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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아트의 선구자' 백남준이 10년 전 이맘때,
그의 인간적이고 순수했던 혼이 담긴 예술작품을 우리 곁에 남긴 채
시공을 초월한 도도한 흐름 속으로 돌아갔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한국전이 일어나자 홍콩 일본과 독일을 돌며
미술사와 전위음악을 공부하며 독창적인 예술을 창안한다.
백남준은 1952년 동경대에 입학해 음악과 예술사를 전공했다
쇤베르크는 현대음악의 아버지이지만 아무도 듣지 않는 음악가이기도 하다.
그는 기존의 음악언어를 12기법 불협화음으로 전복시켰는데
쇤베르크의 열렬한 애호가였던 백남준은
쇤베르크를 동경대에서 졸업논문으로 썼다
1956년에는 독일로 건너가 뮌헨대에서 음악사와 철학을 공부한다.
그리고 1958년 독일 다름슈타트 신음악제에서
존 케이지를 만나 큰 영감을 받는다.
(존 케이지는1952년 '4분 33초'라는 작품을 발표해 관객의 고정관념을
철저히 깬다
연주자가 피아노 앞에 앉아 피아노 뚜껑을 시간에 맞춰
열었다 닫았다 시계를 보면서 무위의 시간을 공유하다가 마침내,
연주 없이 4분 33초 만에 자리를 뜨는 게 전부다.
예기치 않은 관객들의 기침소리, 종이 만지는 소리,
공연장 밖의 바람 소리 등으로 다양한 소리들이
의도되지 않은 삶의 모습이라는 4분 33초 예술이 완성된 순간,
무대 위의 피아니스트가 그 동안의 모든 소리를 생산해 준
관객과 자연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인사하고 무대를 떠난다.
그 모든 소리, 소음들이 케이지의 <4분 33초>라는 시간 프레임 안에서 작품이었다
이런 작품이 나온 건 그가 선불교와 인도철학에 심취해
화음과 멜로디만 아니라 관객의 소음, 침묵, 차소리, 기침소리,
웅성대는 긴장감 등 일상의 우연을 즉 삶자체를 음악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옛날에 작곡가는 천재였고, 지휘자는 폭군처럼 연주자들을 쥐어짰고,
연주자들은 지휘자의 노예노릇을 했다.
그러나 우리 음악에는 폭군도, 노예도, 천재도 없다.
모두가 동등하게 함께 협조해서 만들어간다.
예전에는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고,
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듣도록 무엇인가를 한다.
그것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무도 누구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지 않고도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케이지)
두 거장의 공통점은 전위예술가로 음악과 미술에서 그 통념을 깼다는 점이다.
1950년대 1960년대 네오다다 시기에 독일에서는
통념을 넘어선 유희의 예술가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사회적 요구가 있었다
유럽은 1차대전을 겪었고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고 2차대전을 겪었으며,
나치즘이 등장하고 그리고 사회주의에서는 스탈린 독재가 또다시 등장했으니,
모든 기존 합리 전통 관습 위선에 등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끔찍한 역사를 다 겪은 독일의 신세대들과 네오다다작가들은
그동안 2번의 큰 전쟁과 혁명과 독재의 틈바구니에서
억눌린 유희의 본능을 폭발시킨다
위선과 체면과 관습에 도전하는 이 '유희의 예술'의 거장은,
먼 동양에서 온 곱고 작은 사나이 '동양에서 온 테러리스트'란 별명을 얻은
바로 백남준이었다.
독일의 전위예술가들은 모두 백남준에게 환호하며
기발하고 거침없는 유머와 희롱과 삶의 열정을 뿜어내는 그를 사랑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온 전위예술가 샬롯 무어먼은 백남준에게 반해
평생 그의 퍼포먼스동행자가 되어 그와 함께 했다
1961년 독일에서 네오다다 혹은 아방가르드 작가들과 백남준
회원님? 현대음악과 무용의 거장 존 케이지와 머스 커닝햄 말고
제일 왼쪽은 누구인지요?
가르쳐 주세요 please~!
또 혼자 문제를 푼 것 같습니다, 앨런 긴즈버그 같죠?
1950년대 미국 beat 제너레이션의 출현을 선포한 시
Howl을 쓰고 낭독한 ...
존 케이지 작곡 '인간첼로(John Cage's Charlotte Moorman with Human Cello
performed with Nam June Paik)'
이 퍼포먼스는 1965년부터 시작돼 휘트니미술관 등 여러 곳에서 재연된다.
