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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국가 멸망기의 양상과 원인
차례 ■ 漢이 구성한 고조선 멸망 과정(김병준)---------------------------1 「漢이 구성한 고조선 멸망 과정」에 대한 토론문(윤용구)-----------------------26 「漢이 구성한 고조선 멸망 과정」에 대한 토론문(조법종)-----------------------29 ■ 고구려의 멸망기 정치운영의 변화와 멸망 원인(이문기)----------39 「고구려의 멸망기 정치운영의 변화와 멸망 원인」에 대한 토론문(임기환)-----------66 「고구려의 멸망기 정치운영의 변화와 멸망 원인」에 대한 토론문(이성제)-----------69 ■ 가라국의 쇠퇴 원인에 대하여(이근우)----------------------------72 「가라국의 쇠퇴 원인에 대하여」에 대한 토론문(남재우)-----------------------92 「가라국의 쇠퇴 원인에 대하여」에 대한 토론문(정재윤)-----------------------94 ■ 백제의 멸망 원인(이용현)------------------------------------97 「백제의 멸망 원인」에 대한 토론문(김영관)-------------------------------124 「백제의 멸망 원인」에 대한 토론문(김수미)--------------------------------129 ■ 발해의 멸망과정과 원인(김기섭)-------------------------------132 「발해의 멸망과정과 원인」에 대한 토론문(김종복)---------------------------144 「발해의 멸망과정과 원인」에 대한 토론문(박진숙)---------------------------147 ■ 신라의 멸망 원인(신호철)--------------------------------------150 「신라의 멸망 원인」에 대한 토론문(김영미)--------------------------------167 「신라의 멸망 원인」에 대한 토론문(박재우)-------------------------------169 漢이 구성한 고조선 멸망 과정 - 사기 조선열전의 재검토 김병준 (한림대 사학과) Ⅰ. 서론 고조선과 관련해서는 이미 많은 논저에서 다루어졌다. 고조선 멸망과 관련한 사료가 특별히 더 발견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이 부분을 다루는 것은 무의미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고고학 자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추세가 눈에 띠지만, 이것 또한 왕조가 멸망하는 과정을 정밀하게 드러내 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고를 작성하는 이유는 기존의 문헌사료인 사기 조선열전의 내적 논리에 주목해 볼 여지가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선열전에 기록된 고조선 침공 내용은 이 전쟁을 도발하고 또 결과적으로 승리했던 漢人에 의해 작성된 전쟁 공적 보고서류에 근거해 구성되었다. 조선열전에는 고조선의 입장이 어떠했는지가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漢이 고조선 침공을 어떻게 합리화하고 어떻게 평가했는지가 적혀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필자는 일차자료로서의 전쟁 보고서에 어떤 내용이 기술되어야 하는가 또 어떻게 기술되어야 하는가를 염두에 두면서 조선열전의 의미를 추적해야, 그 사료가 갖는 가치를 적극적으로 해석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전쟁의 명분과 근거가 철저히 그들의 입장에서 서술되어야 할 것임이 분명하지만, 반면 출병과정 및 승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최종 戰功을 엄격히 판단해야 할 필요에 의거해 정확히 기술되어야 했을 것이므로, 이러한 입장에서 漢이 구성한 고조선 멸망과정을 축차적으로 세밀히 천착해 보고 싶다. 한에게 고조선 전쟁은 주변국에 대한 침공의 일환이었다. 그래서 우선 사기 조선열전을 사기의 다른 주변국의 열전과 함께 읽는 방식을 취했다. 흉노열전을 비롯해 남월열전, 동월열전, 서남이열전은 조선열전과 동일한 구도로 서술되었다. 다루고 있는 시기도 거의 같다. 전쟁 관련 기록이므로 그 기술 형식도 유사하다. 그동안의 연구에서는 대략적인 흐름만을 비교할 뿐이었지만, 본고에서는 용어, 인물 그리고 서술기법 등의 세밀한 비교검토를 통해 그동안 의외로 고조선 연구에서 공백처럼 다루어지지 않았던 부분을 드러내 보았다. 마지막에는 최근 제시된 고조선 멸망 시점과 관련된 개인적 의견을 덧붙혔다. Ⅱ. 고조선 침공의 구실 (1) 사기의 반란 서술 방식 고조선의 멸망과정은 사기의 조선열전에 가장 자세하다. 사기 조선열전은 곧 고조선이 멸망하는 과정을 서술하기 위해 작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조선열전은 다시 몇 개의 외국열전과 함께 하나의 커다란 그룹을 구성한다. 각각의 열전은 개별적 지역의 역사를 다루지만, 모두 하나의 공통된 서술 형식과 목적을 갖기 때문이다. 고조선의 멸망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조선열전의 구성과 목적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면, 조선열전과 주변 열전의 구성 비교는 필수적이다. 다만 외국열전의 서술 형식을 살피기 전에 먼저 사기 전체의 서술 방식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사기의 사료적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와 관련해서는 크게 두 가지 의견으로 나뉜다. 사기를 문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사마천이 원자료에 근거하되 자신의 관점과 문체로 다시 저술(‘作’)했다고 보았다. 이 입장에서는 사기에 담긴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단어와 글자 모두에도 사마천의 관념이 담겨져 있다고 주장한다. 자연히 사마천의 생애 특히 이릉의 禍로 말미암은 울분이 사기 속에 어떻게 반영되었는가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사마천이 사기를 작성하면서 참조했을 1차 자료를 적극적으로 확인할 수 없었을 때에는 이러한 입장이 크게 각광받았다. 과거 사마천이 시와 좌전 등 경전을 참조하였다는 것만으로는 그의 역사 서술 방식을 독창적인 것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최근 출토 자료가 대거 발표되면서 적지 않은 부분이 사기의 내용과 중복되었고, 그 내용을 분석한 결과 사기가 출토 자료를 참조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가 자주 이용했던 故事의 내용도 과거 그의 창작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지만, 이러한 고사의 사례도 사마천 이전에 존재하고 있었고 사마천은 그것을 그대로 옮겨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사기의 내용은 문학적 입장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이 사마천 개인이 창작한(‘作’) 것이 아니라, 그가 참조한 1차 사료를 충실히 옮겨두는 데에 주안점을 두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마천은 自序에서 자신은 대대로 내려온 것을 가지런히 정리하는(‘述’) 것에 불과하지 ‘작’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한 바 있다. 사마천의 ‘述而不作’ 정신은 반란과 관련된 기록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사기의 전한 초기부터 무제에 이르기까지 반란 관련 서술은 놀라울 정도의 유사성이 확인되는데, 그 원칙은 실제적 반란이건 모의 수준에 그쳤건 그러한 결과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소개하는데 할애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오왕 비 열전의 경우 오왕 비가 오왕에 봉해지는 순간을 서술하면서 마치 이미 그 반란의 발발을 예견했던 것처럼 시작한다. 그 후 반란에 이르기까지 발생했던 거의 모든 사건도 결국은 반란을 가져오게 된 복선으로 처리된다. 즉 그 결론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관련 자료를 찾아 이를 시간적인 구성으로 다시 맞추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내용은 사마천 개인이 창작한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반란의 죄목으로 최종 판결된 자에 대한 獄吏의 공식적인 조사 결과를 충실히 따라야 이러한 구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서술 방식은 특정 인물의 생애를 설명할 때에도 적용되지만, 반란과 관련된 경우에는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고조선의 멸망 과정을 묘사한 조선열전도 고조선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이를 침공한다는 논리로 구성되어 있는 만큼 다른 제후왕 반란 형식과 동일한 구성을 갖고 있다. 즉 반란을 일으키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하되 그 때까지의 세세한 죄목이나 움직임들을 적음으로써 반란과 진압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하 이 점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2) 사기 조선열전과 남월 및 동월열전의 비교 조선열전의 구성은 (1)위만조선 이전의 조선과 중국 제왕조와의 관계 (2)위만조선의 건국과정과 한과의 외교관계 (3)한무제의 조선침략과 조선의 저항 (4)사군의 설치와 군공의 처리 (5)찬자의 찬평의 5부분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1)과 (2)의 부분도 결국은 조선 침공을 위한 정당성을 확보하는 과정으로 판단된다. (1)의 부분은 ①조선왕 만의 출신 ②전국시대 연의 조선 공략과 지배 ③진의 영역 확대 ④한초 영역의 조정으로 구성된다. ①에서 조선왕의 출신을 燕人으로 언급한 것과 관련해서 원래의 민족 소속은 고조선계라는 논의도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이를 조선인이라고 기록하지 않은 사마천의 서술 방식이다. 이 점은 남월열전, 동월열전과 동일하다. 남월열전에 남월왕의 출신을 眞定人으로 밝히고 있고, 동월열전에 민월왕과 동해왕이 월왕 구천의 후예라고 굳이 쓴 것은 모두 이들 국가가 혈연적으로 漢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함이다. ②③④에 등장하는 구체적인 지명과 관련해서는 여기서 굳이 논급하지 않겠지만, 이러한 서술의 목적도 전국시대 이후 한초에 이르는 기간 동안 조선 지역에 대한 영역적 지배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주장하려고 함에 다름 아니다. 역시 남월열전에서 秦의 六國 겸병 이후 남월지역에 계림군, 남해군, 상군의 군현을 설치하였다는 점을 명시한 것이나, 동월열전에서 역시 이곳에 민중군을 설치했다는 점을 밝힌 것은 한의 공격 이전에 영역적 지배의 연고권이 있다는 것을 밝히려고 했던 것이다. (2)의 부분에서는 먼저 ①만이 자립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진말 한초의 혼란의 과정에서 망명해 나가 자립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마치 원칙적으로 한에 부속되어야 할 자인데 잠시 형편상 자립했던 것처럼 서술한다. 진번과 조선의 만이 외에 전국시대 연과 제에서 망명한 자들을 복속시켜 다스렸다는 사실을 특기한 것도 이러한 점과 무관하지 않다. 남월열전이나 동월열전에서도 조타 및 無諸와 搖가 자립해 가는 과정을 기록하면서 동시에 진말 한초의 혼란 속에서 발생했다는 점이 강조된다. 조타의 경우에는 南海尉로서 주변지역을 공격해서 자립했다고 되어 있고, 無諸와 搖도 鄱陽令 吳芮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漢을 도와주었다고 되어 있는데, 모두 漢과의 잠재적 연계를 갖고 있었으며 부득이한 상황 하에서 자립하게 된 것을 드러내려 한 것이다. 그 다음에는 ②漢이 이들을 인정한 상황을 소개한다. 조선열전에서는 천하가 안정된 뒤 요동태수가 외신의 약속을 맺고 난 뒤 이를 황제가 허락하였다고 한다. 남월열전에서는 陸賈를 보내어 정식으로 남월왕에 임명했으며, 동월열전에서도 각각 민월왕과 동해왕으로 임명했다고 되어 있다. 한과의 관계가 기본적으로 外臣으로서 규정되었던 것이다. 조선과 남월의 경우는 명백히 외신을 기록하였던 반면 동월은 한이 직접 왕으로 임명했다는 점을 분명히 해 두었다. 남월은 칭제하고 외신으로서의 지위를 부정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결국은 적어도 한의 황제 앞에서는 칭신하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해 두었다. 이상 (1)과 (2)의 부분에서는 혈연적으로 그리고 영역적으로 각 지역에 대한 친연관계를 강조하고, 임시적인 이반 상태가 있었지만 결국 한초에 외신으로서 칭신하였다는 구도를 드러내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이어 (3)조선침략의 구체적 과정이 이어진다. 첫 번째 단계는 ①외신으로서의 책무를 이행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한 무제 원봉 2년(기원전 109)에 사신 섭하를 보냈다. 그 내용은 외신으로서 ‘새외의 만이를 잘 보호하여 변방을 침탈하지 말 것, 만이의 군장이 천자를 입견하고자 할 때 이를 막지 말 것’을 약속했지만, 진번과 傍衆國이 입견하고자 했으나 이를 막았다는 것과, 점점 더 많이 한에서 도망한 자를 받아들였다는 것, 그리고 입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2)에서 성립된 외신으로서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②섭하의 조선 비왕의 살해, 조선의 보복으로 이어지며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직접적인 원인은 조선 비왕의 살해이겠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외신으로서의 의무를 강제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남월의 경우에는 조금 복잡한 양상이 벌어지지만, 기본적으로는 동일하다. 남월왕 趙胡가 칭신하고 감히 마음대로 병사를 일으키지도 않았으며 태자를 장안으로 숙위시키는 등의 의무를 지키려고는 했지만 끝내 入見하지 않았다는 점을 문제점으로 지적하였다. 남월왕 조호를 이은 嬰齊가 즉위한 이후에도 아들을 숙위시켰지만 본인은 입견하지 않았다고 적었다. 그 아들 興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內屬을 꾀해 입조를 결정했지만, 이러한 정황에 반대한 여가의 세력들에 의해 저지되었다고 하면서, 황제는 여가 세력을 설득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고자 했고, 이러한 조치가 여가의 반란을 불러일으켰다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동월도 구체적인 상황에서는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외신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구실로 삼았던 것은 동일하다. 민월왕은 외신으로서 마음대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아야 하는 약속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전쟁을 일으켰고, 후에는 칭제를 동월왕에 대한 침공의 이유로 삼았다. 그렇다면 漢의 주변 지역의 침공은 국가를 막론하고 기본적으로 외신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빌미로 삼았다는 것인 바, 이러한 논리를 뒷받침하려면 결국 각국이 외신으로 자리 매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조선열전의 (1)(2)를 비롯한 남월과 동월열전의 앞부분은 이를 위해 할당되었던 것이다. 시간적인 순서대로 정리되었지만, 사실은 침공의 목적을 정당화하기 위해 외신으로서의 지위가 강조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3) 外臣 개념의 가변성 그러나 이러한 재구성이 곧 내용의 허구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조선과 남월이 외신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다. 적어도 한에서는 조선과 남월, 동월을 외신으로 인식했다. 전술한 사기의 일반적 서술방식을 고려하면, 사마천은 적어도 (1)(2)에 해당하는 내용의 원자료를 직접 참조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전한 초기에 외신으로서 약정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사마천의 재구성이 전쟁의 합리화였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외신의 성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과연 외신이라는 개념은 본래 고정된 것일까 그리고 외신은 이러한 약속을 지켜야 했던 것일까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편이 더 유효하다는 것이다. 문헌사료에 여러 차례 외신이라는 말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 함의는 매우 모호하다. 가령 남월의 경우 건원 6년에 황제만이 갖출 수 있는 장식인 黃屋左纛을 하고, 그 땅은 동서 만여리에 달하며, 실제로 한의 변경에서 각축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면서도 이름을 外臣이라고 했다. 반면 흉노는 이미 군사적으로 크게 약화되었지만 외신으로 삼아 변경에서 朝請할 것에 대해 크게 격노했다고 한다. 한과는 대단히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의 국가를 招來하여 외신으로 삼겠다고 하기도 했다. 해당 국가의 규모나 위치와 상관없이 상황에 따라 매우 가변적인 외교적 개념처럼 사용되었던 것이다. 기왕의 연구에서는 외신을 한초에 특수한 국제질서의 한 유형으로 이해해 왔다. 전한 초기에 한정되어 있다거나 그 수가 제한적이었다는 것을 그 증거로 삼았다. 하지만 靑海省 大通縣 上孫家寨 115號 漢墓에서 출토된 木簡을 보면 외신의 뜻을 전한 초기의 몇 가지 사례에 좁혀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諸塞外蠻夷爲外臣 葆塞及不塞者 外有急 軍吏謹以辨道 其不入葆及不居塹內與吏卒相佐者 輒言二千 (338) 이 간독이 출토된 한묘에서는 전한시기 소제와 선제시기의 五銖錢 및 전한 말기 수장품이 발견되었던 반면 왕망전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연대를 전한 말기의 것으로 추정한다. 아울러 羌族이 활동하던 한의 서부 지역을 대상으로 반포되었던 내용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특정한 시기에 특정 지역을 대상으로 운영되었던 질서라고 이해하기 보다는, 秦簡에 보이는 것처럼 외국의 군주로서 사절을 보내온 정도로 이해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漢의 입장에서는 가능한 많은 만이 군주들을 외신으로 삼아 번병으로 삼으려고 했으며, 그 때문에 만이군장 중 입조하려는 자를 막지 말라고 했던 것이었다. 다만 조선이나 남월의 경우 이들을 ‘役屬’시켜야 했기 때문에 한의 입장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한에서 요구하는 ‘保蠻夷’ ‘和輯百越’의 단계를 넘어 주변의 만이 군장들의 입견을 방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주변의 군장들은 ‘외신’이라는 칭호를 허락하는 대신에 일정한 경제적 군사적 댓가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保蠻夷’ ‘和輯百越’ 외에 외신으로서의 책무를 별도로 규정했다고 보기 힘들다. 가령 조선에게 요구했던 것처럼 입견해야 한다는 조항, 한의 亡人을 유인하지 말 것과 같은 의무라든가, 남월에게 입조와 숙위를 요구하거나 漢法을 사용할 것을 요구했던 것들이 본래부터 요구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더욱이 전한 초기 전란이 막 평정된 시기에 외신들에게 이러한 요구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 점은 최근 호북성 장가산에서 출토된 여후 2년 반포 율령에 의해 명확해졌다. 율령 조문에 따르면 당시 漢은 내부 제후국과 대치 상황에 있었으며, 한에서 말과 황금 그리고 각종 금속 제품이 한의 영역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적극 금지하고 있었다. 漢이라는 호칭을 제후국을 포함한 제국의 개념이 아니라 제후국의 명칭과 대치되는 것으로 사용했던 것은 초기의 대립 국면을 가장 잘 보여준다. 전한 문제와 경제까지도 적극적인 제후 대책이 행해지지 않았다. 이렇듯 內臣이라고 할 제후들에게도 漢이 적극적인 통제를 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외신에게 내신에게도 강제하기 어려운 의무를 요구할 수는 없다. 사실 내신인 제후국에 대한 의무 조항도 상황에 따라 매우 가변적이다. 오초칠국의 난으로 유명한 오왕 비의 경우만 간단히 살펴보더라도 동전을 사적으로 주조한 것이 귀책 사유 중의 하나로 언급되지만 사실은 조칙에 의해 동전 주조를 허용했었다. 그러나 후에 다시 이를 금지하였고, 나중에 금지한 상황에 맞추어 이전의 불법사실을 맞추었던 것이다. 漢法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도 문제시 되었지만, 이년율령을 보면 본래 제후국에서는 漢法과 다른 본국의 법이 통용되었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다. 외신에 대한 요구는 제후왕에 대한 입장에 큰 전환이 발생한 경제기 오초칠국의 난을 전후로 크게 달라지고, 더욱이 황제권이 크게 강화된 무제시기가 되면 내신에 대한 통제가 강화됨과 동시에 외신의 의무를 더욱 강화했을 것이다. 남월의 경우 이 점이 잘 나타난다. 즉 고조와 여후시기에는 변경을 직접 공격한 것에 대한 책임만을 물었다가, 문제와 경제시기에는 칭제의 문제를 거론하였고, 무제시기에 들어와서부터는 漢法을 사용하는 등 比內諸侯를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의 경우에는 외신으로 약정한 이후 무제 원봉 2년까지 별다른 사건이 없기 때문에 확인하기는 곤란하나, 조선에게 요구된 의무 중 한의 亡人을 유인하지 말 것과 같은 의무는 이년율령에 제후왕과 관련된 조문으로 규정되어 있으며, 입견 역시 내지의 제후왕에게 강제되었지만 경제 이전에는 오왕 비의 사례처럼 지켜지기 어려웠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조선도 남월과 마찬가지로 무제시기에 바뀌어진 외신에 대한 요구가 강제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요컨대 한초부터 외신제의 외형이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침공의 근거를 찾기 위해 일단 외신으로서의 지위를 분명히 규정해 둔 뒤, 한초와는 크게 달라진 외신의 책무를 제시하고 이를 이행하지 못한 것을 구실로 삼으려 했던 논리의 구성을 찾을 수 있다. Ⅲ. 전쟁의 도발 (1) ‘반란’의 조건 한은 원봉 2년(기원전 107년) 섭하의 조선 장군 살해 사건에 이은 조선의 군사적 도발을 이유로 전쟁을 개시했다. 이 사건을 단지 ‘發兵襲攻殺何’라고 했지만, 한에서는 이를 반란(‘反’)으로 간주했음에 틀림없다. 이른바 신하가 병사를 일으켜 황제의 사자를 살해했기 때문이다. 사실 문제의 발생은 섭하가 조선의 비왕을 살해한 데에서 비롯되었지만, 그것은 한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신하의 신분으로서 군사를 일으켜 황제에 거역했는지 여부일 뿐이다. 한서 무제기에는 앞뒤의 사정이 모두 생략된 채 “조선왕이 요동도위를 공격하여 살해했다. 이에 천하의 사형수를 모집해 조선을 공격했다.” 즉 조선의 반란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을 공격한 것으로 정리되어 나타나게 된다. 남월과 동월에도 마찬가지 상황이 벌어졌다. 남월의 경우에는 당시 궁정 내부가 한에 기울어져 있던 왕․왕후 측과 이에 저항하는 相 呂嘉 및 대신들의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왕과 왕후가 한측에 속한 이상 굳이 군사를 일으켜 침공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었다. 그런데 다시 입장을 바꿔 강경 노선을 취했다. 韓千秋가 2천명을 이끌고 남월 경계 안으로 침공해 들어갔고 이 때문에 여가 등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켜(‘遂反’) 왕과 태후 및 한의 사자를 살해했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실제로는 한이 먼저 군사적 도발을 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에 대해 군사적 대응을 했는지 그리고 그 결과 왕이나 사자를 살해했는지 여부였다. 군사적 침공을 받고나서라도 부득이 군사적 대응을 했다면 ‘반란’이 되고 만다. 동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동월왕 餘善은 한의 누선장군이 자신을 처단하자고 주청했고 그리하여 漢兵이 국경까지 도달해 곧 들어온다는 것을 듣고 나서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고(‘遂反’) 한의 세 校尉를 죽였다. 한서 무제기에는 모두 남월의 반란, 동월의 반란만이 드러나며, 그에 이어진 침공의 원인으로 표현될 뿐이다. 이처럼 반란을 일으켰는지 여부가 지금의 법리적 판단으로 보면 대단히 일방적인 판단임에도 불구하고 漢에게는 매우 중요했다. 물론 나름대로의 원칙이 적용되었다. 즉 군사적 행동을 모의한 데에 그친 것(‘謀反’)과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 것(‘反’)을 엄격히 구분하였다. 전한 초기 이후 크고 작은 제후왕의 반란이 일어났지만, 사기의 기록은 이 두 가지를 엄격히 구분해서 사용하였다. 그 차이가 매우 크기 때문인데, 먼저 토벌의 대상을 반란의 주모자로 볼 것인지 아니면 모반의 주모자로 볼 것인지에 따라 그 처벌의 강도 즉 전쟁의 양상이 달라진다. 또 그들을 체포하거나 주살한 이후 포상을 할 때에도 커다란 차이를 가져온다. 따라서 주변국에 전쟁을 도발한 한에게 가장 중요한 직접적 원인은 ‘반란’이었고, 이를 억지로라도 찾아야 했던 것이다. (2) ‘반란’의 시점 한편 도발의 시점이 무제 원봉 2년(기원전 109년)이라는 점도 주의할 만하다. 진말 이후 전한 경제에 이르기까지는 내부를 통합하는데 급급했던 한이 오초칠국의 난을 경계로 제후왕 세력을 진압하게 되자, 비로소 주변 지역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무제가 즉위한 이후 원광 2년(기원전 133년) 馬邑의 전투부터 흉노와 전투가 시작된 이래, 원광 6년(기원전 129년)에 위청이 오르도스 지역을 되찾고 그곳에 삭방군을 두면서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그 뒤 원수 2년(기원전 121년) 곽거병이 대대적 승리를 거두고 이어서 혼야왕이 수만명을 데리고 항복해 왔고, 원수 4년(기원전 119년) 위청과 곽거병이 선우의 본거지를 공격하여 승리한 때를 기점으로 흉노는 북쪽으로 멀리 달아났으며 한도 더 이상 흉노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후 남방으로 관심을 돌렸다. 물론 그 이전에도 남쪽 지방에 대한 공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건원 3년(기원전 138년)에 민월이 東甌를 공격했을 때에 동구의 요청을 받아 군대를 일으켰지만 조정 내부에도 분쟁이 있었을 뿐 아니라 황제도 직접 호부를 내어 군국의 병사를 징발하지 않겠다고 했었다. 건원 6년(기원전 135년) 민월이 남월을 공격했을 때에도 한은 남월의 요청을 받고 나서야 민월을 군사를 일으켰다. 양자 모두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상황이 종료되었지만, 무엇보다 주변국의 요청에 의해 군사를 일으켰다는 점이 그 이후와 다르다. 그 이후 사마상여가 서남이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그곳에 대한 경략이 있었지만, 원삭 3년(기원전 126년) 삭방군은 남겨둔 채 서남이나 동방의 창해군을 철폐했던 것은 북방 흉노와의 상황이 어느 정도 종료되기 전까지 다른 지역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침략을 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월 내부에서 餘善이 자립해 왕이 되는 상황에서도 오히려 그를 동월의 또 다른 왕으로 인정해 주기까지 하였다. 본격적인 군사행동은 원정 5년(기원전 124년)부터 시작되었다. 3월 한천추의 공격이 실패한 이후 가을에 10만명의 대군을 동원해 남월을 공격하였다. 몇 개월 뒤 원정 6년(기원전 123년) 봄에 남월을 멸망시킨 한은 군대의 일부를 서남으로 돌려 이곳에서 남이를 평정하고 牂牁郡을 설치하였으며 곧이어 서남이의 여러 지역도 모두 항복해 와 군현을 설치했다. 남월 침략에 참여했던 군대의 나머지는 곧 동월의 침략을 위해 그 경계에 머물고 있다가, 원정 6년(기원전 123년) 가을에 동월을 침공했다. 원봉 원년(기원전 122년) 겨울에 동월도 평정이 되자, 한 무제는 그 해 여름 태산에 올라 봉선 제사를 행하고 연호를 원봉으로 바꾸었다. 그가 태산에 세운 각석에는 ‘四宇之內, 莫不爲郡縣, 四夷八蠻, 咸來貢職’이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천하가 이미 모두 복속했다는 자신감이 봉선 제사에 드러난 것이다. 원봉 2년(기원전 109년) 봄에 시작된 조선에 대한 정벌은 바로 이 시점, 즉 흉노와 남월, 동월에 대한 모든 공략이 마무리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한 봉선 제사가 치러진 이후였다. 즉 한이 생각했던 기본적인 천하가 복속되었다는 자신감이 곧바로 고조선과 서남이에 남아 있는 나머지 지역에 대한 침공으로 자연히 이어졌던 것이다. 그때까지 서남이 지역에서는 滇만이 항복을 거부하였었지만 원봉 2년(기원전 109년) 가을에 한이 파촉의 병사를 동원해 주변의 勞浸﹑靡莫을 공격했고 곧이어 滇도 복속하였다. 동시에 고조선에 대한 침공이 이루어졌지만 유독 고조선과의 전쟁이 의외로 길어지자 사신 衛山을 직접 보내기도 했고, 이것이 실패하자 전권 특사 公孫遂를 보냈던 것도 이미 천하를 얻었다는 자신감이 흔들릴까 두려워서이거나 아니면 자존심이 상해서였을 수 있다. 공손수가 당도하자 좌장군이 “조선이 벌써 마땅히 함락되어야 했지만 그렇지 못한 것은 까닭이 있다”라고 한 것도 이러한 불안감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Ⅳ. 전쟁의 경과 (1) 병사의 출신지역 한서 무제기에는 원봉 2년(기원전 109년) 봄에 요동도위 섭하를 살해했고 이에 천하의 死罪를 지은 자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리고 난 뒤 그 해 가을에 이들을 데리고 조선을 침공했다. 약 3개월여에 걸친 준비 작업이 진행되었다는 것이지만, 병사의 신분이 죄수였다는 것은 그 이후 전쟁의 경과와도 긴밀한 관련이 있다. 비록 천하에서 모집했다고는 해도 전쟁이 벌어질 곳과 가까운 지역에서 선발하는 것이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조선열전에는 전쟁이 발발하자 좌장군의 卒正인 多가 遼東兵을 이끌고 공격을 했고, 누선장군이 齊兵을 거느렸으며, 또 좌장군은 燕代卒을 거느렸다고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는 여기서 언급된 요동, 연, 대, 제를 모두 대략적인 지역 명칭으로 이해해 왔다. 그러나 사기와 한서 등 역사기록에서는 원칙적으로 인물의 籍貫은 물론 다른 경우에도 그 당시에 존재했던 政區 즉 군현의 이름을 사용했다. 그렇다면 요동, 연, 대, 제라는 명칭은 모집된 죄수 병사들의 출신지가 遼東郡, 燕國, 代郡 그리고 齊郡라는 더 구체적인 지역이었음을 알려준다. 연국은 무제 원삭 원년(기원전 128년)에 연왕이 자살하면서 廣陽郡으로 바뀌었으나, 원수6년(기원전 117년)에 涿縣 일부를 떼어내어 涿郡을 설치하고 나머지 지역에 燕國을 설치했다. 또 원봉 년간 중에는 연국에서 몇 개의 현을 다시 줄였지만, 병사를 모집하는 시기에 연국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한편 요동군은 원래 연국에 속해 있었지만 일찍이 경제 때 오초칠국의 난이 일어난 뒤 연국에서 떨어져 나와 원봉 2년(기원전 109년)에는 漢郡으로 존치되어 있었다. 代의 경우는 소속 현의 이동이 복잡하지만, 원봉 2년 당시에는 대국이 아닌 대군이 설치되어 있었다. 제의 경우도 치폐가 빈번했지만, 원봉 원년 제왕이 죽고 난 뒤 제국이 없어지고 그 대신 제군과 천승군이 설치되었다. 거연한간에서 확인된 수졸들의 출신을 분류해 보면, 천하에서 소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관적이 22개 郡國에 국한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전국을 대상으로 고르게 징집된 것이 아니라 특정 지역과의 연관되었을 가능성을 높혀주는데, 중국 강소성 연운항에서 발견된 윤만한간 「不在署者」의 내용은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해 준다. 受刑者 즉 죄인을 7월 7일 돈황으로 호송한 ‘送徒民敦煌’, 역시 죄인에 대한 처벌인 ‘罰戍上谷’이 8월 13일, 9월 21,10월 5일 각각 출발한 것은, 국가가 죄인의 노동력을 상황에 따라 인위적으로 배분했을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런 추정에 대과가 없다면, 전쟁에 동원된 죄인들도 이렇게 군 단위로 배분되었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2) 병사의 신분 고조선 침공에 참여한 병졸들은 死罪를 저지른 죄인이었다. 사형수 동원이 이 전쟁에만 한정된 특수한 경우는 아니지만, 일반 수졸들이나 전문 군인들이 참여하는 것과는 전쟁의 성격에 일정한 영향을 가져올 수 있다. 전쟁에 참여하는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춘추전국시대부터 군공작제가 실시되었다. 진한대에 들어와서도 이러한 제도는 계승되었다. 진대의 규정에 의하면 “한 명의 甲首를 잡으면 爵 1급과 田 1경, 宅 9무를 사여”하였다. 전한시기의 규정은 다음과 같은 출토 간독에서 확인할 수 있다.
