 못해서 그렇게 감동적으로 느끼지 않는 형편이다. 16시 34분 텡보체 로지 도착. 짐 추스리고 홀에서 난롯불 쬐고 있다. 푼키텐가에서 또 고도를 600m나 올려야 했기 때문에 무척 힘이 든 하루였다. 3번 정도 쉬었다가 올라온 것 같다. 독일말이 난무하는 가운데 커피 기다리고 있다. 우리 짐은 이미 이곳 롯지에 와있었다.
점점 눈과 얼음이 많이 보이는 가운데 내일 페리체라는 동네로, 고도 400정도를 더 올릴 예정이다. 밖에 나가서 석양에 물든 로체와 아마다블람을 촬영했다. 석식이 19시여서 난로 가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난데없이 이태리 남녀 떼거리가 불쑥 들어오더니 맥주 시켜서 자기들끼리 노래부르고 춤추고 난리 치더니 미안하다면서 휑하니 가버렸다. 이태리 국민성을 그대로 들어내는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자니 오늘이 그 대단한 20세기의 마지막 밤이 아닌가! 아무래도 오늘은 그냥 못 넘어갈 듯 하다.
사랑산 식당으로 전화했더니 내선생님 밤 10시쯤 카트만두에 도착예정이라고 한다. 결국 오시기는 오시는구먼. 우린 여유있게 고도를 높이는 편인데 늦게 오셔서 BC에서 조우하려면 꽤나 고생하시겠구먼 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전화했다고 손대원, 조대원 집으로 전화하려고 롯지를 나갔다. 20세기 마지막날에 지구의 지붕 히말라야에서 집으로 전화가 가면 내용이야 어찌되었던 한국에선 감격할 수밖에 없으리라. 흐흐흐....(난 왜 생각을 못했지?)
독일 애들 밥먹고 자기들끼리 계속 담소중. 역시 철학의 나라답게 절도있게 조용조용 이야기한다. 20세기의 마지막 밤이라고 독일 애들의 셀퍼들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셀퍼들은 잘 논다.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레솜필리리를 신청했더니 아주 흥겹게 노래를 부른다. 이어서 독일 팀의 합창. 다음은 우리들 차례. 이런 식으로 몇 번 부르니까 모두들 허물이 없어졌다. 쪽수가 열세인 우리가 노는 것도 조금 위축된 상태. 한국인은 술이 한잔 들어가야 하는데... 대사를 앞두고 그럴 수도 없고. 하여간 신나는, 20세기 마지막 히말라야의 밤.
1월 1일 토요일(네팔 8일째, 캐러밴 4일째) 계획 : 텡보체(3,860m) - 페리체(4,240m) 실제 : ″ 간밤에 소변이 굉장히 마려웠다. 4번 정도 일어났다. 이제 고소적응이 된건지 머리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0도씨 정도에 잠이 들었고 새벽녘에는 영하1도씨 정도로 온도가 떨어졌다. 해뜰 무렵에 밖에 나아갔더니 21세기의 첫날이라고 일본 애들이 많이 촬영을 하러 나왔다.
우리 팀의 찍새들은 아직 감감소식인 가운데 에베레스트에 비치는 뉴 밀레니엄의 햇빛을 캠코더에 담았다. 배대원이 나왔기에 떠들고 있다가 한국인 한 분을 만나게 되었다. 모조리 일본 애들인 가운데 동포를 만나게 되어서 한참이나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그 분은 내려가는 도중이라고 했다. 우리 팀의 내선생님 만나면 우리 이야기를 해 달라고 부탁하고 헤어졌다.(고마우셔라! 내선생님 올라오시면서 만났다고 함-아마 이 분 한국인만 살피면서 하산하셨을 것임)
10시 45분 히말라얀 뷰롯지 출발. 쭉 내리막길. 경치가 참 좋다. 11시 45분 팡보체의 아마다블람 롯지에서 중식 위해 대기중. 햇빛이 따가운 가운데 롯지 앞에 있는 나무의자에서 오수를 즐김. 외국인 트레커 왔다리 갔다리 하고 은은한 종소리의 야크떼도 왔다리 갔다리. 동네 꼬마들도 왔다리 갔다리.
