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들댁의 아픈 손가락(1)
부들댁은 택호이다. 택호는 집안 안주인들이 시집을 올 때 붙이는 별칭인데 통상적으로는 살던 동네의 이름을 붙였지만 부들댁의 택호 만큼은 예외였다. 부들이란 뜻은 '붙들다'란 뜻으로 아들이 귀한 집안에서 아들을 붙들어 달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었다.
부들댁의 삶은 하늘의 무지개처럼 빛나야 했건만 1941년생인 그는 일제의 압제를 거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6.25가 터지는 와중에 제대로 먹지도, 공부하지도 못한 채움의 한을 평생 안고 살아가야 했다. 초등학교 3학년 중퇴가 최종 학력인 부들댁은 비로도(벨로드)공장 직공으로 일하다가 비교적 어린 나이인 20살에 세살 위의 성실하고 착한 안동 김씨 성을 가진 남편을 만나 먼지 날리는 신작로 길섶 콩나물도가 하는 박씨네 문간방에 세를 얻고 단란한 신혼을 이어갔다. 소구루마 화물 배송일을 하는 남편은 많이 벌지는 못했으나 시골장을 다니는 장꾼들의 짐을 제시간에 맞춰 날라주는 성실함으로 그 업계에서는 신뢰도가 으뜸인 사람이었다.
몇 년후 그들에게는 두 아들이 태어났고 초롱 초롱한 눈망울의 아이들은 잘 컸고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치면서 지역 학교에서 늘 우등생 소리를 듣는 아이들로 자라갔다. 나라에서는 '잘 살아 보세'라는 슬로건을 걸고 새마을 운동이 한참 진행되었다. 먼지 날리던 신작로 길은 조금씩 넓혀지고 늘 냄새나던 좁은 골목 도랑은 깨끗이 정리되고 초가 지붕은 슬레트 지붕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런데 좋은 일만 있지는 않았다. 대한민국 택배 사업의 원조격인 소구루마 배송이 직업인 김씨의 일감도 점차 줄어들었고 급기야 경운기라는 기가막힌 요물이 김씨의 사업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황소 한 마리와 소구루마가 삶의 보루였던 김씨는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여기 저기 날품 팔이로 전전하다가 화병을 이기지 못해 반백년을 채우지 못하고 간경화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소구루마로 근근히 장만한 대지 35평 건평 12평의 방 2칸 슬레이트집 한 채가 재산의 전부였고 남은 가족들의 생계는 부들댁의 몫이 되었다.
다행히 두 아들은 착하게 자랐고 공부도 잘해 서울에 있는 대학에 나란히 합격했으나 부들댁 살림에는 언감생심 형편을 아는 두 아들은 어머니를 위해 전액 장학금을 준다는 지방의 국립대학에 진학하게 되었고 아이들의 딱한 사정을 전해들은 임아무개라는 독지가가 두 형제의 생활비와 학업에 필요한 비용을 모두 도와주었다.
조건없이 도와 주는 임사장은 어린 시절 초등학교를 마치고 남의 가게 점원으로 들어가 그의 성실함에 감동한 자식이 없던 주인이 아무런 조건없이 가게를 물려 주었고 근면성실함이 몸에 베인 그는 구멍가게와 같던 그 사업장을 크게 키워 인근 시,군까지 거래처를 넓히며 사업을 잘 한다는 평판을 듣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자연스레 임사장의 조건없는 도움과 삶의 모습에 감동한 형제는 틈틈이 교회를 찾게 되었고 가랑비에 옷 젖듯 신을 의지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고향집에 홀로 지내며 남의 밭일과 이웃집 큰일에 허드렛일 도우미로 생활비를 조달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하는 아들들은 늘 어머니를 편안하게 모셔야 하는 과제를 짊어지고 있었다.
지방대학을 다니던 두 아들 중 큰아들이 먼저 그 어렵다는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판사가 되었고 뒤이어 둘째는 전국의 수재들만 모인다는 국가에서 특별히 세운 과학기술대학원에 당당히 합격하여 온 동네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큰 아들은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자 했으나 임지를 자주 옮겨 다녀야 하는 관계로 어려움이 있었고 더 큰 문제는 부잣집 맏딸로 귀하게 자란 사법연수원에서 만난 피부색 하얀 변호사를 아내로 맞은 탓인지 며느리는 시골 시어머니의 삶의 고난과 현실에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손자를 보기 위해 틈틈이 서울로 가는 부들댁은 아들이 좋아하는 시골 뒷산 귀한 나물인 두릅과 고사리, 묵나물, 피마자나물, 참나물을 삶아 봉지에 싸고 참깨 농사가 잘된 이웃 오암댁의 검은깨 까지 곱게 씻어 고소하게 짜 준다는 풍산 기름방까지 11번 시내버스를 타고가는 수고는 아들집을 방문할 때 치르는 부들댁의 일상이요 즐거움이었다. 금방 짠 참기름을 금복주 소주병에 담고 찢어진 삼양라면 봉지로 고이 덮어 고무줄로 탱탱묶고 철 지난 농민신문에 돌돌 말아둔다. 행여나 샐까 노심초사하며 아들네 집이 있는 서울로 차멀미가 심한 부들댁은 경기여객 맨 앞자리에 앉아 천리길 오르내리기를 수년 째 하고 있다. 둘 째 아들 역시 국가에서 보내준 미국 유학을 가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우리나라 최고의 기업에 끌려가듯 뽑혀가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다가 지금은 외국에 책임자로 나가 있으니 세상 부러울게 없는 부들댁이었다.
