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로초 얻었는가, 해동땅 건너온 그대
( 해동(海東) - 옛날에 중국인들은 바다(서해=황해)의 동쪽이라 하여
한국땅을 '해동'이라 했다.)
어릴적 어른들로부터 불로초를 구하러 진시황이 동남동녀(남녀 어린이) 수천 명을
우리나라쪽에 보내왔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이 불로초 전설의 중심에는 서복(徐福:일명 서불(徐市))이라는 방사(方士)가 서 있다.
전설과 그 주인공은 오늘날까지도 이러저러한 문헌기록과 유적유물, 그리고 민간 구전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중국의 사서 <사기>와 <삼국지>, <후한서>에 나오는 서복의 한국행과 관련된 7종의 기사를 종합해 보면,
진시황은 선약(불로초)을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 수천 명과 함께 오곡과 쇠뇌까지 지닌 각종 장인들을 바다에 들여보냈는데,
그들이 택한 행선지는 ‘가기에 멀지 않은’ 봉래산(蓬萊山)과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의 삼신산(三神山)이다.
그런데 선약을 구할 수 없게 된 서복 일행은 죽음이 두려워서 감히 돌아오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다가
회계(會稽) 바다 밖에 있는 단주(亶洲) 혹은, ‘평원광택(平原廣澤: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이 있는 그 어느 곳에 정착하였다는 것이다.
서귀포 정방폭포에 ‘이곳 지나가다’ 글 남기고
이 내용 중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서복 일행의 내한(來韓)과 관련된 것이다.
당초 행선지로 잡은 '삼신산'과 발해 (=서해 =황해 ) ,
그리고 종착했다는 '단주'가 다 한반도 판도 내에 속한다.
단군 이래 우리 겨레의 고유 신앙체계인 신선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진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삼신산은 오늘의 금강산과 지리산, 한라산을 가리킨다.
또 진나라 시대의 발해는 오늘의 발해와 황해를 망라한 한반도 주변의 해역이다.
회계는 오늘의 중국 절강성 회계이고,
단주(亶洲)는 선인(仙人)들이 사는 동해(황해)상에서 회계와 교역을 하는 곳이라고 하니,
단주(亶洲)는 십중팔구는 한반도 내의 어느 곳일 것이다.
(펀주 - 단주(亶洲)는 '단군의 땅'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
그밖에 서복의 내한에 관한 여러 가지 흥미로운 전설은 사실성을 한결 보강해준다.
서복이 제주도 영주산에서 ‘시로미’(한라산 1700m 이상의 고산지대에 자라는 상록관목의 완두 크기만한 식용 과실)란
‘불로초’를 구해서 득의양양한 채 서쪽을 향해 귀로에 오른 포구라는 데서 ‘서귀포’란 이름이 지어졌다고 전한다.
지리산 어구에 자리한 전남 구례군 마산면 냉천마을은 서불과 동남동녀 500명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삼신산에 가면서 이 마을에 들러 샘물을 마셔보니 물이 하도 차서 ‘냉천마을’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섬진강 지류인 구례의 서시천(徐市川, 서불의 불(市)자를 시(市)자로 오인) 이름도 같은 경우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제주도) 정방폭포의 암벽에 ‘서복과지(徐福過之)’,
즉 ‘서복이 이곳을 지나다’라는 글이 옛 중국 문자의 하나인 올챙이 문자로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금석학자이기도 한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인 1840~49년 탁본했다고 한다.
19세기 말의 <삼한금석록>과 제주도 설화 속에도 ‘서복과지’ 이야기가 나온다.
이러한 기록과 전승으로 보아, 조선조 말엽 당시에는 바위에 이 글자가 있었던 듯하며,
광복 뒤까지도 본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암각은 폭포 위에 전분공장이 들어서면서 폐수가 흘러내려 지워졌다고 전해진다.
[한겨레 2004-07-19 ]

제주 표선앞바다에서



이상 물매화(한국야생화)

한국 야생화

서울 근교 관악산에서

가을의 꿈

한국 - 산호랑나비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 다 퍼온 사진들 (사진 출처 - 디시인사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