샬럿 무어먼(C. Moorman 1933-1991)은
줄리아드 출신의 재원으로 한때 아메리칸 심포니오케스트라
단원이기도 했다.
1963년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 때부터 해프닝 아트를 주도했고
백남준을 만난 이후 퍼포먼스 예술의 뮤즈가 된다.
백남준이 이렇게 20세기 현대미술에서 몸을 중시한 것이
얼핏 보면 반예술적이고 비이성적인 것 같으나
20세기의 맹목적인 합리주의와 과학주의가 유럽과 일본, 독일을
끔찍한 파시즘과 나치즘으로 내몬 광기에 정면 도전하는
문명과 자연의 합일과 상호교통을 실천하는 길이었다
플럭서스(Fluxus)는 유동(流動), 유출(流出), 변전(變轉)의 뜻으로,
라틴어의 “Fluere(Flow)”에서 유래된 말로서
혼합매체(mixed media)적인 액션형식의 하나로
극단적인 반예술적 전위운동의, 1960년대 국제적인 전위예술가 집단이다
1960년대 초 동명(同名)의 그룹이 조직되어
뉴욕을 중심으로 유럽 각지에서 활동했다.
그 구성원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나
음악가, 화가, 시인, 무용가, 영화작가 등 전 예술 분야에 걸쳐 있으며
이들의 국적도 다양하다.
조지 마치우나스, 백남준, 요셉 보이스, 존 케이지, 오노 요코 등이 멤버였다
백남준의 [총체피아노]는 건반을 누르면 전동 모터가 돌아가고
헤어 드라이기에서 뜨거운 바람이 나오며,
어떤 건반은 누름과 동시에 실내의 전원이 모두 꺼지도록 장치하였다.
그의 피아노는 청각뿐만 아니라 시각과 촉각 등 총체적 감각을 요구하는
그런 피아노였다.
전시장에는 모두 4대의 피아노가 있었는데 갑자기 나타나
멀쩡한 피아노 한 대를 부수어버린 사람이 있었는데
훗날 독일의 국민 작가가 된 요셉 보이스였다.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는 서로 약속하지 않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았던 것인데,
두 사람은 평생을 예술적 동료로서 서로를 지지하며 교류하였다.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았죠."- 요셉 보이스
플럭서스 미술은 독일에서 시작되어
뉴욕과 북구의 수도인 여러 도시로 확산되었으며
일본과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서도 비슷한 활동이 독자적으로 펼쳐졌다.
이 운동은 대중문화에 의존하지 않고 아방가르드 미술가와
음악가와 시인들이 창조해 나갈 새로운 문화를 추구했으며
게릴라 극장과 거리 공연, 전자음악 연주회 같은
초기의 플럭서스 이벤트는 1960년대와 연결지어 생각되는
성적 충동과 무정부주의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플럭서스 미술가에게는 사회적 목적이 미적 목적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들의 주된 목적은
부르조아적인 판에 박힌 미술과 생활을 혼란시키는 것이었다.
백남준은 존 케이지, 조셉 보이스, 머스 커닝햄, 데이빗 보위,
로리 앤더슨 등 당대의 전위예술가들과 협업해왔다
플럭서스Fluxus 전위예술은 상이한 메체를 결합시킨 인터미디어 즉,
음악, 시각예술, 무대예술, 시를 융합한 통합양식 개념을 발전시킨 것이다
Fluxus작품은 기상천외하여 부조리한 것 같지만
고정관념을 타파하려는 기본에 깔린 태도는 후대의 모든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다양한 음악 개념미술과 퍼포먼스 아트 등장에
선도적 역할을 했다
"한마디로 전위 예술은 신화를 파는 예술이다.
자유를 위한 자유의 추구이며, 무목적적인 실험이기도 하다.
규칙이 없는 게임이기 때문에 객관적 평가란 힘들다.
어느 시대건 예술가는 자동차로 달린다면 대중은 버스로 가는 속도다."
-백남준
백남준은1964년 뉴욕에 정착한 이래
TV가 막 탄생했을 무렵 캔버스 대신 TV를 매개로 새로운 예술
'비디오아트'를 창시했다
TV Garden '74
TV 부처 1976-78 폐쇄회로
1974년 뉴욕의 보니노 화랑에서 가진 네번째 개인전에
처음 출품된 이후 돌에 둘러싸인 모습,
흙 속에 파묻힌 모습 등 여러 가지 형태로 만들었다
간혹, 백남준은 TV 모니터를 바라보며 스스로 참선하는 부처가 되기도 했다.