우리는 과연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걸까. 히말라야 이 광활하고 척박한 대지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가. 그 어떤 것이 세계의 젊은이들을, 트레커들을 여기에 끌어 모이게 만드는가 나는 과연 무엇이며 나에게 있어 가족의 의미는 무엇인가. 가족이라는 말에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세속의 정리를 끊을 수 없도록 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새새까만 머리의 새까만 눈동자와 빠알간 얼굴의 남루한 아이들이 코를 흘리며 뒹굴고 있다. 과연 저들에게 우리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냥 외국인? 비슷하게 생긴 사람? 잘사니까 구경 다니는 사람? 인도에 가보고 싶다. 네팔자체가 인도와 큰 차이가 없을 듯 하지만 인도에서 다시 한번 나라는 존재를 알고 싶다.
지금시각 13시 30분. 점심 먹고 쉬고 있다. 14시쯤 출발예정. 페리체 16시 35분 도착. 움푹 꺼진 동네에서 해는 우리가 언덕을 넘을 때 이미 꼴까닥. 이름처럼 추워 보이는 스노우랜드 롯지에 도착. 조대원 어지럽고 메스껍다고 한다. 고소증의 시작인가 보다. 이제 모든 시설이 여건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 게다가 대원들의 식욕은 점점 떨어지고. 우리들의 몰골도 마찬가지. 내선생님은 어디쯤 오고 계실까를 생각해 봤다. 전화를 한번 더 해보면 좋으련만. 전화가 여긴 없으니...
캠코더 배터리는 배터리 파워가 한칸정도 남아 있어 내일 로부제, 모레 칼라파타르 가면 이제 끝날 것 같다. 페리체의 난로 가에서 내가 느끼는 것은, 남체에서 끊어질 것 같은 머리를 가진 아무 것도 아니었던 내가, 이제는 정상적인 60회의 맥박을 되찾은,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어쩌면 간사스러운 나의 몸뚱이가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역시 이곳에도 사람은 살고 있었고, 즐거워하고, 웃고 떠들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같은 인간이라는 감정을 지녔기 때문이 아닐까?
사다! 덩치 좋고 쾌활하고 가끔은 누런 콧물이 보이는 잘생긴 23살의 셀퍼족의 청년과 고운 눈망울의 다소곳한 태도를 가진 아리안 청년 라전, 그가 만든 음식이 오늘 중식에는 비록 짰었지만 항상 자신의 음식에 최선을 다하고 있고, 조금은 인상이 고약한 작은 셀퍼 텐징, 영어가 딸려 별로 말은 않지만 한 손에 계란꾸러미를 들고서 말없이 우리를 따르고 있다.
지금 서울은 1월1일 신정연휴를 즐기고 있겠지. 여기가 5시 45분이니까 3시간 15분을 더하면 저녁 9시. 9시 뉴스를 하겠구먼. 밥을 먹고 뉴스를 보고 있을까? 숙제 안했다고 우리 애들 둘이서 책상 위에서 뭔가를 끄적거리고 있을까? 우리 집 강아지 아롱이는? 아마 우리 애 아람이의 무릎 위에 있겠지. 집사람은? 아마 전화 붙들고 이런 얘기 저런 얘기하고 있을 거야. 그렇지?
셀퍼들은 항상 즐겁다. 본받을 점이다. 우린 홀에서 밥먹고 난로가에 쉬고 있지만 걔네 들은 컴컴한 롯지부엌의 장작불 주위에서, 때로는 기대어 서서 밥을 먹는다. 항상 즐겁게 떠들고 가끔 노래도 부르고 자기들끼리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웃고 떠든다. 낙천적인 민족이라고 할까? 말 역시 부드럽다. 때로는 불어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네팔사람들이 인도 말은 알아듣는데 인도사람이 네팔 말은 알아듣지 못한다고 한다.
지금 난로에 야크똥을 열심히 부수어 넣고 있는 아이는 이 집 큰딸이다. 우리 나라 애들 같으면 학교 가고 자기 치장하기 바쁜 나이인데 전혀 그런 것 없이 롯지일을 도우고 있다. 그래도 자기 또래라고 일본 가족팀의 남자아이에 관심이 많은 듯 하다. 저녁을 먹고 난로가에서 Yeti이야기를 끄집어내었다. 내가 처음에 우리측 사다셀퍼인 다와에게 전설속의 설인 예티를 본적이 있느냐고 했더니 웃으면서 한번도 본적은 없다 그렇지만 이상한 울음소리를 한밤중에 에베레스트 부근에서 들은 적이 있는데 자기는 그것을 예티의 울음소리로 믿고 있다고 한다.