ⓐ各二級, 爵無過左庶長. 斬首捕虜, 拜爵各一級. 車□□□□□斬首虜二級, 拜爵各一級, 斬捕五級, 拜爵各二級, 斬捕八級, 拜爵各三級, 不滿數, 賜錢級千. ⓑ能斬捕君長有邑人者, 及比二千石以上, 賜爵各四級, 其毋邑人, 及吏皆千石以下至六百石, 賜 ⓒ虜十二人以上, 拜爵各一級, 不滿 ⓓ能産捕群盜一人若斬二人, 爵一級. 其斬一人若爵過大夫及不當 爵者, 皆購之如律 ⓔ捕從諸侯來爲間者一人, 拜爵一級, 有購二萬錢. 不當拜爵者, 級賜萬錢, 有行其購. 數人共捕罪人而當購賞, 欲相移者, 許之. 151(C299) 즉 진대와 마찬가지로 참수 및 포로의 수량에 따라 작급이 결정될 뿐 아니라(ⓐ), 참수하거나 사로잡은 자의 직급에 따라 작급이 결정되고(ⓑ), 어느 정도 이상을 참수하거나 사로잡을 경우 단체로 작을 사여하기도 하였다(ⓒ). 작을 받을 정도가 못되면 금전을 사여하였다. 전쟁은 아니지만 도적을 잡을 경우에 대해서도 자세한 규정이 마련되어 있었다.(ⓓⓔ) 작급에 따라 각종 혜택이 규정되어 있었으므로 병사들이 군공작과 금전을 얻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전공을 세우려 했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지만, 그 병사가 死罪를 지은 죄인이라면 더욱 힘을 배가했을 것이다. 운몽수호지 진률과 장가산 출토 이년율령에는 죄인이 군작으로 속죄할 수 있는 길이 규정되어 있다. ⓕ欲歸爵二級以免親父母爲隷臣妾者一人, 及隷臣斬首爲公士, 謁歸公士而免故妻隷妾一人者, 許之, 免以爲庶人. 工隷臣斬首及人爲斬首以免者, 皆令爲工. 其不完者, 以爲隱官工. 軍爵 ⓖ捕盜鑄錢及佐者死罪一人, 予爵一級. 其欲以免除罪人者, 許之. 捕一人, 免除死罪一人, 若城旦舂、鬼薪白粲二人, 隸臣妾、收人、司空三人以爲庶人. 其當刑未報者, 勿刑, 有復告者一人, 身毋有所與. 詗告吏, 吏捕得之, 賞如律. ⓗ諸詐僞自爵、爵免、免人者, 皆黥爲城旦舂. 吏智而行者, 與同罪. 진률에는 작 2급으로 예신첩인 부모 1명을 속죄할 수 있고, 또 적을 참수하여 公士 작을 얻은 자는 그 작을 반납하여 예첩인 고처 1명을 속죄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한률에는 작 1급으로 사죄를 면죄시킬 수 있는 조건을 규정한 조문 및 爵免에 대한 일반적 규정을 찾아볼 수 있다. 국가에서도 일반 백성의 징집을 피하면서도 동시에 군공작을 획득하여 죄수의 신분을 벗어보려는 욕구를 충분히 노렸을 것이다.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좌장군의 지휘를 받지 않은 병졸이 요동병사들과 함께 선제 공격을 했다가(‘先縱’) 패했던 것은 이러한 죄수들의 출신에서 비롯된 성급함과 연결시켜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또 좌장군에 속해 있는 燕과 代의 병졸들이 사납다고 한 것도 그들의 출신에서 비롯되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죄수이기 때문에 충분한 군사훈련을 받지 못하고 군률이 해이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남월을 침공할 때에 복파장군이 죄인을 이끌고 桂陽을 떠나 番禺로 진격했지만 거리가 멀어 약속한 일자보다 훨씬 늦게 도착했을 뿐 아니라 도착한 숫자도 천여 명에 불과했다고 되어 있는데, 누선장군에게도 동일한 상황이 발생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누선장군 양복을 보내 齊에서 발해로 배를 타고 나아가게 했다. 병사는 5만 명이었다. 좌장군 순채는 요동에서 나아가 우거를 토벌했다.”라는 기록 중 ‘병사는 5만 명이었다.(兵五萬人)’을 어느 쪽에 붙여 읽는가가 중요한데, 중화서국 표점본은 ‘병오만인’ 앞쪽에서 끊어 읽음으로써 좌장군의 군대가 5만 명이라고 이해한 것 같다. 뒤편에 곧바로 누선장군이 齊兵 7천명을 이끌고 먼저 왕검성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이어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병사의 규모를 앞쪽에 기술할 경우 ‘以’‘將’‘率’과 함께 기록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면, 차라리 ‘누선장군 양복의 군대가 5만 명이었다’로 읽는 편이 무난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누선장군과 함께 출발한 군대가 5만 명이었는데, 7천명만이 도착했다고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은 남월 전쟁에 동원된 죄인의 사례와 같은 이유로 도중에 군대를 잃었기 때문으로 추정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열전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부분을 찾을 수 있다. 누선장군이 齊卒을 이끌고 바다로 들어갔으나 이미 많은 수를 잃어버렸다. 그런데 먼저 우거와 전투를 벌여 곤욕을 치루고 병졸을 잃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모두 두려워 했고 장군은 마음 속으로 부끄러워 했다.(樓船將齊卒, 入海, 固已多敗亡. 其先與右渠戰, 因辱亡卒, 卒皆恐, 將心慙) 이 기록에서 ‘其’자의 앞과 뒤는 별 개의 사건이므로, 齊卒을 이끌고 바다로 나아가 많은 병사를 잃었다고(固已多敗亡) 되어 있는 것은 우거왕과 전쟁을 하기 이전에 이미 4만여 명의 병사를 잃었다고 보아도 좋은 것이다. 또 도착한 이후 나머지 7천명도 전쟁에 패해 산 속으로 여기저기 흩어졌고 한참 후에야 겨우 불러 모을 수 있었는데, 이것도 단지 숫자의 부족만이 아니라 수전 훈련이 부족한 죄수 병사의 모습이 드러난 것이라고 여겨진다. (3) 고조선의 타협 시도 원봉 2년(기원전 109년) 가을 전쟁이 발발한 이후 좌장군 소속 요동병사의 선공이 실패했고, 또 누선장군 역시 선공을 감행했다가 조선왕의 공격으로 크게 참패했을 뿐 아니라 좌장군도 패수 서쪽 군대를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으므로, 초기 전황은 한군이 크게 불리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황은 즉시 중앙에 보고되었다. 천자는 사자 위산을 보내어 직접 조선왕 우거를 설득하도록 했다. ‘兵威’에 근거해 설득했다는 것은 곧 군사적 권위로 으름장을 놓았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주변 국가에 자주 사용되었다. 고조선 만이 ‘병위’와 ‘재물’로 고조선의 주변 지역 소읍을 공격하여 항복시켰다는 것은 그 대표적 사례이지만, 그밖에 무제 초기 王恢가 동월을 공격하여 전과를 거둔 ‘병위’를 남월에게 알리고자 했으며 남월을 멸망시킨 뒤 서남이의 滇王을 설득할 때에 越을 격파했던 사실과 남이를 주멸했던 ‘병위’를 사용했다. 위산이 조선왕에게 사자로 온 시점이 전왕 설득 시점보다 더 늦은 시점이고 더욱이 봉선제사를 치룬 뒤의 자신감을 갖고 있었던 원봉 2년 가을 이후라면, 그 설득은 역시 한이 나머지 지역을 모두 정복했다는 병위로 협박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이러한 협박을 받은 조선왕은 항복의 의사를 표현했다. 그리고 그동안 저항했던 원인을 좌장군과 누선장군이 자신을 속여 살해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해명하고, 이어서 황제가 직접 사자를 보내 신의를 보여주었으니 항복을 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 부분은 사자 위산이 일을 마치고 돌아가 황제에게 보고한 내용일 것이지만, 조선왕은 곧바로 이에 준하는 행동을 보였는데, 첫째는 태자가 직접 한에 들어가 사죄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말 5천필 및 군량을 바친다는 것이었다. 조선국의 왕 입장에서는 군사적 침공을 한 장군에게 곧바로 항복을 하는 것은 목숨을 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일단 반란을 일으켰다고 규정하고 침공한 것이라면, 한의 장군으로서는 조선왕을 살해하는 것이 최종 목적이었을 것이며 조선왕이 장군에게 항복을 하더라도 그로 인해 나라를 지속시킬 수는 없었다. 남월의 경우에도 다른 자들의 항복은 받아들였지만 일단 반란을 일으킨 주모자인 남월왕 건덕과 相 여가는 끝까지 추적해서 잡아들였다. 동월의 경우에도 반란을 일으킨 동월왕 여선을 살해하면서 침공이 마감되었다. 이런 원칙은 한 내부 제후왕의 반란의 경우에도 적용되어 제후왕은 똑같이 자결 혹은 살해되고 또 그 제후국도 철폐되었다. 그러나 사자가 화의를 주재할 경우는 상황이 달라질 수 있었다. 남월 초기에 육가가 사자로 파견된 이후 외면상 칭제를 취소한 것으로 화의가 이루어졌고, 또 무제 이후에도 莊助 등의 사자가 파견되어 화친이 지속되었다. 물론 더 분명한 사례는 한과 흉노와의 관계에서 종종 확인된다. 그렇다고 조선왕이 직접 입견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남월의 경우에도 남월왕 胡가 조만간 천자를 입견할 것을 약속하였지만, 대신들이 만약 입견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며 곧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간언하여 그만두었던 사례가 있다. 그 대신 태자를 숙위시켰다. 조선왕도 유사한 방식을 취했다. 본인이 직접 입견하지 않고 태자를 보냈으며, 그 사례로 말 5천필과 군량을 보냈다. 전쟁에서 기병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해졌던 시점에서 말 5천필은 상당한 규모의 재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봉헌은 곧 그 이상의 반대급부를 예상한 것이었다. 흉노와의 관계를 비롯해 주변 국가와의 관계에서 한은 늘 몇 배의 재물을 선물로 보내어 그들을 제어하려고 했기 때문이며, 흉노의 혼야왕이 항복하였을 경우 수십거만을 사여해 준 사례도 있었다. 그런데 항복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만여 명이 무기를 들고 경계를 넘는 것을 본 한측에서 변란이 일어날까 걱정하여 무장해제를 요구했고 태자측은 이들이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귀환했다. 이런 상황은 이때에만 발생했던 특수한 상황은 아니었다. 무제 원수 2년(기원전 121년)에 흉노의 渾邪王이 항복해 왔을 때에도 동일한 상황이 벌어졌다. 혼야왕이 항복의 뜻을 보이자, 황제가 거짓으로 항복하고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표기장군 위청에게 이들을 직접 맞이하라고 하였는데, 흉노측은 漢軍을 보자 대부분 항복하려하지 않으려 했고 이에 위청이 도망가려는 자 8천명을 살해하고, 혼야왕 혼자만을 수도로 보냈다. 사실 한의 장군이나 병사 입장에서 보면 항복한 자들보다는 포로로 잡은 것이 훨씬 유리했다. 상술한 바와 같은 군작제도의 규정이 이 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다. 누선장군 楊僕이 남월에서의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그를 책망하며 지적한 잘못 중의 하나가 항복한 자를 잡아놓고 이를 포로로 잡은 것으로 처리했다는 것을 들었는데, 이것도 한군이 항복한 자들을 살해하거나 포로로 잡았을 가능성을 엿보게 해 준다. 조선왕의 태자 역시 이를 의심하고 귀환했던 것이다. Ⅴ. 고조선 내부의 붕괴 : 相과 將의 항복 (1) 大臣들의 항복 의사 일단 고조선의 타협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이상, 조선왕 우거는 강경 노선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침공한 두 장군에게 항복할 수 없었던 데다가 황제가 직접 보낸 사신에게 보여주었던 항복 의사도 한측의 의심스런 행동으로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면, 조선왕은 항전의 방향을 굳혀야했다. 나중에 조선의 상과 장군이 항복을 권유했지만 조선왕이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고조선의 정권에 참여하였던 다른 사람들은 반드시 조선왕과 입장이 같지는 않았다. 한군의 강한 군사적 압박을 목전에 둔 대신들은 조선왕과 같이 항전을 할 경우 그 결과에 대해 상당한 회의를 했을 가능성이 크다. 비록 조선의 경우는 아니지만, 당시 민월의 사례가 참조할 만하다. 건원 6년(기원전 135년) 민월왕이 한의 침공을 막기 위해 요충지를 지키고 있었을 때, 그의 동생인 여선과 相 그리고 종족들은 “한의 군대가 크고 강하다. 지금 요행히 승리하더라도 나중에 더 많은 군대가 몰려 올 터이고 나라가 멸망할 때라야 그칠 것이다.”고 모의했다. 그런데 이미 흉노를 비롯해 남월과 동월, 그리고 대부분의 서남이까지 모든 지역을 복속시켜 고조선에 군사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던 원봉 2년(기원전 109년) 의 시점이라면, 고조선이 수십 년 전 민월 여선이 예상했던 것 이상의 위협을 느꼈을 것이라고 보아도 좋다. 조선왕의 타협이 실패했을 때만 해도 조선왕과 함께 고조선을 사수할 의지가 있었겠지만, 포위된 이후 수개월의 시간이 지나가면 그들의 불안은 커져갔을 것이다. 또 대신들은 조선왕과 달리 ‘반란’의 주모자가 아닐 경우 항복하게 되면 대우가 크게 달랐다. 이미 이러한 사례는 오래 전 흉노와의 전쟁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뒤 남월과 동월에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것이었다. 특히 남월과 동월에 대한 침공이 마무리되면서 남월왕과 동월왕에 반기를 들어 한군에 협조하거나 항복한 자는 열후로 봉해졌다. 따라서 이러한 방식은 고조선의 대신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을 것이다. 설령 고조선의 대신들이 알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漢軍측에서 충분히 이를 선전했을 것이다. 사실 항복은 전쟁으로 인한 인적 물적 희생을 최소한 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또 단순히 권세를 유지할 뿐만이 아니라 재물의 유혹도 컸다. 일찍이 전한 문제시기 한과 흉노의 관계가 화친 상태에 있을 때에도 양쪽 사이에는 상황에 따라 개인적 이익을 얻기 위해 항복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로는 문제 16년(기원전 164년) 6월 흉노의 상국이 항복해 와서 그들에게 1237호와 1432호를 각각 봉해주었고, 2년 뒤 양측이 화친을 체결하며 이렇게 항복한 자들을 재물로 招誘해서 ‘益衆廣地’하는 행동을 중단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다시 경제시기부터 흉노인들이 대거 한에 항복을 하기 시작했고, 한에서는 이들에게 적게는 400호 많게는 만호를 봉해주었다. 흉노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비단을 비롯한 한의 재물을 탐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夜郞 주변의 여러 소읍들은 한의 繒帛을 탐해서 한에게 항복하고 군을 설치토록 했다. 재물을 매개로 항복과 복속이 이루어지는 것은 반드시 한과 주변국 사이에 국한되지도 않는다. 남월의 경우, 일찍이 조타는 주변에 있는 민월과 西甌와 駱에게 재물을 주어 복속시켰으며, 더 멀리 있는 야랑에서 同師에 이르기까지의 지역도 마찬가지로 재물로서 복속시켰다. 그러고 보면 멀리서 그 사례를 찾을 필요도 없다. 고조선 스스로가 이러한 방식으로 주변의 여러 세력들을 복속시켰기 때문이다. 즉 위만조선 초기 滿은 兵威와 재물로서 주변의 소읍들을 침공하고 항복시켰으며, 그리하여 진번과 임둔이 모두 복속해 왔던 것이다. 이렇듯 목전의 군사적 상황이 급박하고 자신들에게 재물과 봉후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상황에서 고조선의 대신들은 한측에 항복의 의사를 밝히게 되었다. 다만 전술한 바와 같이 조선왕이 이를 동의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이들은 이 과정을 몰래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陰間使人私約降樓船’) 그리고 그 항복의 대상은 좌장군이 아니라 누선장군이었다. 바로 얼마 전에 조선왕의 항복 시도가 실패했던 것이 곧 좌장군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것일 뿐 아니라, 이 사건 이후 좌장군의 군대는 패수를 건너 매우 사나운 기세로 계속 승리를 거두면서 교만해졌기 때문에 좌장군과의 타협은 순조롭지 못할 것이기 뻔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나중에 개시된 좌장군의 제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左將軍亦使人求間郤降下朝鮮, 朝鮮不肯) (2) 누선장군과 좌장군의 알력 물론 누선장군과의 교섭 과정은 그다지 쉽게 해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전선에 배치된 장군은 전권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항복한 자들에 대한 신분 보장과 물질적 보상에 대한 구체적 논의를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했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의 상황판단도 필요했다. 무제 초기 아직 남쪽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경우 민월을 토벌하러 출격한 大行 王恢가 민월왕이 살해되자 ‘편의’대로 전쟁을 종결시켰지만, 본격적인 남월 침공시기에는 동월의 원조를 황제가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전선 장군이 이들에 의존했다는 것이 죄목이 되기도 했던 것처럼 신중한 판단을 해야 했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사정이 있었다. 누선장군 양복에게는 특별한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고조선에 대한 침공 과정을 적은 일련의 일차 자료를 훑어보았던 사마천은 마지막 太史公曰 부분에서 본문에는 적지 않았던 부분을 간단히 언급했다. 누선장군이 남월 침공 때 번우에서 저질렀던 실수를 반성하기 위해 행동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정반대로 의심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悔失番禺, 乃反見疑) 번우에서의 상황은 이렇다. 당시 누선장군은 수만명이라는 우세한 병력으로 유리한 곳을 택해 번우를 포위하고 있었던 반면, 함께 전쟁에 나섰던 복파장군은 오는 도중에 병사를 잃어버려 그 병력이 천여명에 불과했다. 전쟁의 결말은 너무 분명해 보였다. 누선장군은 화공 정책을 펴서 번우성을 공격하여 가능한 빠른 시간에 번우성을 항복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성을 공격할 능력도 갖지 못했던 복파장군은 이와는 정반대의 방법을 사용했다. 그는 번우성으로 사신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고 항복한 자에게는 다시 인수를 주어 성으로 들여보내 또 다른 사람들의 항복을 이끌어냈다. 누선장군이 공격을 할수록 남월인은 복파장군에게로 항복해갔고, 결국 성 전체가 복파장군에게 항복했다. 나중에 누선장군은 우세한 병력으로 얻을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잃었다. 그 대신 전쟁 초반에 병사를 잃었던 복파장군은 항복을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기사회생하여 익봉이 되기까지 했다. 누선장군은 장량후에 봉해지긴 했지만, 정작 그가 다음 번 동월전쟁에 참여하기 전 황제가 그를 책망한 글에는 ‘그대가 남월전쟁에서 이룬 공은 그저 먼저 石門과 尋陜을 깨뜨렸기 때문일 뿐인데 어찌 잘난 척 하는가’라고 했다. 사실 사기와 한서 후표에 기록된 그의 공적은 ‘적을 물리치고(推鋒卻敵) 견고한 성을 무너뜨렸다(陷堅)’이지만, 이것도 곧 석문과 심협을 공략한 군공이지 남월성의 공격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누선장군은 이번 조선 침공에서 초반에 이미 4만여 병사를 잃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전공을 세워야 했다. 그런데 이 상황은 바로 얼마 전 자기와 함께 전쟁을 치루었던 복파장군과 같은 상황과 너무도 유사했다. 한대 군공 보고서에는 항상 전쟁에서 잃은 병사와 그 대신 획득한 적군을 비교해서 전공을 결정했다. 가령 표기장군 위청은 원수 2년 여름에 흉노와 전쟁에서 2500명의 투항자와 3만 2천의 斬首虜 전공을 세웠던 것과 함께 자신의 군대의 3/10를 잃었다는 것이 계산된 뒤 益封되었다. 누선장군은 군대의 6/7을 잃은 셈이었으므로 만약 충분한 전공이 없다면 그가 귀환한 뒤 엄중한 형벌을 받아야 할 것임은 너무도 분명했다. 그렇다고 충분한 병력을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면 항복을 유인하는 방식이 남아있을 뿐이다. 남월 전쟁에서 바로 복파장군의 사례가 있지 않은가. 이런 상황 속에서 누선장군에게는 시간이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리 많은 시간을 끌더라도 더 많은 투항자를 받아들여야 했다는 것이다. 우세한 병력을 갖고 있는 좌장군 입장에서 보면 시간을 늦출 필요가 없었다. 그대로 시간이 지나가면 자칫 누선장군에게 모든 공을 넘겨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누선장군에게 함께 공격을 제의했지만 번번히 무시당했다. 또 자신도 항복을 제의해 보았지만, 이미 실패한 터였다. 그는 본래 侍中이었다.(左將軍素侍中) 시중은 황제 곁에서 황제를 모시는 역할을 담당하는 자였다. 무제시기에 들어와 시중을 맡았던 자들은 嚴助의 사례에서 잘 드러나듯이, 주변지역의 침공을 여러 가지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주저하는 대신들을 비난하고 황제의 주변국 침공 의도를 적극적으로 변호하였다. 좌장군 순채도 동일한 이유로 좌장군에 발탁되었던 것으로 판단되는데, 황제의 ‘幸’을 받았다는 것은 이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에게는 황제에게 내보일 분명한 전공이 유달리 더 필요했을 지도 모른다. 앞서 조선왕이 항복 의사를 밝혀왔을 때에 변란을 의심해서 일을 그르친 것도 어찌 보면 그의 이런 조급증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 적어도 사마천이 참조했던 공적 보고서에는 이 점을 주목했음에 틀림없고, 그 때문에 사마천도 이를 열전에 옮겨 놓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함부로 공격을 할 수도 없었다. 좌장군은 고조선이 누선장군과 몰래 연락을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그들이 시간을 끌고 항복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누선장군과 고조선이 함께 반란을 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판단하였다. 그 때문에 자칫 섣불리 공격을 했다가 역공을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3) 고조선의 멸망과 그 시점 이렇게 시간이 오래 흘러가자(故久不決), 무제는 제남태수 公孫遂에게 편의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전권을(有便宜得以從事) 주어 조선성으로 파견하였다. 그가 이르자, 좌장군은 공손수를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한대의 장군은 전쟁에 출정한 이후 독립적인 군사권을 갖고 있었지만, 황제의 부절을 갖고 도착한 경우에는 그의 명령에 따라야 했다. 공손수는 부절로 누선장군을 좌장군 진영으로 불러 그를 체포하고, 그에게 주어진 전권으로 두 군대를 하나로 합쳤다. 군사권을 한 손에 쥔 좌장군은 이제 거리낄 것 없이 고조선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누선장군과 항복 조건을 논의해 왔던 조선의 대신들은 크게 당황했다. 오랫동안의 타협이 수포로 돌아갔을 뿐 아니라, 당장 한군의 전면적 공격을 맞닥뜨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朝鮮相 路人과 相 韓陰, 니계상 參, 將軍 王唊이 모의하여 상황의 급박함을 인지하고 누선장군이 사로잡힌 이상 좌장군에게나마 항복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번 결정은 더 이상 뒤로 늦출 수 없었다. 이들 중 한음, 왕겹, 로인이 먼저 도망하여(亡) 한에 항복하였다. 도망하는 도중에 노인은 길에서 죽었다. 그리고 이어서 원봉 3년(기원전 108년) 여름 니계상 참이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를 살해하고 한군 진영으로 來降했다. 일반적으로는 국왕의 살해는 곧 그 국가의 멸망과 일치한다. 그런데 고조선의 경우에는 특수한 상황이 발생했다. 국왕은 살해되었지만, 국도가 함락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부 반란이 다시 일어났던 것이다. 조선왕의 대신이었던 成己가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그 뒤 좌장군은 조선왕 우거의 아들인 長䧍과 相 路人의 아들인 最로 하여금 백성들을 설득시키고 成己를 살해하도록 했다. 그리고 고조선의 전쟁은 막을 내렸다. 최근 조법종 교수는 고조선의 멸망과정의 마지막 단계 중 조선왕 우거의 살해 시점과 성기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최종적으로 평정된 시점의 차이에 주목해 매우 흥미로운 견해를 제시했다. 이 문제는 멸망의 시점은 물론 고조선의 성격 등과 관련된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므로 이를 검토해 두고자 한다. 조 교수가 주목한 사료는 그동안 그다지 관심을 덜 두었던 사기와 한서의 공신후표였다. 한에 투항한 고조선의 相과 將은 모두 나중에 한으로부터 열후로 봉해졌는데 이들이 봉해진 시점과 이유, 그리고 장소가 사기 建元以來侯者年表와 한서 景武昭宣元功臣侯表에 기록되었다. 이 표는 전한시대의 열후를 봉후한 시간순서에 따라 열거해 놓았다. 그런데 열전에 따르면 우거왕의 살해와 반란의 진압 사이에 거의 시간적 격차가 보이지 않지만, 이 표에는 우거왕 살해의 공적으로 봉후된 澅淸侯 참의 봉후 시점인 원봉 3년 6월 丙辰과 성기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공적을 세워 봉후된 幾侯 長䧍과 열양후 最의 봉후 시점인 원봉 4년 3월 사이에는 9개월 가량의 간격이 있다. 그러므로 원봉 3년(기원전 108년)에는 우거왕이 살해되어 낙랑군이 설치되었을 뿐, 왕검성은 원봉 4년(기원전 107년)까지 함락되지 않은 채 지속되었고 따라서 고조선의 멸망은 원봉 4년(기원전 107년)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필자는 공신후표의 중요성에 동감한다. 사기의 편찬과정을 연구한 자들은 일차 자료로서의 성격을 그대로 옮겨 놓은 표의 사료적 가치를 중시한다. 적지 않은 부분이 먼저 작성된 표에 의거해서 기록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일단 여기서 일일이 모두 열거할 수 없지만, 본기나 열전에서 간단히 언급되었던 사건들이 표의 순서를 참조해 다시 정리하면 그 사건의 진행 과정을 명료하게 판단할 수 있는 것도 많다. 그렇지만 조 교수 주장의 타당성을 논하기 전에 먼저 이 표의 제작 과정에 대해 언급해 두어야 할 부분이 있다. 이 표는 열후를 봉한 일자를 기록한 것이지, 열후가 공을 세운 일자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기본적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두어야겠다. 사기의 표에서는 ‘某年某月某日, 侯某元年’의 형식으로, 한서의 표에서는 ‘某年某月某日 封’의 형식으로 그 시점 이후 열후가 되었다고 쓰여 있다. 공을 세운 일자와 이 표에 기록된 봉후 일자 사이에는 일정한 시간적 격차가 있을 수밖에 없다. 사기 三王世家에는 제후왕을 봉해주는 과정이 실려 있는데, 구체적인 날짜가 기록된 실제 조칙이 그대로 실려져 있어서 그 순서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전체적인 내용은 신하들이 무제의 세 아들을 제후왕으로 봉할 것을 주청한 것이다. 열전은 원수 6년(기원전 117년) 3월 28일(乙亥) 尙書令 光이 올린 상소문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상소를 올리기 이전에 이미 승상 莊靑翟과 어사대부 張湯, 太常 趙充, 大行令 李息, 太子少傅 任安이 주청한 사실이 있고, 황제가 그 내용을 어사에게 하교해 처리하도록 명령했으며, 그 명령을 받아 상소한 자들이 다시금 公孫賀 등 여러 명과 상의한 끝에 다시 상소를 했다고 되어 있다. 이 3월 28일의 상소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상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래서 다시 3월 29일 승상 장청적과 어사대부 장탕이 상소를 올렸으며, 황제는 그 내용을 수정하도록 명령했다. 4월 1일(戊寅)에 승상 장청적과 어사대부 장탕은 또 다시 제후왕을 봉해줄 것을 주청했지만 이 상소문은 궁중에 계류된 상태로 몇 일을 머물렀다. 4월 6일(癸未)에 다시 상소문을 올리고 드디어 허락을 받았다. 4월 19일(丙辰)에 구체적인 책봉 날짜와 봉국의 이름을 묻는 상소가 이뤄지고, 4월 20일(丁酉)에는 의식 절차를 상소했고, 4월 26일(癸卯)일에 조서를 내려 하달했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는 4월 28일(乙巳)에 정식으로 제후왕을 책봉하였다. 사기의 제후왕표에도 4월 28일(乙巳)로 기록되었다. 3월 28일에 상소문이 올려진 뒤 책봉이 이루어진 시점까지는 1개월이 흘렀지만, 첫 번째 상소문이 올려지기 전에 주청한 것까지 포함하면 약간 시간이 더 소요되었을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문제를 상소했던 사람들 중에 태자 및 제후왕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직책의 신하가 포함되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와 관련한 충분한 사전 대책 회의가 선행되었을 것이므로, 논의의 전체적인 시간은 더 오래 걸렸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의외로 빠른 시간 내에 봉후되는 경우도 있다. 