손과 얼굴
[‘예술과 위성’ (1984)]
조지 오웰은 1949년 원거리 통신을 이용한
감시와 통제가 일상이 된 암울한 미래를 그린 디스토피아 소설
「1984」를 발표하면서, 1984년이 되면 매스미디어가
인류를 지배하리라는 비관적인 예언을 하였다.
백남준은 이 예언에 대해 “절반만 맞았다”고 반박하면서,
예술을 통한 매스미디어의 긍정적인 사용을 보여주기 위한
위성 TV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기획하였다.
1984년 1월1일, 백남준은 뉴욕과 파리를 위성을 이용해 실시간으로 연결했다.
이 생방송을 위해 4개국의 방송국이 협력했고,
30여팀, 100여명의 예술가가 참여해 대중예술과
아방가르드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음악, 미술, 퍼포먼스, 패션쇼, 코미디를 선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다채로운 예술들을 합성하여
한 TV 화면 속에서 만나게 하였다.
이 방송은 뉴욕과 파리뿐만 아니라 베를린, 서울 등지에 생중계되었으며,
약 2천5백만 명의 TV시청자가 시청한 것으로 추산된다.
백남준이 진두지휘한 이 위성쇼는
미국 방송사 WNET의 뉴욕 스튜디오와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 사이를 위성연결하면서
존 케이지, 머스 커닝햄, 요셉 보이스, 앨런 긴즈버그,
이브 몽탕, 샬럿 무어먼 등 당대 손꼽히는 예술인들의 퍼포먼스들을
화면 속에 놀~라운 이미지로 펼쳐 놓았다.
브레이크 댄스, 우주요들송, 뮤직비디오가 백남준이 즉흥적으로 연출한
배경 화면 속에서 뒤엉키며 화려하게 첨단의 문명과 예술을 혼합했다.
그의 쇼는 1948년 미디어로 인민을 통제하는 전체주의 국가의 미래상을
담은 소설 <1984>를 발표한 영국 작가 조지 오웰(1903~1950)에게
“당신 예측은 너무 비관적으로 빗나갔다 ”고 세계에 전하는 동시에
첨단 미디어기술이 평화와 소통의 미래를 가져오리라는
'거장'의 소망과 예측을 세상에 보여준 것이었다.
"미디어가 지닌 전지구적인 소통의 잠재력을 보여줬다"는
서구 언론의 호평이 이어졌다.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이 뉴욕·파리의 시공간이 분할된 스크린 속에
함께 등장하고, 이런 영상들이 또한 '생방송'됐다는 사실은
기술을 업고 예술이 지구전체로 순식간에 전파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이 모두가 백남준의 아이디어와 앞을 내다보는 그의 철학과 예술 전반을
망라한 그의 교분과 스케일이 대범한 추진력과 무엇보다 부지런한 부단한
노력과 진정한 지성의 힘이었음을 칭송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에서도 언론들은 ‘첨단과학과 예술의 만남’이라며 대서특필했다.
생소한 좌파작가 오웰의 <1984>는 스테디셀러가 됐다.
총천연색 황홀한 이미지들이 명멸하며 현혹하는 신명나는 TV화면은
백남준 미술의 대명사로 자리를 굳혔다.
반면 국수주의자들은 “한국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21세기 오늘에는 같은 말을 할 수 없다, 그의 예상을 지금 현실로
우리가 매일 향유하고 있으니....
"예술가는 미래를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엄청난 향학열로 [종이없는 사회를 위한 확장된 교육](1968)에서
기술의 발전으로 등장한 새로운 미디어가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또
[후기 산업사회를 위한 미디어 계획](1974)이라는 연구 논문에
‘전자고속도로(electronic super highway)’라는
지금의 인터넷을 의미하는 단어를 언급하면서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으며 진보하는 길"이라고 예언했는데
그가 생각해낸 전자 고속도로(인터넷)가 이제 생활이 되었으니
그는 위대한 예술가일 뿐 아니라 최고 지성이었음을
간과해선 안된다
현대무용의 거장 머스 커닝햄
이 위대한 무용가가 초기에는 시대를 너무 앞서가는 바람에
분노한 관중이 야유와 조소, 또 무대로 물건을 던지기도....
