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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에게 한국을 깨우쳐준 '천생 기자'
25일 별세한 '기자 이규태'의 삶
▲ 펄 벅과 함께. 1960년 한국을 방문한 '대지'의 작가 펄 벅 여사와 그를 취재하던 젊은 날의 이규태 기자가 경주 첨성대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당시 펄 벅 여사의 말에 감명받은 이규태 기자는 '한국학' 탐구에 눈떴다.
▲ 3년차 신참기자 이규태가 1961년 소록도를 취재했다. 한센병 환자들에게 붙잡혀 닦달을 당하고도 이규태는 바다를 메워 ‘천국’을 만들겠다던 그들의 ‘눈물’을 기사에 담아냈다. 작가 이청준이 그 기사를 바탕으로 쓴 것이 ‘당신들의 천국’이다. 작품 속 기자 ‘이정태’의 모델도 이규태다. 훗날 이청준은 말했다. “그는 내 소설의 주인공이었지만 이제 나는 그의 독자다.”
‘개화백경’에서 시작한 우리 것에 대한 탐구…
쉼없이 계속된 ‘38년 大항해’… 死神앞에서도 붓꺾기 싫었다
▲ 사실 이 땅에서 이규태의 독자보다 독자 아닌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1988년 몸을 의탁하던 백담사 궁벽한 객사(客舍) 방을 TV가 비춘 적이 있다. 생활편의품 하나 없이 썰렁한 방에 책 ‘한국인의 의식구조’가 놓여 있었다. 물러난 권력자가 황망하게 서울을 뜨면서 챙겨 온 것이 이규태의 책이었다.
▲ 이규태는 기자가 노력하면 무엇을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기자였다. 조선일보에서 45년을 근속했고 퇴직한 뒤로도 2년을 독자와 함께 했다. 그가 연재한 대형 시리즈만 37개를 헤아린다. 1968년 60회를 이어간 첫 연재 ‘개화백경(開化百景)’부터가 한국 신문사상 가장 긴 전면(全面) 시리즈다.
▲ '한국학 벙커' 서재. 1만5000여권의 책과 노트, 스크랩 등 자료들로 가득 채워진 자신의 서재에서 집필에 몰두하던 이규태 전 조선일보 논설고문.
▲ 1975년부터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연재하면서 그의 우리 것 찾기는 일대 현상을 불렀다. 대학에선 토론대상, 기업에선 연수교재, 군에선 교육자료가 됐다. 8권으로 묶은 베스트셀러 ‘한국인의 의식구조’는 지금도 꾸준히 팔린다. 그는 120권에 이르는 저서를 낸 왕성한 저술가이기도 했다. 1983년 출발해 23년을 달려온 ‘이규태 코너’는 새삼 말할 것도 없다.
▲ 이규태는 한국인에게 한국인이 누구인가를 깨우쳐준 기자였다. 그 평생작업에 눈 뜬 계기가 작가 펄 벅과의 만남이었다. 1960년 방한한 펄 벅은 농부가 볏단 실은 소달구지를 끌면서 지게에 볏단을 지고 가는 모습에 감탄했다. “농부도 지게도 달구지에 오르면 될 텐데 소의 짐을 덜어주려는 저 마음이 내가 한국에서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규태는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 풍경에 펄 벅이 감동하는 것을 보고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실마리를 잡았다. 왜 우리 음식엔 물이 많은지, 갓은 왜 비도 새고 바람도 새는지, 우리는 사촌이 땅을 사면 왜 가슴이 아니고 배가 아픈지. 의문이 끝없이 일었다. 우리 것의 원형을 찾는 대장정(大長程)이 시작됐다.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이었다.
▲이규태는 널리 보고 오래 기억하는 마지막 박람강기형(博覽强記型) 기자였다. 다들 인터넷에 널린 남의 것 골라다 쓰는 세상에 스스로의 눈과 귀로 지식의 곳간을 채웠다. 책 1만5000권이 메운 집 지하실은 ‘한국학 벙커’였다. 동서고금을 종횡무진한 필법의 원천이었다. 책마다 책장이 접혀 있거나 밑줄 긋고 메모한 흔적이 책과 주인의 수십 년 대화를 말했다. 그나마 멀쩡한 책들이 그렇고, 훨씬 더 많은 책이 분해되고 오려져 파일에 담겼다. 그가 시행착오 끝에 나름대로 창안한 분류법으로 만든 색인이 10만개를 넘는다.