나중엔 롯지의 주인아저씨와 몹시 추위를 타는 필리핀 처녀와 동행한 일본인까지 가세해서 꽤 진지한 예티이야기로 시간이 깊어가는줄도 모르고 난로가를 지켰다. 고도 4200의 히말라야에서 야크똥이 타 들어가는 난로가에 모인 잡다한 국가의 사람들이 예티이야기를 한다. 그것도 꽤나 진지하게...이 집의 주인 아저씨는 잘달막한 키의 셀퍼족인데 우리 나라 식으로 치면 산악회 구조요원 쯤 되는 사람으로 자기는 거의 10번 정도 예티의 울음소리(늑대나 고양이 울음소리와 비슷한)를 들었다고 했다.
이제 예티의 존재는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다는 사람들 가운데 네팔에서조차 전설상의 동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마치 우리 나라에서 호랑이의 존재와 같은 처지라고 할까? 그 중에서도 예티이야기를 자꾸 하면 예티가 나타난다는 것과 예티가 사람을 싫어해서 히말라야 더 깊은 오지인 티벳쪽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어떻게 우리 나라의 호랑이 이야기와 이렇게도 닮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1월2일 일요일(네팔9일째, 캐러밴 5일째) 계획 : 페리체(4,240m)예비일 실제 : ″ 지난밤에는 영하 8도라는 온도계의 눈금을 보면서 침낭에 들어갔다. 03시 30분경 소변을 보기 위해 침낭에서 빠져 나왔을 때 실내의 온도가 영하 4도를 가르키고 있는 것을 봐서 실내온도가 손대원과 나의 체온으로 인해서 올라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혼자 몸의 상태가 좋다고 우쭐해서인지 어제 밤에는 잘안피우는 담배를 많이 피웠다. 그 영향인지 아침에 일어나니까 목이 좀 부은 느낌이다.
그리고 어제 밤에는 난로 가에서 돌아가면서 노래를 불렀다. 나는 산 노래 일명 '비가'와 손대원은 '진도아리랑'. 순서대로 노래를 하기로 했는데 히말라야에서 뭔가를 찾고있는 듯한 일본인 트레커와 필리핀 아가씨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필리핀 아가씨의 영어는 무척 미국화 되어서(빨라서) 왠지 알아듣기가 힘이 들었고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돈만 가지고 필리핀에 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못사는 나라의 애국론이기 보다는 한국사람을 속물로 여기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어제 밤에 예티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있을 때에는 내가 정말 히말라야에 들어 왔구나 라는 것을 실감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신세대 셀퍼인 우리측 사다와 구세대 셀퍼인 주인아저씨의 이야기를 통해서 히말라야의 변해 가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지금 엎드려서 이 글을 쓴다. 조금 있으면 헬로우 굿모닝이라는 인사와 함께 사다가 블랙티를 들고 나타날 것이다. 맥박이 너무 미약해서 한참이나 찾았다. 또 60회이다. 그것도 아주 약하게. 행동에 지장은 없지만 이러다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영원히 죽는 게 아닐까?
4,200까지 올라왔는데도 한국과 마찬가지라니... 오늘은 700m 정도 고도를 더 올린다. 더 이상의 고소증은 없으면 좋으련만. 어제 밤에는 또 기나긴 꿈으로 난리가 났다. 꿈이 너무나 생생해서 집에 한번 전화라도 해야하지 않을까 하다가 개꿈이라고 생각하니까 담담해졌다. 이제 전화시설이 없다. 칼라파타르 들어가는 로부제에서나 위성통신이 가능하다고 하는데 거기는 내일 들어갈 예정이고... 오늘밤엔 어제 꿈의 마무리나 하면 좋겠다.
그 동안 정신없이 하루하루가 지났는데 불현듯이 가족들이 생각난다. 내나라 내가족이 그리워진다. 무사히 이번 원정을 마치면 더욱 멋진 대한민국 시민이, 아버지가, 남편이, 그리고 자식이 되어있을 것 같다. 조현만 대원이 숨이 가빠서 잠자는데 애로점이 많았다면서 우리 방을 방문했다. 손대출 대원은 맥박이 84회로 어제와 마찬가지인데 이제 어느 정도 고소에 적응된 모습이다.
아침 식사 후 강가에서 오랜만에 세수하고 양말을 빨았다. 양말은 넉넉하게 가지고 와서 신다가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매일 갈아 신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왜냐하면 지금 계절이 건기이다가 보니까 등산로란 등산로는 모두가 흙먼지 덩어리로서 어떤 곳에서는 눈길이 아니라 먼짓길을 가는 모습이다. 또 이렇게 차디찬 물에 양말을 빠는 것도 무진장한 고통이다. 손이 터져 나갈 것 같다. 오늘은 예비일 이어서 사다셀퍼와 고소순응차 페리체 뒷산 언덕에 올라갔다.