차례로, 팝 뮤지션과 머스 커닝햄, 존 케이지
머스 커닝햄은 노년인 70,80대 까지 무대에 서며 90세 생일에 새 무대를 선보인
대단한 춤꾼이며 안무가 였습니다
그는 백남준과 존 케이지와 늘 함께 무대와 실생활에서 친교했구요
전통무용의 갑갑한 틀을 깨고 혁명을 일으킨 포스트 모던 댄스의 대가입니다
머스 커닝햄과 백남준의 예술적 협업은 많은 무대를 함께 했고,
1984년 1월 1일의 이 영상에서도 백남준은 그를 위해 추상화 못지않은
배경화면을 선사하는 공동작업이었다!
백남준은 배경 화면을 흐릿하게 만들어 예술적인 이미지를 창조했습니다.
1984년 백남준이 연출한 위성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에서 생중계했던
다양한 퍼포먼스 영상들!
이 모든 것이 1984년 백남준에 의해 기획되고 그 때 돈 40만불이 소요되고
일부를 제외하고 빚을 내 스스로 충당했었다니 통큰 사나이요 선각자요
유목민의 정점을 찍었다는 점에 위대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역사 위에 놓고 볼 때 당연히 징기스칸보다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아내, 시게꼬에게,,,
징기스칸의 복권
디지털 네트워크를 타고 세상을 누비며
생각이 자유롭게 유목하는 삶이 바로 백남준 사유와 예술과 실천이었다
백남준은 "멀리 여행을 떠나 새로운 지평선을 바라보고자 하는
유목의 원형 archetype이 자신에게 있다"고 말했다
그러기에 지구는 그에게 너무 좁았을지 모른다...
《TV 시계》
《즐거운 인디언》
《필름을 위한 선》
《데카르트》 얼마나 철학적 사고인가? ㅎㅎ
"사람들은 이 소머리만 기억하더라.."고 백남준은 '허탈하게, 위대하게^^' 술회했다
삼원소, 1997-2000, 백남준아트센터 소장 (제겐 너무 아름다워 오래 놀랐습니다)
이미 위에서 언급했지만,
백남준은 "예술가는 미래를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록펠러재단의 지원을 받아 작성한 글
[종이없는 사회를 위한 확장된 교육](1968)에서
기술의 발전으로 등장한 뉴미디어가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적고
[후기 산업사회를 위한 미디어 계획](1974)이라는 연구 논문에서는
‘전자고속도로(electronic super highway)’라는
지금의 인터넷을 의미하는 단어를 언급하면서
미국 사회가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전자고속도를 건설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그는 이것이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으며 진보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생각해낸 전자 고속도로(인터넷)는
약 30년 후 미국 대통령이 된
빌 클린턴의 연설문에서 언급되었으며,
오늘날 인터넷은 전 세계를 연결하는 중요한 매체가 되어있다.
"전자고속도로라는 나의 아이디어를 빌 클린턴이
1992년 자신의 대선 공약에서 사용했지.
그는 나의 아이디어를 훔쳤어.
(Bill Clinton stole my idea)"-백남준
백남준은 베트남 전쟁이 아시아인에 대한 미국인의 오해와 정보의 결핍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재즈가 흑인과 백인을 이어주었고
록 음악이 젊은 층과 기성세대를 이어주었듯이
비언어적 소통으로서 음악과 춤이 주는 풍요로움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이 담긴 [글로벌 그루브](1973)가
전 세계의 케이블 방송 채널을 연결하는 상상의 공동체에 대한 서막이었다면,
[굿모닝 미스터 오웰]에 이어 제작된 [바이바이 키플링], [손에 손잡고]등
위성 프로젝트는 그의 상상의 '공동체'를 전 세계 거실의 텔레비전에
실어 보낸 놀라운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1993년 백남준은 전세계 미술인들의 큰 잔치인
베니스비엔날레의 독일관 작가로 초청되었다.
통일 후에 처음 열리는 베니스비엔날레의 독일관에
극동의 한국 출신 작가이면서 유럽과 미국에서 활동한 백남준과,
극서(미국)에 살고 있는 독일 출신의 작가 한스 하케가 함께 선정되어
전시를 연 것이다.
동양과 서양의 결합이라는 독일관의 조합은 비엔날레 기간 내내 회자되었고,
백남준이 출품한 [일렉트로닉 슈퍼 하이웨이 : 울란바토르에서 베니스까지]는 황금사자상을 수상하였다.