사기 衛將軍驃騎열전에 의하면 원수 2년(기원전 121년) 여름에 곽거병이 흉노를 크게 격파했다. 그리하여 황제는 곽거병 외에 趙破奴, 高不識, 僕多의 공적을 상세히 열거한 뒤 이들을 익봉하거나 봉후했는데, 후표에는 그 봉후의 시점을 원수 2년(기원전 121년) 5월로 적고 있다. 바로 근처에서 벌어진 앞서 봄의 전쟁과 이어져 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 여름은 4월일 가능성이 크지만, 그래도 기껏해야 한달 정도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따라서 군공을 세운 시점과 봉후 시점의 시간적 간격이 그리 크지 않다고 볼 수 있다. 한대의 문서행정의 규정에 의하면 관서에 도착한 문서 처리를 계류할 경우 엄중한 문책을 받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군공이 중앙 부서에 도착한 즉시 봉후 관련 업무가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일단 봉후 관련 업무는 이미 상세히 규정된 조문에 의해서 결정되었을 것이다. 한대 율령에 군공과 관련된 賜爵 규정이 있다는 것은 전술한 바와 같지만, 한대 돈황에서 발견된 甘肅 敦煌 酥油土 漢簡에는 군공에 의해 봉후되는 내용도 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진률에는 군공을 세웠는데 작을 받기 전에 사망한 경우를 규정한 내용도 있다. 따라서 이러한 관련 규정을 숙지하고 있는 전문 관리들에 의해 신속히 처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이와는 달리 시간이 어느 정도 소요되는 경우도 보인다. 먼저 원수 4년(기원전 119년) 봄에 위청과 곽거병은 흉노의 선우와 대규모 전쟁을 치렀고 그중 곽거병의 군대는 대대적 승리를 거두었는데, 열전에는 흉노왕 및 장군들을 참획한 숫자를 일일이 열거한 뒤 그들의 봉후 사실을 기록했다. 그런데 표에는 그 봉후의 시점을 원수 4년 6월로 적어 놓았다. 전쟁이 봄에 일어났다면 최소한 3~4개월의 격차가 생긴 셈이다. 그런데 열전에는 전쟁과 봉후 사실 사이에 ‘軍旣還, 天子曰’이라는 부분을 삽입해 두었는데, 이 문구가 군공과 봉후의 시간적 차이를 설명해 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 이 경우 최종적인 군공 판단은 그 전쟁이 일단 종료하고 귀환한 뒤 시작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도 한다. 사기 위장군표기열전과 한서 무제기에는 똑같이 원수 2년(기원전 121년) 가을에 흉노의 혼야왕이 한에 투항했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사기 위장군표기열전에는 이 사건을 기록한 뒤 혼야왕과 그를 따라 함께 투항해 온 자들을 열후에 봉했다고 적었다. 그런데 후표는 이것과 달리 기재해 놓았다. 먼저 사기 건원이래후자연표에는 혼야왕은 원수 2년 7월에 봉후되었고, 나머지 함께 투항해 온 자들은 모두 이보다 1년 뒤인 원수 3년(기원전 120년) 7월에 봉후되었다고 되어 있다. 한편 한서 후표에는 혼야왕을 비롯해 모든 경우가 원수 3년(기원전 120년) 7월에 봉후되었다고 기록했다. 사기와 한서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어느 한 편에 오자 가능성을 인정해야겠지만, 어느 경우이든 혼야왕과 함께 투항한 자들에 대해서는 항복 시점으로부터 무려 1년이나 지난 뒤에야 봉후되었던 것은 동일하다. 그 구체적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투항 이후 속국이 설치되었으므로 이 모든 수속이 모두 끝난 뒤 봉후 논의가 시작되었을 가능성, 또는 혼야왕 이외의 투항자에 대한 차별적 대우를 둘러싸고 논의가 지연되었을 수도 있다. 한편 후표와 다른 열전 및 본기의 내용이 완전히 모순되는 경우도 있다. 가령 흉노의 동호왕이 투항했던 시기를 열전에서는 경제 중6년(기원전 144년)이라고 기록한 반면, 후표에서는 이를 중5년(기원전 143년)이라고 기록했다. 또 본기에는 경제 중3년(기원전 147년) 봄에 흉노왕 2인이 투항해 왔다고 기록되어 있는 반면, 후표에는 12월에 봉후되었다고 되어 있다. 결국 현재로서는 군공과 봉후 시점 사이에 어느 정도의 시간적 격차가 있었던 것인지 단정하기 힘들다. 매 상황마다 특수한 조건이 작용했다고 보는 편이 무난할 것 같다. 다만 확실한 것은 후표에 나온 봉후의 시점을 곧바로 군공의 시점으로 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고조선의 相과 將의 경우 한음, 왕겹의 봉후 시점은 원봉 3년(기원전 108년) 4월로 모두 같다. 그리고 參은 원봉 3년(기원전 108년) 6월이다. 열전에 기록된 순서도 같다. 이들이 함께 모의를 했지만 먼저 한음과 왕겹 그리고 노인이 함께 투항해 왔고 그 뒤에 이어서 참이 우거왕을 살해했다고 적었다. 노인은 오는 도중에 죽었기 때문에 봉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열전에서 한음, 왕겹, 노인의 투항과 참의 우거왕 살해를 구분했는데, 후표에서 역시 이를 2개월의 차이로 봉했던 것은 매우 중요하다. 사건의 발생과 봉후의 시점을 일치할 수는 없어도, 전투가 완전히 종식되고 난 뒤에 군공이 결정되었던 다른 사례와는 달리 그 때마다 봉후가 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다만 열전에서 한음, 왕겹, 노인의 투항을 설명하고 난 뒤에야 ‘원봉 3년 여름’이라는 시간을 명시했던 것은 이 세 사람의 투항이 여름 이전에 발생한 것이라는 점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세 사람의 투항했던 봄과 봉후가 이루어진 4월 사이에는 약간의 시간적 차이가 있다. 전황이 보고되고 봉후 논의가 처리되는 시간일 것이다. 따라서 우거왕 살해도 니계상 참이 봉후되는 시점보다 약 1개월 정도 앞섰을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성기에 의한 반란이 언제 종료되었는가이다. 앞서의 경우를 참조하면 반란의 종식과 봉후 시점 사이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동일한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이므로 전황 보고에 비슷한 시간이 걸렸을 것으로 볼 때 역시 1개월 정도의 차이를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기의 반란은 원봉 4년(기원전 107년) 3월보다 약간 이른 시간에 종식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조금 더 신중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각종 특수한 상황이 얼마든지 개입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혼야왕의 사례를 보면 혼야왕과 함께 투항한 자들에 대한 봉후가 많이 늦춰졌는데, 이런 경우와 관련된 규정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성기의 반란을 마감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우거왕의 아들 長䧍과 상 노인의 아들 最의 경우도 어느 정도 복잡한 사정이 개입되었을 것 같다. 가령 성기의 반란을 종식시켜 봉후된 자는 바로 조선왕 우거의 아들이었다. 반란의 주모자의 아들에게 그대로 군공을 인정해서 열후로 봉해주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담당 관리 혹은 조정 회의에서 많은 논의를 거쳤을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해서 후표에 기록된 長䧍과 最의 봉후 사유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장극에 대해서는 ‘圍朝鮮, 降’이라고 되어 있고, 최에 대해서는 ‘路人, 漢兵至, 首先降, 道死, 其子侯’라고 되어 있다. 이들 두 사람은 성기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왕검성 안에 있었던 것 같다. 성 바깥에서 성내의 民들을 설득하는 것은 물론, 반란의 주모자를 살해하는 것은 그다지 현실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극의 봉후 이유에 성기를 살해했다는 등의 내용이 기록되지 않고 최종적으로 성을 포위했을 때에 항복했다는 식으로 서술했다. 또한 만약 최가 아버지인 노인과 함께 한군측에 도착했었다면, 봉후를 이렇게 늦출 이유가 없다. 당시 한대 율령에는 마땅히 작을 받아야 할 자가 사여하기 전에 죽게 될 경우 후계자에게 사여한다는 상세한 규정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규정에 따를 경우 왕겹과 한음과 거의 동시에 봉후받아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려 원봉 4년(기원전 107년) 3월에 사여된 것은 곧 그가 장극과 함께 왕검성에 머물러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그 역시 봉후를 받는 과정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아버지의 작을 받을 자격은 있지만, 한동안 반란세력과 행동을 같이 한 셈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이 마지막에 성기를 죽이고 투항해 온 공적이 있었기 때문에 봉후를 둘러싸고 설왕설래가 오갔을 것이겠지만, 관리들의 의견이 갈라질 경우 관례상 봉후의 시점은 오랫동안 지체될 가능성이 크다. 장극과 최가 동시에 성기 반란 진압에 공을 세우고 항복을 했어도, 장극의 봉후 시점과 최의 봉후 시점 사이에도 불과 며칠이지만 차이가 난다는 점도 유의해 둘 필요가 있다. 남월의 경우에도 유사한 사례가 있다. 누선장군 양복과 그 부하가 남월의 수도인 번우를 함락해서 봉후된 시점이 원삭 6년(기원전 123년) 3월인데 반해, 번우성을 빠져 나간 남월왕 건덕과 여가가 잡힌 공로로 봉후된 시점은 각각 원삭 6년 7월과 원봉 원년(기원전 122년) 윤월이었다. 이것도 봉후의 시점만을 보면, 마치 남월왕은 번우성 함락 이후 4개월만에 잡혔고 상 여가는 1년 10개월만에 붙잡힌 셈이 된다. 그러나 한서 무제기에 따르면 원삭 6년 봄조에 ‘황제가 汲新縣 中鄕에 도착했는데, 마침 여가의 목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을 획가현으로 했다.’고 한다. 이 기록의 가치를 일방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한, 여가는 원삭 6년 봄에 잡혔다는 것이며 곧 번우를 함락한 이후 곧바로 잡았다는 셈이 된다. 사실 남월열전에도 번우성이 함락되자 마자 항복한 자들을 취조해서 남월왕과 여가가 수백명을 데리고 빠져나간 곳을 알아냈다고 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후표에 여가를 잡은 孫都를 봉후한 시점이 1년 10개월이나 지난 원봉 원년 윤월이 된 것은 별도의 사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손도의 봉후 이유에 대해서는 ‘본래 南越郞이었는데 漢兵이 번우를 격파했다는 사실을 듣고 복파장군을 위해 남월상 여가를 잡은 공로로 후에 봉해졌다.’고 되어 있다. 아마 南越郞이라는 특별한 출신과 연관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필자는 성기의 반란이 일어난 뒤 이를 종식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幾侯 長䧍과 涅陽侯 最의 봉후 시점이 우거왕 살해 이후 9개월 가량이나 지체되었다는 점을 주목한 조법종 교수의 지적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곧 성기의 반란이 9개월 이후에 종료되었다고 결론을 내리기에는 성급하다고 생각한다. 원봉 3년 여름 우거왕의 살해 이후 반란이 어느 정도 지속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원봉 3년 내에 반란이 종식이 되고 난 뒤 봉후와 관련된 논의가 진행되었을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는 한 곧바로 원봉 4년(기원전 107년)까지 성기의 반란이 지속되었다고 단언할 수 없다. 더욱이 고조선의 멸망이 이때라는 주장은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다. 조법종 교수는 또 한서 지리지를 비롯한 사료에 의하면 낙랑군은 원봉 3년에 설치된 것이 분명한데, 성기의 반란이 원봉 4년까지 지속되었다면 이는 곧 성기가 반란을 일으킨 곳이 낙랑군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고, 이 논점을 확대시켜 낙랑군이 설치된 곳은 고조선의 왕검성이 아니라고 보았다. 조 교수는 한서 지리지 기록과 사기와 한서의 후표 기록은 사료적 가치를 인정한 반면, 조선열전에서 성기의 반란이 종료된 후 ‘조선을 평정했고 그리고 4군을 설치했다.’는 기록이나 한서 무제기의 ‘원봉 3년에 사군을 설치했다’는 기록의 가치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선택적으로 사료의 가치를 결정하려면 충분한 근거가 마련되어야 한다. 적어도 다른 부분에서는 그런 사료적 결함이 드러나지 않는데 이것만을 문제시 삼을 수는 없다. 차라리 이 모든 사료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방식이 더 유효하다. 즉 앞서 필자가 입증한 대로 성사의 반란이 반드시 원봉 4년까지 지속되었을 필요가 없다면 고조선의 멸망은 원봉 3년으로 보는 것이 모든 자료를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 방식이다. Ⅵ. 결론 필자는 사기 조선열전이 한의 고조선을 침공해서 멸망시킨 이후 전공을 판단하기 위한 보고서류의 일차 자료가 기초가 돼서 작성된 것으로 보고, 그 내부에서 일관된 논리를 찾으려고 했다. 즉 한이 구성한 고조선 침공 기록을 재구성했다. 그 결과 조선열전에서 그동안 간과했던 많은 부분을 논리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었다. 사실 전쟁 보고서류는 그것이 사실인지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일단 내부적 논리는 갖추어져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기존의 고조선 연구는 조선열전 중에 필요한 부분만을 취사선택해서 고조선이 오랜 기간 저항했다는 점을 유난히 강조했다. 그리고 그것은 고조선의 강한 국력에 의한 것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한이 작성한 사료를 세밀히 살펴본 결과, 한에서는 침공 군대의 자체 내부에서 발생한 문제라는 각도에서 이를 정리했었다. 필자가 본고에서 살펴본 것은 완전한 의미의 ‘역사적 사실’이 아닐 수 있다. 전쟁을 도발하고 또 그 전쟁에서 승리한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정리된 내용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패자의 구체적 정황, 또 전쟁이 발발한 초기 수전을 비롯한 여러 차례의 패배 등은 대부분 빠져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사료가 한에 의해 정리된 것인 이상, 무엇보다 먼저 그들의 논리를 정확히 이해해야 하는 것이 순서이다. 이 점에서 필자는 철저히 한의 입장에서 사용된 기록, 특히 조선 이외의 다른 지역에 대한 열전 그리고 그밖에 본기와 표를 사용했다. 그리하여 외신 개념의 가변성, 반란의 서술 방식, 병사의 출신지와 신분, 항복과 복속의 유형, 누선장군과 좌장군의 개인적 경험, 고조선 멸망 시점에 대한 검토 등의 주제에 대해 개인적 의견을 제시해 보았다. 질정을 바란다. 「漢이 구성한 고조선 멸망 과정-《사기》조선열전의 재검토」를 읽고
윤용구(인천시립박물관) 발표 잘 들었습니다. 사기 조선열전이 漢의 전쟁공적 보고서류에 기초하여 구성되었으리라는 전제아래 고조선의 멸망 과정을 세밀하게 복원하였다고 생각됩니다. 그동안 성립과 성장과정에 대한 규명에 치우쳐 소멸에 이르는 과정을 담은 사기 조선열전에 대한 문헌적 관심은 소홀하였다고 생각됩니다. 한대사 전공자의 시각에서 사료를 종횡으로 검토하여 복원한 멸망의 제문제는 이 분야 이해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 봅니다. 발표문은 고조선 멸망의 모든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라, 사기 조선열전의 내용을 재검토, 음미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토론자로서 특별히 이의를 제기할 것이 많지 않습니다. 다만 몇가지 문제에 대한 약간의 생각을 나열해 보는 것으로서 토론에 대신하겠습니다. 첫째, 2장 3절에서 언급하신 ‘外臣制’ 의 문제입니다. 한이 고조선 침공의 명분으로 外臣으로서의 의무를 이행치 않았다는 점이 지적되어 왔습니다.(김한규, 1980 ; 권오중 1992) 곧 고조선 침공은 漢의 고조선에 기대한 外臣의 역할을 복원하려던 것이고, 낙랑군의 설치는 과거 외신의 기능을 낙랑군에 부과한 형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발표를 침략의 명분이 된 고조선의 外臣으로서의 의무는 외신으로 책봉되던 전한초(기원전 192-191경; 荊木計男, 1985))부터 있었다기보다는 침략에 임박한 武帝代 새로이 요구, 강제되었다는 설명입니다. 전한대 內ㆍ外臣의 제도적 보증이라 할 公印의 확정이 한무제 즉위 20년(기원전 121년)이후 라는 연구(阿部幸信, 2005)와도 부합되는 卓見이라고 생각됩니다. 둘째, 3장 2절에서 서술하신 ‘반란’의 시점과 泰山封禪을 연관지은 부분입니다. 곧 기원전 108년의 고조선 침공은 그에 앞선 기원 110년(발표문에는 기원전 122년으로 되어 있음) 泰山封禪에서 제시된 ‘四宇之內, 莫不爲郡縣, 四夷八蠻, 咸來貢職’이라는 봉선이념의 이행 결과라는 것입니다. 고조선 정벌의 시점을 對匈奴政策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 온 (蔡致容, 1998)것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어 주목됩니다. 이왕에도 고조선의 군현화를 泰山封禪과 연관하여 이해 해온 바 있는데(齋藤實, 1989), 무제대의 전체적인 대외정책을 고려하면서 고조선 침공을 검토해야 한다는 점을 제기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셋째, 4장 2절에서 제기한 고조선 침공에 동원된 ‘兵五萬人’의 소속 문제입니다. 곧 고조선 침공의 개시를 알리는 “ 天子募罪人擊朝鮮.其秋,遣樓船將軍楊僕從齊浮渤海;兵五萬人,左將軍荀彘出遼東:討右渠.” 기록 가운데 밑줄친 병사 5만인이 중화서국 표점본과는 달리 누선장군 양복이 이끈 수군에 해당한다는 해석입니다. 이것이 좌장군의 소속이라면 밑중 그은 문장 앞뒤로 “以, 將. 率” 등의 표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누선장군 양복이 바다를 건너 고조선에 도달할 때에는 5만명 가운데 겨우 7천명이 남았다고 설명하였습니다. 5만명의 소속을 좌장군이 아닌 누선장군으로 설명한 견해는 전에도 적지 않았는데(李 丙燾, 1976, 사기열전강독회, 1989), 도착전 4만 3천명을 잃어버렸다는 설명은 전에 없는 새로운 견해라 하겠습니다. 발표문 전체에서 제기한 의미에 비하면 사소한 문제이겠습니다만, 누선장군이 출발한 산동에서 수일이면 도달할 대동강 하구까지 오는 동안 대분분의 병력이 소실되었다는 것은 좀더 보완 설명이 필요하다고 보입니다. 사기 조선열전 말미에 기재된 태사공자서에 누선장군을 설명하면서 언급한 “樓船將狹,及難離咎”의 將狹에 대해 集解에는 徐廣의 언급을 인용하여「言其所將卒狹少」라 하여 누선이 거느린 병사의 협소함을 지적한바 있습니다. “兵五萬人”전후 문맥이 매끄럽지많은 것은 분명한데, 현존 판본의 내용을 司馬遷 저술 당시 그대로의 문장으로 보고 미세한 분석을 하는 것은 보다 많은 검토를 요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인용문헌】 齋藤 實, 1989「前漢武帝の對外政策-兩粤ㆍ西南夷ㆍ朝鮮の郡縣化と泰山封禪」『日本大學學 藝術學部紀要』18, pp.206〜226. 李 丙燾, 1976「衛滿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博英社, p.88. 荊木計男, 1985「衛滿朝鮮王冊封について-前漢帝國遼東郡からのアプロ-チ」『朝鮮學報』 115 사기열전강독회, 1989 『이야기 사기열전-하』55. 조선열전 (청아출판사), p.55. 齋藤 實, 1989「前漢武帝の對外政策-兩粤ㆍ西南夷ㆍ朝鮮の郡縣化と泰山封禪」『日本大學學 藝術學部紀要』18, pp.206〜226. 蔡 致容, 1998「古朝鮮의 滅亡原因-漢의 對匈奴政策과 關聯하여 」중앙대 석사학위논문 阿部幸信, 2005「漢帝國の內臣-外臣構造形成過程に關する一考察」『歷史學硏究』784, 【史記 115, 朝鮮列傳】 朝鮮王滿者,故燕人也.自始全燕時 嘗略屬真番、朝鮮,為置吏,築鄣塞.秦滅燕,屬遼東外徼.漢興,為其遠難守,復修遼東故塞,至浿水為界,屬燕.燕王盧綰反,入匈奴,滿亡命,聚黨千餘人,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鄣,稍役屬真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都王險. 會孝惠、高后時天下初定,遼東太守卽約滿為外臣,保塞外蠻夷,無使盜邊;諸蠻夷君長欲入見天子,勿得禁止.以聞,上許之,以故滿得兵威財物侵降其旁小邑,真番、臨屯 皆來服屬,方數千里. 傳子至孫右渠,所誘漢亡人滋多,又未嘗入見;真番旁衆國欲上書見天子,又擁閼不通.元封二年,漢使涉何譙諭右渠,終不肯奉詔.何去至界上,臨浿水,使御刺殺送何者朝鮮裨王長,卽渡,馳入塞,遂歸報天子曰「殺朝鮮將」.上為其名美,即不詰,拜何為遼東東部都尉.朝鮮怨何,發兵襲攻殺何. 天子募罪人擊朝鮮.其秋,遣樓船將軍楊僕從齊浮渤海;兵五萬人,左將軍荀彘出遼東:討右渠.右渠發兵距險.左將軍卒正多率遼東兵先縱,敗散,多還走,坐法斬.樓船將軍將齊兵七千人先至王險.右渠城守,窺知樓船軍少,即出城擊樓船,樓船軍敗散走.將軍楊僕失其,遁山中十餘日,稍求收散卒,復聚.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未能破自前. 天子為兩將未有利,乃使衛山因兵威往諭右渠.右渠見使者頓首謝:「願降,恐兩將詐殺臣;今見信節,請服降.」遣太子入謝,獻馬五千匹,及饋軍糧.人衆萬餘,持兵,方渡浿水,使者及左將軍疑其為變,謂太子已服降,宜命人毋持兵.太子亦疑使者左將軍詐殺之,遂不渡浿水,復引歸.山還報天子,天子誅山.左將軍破浿水上軍,乃前,至城下,圍其西北.樓船亦往會,居城南.右渠遂堅守城,數月未能下. 左將軍素侍中幸,將燕代卒,悍乘勝,軍多驕.樓船將齊卒,入海,固已多敗亡;其先與右渠戰,因辱亡卒,卒皆恐,將心慙,其圍右渠,常持和節.左將軍急擊之,朝鮮大臣乃陰閒使人私約降樓船,往來言,尚未肯決.左將軍數與樓船期戰,樓船欲急就其約,不會;左將軍亦使人求閒郤降下朝鮮,朝鮮不肯,心附樓船:以故兩將不相能.左將軍心意樓船前有失軍罪,今與朝鮮私善而又不降,疑其有反計,未敢發.天子曰將率不能,前(及)[乃]使山諭降右渠,右渠遣太子,山使不能剸決,與左將軍計相誤,卒沮約.今兩將圍城,又乖異,以故久不決.使濟南太守公孫遂往(征)[正]之,有便宜得以從事.遂至,左將軍曰:「朝鮮當下久矣,不下者有狀.」言樓船數期不會,具以素所意告遂,曰:「今如此不取,恐為大害,非獨樓船,又且與朝鮮共滅吾軍.」遂亦以為然,而以節召樓船將軍入左將軍營計事,卽命左將軍麾下執捕樓船將軍,并其軍,以報天子.天子誅遂. 左將軍已并兩軍,急擊朝鮮.朝鮮相路人、相韓陰、尼谿相參、將軍王唊、相與謀曰:「始欲降樓船,樓船今執,獨左將軍并將,戰益急,恐不能與,(戰)王又不肯降.」陰、唊、路人皆亡降漢.路人道死.元封三年夏,尼谿相參乃使人殺朝鮮王右渠來降.王險城未下,故右渠之大臣成巳又反,復攻吏.左將軍使右渠子長降、相路人之子最 告諭其民,誅成巳,以故遂定朝鮮,為四郡.封參為澅清侯,陰為荻苴侯,唊為平州侯,長[降]為幾侯.最以父死頗有功,為溫陽侯.左將軍徵至,坐爭功相嫉,乖計,棄市.樓船將軍亦坐兵至洌口,當待左將軍,擅先縱,失亡多,當誅,贖為庶人. 太史公曰:右渠負固,國以絕祀.涉何誣功,為兵發首.樓船將狹,及難離咎.悔失番禺,乃反見疑.荀彘爭勞,與遂皆誅.兩軍俱辱,將率莫侯矣. (史記 115, 朝鮮列傳) 「漢이 구성한 古朝鮮 멸망과정 -『史記』朝鮮列傳의 재검토 - 」에 대한 토론문 조법종(우석대 사회교육과) 김병준교수의 발표는 漢이 위만조선 침공을 어떻게 합리화하였고 평가하였는가에 대한『史記』朝鮮列傳의 내적 논리에 주목하여 중화주의적 한제국 건설이념을 역사서술을 통해 구현한 내용을 분석한 접근법이란 점에서 새로운 해석과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발표자의『史記』등 중국자료에 대한 폭 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진행된 논의방법이 종래 협애한 사료에 국한되었던 고조선사 이해의 지평을 확충하고 있다는 점에서 감사와 고마움을 표하고자 한다. 한편, 발표자는 말미에서 본 토론자가 기왕에 제기하였던 위만조선 붕괴시점 등과 관련된 이해에 대해 체계적인 분석과 해석을 제시하여 필자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결론은 필자와 다른 입장으로 나타나 이에 대해 토론자 및 질의자로서 몇 가지 질문을 드리고자 한다. 질문 1.『史記』기술 방식과 해석에 대한 문제 발표자는 사마천의『史記』列傳 기록 방식을 ‘述而不作’이라는 입장에서 이해하고 특히 그 형식과 내용이 反亂기록에 대해서 전형성을 띠고 있다고 분석하였다. 즉, 관련 기록을 시간적 순서와 인과적 관계로 재구성하였을 뿐임을 강조하고 朝鮮列傳에 나타난 내용을 南越 및 東越列傳과 비교해 검토하고 있다. 그런데 본문 내용이 述而不作적 성격의 글이라면 각 열전 말미에 ‘太史公曰’로 시작되는 史評은 사마천에 의해 정리된 ‘作’에 해당하는 역사적 해석과 평가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필자가 서론에서 제기한 漢의 입장 合理化와 評價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부분이 함께 비교 검토되었어야 그 전체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해를 돕기 위해 朝鮮列傳의 史評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A. 太史公曰:右渠負固,國以絕祀 涉何誣功,為兵發首.樓船將狹,及難離咎.悔失番禺,乃反見疑.荀彘爭勞,與遂皆誅.兩軍俱辱,將率莫侯矣. 『史記』卷一百一十五 列傳 第五十五 朝鮮列傳 이 내용은 漢의 위만조선 정벌이 右渠의 저항이 기본 원인이지만 涉何의 ‘誣功’ 즉, 사실을 왜곡하여 공을 속임으로 결국 為兵發首하였던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이는 발표자가 제시한 “조선왕이 요동도위를 공격해 살해한 사실”이 강조되어 전쟁이 발발한 것으로 이해한 내용과는 사뭇 다른 해석이다. 따라서 위만조선 공략의 원인 분석에 있어 漢측의 일정 책임을 묻고 있는 사마천의 해석이 함께 설명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또한 후술할 내용이지만 누선장군 양복, 좌장군 순체, 공손수 등이 처벌받고 주살된 사실 및 관련 장솔 누구도 侯로 책봉되지 못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사마천의 입장은 위만조선 침공이 한의 입장에서는 결과적으로 실패한 전쟁이었음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사마천의 사평은 적극적으로 해석되었어야 한다고 파악된다. 이에 대한 발표자의 입장을 부탁드린다. 2. 위만조선의 멸망시점에 대한 해석문제 발표자께서는 토론자가 기왕의 논고에서 위만조선의 붕괴시점을 통설인 元封 3年(기원전 108년)이 아닌 1년 뒤인 元封 4年 즉, 기원전 107년이라고 주장한 내용에 대해 체계적인 검토와 논의를 진행하여 결과적으로 토론자와는 달리 기존 입장을 유지하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해 토론자는 다음과 같은 반론과 질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먼저 발표자가 지적한 것처럼 漢에서 功臣을 侯로 봉한 시점이 관련 사건이 일어난 시점과 정확히 동일하지 않다는 지적은 적절하다. 즉, 사건이 일어난 후 이에 대한 포상으로 제후로 책봉되었기 때문에 얼마간의 時差가 존재하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제후로 봉해지는 상황이 신속히 진행된 경우라면 그 시점은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는 입장에서 발표자는 기존의 표현을 사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기존 표현에서 책봉시점과 관련 사실의 발생시점을 동일한 것처럼 표현한 것은 일부 조정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이 본인이 제기한 한 4군이 동시에 설치된 것처럼 표현된『史記』朝鮮傳 및『漢書』武帝紀의 기록에 문제가 있다는 기왕의 입장까지 수정하거나 정정될 상황이 아님을 강조하고자 한다. 특히 발표자의 지적은 본인의 기존 이해가 적절하였음을 확인시켜주었다고 이해된다. 먼저 발표자는 漢代 功臣을 封侯하는 절차와 소요기간을 다양한 사례를 열거하여 경우가 다양함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1) 1개월사례 -『史記』삼가세왕 : 상소에서 제후책봉까지 1개월 -『史記』위장군표기열전 : 1개월 2) 3-4개월사례 -원수 4년(기원전119년) 위청,곽거병의 흉노선우와의 전투포상 3) 1년사례 원수2년(기원전121년) 투항한 혼야왕은 원수2년 7월, 투항신하는 원수3년 7월로 1년 격차 그런데 3번째 1년 소요의 경우 발표자도 지적한 것처럼『漢書』에서는 모두 원수3년으로 표기되어 사료상의 혼란 가능성이 높은 기록이므로 실제로 취하기 어려운 사례로 파악된다. 이는 이후의 사료혼란의 경우가 더 지적되었듯이 적절한 사례로 보기 어렵다. 따라서 발표자가 제시한 상기 경우를 살펴볼 때 봉후기간은 사건발생이후 최소 1개월에서 3, 4개월 내외의 시간차를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같은 사례를 전제로 발표자는 사료의 신뢰성이 낮은 1년의 편차치를 강조하면서 우거의 아들 張降(장각)과 路人의 아들 最의 봉후시점이 앞서 봉후된 사람들과 동시점에 공을 세우고 단지 공에 대한 평가가 늦어져 나중에 제후에 봉해졌을 것으로 추정한 견해는 논리적으로 성립되기 어렵다고 파악된다. 이를 위해『史記』 조선전의 관련 자료를 다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B- 1) 左將軍已幷兩軍 卽急擊朝鮮 2) 朝鮮相路人 相韓陰 尼谿相參 將軍王唊 相與謀曰 始欲降樓船 樓船今執 獨左將軍幷將 戰益急 恐不能與 王又不肯降 3) 陰、唊 、路人皆亡降漢 路人道死 B-4) 元封三年夏 尼谿相參 乃使人殺朝鮮王右渠來降 B-5) 王險城未下 故右渠之大臣成巳又反 復攻吏 B-6) 左將軍使右渠子長降 相路人之子最 告諭其民 誅成巳 以故遂定朝鮮 爲四郡 B-7) 封參 爲澅淸侯 陰爲荻苴侯 唊爲平州侯 長降爲幾侯 最以父死頗有功 爲溫陽侯 『史記』卷一百一十五 列傳 第五十五 朝鮮列傳 일단 이 기록에서 주목되는 사실은 漢과의 화해를 주선하다가 투항한 위만조선 최고지휘부밑 백성들의 투항과정이 세 차례로 나뉘어져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는 朝鮮相路人 相韓陰 將軍王唊이 투항하고 두 번째는 尼谿相參이 右渠王을 살해하고 투항하였다.