▲이규태는 이름이 ‘한국학’ 앞에 붙어 불렸던 기자였다. 그는 근래 부쩍 “저 비싼 책, 희귀한 자료들을 누군가 활용하면 좋을 텐데” 되뇌곤 했다. “대학처럼 함께 공부하는 선후배들이 있었다면 참 할 일이 많은 분야인데 혼자 힘으론 한계를 절감한다”고 했다. 그는 아사히신문 논설위원 출신으로 일본 민속학을 개척한 야나기다 구니오(柳田國男) 이야기도 자주 했다. 야나기다가 채집한 방대한 자료를 후세가 정리해 체계를 세우는 ‘야나기다학(學)’이 생겼듯 ‘이규태학’도 곧 나올 것이다.
▲이규태는 겉은 질박하고 속은 따스한 기자였다. 전북 장수의 외진 시골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 종이를 처음 보고 너무 신기해서 그걸 접어놓고 자다가도 펴보곤 했다”고 말했다. 어렵게 자란 만큼 그는 평생 검약하게 살았다. 집 변기 물통에 벽돌을 넣어 물을 아꼈고 점심은 몇 천원짜리만 먹었다. 그러나 뜻 맞는 후배들과는 곧잘 낙지집, 선술집에서 소주 자리를 벌였다. 맨날 그 양복이 그 양복이었어도 후배 전세금은 선뜻 빌려주곤 했다.
▲그는 이발소에 가지 않고 주례 서지 않고 TV에 나가지 않는 ‘삼불(三不)’을 지켰다. “생긴 것이 둔하고 말주변 없어서”였다. 수십 년 고정 칼럼을 이어온 피 말리는 행군은 그 굼뜬 듯한 무던함, 진중한 참을성, 질박한 성품이 있어서 가능했다.
▲이규태는 자기를 알아보고 배려해 준 윗사람에게 글로 보답한 기자였다. ‘이규태 한국학’의 출발점 ‘개화백경’과 세계 언론사에 남을 ‘이규태 코너’ 연재를 그에게 권한 이가 당시 사장이던 방우영 명예회장이다. 방 명예회장은 ‘이규태 코너’라는 칼럼명도 지어줬다. 일본에 가면 헌책방에 들러 이규태가 반길 유익한 책을 두어 권씩 사다 주기를 낙으로 삼았다. 방상훈 사장도 그의 글을 하늘이 끝낼 때까지 쓸 수 있게 배려했다. 그는 소주 자리에서 두 경영자에 대한 고마움을 말하곤 했다.
▲그는 병상에서 이미 열흘 전에 ‘이규태 코너’를 접는 고별 원고를 기자 아들에게 구술해 놓고도 매번 “이제 신문에 실으라고 할까요”라는 아들의 여쭘에 답을 하지 않았다. 사신(死神)을 앞에 두고도 끝내 붓을 꺾기가 싫었던 것이다. 이규태, 그는 천생 기자였다.
<'재야 한국학 박사' 이규태 기자의 삶과 글> 2006-02-26
이규태 전 조선일보 고문 별세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2월23일자 조선일보 1면의 '이규태(李圭泰) 코너'를 본 독자들은 만 23년간 6천702회를 이어오던 한국 신문사상 최장기 연재기록이 마감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회에 젖었다.
1983년 3월1일 명월관 이야기로 첫회를 시작한 이규태 조선일보 전 논설고문은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규태 코너'를 써오다가 이날 '마지막회'임을 선언하며 독자와 고별 인사를 나눈 것이다.
이 글에서 그는 방우영 명예회장과 방상훈 사장, 캐리커처를 그린 김도원 화백, 교열부원 등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누구보다 독자 여러분께 제 늙은 몸을 구부려 큰절을 올립니다"라며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독자들은 그가 건강 사정 때문에 붓을 꺾는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글 말미에 '6천702회 이규태 코너는 투병 중인 필자의 구술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란 글귀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고인은 2월11일 '책찜질 이야기'를 사실상 마지막 글로 장식한 뒤 마지막회를 스포츠조선에서 엔터테인먼트부장으로 일하고 있는 아들 이사부 씨에게 미리 받아적게 했으며, 죽음을 며칠 앞두고 독자에게 고별 인사를 전한 것이다.
그를 아는 독자들은 '투병 중'이라는 말이 없었다 해도 고인의 지병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짐작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루라도 글을 쓰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치는 것처럼 열정을 불태워온 그의 집필 의지를 죽음의 그림자가 아니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25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이규태 전 고문은 수치상의 기록 말고도 우리나라 언론계는 물론 한국학계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1968년 '개화백경(開化百景)'을 신문 전면에 60회 연재한 데 이어 1975년부터는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통해 한국인 심성의 원형을 파헤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밖에도 '6백년 서울' 등 모두 37개의 대형 시리즈를 조선일보에 집필했다.