"바로 우리 몸은 일 센티미터도 움직이지 않으면서 우리의 생각을 옮기는 것이다.
나는 이를 위해 ‘정주 유목민stationary nomad’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인류는 아직 그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백남준 (1980년)
...회원여러분 전 이 말에 통곡하고 싶은 기분입니다
이런 내 조국의 세계적인 천재를 한국전때 유일한 재벌이다시피한
집안의 귀공자로 국난을 피해 혼자 모든 문화와 예술과 교육의 혜택을
받는 행운아로만 생각했던 우리의 무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 술과 마약에 빠져 시대를 한탄한 젊은 부유층이 더 많았던 시절
전기 전자 물리 문학 음악 예술사등 한계 없이 부단한 인류의 정신과
인간,기계, 자연을 연결하는 데 기여한 그를 너무,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마르코 폴로
'탈것'의 모티프는[ 징기스칸의 복권]에서 '자전거'로,
[마르코 폴로]의 '자동차'로 이어진다.
운송 수단 위의 로봇은 '이동'과 '소통'의 역사 발전의 '메타포'로
디지털 세대에게는 이제 구식인 듯 보이지만
늘 저 멀리를 내다보고자 했던 그의 앞선 역사 통섭의 작품이다!
백남준의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나눈 가상의 대화를 기록한
[ 태내(胎內)기 자서전 ] '
《마이너스 108일》
나는 물었다. 한국은 무엇인가요?
나의 아버지가 말했다.
그건 너의 나라가 될 거야. 나는 물었다. 왜요?
엄마가 말했다. 이유는 없어.
백남준. 큰 나라인가요?
엄마는 아니라고 말했다.
나는 물었다. 선진국인가요?
엄마. 아니, 뒤로 가는 나라란다.
백남준. 난 태어나지 않을래요.
엄마가 말했다. 그렇지만 약한 것이 좋은 것일 수도 있어.
우리는 1943년에 재난을 피하게 될 거야.
나는 물었다. 왜 한국을 선택한 거에요?
-1932년 4월 3일 백남준
(이런 여리며 강하고, 귀여우며 날카롭고, 가슴시린 영특한 시인을
본 적 있습니까, 회원님?)
한국 태생의 아티스트로서 백남준은 ‘모국’, ‘고향’이라는
정서적 구분에 연연하지 않았다
백남준은 전통과 관습으로 구분되는 모든 것을 해체하고
새롭게 배치하여 살아내는 앞서가는 미래의 아티스트였다
한국은 자신의 뿌리로서가 아니라 백남준식 '유목' 경로의 '한 지점'이었다
세계인! 진정한 자유의 예술가....
첫댓글 또 좋은 글을 올려주셨네요,
백남준의 창작동기와 배경을 자세하게 다룬 것은 다른 회원들에게도 도움이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은시님!^^
카페회원들에게 부탁하고 싶네요.
백남준을 인터넷에서 떠도는 수준, 일반 상식이 아닌 좀더 깊게 접근해
각자들의 생각을 밝히고 그걸 통해서 업데이트 할 수있는...
....
저희 카페는 다른 카페와 달리 박사학워 출신자들도 많고
전문인들도 적지 않고 많은 분들이 관련분야 석사학위 출신자들이니
충분히 가능할 것입니다.
Minnie님은..수고스럽지만..
다시 한번 불교사상과 존 케이지를 그의 작품 심우도(십우도)와 관련해서
다루어 주시길 부탁드리고..
예술경영을 하는 분들에겐 백남준 작품의 하향화경향에 대해서
그림을 하시는 분들은 백남준 재료와 평면작업의 한계와 그 무한한 가능성 등에 대한
글을 올려주샤도 좋을 것 같은데요
감사합니다!!! 은시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렇게 글을 올리는 것이
제일 도움이 되는 것은 읽는이보다도 글을 쓴 당사자입니다.
첫째는 지식이 정리가 되고
둘째는 낯선 관념적 지식이 자기것으로 체득화 할 수있는 기회를 갖게 되고
셋째는 오류를 지적받거나 본인이 발견할 수있고
넷째는 바로 실력을 업데이트해 새단계로 진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남의 글을 기웃거리며 평생 자신의 생각을 늘 구깃구깃 안에 보관하며
망서리는 사람들의 삶은 늘 자신의 본질이나 자신의 운명에도
손님처럼 남아 있다 가는 것이 인생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