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이 많이 찾는다는 강남 민박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 사는 주부 노순남(53)씨가 가벼운 차림으로 집에서 나와 자기 차에 올라탔다. 어디 멀리 간 게 아니다. 차를 잠시 멈춘
곳은 아파트 단지 앞 큰길가에 있는 공항버스 정류장. 노씨는 막 공항버스에서 내린 여행가방을 든 외국인을 반갑게 맞았다. 짐을 차에 싣고는 함께
아파트로 돌아왔다. 평소 알던 손님을 맞은 거냐고? 아니다. 이 외국인은 노씨 집에 일주일 동안 묵을 민박 손님이다. 그렇다. 노씨는 민박집
주인이다. 압구정 현대아파트 민박집 주인.
관광지도 아닌 서울 한복판, 그것도 부촌(富村) 압구정동에 민박집이라니, 생뚱맞다고? 하지만 노씨 집뿐이 아니다. 강남구에만 신사동 현대맨션과
삼성동 래미안삼성2차아파트 등 16군데가 민박집으로 등록돼 있다. 서울시 전체로는 235곳(5월 24일 기준)의 민박집이 있다.
노씨가 민박집을 하게 된 건 정말 우연이었다. 강남구청에 갔다가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도시 민박업에 관한 팸플릿을 발견한 것이다. 관심 있게
들여다보자 구청 직원이 적극적으로 권했다고 한다. 지난해 2월 등록증을 받고 3월 첫 외국인 손님을 받았다. 그동안 노씨 집을 다녀간 손님은
테헤란로에서 비즈니스가 있는 외국회사 중역부터 성형관광 목적으로 한국에 온 외국인 모녀 등 다양하다. 국적도 아랍에미리트에서부터 싱가포르·일본
등 고루 포진해 있다.
(위부터)노씨가 외국인 손님을 위해 만든 가정식.
중국 쓰촨에서 온 모녀 투숙객. [사진 노순남]
초등학교 교사 출신인 노씨가 쉽게 민박을 하기로 결정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여행 경험 덕분이다. 방학을 이용해 가족과 함께 해외 여행을 갈
때마다 홈스테이를 했다. 낯선 집에서 집주인과 함께 지낸다는 것에 대해 원래 거부감이 없었던 거다. 손님 신분에서 주인 신분으로 바뀌었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다.
또 최근 식구가 단출해진 것도 노씨가 민박을 치기로 한 이유 중 하나다. 노씨는 “남편과 아들이 각각 직장일과 공부 때문에 해외에 나가 있다”며
“딸과 둘만 있기엔 179㎡(54평)짜리 집이 크기도 하고 외로워 민박을 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집에 딸이 있기 때문에 손님은 여성만
받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또 한 달에 한 번 정도 한 팀만 받는다는 원칙도 있었다.
그러나 첫 손님부터 예외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지난해 3월 서울에서 ‘2012 핵안보정상회의’가 열리던 때였다. 당시 강남에 있는 대형 호텔은
예약이 모두 찬 상황이었다. 민박 연결 사이트를 통해 두바이 석유회사 중역이 “그 집에 꼭 머물고 싶다”는 쪽지를 보냈다. 노씨는 워낙
급하다길래 얼른 수락 버튼을 눌렀다. “첫 손님이라 그 순간이 참 설렜어요. 나중에야 알았죠. 남자라는 걸요.”
걱정이 많았지만 민박집 주인 모녀와 남자 손님 사이에 흐르던 어색함은 곧 사라졌다. 한국산 스마트TV 덕분이었다. 두바이 비즈니스맨은 민박집
마루에 있는 65인치 텔레비전에 관심을 보였다. 이 브랜드는 어떠냐, 얼마짜리냐 등등의 질문을 쏟아냈다. TV뿐 아니라 홈시어터·에어컨 같은
국산 제품에도 관심이 많았다. 돌아가면 “당장 한국산 TV를 사겠다”고 했다. 가족에게 줄 한국산 선물에 대해 조언도 구했다. 아침마다 차려주는
비빔밥도 좋아했다.
강남 민박집은 단순히 숙박시설이 아니라 이렇게 주인이 사는 모습 전부를 파는 일종의 문화상품이다. 템플 스테이를 통해 불교문화를 체험하듯이
외국인이 비교적 싼값(하루 55달러)에 강남 스타일을 체험하는 셈이다. 민박집을 나서면 주변에 즐비한 즐길거리를 통해 그야말로 강남 스타일을
즐기고, 민박집에 돌아와서는 진짜 강남 사람들의 삶을 경험하는 거다. 강남 스타일에 흠뻑 빠진 노씨의 첫 손님은 이후에도 서울을 찾을 때마다
노씨 집에 들른다.
신사동 현대맨션에서 민박을 하는 윤모씨는 “신문에서 외국 관광객은 많은데 숙박시설은 부족하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방 놀리기도 아까워 지난해 10월
민박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윤씨도 첫 손님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러시아에서 온 20대 여성이었는데 노씨와는 좀 다른 이유에서다.
“펜팔로 알게 된 한국 친구를 만나러 왔다고 하더라고요. 약속장소에서 보자던 한국 친구가 나타나질 않았다는 거예요. 또 공항에서 우리 집 오면서
택시비로 5만원권을 4장이나 줬대요. 한국 사람으로서 어찌나 부끄럽던지….”
첫 손님은 러시아인이었지만 이곳은 특히 일본 관광객에게 인기가 높다. “지금은 엔저와 북핵 문제 때문에 손님이 많이 줄긴 했지만 1~2월만 해도
매일 방 7개가 다 찰 정도였어요.” 인근 가로수길 등 일본 관광객이 좋아하는 명소와 가까운 덕분이다. 그는 위층 사는 노부부에게도 민박을
권유했다. 올해부터 같은 건물의 두 집에서 모두 외국 손님을 맞고 있다.
도시민박업에 등록한 집마다 제공하는 방 개수와 크기는 다양하다. 호텔처럼 침대 하나 있는 싱글룸부터 침대 두 개를 놓은 트윈룸, 2인용 침대가
있는 더블룸, 2층 침대 3개를 둔 6인 도미토리룸(기숙사형 방)도 있다. 여성 관광객 전용도 있고, 방문마다 출입 카드 인식기를 따로 설치한
집도 있다. 숙박 가격은 방 크기별로 3만~10만원(하루 기준)이다. 여행객들은 각종 여행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민박집 정보를 보고 e메일이나
전화 등으로 예약한다.
서울시는 도시민박업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지난달 27일 서울시민을 대상으로 민박집 운영 요령 아카데미를 열기도 했다. 올해 말까지 매달 한
차례씩 개최할 예정이다. 박진영 서울시 관광정책과장은 “외국인관광 도시민박업은 일석삼조”라며 “서울의 외국인 숙박시설 부족을 해결하면서 은퇴자는
비교적 위험이 적게 창업할 수 있으며 시로서는 최근 적극적으로 밀고 있는 ‘공유 도시’를 구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조한대 기자 2013.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