저서로도 '한국의 인맥' '서민한국사' '민속한국사' '한국인의 조건' '서민의 의식구조' '선비의 의식구조' '서양인의 의식구조' '동양인의 의식구조' '리더십의 한국학' '역사산책' '한국인의 생활구조' '한국인의 정서구조' '李圭泰 사랑방이야기' '뭣이 우리를 한국인이게 하는가' '李圭泰의 환경학' '한국인 이래서 잘산다 이래서 못산다' '한국인의 음식문화' 등 120여 권에 이른다.
그의 칼럼과 저서는 국내외 대학 연구소 등에서 한국학 자료로 쓰였으며 많은 작가와 학자들이 즐겨 인용했다. 특히 '이규태 코너' 가운데 북방 문화권 온돌문화에 관한 이야기(1989년 5월28일자)와 평화 지향의 성격을 지닌 우리나라 신발 고무신 이야기(1995년 4월23일자)는 2003년 미국 하와이대 한국어 교재에 전재되기도 했다.
고인은 책에 대한 욕심과 왕성한 독서열로 고금의 역사와 동서의 문물을 두루 꿰고 있었으며 독특한 자료 분류법을 창안해 글쓰기 자료를 정리했다. 해박한 지식과 놀라운 기억력의 소유자로, 인터넷 시대에 들어와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마지막 박람강기(博覽强記)형 기자로 꼽혀왔다.
그는 이름 석자와 함께 김도원 화백의 캐리커처로 얼굴까지 널리 알려진 이른바 '스타 기자'였지만 외모에 신경쓰지 않고 소탈한 생활습관을 버리지 않았다. '이발소에 가지 않고, 주례 서지 않고, TV에 출연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삼불(三不) 원칙'은 지인 사이에 소문나 있다
[이규태 역사에세이] 유흥업소 이야기 2005/06/07
한말 사양의 궁중에서 퇴출당한 것은 궁녀만이 아니다. 팔도에서 음식솜씨 좋다하여 선상된 숙수들도 퇴출대상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고종황제가 흡족해하시는 간을 가장 잘 맞춘다는 안순환이라는 숙수가 있었다.
일제의 강제병탐 후 궁에서 퇴출당한 안순환은 황로마루(지금의 광화문 네거리 남동쪽 모서리)에 조선 요리집을 차렸다. 당시 풍토로서 조선 요리집이란 벤처산업 가운데 하나였다. 이것이 한국 현대사에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명월관이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명월관은 태화정에 지점을 내고 있는데, 바로 이 지점 2층이 민족대표 33인이 모여 독립선언을 했던 만세의 진원지가 된 것이다. 이 독립선언의 산실은 2층 동쪽 끝방으로 만세를 부르기 전에 고종황제의 빈소가 차려진 남쪽 문을 열어 만세 소리가 빈소에 까지 들리게 하는 배려를 했다.
명월관의 지점이 들어가기 이전에 이 태화정에는 매국노 이완용이 살고 있었다. 강제병탐 후 중추원 부의장으로 있었을 때 일이다. 이 집에 놀러갔던 이완용의 누님의 아들 한상용이 둘째 아들 이항구와 놀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태화정 마당에 있는 아름드리 느티나무에 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겁이 나 방으로 쫓겨들어가 이불을 둘러쓰자 이완용이 '벼락이 떨어진 후에는 도망쳐야 쓸데 없는 일이다'고 말하더라고 한상용이 회고하고 있다. 벼락뿐 아니라 장독대가 자주 울고 떨며 깨지는 변고가 잇따르자 이완용이 이 집을 팔고 이사한 것이다. 민족정기가 서린 명월관 터였던 것이다.
명월관 본점은 1200평의 땅에 건평 600평이 넘는 큰 집이요 종업원수가 120명이나 되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규모 큰 기업형 요정이었다. 이 명월관은 기미년 이듬해에 이종구에게 넘어가는데 한말에 육군 정위로 군관학교 교장을 역임한 이규진의 아들로 외국어학교를 나와 잡화상과 주식 거래소를 하여 돈을 벌어 명월관을 사기에 이른 것이다.
요식업계의 대부인 안순환은 명월관을 팔고 지금의 태평로1가 인근에 식도원을 차린다. 명월관의 절반정도의 규모요 수입이지만 요식업계의 양대 라이벌이었다. 안순환은 풍류객으로 항상 갓을 쓰고 유생들과 시회와 유람과 풍악으로 지새운 멋쟁이였다.
그래서 식도원의 객실들은 봉황수 놓은 비단 보료에 산수화 병풍을 두르고 풍악과 가무로 응접했기로 명월관보다 품위가 있고 외국인들이 즐겨 찾았던 것이다. 이밖에 이 두 요정 이외에 국일관, 송죽원, 태서관 등이 있었으나 품격이나 규모, 역사에서 이 두 요정과는 거리가 있었다.