사다셀퍼 말로는 우리의 목표 임자체가 보인다고 해서 캠코더를 휴대했다. 오후 1시에 출발해서 2시반 정도에 목표지점에 도착했다. 고도 4,550m. 고소순응을 위해서는 되도록 많이 머물러야 하지만 바람이 차서 빨리 내려가기로 했다. 다시 롯지에 도착한 시간이 16시 40분이다. 손대원은 머리가 아프고 메스껍다고 하고 조대원은 오르막 올라가는데 몹시 힘이 들었다고 한다. 내려올 때 사다셀퍼가 자기는 앞으로 독립해서 지금의 일을 해보겠다고 하면서 나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해왔다. 아무래도 똑똑한 친구인 만큼 자기가 직접 관여하면 더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 모양이다.
해가 산에 갇히는 지형인 이곳은 그만큼 일몰이 빠른 셈이다. 선탠 하우스로 이름 붙여진 유리가 많은 온실 같은 곳에 있다가 다시 난로가로 자리를 옮겼다. 손대원과 배대원 피곤하다며 자러 들어가고 저녁 식사로 후라이드 베지터블 라이스와 배대원의 포테이토 치킨을 주문했다. 히말라야에서 그래도 입맛에 맞는 것이 쌀을 볶아서 여러 가지 야채로 튀긴 후라이드 베지터블 라이스이다. 이것마저도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사람은 포테이트 보일드라고 생감자 삶은 것이 적당하다. 가장 흔한 음료가 블랙티인데 한잔에 10루피 정도이고 이것도 고도가 올라 갈수록 비싸진다. 생감자 삶은 것이 60루피로서 그 중에서 그래도 저렴한 편에 들어간다.
난로 가에서 가지고 온 오징어(네팔사람들 주면 잘먹는다) 구워 먹으면서 방글라데시에서 방학을 맞아 이곳에 왔다는 미국인들(교사)과 이야기를 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그래도 미국인들하고 이야기가 잘 통한다는 것을 느꼈다. 가까운 우방에다가 노는게 비슷해서. 블랙티 열심히 먹고 있는데 일단의 가족 팀이 들어 왔다. 일본인들이었다. 꼭 한국사람 같았는데... 미국애가 자기가 먹는 음식이 마카로니 치즈라고 이야기한다. 먹음직해서 내일은 저걸 먹어봐야지하고 생각했다.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 우리 팀은 너무 먹질 못한다. 고추장, 김치 없으면 맥을 못추는 것 같다. 비단 우리 팀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이런 것들이 외국생활에 그다지 적응하지 못하는 한민족의 약점이 아닌가 생각했다. 앞으로 떠들지 말자. 고추장을 한 단지나 가져갔네, 김치 없이는 밥을 못 먹었네라는 말들을. 내일은 로부제로 간다. 이번 원정에서 가장 높이 위치한 롯지가 있는 곳을 향해 고도 700을 올리고 다음날 마지막 고소적응으로 5,500의 칼라파타르로, 그런 다음 다시 로부제, 딩보체, 추쿵 그리고 BC로 진입한다.
지금 생각으론 이 지긋지긋한 트레킹을 빨리 마치고 산다운 산을 밟고픈 마음뿐이다. 오늘 뒷산에서 본 우리의 목표 임자체는 로체의 덩치에 눌려서 이렇다할 특징이 없지마는 정상부근의 흰눈이 사뭇 위압적이었다. 사다셀퍼의 설명에 의하면 고소캠프 이후는 경사가 급해지고 정상직하의 200m 설벽이 최대난관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설벽부터는 고정자일을 설치한다고 했다. 일찍 저녁을 먹어봤자 별로 할 일도 없고 또 일찍 자게되면 자주 잠에서 깨어나기 때문에 8시에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1월 3일 월요일(네팔 10일째, 캐러밴 6일째) 계획 : 페리체(4,240m) - 두그라(4,620m) - 로부제(4,910m) 실제 : ″ 07시 30분에 기상. 영하 5도이다. 물론 실내기온. 입맛이 없다며 대원모두가 토스트를 아침식사로 주문했다. 날씨는 계속 좋은 편이다. 이 집은 큰딸이 살림꾼이다. 난로에 불피우고, 재를 치우고, 연료인 야크똥을 자기가 일일이 부수어서 난로에 넣고, 너무 큰 야크똥은 들어가지도 않고 또 바짝 마른 것은 너무 단단하여 손으로 부수어 지지도 않는다. 그래도 싱긋 싱긋 웃으면서 열심히 집안일 을 하는 걸 보니까 부모 따라 트레킹 온 일본소년에 비해서 훨씬 이뻐 보인다.
