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치전이드나 머루전이드나 : 여기서 '전'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 진다. '전'을 '廛(전 : 가게 전)'의 뜻으로 보고 "아스리치(=山앵두)나 머루가 많이 모여 있는 곳"이라 풀이할 수 있고 '전'을 '奠(전 : 장사지내기 전에 간단히 술, 과일 등을 차려 놓은 일)'으로 보고 "아스라치(=山앵두)나 머루로 '전(奠)'을 차리는 것인가"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하이얀복 : 소복(素服 : 하얗게 차려입은 옷) 여기서는 수리취와 땅버들의 표면에 난 하얀 솜털을 뜻한다.
*뚜물 : 뜨물. 곡식을 씻어 부옇게 된 물.
[해설] 이 詩가 단순히 거적을 파는 장사가 혼자 걸어가는 쓸쓸한 길을 묘사했다고 보기엔 '쓸쓸함'과 '서러움'의 부피가 상당히 크게 느껴진다. 그리고 "아ㅡ딸으는사람도없시 쓸쓸한 쓸쓸한길이다"에 제시된 탄식의 밀도에 부합하는 내용이 이어져야 할 것이다. 수리취와 땅버들의 흰 솜털을 서럽게 받아 들이려면 거기 상응하는 의미 내용도 제시 되어야 할 것이다. 또 거적 장사를 따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개[犬] 한 마리가 따라간다는 설정도 자리를 파는 장사의 경우라면 서러울 것이 별로 없으나 거적 덮는 초라한 장사의 경우라면 충분히 슬픔을 유발할 만하다. 이렇게 해석하면 수리취나 땅버들의 흰 솜털을 소복(素服)으로 표현한 것은 화자의 정서가 투입된 특색있는 표현이다. 요컨대 '거적장사'를 '거적을 덮고 지낼 만큼 초라한 장사'라고 봐야 詩의 문맥이 더 확실해지고 전후 상황에 의한 의미의 합리적인 해석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거적장사를 초라한 장사로 해석 하는 경우에도 '아스라치전'과 '머루전'을 아스라치(=山앵두)나 머루를 넣고 부친 전(煎 : 달일 전)으로 풀이하는 것은 어울 리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거적장사 치르는 마당에 화전(花煎)을 떠올리는 것은 매우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수리취 와 땅버들에 하얀 솜털이 돋아 있고 동풍이 설렌다고 한 것으로 보아 계절은 봄철이므로 '아스라치'나 '머루'는 열매의 형태가 아니라 꽃의 형태로 필요가 있을 것이다. 초라한 거적장사꾼이 산비탈을 오르는데 양 옆으로 산앵두꽃과 머루꽃이 피어있으며 따르는 사람 아무도 없이 山(산)까마귀만 음산하게 우지짖고 개 한마리가 (거적장사꾼을) 어정어정 따라간다. 여기에 호응하듯 수리취와 땅버들도 망자를 위해 하얀 소복을 입 고 있다고 상상한 것이다. 하지만 상주 없는 쓸쓸한 장사에 앞서 제시한 상상 까지 더해져 슬픔을 오히려 더 일으킨 다. 그래서 하이얀 복이 '서러웁다' 라는 말로 화자의 심정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찌푸린 하늘을 뜨물에 비유한 데도 백석 특유의 '눌변의 미학'이 빛난다. 거적장사 치르는 마당에 세련된 서구적 이미지가 도입될 수는 없는 일이다. 백석은 '東風(동풍)'이라는 한자어를 통해 부정적 상황을 표현 했다. '마파람'이나 '봄바람'과는 달리 '동풍'이라는 음이 갖는 거센 음상이 부정적 의미로 이어지는 것 같다.
백석은 '쓸쓸한'과 '서러웁다'라는 형용사를 통해 마음의 상태를 표현하면서도 감정의 세부를 드러내지 않았다. 끝내 대상과 거리를 두면서 정황의 묘사를 통한 간접 표현으로 일찍이 김기림이 지적한대로 백석은 "우리를 충분히 애상적이게 만들 수 있는 세계를 주무르면 서도 그것 속에 빠져서 어쩔 줄 모르는 것이 추태라는 걸 가장 절실하게 깨달은 시인" 이다. 뜨물같이 흐린 날과 설레는 동풍으로 詩를 끝낼 뿐 그 이상의 군말은 덧붙이지 않음으로써 "주책없는 일련의 향토주의(김기림, <'사슴' 안고> , 《조선일보》, 1936. 1. 29.)와 결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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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어 정본]
쓸쓸한 길
거적장사 하나 산 뒷옆 비탈을 오른다 아ㅡ따르는 사람도 없이 쓸쓸한 쓸쓸한 길이다 산까마귀만 울며 날고 도적갠가 개 하나 어정어정 따라간다 아스라치전이 드나 머루전이 드나 수리취 땅버들의 하이얀 목이 서러웁다 뜨물같이 흐린 날 동풍이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