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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여자 / 이생진
- 빈센트 반 고흐
낡은 옷 속으로 스미는 바람이
시리게 배고프다
오늘 아침도 굶고 하숙집을 나와
급식소에서 수프를 마셨다
그림 그리는 동안 배고픔을 잊는다는 건
생 거짓말이다
저녁 늦게까지 그림을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역전에서 불쌍한 여자를 만났다
시퍼렇게 얼어터진 동태 같은 여자
앙상한 손가락에 쑥 들어간 눈알
불쌍하다는 생각과 도와줘야 한다는 의무감에
서로 마주치는 한숨이 크다
그러나 맨손으론 아무 소용이 없다
그날 밤
죄 진 사람처럼 머리를 숙이고 돌아왔다
다음날도 역전에서 그녀를 만났다
집으로 가자고 할까 하다가 그냥 돌아왔다
그 다음날도 그렇게 돌아왔다
그녀는 손님을 찾고 있었다
그녀의 직업은 손님을 맞는 일이다
배고프고 불쌍하다
불쌍한 것은 불결한 것이 아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실토를 했다
‘나는 가난한 화가인데 필요한 것은 모델이요
우리 집에 가겠소?’ 하고 묻자
그녀는 기침을 하면서도 그 말을 놓치지 않았다
고흐를 쳐다보고 일단 가보자며
딸린 식구가 있다고 했다
그 식구들도 따라왔다
와서 보니 그녀의 뱃속에도 식구가 있다
앉혀놓고 그림부터 그렸다
고흐도 그녀처럼 배고프지만
그림 그리는 배고픔이 더했다
그림의 눈물 / 이생진 *리히텐슈타인(1923-1997): 만화를 미술에 응용한 대표적인 팝아티스트.
- 빈센트 반 고흐
눈물 나는 그림이 있다
그림에서 눈물을 비교하긴 처음이다
그만큼 눈물을 무시했다는 이야기다
아니다
그림을 보는데 돈으로 따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돈은 눈물이다
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는지
그림 앞에서 돈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행복한 눈물과
불행한 눈물
리히텐슈타인(1923-1997)*의 눈물은 ‘행복한 눈물’(Happy Tears)이고
고흐(1853-1890)의 눈물은 ‘슬픔(Sorrow)’에서 흐르는 눈물이다
그건 맞다
그러나 아무 쪽에도 손수건을 흔들지 말라
그들의 눈물은 씻어지지 않는 눈물이다
눈물의 맛은 같지만 미세한 차이가 있다
행복한 눈물은 달큼하고
슬픈 눈물은 시큼하다
하지만 그림의 눈물은 찍어먹을 수 없는 눈물이다
리히텐슈타인도
고흐도 그림을 그리다 갔다
지금 눈물 맛이 문제가 아니라
죽은 화가들이 만져보지 못하는 뭉칫돈이 문제다
‘행복한 눈물’은 90억이고
‘슬픔’은 100억이 넘는 눈물이다
사두면 값이 오른다는 유혹에 눈이 뒤집힌다
뒤집힌 눈에선 눈물이 나지 않는다
눈물이 나지 않는 데선
눈물로 호소하기 어렵다
사람의 눈물에서 돈을 캐는 광인
눈물은 눈을 보호하기 위해 흐르는 것인데
지금 시비가 붙은 눈물은 정서적 눈물이다
정서적 눈물은 놀람, 기쁨, 슬픔에서 온다
그 중 기쁨과 슬픔이 시비 거리다
아니다 그건 눈물 때문이 아니라 돈 때문이다
고흐의 말을 들어보자
“내 그림을 보고 사람들이 감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평범한 일상 생활에서 느끼는, 그러나 살아가면서
불가피하게 느끼는 심각한 슬픔을 그리고 싶어…
삶은 슬픔의 연속이니까…”**
슬픔의 가치는 돈에 있지 않고
혼에 있다
돈에는 혼이 없으니
화가들의 눈물에서 혼을 빼가자 말라
상업미술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간파한 화가. 대표작 ‘공을 든 소녀’
‘행복한 눈물’ 등.
**고흐, 37년의 고독 /노무라 아쓰시 지음 김소운 옮김/ 큰결.2004(149쪽)
이별 / 이생진
-30세 (1883)
시엔과 헤어지는 것은
시엔을 두 번 버리는 것이다
고흐 자신도 버려진 처지에서
버려진 사람들끼리 살기란
또 버림 받는 일밖에 없다
가난해서 버리고 버림 받는 것들
아비도 모르고 태어난 빌렘은
출생부터 버림이다
고흐가 그림을 그리려고 사 둔
아마포로 빌렘의 옷을 꿰매는 시엔
시엔은 만날 때 이미 이별을 시작한 듯
태연하게 아마포를 자른다
고흐의 가슴에서 가위 소리가 난다
그러고 떠난다
고흐는 네덜란드의 북부 드렌테로 가고
시엔은 가족과 기차역에 남는다
2년 전 시엔이 손님을 기다리던 역
빌렘의 내일을 위해
고흐는 어린 이별에 입을 맞춘다
시엔은 만날 때나 헤어질 때나 손님을 기다리는
복사판 표정이다
시엔을 안아준다
죽은 나무토막이다
빌렘의 유모차를 끄는 어린 누나에게 얼굴을 비빈다
좁은 얼굴에 눈물이 고이고
아빠 같은 아저씨가 떠난다
그 소녀의 이별이 이별 같다
한 여인과 살다 그만두고 떠나는 이별
22개 월 만에 헤어지는 장면이다
고흐는 화구를 짊어지고 기차에 오른다
차창 밖으로 내민 손
손으로 잡지 못하는 이별
이별은 서로를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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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슬픔과 눈물 그리고 이별이 예술로 승화됨을 적은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