10시쯤 로부제를 향해서 출발했다. 서부극에서나 나옴직한 대평원을 지나서 두그라(4,620m)도착해서 사다셀퍼를 기다리고 있다. 제법 트레커들과 야크맨, 셀퍼가 많이 보인다. 아낙네들이 모여 설거지를 하고 있기도 할 정도로 제법 시끌벅적하다. 넓은 롯지에서 점심으로 누들(국수)을 먹었다. 롯지음식은 왜이리 짠지 소금을 적게 넣으라고 부탁을 해도 우리 입맛에는 짜게 음식이 나온다. 서양 애들 음식이 우리보다 짜기 때문에 걔들 입에 맞춘 것일까? 하여간 매번 음식을 주문할 때마다 요구하는 사항이 little salt, please little salt이다.
롯지마다 부천의 로체남벽원정대의 포스터가 붙여져 있다. 어떤 일본의 대학산악부의 두그라 위에 있는 아위피크(5,245m)등정 페넌트도 보인다. 저런 작은 봉오리까지 일본인이 다니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니 우리 나라 역시 다양한 등반활동이 필요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오줌누러 갔다가 깜짝 놀랐다. 문도 없고 천장도 없다. 대단한 곳인것 같아서 문틀에 오늘 날짜 적고 영어로 나 여기 왔노라 라고 적어 놓았다. 언제쯤 다시 볼 수가 있을까? 3시에 로부제에 도착했다. 길고 긴 길이었고 평지인데도 힘이 많이 들었다.
이제 모레인 지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얼음이 얼어있는 개울사이로 시냇물도 군데군데 흐르고 있다. 오는 도중에 지난번 만났던 일본 팀을 또 만났다. 서로 반갑게 나마스테라고 인사를 했다. 로부제에는 위성통신 시설이 있어 전화를 할 수 있게끔 되어있었다. 고도가 높은 관계로 약간의 두통이 모두에게 나타났는데 그중 조대원의 컨디션이 가장 나쁘다. 롯지 침상에 들어가서 아무 것도 먹지 않으려고 한다. 이곳은 난로가 있는 홀과 침상이 문으로 연결이 되어 있어 따뜻한 편이다. 그래봤자 영하로 떨어지지 않을 뿐이지만(취침 시에는 난로가 거의 꺼진다)
입맛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한국에서 준비한 컵라면과 햇반으로 식사준비를 시켰다. 호흡곤란까지 발생된 조대원에게는 사랑산에서 준비한 산소(한국산)를 마시게 했다. 수험생용이나 병약자를 위한 것인데 그렇게 효과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조대원은 침상에 엎어져 있고 완전히 그로기 상태이다. 후송할 정도는 아니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내가 옆에서 돌보아 주기로 했다.(그래봤자 밤중에 자다 일어나 코에 손을 대어본 것밖에 없지만) 빨리 내일 일정이 끝나고 BC들어가서 나중에 들어오는 준규형의 얼큰한 한국요리를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남체바자르 이후 적응이 어느 정도 되어 있는가 보다. 남들처럼 머리가 아프지도 않고 메스껍지도 않고 밥도 꼬박꼬박 잘 먹고 있으니. 지금 21시가 넘어서 모두들 취침중이다. 조금 전에 조대원이 구토를 했다. 롯지자체가 통풍이 잘 안되다 보니까 어지러운가 보다. 밖에 나가서 찬 공기를 마셨다. 변소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문은 분명히 하나인데 일보는 곳은 2개이다. 이성간에는 사용이 힘들 듯. 동성도 무리가 아닐까?
1월4일 화요일(네팔 11일째, 캐러밴 7일째) 계획 : 로부제(4,910m) - 칼라파타르(5,550m) - 로부제(4,910m) - 딩보체(4,410m) 실제 : 로부제(4,910m) - 고락셉언덕(5,207m) - 로부제(4,910m) - 딩보체(4,410m) 새벽같이 일어나 어제 먹다가 남은 김치죽을 데펴 먹고 칼라타파르를 향해서 출발했다. 사방은 이제 눈으로 많이 덮인 지형이다. 이 길이 뭐가 그리 유명한지 이해가 안되는 가운데 가도가도 끝이 없다. 중간에 푸모리에서 눈사태로 희생된 한국인의 위령탑이 세워져 있는 곳을 지나서 너덜지대도 진입했다. 해가 나기 전에는 몹시 추워서 혼이 났고 햇빛이 나고 부터는 훈훈해 졌다. 딱딱해진 눈이 깔린 곳도 있지만 등산로는 대부분 맨땅이다. 모든 풍경이 그저 내 눈에는 삭막하게 보일 뿐이다. 단지 고도하나 때문에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고소 적응하기 위해서 이 길을 거쳐야 한다는 게 우스워 보인다.