당시 접대하는 기생은 요정 소속이 아니라 기생조합이랄 권번 소속으로 손님이 어느 권번 아무개를 예약하거나 부르면 인력거로 권번에 가 모셔오곤 했다. 곧 인력거꾼이 요정 전속이요 기생은 인기에 따라 격차가 심했다. 고종말년 사양의 궁실에서 큰 잔치가 있을 때마다 팔도에서 명기들을 차출해서 잔치에 가무와 풍악을 잡게 했다.
이를 선상기라 했는데, 잔치가 끝나면 후하게 화채를 주어 돌려보내곤 했다. 한데 후에 순종이 되는 황태자의 혼례 때 팔도에서 불러들인 선상기들에게는 화채를 나누어줄 수가 없었다. 궁의 재정도 궁핍했으려니와 궁의 재정 깊숙이 침투한 일본의 입김이 지출을 억제한 때문이다.
창덕궁 낙선재 앞마당에서 이 선상기들의 화채를 위한 농성 데모까지 있었으면 알아볼만 하다. 궁밖으로 쫓겨난 이들은 고향에 내려갈 엄두도 못내고 서울에 흩어져 기생업으로 호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당시 정락원 학감이던 하규일이 이 선상기들이 가무에 뛰어난 것에 착안해 정악교습분소라는 이름으로 기업을 뒷받침해주는 기둥서방 곧 포주가 없는 무부기들을 모아 합숙 교습을 시켰다. 이것이 발전하여 기생 300여명을 거느리는 다동기생조합이 된다.
이 평양기생들의 집합체에 대항하여 서울의 유부기들과 관기 출신들 400여명이 모여 한성조합을 만들어 경쟁을 한다. 그밖에 몸을 파는 삼패기생들을 취합하여 신창조합, 전라도와 경상도 기생을 중심으로 한남조합, 그리고 한성조합에서 프라이드가 높은 평양기생끼리 분리하여 대동 조합을 만든다.
이렇게 난립된 기생조합들이 본래의 기생조합 호칭인 권번이라는 호칭으로 바뀌어 부르게 됐다. 권번마다 권번화가 정해져있어 모란화 하면 한성권번, 국화 하면 대정권번, 월계화 하면 한남권번, 해당화 하면 경화권번을 뜻하여 꽃이름으로 소속권번을 불렀다.
요정에는 '조선미인도감'이 비치돼 손님으로 하여금 기생을 선택할 수 있게 했는데 그 도감에는 권번별로 사진과 성명, 예명, 나이, 그리고 남도잡가니 사군자 등의 특기, 용모와 심성의 특징을 미화한 미사여구가 나열돼 있다.
단골이 없으면 이 도감을 훑어보고 용모와 심성을 읽어보고는 '오늘의 절지는 모란화 향심이다'고 외친다. 기생 선택하는 것을 꽃가지 꺾는다는 뜻인 절지라 했으니 감각적인 기방용어가 아닐 수 없다. 그러면 대령했던 인력거가 모란화원인 한성권번에 달려가 향심이를 태워 모셔온다. 인력거 대기소가 요정앞마다 있었음은 그 때문이다.
1930년대초 4대 권번 중 한국사람이 경영하는 한성권번의 소속 기생수는 177명이요 예비기생이랄 동기가 100여명으로 경기 출신이 221명, 평안도 출신 40명, 경상도 출신 10명 순이었다.
그중 송연화의 서화와 유운선의 아리랑타령은 소문나 있었다. 기생 64명에 동기 31명의 한남권번은 경상도 55, 경기도 34명으로 명기 오류색을 불러다 노는데 당시 총독부 고등관 봉급과 멎먹는 3600원을 화채로 내놓아야 했다. 권번은 배후에 물주랄 권력자가 도사리고 있었는데, 한성권번의 뒤에는 나라 팔아먹는데 앞장섰던 송병준이 있었다.
그의 고리대금업체인 대성사로 하여금 권번을 관리토록 했는데, 권번 감독인 하일규와 송병준의 대리인인 유흥업계의 대부 안순환과의 충돌로 하일규가 물러나면서부터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왜냐하면 하일규의 노련한 가창과 그의 인품의 품안에 있던 기생들이 다른 권번으로 이산해갔기 때문이다. 이렇게 술집에서 손님들이 지명 또는 무지명으로 인력거를 보내 기생을 부르면 권번에서는 태워보내는 주기 분리체계였다.
'붉고 파란 등불 밝지못한 샹들리에 아래 담배연기 술 냄새를 재즈에 맞춰 춤추는 젊은 남녀의 옷깃이 소용돌이 친다. 그 틈에 흘러나오는 여급의 목소리는 누님처럼 차분히 가라앉고 오히려 사나이들의 언행이 초조하고 격앙돼있다.' 김동환의 30년대 카페 풍경의 묘사다.