그런데 이 사건의 전개과정은 朝鮮傳과 함께『史記』의 建元以來侯者年表에 나타난 내용과『漢書』의 景武昭宣元成功臣表에 衛滿朝鮮에서 漢에 투항하여 제후로 제수된(이하 降漢諸侯로 약칭함) 존재들에 대한 기록에서 시간대별로 진행과정이 나타나고 있다. 우선『史記』에 수록된 위만조선의 降漢諸侯表의 내용을 보면 <표-1>과 같다. <표-1>에 나타난『史記』와『漢書』양 사서의 朝鮮傳과 功臣表의 내용을 비교할 때 가장 주목되는 점은 漢에 투항한 위만조선의 지배층들이 제후로 봉해진 시기가 각각 다르다는 사실이다. 즉, 양 史書의 朝鮮傳에서는 전체적인 사건의 내용을 개관하여 서술한 반면 諸侯功臣表에서는 구체적인 시간을 명기하여 전후 관계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공신표 내용에 의하면 漢은 위만조선에서 자신들과 평화적 협상을 주도했던 망명세력들을 3차례에 걸쳐 降漢功臣으로 봉하였는 데 이를 朝鮮傳에 나타난 내용과 함께 정리해보면 <표-2>와 같다. <표-2>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나)단계에 나타난 시기이다. 즉, 니계상 참이 투항한 시기가 ‘元封
이 같은 사실은 漢代의 官문서 전달에 있어 騎馬의 경우 1일 평균 414里를 달린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기록의 진위에 논란이 있지만 眞番 및 臨屯과의 거리에 대한 茂陵書의 기록을 참조한 사료B-8의 내용을 고려하면 臨屯까지의 거리가 6138里로 나타나 6138里÷414里≒約15日 이내로 파악된다. B-8 夏,朝鮮斬其王右渠降 以其地為樂浪﹑臨屯﹑玄菟﹑真番郡 臣瓚曰 茂陵書臨屯郡治東暆縣,去長安六千一百三十八里,十五縣; 真番郡治霅縣,去長安七千六百四十里,十五縣. 『漢書』卷六 武帝紀 第六 元封 3年 따라서 위만조선과의 전투시 전황보고는 일방 전달시에는 전장에서 보름이면 상황이 보고되고 있으므로 상황발생과 봉후시차는 최소15일이고 논의과정이 고려된다면 1달 내외로 추정된다. 특히, 사건발생시점과 봉후시점이 거의 동시기인 이유는 앞서 언급되었듯이 위만조선공략은 漢에게는 실패한 전쟁으로 이와 관련된 투항자 및 관련 포상을 즉각 시행하여 적극적인 투항을 유도한 상황에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나)상황에 전후한 (가)와 (다)의 상황도 사건전개시점과 封侯시점이 차이는 15일에서 최대로는 발표자가 추정한 1개월 내외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衛滿朝鮮의 실질적인 붕괴는 元封 4년 3월 즉 기원전 107년 2월-3월사이로 설정된다. 이 같은 사실은 앞서 정리한 것처럼 위만조선은 右渠王이 암살된 元封 3년 6월에 붕괴된 것이 아니라 이후에도 王險城을 거점으로 1년 남짓 漢과의 전쟁을 지속하였던 成已가 元封 4년 2-3월경에 피살된 후에 위만조선이 완전히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위만조선 정벌의 주역이었던 樓船將軍 楊僕과 左將軍 荀彘가 元封 4년에야 비로소 우거왕의 아들 長降등에 대한 諸侯봉후와 함께 전투패배에 대한 처벌로서 樓船將軍은 庶人으로 강등되고 左將軍은 극형인 棄市刑을 당하고 있음에서도 위만조선의 붕괴시점은 원봉4년임이 확인되고 있다. B-9) 樓船將軍楊僕 坐失亡多 免爲庶民 左將軍荀彘 坐爭功 棄市 漢書』卷六 本紀 第六 武帝紀 元封 3年 B-10)
즉, 상기 사료에서 확인되듯이 漢은 투항세력에 대해 투항직후 바로 諸侯로 봉하였다. 이 사실을 감안할 때 우거왕자 長降과 노인 아들 最에 대한 제후 封侯가 元封 4년 3월에 진행되었고 樓船將軍 楊僕에 대한 처리와 左將軍 荀彘에 대한 처리가 元封 4년에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위만조선의 마지막 붕괴는 元封 4년 3월 즉, 기원전 107년 3월이었다. 또한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로서 漢 군현이 元封 3년과 元封 4년에 축차적으로 설정된 것에서도 확인된다. 즉,『漢書』五行志의 내용을 보면 한군현이 동시에 개설된 것이 아니라 3개의 군이 먼저 설치되고 차후에 1군이 추가되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제시되고 있다. B-11) 元封六年秋 蝗 先是 兩將軍征朝鮮 開三郡 『漢書』卷二十七中之下 志 第七中之下 五行志 또한 樂浪과 眞番 臨屯은 元封 3년(기원전 108년)에 玄菟는 元封 4년(기원전 107년)에 설치된 것은 다음 사료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B-12) 樂浪郡 武帝元封三年開 莽曰樂鮮 屬幽州 ..... 玄菟郡 武帝元封四年開 高句驪 莽曰下句驪 屬幽州 .... 『漢書』卷二十八下 志 第八下 地理志 사료B-12)에서는 玄菟가 1년 늦게 설치된 상황은 앞서 확인된 成已가 죽고 마지막으로 王險城이 함락된 시기에 설치된 사건과 연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위만조선은 기원전 108년이 아닌 기원전 107년 원봉 4년에 붕괴되었다고 파악된다. 이 같은 결론은 발표자도 지적하였듯이 王險城과 관련된 漢 郡縣이 樂浪郡인지 또는 玄菟郡인지 다시금 논의하여야 함을 제기하고 있다. 이에 대한 발표자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3.『史記』朝鮮列傳의 조선평정후 4군설치기록 및『漢書』무제기의 원봉3년 4군을 설치했다는 기록의 신뢰성에 대한 문제 발표자는 사기 조선열전과 한서 무제기에 대한 토론자의 사료이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1)『史記』朝鮮列傳의 기록의 경우 이미 玄菟郡의 축차적 설치기사에 의해 이는 조선정벌을 마무리 짓고 포괄적으로 언급한 기록이었다고 이해된다. 즉, 조선을 정벌한 지역에 4군을 설치하였다는 것이지 원봉3년에 이를 다 설치하였다는 명확한 기록으로는 볼 수 없다. 특히 B-7) 5후국설치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降漢封侯國의 설치도 일괄적으로 말미에 표현하고 있는 사실을 주목해야한다. 즉, 시차가 1년 이상 존재하는 封侯國의 내용도 말미에서 일괄적으로 처리하고 있는 엄연한 사실을 인식한다면 4군설치의 기록도 일괄적으로 말미에 재편집해서 정리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토론자는 이들 기록을 무시하거나 인정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단지 이를 원봉3년에 동시에 일어난 사건처럼 이해하는 견해를 수용치 않은 것일 뿐이다. 2)『漢書』武帝紀의 元封3년 4군을 설치했다는 기록의 문제점 토론자는 『漢書』의 이 기록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논의의 명확성을 기하기 위해 관련된 기록을 전제하면 다음과 같다. 『漢書』 本紀 卷六 武帝紀 第六 二年 ...... 朝鮮王攻殺遼東都尉,乃募天下死罪擊朝鮮. ....... 秋,作明堂于泰山下. 遣樓船將軍楊僕 左將軍荀彘 將應募罪人擊朝鮮..... 三年 春 作角抵戲.... 夏 朝鮮斬其王右渠降 以其地為樂浪﹑臨屯﹑玄菟﹑真番郡 樓船將軍楊僕坐失亡多免為庶民,左將軍荀彘坐爭功棄市 秋七月 膠西王端薨...... 四年 冬十月 行幸雍 『漢書』武帝紀에 나타난 내용은 漢 武帝 元封 2년조의 기록에 조선을 공략하는 내용이 기재되고 元封 3年 夏조에 우거왕이 살해되고 조선이 항복한 것으로 일괄 정리한 뒤에 낙랑 등 4군이 설치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미 이 기록은 玄菟가 1년 뒤에 설치된 기록에 의해 사료의 신빙성이 떨어지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사료에서 주목되는 것은 연속된 기록인 누선장군 양복과 좌장군 순체에 대한 처벌기록을 역시 같은 “元封 3年 夏”조에 수록함으로서 결정적인 연대 불일치의 오류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史記』 및 『漢書』 공신제후표에 의해 원봉 4년에 행해진 사건으로 “元封 3年 夏”조에 기록될 수 없는 내용이다. 결국『漢書』武帝紀에 근거하면 위만조선의 붕괴와 한4군의 설치 및 양복, 순체 등의 처벌이 모두 같은 시기 즉 원봉 3년 6월에 이뤄진 것이 된다. 이는 명백한 오류이다. 따라서 토론자는『漢書』武帝紀에 기록된 조선붕괴관련기록은 漢이 조선공략과정에서 당한 어려움 및 사실상 패전의 내용을 생략한 채 포괄적으로 정리한 기록이기 때문에 신뢰키 어려우며 앞서 논의를 전개한 것처럼『史記』 조선전 및 공신봉후표에 입각하여 재구성하여야 한다고 본다. 이 같은 입장에 대한 발표자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4. 衛滿朝鮮 붕괴후 衛滿朝鮮 遺民의 漢과 투쟁과 지역적 계승성문제 『史記』와 漢書의 공신표에 나타난 위만조선의 降漢功臣관련 사료 가운데 주목되는 사실은 朝鮮王子인 張降, 그리고 尼谿相 參과 관련된 封侯以後의 사실이다. 즉, 幾侯로 봉해졌던 右渠王의 아들 張降은 표에 부가된 내용에 의할 때 위만조선 붕괴후 3년뒤인 元封 6년(기원전 105)에 謀反事件을 진행하여 죽임을 당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C-1) 元封 六年 侯張降(咯) 使朝鮮 謀反 死 國除 史記 表 卷二十 建元以來侯者年表 第八 이 같은 사실은 右渠王의 아들인 張降의 投降은 장기간 漢과의 전쟁과정에서 부친인 右渠王이 신하들에 의해 피살된 상황에서 대신 成已와 함께 계속 항전을 하던 중 더 이상 전쟁을 유지하기 힘든 극한 상황에 이르지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左將軍과 모종의 타협이 이뤄어졌고 기왕의 정치적 지위와 영향력 등이 보장되는 협상이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장항은 여러 상황속에서 결국 조선유민 등 저항세력을 결집하여 한과의 전투재개를 주도하였고 그 과정에서 “謀反”으로 죽임을 당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이 기록은 기원전 107년 漢의 郡縣이 마지막으로 설치된 이후에도 지속적인 저항과 군사적 충돌이 유지되었음을 확인시켜주는 내용이다. 이는 漢郡縣이 설치되고 기왕의 위만조선영역을 漢 세력이 바로 장악한 것으로 파악되었던 기왕의 인식에 큰 변화가 필요함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漢書 功臣表에는 尼谿相 參이 위만조선이 붕괴된지 10여년이 지난 天漢2年(B.C 99)에 조선에서 도망온 포로를 숨겨준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투옥되어 죽는 사건이 기록되고 있다. C-2) 天漢二年 坐匿朝鮮亡虜 下獄病死 『漢書』表 卷十七 景武昭宣元成功臣表第五 사료에 나타나고 있는 「朝鮮亡虜」라는 표현은 위만조선이 완전히 붕괴된 기원전 107년으로부터 8년이 지난 天漢 2년(기원전 99년)에도 한과의 전투중 잡힌 위만조선의 군대가 여전히 존재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朝鮮亡虜는 앞서 張降의 모반사건과 같은 사건이 계속되었고 위만조선이 붕괴된지 8년후까지도 지속적으로 한과의 전투가 진행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漢에 항복하였던 지배세력집단들이 이들을 보호하고 원조하였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玄菟郡이 계속된 토착세력의 공격을 받아 더 이상 과거 설치지역에 존재치 못하고 군의 위치를 옮기고 있는 사실과 연결된다. C-3) 武帝滅朝鮮 以沃沮地爲玄菟郡 後爲夷貊所侵 徙郡於高句驪西北 『後漢書』 列傳 卷八十五 東夷列傳第 七十五 東沃沮 C-4) 至元封三年 滅朝鮮 分置樂浪 臨屯 玄菟 眞番四郡 至昭帝始元五年 罷臨屯 眞番 以幷樂浪 玄菟 玄菟復徙居句驪 『後漢書』 列傳 卷八十五 東夷列傳第 七十五 濊 즉, 사료들의 내용은 王險城을 중심으로 가장 마지막까지 저항하였던 세력들은 成已로 대표되는 저항세력이 살해되어 잠시 한 군현체계에 포섭된 이후에도 계속 핵심거점을 중심으로 漢과 전쟁상태를 유지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구체적 검토가 필요하지만 玄菟가 대립의 중심세력이란 점에서 이 같은 대립세력의 실질 지역이 이 지역과 관련되었다고 보이며 그 핵심세력은 고구려와의 관련성이 상정된다. 이는 기왕의 고조선, 위만조선이 대중국관계에서 차지하였던 군사적 갈등양상과 연결된다. 한편, 樂浪郡의 성격과 玄菟郡의 성격을 설정함에 있어 樂浪郡은 眞番옆의 여러 세력과의 중계무역거점이고 玄菟郡은 군사적 충돌의 중심지역이란 점에서 王險城의 복속시점과 이들 군의 위치 및 성격 파악이 새롭게 진행되어야함을 확인시켜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에 대한 발표자의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5.『史記』와『漢書』의 위만조선 붕괴관련 사실의 재구성문제 발표자는 漢제국의 주변국 복속과정에 대한 합리화방법에 대해 검토한다는 전제를 서론에서 제기하였다. 따라서 이 합리화는 역사적 사실을 재배치함으로서 사실이 왜곡되거나 그 실체가 모호해진 상황까지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정작 결론에서는 그 같은 합리화의 방법과 문제점에 대한 지적보다는 그 합리화의 내용을 밝히는 데 논의가 집중되어 문제점을 부각하는 데는 미흡했다는 느낌이 든다. 즉, 『史記』와 『漢書』의 本紀, 列傳에 관통되고 있는 위만조선 복속의 합리화 방법과 설명틀에 대한 소개만 이뤄지고 그것이 갖고 있는 문제점 및 역사적 실체와 사실을 행간을 통해 찾아내고 부각하는 방법과 의미부여는 미흡하다는 느낌이다. 특히, 앞서 제기한 『漢書』 武帝紀에 나타난 포괄적 서술이 갖는 문제점 등이 검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데 이에 대한 발표자의 의견을 묻고 싶습니다. 高句麗 滅亡期 政治運營의 變化와 滅亡의 內因 李文基(경북대학교 역사교육과) <차 례>
Ⅰ. 머리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영속적인 국가는 없었다. 모든 국가는 건국과 성장, 발전과 융성, 쇠퇴와 멸망의 과정을 차례로 거쳐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700여년의 역사를 지닌 고구려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원전 1세기에 흘승골성을 근거로 소국으로 성립된 고구려는 연맹체 국가의 단계를 거쳐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여 4세기말~5세기에는 동북아시아의 대제국으로 군림하였고, 6~7세기에는 중원의 통일제국 수·당과의 존망을 가르는 전쟁을 경험하였으며, 결국 668년 9월에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멸망당하고 말았다. 고구려의 멸망은 흔히 한국사의 전개 과정에서 넓은 영역과 많은 주민을 상실하여 역사의 무대가 한반도로 축소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인식될 만큼 커다란 변동을 초래한 대사건이었다. 그런 만큼 전통시대 이래 많은 역사가들이 고구려의 멸망 문제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기울여 왔고, 특히 멸망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동북아시아를 호령했던 고구려라는 강력한 국가가 결국 붕괴하고 만 연유나 과정 자체가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을 뿐 아니라 그를 통해 역사적 교훈을 얻으려는 의도도 컸기 때문일 것이다. 종래의 연구 성과를 通觀하면 기실 고구려의 멸망 문제는 더 이상 재론의 여지가 없다는 느낌까지 든다. 멸망 원인을 內·外因을 두루 고려한, 즉 수·당과의 전쟁과 같은 국제적 조건과 국내의 정치·사회적 조건이 복합된 것으로 보는, 인식은 강한 설득력을 갖고 있고, 그러한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고구려 후기의 정치·사회적 변화 양상을 추적하여 멸망에 이르는 과정을 치밀하게 밝힌 실증적인 연구도 충분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 시점에서 이에 대한 약간의 진전된 연구 성과라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문제의 범위를 좁혀서 좀더 미시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본고에서는 일단 국제적 환경 및 조건의 변화 등 고구려 멸망의 外因에 대한 문제는 논외로 하고, ‘멸망기’ 고구려의 국내 문제, 그 가운데서도 ‘멸망기’의 정치적인 변화 문제로 논의의 범위를 한정하여 그것이 고구려의 멸망에 미친 영향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이는 달리 말하면 고구려 멸망의 內的 原因, 그 가운데서도 단기적·직접적 원인의 하나가 되었을 정치적 원인을 밝혀 보려는 것이다. 필자가 이와 같이 논의의 범위를 한정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고구려 멸망의 내인으로 연개소문의 정변·집권과 독재적 정치운영 및 그로 인해 야기된 국내의 제반 정치적 문제를 지적한 견해가 가장 많은데, 이것이 고구려 멸망의 단기적·직접적 내인이 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래의 연구에서 연개소문 일가의 정치운영에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정치적 조건이나 메카니즘의 해명에 미진한 부분이 남아 있는 듯하고, 또 그로부터 파생된 국내의 정치적 문제도 좀더 체계적으로 정리될 필요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본고에서는 먼저 고구려의 ‘멸망기’를 연개소문 일가의 집권기 곧 보장왕대로 설정하고, 다시 이 시기를 몇 가지 근거에서 小段階로 나누어 보고자 한다. 다음으로 소단계별 정치운영 양상을 변화의 관점에서 살펴보면서 그로부터 파생된 국내의 정치·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려고 한다. 이를 토대로 고구려의 멸망 원인에 대한 종래의 견해를 개관한 다음, 그 가운데서 특히 연개소문 일가의 정치운영 방식과 그로부터 파생된 정치·사회적 문제가 고구려 멸망의 내적인 단기적·직접적 원인이 되었음을 확인해 보고자 한다. 입장이나 관점에 따라 서로 다른 견해가 성립될 여지가 매우 큰 주제인 만큼, 토론을 통해 부족한 부분이 대폭 보완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Ⅱ. 고구려 ‘滅亡期’의 설정과 변화 단계 어떤 국가의 멸망의 과정론이나 원인론은 旣定 사실인 멸망을 전제로 한 결과론적인 해석이므로, 한 국가의 멸망의 과정이나 원인은 연구자의 시각이나 관점에 따라 다르게 파악될 개연성이 매우 높다. 뿐만 아니라 국가의 멸망 원인은 결코 단순하지 않으며, 매우 복합적이고 다양한 원인들이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누적되어 초래된 결과이므로 그 복수의 원인 가운데서 어떤 측면을 중시하는가에 따라 견해 차이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러한 멸망 원인에 대한 인식은 곧 ‘멸망기’의 설정 문제에까지 파급된다. ‘멸망기’라는 시기 구분은 개념 자체가 분명하지 않으므로, 대부분의 논자들은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인적 상황이 발생한 시기부터를 멸망기로 규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고구려 국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668년 9월에 평양성에서 끝까지 항전하던 보장왕과 연남건이 당군에 의해 사로잡힘으로써 고구려 국가는 그 명맥이 완전히 끊어졌다. 이 사실을 중시한다면 고구려 멸망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나당과의 전쟁에서의 패배였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를 고구려 멸망의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인정하는 논자라고 하더라도, 사건의 전개과정을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멸망기’의 설정은 달라질 수 있다. 예컨대 나당연합군에 의한 멸망으로 이해한다면, 고구려의 멸망기는 고구려 공격에서 당과 신라의 협력체제가 가동되기 시작한 660년~661년이나 아니면 최후의 공격이 개시된 666년 이후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고구려 멸망의 주역을 당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668년 9월의 보장왕의 항복이 고구려의 對唐戰爭의 연장선에 있다고 이해할 것이므로, 당의 고구려 공격이 개시된 644년~645년의 당태종의 요동 원정 이후를 ‘멸망기’로 설정할 가능성이 크다. 또 이와는 달리 당과의 전쟁을 중원의 통일제국과의 항쟁의 연속이라는 관점에 서서 외연을 확대하여 수와의 전쟁이 시작된 598년이나 수양제의 대군이 침입한 612년 이후를 ‘멸망기’로 파악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와 같이 멸망 원인에 대해 동일한 견해를 갖더라도 관점에 따라 ‘멸망기’는 서로 다르게 설정될 가능이 매우 높은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고구려의 멸망 원인을 다르게 본다면 고구려의 ‘멸망기’의 설정이 전혀 달라지게 될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렇듯 고구려 ‘멸망기’의 설정은 연구자가 주요 멸망 원인을 무엇으로 파악하느냐와 그 원인적 상황의 전개과정을 여하히 파악하느냐라는 나름의 시각과 관점에 따라 대단히 가변적으로 설정될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닌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의 논의를 전개하기 위한 하나의 기준을 마련하기 위하여 우리는 고구려의 ‘멸망기’를 설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을 경우 멸망의 과정이나 원인의 파악 대상 시기가 무한정 상향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멸망기’도 고구려사의 전개과정에 입각하여 구분된 하나의 分期이므로, 이를 설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전체적인 고구려사의 시기구분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멸망기’가 어떤 국가의 마지막 멸망 시점에 이르는 최후의 一時期를 의미한다면, 고구려의 ‘멸망기’도 전체 고구려사 시기구분에서도 마지막 시기이거나 혹은 그것을 다시 세분한 최후의 소시기일 것이다. 따라서 전체적인 고구려사 시기구분에서의 마지막 시기는 고구려 ‘멸망기’의 설정에 있어 유용한 준거가 될 수 있겠다. 현재까지 나와 있는 고구려사 시기구분에 대한 대표적인 견해는 구분 근거에 따라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도읍의 천도를 기준으로 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구려의 정치체제나 정치운영방식을 기준으로 삼는 유형이다. 전자를 대표하는 것이 末松保和의 견해이다. 그는 고구려의 세 번에 걸친 천도를 기준으로 제1기 沸流시대(BC. 108~AD. 210년경; 수도 환인) - 제2기 丸都시대(210년경~427; 수도 집안) -제3기 平壤시대(427~668 ; 수도 평양성)로 나누고 제2기를 중앙집권체의 완성기, 제3기를 그 성숙기라고 부언한 바 있다. 한편 후자는 최근 국내학계의 일반적인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盧重國은 율령이 반포된 소수림왕을 기준으로 이전의 불문·관습법시대와 이후의 성문법시대의 2시기로 구분될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도, 정치적인 변화를 기준으로 태조왕 이전, 태조왕~고국원왕, 소수림왕~문자명왕, 안장왕 이후의 4시기로 구분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林起煥은 정치적인 변화 가운데서 특히 통치체제의 변화에 초점을 두어 국가형성~3세기 말, 4~5세기, 6~7세기의 3시기로 나누고 각각을 나부통치체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 귀족연립체제 단계로 정리하였다. 盧泰敦도 정치체제의 변화를 기준으로 초기 ; BC. 1세기~AD. 3세기( ~봉상왕), 중기 ; 4세기~6세기 중반(미천왕~안원왕), 후기 ; 6세기 중반~668년(양원왕~보장왕)의 3시기로 구분하면서 다시 초기는 태조왕대, 중기는 427년의 평양천도, 후기는 642년 연개소문의 정변을 경계로 앞 뒤 시기로의 세분될 수 있음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김현숙도 고구려사 전체의 변화과정과 영역지배방식을 두루 감안하여 전기(건국~3세기 말), 중기(4~5세기), 후기(6~7세기)의 3시기로 구분하는 데 동의하고 있다. 이러한 고구려사의 시기구분에 대한 국내의 대표적인 논의를 보면, 각 시기의 구체적인 시점과 종점에 대해서 미세한 차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구분 기준이나 구분된 시기가 대체로 일치하고 있어, 이를 준용해도 좋을 것 같다. 특히 ‘멸망기’의 설정과 관련이 있는 고구려사의 마지막 시기(혹은 후기)의 시작을 6세기 초중엽(안원왕·안장왕·양원왕대)으로 비정하고 있는 점은 매우 시사적이다. 이는 6세기 초중엽이 시기구분의 획기가 될 정도로 정치·사회적 측면에서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 ‘멸망기’는 아무리 늘려 잡더라도 그 始點을 6세기 초중엽(안원왕·안장왕·양원왕대)보다 상향 소급할 수는 없겠다. 요컨대 고구려사 시기구분에 대한 근래의 논의를 참조할 때, 고구려 ‘멸망기’의 설정에서 가능한 상한 시점은 6세기 초중엽임을 알 수 있다. 하한은 물론 668년의 보장왕의 항복 시점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마지막 시기(혹은 후기)로 규정된 6세기 중엽 이후부터 668년의 멸망 시점까지를 그대로 ‘멸망기’로 등치할 수 있을지가 다음 문제로 남는다. 668년의 고구려 멸망 시점은 안원왕대로부터 약 150년 정도 떨어져 있다. 150년이라면 비교적 긴 기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기간 전부를 ‘멸망기’로 뭉뚱그려 규정하기에는 그 기간 내의 변화 양상을 경시·간과하는 측면이 있어 문제가 있을 듯싶고, 또 그럴 경우 고구려의 역사가 최고의 전성기에서 急轉直下 ‘멸망기’로 돌입했다는, 순조롭지 못한 전개과정을 밟은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문제도 발생한다. 이런 점에서 고구려의 ‘멸망기’는 6세기 중엽 이후의 고구려사의 마지막 시기(후기) 중에서도 멸망 시점에 가까운 보다 짧은 최후의 시기를 대상으로 설정되어야 옳을 듯하다. 다만 고구려의 ‘멸망기’를 이렇게 설정하기 위해서는 멸망 원인에 대한 검토가 요청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어떤 사건이나 현상이 고구려의 멸망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가라는 멸망 원인론에 따라 고구려의 ‘멸망기’도 고구려의 멸망 원인이 된 사건이나 현상이 발생한 시점까지 그 상한이 소급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Ⅳ장에서 후술되듯이 고구려의 멸망 원인론은 연구자의 관점과 입장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며, 그것도 단일한 것이 아니라 대단히 복잡하고 복합적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어, 멸망 원인론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하나의 ‘멸망기’를 설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의 멸망은 매우 복잡한 國內外的 조건이나 상황이 가져온 결과물이며, 그 원인은 일단 內因과 外因으로, 다시 각각을 다시 장기적·구조적 측면과 단기적·직접적인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중 장기적·구조적 원인은 단기적·직접적 원인보다 그 발생 시점이 상대적으로 빠를 수밖에 없겠고, 그것이 발생하는 단계부터 當代人들이 멸망을 예상하거나 체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면 단기적·직접적인 원인이 현실에서 집중적으로 노정되는 단계에 이르면 當代人들도 멸망을 예견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구려사 시기구분의 마지막 시기(혹은 후기 ; 6세기 초중엽 이후)를, 멸망으로 귀결되는 장기적·구조적 원인이 하나의 현상으로 등장하게 되는 시점부터를 ‘쇠퇴기’로 하고, 당대인들이 멸망을 예견할 정도로 단기적·직접적 원인이 노정되기 시작했던 시점부터를 ‘멸망기’로 세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러면 고구려의 ‘쇠퇴기’와 ‘멸망기’를 나눌 수 있는 합당한 경계선은 어디일까. 결론을 앞세우자면 필자는 642년의 연개소문의 유혈정변을 쇠퇴기와 멸망기의 계선으로 본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연개소문의 정변과 집권이 당의 고구려 침략의 가장 중요한 빌미가 되었던 점, 둘째, 많은 논자들이 그것을 고구려 멸망의 주된 원인으로 보고 있는 점, 셋째, 고구려 후기(마지막 시기)가 642년의 연개소문의 정변을 기준으로 전후로 나눌 수 있다는 제안이나 연개소문의 집권으로 기존의 귀족연립체제가 붕괴된 것으로 보는 주장 까지 나와 있는 점 등이 그것이다. 이에 더하여 고구려로부터 그리 멀지않은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의 인식에서도 그러한 견해를 엿볼 수 있다는 사실을 덧붙일 수 있다.
A. 又按唐書云 先是隋煬帝征遼東 有裨將羊皿 不利於軍 將死 有誓曰 必爲寵臣滅彼國矣 及蓋氏擅朝 以盖爲氏 乃以羊皿是之應也 又按高麗古記云 隋煬帝以大業八年壬申 領三十萬兵 渡海來征 十年甲戌十月 高麗王 上表乞降 時有一人 密持小弩於懷中 隨持表使 到煬帝舡中 帝奉表讀之 弩發中帝胸 帝將旋師 謂左右曰 朕爲天下之主 親征小國而不利 萬代之所嗤 時右相羊皿奏曰 臣死爲高麗大臣 必滅國 報帝王之 帝崩後 生於高麗 十五聰明神武 時武陽王聞其賢 徵入爲臣 自稱姓盖名金 位至蘇文 乃侍中職也 金奏曰 鼎有三足 國有三敎 臣見國中 唯有儒釋無道敎 故 國危矣 王然之 奏唐請之 太宗遣叔達等道士八人 王喜 以佛寺爲道館 尊道士坐儒士之上 道士等 行鎭國內有名山川 古平壤城 勢新月城也 道士等 呪勅南河龍 加築爲滿月城 因名龍堰城 作讖曰 龍堰堵 且云千年寶藏堵 或鑿破靈石 盖金又奏築長城東北西南 時男役女耕 役至十六年乃畢 及寶藏王之世 唐太宗親統 以六軍來征 又不利而還 高宗總章元年戊辰 右相劉仁軌大將軍李勣 新羅金仁問等 攻破國滅 擒王歸唐(三國遺事 권3, 興法3, 寶藏奉老 普德移庵條) 사료 A는 三國遺事가 전하는 당서와 고려고기에 수록되었다는 이른바 羊皿설화인데, 수나라 사람 양명의 환생인 蓋金(연개소문)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장본인이라는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삼국유사에서 양명설화를 언급한 궁극적인 이유는 고구려의 멸망이 집권자 연개소문의 불교 탄압과 도교 숭상에서 기인된 것이라는 佛敎中心史觀에서 찾을 수 있고, 설화의 내용도 盖의 破字인 羊皿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키고 있는 점에서 과연 이것이 고구려 당대인의 인식인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그러나 고구려의 멸망 이후 그리 멀지않은 시기에 불교계를 중심으로 이러한 인식이 성립·유포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어쨌든 A를 통해 우리는 연개소문의 집권이 고구려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는 인식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고, 이는 고구려 ‘멸망기’의 시점을 642년 연개소문의 정변으로 잡을 수 있음을 방증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고구려의 마지막 시기(혹은 후기)는 642년을 계선으로 다시 ‘쇠퇴기(6세기 중엽~642)’와 ‘멸망기(642~668)’로 나눌 수 있겠다. 그렇다면 고구려 ‘멸망기’는 642년의 연개소문의 정변에서 668년 9월 보장왕이 항복하는 시점까지의 27년간의 ‘보장왕의 시대’ 즉 ‘연개소문 一家의 집권기’가 되는 셈이다. 이 27년간의 고구려의 ‘멸망기’,는 대외적으로는 중원의 대제국 당과의 전쟁이 斷續的으로 이어지고 있었고, 국내적으로는 연개소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들이 최고의 권력자로서 정치운영을 주도했던 시기였다. 국내 상황에 초점을 두면, 최고 권력자와 정치운영의 변화를 기준으로 다시 몇 개의 소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665년의 연개소문의 사망을 기준으로 최고 권력자가 변화하였다. 그 이전이 ‘연개소문 집권기(642~665)’라면 이후는 ‘남생 형제 집권기(665~668)’라고 할 수 있다. ‘남생 형제 집권기’는 666년에 형제 갈등이 폭발하고, 남생이 당에 투항함으로써 최고 권력자가 남생에서 남건으로 바뀌었다. 이에 이 시기는 다시 ‘남생 집권단계(665~666)’와 ‘남건 집권단계(666~668)’로 세분할 수 있다. 그리고 각각의 단계는 정치운영의 방식이나 정치 주도 세력 면에서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한편 ‘연개소문 집권기’도 그가 가졌던 직위를 기준으로 3개의 소단계를 설정해 볼 수 있다. 물론 모든 문헌사료에는 642년 연개소문이 정변을 성공하고부터 그가 사망하는 665년까지 계속 막리지였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고, 이를 그대로 신빙하는 논자들도 많다. 즉 연개소문의 직위가 계속 막리지였던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연개소문의 직위가 막리지→대막리지(혹은 태막리지)→태대대로로 세 번에 걸쳐 바뀐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러한 직위 변동에 따라 정치운영의 구도나 방식도 달라진 것으로 생각한다. 먼저 아래의 사료를 보자. B-1. 父蓋金 任太大對盧 乃祖乃父 良冶良弓 竝執兵鈐 咸專國柄(「泉男生 墓誌銘」) B-2. 祖盖金 本國任太大對盧 捉兵馬 父承子襲 秉權耀寵(「泉獻誠 墓誌銘」) B-3. (金春秋)旣入彼境 麗王遣太大對盧盖金館之 燕饗有加(三國史記 권 41, 金庾信列傳(上)) 위의 사료에는 연개소문의 관직을 太大對盧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옳다면 연개소문은 태대대로에 재임한 적이 있었던 셈이다. 특히 아들과 손자의 묘지에 태대대로라고 명기된 점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자손들의 묘지에서 선조들의 직위을 밝힐 경우 최후의 최고직을 기록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렇다면 태대대로는 연개소문이 역임한 최후의 최고 직위로 볼 수 있겠고, 이를 통해 그는 사망하기 전 언젠가 막리지(후술되듯이 실은 대막리지)에서 태대대로로 직위를 옮겼음을 알 수 있다. 연개소문이 태대대로로 轉任한 시기는 자료부족으로 분명히 알기 어렵다. 그러나 아들인 남생의 역관 기록에서 약간의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C-1. 乾封元年 <중략> 而蓋蘇文死 子男生代爲莫離支(新唐書 권 220, 列傳 145, 高麗傳) C-2. 卄八任莫離支 兼授三軍大將軍 卅二加太莫離支 摠錄軍國 阿衡元首(「泉男生 墓誌銘」) C-1을 비롯한 각종 문헌 사료에는 乾封 원년(666)에 연개소문이 죽고, 장자인 남생이 아비를 대신하여 막리지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분명한 착오가 있다. 첫째, 연개소문의 사망시기는 이미 논증된 바 있듯이 666년이 아니라 1년 전인 665년이다. 따라서 남생이 연개소문의 지위를 계승한 시기도 665년으로 고쳐보아야 한다. 둘째, 이 때 남생이 막리지가 되었다고 했지만, 이것도 잘못이다. C-2에서 볼 수 있듯이 남생은 28세였던 661년(보장왕 20)에 이미 막리지가 되었고, 32세가 된 665년에는 태막리지가 더해져서 軍國을 摠錄하는 宰相과 元首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는 남생이 막리지에서 태막리지(혹은 대막리지)로 승진한 사실을 잘못 전하는 것이다. 셋째, 연개소문의 사망으로 아들 남생이 막리지를 대신했다는 것도 착오이다. 사망 당시의 연개소문은 태대대로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는 남생이 아버지를 이어 막리지라는 직위를 承襲했던 것이 아니라 대막리지에 올라 연개소문의 최고 권력자로서의 위상을 이어받았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옳다. 이를 정리해 보면 661년에 막리지로 취임하여 권력의 중추부로 진입한 연개소문의 장자 남생은 665년에 태대대로로서 최고 집권자였던 아버지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대막리지가 되어 최고 집권자로서의 지위를 계승했던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남생의 관직 授受는 연개소문이 長子에게 권력을 순조롭게 승계시키기 위한 포석의 일환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따라서 연개소문의 태대대로로의 전임 시점도 남생의 직위 변동을 통해 유추가 가능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661년에 남생이 막리지로 취임했던 사실이다. 막리지의 官制的 성격은 본래 中裏太大兄으로서 최고의 근시직이며 복수제의 관직으로 그 자체 고위 요직이었다. 그러므로 비록 동 시기에 여러 명의 막리지가 공존했다고 해도, 남생의 막리지 취임은 그가 연개소문의 후계자임을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후술되듯이 당시 연개소문은 대막리지의 직위에 있었다. 