에베레스트 전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어서도 유명하지만, 물론 신록의 계절이 오면 좀 더 좋은 평가를 할 수가 있었겠지만... 10시10분에 칼라파타르 롯지가 보이는 언덕에서 빽을 했다. 이유는 전대장님과 배대원이 너무 뒤쳐져있어 어려운데다가 칼라파타르의 실제모습을 보니까 독립 봉으로서 다녀오는데 최소 3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아서였다. 손대원은 가고싶어 하지만 후미가 너무 뒤떨어져 있어 어쩔 수가 없었다. 칼라파타르를 오르고 늦게라도 로부제로 돌아오면 침낭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침낭과 우리의 짐은 지금쯤 야크편에 딩보체로 가고 있으리라.
그리고 칼라파타르도 보통은 아니었다. 자갈밭 길을 엄청나게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고도 또한 5,000을 넘어가니까 보통사람들로서는 무리가 아닌가 한다. 이후 배대원은 사다셀퍼의 부축을 받기까지 하면서 돌아오게 되었다. 내려오다가 푸모리 눈사태 위령탑에서 담배하나 붙여주고 왔다. 머나먼 히말라야에서 눈사태로 운명을 달리한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잠시 울적한 마음이었다. 내가 어제 그 롯지에 가장 먼저 도착하였다.
불랙티를 주문하고 있으니까 10분, 20분 간격으로 대원들이 나타났다. 멀리서 흐느적거리며 오는 모습을 캠코더에 담고 싶었지만 배터리를 아끼기 위해서 꾹 참았다. 12시 40분에 우리보다 늦게 한국을 떠난 준규형과 상봉했다. 무척 반가웠다. 준규형은 내일 칼라파타르 고소 순응을 하고 우리보다 하루쯤 늦게 임자체 BC에 들어올 예정이다. 이제 우리의 요리사 준규형의 한국음식을 실컷 먹을 수 있겠구나를 생각하니까 힘이 막 났다.
점심 식사 후 2시에 출발했다. 펭보체를 걷히지 않는 산길로 해서 딩보체에 16시 40분에 도착했다. 경치는 좋았지만 오늘 일찍부터 걸어다녀서 피곤한 모습들이다. 우리가 하루 묵을 롯지가 이름조차도 Island peak view lodge이다. 여장을 풀고 창문사이로 보이는 임자체(아일랜드 피크)에 눈길을 돌렸다. 꼭 올라가고 말리라 라고 마음속으로 굳은 다짐을 하지만 대원들의 컨디션이 영 엉망이다. 고소증을 겪고 있는데다가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이지만 다 큰 어른들이 웬만하면 꾹 참고 위장으로 밀어 넣으면 될 일인데 먹질 못하니.... 하기야 나같이 살기 위해서 아무거나 먹으면 되는 단순한 사람에게는 문제가 없는 게 당연하겠지만.
동네 우물가에서 발을 오랜만에 씻고 있으려니까 원주민 아저씨가 춥지 않느냐라는 몸짓을 했다. 발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지만, 여유 있게 웃음을 지으며 Korean winter same이라고 했더니 이해하는 눈치다. 캠코더 배터리가 하나만 더 있으면 정상공격의 모습을 촬영할 수가 있을텐데 그걸 못하게 되어 아쉽다. 남체 이후에는 롯지에 콘센트 자체가 없어서 충전을 못했다. 그런데다가 내가 가지고 있는 캠코더 자체가 영하의 기온에서는 사용을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찍힐지 안 찍힐지도 모르거니와 배터리 역시 1시간 짜리, 2시간 짜리 두 개나 있지만 항상 촬영을 해보면 10분 정도 배터리가 나가 버려서 길게 촬영을 하지 못한다. 그나마도 이제 거의 다 소진되어 가니까 안타까웠다. 내일 드디어 추쿵을 거쳐서 베이스에 입성한다. 베이스캠프의 높이가 5000정도니까 이곳 딩보체 4330에서 700정도의 고도를 높여야 한다.