당시 서울에는 '낙원' '왕관' '엔젤' '태평양' 등의 카페가 있었는데 카페마다 소위 '부정스타'가 있었다. 일본경찰이 독립운동을 하거나 민족사상을 신봉하거나 그 혐의자를 부정선인이라 부른데서, 독립운동에 간접 연관이 되거나 민족사상에 동조적인 여급들이 인기가 있었고, 일본 형사들 색안경의 감시를 받았으며, 따라서 부정스타로 불리었다.
우미관 건너편에 있었던 '왕관'에는 만주에 망명중인 젊은 독립지사와의 비련으로 소문난 최다순, '엔젤'에는 만주 독립군 지도자 이아무개의 누이 이애자가 소위 부정스타였다.
'낙원'에는 한국 보이스카우트 창설자인 조철호의 제자로서 연극배우가 되어 등단했다 하면 눈물을 한 말쯤 쏟게 한다는 전기봉이 스타였다. 당시 카페 여급들은 3명중 2명은 여학교 출신이요, 3명중 2명이 조혼에 거역하고 가출했으며, 3명중 2명이 만주나 중국에 가 살아본 체험자였다.
30년대의 카페는 돈많은 집 자제들의 환락장소였다기보다 한국여성 사회진출의 시대적 한 양상이요 남성상위의 구습에 저항한 선구자들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카페에서 댄스하는 것은 허락됐지만 전문 댄스홀은 총독부 방침으로 허가가 나지 않았다.
이에 이서구(레코드회사 문예부장) 복혜숙(비너스끽차점 마담) 오도실(영화배우) 최선녀(연극배우) 그리고 한성권번 조선권번 종로권번 기생 셋이 연서명하여 서울에 댄스홀을 허가하라고 '삼천리'잡지 1937년 신년호를 통해 미쓰바시(삼교) 당시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에게 공개 청원을 하고있다.
이 글에서 동양 서양의 큰 도시 그리고 일본 만주 중국의 도시를 다 돌아보았지만 댄스홀 없는 곳은 서울 뿐이라고, 댄스가 건전한 가정을 파괴하고 청소년을 타락시킨다는 우려가 얼마나 전근대적인가도 지적했다.
'교육가 부인도 관공리 부인도 은행회사원 부인도 모두 요리집보다 차라리 댄스홀에 출입하는 것을 그 남편이 원할 것이외다. 어찌 원하고만 있으리까. 명랑하고 점잖은 사교댄스 홀이면 부부동반하여 하루저녁 유쾌하게 놀고 올것이 아니오리까.
이리되면 가정부인에겐들 얼마나 칭송받을 일이 아니오리까. 서울 도심이 아니면 한강 건너 영등포나 동대문 밖 청량리에라도 댄스홀을 허하여 유쾌한 기분을 60만 서울 시민에게 맛보게 하여 주소서' 했다.
[이규태 코너] 보름달과 개 2005/06/07
[이규태 코너] 광우병 2005/06/07
[이규태 역사에세이] 이산 이야기 2005/06/07
[이규태 역사에세이] 홍사익 이야기 2005/06/07
[이규태 역사에세이] 유행가 이야기 2005/06/07
한국인에게 한국을 깨우쳐준 마지막
박람강기형 (博覽强記型)기자 이규태 이 사람을 주목하라 * 여러 가지의冊을 널리 많이 읽고 記憶을 잘함[박람강기]
이규태는 한국인에게 한국인이 누구인가를 깨우쳐준 기자였다.
그 평생작업에 눈 뜬 계기가 작가 펄 벅과의 만남이었다.
1960년 방한한 펄 벅은 농부가 볏단 실은 소달구지를 끌면서 지게에 볏단을 지고 가는 모습에 감탄했다. “농부도 지게도 달구지에 오르면 될 텐데 소의 짐을 덜어주려는 저 마음이 내가 한국에서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규태는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 풍경에 펄 벅이 감동하는 것을 보고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실마리를 잡았다. 왜 우리 음식엔 물이 많은지, 갓은 왜 비도 새고 바람도 새는지, 우리는 사촌이 땅을 사면 왜 가슴이 아니고 배가 아픈지. 의문이 끝없이 일었다. 우리 것의 원형을 찾는 대장정(大長程)이 시작됐다.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이었다.
- 3년차 신참기자 이규태가 1961년 소록도를 취재했다. 한센병 환자들에게 붙잡혀 닦달을 당하고도 이규태는 바다를 메워 ‘천국’을 만들겠다던 그들의 ‘눈물’을 기사에 담아냈다.
작가 이청준이 그 기사를 바탕으로 쓴 것이 ‘당신들의 천국’이다. 작품 속 기자 ‘이정태’의 모델도 이규태다. 훗날 이청준은 말했다. “이 소설의 3분의 1은 이규태의 것이다. 그는 내 소설 속의 주인공이었지만 이제 나는 그의 독자다.”