대막리지는 칭호 자체에서 막리지에서 분화한 최고의 막리지였음을 간파할 수 있는데, 그 관제적 성격은 막리지 본연의 그것을 기본으로 하면서 최고 집정자의 권한이 더해진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남생의 막리지 취임 이후에도 父子가 대막리지와 막리지라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성격의 직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남생의 관직 授受가 순조로운 권력의 승계를 위한 포석이었으므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연개소문이 기본적으로 근시직인 막리지 계열의 관제를 벗어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에 필자는 연개소문의 太大對盧로의 전임 시점을 남생이 막리지에 취임한 661년으로 추정한다. 한편 이 해에는 연개소문의 3자 남산도 중리위두대형이 되어 근시직의 상층부로 진출하고 있어, 661년에 이르러 연개소문은 자신은 태대대로가 되어 외정을 통괄하고, 아들들을 중리직에 포진시켜 근시조직을 장악하는 형태의 새로운 정치운영의 틀을 구축했음을 암시하고 있다(후술). 이상에서 보았듯이 661년에 연개소문은 장자인 남생을 막리지에 임명하고, 자신은 태대대로가 되어 665년에 사망할 때까지 재임하였다. 그러므로 661년에서 665년은 ‘연개소문 집권기’의 마지막 단계인 ‘태대대로 재임단계’라고 할 수 있다. 연개소문이 642년의 정변 이후 취임했던 관직이 막리지임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면 그는 661년에 태대대로로 옮기기까지 약 20년간 그대로 막리지 직에 머물렀던 것일까. 역시 여러 문헌에는 그러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사료가 다수 남아 있지만 그대로 따르기는 어렵다. 정변의 주역으로 정치적 실세였던 연개소문은 정변 직후부터 기회가 주어진다면 권력을 독점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막리지 직에 머물러서는 독재적 권력 행사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막리지는 국왕 근시직으로서 복수제의 관제였으므로 동일한 직위를 가진 인물이 여럿 공존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개소문은 권력의 독점과 그것의 원활한 행사를 위해 막리지 직을 서열화하여 자신이 복수의 막리지 가운데서 최고의 막리지로 군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천남생묘지」의 32세(665년)에 남생이 태막리지에 취임했다는 기록, 「천헌성묘지」의 아비 남생이 본국에서 태대막리지를 역임했다는 기록, 「천남산묘지」에 30세(668년)에 태대막리지가 되었다는 기록 등이 참조된다. 이들을 종합하면 막리지라는 관제는 분화하여 막리지-태막리지(=대막리지)-태대막리지로 서열화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고구려 관제의 일반적 분화과정과 동일한 방식이라는 점에서 고구려의 현실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막리지 직은 고구려 멸망 전야에는 막리지-대막리지-태대막리지로 서열적 분화가 이루어져 있었다. 이 가운데서 태대막리지는 666년 남생 형제의 분열 이후에 서로가 경쟁적으로 보다 높은 직위에 있음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등장했던 位號였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태대막리지의 전제가 되는 대막리지는 그 이전 665년 당시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남생이 665년에 태막리지에 취임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대막리지는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시기 추정의 전제로 두 가지의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연개소문이 죽은 후 남생이 최고 권력자의 위상을 승계하기 위해 막리지를 넘어서는 위호가 필요하여 새로 만들었을 가능성이다. 그랬다면 대막리지의 설치시기는 665년이 된다. 한편 남생이 이미 그 전에 설치되어 있던 대막리지 직에 취임하여 최고 권력자의 위상을 승계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를 따르면 대막리지는 연개소문의 생존 당시에 설치되었던 셈이다. 양자 중 어느 쪽이 옳을지는 쉽게 판정내리기 어렵지만, 필자는 후자의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최고 권력자의 위상을 승계하게 된 남생이, 처음부터 논란의 불씨가 될지도 모르는 대막리지라는 새로운 위호를 만들어 취임했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을뿐더러 이런 조치를 취할 수 있을 만큼 권력기반도 다져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연개소문 생존 당시에 이미 막리지 직은 막리지와 대막리지로 서열적 분화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이며, 최고의 막리지인 대막리지 직은 물론 연개소문이 차지했을 것이다. 그런데 연개소문은 661년에 태태대로로 轉任하였다. 따라서 대막리지의 설치시기는 642년~661년 사이의 어느 때일 것이다. 연개소문이 대막리지 직을 설치한 시기에 대한 사료는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대막리지 직은 연개소문이 권력을 독점하고 독재적 권력행사를 위해설치한 것이므로, 그가 독점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게 된 시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각종 사료에는 642년에 유혈정변을 단행한 연개소문이 막리지에 취임한 후부터 국정을 마음대로 하는 등 독재권력을 행사했다고 하였다. 물론 그는 영류왕과 반대파 귀족 100여명을 주살하는 유혈정변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으므로, 정변 직후부터 정치적 실세이자 실질적인 권력자였을 수 있다. 그러나 정변 직후 그가 취임한 막리지라는 官制는 본래적 성격과 기능 면에서 권력을 독점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또 집권 초기의 정치운영방식도 연개소문 一人에 의한 독재적 운영으로는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Ⅲ장 1절 참조). 그런데 644년이 되면 국제정세가 일변하게 된다. 前年의 신라의 구원 요청에 호응하여 그 해 정월에 당은 상리현장을 파견하여 신라에 대한 공격 중지를 강권하였고, 7월에는 고구려 원정을 위한 준비에 돌입하는 한편 영주도독 장검이 요동을 침공하는 등 탐색전을 전개했다. 당의 대대적 침공이 가시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당의 침략 의도는 고구려도 간파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해 9월의 백금 조공이나 관인 50명의 숙위 요청은 어떻게든 당의 침략을 피해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당의 대대적인 침략에 직면하게 된 고구려 조정에서는 이에 대응하기 위한 여러 가지 조치들이 취해졌을 것이다. 국가의 존망이 결정되는 대제국 당의 침략에 대해 성공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종래의 정책결정기관인 귀족회의체 ‘五官會議’와는 다른, 정책의 결정과 집행에서 신속성을 보장하고 국력을 효율적으로 결집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했을 것이다. 대막리지 직은 이러한 현실적 필요성에 의해서 등장한 제도적 장치로 생각된다. 정변 이후 권력의 실세였지만 막리지 직에 머물러 있었던 연개소문이 당의 침략이 직면한 644년에 대막리지를 설치하여, 자신이 그 직에 취임함으로써 대당전쟁을 총지휘하는 한편 독재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추론이 가능하다면, 대막리지의 설치시기는 당의 침략을 앞둔 644년으로 볼 수 있겠고, 연개소문의 직위도 642년 막리지→ 644년 대막리지→661년 태대대로로 변화했다고 하겠다. 이러한 연개소문의 직위 변화를 기준으로 ‘연개소문의 집권기(642~665)’를 소단계로 나누면, ‘막리지 재임단계(642~644)’-‘대막리지 재임단계(644~661)’-‘태대대로 재임단계(661~665)’로 3분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연개소문집권기의 3개 소단계는 정치운영 양상은 물론 그로부터 파생된 제반 정치·사회적 문제도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이상에서 고구려 ‘멸망기’를 설정하고, 그 내부의 변화단계에 대해 살펴보았다. 논의된 바를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표 1> 고구려의 ‘멸망기’와 변화 단계 6세기 초중엽 642 644 661 665 666 668
Ⅲ. ‘멸망기’ 고구려의 정치운영 양상과 그 波長 본 장에서는 전술한 고구려 ‘멸망기’의 소단계 구분에 입각하여, 각 단계별 정치운영방식과 그로부터 파생된 국내의 제반 정치적 문제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 ‘연개소문 집권기(642~665)’의 정치운영 1) ‘막리지 단계(642~644)’ 父 태조가 죽은 후 연개소문은 유력 귀족들의 강한 견제를 극복하고 겨우 東部(혹은 西部)大人의 지위를 承襲할 수 있었다. 이렇게 그가 父職을 승습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연씨 가문이 상대적으로 뒤늦게 진출한 신흥귀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류왕대에 이르러서는 그 세력이 강대해져 여타 귀족들로부터 집중적인 견제를 받았기 때문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러한 귀족세력들은 642년(영류왕 25) 초에 연개소문을 변방인 천리장성 축조의 監役으로 임명하여 그의 세력기반과 격리시키려 하였고, 나아가 국왕과 결탁하여 암살을 모의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연개소문은 閱兵을 핑계로 部兵을 동원하여 백여명의 반대파 귀족들과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옹립하는 유혈 정변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막리지에 취임하였다. 이렇게 연개소문의 정변이 성공하게 된 이면에는 6세기 이래의 국내계 귀족세력과 신흥 평양계 귀족세력의 대립이 숨어 있었으며, 대당정책을 둘러싼 온건파와 강경파의 대립도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고 한다. 결국 연개소문은 평양계 귀족세력과 대당 강경파의 지원으로 정변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三國史記 개소문전을 비롯한 많은 사료에는 막리지에 취임하고부터 그가 권력을 專制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의 다음 기록은 막리지에 취임한 연개소문의 정치운영이나 권력행사와 관련하여 달리 생각해 볼 여지를 남기고 있다. D.遣諸大夫於難波郡 檢高麗國所貢金銀等幷其獻物 使人貢獻旣訖 而諮云 去年六月 弟王子薨 秋九月 大臣伊梨柯須彌弑大王 幷殺伊梨渠世斯等百八十餘人 仍以弟王子兒爲王 以己同姓都須流金流爲大臣(日本書紀 권 24, 皇極紀 元年 2월 丁未條)
사료 D는 日本書紀에서 연개소문의 정변을 전하는 기사로서 이미 많은 논자들에 의해 주목된 바 있다. 그런데 정변에 성공한 伊梨柯須彌, 즉 연개소문이 보장왕(弟王子兒=太陽王의 아들)을 옹립하고, 이어 자기와 同姓인 都須流金流를 大臣으로 삼았다는 점이 주목된다. 여기서 同姓은 곧 淵氏를 의미하며, 大臣은 大對盧로 보아도 좋을 듯싶다. 그렇다면 정변에 성공한 연개소문은 一族인 都須流金流를 대대로에 추대하고, 자신은 막리지에 취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정변의 주역 연개소문이 종래의 전통적인 최고 관직인 大對盧에 자신이 취임하지 않고 일족인 도수류금류를 추대하면서, 스스로는 막리지에 취임했던 데에는 어떤 정치적 의도와 더불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연개소문이 비록 정변을 통해 많은 반대파 귀족을 제거했지만, 국내에는 그의 집권을 반대하는 상당한 세력들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정변 과정에서 연개소문에 끝까지 저항하여 항복하지 않자 결국 타협하고 말았던 安市城主와 같은 존재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개소문은 자신이 舊來의 최고 집권직으로 귀족의 대표자라는 상징성까지 갖고 있는 대대로에 취임했을 경우에 예상되는 반대파 귀족들의 반발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크게 무리를 범하지 않으면서도,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代案으로서 一族인 都須流金流를 대대로에 추대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정변 이후 권력의 실세였던 연개소문도 고구려 후기의 귀족연립체제에서 가장 중핵적인 국가 운영기구로 기능해 왔던 귀족회의체인 (1)대대로~(5)위두대형으로 구성된 ‘五官會議’와 그 長인 대대로가 가진 정치적 비중을 무시할 수 없었음을 시사한다. 만약 종래의 통설처럼 막리지 직 자체가 최고의 집권직이었고, 정변 이후 대대로와 ‘오관회의’가 空洞化된 상태였다면, 굳이 자신의 一族을 대대로로 삼아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연개소문의 집권 이후에도 최고의 귀족회의체인 ‘오관회의’와 제1등급 관등이자 그 장이었던 대대로가 여전히 제도적으로 국가적 중요정책의 결정과 집행에 상당한 권위와 일정한 기능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추지할 수 있다. 대대로도 여전히 최고 관직으로서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연개소문이 반대파 귀족들의 반발을 의식하여, 귀족회의체의 장이자 귀족의 대표자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는 대대로에 취임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가 선택한 官制가 막리지였다. 막리지의 관제적 성격에 대해서는 大對盧說, 太大兄說, 최고관직설, 귀족연립정권에서의 최고위 무관직說등으로 다양하지만, 필자는 莫離支를 中裏太大兄으로 보고 있다. 막리지는 국왕 근시직 가운데 최고위인 중리태대형이었므로, 국왕과 지근 거리에서 복무하는 측근 신료라고 할 수 있고, 막리지 취임자는 국왕의 권위와 상징성을 손쉽게 활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또 막리지의 휘하에는 外廷의 신료와는 구별되는 上下階序的인 中裏職 臣僚들이 또 하나의 官制 系列을 이루고 있었고, 국왕 시위군을 지휘․통제할 수 있는 권한까지 가졌다. 이에 막리지는 중리제 신료 즉 內朝라는 인적 기반과 국왕 시위군이라는 군사적 기반까지 확보할 수 있다. 연개소문이 막리지를 선택한 이유는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정변 직후 상황에서 연개소문은 막리지로서 자신이 옹립한 보장왕을 측근에서 근시하게 됨에 따라 반대세력의 국왕에 대한 접근을 견제할 수 있는 또 다른 효과도 얻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중리제의 최고위인 막리지(=중리태대형)는 정변의 주역으로서 반대파 귀족세력의 반발을 피하면서 실질적인 권력 행사의 주체로 군림하고자 했던 연개소문에게는 가장 적합한 관제였을 수 있겠다. 이상에서 언급한 바를 바탕으로 ‘연개소문 집권기’ 중 ‘막리지 단계(642~644)의 정치운영방식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연개소문이 비록 많은 반대세력을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했지만, 안시성주의 예에서 보듯이 중앙정계는 물론 지방의 유력 성주 중에도 반대파가 상당수 남아 있었다. 정변 직후의 연개소문은 이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들의 반발과 견제를 피하기 위하여 자신은 대대로가 아닌 최고의 국왕 근시직인 막리지에 취임하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귀족연립체제에서 전통적으로 핵심적 권력기구였던 ’오관회의‘와 그 장인 대대로로 대표되는 外廷을 장악하기 위하여 일족인 도수류금류를 대대로로 추대하였다. 이는 대대로와 귀족회의체의 기능과 위상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막리지 단계’의 정치운영은 연개소문의 독재적 권력 행사와는 일정한 거리가 있었으며, 오히려 전통적인 권력기구인 대대로와 ‘오관회의’를 통해 반대세력과의 타협을 도모하는 방식으로 정치를 운영해 가야 했던 점에서 고구려 후기의 귀족연립체제적 성격이 지속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일정 수준 회의체를 통한 합의제적 정치운영이 유지되었으므로, 이 단계에서 지배귀족들의 극심한 분열이나 이탈 현상이 발생한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또 이 시기는 대당관계 면에서도 우호 친선관계가 이어졌던 1기에 해당하므로, 대부분의 고구려인들은 그때까지 자신들의 국가가 20여년 후에 멸망하게 될 것으로는 조금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2) ‘대막리지 단계(644~661)’ 대막리지는 막리지에서 분화한 것으로, 복수의 막리지 가운데서 최고의 막리지라는 의미를 지닌 직위이다. 이는 전술했듯이 대규모의 당의 침략이 가시화된 644년에 대당전쟁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정책의 결정과 집행의 신속성을 보장하면서 국력을 하나로 결집하기 위한 차원에서 신설되었다. 그러나 정변 이후 실질적인 권력의 실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막리지 직에 머물러 있던 연개소문이 대막리지가 되면서, 대막리지는 대당전쟁의 총지휘권자이자 독재적 권력행사를 가능케 하는 제도적 장치로 기능하게 되었다. 여러 문헌자료에서 연개소문을 최고 권력자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바로 ‘대막리지 단계’의 정치운영이 투영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연개소문이 대막리지로서 645년의 당의 침략을 막는 과정에서 고구려군의 최고 지휘자 내지 최고의 군령권자로 활동했던 사실은 다음을 통해 알 수 있다. E-1. 初 莫離支遣加尸城七百人 戍蓋牟城 李世勣盡虜之 其人請從軍自效 帝曰 汝家皆在加尸 汝爲我戰 莫離支必殺汝妻子 得一人之力 而滅一家 吾不忍也 皆稟賜遣之 以盖牟城爲蓋州(三國史記권 21, 보장왕 4년조) E-2. 王師攻安市城 高麗莫離支遣將高延壽等 率兵二十萬 拒戰(新唐書 권111, 薛仁貴傳) 사료 E-1에는 막리지가 가시성의 성병 7백인을 개모성에 진수하도록 파견했다고 하였고, E-2의 고연수 등이 인솔하는 대규모 구원군을 안시성에 보낸 것도 막리지였다. 여기서의 막리지는 연개소문을 대신하는 호칭에 불과한 것으로서, 이를 그가 당시에 실제로 막리지였던 증거로 보아서는 곤란하다. 이 시기의 연개소문의 직위는 대막리지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E를 통해 645년의 대당전쟁에서 연개소문이 최고 군령권자의 위상을 갖고, 전쟁을 총지휘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를 참조하면, 항복한 백암성 주둔 병력 가운데서 他城 출신 병력이 포함되어 있는 이유도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타성의 병력을 백암성에 진수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대막리지 직에 취임한 연개소문은 645년의 대당전쟁을 총 지휘하는 최고의 군령권자로 활약하였다. 더구나 전쟁이 고구려의 승리로 귀결되었으므로,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권위는 크게 고양되었고, 권력도 또한 더욱 강화되었을 것이다. 이로써 연개소문은 권력을 독점하고 국정을 전제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바야흐로 연개소문 일인의 독재시대가 열렸다고 할 수 있다. 645년의 대당전쟁 승리 후의 연개소문의 위상과 관련하여 다음 사료는 참조할 만하다. F. (보장왕 5년) 夏五月 王及莫離支蓋金 遣使謝罪 幷獻二美女 帝還之 謂使者曰 色者人所重 然憫其去親戚以傷乃心 我不取也……初 帝將還 帝以弓服賜蓋蘇文 受之不謝 而又益驕恣 雖遣使奉表 其言率皆詭誕 又待唐使者倨傲 常窺伺邊隙 屢令不攻新羅 而侵凌不止 太宗詔勿受其朝貢 更議討之(三國史記권21, 보장왕 5년조) 여기에는 戰後의 화해 사절 파견의 주역으로 왕과 더불어 연개소문이 거론되고 있고, 또 연개소문이 전쟁이 끝난 후 더욱 교만 방자해져서 당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고 폄하하고 있다. 대당전쟁의 승리를 통해 연개소문이 최고 권력자의 위상을 확립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연개소문이 독재적 권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정치운영방식에도 변화가 초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귀족연립체제에서 명실상부하게 최고의 관직으로 기능해 왔던 대대로는 이제 정치운영의 전면에서 물러나게 되었을 것이며, 귀족들의 합의제적 정치운영을 가능하게 했던 오관회의체도 유명무실하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양이 많지 않은 사료라는 한계는 있지만, 661년에 연개소문 자신이 태대대로로 전임하기까지 대대로에 관한 단 1건의 기사도 보이지 않는 것은 이를 상징하고 있다. 연개소문에 반대했던 지방의 유력 성주들도 이제는 연개소문의 권위와 권력 속으로 편입되지 않을 수 없었고, 6세기 초중엽 이래 귀족연립체제의 성립과 지속에서 양대 축을 이루었던 국내계와 평양계의 귀족세력간의 갈등도 수면하에 가라앉게 되었을 것이다. 반면 연개소문은 근친들을 별도의 관직체계인 중리직에 기용하여 자신의 권력기반을 확충해 나갔다. 墓誌가 남아 있는 아들 남생과 남산의 역관을 통해 이를 추지할 수 있다. <표 2> 墓誌에 보이는 男生과 男山의 歷官
<표 2>는 묘지명에 기록된 남생과 남산의 역관을 정리한 것인데, 특히 두 가지 사실이 주목된다. 하나는 아들들이 국왕 근시직인 중리직과 무관직을 통해 정치적으로 성장했던 점이고, 다른 하나는 비교적 낮은 관등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권력을 행사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성장이 특히 648~661년에 집중되어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대막리지 단계’에 연개소문은 자신의 아들을 비롯한 근친들을 중리직에 포진시켜 私的인 기반을 구축하고 나아가 연씨 일가의 권력 승계 구도를 구축해 나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연개소문 일가로의 과도한 권력집중은 곧 또 다른 반발을 불러온 듯하다. 이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료는 없지만, 三國史記에 기록된 이 단계의 凶兆 기사는 이와 관련하여 눈길을 끈다. G-1. (동 5년 ; 646) 동명왕 어머니의 塑像이 사흘 동안 피눈물을 흘렸다. G-2. (동 7년 ; 648) 가을 7월에 서울에 사는 여자가 아들을 낳았는데 몸 하나에 머리가 둘이었다 G-3. (동 7년 ; 649) 9월에 노루 떼가 강을 건너 서쪽으로 달아나고 이리 떼가 서쪽으로 갔는데, 3일 동안 끊이지 않았다. G-4. (동 9년 ; 650) 가을 7월에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쳐 백성들이 굶주렸다. G-5. (동 13년 ; 654) 여름 4월에 사람들이 혹 말하였다. “馬嶺 위에 神人이 나타나 ‘너희 임금과 신하들이 사치함이 한도가 없으니 패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G-6. (동 15년 ; 656) 여름 5월에 서울에 쇠가 비처럼 떨어졌다. G-7. (동 18년 ; 659) 가을 9월에 아홉 마리의 호랑이가 한꺼번에 성으로 들어와 사람을 잡아먹었는데, 붙잡으려 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G-9. (동 19년 ; 660) 가을 7월에 평양의 강물이 무릇 3일 동안이나 핏빛이었다 三國史記 보장왕기에는 모두 11건의 天變地異나 흉조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9건이 ‘대막리지 단계’에 집중되어 있다. 이 흉조들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제대로 밝혀내기는 어렵지만, 특히 G-3·5·9는 고구려 국내의 정치·사회적 상황 암시하는 조짐으로 보인다. 먼저 G-3에서 노루와 이리떼가 3일 동안 서쪽으로 갔다는 것은 고구려인들의 西國 즉 당에 투항한 사실을 은유한 것이 아닐까 한다. 몇 년간 연개소문의 권력 독점과 독재적 권력행사가 이어지자, 이에 반발한 세력들이 고구려를 떠나 당으로 투항해 간 경우가 있었던 것 같다. 또 G-5는 노골적으로 고구려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는 점에서 유의할 만하다. 654년은 당의 직접적인 위협으로부터 상당히 벗어난 시기였다. 645년의 대규모 친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당태종은 소부대 침공을 통한 장기소모전으로 전술을 전환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비록 전쟁이 없었지지는 않았지만 대부분 변경 요충지에 대한 기습 공격이었으므로, 멸망의 위기감을 가질 정도라고는 할 수 없다. 거기다가 649년에는 당태종이 사망하면서 요동정벌 중지의 유지를 남겼고, 막 즉위한 고종도 국내 정국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함으로써 고구려와 당 사이에는 649년부터 654년까지 소강 국면이 형성되었다. 이렇듯 대외적 위기가 감소하고 있는 상황에서 G-5와 같이 고구려의 멸망을 예언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G-5에서 보듯이 馬嶺에 나타난 神人은 고구려가 곧 멸망하게 될 이유로 君臣의 사치를 들고 있다. 이는 아무래도 고구려 조정 전체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독재적 권력을 행사했던 연개소문 일가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된다. 10년 가까이 권력을 독점해 왔던 연개소문 일가가 권력만이 아니라 사치로 상징되는 부의 독점과 같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고구려 주민들의 불만이 마령 신인의 예언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말하자면 ‘대막리지 단계’ 후반에 이르면 연개소문 정권의 폐해가 나타났으며, 이에 반발하는 세력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던 셈이다. 그 후에도 이런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던 것 같다. G-9에 보듯이 660년에는 평양의 강물이 핏빛으로 물드는 흉조가 나타났다고 한다. 백제의 경우 사비도성의 샘물이 핏빛으로 변하고, 泗沘河의 물이 핏빛과 같이 붉어지는 흉조가 나타났던 바로 그 해에 멸망당했음을 참조하면, G-9 역시 고구려의 명망을 예견하는 흉조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대막리 단계’ 후반에 이르면, 연개소문 일가의 권력 독점에서 비롯된 여러 가지 폐단이 나타났으며, 이에 대한 비판과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반발한 주민들이 고구려로부터 이탈하는 현상도 발생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 사회가 연개소문의 독재에서 파생된 문제로 인해 사회적 통합력이 크게 이완되고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 사회의 내부적 통합력은 당태종이 수양제의 고구려 원정을 실패로 돌아가게 한 이유로 지목하거나, 668년 요동전선에 군수를 보급하고 전황을 살피기 위해 파견되었던 시어사 賈言忠이 당태종의 친정이 실패한 이유로 거론할 만큼 국가·사회 보전의 주요한 원천이던 점에 비추어 보면, 멸망으로 연결될 수 있는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가 발생했던 셈이다. ‘대막리지 단계’에 연개소문 정권에 대한 불만으로 주민이 이탈했던 분명한 사례로는 650년의 보덕화상의 완산 이주 사건을 들 수 있다. H.(보장왕 9년 ; 650) 夏六月 盤龍寺普德和尙 以國家奉道不信佛法 南移完山孤大山(三國史記권 22, 보장왕 9년조)
연개소문은 정변 이후 도교를 장려하고 불교를 탄압하는 정책을 폈는데, 도교를 정치 이데올로기로 활용하여 독재적 지배를 합리화하고, 그것을 매개로 지방세력을 회유·통제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고구려 불교계의 거센 반발을 불러 왔다. H에서 보듯이 650년에 보덕화상은 고구려를 떠나 거처를 백제지역인 완산으로 옮기고 있는 것이다. 도교 숭상과 불교 탄압에 대한 불만은 비단 보덕화상 개인의 경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고구려 전체 불교계와 불교를 지지하는 귀족과 백성층도 마찬가지였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고구려인들의 불만은 결국 최고 권력자인 연개소문 정권에 대한 불만으로 표출되거나 고구려를 이탈하는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대막리지 단계’의 정치운영은 연개소문 일가의 권력독점과 독재권력의 행사로 요약될 수 있다. 연개소문은 644년에 직면한 대당전쟁에 대비하여 대막리지 직을 신설하고 자신이 그 직을 차지하였다. 고구려 최고 지휘관이자 최고 군령권자로서 645년 당태종의 친정군을 격퇴한 연개소문은 승리의 주역으로 권위가 고양되고 권력도 일층 강화됨으로써 이후 최고 권력자로서 일인 독재정치를 운영하였다. 그는 대대로와 ‘오관회의’ 등 귀족연립체제에서의 핵심 권력기구를 무력화시키는 대신 자신의 아들을 비롯한 근친을 국왕 근시직인 중리직에 기용하여 사적인 권력기반으로 활용하였다. 이러한 연개소문의 독재적 권력행사와 연씨 일가로의 권력집중은 곧 정치·사회적 측면의 여러 가지 폐단을 낳았으며, 이에 대해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반발세력도 등장하게 되었다. 보덕화상의 사례에서 보듯이 주민의 고구려 이탈 현상이 나타나는 등 사회적 통합력이 크게 이완되었다. 국가 존립의 주요한 기초가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대막리지 단계’ 후반에 이르러 고구려의 멸망을 노골적으로 예언하는 흉조가 출현했던 것은, 이 같은 국내 상황에 대해 고구려인들이 느꼈던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대변하고 있는 것같다. 3) ‘태대대로 단계(661~665)’ 전술했듯이 661년에 연개소문은 대막리지를 떠나 태대대로로 전임하였다. 그리고 장자 남생에게 막리지를 수여하여 중리제의 고위직에 포진하게 하였다. 이로써 ‘대막리지 단계’와는 다른 권력구도로 재편된 것이며, 그에 따라 정치운영 방식도 달라지게 되었다. 연개소문이 이 같은 권력구도로 재편을 단행한 데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앞에서 보았듯이 ‘대막리지 단계’의 연개소문의 독재적 정치운영은 그 후반으로 이르면 여러 가지 정치·사회적 폐해를 불러와 이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반발세력이 늘어나는 등 사회적 통합력이 약화되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조성되고 있었다. 연개소문 정권 자체의 위기이기도 했음은 물론이다. 이에 연개소문으로서는 반발 세력을 무마하고 정권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착목했던 것이 귀족연립체제로의 回歸가 아니었을까 한다. 연개소문이 15년 가까이 독재적 권력자의 상징이었던 대막리지 직을 버리고 태태대로로 전임하고 있는 데서 이를 유추해 볼 수 있다. 태대대로는 연개소문이 그 동안 虛位化되어 있었던 대대로의 격을 높여 자신이 취임하기 위해 고안해 낸 칭호이지만, 정치적 성격이나 기능은 대대로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즉 태대대로도 귀족연립체제에서 귀족세력의 공존을 전제로 하는 회의체인 ‘오관회의’의 장이자 귀족세력의 상징적 대표자의 성격을 가졌을 것이다. 따라서 연개소문의 태대대로로의 전임은 귀족세력들에게는 그들과의 합의를 바탕으로 한 귀족연립체제적인 정치운영을 약속한 것으로 받아드려졌을 가능성이 크다. 달리 말하면 연개소문의 태대대로로의 전임은 독재적 권력행사를 자제하고 귀족들과의 합의를 통한 정치를 운영하겠다는 무언의 약속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태대대로 단계’의 정치운영에는 귀족연립체제적 성격이 다분히 되살아나게 되었을 것이다. 귀족세력은 ‘오관회의’를 통해 발언권을 행사하게 됨으로써 정치적 입지를 조금씩 강화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연개소문이 최고의 집권자적 위상까지 잃어버린 것으로는 볼 수 없다. 남생에게 막리지를 수여하여 內朝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는 한편 자신은 태대대로로서 외정의 領袖가 되어 국정을 총괄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국운영 방식은 정변 직후 ‘막리지 단계’의 그것과 흡사한 점에서 흥미롭다. 어쨌든 이러한 정국운영방식의 변화를 통해 연개소문은 급박한 정권의 위기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다. 한편 ‘태태대로 단계’는 남생으로의 권력 이양을 위한 준비기로서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연개소문의 연령이나 건강상태를 알 수는 없지만, 5년 후에 사망했음을 감안하면 이 무렵에는 권력의 승계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연개소문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인물은 장자 남생이었다. 남생에게 661년에 막리지과 삼군대장군을 兼授하였던 것은 바로 후계 구도와 관련이 있었다. 남생은 근시 고위직인 막리지를 받아 내조의 영수로서 국정 일반에 대한 강한 발언권을 가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삼군대장군으로서 무력기반을 갖출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 660년에 백제를 멸한 당은 소부대 침공에 의한 장기 소모전술을 버리고 大部隊로 하여금 평양성을 직공하게 하는 이른바 평양직공책으로 전술을 바꾸어 661년부터 평양성을 공격목표로 삼아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이 때 唐軍은 수륙 양로로 진군하였는데, 해로를 이용한 소정방은 평양성 부근까지 진격하여 포위망을 구축하였고, 육로를 이용한 요동도행군총관 契苾何力의 군대는 압록강으로 진격해 왔다. 이에 대응하여 연개소문은 평양성 방어전을 지휘하고, 남생으로 하여금 압록강 방어전을 책임지게 하였다. 남생이 받은 삼군대장군은 661년 압록강 방어전에서의 최고 사령관으로서의 직함이었다. 남생의 압록강 방어전은 결빙기를 맞아 3만명의 전사자가 발생하고 남생 자신도 겨우 죽음을 면할 정도로 대패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연개소문 일가의 권위를 손상시키고, 남생의 능력과 후계자로서의 자질에 회의가 제기되는 계기가 되었을 법하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글필하력군이 回軍하였고, 이듬해에 연개소문이 평양 부근의 사수전투에서 옥저도총관 龐孝泰軍을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고 소정방도 신라의 군수지원을 받아 철수하게 됨으로써, 남생의 후계자 문제는 미봉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요컨대 ‘태대대로 단계’는 ‘대막리지 단계’ 후반의 연개소문 일가로의 권력집중과 독재적 권력행사로부터 야기된 반발을 무마하여 연개소문 정권의 위기를 극복할 목적으로, 연개소문이 태태대로로 전임하여 귀족연립체제적 정치운영으로 회귀해 갔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치운영을 통해 귀족세력과의 타협이 이루어져 일시 정권적 위기는 극복될 수 있었으며, 귀족세력은 이러한 정치 환경을 이용하여 조금씩 행보의 폭을 넓혀가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는 또 남생으로의 권력 승계를 위한 준비기라고도 할 수 있는데, 661년 남생에게 막리지와 삼군대장군을 겸수했던 것은 후계자적 위상을 고려한 조치였다. 그런데 남생은 압록강 방어전에서 대패함으로써 후계자로서의 능력을 의심받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은 귀족세력의 부활과 맞물려 후계구도를 둘러싼 새로운 정쟁의 불씨가 되었다. I. 是月 高麗大臣蓋金終於其國 遺言於兒等曰 汝等兄弟 和如魚水 勿爭爵位 若不如是 必爲隣咲(日本書紀 권27, 天智 3년 10월조)