1월5일 수요일(네팔12일째, 캐러밴 8일째) 계획 : 딩보체(4,410m) - 추쿵(4,730m) - BC(5,087m) 실제 : ″ 07시기상. 손대원 설사로 간밤에 변소를 들락날락 거렸음. 배대원 설사. 조대원 아직도 잘 먹지를 못한다. 대장님도 마찬가지. 대원들 모두가 햇반을 자꾸 먹어대는데 정작 필요할 때 없어서 고생하는 게 아닌지... 평소와 다르게 어젯밤부터 바람이 몹시 분다. 임자체에서 동네 쪽으로 없던 바람이 생긴걸 봐서 날씨가 변화하는 것 같다. 빨리 후딱 해치우고 내려 가는게 좋은데. 대원 모두의 컨디션이 엉망인데다가 설사까지 겹쳐서 이거 참 진퇴양난이다.
09시 50분에 출발해서 12시 14분에 추쿵 리조트라고 쓰여진 롯지에 도착했다. 바람이 몹시 분다. 롯지뒤가 로체 남벽이다. 여기도 부천 팀의 포스터가 붙어있다. 여기에서 점심을 먹고 BC에 진입한다. 리조트란 말을 쓴 이유가 경치가 좋아서 일까? 시설이 좋아서 일까? 안마당에 넙적한 바위를 깔아놓아서 다른 롯지와 차별화를 하고 있고 여기서 보는 아마다블람 뒷면이나 딩보체쪽의 경치가 예쁘다. 17시가 조금 넘어 BC에 도착했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모레인지대의 연속이었다.
BC에 거의 다와서 한국산악회 회원인 유승국씨를 만났다. 혼자서 네팔에 업무차 왔다가 시간이 남아 임자체를 오늘 새벽 2시 30분에 출발하여 09시경 정상에 도착하고 15시에 하산을 완료했다고 한다. 정상 부분에 커니스가 어려웠다고 한다. 우린 고소캠프를 하나 운영한다고 이야기했더니 캠프를 설치해서 하루를 허비하기 보다는 새벽에 출발하면 충분히 돌아올 수 있으니 자기가 한대로 등반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을 해준다. 단출하게 준비하고 화끈하게 공격하는 그런 타입의 등반을 좋아하는가 보다.
유형은 빌라 에베레스트를 통해서 셀퍼 한 사람과 야크맨 한 사람씩 대동하고 산행을 하고 있었다. 조금 더 올라가니 소형텐트 4동이 설치되어있고 우리측 쿡인 라전이 열심히 밥을 하고 있었다. 손대원은 텐트 속에 들어가서 쭉 뻗어버리고 나머지 대원만 식사를 했다. 오랜만에 한국 음식을 실컷 먹었다. 사다 셀퍼의 계획은 내일 자기들 두명이 정상 직하까지 고정로프를 설치하고 오겠다고 한다. 서울에서 이렇게 하기로 알펜투어 사장님과 이야기가 되어있었지만 너무 셀퍼에게 의존하는 것 같아서 한편으론 미안했다.
그래서 사다 셀퍼에게 내일 올라갈 때 우리가 가지고 온 고소 음식을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다고 이야기했다. 무척 좋아하는 눈치다. 베이스캠프에 설치된 식당은 내가 1983년 한라산 동계 훈련때 텐트 주변에 눈 블록을 쌓았듯이 돌로 벽을 만들고 그 위에 천막을 덮어서 아늑한 느낌이었다. 버너도 우리 나라의 가스통처럼 생긴 대형 석유버너를 사용하고 있었다. 자기들끼리 석유버너옆에 둘러앉아 죽 같은 것을 맛있게 열심히 떠들면서 먹고 있었다. 아마 19시경에 취침을 한 것 같다.
고도 5,000m의 밤은 이다지도 괴롭단 말인가? 오줌 누러 갔다오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다. 힘도 들고 몸도 말을 듣지를 않고, 침낭에 들어가게 되면 조금 움직였다고 숨이 가빠서 식식거리게 된다. 거기에 잠도 안 오고 볼펜 마저도 작동이 잘 되질 않는다. 콧물까지 질질 나오고, 재채기도 계속 되고, 재채기 할 때마다 눈앞에 불이 번쩍번쩍 그런다. 조금 전에 텐트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펭보체 롯지 아저씨가 이야기하던 예티의 소리인가?