- 1975년부터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연재하면서 그의 우리 것 찾기는 일대 현상을 불렀다. 대학에선 토론대상, 기업에선 연수교재, 군에선 교육자료가 됐다. 8권으로 묶은 베스트셀러 ‘한국인의 의식구조’는 지금도 꾸준히 팔린다.
- 전두환 전 대통령이 1988년 몸을 의탁하던 백담사 궁벽한 객사(客舍) 방을 TV가 비춘 적이 있다. 생활편의품 하나 없이 썰렁한 방에 책 ‘한국인의 의식구조’가 놓여 있었다. 물러난 권력자가 황망하게 서울을 뜨면서 챙겨 온 것이 이규태의 책이었다.
- ‘코너’는 ‘이규태 한국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특히 한국의 ‘씨받이 문화’는 그가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것이다. ‘씨받이 부인’(1984년 2월 9일자)은 1971년 그가 직접 취재한 대리모 할머니 기사를 바탕으로 쓴 것인데 ‘씨받이’라는 잊혀진 한국의 민속문화를 알리는 계기가 됐다. ‘씨받이’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로 만들어졌고, 1987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주연배우 강수연은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 그의 ‘코너’는 미국 대학 교재에 실리기도 했다. 한국을 중심으로 한 북방 문화권의 온돌문화에 대한 이야기(1989년 5월28일자)와 탈권위적이고 평화지향의 성격을 지닌 우리나라 신발 ‘고무신’(1995년 4월23일자)은 2003년 미국 하와이대 한국어교재에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로 전재됐다. 도올 김용옥씨도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미국 유학 중 ‘이규태 한국학’을 즐겨 읽었다고 고백한 것도 유명한 이야기다.
- 그는 병상에서 이미 열흘 전에 ‘이규태 코너’를 접는 고별 원고를 기자 아들에게 구술해 놓고도 매번 “이제 신문에 실으라고 할까요”라는 아들의 여쭘에 답을 하지 않았다. 사신(死神)을 앞에 두고도 끝내 붓을 꺾기가 싫었던 것이다. 이규태, 그는 천생 기자였다.
- ... 마지막.
1996년. 내가 고등학교때만해도 신문활자는 세로였다.
일반적인 눈동자의 흐름을 거스르면서도 그의 글은 한자 한자 놓치지 않고 읽어내렸었다.
10여년간 매일 읽어 온 책을 이제는 읽을 수 없게 된 것 같다.
"박물관 하나가 사라진 기분"이라는 어느 네티즌의 말이 너무나 와 닿는다...
20평 지하실 서재... 이규태의 힘의 원천
지난 2월25일 별세한 이규태 <조선일보> 전 논술고문이 평생에 이룩한 기록은 한국 언론에서는 이례적이라고 할 만하다. 한국은 저널리스트들이 꾸준히 자신의 분야를 개척하고 그 분야의 전문가로 거듭날 수 있는 제도와 경험이 일천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원천과 생명력은 무엇이었을까. 그를 아는 많은 이들이 이 전 고문의 자택 지하실 서재를 물리적 원천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20~25평 정도 돼 보이는 지하실 서재는 책과 각종 스크랩, 서류들로 가득 차 있었다. ‘미니 도서관’이라는 말이 적당할 듯했다.
“책이 정확하게 몇 권이나 되느냐”는 질문에 이씨는 “정확하게 세어보지 않아서 알 수는 없지만, 대략 1만2천~1만3천권 정도 될 것 같다”며 “원하는 자료를 모으는 기쁨과 행복으로 한평생을 산 분이었기 때문에 이 공간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셨다”고 말했다.
'이규태의 지하실에 들어가다' 중에서 (한겨레21, 2006.3.21)
8391일 동안 6702회가 계속된 신문 고정 칼럼(이규태 코너). '한국인의 의식구조' 등 120여 권의 저서. 얼마전 타계한 언론인 이규태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국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고, 20년이 넘게 신문에 고정 칼럼을 쓴 언론인. 90년대 초 제가 조선일보에 입사했을 때, 신참 기자였던 제게 그는 '자료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컴퓨터가 지금처럼 보급되지 않았던 그 시절, 그는 자신만의 노하우로 방대한 자료들을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칼럼을 연재하고 '한국인의 의식구조' 같은 의미 있는 책을 쓸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이런 철저한 자료관리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그의 서재였다는 생각입니다.