서울 한강변에 자리잡은 큰 아들 집의 거실 풍경이다. 착하고 이쁜 맏며느리이지만 변호사 일이 너무 바빠 고부간의 대화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늘 시간에 쫓기며 전화기만 들고 허둥댄다. 고등학교 2학년과 중학교에 다니는 손자 손녀는 제 방문 걸어 잠그고 공부에 매달리니 부들댁은 늘 뒷짐을 진 채 죄없는 남산 타워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거실을 서성인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학원이다, 수영장이다 바쁘게 다니며 할미와 앉아 사과 한 쪽 나누는 여유조차 없었으니 부들댁은 모든 것을 체념한지 오래다. 남창에 햇살이 드리울 때면 직장으로 학교로 썰물처럼 떠나버린 넓은 아들 집, 적막이 흐르는 거실 창가 우두커니 소파에 엉덩이 깊숙히 넣지도 못한 채 고추앉은 부들댁, 무슨 말인지도 알 수 없는 시골집 담벼락 만한 TV속 대화에 먼 산만 보기 일수이다.
파출부 아주머니가 차려주는 밥상은 부들댁의 입맛에 영~ 아니다. 달고 짜기만 한 햄과 소시지는 소힘줄을 씹는 것 같기만 하다. 이름도 알수없는 넓적하게 파인 접시에 주는 흰물 섞인 과자 부스러기는 평생 든든하게 속 채워본 적 없는 부들댁에게도 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부들댁은 사흘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온다. 오늘도 출근한 아들에게 전화로 '애비야 잘 있다가 내려 간다.' 전화기 너머 다정한 아들의 목소리 "어무이 식사는 잘 하셨어요?" "그래 마이 먹었다. 우째든지 건강하거라 그래 끊는다" 전화비가 많이 나올까 걱정되는 부들댁은 가슴속에 묻어둔 하고 싶은 이야기를 뱉어 내지도 못한 채 전화를 끊는다.
고향으로 내려오는 경기여객 1번 좌석, 운전기사의 바로 뒷자리 창가는 부들댁의 허전함을 달래려는 듯 벌어진 창 틈사이로 상큼한 바람이 밀려온다.
부들댁은 요즘 평생 오금저리며 살던 돈의 굴레에서 벗어나 걱정이 없다. 반 백년 넘게 은행 통장 하나 없던 아낙이 벌써 통장이 6개가 넘었다. 투명 비닐 봉투에 노란 고무줄로 꽁꽁 싸매 장롱 깊숙이 넣어둔 보물단지, 애지중지하며 갈무리 해온 육소간 건너 단위 농협에서 만든 1번 통장 이것은 두 아들이 매달 100만원씩 보내주는 생활비가 또박 또박 200만원씩 쌓여있는 통장이다. 2번 통장은 나라에서 매달 넣어주는 노령연금 통장, 3번, 4번 통장은 법석골 입구 신협에 만들어 둔 맏아들네 손자 손녀 미래 준비 할머니 선물 통장, 5번 통장은 회사의 동남아 책임자로 나가 몇 년째 외국 생활하는 둘째네 손자 장가갈 때 보태 줄 세금 없다는 통장 6번 통장은 잃어버린 딸에게 줄 마음의 빚 통장... 부들댁은 먹지 않아도 배부른 행복한 날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누구나 아픔은 있는 법 부들댁이 지금까지 평생을 가슴 한켠 응어리로 묻은 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비밀이 있었으니 그것은 아픈 손가락이었다.
80초반에 들어선 부들댁은 점점 그 아픈 기억이 더 초롱 초롱해 진다. 지금까지 아들들이 몰랐던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오래전 부터 부들댁은 안동 장날만 되면 신시장 초입 과일가게 처마밑에서 좌판을 깔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 이른 새벽 도매상에서 떼어온 간고등어와 생선을 돌돌 구르는 바퀴 달린 구루마에 얹어 얼기 설기 묶은 나무 상자에 걸쳐 놓고 소리친다. 남들보다 더 싸게 파는 생선이니 손님이 꽤나 많다. 2일, 7일 안동장날 오전 9시 그 자리엔 부들댁이 있다. 깊게 패인 이마의 주름살 사이로 느껴지는 고난의 흔적을 간직한 채 오늘도 부들댁의 생선은 채 12시를 넘기지 못하고 완판이다. 장날마다 부들댁의 3시간 반짝 세일은 사연이 있다. 어떤 날은 기분 좋아 덤으로 주다 보면 새벽에 도매상에서 가져온 물건 값보다 결산이 부족할 때도 자주 있었으니 말이다.
사실 부들댁은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언젠가 부터는 돈이 목적이 아닌 사람을 만나는 공간으로 바뀌었기 떄문이다. 찐한 비린내 속에서 지나온 삶을 기억했고 부대끼는 장터에서 나를 지탱하는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부들댁의 아픈 손가락은 이유가 있다.
부들댁은 지금껏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가슴앓이를 하고 있었던 사연이 있다. 맏 아들 두 살 위에 딸이 하나 있었는데 두 돌 지난 아이를 추석 명절 안동신시장에 데리고 왔다가 잃어버린 사연이다. 아이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고 헤메이기를 여러 해 모든 것을 체념하고 어느 부잣집에 가서 잘 살겠지 자위하며 살아온 세월이다.
유독 부들댁이 신시장 초입 자리를 고집하는 것은 혹시라도 잃은 딸이 돌아오지 않을까 막연하게 시작한 연유에서였다. 부들댁의 수입은 중요하지 않았다. 찌든 비린내도 장애가 되지 못했다. 혹여나 어릴 때 시장을 기억하고 찾아올 딸의 모습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아들집을 가도 장날을 피해야 하는 부들댁의 특별한 사정과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내려와야 하는 데는 이런 아픔이 있었기 때문이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