내일 셀퍼 두명이 먼저 올라가서 고정 자일을 깔아 놓으면 다음날 새벽에 공격이다. 고소캠프를 운영하지 않아 힘은 무척 들겠지만 이른 새벽에 공격을 해서 하루를 벌기로 했다. 또한 사다 셀퍼의 말이 구름의 모습이 바뀌고 있다는 즉, 조만간 날씨가 나빠질 것 같다는 이야기도 여기에 한몫을 했다. 과연 누가 정상공격에서 빠지게 될 것인가? 정상직하에 커니스가 있다는데, 아무래도 안자일렌을 해야하는데... 뒷골이 아파 온다. 이제 하루 이틀 결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1월 6일 목요일(네팔 13일째, 캐러밴 9일째, BC 1일째) 계획 : BC(5,087m) 실제 : ″ 07시에 기상. 영하 20도를 가리킨다. 간밤에 밖에 나왔을 때는 영하 10도를 가리켰는데 지금이 더 춥다. 혼자 체조하고 어슬렁거리다가 식당캠프에 갔더니 라전이 있길래 인사를 했다. 그래도 시간이 있어 유승국씨를 찾아가서 여러 가지 정보를 교환했다.(교환했다기 보다는 일방적으로 받았다라고 할까?) 물을 많이 가져가라는 것과 정상직하 커니스가 위험하다는 것. 그리고 크레바스가 몇 군데 있다고 충고를 해준다. 이분은 혼자서 이곳저곳을 다니는 타입이라 장비가 간출하고 셀퍼하나 야크맨 하나여서 이동하기에 편리해 보였다. 차후 초오유와 시샤팡마 원정에 관한 이야기를 끝으로 유승국씨와 헤어졌다.
우리 텐트에서는 밀크티를 돌린 모양이다. 나도 먹고 싶어서 식당에 가서 한 잔을 하면서 사다 셀퍼와 등반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사다의 말이 우리의 안전벨트와 플라스틱 등산화, 아이젠 등을 모두 모아서 달라고 한다. 자기들이 모조리 설선이 시작되는 곳에 데포를 해놓겠다고 한다.
드디어 셀퍼 두명이 출발을 했다. 우리들의 개인 장비에다가 자일까지 메고 가니까 배낭하나가 거의 30kg은 될 것 같다. 대단하다. 아니 질려버렸다. 얘들이 다가져가고 우리는 빈 몸으로 달랑달랑 간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워졌다. 우리 나라에서, 서북주능에서 방방 뛰던 우리들이 아닌가! 그렇지만 여기는 낯설고 물설고, 거기에 공기까지 선 희말라야이니까... 이것은 차후 우리가 해결해야할 문제라고 생각을 한다. 이제 어느 정도 대원들의 컨디션이 정상적으로 되어간다. 식사량도 모두 늘었다. 그런데 내일 02시 30분 공격에 모두 나서겠다고 한다. 걱정이 된다. 누군가 남아서 뒷바라지를 해주는 것이 얼마나 공격조에게 도움이 되는가?
이렇게 모두가 공격을 할 때 분명히 낙오하는 대원이 생길 것이고 이렇게 되면 셀퍼 두명중에 한명이 빠져야 한다는 결론이다. 그럼 세명이 될지 네명이 될지 다섯명이 될지 모르는 정상 공격조를 셀퍼 한명이 커버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또 많은 인원으로 서로간에 속도가 맞지 않게 되면 정상 등정후 베이스캠프로의 귀환이 그만큼 어려워진다. 그렇지만 위계질서가 대단한 산악회도 아니고 우리 팀의 성격상 "너 가지마" 라고 할 수도 없고... 나도 안전하게 올라가고 싶고 또 안전하게 내려오고 싶다. 아무도 BC에 남아있겠다는 사람이 없으니까 마음이 무겁다. 서로가 서로를 도와줘야 하는데 말이다.
점심으로 라면을 먹었다. 진짜 우리라면 신라면, 맛있는 라면을. 16시경 셀퍼들이 돌아왔다. 밖에는 구름이 잔뜩 깔려서 어제와는 날씨가 달라지고 있는데도 우리들의 사다 셀퍼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띄우고 식당에 쭈그리고 앉아 밀크티를 먹고 있다. 그 옆에는 김치라면이 신나게 끓고 있고. 춥지도 않은가 보다. 평상시 복장에서 별로 달라진 것도 없이 험한 산을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다. 얘는 BC도착까지 청바지를 입고 왔다. 오늘 BC에 들어온다는 준규형은 아직도 소식이 없고... 만약 칼라파타르에서 너무 많은 힘을 소진했다면 내일 새벽에 정상 공격에는 준규형이 나서지 못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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