20여평쯤 되는 그의 지하실 서재는 책으로 가득찬 책장과 글을 쓰는 책상, 그리고 소파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1만권이 넘는 책으로 둘러싸인 '미니 도서관' 같은 이 공간에서 그는 책을 읽고 생각을 하고 글을 쓴 것이겠지요. 그는 월급의 3분의 1을 책을 사는 데 쓴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조그마한 '골방'으로 시작해도 좋겠습니다. '나만의 생각공간'을 만들고 매일 한 두시간 그곳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3분의 1까지는 아니더라도 10% 정도는 책이나 공부하는데 투자하는 것도 좋겠지요. 고 이규태 조선일보 전 논설고문의 지하 서재에 대한 기사를 한겨레21에서 보고 느낀 소감입니다.
[한겨레] 24년동안 칼럼을 연재하고 세상을 떠난 <조선일보> 전 논술고문의 서재
1만권이 넘는 책들과 엄청난 메모들이 행복한 글쟁이의 인생을 증명한다
24년 동안 8391일에 걸쳐 6702회까지 이어진 초유의 신문 고정 칼럼(‘이규태 코너’), 스스로 주도한 대형 신문 시리즈물 37개, 120여 권에 이르는 저서….
지난 2월25일 별세한 이규태 <조선일보> 전 논술고문이 평생에 이룩한 기록은 한국 언론에서는 이례적이라고 할 만하다. 한국은 저널리스트들이 꾸준히 자신의 분야를 개척하고 그 분야의 전문가로 거듭날 수 있는 제도와 경험이 일천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원천과 생명력은 무엇이었을까. 그를 아는 많은 이들이 이 전 고문의 자택 지하실 서재를 물리적 원천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그 서재를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었다. 이 전 고문의 장남인 이사부(41·<스포츠조선> 엔터테인먼트부 부장대우)씨는 <한겨레21>의 취재 요청에 흔쾌히 동의하고 서재를 공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이 전 고문을 모시고 살아왔다. 서울 서초구 반포동 이 전 고문의 자택에 들른 것은 3월8일 오후 2시였다.
사람 얼굴을 다룬 책만도 30권
20~25평 정도 돼 보이는 지하실 서재는 책과 각종 스크랩, 서류들로 가득 차 있었다. ‘미니 도서관’이라는 말이 적당할 듯했다. “책이 정확하게 몇 권이나 되느냐”는 질문에 이씨는 “정확하게 세어보지 않아서 알 수는 없지만, 대략 1만2천~1만3천권 정도 될 것 같다”며 “원하는 자료를 모으는 기쁨과 행복으로 한평생을 산 분이었기 때문에 이 공간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셨다”고 말했다. 이 공간을 마련한 때는 10년 전이었다. “아파트에 살 때만 해도 온 집안의 벽이 책으로 가득 찼죠. 10년 전 이사를 하는 데 가장 먼저 고려하시는 게 이 공간이더라고요. 이런 곳을 마련할 만한 경제적인 여유는 없었지만 무리를 해서 이사한 겁니다.”
이 전 고문은 평생 수입의 상당 부분을 책 사는 데 써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는 “너무 많이 사다 보니 대형 서점들에서는 아예 일본 책들이 한꺼번에 들어오면 책 제목과 간략한 내용이 담긴 리스트를 부친께 먼저 보내줄 정도였다”며 “새로운 전집류가 집에 들어올 때면 ‘우리나라에 한 질밖에 없는 것’이라면서 흐뭇해하시던 기억이 난다”고 회고했다.
책들은 대부분 한글과 일본어, 그리고 한자로 된 것들이었다. 영어책은 거의 없었다. 전집류는 한쪽 벽에 몰아서 정리됐다. 국사책에서 제목만 외웠던 것들이 눈에 띄었다. <연려실기술> <성호야설> <조선왕조실록> <대동야승> <불교대장경>…. 최근에 발간된 것보다는 1960~80년대에 나온 것들이 많았다.
전집류를 제외한 나머지 책들은 주제에 맞게 분류됐다. 도서관처럼 고유번호를 붙여서 체계적으로 분류한 것은 아니지만, 나름의 분류법이 있는 듯했다. 설화와 신화, 시조·한시 등 한국문학, 삼국시대, 한국전쟁, 한국의 건축, 한국의 음식, 한국의 의류문화, 인간관계 등 주제에 따라 책들이 따로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와 관련한 방대한 주제의 자료들이었다. 그에게 ‘한국학’ 전문가라는 타이틀이 붙은 이유를 알 만했다. 예를 들어 사람의 얼굴에 관한 연구를 다룬 책들만 해도 족히 30권은 돼 보였다. 어떤 책들에는 책 겉표지에 색깔이 있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고, 책갈피에 메모지가 붙어 있는 책도 있었다. 책을 사지 못한 경우에는 책 전체를 복사해놓기도 했다.