사료 I에는 연개소문이 유언으로 형제간의 화합을 당부한 사실이 보이는데, 이미 남생 형제 모두가 20·30대의 성인으로서 정치적으로 상당한 고위직에 올라 있었던 점에서 보면, 심상치 않은 의미를 지닌 것으로 생각된다. 사망을 앞둔 연개소문이 염려할 정도로 남생 형제 사이에는 후계구도를 놓고 이미 갈등과 분열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남생형제의 갈등의 배후에는 귀족세력 간의 갈등이 숨어 있었으며, 이러한 지배세력의 분열과 정쟁은 ‘대막리지 단계’부터 이완되어 가고 있었던 고구려 사회의 내부적 통합력을 더욱 약화시켜. ‘남생 형제 집권기’ 4년을 거치면서 고구려를 멸망에 이르게 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2. ‘남생형제 집권기(665~668)’의 정치운영 1) ‘남생 집권단계(665~666)’ 665년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남생은 태막리지에 올라 국정을 摠錄하는 수상과 원수가 되었다. 아버지 연개소문의 뒤를 이어 최고 집권자의 지위를 계승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지위계승에 대해 「泉男生墓誌」에서는 “先祖의 遺業을 이으니, 선비가 알고 마음을 돌렸고, 위태로운 나라의 권력을 잡으니 비난하는 사람이 없었다.”라고 하여, 이에 반대하는 세력이 없었다고 하였지만 撰者의 修辭的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연개소문이 사망하기 전부터 후계구도를 둘러싸고 남생 형제간의 갈등이 시작되었으며, 「천남생묘지」에도 남생의 집권 직후부터 안팎으로 여러 가지 견제와 갈등이 있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묘지의 해당 부분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대략 남생을 반대하는 세력이 중앙정계는 물론 지방에도 존재했음은 유추해 볼 수 있다. 남생의 666년의 지방 순행은 지방의 반대세력을 회유하는 한편 자신의 새로운 세력기반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목적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남생의 지방 순행은 그의 집권에 불만을 가졌던 남건·남산을 중심으로 한 反男生勢力에게는 호기로 여겨졌으며, 그 틈을 이용하여 남건이 막리지(이 역시 대막리지일 것이다)에 올라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러한 형제간의 구체적인 분열과 대립과정은 생략하지만, 국내성을 근거로 평양성의 남건·남산과 무력으로 대립하던 남생은 666년에 대형 苒由와 아들 獻誠을 거듭 당에 보내 항복할 의사를 전하였고, 667년에는 그의 영향력이 미치던 국내성 등 6성과 목저성 등 3성의 병력을 이끌고 唐軍의 嚮導로서 고구려를 공격하는 선봉에 섰다. 이러한 남생의 투항은 고구려 멸망의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 668년 2월 요동 원정군에 대한 군량 보급과 전황파악을 위해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고종에게 당의 필승을 보고한 侍御史 賈言忠이 남생이 향도로 참전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고구려의 내부사정을 모두 알게 된 것을 주요한 논거로 삼고 있는 데서 이 점이 잘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이후 많은 지배세력들의 고구려 이탈을 先導했다는 점에서도 고구려 멸망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진 것으로 판단된다. 2) ‘남건 집권단계(666~668)’ 666년 8월 남건이 대막리지에 올라 집권하게 되면서 남건의 집권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고구려가 수명을 다하는 668년 9월까지는 나당 연합군의 최후의 공격이 지속된 시기였다. 따라서 성공적인 방어전 수행만이 국정의 유일한 목표였을 것이다. 그러나 666년 이후의 대당전쟁 양상은 이전의 전쟁과 현저하게 달랐다.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 고구려 軍民의 항전 자세 내지 의지의 약화 현상이다. 667년 신성전투에서는 城民인 師夫仇가 성주를 포박하여 항복하고 있고, 668년의 鴨淥柵과 辱夷城 전투 패전 이후에는 도망 사례가 보이며, 신성·부여성의 사례처럼 거점성이 무너졌을 때 연관된 주변성들이 쉽게 무너지거나 항복하는 모습도 발견된다. 후자의 경우 고구려 후기 지방제도가 유력한 大城을 중심으로 그 예하에 중소 성이 여러 개 딸려 있어 그 자체가 하나의 군관구로 기능했던 특성에서 기인된 바가 없지 않지만, 645년의 대당전쟁과 비교해 보면, 고구려 군민의 항전의지가 크게 약화되어 있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는 남부 전선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신라는 668년 6월 21일에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한 행군편성을 완료하고 출정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다음 날에 유인원으로부터 고구려의 대곡성·한성 등 2군 12성이 항복해 온 소식을 통보받았다. 북부전선에서 전쟁이 지속되고 있었던 상황에서 남부전선이 스스로 붕괴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남부전선의 전면적 붕괴로 신라군은 별 다른 저항없이 평양성까지 진군할 수 있었다. 신라군이 고구려군과 조우하여 전면전을 벌인 최초의 전투가 평양성 부근 蛇水전투였던 점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항전의지의 약화와 방어망의 전면적 붕괴 상황 속에서 고구려가 더 이상 버티기란 불가능하였다. ‘남건 집권단계’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지배층의 고구려 이탈이 현저했다는 점이다. 666년 12월에는 연개소문의 아우 淵淨土가 12성 763호 3,543명을 이끌고 신라에 항복하였으며, 高質·高慈 부자와 그 일족들이 당에 투항한 것도 이 무렵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추세는 최후의 평양성 전투에서도 이어졌다. 사료에는 보장왕이 남산으로 하여금 수령 98명을 거느리고 먼저 항복하도록 했다고 하였지만, 남산 자신이 지지세력과 함께 자진 항복한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남건으로부터 군권을 위임받은 승려 信誠도 남건을 배반하고 小將 烏沙·饒苗 등과 함께 당에 內應하고 있다. 이러한 고구려 핵심 지배세력의 이탈이나 자진 항복은 모두가 고구려의 멸망이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668년이면 당의 조야도 이를 확신하고 있었다. 4월에 발생한 星變을 보고 당의 허경종이 고구려의 멸망을 단언하고 있는 데서 잘 드러나고 있다. ‘남생형제 집권기’의 고구려의 정치운영은 연개소문의 독재적 운영방식을 계승한 것이었지만, 이미 ‘대막리지 단계’부터 진행된 사회적 통합력의 이완이 더욱 심화되어 핵심 지배세력 내에서도 분열과 갈등이 표출되기에 이르렀다. 남생 형제간의 갈등의 배후에는 정치세력 간의 대립이 숨어있었고, 그것은 결국 최고 집권자 남생의 당 투항으로 이어졌다. 이후 지배세력의 고구려 이탈이 가속화되었고, 고구려 군민의 항전 의지도 크게 약화되었다. 이로써 고구려의 멸망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Ⅳ. 고구려의 멸망의 內的 原因
1. 고구려 멸망 원인론 槪觀과 정리 고구려의 멸망 원인은 전근대 사서에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三國史記 찬자는 사론을 통해 중국 왕조 특히 통일제국인 수당과 전쟁을 계속한 점과 백성에 대한 수탈과 그로 인한 민심 이반과 상하의 불화가 고구려의 멸망 원인으로 보았다. 이는 후대 사서가 대부분 계승하고 있다. 다만 조선시대의 권근은 이를 계승하면서도 좀더 구체화하여 연개소문의 사후 아들들의 권력투쟁을 덧붙이고 있으며, 동국통감의 찬자도 이에 동의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조선 후기의 私撰史書에도 거의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한편 三國遺事는 연개소문의 도교 숭상과 불교 탄압이 멸망의 원인이라고 하였다. 많은 근현대의 역사학자들도 고구려 멸망 원인을 탐색하였다. 필자가 우선 조사한 몇 가지 견해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가. 손진태, ① 598년 이래 70년의 장기에 걸친 대수·당전쟁으로 인한 국력 피폐 ② 연개소문의 독재정치(예 ; 천리장성 축조)로 인한 정신적 단결의 해이 ③ 연씨의 강경 외교정책 ④ 연개소문 자제들의 권력쟁탈전 ⑤ 연남생의 매국적 행위 *근본원인 : 지배귀족계급의 무도·사치한 생활→귀족정치·귀족국가의 근본적 문제 나. 이병도 ① 오랜 전쟁으로 인한 국력(많은 생명과 재물) 허비 → 국운이 증창하는 당 및 신라와의 전쟁 ② 연개소문 사후 三子간의 정쟁→내부적 파탄 ③ 연년 흉작으로 인한 기근의 계속 다. 이호영 ① 삼국사기의 멸망원인론에 동의 ② 독재자 연개소문의 집권, 아들들의 권력 투쟁→정책입안자인 대신 살해, 중앙과 지방의 지배자 분열→애국심 저하 ③ 민심 이반, 사회기강 붕괴 ④ 외교의 실패 ; 강경외교 라. 신형식 ①전제 : 중국 대제국과의 장기전쟁으로 인한 물적·인적 손실, 연개소문의 독재와 내부적인 분열과 갈등 ② 다부족·다종족국가로서의 취약성→북방민족의 빈번한 이탈·투항 ③ 고구려 민족과 문화의 변질 ; 북방 유목민족적 성격→남진정책(평양천도 계기)으로 농업사회로 이전과정에서 상무적·역동적 강건한 기질의 약화, 남북간 이질문화간의 문화충돌 발생 마. 이종욱 ①遠因 : 6세기 중반 이후의 왕정의 피로 ②직접적 원인 : 연개소문의 등장 ㉮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백성들의 민심을 잃음 ㉯ 다수의 대신 숙청으로 다양한 국론 제출 통로 봉쇄 ㉰ 연개소문 정권의 지방세력 장악 실패로 국력의 조직화 불가능 ㉱ 도교 강조로 인한 불교계 반발 ㉲ 대당강경책의 고집으로 침략에 대한 대비 부실과 유화적 외교정책 전개의 미숙 ③구조적 원인 : 다종족국가로 발전한 후에도 중앙집권적 통치체제 미구축 바. 기타 : 池內宏,-연개소문 사후의 아들들의 내분. 임기환-대당전쟁 패배의 원인은 지배귀족 세력의 분열과 이탈 김영하-고구려 내분의 배경에 당의 공작이 있음, 멸망원인은 당의 外侵
이상에서 소개한 몇몇 견해에서 볼 수 있듯이 고구려 멸망 원인론은 매우 다양하다. 이를 정리해 보면 크게 보아 외인론과 내인론, 다시 각각을 장기적·구조적 원인과 단기적·직접적 원인론으로 나눌 수 있겠다. 거론된 고구려 멸망 원인론을 필자 나름대로 정리한 것이 <표 2>이다. <표 2> 고구려 멸망원인론의 정리
2. 고구려 멸망의 內的 原因 앞에서 정리한 기존의 고구려 멸망 원인론을 참조하면서 內因 가운데서 단기적·직접적인 측면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대부분의 논자들이 연개소문의 정변과 집권 및 독재적 정치운영과 그의 사후 남생형제의 길등과 분열을 고구려 멸망의 내인으로서 단기적·직접적인 원인으로 파악하고 있다. 필자 역시 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전술했듯이 미시적인 관점에서 멸망기 고구려의 정치운영의 변화 양상을 살펴본 결과 연개소문의 정변 직후의 ‘막리지 단계’부터 멸망에 이를 만한 직접적인 원인이 생겨났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그보다는 ‘대막리지 단계’가 시작된 644년부터 연개소문과 그 일가의 권력 독점과 독재적 권력행사가 이루어졌고, 이로부터 많은 정치·사회적 문제가 파생되었으며, 그것이 고구려 사회의 내부적 통합력을 현저하게 약화시켰다. 이러한 현상은 남생형제의 분열 이후 더욱 심화되어 고구려 軍民의 항전의지가 약화되었고, 지배세력의 이탈도 격증하였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고구려 멸망의 내적 원인 가운데서 단기적·직접적인 원인은 ‘대막리지 단계’ 이후의 연개소문 일가의 독재와 그로부터 파생된 정치·사회적 파장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점은 凶兆가 ‘대막리지 단계’에 고구려인들이 멸망을 체감하고 있는 점에서도 방증을 얻을 수 있겠다. 그리고 남생형제의 분열과 남생의 당 투항은 고구려를 멸망으로 이끈 최후의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였다. Ⅴ. 맺음말(생략) 「고구려 멸망기 정치운영의 변화와 멸망의 內因」에 대한 토론문 임기환(서울교육대) 668년 고구려의 멸망은 이후 동북아 역사 전개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고구려의 멸망이 당대에 급격하게 전개된 동북아 국제정세 변동의 결과라는 점에서도 그러하지만, 동시에 당시까지 동북아에서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었던 위상이 매우 컸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고구려가 멸망하게 된 대외적 대내적 요인을 찾아보는 연구가 그동안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은 당연하다. 여기에 이문기 선생의 본 발표는 대내적 요인, 그중에서도 연개소문 집권기의 정치운영의 변화상에 초점을 맞추어 이를 정밀하게 추적함으로써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한 국가의 멸망의 원인에 대한 검토는 거시적인 시각에서 접근하기 마련인데, 이문기 선생은 오히려 미시적인 분석을 통해 고구려 멸망의 내적 요인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본 발표의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다만 몇가지 의문점에 대해 질의함으로써 토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1. 발표자는 연개소문 정변 이후를 ‘멸망기’로 구분하고, 이를 연개소문 집권기와 그의 아들들의 집권기로 나누고, 다시 연개소문 집권기를 그의 관직의 변화에 따라 막리지기(642~644) - 태막리지기(644~661) - 태대대로기(661~665)로 나누고 있다. 태대대로에 취임하는 시기는 발표자의 견해가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되지만, 그 이전의 官을 막리지와 태막리지로 나누는 견해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정변 직후부터 연개소문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음은 당시 唐이나 신라 등 국외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때 연개소문이 단지 여러 막리지 중의 하나인 막리지라는 직위로 그러한 권력을 행사하였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비록 <<일본서기>>의 기사대로 同姓인 都須流金流를 대대로에 내세웠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권력 행사를 위해서는 보다 안정적인 직위가 필요하였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것이 바로 태막리지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연개소문이 정변 이전에 承襲한 父職이 바로 막리지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즉 연개소문은 정변 이전에 막리지를 이어 받고, 정변 이후에는 태막리지에 올라 권력을 집중하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또한 대막리지가 644년 당과의 전쟁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국력을 하나로 결집하기 위한 차원에서 신설되었다고 본 점도 납득하기 어렵다. 당시 대외적인 환경이 연개소문에게 권력을 집중하게 된 배경이 된 점은 인정할 수 있지만, 이러한 배경에서 태막리지라는 제도적 장치가 등장하였다고 본 점은 642년 정변 이후에도 여전히 태대로와 오관회의를 통한 귀족연립정권의 성격을 유지하였다고 보는 발표자의 견해와 어긋나는 시각이기 때문이다. 2. 본 발표의 논지를 구성하는 중요한 논거의 하나는 바로 대대로와 귀족회의체로서 ‘五官會議’의 존재이다. 이 오관회의의 존재를 상정할 수 있는 근거는 <<한원>>에 인용된 고려기의 “以前五官 掌機密 謀政事 徵發兵 選授官爵” 란 기사이다. 그런데 이 기사는 위두대형 이상의 관등이 권력의 중추를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 기사가 곧바로 위두대형 이상의 관등자가 참여하는 귀족회의 존재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당시 대대로를 중심으로하는 귀족회의 존재를 상정할 수 있지만, 이를 곧바로 ‘오관회의’로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위두대형 이상의 관등 소지자는 중앙관료 중에서도 그 수가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귀족회의의 운영은 보다 핵심적인 관료 등의 구성원을 상정해야하지 않을까 한다. 그러한 점에서 6세기 중반 이후, 혹은 연개소문 집권기 권력운영의 구조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3. 발표자의 견해에 따르면 연개소문 집권기 고구려 정치권력 구조는 크게 두 계통으로 나누어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태막리지 - 막리지가 중심이 되는 中裏制 신료 즉 內朝이고 다른 하나는 대대로-오관회의로 이루어지는 外廷이다. 태막리지기 이후 연개소문은 內朝를 중심으로 권력을 집중시켜 귀족회의체를 무력화시켰으나, 태대대로의 취임을 통해 반대세력을 무마하기 위하여 귀족연립체제로의 회귀를 꾀하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이해가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이 시기 권력 운영 구조의 윤곽을 가능한 한 좀더 그려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단지 태대대로의 취임을 논거로 한다면 반대로 연개소문이 귀족회의체 조차도 완전 장악하여 이를 무력화시키려는 조처라고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4. 남생으로의 권력 승계의 과정에서도 특별한 조처가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한편으로는 父職의 승계라는 당시 일반적인 관직 운영 방식이 적용되었음도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겠다. 즉 연개소문가의 권력 집중이 그 이전까지의 관료체제나 권력 구조와 어떠한 차별성이 있는지에 대해 좀더 보충 설명을 듣고 싶다. 또한 남생이 동생들에 의해 축출된 후 그의 세력 기반이 국내성과 그 일대라는 점에서, 당시 정쟁의 성격을 중앙귀족세력간의 분열로서 만이 아니라, 중앙과 지방의 관계에서 파악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에 대한 발표자의 견해도 말씀해주기를 바란다. 5. 고구려의 멸망 원인을 찾아보는 것은 혹 결과론적 시각이 될 가능성도 있다. 즉 한 나라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강력한 힘은 내부의 사회모순과 무관하게 언제든지 한 왕조를 패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구려가 멸망에 이를 정도로 그 내부의 사회 모순이 심화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히 검토되지 않았다. 따라서 6세기 중엽 이후를 ‘쇠퇴기’로 성격 규정하는 것이 타당한 지는 좀더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흔히 정치적으로 ‘귀족연립체제’가 전개되는 이 시기의 정치 현상이 자칫 고구려 쇠퇴와 멸망의 요인으로 이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高句麗 滅亡期 政治運營의 變化와 滅亡의 內因」에 대한 토론문 李成制(동북아역사재단) 선생님의 발표를 잘 들었습니다. 고구려의 멸망 원인을 검토하는 이 글에서 이문기 선생님은 연개소문가의 집권기에 한정하여 그 정국의 운영과 특징에서 문제의 소지를 드러내 주셨습니다. 즉 연개소문의 정치운영이 독재적이었다는 기왕의 이해에 더하여, 이 글은 그것의 운영방식과 한계를 구체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발표문에 대해 저로서는 커다란 이견이 없습니다. 다만 토론자로 나선 이 자리가 평소 궁금했던 문제들을 질문할 수 있는 기회라 여기고 몇 가지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 글은 정변 이후 집권기간 중 연개소문의 지위가 막리지→대막리지→태대대로로 바뀌어 갔고, 그에 따라 정치운영의 구도나 방식이 달라졌다는 이해 아래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이에 정치운영에 대한 질문부터 드리고자 한다. 1. 大莫離支 등의 신설 관직이 淵蓋蘇文 집권기에 등장하였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막리지의 설치 시기와 그 역할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설명에 따르면 대막리지 직은 당의 침략이 가시화된 시점에서 정책 결정과 집행의 신속성을 보장하고 국력 결집을 위해 설치되었다고 한다. 관련 사료들에 따르면, 당의 침략이 예견되기 시작한 것은 이미 營留王 말년의 일이었다. 예컨대 영류왕 24년(641) 唐使 陳大德의 보고에 따르면, 당의 高昌 정복은 고구려의 위기감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당사를 각별히 처우했으며, 대대로가 사신의 숙소를 방문하여 당측의 입장을 엿보려 했다는 사실로 보아 그러하다. 이 점에서 전쟁 발발의 가능성에서 대막리지 직을 신설하였다는 이해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또한 대막리지 직의 신설은 누가 보더라도 연개소문의 독재적 지위를 보장하는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그것도 연개소문 정권에 불만을 가진 이들(지방의 安市城主 등)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독재적 성격의 관직 신설은 여러 면에서 어렵지 않았을까. 또한 대막리지 직의 역할이 과연 정책 결정과 집행의 신속성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을까 한다. 연개소문측에서는 그렇게 주장하였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초월적 관직의 신설을 강권하기 위해 내세운 구실에 불과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2. 연개소문과 645년 전쟁의 관계를 두고 볼 때, 연개소문이 전쟁의 전 과정을 주관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연개소문이 당시 최고의 지위에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반드시 최고의 지위에 있어야만 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점은 연개소문이 정변 직후 막리지에 머물렀다는 사실로써도 알 수 있다. 복수의 막리지라고 할지라도 다른 막리지의 활동이 전무하다는 사실은 당시 연개소문의 권력에 버금갈 이들이 없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전쟁의 발발은 연개소문에 반감을 갖고 있던 세력들조차 연개소문의 명에 따를 수밖에 없도록 하였고, 당군을 격퇴한 뒤에는 그 승리의 전과 역시 연개소문의 정치적 지위를 보장하는 명분이 되기에 충분했다고 볼 수는 없을까. 3. 太大對盧의 신설 문제와 관련하여, 발표자께서는 ‘태대대로 단계’의 정치운영이 다른 단계의 그것과 다르다고 보고, 그 성격이 귀족연립체제적인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당시의 정국에서 드러나는 특징은 男生 형제들의 정치적 성장과 권력 행사라 보여지는 데, 연개소문 일가로의 권력집중이 과도하게 전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에서 태대대로의 신설과 그 정치운영은 권력세습과 관련이 있다고 보여진다. 그렇지만 태대대로의 신설이 연개소문 일가의 독점에 대한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보려면, 보충의 설명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예컨대 귀족연립체제적인 것이었다면, 태대대로 역시 3년 임기제였다고 이해해야 하는지 추가의 설명을 부탁드린다. 4. 발표자께서는 멸망기의 마지막 단계로서 ‘남건 집권단계(666∼668)’을 설정하고, 그 구체적 내용으로 전쟁양상의 차이를 제시하였다. 즉 고구려 군과 민의 항전 의지가 약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이미 645년 대당전쟁에서도 지적될 수 있는 모습이었다. 예를 들어, 백암성주의 항복이라든가, 주필산 전투 후 인근 성민들의 집단 도주 현상이 그러한 사례에 속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666년 무렵의 전쟁양상과 645년의 그것 간에 보이는 유사점과 차이에 대해 설명을 부탁드린다. 5. 이 글을 통해 독재적 성격을 가진 연개소문 정권이 종국에는 고구려를 멸망으로 몰고 갔다는 사실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역사상 정권을 오로지 한 이가 연개소문만은 아니었고, 그들 모두가 나라를 망국으로 몰아간 것도 아니었다. 이 점에서 이제는 연개소문 정권이 보인 특징에 대해 좀더 고구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예를 들어, 20여 년에 달하는 연개소문 부자의 집권은 국내 정치면에서 볼 때, 비교적 순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남아있는 사료의 한계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연개소문을 몰아내려는 정변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단지 대당전쟁이라는 목전의 위기 탓이라고 보기에는 힘들 것이다. 또한 645년 駐蹕山 전투나 661년 鴨綠江 전투에서 고구려군이 패한 원인은 당군의 뛰어난 전술 탓도 있었지만, 당시 고구려군을 지휘한 장수들이 무능한 탓도 적지 않았다. 이 두 전역이 가졌던 의미로 볼 때, 이러한 장수들을 인선한 연개소문의 책임이 컸다고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는 연개소문이 기도한 정치운영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고 보인다. 선생님의 답변을 부탁드린다. 가라국의 쇠퇴 원인에 대하여 이근우 (부경대 사학과) 머리말 加耶諸國의 멸망 원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접근한 논문은 그리 많지 않다. 가야의 멸망과 관련된 기존의 논문들은 대체로 가야의 멸망과정 그것도 주로 정치적인 과정에 초점을 맞춘 논문이다. 예를 들어 주보돈은 가야의 멸망을 신라의 팽창과정 속에서 이해하고 있다. 그는 法興王代의 制度的인 정비와 王權强化의 바탕 위에서 낙동강 유역의 진출이 가능하였다고 보았다. 그리고 일찍 신라에 의해 멸망한 김해의 가라국이나, 탁순, 탁기탄과 같은 나라들은 친신라적인 정책을 취하고 있다가 신라세력이 확대해 오자 勢不利를 느끼고 스스로 투항하였다고 하였다. 가야의 멸망 원인 그 자체에 대한 다양한 논의로는 오히려 일본학계에서 수행된 작업을 들 수 있다. 鈴木靖民, 武田幸男 등이 심포지움 형태로 논의한 내용을 정리한 伽耶はなぜほろんだか(大和書房, 1998)가 바로 그것이다. 논문이 아니기 때문에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전망을 제시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이 심포지움에서 李成市는 가야가 왜 멸망하였는가라는 질문은 왜 가야는 백제나 신라만큼 조직화되지 않았던가하는 질문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고 하고, “고구려에서는 4세기 단계에 ‘干(旱)’ 층의 일원적인 조직화가 이루어져 13등으로 이루어진 관위제가 정비되었다. 백제에서도 역시 5세기 말에는 16등의 관위가 성립되었으며, 신라도 520년에는 17등의 관위가 성립된 것이 거의 틀림없다. 고구려에 이어서 등장한 백제 신라에서 왜 조직화가 가능하였는가를 생각해 보면, 백제든 신라든 국가성립 당시부터 장기간에 걸친 고구려의 압력이 조직화에 크게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라는 대외적인 압력과 고구려와의 갈등 속에서 이러한 조직화의 메카니즘이 탄생한 것이 아닐까.”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실례로서 울진 봉평비의 내용을 통하여, “舊高句麗民을 복속시키고 조직화하기 위해서는 高句麗를 능가하는 지배체계를 스스로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백제가 고구려보다 많은 관위체계를 가지고, 다시 신라가 백제보다 많은 관위체계를 만든 것은, 신라를 압박하는 고구려와 백제를 능가하는 지배체계, 지배질서를 신라가 의식적으로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에서 가라는 백제와 신라에 비하면 이러한 고구려의 정치력이 직접 강하게 작용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라고 하였다. 고구려의 압력이 백제와 신라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한 반면, 가야제국은 고구려의 직접적인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고대국가를 향한 조직화가 뒤늦었다고 지적한 것이다. 鈴木英夫는 가야제국 지배층(干)들에 의한 회의체에 주목하고 그 실례로서 任那復興會議를 들고 있다. 임나부흥회의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원래 가야 사회에서 외교상의 중요한 문제가 있으면 협의하는 旱岐들의 회의’로 보고, 백제가 안라지역 근처까지 진주하고 下韓地域에 郡令ㆍ城主를 둔 상태에서, 회의체의 長을 대신하여 회의를 소집하는 등, 가야지역을 통제하게 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윤용진은 “한반도에서 북쪽보다 남쪽이 지리적으로 농경에 적합하다. 그래서 농산물의 생산이 증가하고, 인구가 늘고, 항구적인 집락이 확대되면서, 국가가 출현할 조건도 충족되었다. 그러나 북쪽은 농경기술이 발달해도, 지리적인 조건에 한계가 있어서, 농경 생산물이 충분하게 증산되지 않아서, 충족에 고심하게 된다. 북방민이 활발한 활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초기의 이유의 근저에는, 식료충당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가야는 유리한 조건 속에서 인구가 증가하고 또 안정된 집락이 확대되어, 소지역 단위로 國을 만들었다. 그러나 광역의 고도의 조직을 필요로 하는 국가 형성의 움직임 속에서 안정된 생활에 안주하였기 때문에, 결국 활발한 활동에 의해서만 생존할 수 있었던 백제 신라의 국가조직에 포섭되어 버렸다”고 하여, 충분한 농업생산력이 오히려 가야제국의 고대국가 발전을 저해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武田幸男은 5部ㆍ6部 등의 部에 주목하여, 부를 지배자공동체 혹은 지배공동체라고 보고, 이것이 직접 나라를 만드는 중심이 되는 특정 人間集團이며, 이러한 정치적 군사적으로 정비된 조직이 왕권을 지탱하고 있었는데, 이 部의 관점에서 보면 三國과 가야는 크게 다르다고 하였다. 즉 왕권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유기적이고 조직적으로 결집하지 못한 것, 즉 部制의 결여야말로 백제나 신라보다 먼저 멸망한 이유로 보았다. 鬼頭淸明은 이상의 논점들을 정리하여 가야의 멸망 원인을 가야를 둘러싼 국제적인 환경과 가야제국이 가지고 있는 내재적인 문제로 나누고, 국제적인 환경으로서 고구려와 같은 강대한 압력을 받지 않았으므로, 권력을 집중할 필요가 그다지 없었기 때문에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한 것으로 전망하였다. 내재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왕궁, 수전, 집락 등의 발굴을 통하여 좀더 가야의 실상이 구체적으로 밝혀질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다양한 관점을 제시한 이러한 논의 역시 가야의 멸망을 정치적인 과정으로 파악하는 데는 크게 차이가 없다. 물론 가야제국은 백제나 신라가 같은 고대국가로 성장하지 못하였거나 성장하였지만 그 초기 단계에서 보다 발전된 고대국가에 의해 멸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가야 멸망 최종 단계의 상황에만 주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관점을 다소 달리하여, 가야의 멸망 원인을 기후와 환경파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 보고자 한다. 다만 필자의 능력 부족으로 김해의 가라국만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해 보고자 한다. 그래서 이 글의 가라국은 김해의 가라국으로 한정하여 사용한 것이다. 김해의 가라국의 쇠퇴원인에 대하여 가장 직접적으로 언급한 연구로는 최종규와 김태식의 견해를 들 수 있다. 최종규는 김해 가라국이 쇠퇴하는 원인에 대해서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을 직접적인 원인으로 파악하는가 하면. 김태식은 광개토대왕의 남정 이후 가라국의 주력이 반파국 즉 고령으로 옮겨 가면서, 김해의 가라국이 쇠퇴하게 된다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이러한 견해에 이어서 김해에 있던 세력들이 고령지역만이 아니라 가야의 여러 지역, 나아가서는 일본열도로 진출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제시되었다. 낙랑과 대방의 멸망으로 인하여 김해지역에서 생산되는 철의 중요한 수입처가 사라지면서 김해가 쇠퇴한 것으로 보는 설의 경우도, 김해지역의 철을 수입하는 또 다른 지역으로 일본열도를 상정하면서 여전히 김해지역에서 생산되는 판상철부가 계속 유통되었다는 견해가 있으므로, 낙랑과 대방의 멸망이 김해의 쇠퇴를 초래하였다고 단언할 수 없다. 日本書紀 欽明紀에 인용된 聖王의 언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광개토대왕의 남정으로 바로 가라국이 멸망한 것은 아니다. 또한 고구려가 다른 나라를 정벌했을 때, 그 나라 자체를 없애지 않고 조공이나 공물을 바치는 신속관계를 맺고 그 국가를 존속시키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므로 광개토대왕의 남정만으로 가라국의 쇠퇴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필자로서는 이러한 견해들의 당부를 판단할 충분한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지만, 5세기에 들면서 가라국이 현저하게 쇠퇴한 것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가라국이 고구려의 남정으로 큰 타격을 입기는 하였지만, 나라가 완전히 멸망한 상태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급격하게 쇠퇴한 원인을 좀더 널리 찾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가라국 쇠퇴의 또 다른 원인으로 환경의 변화 및 장기간의 철 생산으로 인한 삼림의 황폐화라는 요소를 설정해 보았다. 그러나 기후환경을 확인할 수 있는 사료가 극히 제한되어 있고, 삼림의 황폐화 과정을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것도 용이한 일이 아니므로,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상관계기사, 누리(蝗)의 발생, 왜의 침입기사, 고구려와의 전쟁 등 여러 가지 자료를 종합하여 4세기에서 6세기에 이르는 기후환경을 간접적으로 추정해 보았다. 나아가 철 생산에 필요한 목탄의 양, 이에 따른 목재의 남벌 등의 상황을 상정해 보았다. 글의 구성은 어디까지나 가설적인 것이며,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 정도의 의미가 있을 뿐이다. 논리의 비약이나 과도한 추정을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기 바란다. 1. 5세기의 기후 환경 1) 중국 대륙과 일본열도 4-6세기는 전세계적으로 한랭한 기후가 엄습한 시기이다. 중국의 요녕성, 황하 이북, 양자강 유역, 일본의 尾瀨 등에서 광범위하게 5-6세기의 기후 하강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는 역사적인 기록으로는 남북조시대(기원 420-589)에 남조는 南京의 覆舟山(북위 32도, 동경 119도)에 氷藏室를 설치하였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周 이래로 역대 왕조는 빙장실을 설치하고 음식물을 저장하였으나, 도읍은 항상 화북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겨울철의 눈이나 얼음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南京(建業)에서도 빙장실을 만들었다는 것은 이 시기에 겨울철이 결빙될 정도로 기온이 하강하였음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근년(1906-1961) 남경의 1월 평균기운은 2.3℃이며, 0℃ 이하로 내려간 해는 3회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이 지역의 5-6세기 기온은 현재보다 2.0℃ 이상 낮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연평균 기온으로는 약 1℃ 낮아진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의 경우에는 6세기 중반까지 한랭한 기후가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淮水가 225년에 이어 515년에 거의 300년 만에 다시 얼어붙었다고 한다. 이해에는 화북평원에서 大乘敎의 난이 일어난 해이기도 한데, 512년에는 “이 무렵 수해와 한해가 많아서 기근이 확산되었으며, 513년에는 봄의 기근이 일어났다. 516년에는 瀛州에 기근이 일어났다. 517년에는 華北 일대에 대기근이 일어났다고 하는 등 해마다 기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기근의 한 원인은 한랭한 기후였을 것으로 보인다. 