이 전 고문이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는 데 집착에 가까운 열정을 보였다는 점은 나름대로 만든 색인 목록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났다. 도서관에서나 볼 수 있는 색인 분류 도구를 서재 한쪽에 마련한 그는 ‘창기’(娼妓), ‘향약’ ‘기후’ 등 각각의 주제별로 이용할 수 있는 자료의 내역을 정리해놨다. 예를 들어 기후나 풍속과 관련한 주제에 대해서는 고려사 공민왕편 몇 년에 해당하는 곳에 해당 자료가 있다는 식으로 돼 있다.
둘째형 월북으로 마음 고생
이 전 고문은 ‘자료수집광’인 동시에 ‘메모광’이었다. 서재 한쪽엔 수십 권의 노트와 스크랩들이 모여 있었다. 신문기사들을 모아 오려붙인 기사 스크랩과 직접 손으로 해당 주제에 대해 메모한 것들이었다. 아들 이씨는 “부친께서는 책을 읽으면서 인상적인 부분이 나오면 항상 노트에 메모하는 습관이 있었다”면서 “사소한 것이라도 못 버리는 스타일이었다”고 전했다. 인터넷으로 쉽게 찾을 수 없는 재료들로 글을 쓸 수 있는 배경이 여기에 있는 듯했다. 미처 쓰지 못한 새 대학노트들도 스무 권이 넘어 보였다.
이 전 고문은 인터넷과는 별로 친하지 않았다고 한다. ‘독수리 타법’으로 기사를 쓰고 그것을 이메일로 보내는 정도까지만 컴퓨터를 활용했다. 모으고, 분류하고, 재활용하는 모든 행위를 아날로그 방식으로 했던 셈이다. 그러다 보니 그는 문구점을 사랑했다. “새로운 파일이 나오면 꼭 사야 하고 노트도 항상 새것이 몇 개 이상씩은 있어야 했다”는 게 아들 이씨의 말이다. 이 전 고문은 마지막 칼럼(2월23일치)에서 자신을 “어린 시절 종이를 처음 보고는 너무 신기해 잠을 이룰 수 없었던 소년”이라고 일컬었다.
물론 그의 칼럼이 항상 호평만을 들은 건 아니다. 9·11 사태 이후 아랍인들의 특징에 대해 “극단을 오가는 기후 틀에 마음도 틀이 박혀 매사에 극단적”이며 “복수에 민감하고 호전적”이라고 썼다가 “환경결정론이며 인종주의적 편견”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고, 1994년 10월에는 하루치 칼럼의 상당 부분이 일본 <아사히신문>의 논설위원이 쓴 글과 겹친다는 지적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일보> 칼럼니스트들이 끊임없이 시민사회와 충돌했던 것에 견줘보면 1990년대 이후 계속 높아져만 간 반조선일보 기류에 휩쓸리지 않았다.
그가 비교적 한쪽으로 쏠리지 않은 내용의 글로 일관했던 배경에 대해 아들 이씨는 “부친께서 들려준 말씀이 있다”고 털어놨다. “한국전쟁 당시였는데 둘째 큰아버지가 좌익 고위 간부였다가 월북했다는 사실 때문에 당신을 포함한 가족과 친척이 연좌제 때문에 고생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당신도 잘못하면 돌아가실 뻔한 위기까지 갔는데 당시 경찰서장이 봐줘서 살아났다는군요. 신문사에 입사한 이후로도 조카들이 취직할 때 보증까지 서야 했다고 하셨죠. 제가 대학에 들어갈 때도 ‘데모하는 것은 좋은데 연좌제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라’고 충고하셨습니다.”
숨이 멎기 3일전까지 칼럼 써
서재의 책들은 3월 말께 연세대 도서관으로 옮겨갈 예정이다. 수십 년간 때를 묻힌 책들에 대해서 이 전 고문은 “그렇지만 나만큼 책을 정독하거나 완독하지 않은 사람도 없을 것”이라며 시치미를 뗐다고 한다.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부분만을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발췌해서 봐야 하는 기자들의 노동 방식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은 셈이다. 아들 이씨는 “장례식장에서 한 스님이 이규택 코너 24년치를 모두 복사해서 보관해오던 것을 가지고 온 것을 보고 ‘부친께서 행복한 삶을 사셨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전 고문이 쓴 모든 글을 한데 묶어 ‘이규태 전집’을 만들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이 전 고문은 숨이 멎기 3일 전까지 칼럼을 썼다. 폐암 말기 증상 때문에 마지막 몇 회는 기력이 달려 구술했다. ‘독자와 세상에 대한 유언’이나 다름없는 그의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글로 먹고사는 놈에게 항상 무언가를 쓸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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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로 조국 대한민국을 뜨겁게 사랑하시다가 돌아 가신 분이네요.
<한국학> ...그 분의 뜻을 이어 받아 후학들이 더욱 열심히 한국학을
계승 발전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