남조의 梁에 있어서도 양무제의 시기(502-549)에 인민이 流亡하는 일이 많았으며, 또한 각지에서 농민의 반란이 빈발하였다고 한다. 남조의 수도가 위치하였던 건업이 북위 32도에 위치하고 김해가 35도선에 위치하므로 상대적으로 김해지역의 기후변동이 더 컸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기원 400년 전후의 시기는, 일본열도 각지에서 고분시대 수장의 계보가 단절되거나 이동하는 현상이 현저해지며”, “古墳時代 중기인 5세기에는 畿內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서일본의 선진지대에서 화덕이 출현한다.” “화로를 대신하여 화덕이 채용된 것은 생활양식의 커다란 변화를 의미한다.” “화덕의 채용은 한반도계 도래집단의 생활양식의 영향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이 시기를 ‘고분한랭기’라고 부른다. 5세기 무렵에 한반도로부터 일본열도에 다수의 사람들이 유입된 사실에 대하여, “北魏의 太武帝는 기원 440년 이제까지 중국의 서북변경에서 할거하고 있던 五胡 諸國을 평정ㆍ통일하여 강력한 기마민족국가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그 전후한 시기에 北魏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였거나 혹은 北魏의 지배에 굴복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다른 기마민족들 중 그 일부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이전부터 요하 주변에 근거를 두고 있었던 夫餘와 결합하였고 다시 남쪽으로 대이동을 시작하였다. 이들이 한반도에서 최종적으로 거점으로 삼은 곳이 가야지역(북위 36도, 동경 128도)이다. 그리고 이 가야지역에서 다시 바다를 건너 상륙한 곳이 바로 북부 九州의 해안지역 그 중에서도 가야와 같은 지명을 가진 可也 즉 糸島半島(福岡縣 서부)의 가야산록 지역 혹은 그 동쪽의 遠賀川 하구지역일 것으로 추측된다. 糸島半島에 상륙한 도래집단의 일부 혹은 대부분은 다시 筑後川 유역에 정주하였고, 다시 그 일부는 남하하여 菊池川 유역(웅본현 북부)로 이동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이러한 주장의 당부는 차치하고라도, 이처럼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은 동아시아 전역에 한랭한 기후가 내습한 시기로 볼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사실, 北魏의 화북 통일, 한성백제의 멸망과 南遷, 뒤이은 호남지역으로의 진출, 가야의 멸망 등은 사실 기후변동과 정치변동의 연쇄반응을 일으킨 결과로 생각된다. 2) 한반도 한반도의 고대 기후에 대해서는 선행연구가 존재하지만, 이들의 견해가 반드시 서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김연옥의 경우는 4-6세기를 온난한 시기로 보면서 201년에서 400년까지를 건조기, 401-700년까지를 습윤기로 보았다. 한편 山本武夫는 4-5세기를 한랭기로 보았다. 다만 351-400년까지를 그 기간 중에서는 비교적 온난한 시기로 파악했다. 신보배 역시 이 시기가 한랭한 기후와 온난한 기후가 반복되는 불안정한 시기로 파악하고 있다. 기존의 연구에서 4-6세기에 걸친 시기에 나타난 한반도의 기후환경이 구체적으로 어떠하였는지에 대해서 일치된 견해에 도달하지 못하였으나, 기후환경이 불안정한 시기라는 점은 수긍할 수 있다. 다만 이 글에서는 기상 현상만이 아니라 누리의 발생과 같은 자연 현상, 그리고 전쟁과 같은 인문현상에 대한 자료까지 고찰의 폭을 넓혀서 검토해 보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살펴보면 4세기 대에는 홍수의 수가 비교적 적은데 대하여, 5세기에는 홍수의 수가 급증한다. 홍수만이 아니라 한발, 누리의 발생이 빈번하여 기근이 자주 발생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내물이사금 11년 4월조에 의하면, 큰물이 져서 산이 무너진 곳이 13곳이나 된다고 하였다. 17년에는 봄여름에 크게 가물어서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렸으며, 많은 사람들이 유망하였다. 이에 사신을 보내어 창고를 열어 진휼하였다고 하였다. 18년에도 백제의 독산성주가 300명을 이끌고 와서 항복하므로 왕이 이들을 받아들여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고 한다. 17년의 한발이 전국적인 현상이었을 것을 생각한다면, 독산성주가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신라로 넘어온 것도 식량 부족에 기인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이 해에 雨魚 즉 고기가 비처럼 내렸다고 하였는데, 이도 역시 바다에서 용오름과 같은 현상이 발생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26년에도 역시 봄여름에 한발이 들어서 흉년이 들고 백성들이 굶주렸다고 하였다. 한편 33년에는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았으며, 34년 정월에는 이른 봄인데도 불구하고 도성에 역병이 만연하였으며, 2월에는 흙비가 내리고 7월에는 누리가 발생하였다고 곡식이 익지 않았다고 기록하였다. 42년 7월에도 하슬라주에서 한발이 들고 누리가 발생하여 흉작이 되어 백성들이 굶주렸다고 하였다. 44년에도 누리가 들을 덮었다고 한다. 46년에는 역시 봄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이처럼 내물왕대(356-401)에는 기근에 대한 기록들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특히 누리가 3차례나 발생하였고, 44년조에서는 누리가 들을 덮었다고 하였으므로, 이 해에는 곡물의 정상적인 수확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뒤를 이은 실성왕대에도 5년 7월에 나라의 서쪽에서 누리가 발생하여 곡식을 먹어치웠으며, 겨울 11월에는 얼음이 얼지 않았다고 하였다. 눌지마립간 4년에는 봄여름에 큰 한발이 들었으며, 가을 7월에는 백성들이 굶주려 자식을 파는 자가 있었다고 하였다. 15년에는 가을 7월에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물이 피해를 입었다. 16년에는 곡식이 비싸져서 백성들이 소나무껍질을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년에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으며, 20년에는 여름 4월에 우박이 내렸으며 억울한 죄수가 있는지를 조사하였다. 22년에는 우두군에서 계곡물이 불어 50여가를 휩쓸어갔으며, 도성에서는 큰 바람과 비 그리고 우박이 내렸다고 한다. 37년에는 봄여름에 한발이 들고 38년에는 가을 7월에 서리와 우박으로 곡식이 피해를 입었으며, 41년에는 서리가 내려 보리가 피해를 입었다고 하였다. 이처럼 눌지왕대는 자연재해나 흉년이 끊이지 않았다. 자비마립간 8년에는 큰물이 져서 산이 무너진 곳이 17개소였으며, 5월에는 사벌군에서 누리가 발생하였다고 하였다. 12년 여름 4월에는 나라의 서쪽에서 큰물이 져서 백성들의 가옥이 물에 떠내려갔다고 하였다. 소지마립간 2년에는 도성에 한발이 들었으며, 10월에는 백성들이 굶주려 창고의 곡식을 풀어 진급하였다고 한다. 한편 4년 4월에는 비가 오래 내리므로 감옥에 억울한 죄수가 있는지를 확인하게 하였다. 5년 4월, 7월에는 큰물이 졌으며, 10월에는 일선군으로 가서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을 살펴보고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6년 3월에는 비와 우박이 내렸으며, 14년에는 봄여름에 가뭄이 들므로 왕이 스스로를 책망하여 먹는 음식을 줄였다. 16년 4월에도 큰물이 졌으며, 18년 5월에는 큰 비가 내려 알천이 범람해 200여 가가 떠내려갔다. 19년에는 한발이 들고 누리가 발생하였다. 지증왕 7년(506)에는 봄 여름에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열어 진급하였다고 한다. 10년에는 가을 7월에 서리가 내려 콩이 피해를 입었다고 하였다. 진흥왕 3월에 눈이 1척이 왔다. 진평왕 7년에는 3월에 가뭄이 들어 왕이 음식을 줄이고 억울한 죄수들이 있는지를 확인하였다. 11년(589)에는 나라 서쪽이 홍수가 나서 33600호가 떠내려가고 죽은 자만 200여 인이라고 하였다. 5세기에도 가뭄이나 서리, 홍수 등의 기사가 있지만 그 빈도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실제로 특이한 기상현상이 100년 동안 불과 5차례만 기록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6세기의 기후는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중에서도 5세기와 달리 6세기에는 가뭄이 들기는 하지만 누리가 발생하는 상황에 이르지는 않았다는 점도 주목된다. 누리는 가뭄이 심각한 경우에만 발생하는 특별한 현상으로 볼 수 있겠다. 즉 4-5세기에 상당히 빈번하게 나타나던 누리가 소지왕대를 끝으로 성덕왕대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누리가 다시 발생한 것은 성덕왕 19년(720)의 일이다. 220년 이상 신라에서 누리가 발생하지 않은 것이다. 신라본기의 누리 발생기사에 대해서 일각에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4세기 중엽부터 5세기 사이에만 대부분의 누리 기사가 집중되어 있는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누리의 발생은 대체로 7~8월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러한 누리의 발생은 한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 한발로 인하여 메뚜기가 먹을 풀이 없어지면, 종 유지를 위한 기제가 발동하여 대량으로 메뚜기가 번식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즉 누리의 발생은 한발 → 누리 → 기근이라는 순서로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누리의 발생은 한발이라는 조건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한발은 한랭기에 빈번하게 나타나는 기상 현상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한발이 누리의 발생을 초래하기에 이르는 상황은 그만큼 한발이 심각했다고 하겠다. 결국 누리는 가뭄의 심화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한다면, 한랭기를 나타내는 한 지표로 이용할 수 있는 셈이다. 고구려의 경우도 신라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기후변화에 직면하고 있었다. 고국원왕대에는 4년(359) 12월에 겨울이 눈이 오지 않았다고 하였는가 하면, 5년에는 가을 7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의 피해를 입었다고 하였다. 한편 13년 11월에는 눈이 5척이나 내렸다고 한다. 소수림왕 7년(377) 10월에는 눈이 내리지 않고 천둥이 쳤으며, 백성들 사이에 역병이 퍼졌다. 8년에도 한발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자 서로 잡아먹었다고 하였다. 고국양왕 5년(388) 4월에는 크게 가물었으며, 8월에는 누리가 발생하였다. 6년에는 봄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 먹었으며, 왕은 창고를 열어 진급하였다고 한다. 광개토대왕 15년(405) 가을 7월에는 누리가 발생하였다. 장수왕 2년(414) 12월에는 도성에 눈이 5척이 내렸고, 7년 5월에는 나라의 동쪽에 큰 물이 져서 왕이 사신을 보내어 사정을 살피게 하였다. 문자명왕 8년에는 백제에 기근이 들어 백성 2000명이 항복해 왔다고 하였으며, 11년(502)에도 8월에 누리가 발생하였다. 안장왕 5년 봄에는 가뭄이 들고 8월에는 병사를 보내어 백제를 침략하였다. 10월에는 기근이 들어 창고를 열고 구휼하였다. 안원왕 5년(535) 5월에 나라 남쪽에서 큰물이 져서 민가가 떠내려갔으며, 죽은 자가 200여 명이었다. 6년에도 봄여름에 가뭄이 들었으며, 사신을 보내어 굶주린 백성들을 돌보게 하였다. 같은 해 8월에 누리가 발생하였다. 7년 3월에는 백성들이 굶주려 왕이 돌아다니며 식량을 주어 구하였다고 한다. 한편 10년 10월에는 겨울철인데도 복숭아와 오얏꽃이 피었는가 하면, 12년 4월에는 여름인데도 우박이 내렸다. 양원왕 2년 4월에도 역시 우박이 내렸다. 또 10년 겨울에는 12월인데도 얼음이 얼지 않았다. 평원왕 3년에는 6월에 홍수가 났으며, 5년 여름에는 크게 가뭄이 들어 왕이 음식을 줄였다. 13년 8월에는 누리가 발생하고 가뭄이 들므로 궁실을 중수하는 일을 그만 두었다. 23년에는 7월에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이 피해를 입었으며, 10월에는 백성들이 굶주렸다. 그래서 왕이 다니면서 구휼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고구려가 기원 427년에 압록강 유역(북위 41도, 동경 125도)에서 남쪽의 平壤(북위 39도)으로 천도하였다. 그 배경에는 한랭한 기후로 인하여 고구려의 생산력 저하라는 상황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고구려는 455년 이후 거듭 백제를 침공하였고, 마침내 475년에는 한성을 함락시켰다. 그 결과 백제는 남방의 熊津(현재의 공주)로 천도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기상 변화의 기사는 신라처럼 많지 않기 때문에 전반적인 동향을 복원하는 것은 용이하지 않다. 그렇지만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에 걸쳐서 간헐적이기는 하지만 가뭄, 기근, 누리, 냉해를 비롯하여 홍수나 異常暖冬 등의 기사들을 찾을 수 있다. 신라와 비교해 보면 6세기대에 신라에서는 전혀 누리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고구려에서는 500년 이후에 3차례나 누리가 발생하였다. 이는 고구려가 좀더 고위도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 지역에서는 기후의 변동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으나, 고구려에서는 여전히 그 영향이 남아있었던 것으로 추정해 보고자 한다. 백제에서도 4세기 중엽의 근구수왕대에 이르러 5년(379) 4월에 하루종일 흙이 비처럼 내렸으며, 8년에는 봄부터 6월까지 비가 오지 않아서 백성들이 굶주려 자식을 파는 자들이 있을 정도였다. 이에 왕이 궁을 나서 곡식을 풀었다. 진사왕 2년(386)에는 7월에 서리가 내려 곡물이 피해를 입었다. 비유왕 3년(429)에는 12월에 얼음이 얼지 않았으며, 28년(454) 8월엔 누리가 곡식을 해쳤으며, 기근이 들었다. 동성왕 4년(482) 10월에는 큰 눈이 내려 한 장이나 쌓였다. 12년 겨울 11월에도 얼음이 얼지 않았다. 14년에는 3월에 눈이 왔다. 19년 6월에는 큰 비가 와서 백성의 가옥이 떠내려가고 부서졌다. 21년 여름에는 크게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 서로 잡아 먹었다. 도적도 크게 일어나자 신하들이 창고를 열어 구휼하고자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한산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고구려도 도망쳐 들어간 자가 2000명이었다고 한다. 이어서 무령왕 2년(502) 봄에는 백성들이 굶주리고 또 역병이 돌았다. 3년 겨울에는 얼음이 얼지 않았다. 6년에는 봄에 크게 역병이 돌고 3월에서 5월까지 비가 오지 않았다. 강과 못이 마르고 백성들이 굶주렸다. 이에 창고를 열어 구휼하였다. 21년(521) 5월에는 홍수가 났고, 8월에는 누리가 발생하여 곡물이 피해를 입었다. 백성들이 굶주려 신라로 도망쳐 들어가는 자가 900호였다고 하였다. 법왕 2년(600)에는 크게 가물었다. 이처럼 삼국사기의 기사를 살펴보면 특히 5세기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격변기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기상이변이 빈번하게 발생하는가 하면, 외교나 전쟁관계의 기사가 급증한다. 특히 전체적인 동향으로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신라가 왜의 침입을 받은 회수가 급증하고 있는 점, 또한 고구려와의 전투기사가 가장 많은 시기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백제와 통교하면서 백제와 협력하여 고구려의 침입을 막는 기사들이 빈출한다. 즉 고구려의 남하를 신라, 백제 그리고 가야까지 참여하여 저지하고 있는 상황이었음을 쉽게 알아낼 수 있다. 그 구체적인 양상을 살펴보도록 하자. 2. 국제정세의 변화 1) 왜의 침입
우선 왜의 신라 침입 기사를 살펴보면 4세기에서 5세기 사이에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 4세기 중엽부터 살펴보면 흘해이사금 37년(346)에 왜의 군사가 갑자기 풍도에 이르러 변방의 민가를 노략질하였다고 하였다. 내물왕 9년에 왜병이 크게 침입해 왔으며, 왕이 듣고서 대적할 수 없을까 두려워하여 풀로 허수아비 수천 개를 만들어 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서 토함산 아래에 나란히 세워 두었다. 그리고 용맹한 군사 1천 명을 부현의 동쪽 들판에 숨겨 놓았다. 왜인이 자기가 무리가 많음을 믿고 곧바로 나아가자 숨어있던 군사가 일어나 불의에 공격하였다. 왜군이 크게 패하여 달아나므로 추격하여 그들을 거의 다 죽였다고 하였다. 허수아비로 수천 명을 만들어두었는데, 왜병들이 자신의 수가 많다고 여긴 것으로 보아 많은 병력이 동원된 전투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38년에도 역시 왜인들이 금성을 포위하여 닷새가 지나도록 물러가지 않았는데, 왕이 말하기를 “적들이 배를 버리고 내륙 깊숙이 들어와 죽음을 각오하고 있으니 그 예봉을 막기 어렵다”고 하고 성문을 열지 않으니 적들이 물러갔다고 한다. 이처럼 왜인들이 대규모로 혹은 내륙 깊숙이 쳐들어온 것 역시 신라와 마찬가지로 일본열도에서 한발이나 홍수 등으로 기근이 들어 식량을 확보할 목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실성이사금대에 들어서는 원년 3월에 내물왕의 왕자 미사흔을 왜에 보내어 우호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4년 여름 4월에 역시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는데, 이때, 왕이 기병을 이끌고 독산의 남쪽에서 요격하여 두 차례 싸워서 300여 급을 죽이고 사로잡았다고 하였다. 이러한 침입은 전투의 규모로 보아 대규모 병력이 왔다기보다는 대마도나 구주 등 동해 연안지역의 왜인들이 소규모로 쳐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5년에는 누리가 발생하였고, 이듬해 3월에는 다시 왜인들이 동쪽 변경을 침입해 왔고, 6월에는 다시 남쪽 변경을 침입하여 100인을 사로잡아갔다고 하였다. 7년조에서는 왕이 왜인들이 대마도에 군영을 두고 무기와 양식을 비축하고 신라를 공격하려고 한다는 것을 듣고 이를 먼저 공격하려고 하였다. 14년 8월에 왜인과 풍도에서 싸워서 이겼다고 하였다. 눌지마립간 때에는 15년 4월에 왜병이 동쪽 변경을 침입해 와서 명활성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다고 하였고, 7월에는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쳤다고 하였다. 24년에는 왜인이 남쪽 변경을 침입하여 생구를 사로잡아 갔으며, 여름 6월에는 다시 동쪽 변경을 침입하였다고 하였다. 28년 4월에는 왜병이 금성을 10일동안 에워싸고 있다가 양식이 다하자 돌아갔다고 하였다. 가장 빈번하게 침범해 온 때는 바로 자비마립간 시기(458-478)이다. 2년 2월에는 왜인이 병선 백여 척으로 동쪽 변경으로 쳐들어와 월성을 에워쌌다고 한다. 사방에서 화살과 돌이 비처럼 쏟아졌으나 왕성을 지켰다. 적이 장차 물러나려고 하자 병사를 내어 쳐서 이겼다. 북쪽으로 추격하여 바닷가에 이르니 적들 중에서 빠져죽은 자가 절반이 넘었다고 한다. 이 전투는 상당히 대규모로 진행된 것으로 생각된다. 5년에는 왜인이 활개성을 습격하여 깨트리고 포로 1000명을 잡아갔다. 6년 2월에는 왜인이 삽량성(양산)을 침략하여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때 왕이 벌지 덕지에게 명하여 길에서 매복케 하여 크게 패퇴시켰다. 또한 왕은 왜인이 자주 영토를 침략해 오므로 두 성을 쌓도록 하였다. 19년에는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입해 오므로, 왕이 장군 덕지를 보내어 격퇴케 하고 200여 인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고 한다. 20년에는 왜인이 병사를 일으켜 다섯 길로 쳐들어왔으나 마침내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소지마립간대에는 4년 5월에 북쪽 변경을 침입해 왔고, 8년 4월에는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19년 4월에는 왜인이 변경을 침입해 왔다. 이해에는 가뭄이 들고 누리가 발생하였다. 22년 3월에는 왜인이 장봉진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소지마립간 이후에는 문무왕 5년(665년까지) 왜에 관한 기사가 160년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마치 누리에 관한 기사가 5세기대에 집중되어 있는 것처럼, 왜의 침입도 5세기대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와 같이 5세기대의 왜의 신라 침입이 가장 빈번하게 이루어졌던 때이며, 100년간 20회 가까이 신라를 침공하였다. 때로는 경주지역까지 들어와 금성을 에워싸는가 하면, 변경을 침략하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왜의 침입을 단순히 정치적인 이유로만 설명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후대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식량을 확보하기 어려웠던 대마도인들은 고려나 조선의 변경을 침입하여 식량을 약탈하였던 것처럼, 5세기대에 왜가 빈번하게 신라를 침입한 것은 대마도인들의 식량 확보를 위한 경우를 포함하여, 일본열도로부터 같은 목적으로 특히 동해에 면한 왜인들의 침입을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 고구려와 말갈의 침입 한편 이 시기의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에서도 여러 가지로 주목할 만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4세기 말에서 5세기 중엽까지는 신라가 인질을 파견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가 유지되지만, 5세기 후반에는 백제와 합세하여 고구려 그리고 말갈의 침입을 막아내고 있다. 내물왕 37년(392) 봄 정월에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왔다. 왕은 고구려가 강성하므로 이찬 大西知의 아들 實聖을 보내 볼모로 삼았다고 하였다. 이 기사는 5세기 전반의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규정짓는 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이후 내물왕의 아들 복호가 볼모로 파견될 때까지는 인질외교를 통해서 우호적인 관계가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복호가 박제상의 활약으로 신라로 돌아온 이후에는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가 소강상태를 보이다가 450년 이후에는 본격적인 대립상태에 빠져든 것으로 생각된다. 눌지 마립간 34년(450) 7월에 고구려의 변방 장수가 悉直의 들에서 사냥하는 것을 何瑟羅城 성주 三直이 군사를 내어 불의에 공격하여 그를 죽였다. 고구려왕이 이를 듣고 노하여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내가 대왕과 우호를 닦은 것을 매우 기쁘게 여기고 있었는데, 지금 군사를 내어 우리의 변방 장수를 죽이니 이는 어찌 의리있는 일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군사를 일으켜 우리의 서쪽 변경을 침입하였다. 왕이 겸허한 말로 사과하자 물러갔다. 이후 38년 8월에도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입해 왔으며, 39년에는 고구려가 백제를 침입하자 신라가 군사를 내어 이를 도왔다. 이때부터 신라와 백제가 힘을 합쳐서 고구려의 공격을 저지하는 공동전선을 펼치고 있다. 그만큼 이 시대의 고구려의 남하 압력이 강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자비마립간 때에도 이러한 상황은 계속되어 11년 봄에는 고구려와 말갈이 함께 북쪽 변경의 실직성을 습격해 왔으며, 이에 신라는 하슬라인들은 모아 니하라는 곳에 성을 축조하고 있다. 이는 고구려와 말갈의 침입을 저지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17년(474) 7월에는 고구려왕 거련(장수왕)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였고, 개로왕은 아들 문주를 보내어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에 군사를 내어 구원토록 하였으나 구원병이 이르기 전에 이미 백제는 함락되고 개로왕은 피살되었다. 고구려의 공격으로 결국 한성 백제가 일시적으로 멸망하는 위기 상황이 온 것이다. 소지마립간 3년(481) 2월에는 고구려와 말갈이 함께 북쪽 변경으로 쳐들어와 호명성 등 일곱성을 빼앗고 또 彌秩夫까지 진출하였다. 이에 신라 군사가 백제 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여러 길로 나누어 이들을 막았다. 적이 패하여 물러가므로 뒤쫓아가서 니하의 서쪽에서 공격하여 깨트렸는데 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고 하였다. 이 시기에는 고구려와 말갈이 한 그룹을 이루고, 신라는 백제는 물론 가야군과도 합세하고 있는 것이다. 6년 7월에도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입하자 신라는 백제와 함께 모산성 아래에서 공격하여 크게 이겼다. 11년 9월에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입하여 과현에 이르렀고, 10월에는 호산성을 함락하였다. 16년 가을 7월에 장군 실죽 등이 고구려와 薩水의 들판에서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犬牙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고구려 군사가 그곳을 에워쌌다. 백제왕 牟大가 군사 3천 명을 보내 구원하니 포위를 풀었다. 17년 가을 8월에 고구려가 백제 雉壤城을 에워싸므로 백제왕이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이 장군 덕지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게 하자, 고구려 무리들이 도망하였다. 백제왕이 사신을 보내와 고마움을 표하였다. 18년 7월에는 고구려군이 우산성을 공격해 왔고, 장군 실죽이 나아가 싸워서 니하에 이를 깨뜨렸다. 19년 8월에는 고구려가 우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진흥왕 9년(548) 2월에는 고구려가 濊人들과 함께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하므로 백제가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왕은 장군 주령으로 하여금 날랜 병사 3000명을 거느리고 치게 하였는데, 죽이거나 사로 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고 하였다. 진흥왕 11년(550)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싸우는 틈을 노려 도살성과 금현성을 빼앗고 여기에 갑사 1000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이로써 신라가 백제와의 동맹을 깨트리고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한다. 12년에는 거칠부로 하여금 고구려의 10군을 점령케 하였다. 그러나 이후 7세기까지 약 50년간 고구려와 교전한 기사는 급격하게 줄어든다. 한편 말갈의 경우도 4세기 후반의 내물왕대부터 빈번하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내물왕 40년(395) 가을 8월에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으므로 군사를 내어 그들을 悉直의 들판에서 크게 쳐부수었다. 11년 (468) 봄에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의 悉直城을 습격하였다. 가을 9월에 하슬라 사람으로서 15세 이상인 자를 징발하여 泥河에 성을 쌓았다. 소지마립간 2년(480) 여름 5월에 서울에 가뭄이 들었다. 겨울 10월에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의 곡식을 내어 진휼하였다. 11월에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입하였다. 소지마립간 3년에도 말갈이 고구려와 함께 북쪽 변경을 쳐들어왔다. 그러나 이후 태종무열왕 때에 고구려, 백제와 함께 말갈이 쳐들어왔다고 할 때까지 180년 이상 말갈에 관한 기사는 나타나지 않는다.
3. 가라국의 쇠퇴 원인 이상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4-5세기가 특히 기후변동이 심하고 이상 기상현상이 빈번하게 나타났으며, 아울러 이러한 기후변동이 왜나 고구려가 신라를 빈번히 침입한 원인 중의 하나였다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환경적인 요인이 가라국 쇠퇴에도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철의 생산이 가라국의 발전과정에서 크게 기여하였다고 하더라도, 철 생산이 몇백 년 지속될 경우 철생산과 관련된 삼림의 벌채로 인한 환경파괴 역시 가라국 쇠퇴의 한 원인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 가라국의 제철과 환경 파괴 김해지역이 이미 3세기 중엽에는 철생산지로서 중요한 지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래서 韓 濊 倭, 낙랑 등에도 철을 공급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김해지역이 어느 정도의 철을 생산했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직접적으로 김해지역의 철생산량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후대에 철을 생산한 지역의 철 생산량을 참고로 김해지역 철생산량을 추정해 보고자 한다. 먼저 고령 야로현의 경우는 철의 생산이 많아서 세공으로 일년에 정철 9500근을 바쳤다고 한다. 이 양은 5-6t에 달한다. 울산 달천광산의 경우는 세종대에 세공이 생철 1만 2천 5백근이었다. 이는 7t이 넘는 양으로 생각된다.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겠지만, 김해의 가라국이 한, 예, 왜 및 한의 군현에까지 철을 공급했다고 한다면, 이 규모와 큰 차이가 나지 않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철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목탄을 연료로 써야 한다. 역시 조선시대의 사례를 보면, 40바리의 철광석을 녹여 15-20바리의 철을 생산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단위로 환산하면, 철광석 2.3t과 숯 1.8.t을 써서 1.2t의 철을 생산한 것이다. 물론 조선시대에는 철광석을 선광하는 등 제철기술에 진보가 있었고, 또한 선철을 다루어 연철이나 강철로 만드는 데는 다시 목탄이 필요하다. 유럽의 경우에는 초기 고로에서 1t의 선철을 생산하는데 약 6t의 광석에 5t의 목탄이 필요했다고 한다. 한편 고대제철로의 복원시험에서는 제련작업 과정에서 철광석 525kg, 목탄 1200kg을 사용하여, 괴련철 84.3kg을 얻고, 다시 여기에 목탄 220kg을 사용하여 최종적으로 9kg의 철을 얻었다고 한다. 여러 자료들이 동일한 조건에서 얻어진 것들이 아니고 또한 최종적인 결과물도 선철, 연철, 강철 등으로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구리의 생산에 있어서 37kg을 얻는데, 숯이 6t이 필요하였다는 보고를 참고하며, 이동완의 실험을 통해서 철 1kg을 생산하는데 드는 숯의 양이 약 160kg이 들었다는 수치는 신뢰할 만한 것으로 보인다. 추정을 거듭하여 만약 3세기에서 5세기 사이에 김해가 조선시대의 야로 혹은 달천 광산 정도로 철을 생산하였다고 한다면 대략 5-7ton 정도를 생산한 셈이다. 만약 6ton을 생산하였다고 하더라도 철 생산에 필요한 연간 소비 목탄량은 6000kg×160kg = 960t에 이른다. 양질의 목탄을 생산하는 데는 주로 참나무숯이 사용되었으므로 철생산에 필요한 목탄도 참나무를 주원료로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목재를 숯으로 만드는데 그 무게가 통상적으로는 1/10로 줄어든다(표 참조). 특히 참나무의 경우는 지름이 15~18cm 정도되는 생나무를 사용한다고 한다. 보통 벌채한 지 약 3주가 지난 생나무를 태워 굽는데, 3주 동안 자연 건조가 되면서 50%쯤 되던 나무의 수분이 35%로 줄어든다고 한다. 현재의 일반적인 제탄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대에도 生材를 사용한다고 가정해 보자. 만일 높이 20m, 원구 평균 직경 40cm 말구 평균 직경 20cm의 참나무 한 그루의 재적은 약 1.4㎥이다. 참나무 1㎥의 중량은 1,095kg이고, 3주간 건조되는 과정에서 그 무게가 15%정도 감소하여 약 1.3ton이 되었다고 할 때, 필요한 참나무는 약 7,400그루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숯을 만들기 좋다고 하는 15~18cm 굵기의 참나무를 사용한다면 상황을 달라진다. 만약 원구 평균 직경이 20cm, 말구 평균 직경이 15cm, 높이 20m라고 한다면, 재적은 0.480㎥이다. 이를 3주간 건조하면 무게는 0.447ton이 된다. 이를 숯으로 만든다고 한다면, 필요한 참나무는 21,476그루가 된다. 김해지역의 경우 2004년 현재 김해시의 임야면적은 24,281ha이고 ha당 약 50㎥의 산림이 있다고 한다면, 총 산림축적량은 1,214,050㎥ 즉 121만 그루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현재의 식생으로 볼 때 우리나라 삼림에서 참나무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30%이다. 40만 그루의 참나무가 있고, 이를 한 해에 2만 그루씩 철을 생산하는데 사용한다면, 참나무의 생장률을 4%로 잡더라도 한 그루에 16,000그루만 늘어나는 셈이므로, 1년에 4천 그루씩 참나무가 줄어들게 된다. 100년 후에는 참나무는 모두 사라지게 된다는 계산이다. 물론 소나무 등의 다른 목재를 함께 쓴다고 해도 철의 생산에만 방대한 양의 목재가 소비되는 상황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철생산과 관련되어 소비되는 목재에 대한 추산과 아울러 김해지역에서 다른 다양한 목적으로도 사용하였다고 한다면, 김해 주변지역의 산림에 대한 벌채가 빈번하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토기의 생산, 난방이나 조리, 가옥 건립, 선박의 조영 등 목재는 당시에 가장 널리 쓰이는 소재의 하나였을 것이므로, 김해지역의 삼림의 황폐화라는 상황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이에 대해서 고령군은 산림의 면적이 역시 24,361ha이고, 목재량은 1,563,516㎥이다. 삼림의 규모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 지역이 4세기까지는 대량의 철을 생산하지 않았으므로 목재자원이 훨씬 풍부했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김해의 중심세력 중 일부가 고령으로 옮겨갔다는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철의 생산을 위한 새로운 거점으로서 고령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있다. 비록 고령이 내륙에 위치하지만 낙동강의 지류를 이용하여 낙동강 하류의 김해지역과 쉽게 접촉할 수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고령 지역은 농업생산에 있어서도 유리한 곳이었다. “고령지역의 경지는 대가천 서안에 남북으로 길게 펼쳐진 고령평야를 중심으로 운수평야, 안림천 유역의 백산평야와 안림평야가 있다. 이들 평야는 사철 끊이지 않는 풍부한 수량과 비옥한 토질로 쌀 생산에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낙동강 유역은 범람이 심하여 근대의 제방이 축조되기까지는 농경지로서의 좋은 조건이 되지 못하였으나, 대가천과 안림천 유역은 자연제방적 하천으로 여간해서는 범람하지 않아 특히 고대 농경에 아주 좋은 여건이었다고 하겠다. 조선시대 택리지에도 ‘가야천(대가천과 안림천) 유역의 땅이 가장 비옥하고,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많고, 수량이 풍부하여 旱災를 모른다’고 기술한 것은 이런 사정을 말한 것이다.” 철생산을 위한 목탄이 부족해지자 그 거점을 옮긴 사례는 후대에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17세기 영국의 경우도 성장하는 제철업으로 목탄공급이 어려워지자 아일랜드와 북미 식민지 마세추세스에서 1640년에 고로를 세웠다고 한다.
2) 기후변동과 국제정세의 변화 앞에서 신라를 중심으로 하여 4-5세기의 기후변동과 왜 및 고구려의 침입을 연결시켜 고찰해 보았다. 가라국의 경우는 문헌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 상황을 자세히 알기 어렵지만, 신라의 강역이 가라국과 멀지 않으므로 대체로 비슷한 기후변동을 경험한 것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신라의 경우와 같이 가라국에서도 가뭄, 누리, 기근이 빈번하였고 또한 한랭화의 영향에 노출되어 있었다면, 철의 생산과 직결되는 삼림의 성장이 더뎌졌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철의 생산을 위해서 지속적으로 주변의 삼림을 벌채한 결과, 삼림의 홍수나 가뭄 조절 기능이 약화되는 상황도 예측할 수 있다. 산에 나무가 없어지면 수분을 일시적으로 저장하거나 흡수하는 홍수조절기능과 저장되어 있던 수분을 천천히 배출하는 가뭄조절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김해지역의 농업생산력을 저하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고 그럴수록 김해는 철의 생산을 통해서 식량을 확보하는 데 주력해야 했을 것이고, 이는 다시 삼림의 황폐화를 가속시켰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는 기상이변 등으로 곡물의 안정적인 수확이 어려워지면서 신라에 대한 왜의 침입이 빈번해졌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라의 경우도 변경지역의 침입이 빈번하였던 것처럼, 해안에 위치한 김해지역에 대해서도 왜의 침입을 상정할 수 있다. 대마도를 비롯한 구주 지역의 왜인들이 식량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신라의 해안지역을 공격하였다면, 김해지역이라고 해서 그런 침입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4-5세기의 국제정세를 중국남조 - 백제 - 가야제국 - 왜와 고구려 - 신라의 대립구도로만 파악하는 것은 역사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열도의 모든 지역이 전시기에 걸쳐서 가야지역에 대해서 우호적이고 또 야마토왕권의 통제에 따랐다고 보기는 어렵다. 기근 등을 이유로 일본열도의 여러 지역 세력들이 신라를 비롯한 해안지역의 약탈을 행하였다고 하더라도, 당시 왜국이 이를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이처럼 4-5세기에 가라국은 기후변동, 지속적인 제철로 인한 삼림의 황폐화, 삼림의 부족으로 인한 농업생산력의 저하 등의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광개토대왕의 남정을 비롯한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가라국이 쇠퇴하였던 것이 아닐까? 맺음말 이 글에서는 김해의 가라국 쇠퇴 혹은 가라국 중심세력의 거점 이동을 환경적인 원인에서 찾고자 하였다. 가라국은 구야국 단계부터 시작된 철의 지속적인 생산으로 제철 제련에 필요한 숯을 만들기 위해서 참나무 등의 삼림을 대량으로 벌채하였을 것이다. 이로 인하여 삼림이 황폐화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와 더불어 4-5세기의 기후 변동으로 가뭄, 기근이 빈발하게 되면서 동아시아 전체의 정치적인 정세가 불안정해졌다. 왜의 침입, 신라와의 전쟁 등도 예상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철의 유통망의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가라국의 철을 왜가 무엇과 교역하였는지 아직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으나, 쌀, 소금, 노동력(노예), 일본열도에서 생산되는 물품(석제 장신구, 청동제 의기) 등을 그 후보로 꼽을 수 있다. 그런데 기후변동으로 인하여 곡물가격이 높아졌다면 철의 생산으로 적정한 이윤을 확보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결국 보다 저렴하게 숯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다 삼림이 무성한 내륙지역으로 이동할 필요가 생긴다. 또한 왜의 침입과 같은 요인도 해안에 위치한 가라국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또한 내륙으로 이동하게 만든 원인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시기야말로 일본열도에 제철기술이 보급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김해지역의 목재의 소비와 관련된 사례로 들 수 있는 것은 시간적으로는 조선시대이지만, 명지의 소금 생산을 들 수 있다. 조선시대에 남해안에서 소금을 대량으로 생산한 것으로 유명한 명지 염장은 소금을 굽기 시작한 지 100여 년후에는 땔감의 부족 가격 상승으로 소금생산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소금의 생산을 좌우한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가 바로 땔감 그 중에서도 나무 자체로서 화력이 좋은 소나무였던 것이다. 조선 정부에서는 군선 등을 만드는 데 필요한 소나무를 확보하기 위해서, 소나무의 벌채를 엄격히 금하였기 때문에 역시 소나무를 많이 사용하였던 소금생산이 커다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어떤 물자를 생산하는 일은 그에 필요한 땔감이 큰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고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철의 생산은 땔감을 다시 숯으로 가공하여 쓰기 때문에 목재의 사용량은 더욱 많을 수밖에 없었고, 결국 목재의 과도한 사용은 삼림의 황폐화를 초래하고, 다시 삼림의 황폐화로 인하여 홍수나 가뭄의 피해가 빈번하게 나타나게 된다. 이처럼 홍수와 가뭄이 쉽게 발생하는 환경 속에서는 곡물의 안정적인 생산 역시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였을 것이다. 김해 가라국의 멸망도 광개토대왕의 남정과 같은 한 가지 요인이 아니라, 철 생산에 따른 삼림의 황폐화, 홍수와 가뭄의 빈발, 곡물의 부족 등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이상의 입론은 여러 가지 가정 위에서 전개된 것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고대 김해지역의 목재량을 현재의 목재량과 동일한 것으로 가정한 것을 비롯하여, 가라국의 철생산이 김해지역의 목재에만 의존했을 것이라는 가정 역시 자의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만일 철의 대가로 숯을 받았다면 철생산으로 인한 삼림의 피해는 훨씬 적었을 것이다. 또한 가라국의 철생산량을 조선시대의 야로나 달천 광산과 같은 양으로 추정한 것도 논란의 소지가 크다. 과연 6ton의 양을 200년 이상 지속적으로 생산하였는지도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고대사회에 있어서 목재야말로 철생산, 토기생산, 조리, 난방, 건축, 선박 등 각 방면으로 소비되는 가장 보편적인 재료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이처럼 철생산 이외에도 여러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목재가 소비되었고, 그 소비량을 모두 합한다면 김해의 삼림이 온전히 유지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분명한 사실은 4세기 중엽에서 5세기에 한반도가 기후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격동기에 들어섰으며 그 과정에서 가라국이 쇠퇴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리이스의 멸망 원인에 대해서도 숲의 파괴를 지적한 견해가 있다. 그리이스는 청동기나 도기를 수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대량의 연료(목재)가 필요하였고, 더구나 수출을 하려면 배가 필요하고, 배를 만들기 위해서는 나무가 있어야 했다. 문명의 자원으로서 나무는 필수품이었고, 그런 면에서 그리이스는 먼저 숲의 나라여야만 했다. 그런데 그 숲을 파괴하는 과정에서 그리이스 문명이 번성하였고, 숲이 완전히 파괴되자, 그리이스도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이스가 청동기와 도기를 수출한 것처럼 가라국은 철과 토기를 수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가라국은 철의 생산을 통해서 성장한 나라였다. 그러나 그것은 국력을 신장할 수 있는 원천이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자원의 고갈과 환경의 파괴로 말미암아 쇠퇴의 길을 걷게 한 원인이 되기도 한 것이다. 앞으로 김해지역의 4-5세기 기후변동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자료(花粉分析 등)가 확보되고, 또 김해지역에서 생산된 철의 양, 철을 생산하기 위해 사용된 숯과 숯을 생산하는데 사용된 나무 종류, 철의 유통에 대한 자료가 축적되기를 기대해 본다. 흔히 우리는 역사를 인간의 적극적인 활동의 결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역사는 인간이 자연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측면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5세기의 고구려의 남천, 한성백제의 멸망, 왜의 침입은 동아시아 전체에서 일어난 기후변동의 결과라고 본다면, 우리가 종래에 생각해온 역사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역사상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가라국 쇠퇴 원인에 대하여」를 읽고 남재우(창원대학교 사학과) 가야지역에서 조사된 유적과 유물로 볼 때 가야는 당대의 신라와 백제에 못지않은 세련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제국이 신라에 의해 멸망되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가야의 멸망원인에 대하여는 대략적인 논의들이 있어왔다. 크게 대내·외적 요인으로 나눌 수 있겠다. 대외적 요인은 첫째, 가야외교의 실패였다. 가야의 독자성을 유지하고자 진행되었던 ‘안라고당회의’, ‘사비회의’ 등이 가야제국의 의도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둘째, 신라의 영역팽창 욕구 때문이었다. 대내적 요인은 첫째, 가야 각국은 자급자족할 수 있는 산간지형 조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독립된 정치집단으로 존재할 수는 있었지만, 서로 통합하여 하나로 발전하지 못했다. 산간에 입지했던 지형조건은 서로간의 교류에 장애요인이 되었고, 자신들의 믿음과 사고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한계성을 가지게 되었다. 즉 가야의 각국사이에는 힘의 견제와 균형( ‘balance of power' )이 이루어져 통합된 정치집단으로 성장할 수 없었다. 따라서 통합된 신라의 힘에 미치지 못했고, 그것이 멸망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둘째, 교역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았다. 즉 가야의 힘은 철생산 능력이었다. 제철능력으로 인하여 여러나라들과 교역함으로써 성장이 가능했다. 하지만 5세기대 이후 왜가 제철능역을 가지게 됨으로써 왜에 대한 상대적 우월성을 상실하게 되었고, 게다가 선진문물의 측면에서 가야보다 우월했던 백제가 5세기대 이후 왜와 직접 통교하면서 대왜교역면에서 백제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없었다. 셋째, 멸망기까지 진행된 후장의 장례풍습이 국가적 경쟁력을 저하시켰다는 지적도 있다. 발표논문은 가야 멸망에 대한 종래의 견해에서 벗어나 ‘기후의 변화’와 ‘장기간의 철생산으로 인한 삼림의 황폐화’라는 요소를 멸망의 한 요인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가야사 연구를 위한 사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다양한 시각으로 가야사를 연구할 수 계기가 되어 가야사연구의 폭과 깊이가 확대될 것이라는 희망을 엿보이게 한다. 토론자는 기후와 환경의 변화가 역사발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진 바가 없으므로 토론에 임하는 데, 어려움이 없지는 않았지만, 현재까지의 가야사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첫째, 김해 가락국의 멸망원인을 4~5세기에 걸친 기후변동 등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 근거가 될 만한 가야사에 대한 기록이 없으므로 신라의 기록을 토대로 신라의 기후변화와 자연재해, 이에 따른 신라지역으로의 고구려, 왜 등의 침략을 언급하고 있다. 즉 가야가 신라의 인근지역이므로 가락국도 기후의 변화와 왜 등의 침략이 진행되었을 것이고, 이것이 가락국 멸망의 한 요인으로 볼 수 있다는 입장인 것이다. 하지만 신라의 경우 이러한 기후 변화와자연재해, 외세의 침입을 극복하고 정치적 발전을 이루었고, 가야지역을 복속시켰다. 그런데 가락국은 멸망하였다. 따라서 가락국의 멸망원인을 기후변화와 왜 세력 등의 침입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왜 가락국이 신라처럼 기후변화와 그에 따른 외세의 침입을 극복하지 못했는가” 라는 점을 밝히는 것이 가락국 멸망원인을 파악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둘째, 한랭한 기후의 내습으로 고구려의 평양천도, 북위의 화북통일, 한성백제의 멸망과 남천 그리고 호남지역으로의 진출, 가야의 멸망 등의 요인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그 근거를 잘 알 수 없다. 기후변화가 어느 정도인지, 어느 정도의 기후변화가 이와같은 역사적 변화를 가져 올 수 있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기후의 변화가 단순히 역사적 변화에 영향을 미친다는 일반론에 그칠 수밖에 없다. 셋째, 신라는 6세기대에 기후변화가 진정되어 누리와 같은 자연재해가 일어나지 않았지만, 고구려의 경우는 6세기대에도 3차례나 누리가 발생하고 있다. 이것을 단지 고구려가 고위도에 위치해 있기 때문으로 단정지을 수 있는지 의문이다. 또한 누리의 발생과 같은 기록들이 등장하는 이유가 단지 자연재해를 말하기보다는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는 입장도 있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인지 궁금하다. 넷째, 고구려, 왜, 말갈 등의 침입을 동일한 관점 즉 불안정한 기후와 식량확보의 어려움에서 비롯되었다고 이해하고 있다. 당시의 고구려와 왜·말갈의 침입을 동일한 이유로 이해할 수 있는 지 의문이다. 고구려의 평양천도나 남하정책은 북위의 화북통일, 한반도에서의 백제와의 대립이라는 정세 속에서 진행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다섯째, 제목에서 ‘가라국’=김해 ?
「가락국의 쇠퇴 원인에 대하여」 토론문
정재윤(공주대학교) 이근우 선생님의 발표 잘 들었습니다. 가야 멸망에 관한 여러 견해들이 대부분 정치사적인 접근을 하고 있는데 반하여 본 주제는 기후와 환경파괴에서 가락국의 쇠퇴를 조망하였다는 점에서 신선한 접근 방식을 취했다. 토론자는 이를 흥미롭게 보았으나 사실 가야사에 무지한 사실은 접어두고 환경 문제라는 생소한 분야까지 언급해야 하므로 걱정이 앞선다. 부족하지만 토론자는 기존의 방식에서 발표자의 새로운 paradigm을 논하고자 하니 양해 바란다. 발표자의 견해를 요약하면 5세기 무렵에 이르러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한랭한 기후 변화에 따른 식량 부족 현상이 일어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각국의 침입 사례가 잦아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가락국은 많은 재철 생산으로 인하여 삼림의 황폐화가 이루어짐으로써 철 생산의 중심지가 대가야로 이전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아울러 신라가 빈번하게 왜인 집단의 침입을 받은 것처럼 해안에 위치한 가락국도 비슷한 상황에 처하였을 가능성을 상정하였다. 요컨대 가락국의 쇠퇴 요인으로 기후 변동과 삼림의 황폐화, 농업 생산력의 저하 등 환경적 요인에 왜인 집단의 침입과 광개토왕의 남정 등 정치적인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결국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표자의 새로운 접근 방식에 토론자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으며, 고대 사회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이 다양한 접근 방식을 취해야 한다는 원칙을 확인시켜주는 중요한 자리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틀 자체가 인접 분야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사실 질의 자체가 무의미할 수도 있지만 의문이 들거나 보완할 점 몇 가지를 질의하면서 토론자의 소임을 다하고자 한다. 1. 가설의 원론적인 문제 : 발표자도 언급하였듯이 본 발표는 목재량이 현재와 동일하고, 공급은 김해 지역만을 대상으로 하며, 철 생산량도 조선시대와 같은 규모로 보고 있다. 개략적인 수치 파악과 흐름을 보려는 고뇌 속에 나온 가설이라는 점은 수긍이 가나 이러한 가설은 하나라도 어긋날 경우 논지의 전개에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일본 열도의 경우 삼림의 풍부함으로 인해 가락국과 철을 교역하면서 물물교환 형태로 숯을 제공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무령왕릉 관목의 수종이 일본산이라는 점을 보면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김해 지역에 삼림의 황폐화라는 심각한 환경 문제만 언급하였지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간과하였다. 가락국의 지배 세력은 철 생산의 쇠퇴를 막기 위해선 이를 어떠한 식으로든 극복하고자 하였을 것이며, 이러할 경우 외부 조달은 충분히 상정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2. 한랭기의 도래라는 시각 문제 : 발표자는 5세기의 기후 환경을 한랭기로 상정하고 있으며 한랭기->한발->누리->기근이라는 연속적인 사슬고리를 상정하였다. 이러한 관점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발표문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이 시기를 정반대로 온난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 내물왕 33년과 실성왕 5년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는『三國史記』기록은 한랭기의 개념 자체가 명시되지 않아 확실하지 않지만 설정 자체에 의문을 가지게 한다. 또한 봄에 역병이 만연하는 것은 통상 겨울에 따듯한 경우 발생하는 현상인데, 그 해 7월에 누리가 발생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환경의 사슬고리가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식량 부족 문제는 인구 증가가 같은 다른 요인도 고려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묻고 싶다.
3. 국제정세의 변화라는 일반론적 접근 문제 : 발표자는 2장에서 왜와 고구려, 말갈의 침입을 상정하고 있다. 식량 자원의 확보라는 거시적인 틀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2장의 주어는 신라이다. 이 문제 때문에 신라가 쇠퇴한 것은 아니다. 발표자의 견해를 따른다 하여도 신라는 이 문제에 직면하였지만 해결 방식을 찾아서 결국 삼국을 통일하였다. 외부적인 환경 여건은 원인을 제공할 수 있지만 그 내부에서 취한 대응 방식의 문제를 찾아야 한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모든 나라가 환경 문제에 직면하였다고 하더라도 대응 방식은 틀리다. 이 시기 왜는 한반도계 이주민들이 선진 기술 접목하여 식량생산 혁명 시기에 돌입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위기가 기회가 된 것이다. 따라서 다른 나라의 변화와 달리 가락국이 왜 환경 문제에 심각하게 직면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점을 밝히는 것이 본고의 핵심적인 과제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필자의 생각은 어떠한지 묻고 싶다. 4. 철산지 중심 이전 문제 : 발표자는 목탄의 부족하여 철산지의 중심을 대가야로 옮긴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가락국이 철산지의 중심지라는 가설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당시 가야 지역에는 여러 철산지들이 존재하였다. 창원 다호리 유적의 토광묘에서 보이는 대형 자철광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는 철이 중국 군현의 필요라는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개발되었기 때문에 낙동강과 남강 연안에 있는 가야 세력의 발전을 가져왔다. 가야 세력이 동시 다발적으로 성장한 것은 가락국이 신라나 백제처럼 주변 가야 세력을 통합하지 못한 이유의 하나로도 언급된다. 이와 같이 볼 경우 철광의 개발은 목탄의 문제가 아닌 야철 철광석의 확보라는 문제가 보다 중요하다 할 수 있다. 가락국의 철광도 있지만 주변 나라에서도 철광을 개발함으로써 두각을 나타낼 수 있지 않는가. 일본 또한 점차 철을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가. 따라서 환경 문제를 제기할 때 목탄의 문제 외에도 보다 복합적인 변수를 고려하면서 논리 전개를 하면 어떠한지 묻고 싶다. 5. 기타 의문점 ㅇ 5쪽 : 백제의 독산성주가 신라로 넘어온 것은 식량 부족일 가능성이 크다는 논거는ㅇ 6쪽 : 세 번째 문단 5세기->6세기가 아닌지 ㅇ 7쪽 : 평양천도의 요인으로 한랭한 기후로 인한 생산력의 저하를 들고 있는데, 직접 이 부분만 언급함으로써 오해의 소지가 있다. 여러 요인 중 이러한 부분도 있다는 식으로 표현을 완화하면 어떠한지. ㅇ 10쪽 : 474년 자비마립간조를 인용한 한성 함락의 기사는 백제본기와 비교해서 처리하는 것이 정확한 것이 아닌지. 이상으로 이근우 선생님이 발표하신 내용에 대하여 몇 가지 질의를 하였다. 논문의 완성도를 높였으면 하는 바람에서 질의 하였지만 해결할 수 없는 화두를 던지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앞선다. 제목에서 암시하듯이 ‘멸망’이라는 단어 대신에 ‘쇠퇴 원인’을 사용한 것은 발표자 또한 직접적이라기보다는 여러 가능성 중에 하나로 제시한 가설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정치사 위주의 멸망 요인을 극복하고자 새로운 접근방식을 시도한 노력에는 찬사를 보내지만 이 견해가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여러 요인과 결합될 수 있는 객관성을 가져야 한다. 아울러 가락국이라는 특수성에 공감을 가질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끝으로 내용 중 혹시라도 제가 잘못 이해한 점이 있다면 양해하길 바라며, 두서없는 저의 토론을 마치고자 한다. 백제의 멸망 원인 이용현(국립부여박물관) 머리말 一. 멸망 원인에 대한 시각 二. 동아시아 국제정세와 백제의 외교 三. 의자왕 정권의 내정 四. 다른 각도에서의 모색 맺음말 머리말 660년 7월 백제는 멸망을 고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년에 의하자면 온조가 기원전 18년에 백제를 건국한 지 실로 678년만의 일이었다. 본고에서는 선학의 연구를 바탕으로 백제 멸망 특히 그 원인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한다. 당군에게 사비성이 포위되자 660년 7월 9일 백제가 당군의 퇴병을 애걸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7월12일 다시 음식을 진상하며 죄를 빌었으나 거절당하였다. 7월13일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피신하고 왕자인 융과 대신 사택천복이 당에 항복하였다. 7월18일 의자왕이 웅진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7월29일 신라문무왕이 전공을 당에 보고하였다. 8월 2일 당이 주연을 베풀어 장사들을 위로하였는데, 의자왕과 태자인 융이 당하에서 당상의 점령군에게 술잔을 올렸다. 아울러 점령군은 모택,검일 등 반역자를 처단하였다. 즉 이미 7월 9일 시점에서 전세는 결정된 것이었으며, 9일과 12일 백제가 사죄를 통해 철군을 구하였지만 이루지 못하고 결국 18일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후 부흥운동이 이어지고 왜군이 대거 참전하여 당과 신라 대 백제부흥군과 왜군의 대전 끝에 663년을 백제,왜군의 참패로 부흥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길게는 663년을 멸망으로 볼 수 있겠지만 백제부흥정권의 성격이 이전 백제왕조와 다른 점도 있어서 본고에서는 선을 그어 660년 멸망까지를 중심으로 고찰하기로 한다. 一. 멸망 원인에 대한 시각 백제멸망 원인에 대해 『삼국사기』찬자는 백제멸망에 대해 “백제 말기에 이르러 무도한 짓이 많았고 또 대대로 신라와 원수가 되어 고구려와 화호를 맺고 침범하여 利와 편의에 따라서 신라의 중요하고 큰 城을 약취하지 마지 않았다. 소위 仁者와 친하고 이웃과 잘 지내는 것이 국가의 보배라는 말과는 틀린다. 이제 唐의 天子가 두 번이나 詔書를 내려서 그 원한을 풀도록 하였으나 겉으로는 따르는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명을 어기어 대국에 죄를 얻었으니 그 망하는 것이 또한 당연한 일이로다.” 라 논평하였다. 신채호는 狂妄한 의자왕을 처치하는 혁명을 일으키지 못했기 때문에 또 백제가 원병을 믿었기 때문에 멸망하였다고 지적하였다. 이호영은 ①빈번한 전쟁으로 인한 국력소모 ②왕을 비롯한 지배자들의 사치와 방탕 ③말기에 왕자중심으로 관직배부 및 애국적 충신이 도태됨 ④말기 방어전략의 실패 ⑤외교실패를 들고 있는데, 이를 다시 ①왕을 비롯한 지배자의 사치,방탕과 독재로 민심이반, ② 소극적 국제적 외교 로 요약하였다. 심정보는 ①대외적으로 대당외교에 실패하여 당의 침략을 유발, ②의자왕의 전제왕권 강화로 귀족들간의 분열 야기, 이로 인한 방어전략수립 실패를 거론하였다. 김영관은 ①의자왕의 실정에 따른 민심의 이반과 국론 분열, ②국제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여 당의 개입을 막지 못한 것, ③나당연합군에 대한 방어전략 부재, ④신라의 치밀한 외교전략과 군사력, 을 들었다. 김선욱은 백제가 신라와 균형관계를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의 고구려침략을 위한 일차대상이 되었다고 하였다. 천관우는 삼국 중 신라가 대당외교에 성공한 것은 신라의 실리위주의 밀착과 견당사절의 수완이 좌우하였다고 하였다. 변태섭은 의자왕의 무모한 신라공략과 신라가 대당접근을 성공시킨 것 때문에 백제가 멸망하였다고 보았다. 한편 문정창은 승부를 위한 모략과 계책에서 의자왕이 이미 싸우기 전에 패하였다고 하였다. 『조선통사』에서는 신라가 당나라침략자를 끌어들여 백제를 공격하였으며, 백제군 오천은 계백의 지휘 밑에 용감히 싸웠으나 역량상 차이로 격파당하였다고 하면서, 7세기 중엽 백제의 혼란하였다고 기술하였다. 구체적으로 의자왕과 귀족관료배들은 나라의 운명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기자신의 향략과 부화한 생활만을 일삼고 있었으며 귀족들 사이에는 벼슬과 권세를 둘러싸고 분쟁이 계속되었다는 점을 적시하였다. 이를 적극적으로 풀어보면 ①당나라의 공격(혹은 침입) ②군사전력의 역부족 ③7세기후반 지배층의 혼란 으로 풀이할 수 있다. 한편, 노중국은 정치와 경제의 파탄을 꼽았다. 한편 이기동은 통치체제에서도 백제 멸망의 원인을 구하였다. 즉 백제가 신라에 패망한 궁극적 원인을 통치체제에서 찾는다면 상대적으로 대외관계에 치중하여 내정에 소홀했던 것 같으며, 국가권력이 지방사회 말단까지 침투하지 못한 점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였으며, 또한 문화적으로 백제는 쇠퇴기에 접어든 끝에 멸망한 것이 아니라 한창 국력이 뻗어나갈 즈음에 칼에 등을 찔려 비명에 간 것이라고 논평하였다. 김주성은 가장 간명하면서 알기쉽게 표현하였는데 멸망의 직접원인은 나당연합군의 공격이며, 이를 입체적으로 규명하기 위해서는 의자왕대 정치세력의 동향에 주목해야한다고 하였다. 이상 선학의 진단은 표현상의 낙차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의자왕대의 정치운영과 대외외교에서 멸망의 배경을 찾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정치의 파행, 사치가 극단에 흐름, 잦은 군사행동, 이에 따라 지배층과 국론이 분열되고, 재정이 파탄에 이름, 외교실패로 요약할 수 있으며, 구체적으로 나당동맹과의 멸망전쟁에 접어들어서 전략의 부재로 이해할 수 있다. 대체적으로 이들 지적을 본고에서 백제멸망을 고찰함에 좋은 지표가 된다. 국가 멸망을 논할 때, 외재적 배경과 내재적 배경이 있을 것이다. 외재적 배경은 백제를 둘러싼 7세기 중엽 경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의 고찰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내재적 배경은 의자왕대 정치운영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멸망했기 때문에 무엇이 나빴다는 반성론에 흐를 수 있으며, 외재적 문제와 내재적 문제는 표리관계에 있고 상호 복합적이며 표리관계에 있어서 기계적으로 분리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지만, 편의상 분절적으로 서술해둔다. 사료의 양적인 문제나 중요도상 양적으로 외재적 요인에 더 할애됨에 양해와 교시를 바란다. 二. 동아시아 국제정세와 백제의 외교 7세기 중엽 백제의 외교는 실패로 규정지어진다. 당과 신라의 동맹에 대항하여 백제는 고구려 및 왜와 연합을 구성하였으며 대립이 무력 충돌로 이어져 당의 공격,침입을 불러와 멸망하게 되었다. 즉 국제정세의 변화를 읽는 능력이 부족하여 이에 대한 형세 오판으로 외교 파탄을 불러오고 이것이 멸망으로 직결되었다고 판단되므로 이 시기 국제 정세를 고찰해본다. 660년 백제의 멸망은 [백제=고구려=왜 동맹]과 [신라=당 동맹]간의 충돌 속에서 이해된다. 대체로 6세기말 이전까지 중국은 남북조로 양립되어 있어서 삼국(특히나 고구려)은 남북양쪽에 견사조공하며 길항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589년 중국에 통일제국이 성립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결과적으로 보면 동아시아의 역관계 속에서 백제가 당과의 관계가 파탄되어 적대관계로 돌아선 이후 당의 공격을 받아 멸망해버린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하 본고에서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추이와 백제와의 관계에 초점을 두어 서술한다. 1. 기존 연구와 시기 구분 이 시기 동아시아 정세변화를 둘러싸고 국면변화를 설명하는 많은 논고들이 있다. 김수태는 무왕20년부터 의자왕말년까지 백제의 대당외교를 분석하여 무왕대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당과 외교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으며 의자왕대는 당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고구려와도 연계하여 당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독자외교를 전개하였으며, 이것이 의자왕15년을 계기로 변화된 내정과 신라의 대당외교로 인해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정동준은 7세기 전반 즉 645년까지 백제의 대외외교를 고찰하여, 대수외교는 고구려를 견제하여 신라와의 관계에 전념하려는 것이었으며, 무왕대 초반에서 의자왕 전반에 이르는 대당외교는 내부 권력집중 완수에 도움을 얻기 위한 것이어서 당과 고구려에 대해 일시적으로 양면외교를 전개하였지만, 연개소문의 집권이후 고구려의 비중이 높아지다가 645년에 고구려 일면외교로 고착되었다고 하였다. 森公章는 백제 멸망에 이르는 국제적 변화에 따라 3기로 구분하여, 642년-647년은 당의 3국화친 설득과 각국의 대응, 648년-654년는 신라의 당풍화정책과 당에 접근, 655년-660년은 당의 고구려정토와 백제멸망의 과정이라고 하였다. 鬼頭清明는 7세기후반의 동아시아의 정세를 3시기 구분하고, 제1기 626년-642은 당의 중국통일 후, 토번정벌로 인해 조선삼국에 적극개입하지 않은 시기, 제2기 642년-649년은 고구려 연개소문정권의 성립과 당의 고구려 정토가 개시되고 당-신라 연합과 고구려-백제 연합이 형성된 시기, 제3기 650년-660년은 고구려,백제,야마토 동맹의 성립한 시기라고 하였다. 山尾幸久는 640년대 동아시아의 급격한 변혁을 중심으로 7세기중엽이후를 4기 구분하여, 제1기 630년대부터는 당이 고구려를 압박하고, 신라가 당과의 관계를 강화해나가던 시기, 제2기 640년 이후는 당의 고창국 멸망을 계기로 조선삼국이 동요하는 시기, 제3기 650년대는 당의 백제강경정책이 등장한 시기, 제4기 660년대는 백제 및 고구려 멸망과 일본의 백제구원시기로 구분하였다. 한편 신라의 대왜외교를 중심으로 한 시기구분이어서 조금 분류의 시각이 차이가 있긴 하지만 鈴木英夫의 7세기 후반의 시기구분도 참고된다. 이상의 시기구분은 각각의 필요한 논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어서, 엄밀하게 본고에서 추구하는 초점과는 미묘하게 다르지만, 유사 선행연구로서 참고가 된다. 이들 시기구분에서 동아시아 각국에서 정변이 일어나는 격동기인 642년은 공히 중시되고 있으며 당의 동향과 그에 따른 동아시아 각국의 연동이 시기구분의 주요인자로 삼고 있다. 이를 참고로 하여 백제 주변 동아시아의 변동과 백제의 대당정책을 중심으로 한 시좌에서 다음과 같이 시기구분하여 시기별로 고찰해보기로 한다. 2. 의자왕 이전 -위덕왕 후기․무왕대- 결론을 먼저 말하면 백제의 대외정책은 의자왕대에 크게 움직임을 보인다. 의자왕대 대외정책을 살피기에 앞서 그 전대의 대외정책을 살펴보되, 동아시아에 큰 변화를 가져온 중국의 통일제국 성립이후로 한정해보기로 한다. 제1기 - 589년에서 618년까지 : 수제국시대- 강력한 수당제국의 대외강경정책은 동돌궐,토욕혼,고창,고구려를 그 대상으로 하였으므로 이들 나라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수당제국의 동아시아 삼국에 대한 정책의 중심은 고구려에 있었다. 집중견제 혹 타도의 대상은 삼국 중 고구려였으며, 이를 축으로 백제와 신라에 대한 정책은 그에 부수하는 이차적인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589년 隋가 남조의 陳을 병합하여 통일제국이 성립하였다. 이를 계기로 동아시아는 격동의 7세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미 통일 8년전에 고구려와 백제는 수에 사신을 파견하여 책봉을 받았으며 신라도 통일된 지 5년 후에 책봉을 받게 되어 594년에 삼국은 모두 수의 일원적인 이른바 “책봉체제” 아래 편입되게 되었다. 589년 수가 진을 평정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590년 고구려는 긴장하여 군대를 정비하고 군량을 축적하는 등 방비를 서둘렀다. 신라도 이듬해인 591년 남산에 신성을 쌓고 593년에 명활성과 서형산성을 개축하였다. 확언하기는 어렵지만, 동아시아의 긴장과 연동된 것이라고 해석할 여지도 있어 보인다. 598년 고구려는 요서를 침공하였으며 이에 수가 곧바로 출병하자 고구려왕이 사죄함으로 일단락되게 된다. 그러나 실상은 隋군의 패배로 병사 열 중 여덟,아홉의 사상자가 나왔으며 고구려정벌의 여론이 조성되게 되었다. 신라는 고구려와 분쟁 속에서 수에 출병을 요청하는 乞師表를 준비하였다. 수 煬帝는 모두 3회에 걸쳐 고구려를 정토하였다. 제1회는 610년에 결단하고 다음해에 선언하고 그 다음해에 행동으로 옮겼다. 이는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으로 알려진 바와 같이 살수 즉 청천강에서 저지당하였다. 제2회는 613년이었는데 양제는 요하를 건넜지만 楊玄感의 거병과 병부시랑 斛斯政의 고구려망명 소식을 듣고 회군하였다. 제3회는 이듬해인 614년이었다. 출발하자마자 망명한 곡사정 인도와 고구려왕의 입조를 조건으로 중지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입조는 실현되지 않았으며 수는 국내대란과 고구려정토의 실패가 원인이 되어 붕괴되었다. 또 신라는 600년 이래 꾸준히 수에 견사하였다. 이 시기는 백제로는 위덕왕대 말기(위덕왕36-44년)와 무왕대 전반기(무왕원년-19년)에 해당한다. 백제는 이미 위덕왕대 598년 수의 고구려 원정시 길안내를 자청하였으며, 611년 무왕대는 재차 수에게 고구려정토를 요청하며 공동출병 의사를 개진하였다. 그러면서도 정작 612년 수가 6만군을 동원하여 요하를 건너 고구려를 공격할 때는 국경수비를 엄하게 하였을 뿐 수나라를 돕는 실제적 군사활동을 취하지 않았다. 즉 백제는 수나라에 견사하면서 고구려정토를 종용하면서도 동시에 고구려와 통교하면서, 수⇔고구려 전쟁에 개입하지 않고 사태를 정관하는 자세를 취하여 대 수․고구려 양면외교를 펼치면서 사태의 추이를 신중히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제2기 - 618년에서 641년까지 : 당제국시기- 수를 이어 618년에 당이 성립하였다. 이듬해 고구려가 속히 遣使하였으며 621년에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모두 조공하였으며 624년에는 삼국이 모두 책봉을 받았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삼국간의 견제는 치열하였다. 먼저 백제는 고구려가 중국으로의 통교를 방해하였다고 당에게 호소하였으며,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가 매년 침입하고 있다고 당에 고하였다. 당 황제는 “책봉체제”의 초월적 주재자로서 평등, 평화의 입장에서 삼국에 사신을 보내어 삼국간의 자제와 화해를 촉구하였으며 이로써 소강상태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당이 630년 동돌궐제국을 와해시키게 이르렀으며 이듬해 631년 광주도독부의 사마인 長孫師를 고구려에 파견하면서 사태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長孫師가 한 일은 고구려가 隋와 전쟁에서 전승기념으로 세운 수 장사 시체를 쌓아올려 封土한 軍門을 무너뜨리고 전사한 隋 군사의 유골을 수습하는 것이었다. 이 당 태종의 강렬한 메시지는 고구려에게는 매우 위협적인 것이어서 고구려 영류왕은 당의 고구려 진군로를 차단하기 위한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한편으로 고구려는 당과의 관계악화를 막기 위해 640년에 의도적으로 태자를 파견하였다. 당은 고구려 태자를 정중히 대접하였으며 귀국하는 태자에 딸려 陳大德이란 사신을 보냈다. 진대덕은 애초부터 고구려 정탐의 임무를 부여받고 파견된 것이었으며 그의 스파이활동 보고서로 유명한 것이 『高麗記』이다. 641년 귀국 후 진대덕의 보고 시 진대덕과 당태종의 대화내용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진대덕 : 고구려가 高昌이 멸망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단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는]斥候隊 수를 평소보다 늘렸습니다. 당태종 : 내가 병졸 수만을 출동하여 요동을 공격하면 저들을 반드시 온 국력을 다해 대적할 것이다. 별도로 수군을 동래에서 출동시켜 바닷길로 평양을 향해 수륙으로 합세하면 고구려를 취하기는 어렵지 않다. 다만 산동의 주현이 피폐하여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있어 내 그들을 노고스럽게 하지 않고자 함이다. 즉 당 태종은 前代인 수 이래의 과제였던 고구려 정토를 위해 착착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으며 다만 수대의 후유증으로 인해 그 결행시기를 엿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무왕이 죽었을 때 당 태종이 몸소 소복을 입고 곡까지 하며 현무문에서 애도식을 거행한 것으로 보면 이 시기 당은 고구려를 의식하면서 고구려견제를 위해 배후의 백제와의 관계 유지에 공을 들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630년대 후반 당의 동아시아 삼국에 대한 외교는 어떤 특정 국가를 적대 혹 지지하지 않고 사태 추이를 주시하는 정관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처럼 당과 소강상태를 맞이하여 백제는 신라에 대해 다시 빈번하게 공격하게 되었다. 백제는 633년, 636년에 신라를 침공하였다. 신라를 공격하기는 고구려도 마찬가지였다. 고구려는 638년에 30년만에 신라를 침공하였다. 신라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633년,635년,640년 빈번하게 당에 사신을 파견하였지만, 당은 아직 삼국간의 항쟁에 개입하거나 이를 조정하지 않았다. 이로써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협격당하여 고립되게 되는데 이 시기 신라의 대倭외교 추진은 고립타개책의 하나로 보인다. 신라는 638년, 639년, 640년 왜에 견사하였는데, 특히 638년과 639년에는 신라사절이 倭人在唐유학생을 동행하였다. 즉 재당왜인유학생 등 왜의 친신라파와 연계를 강화하면서 왜의 대외정책변화를 이끌려하였다. 그렇지만 이같은 신라의 노력은 효력을 보지 못하였다. 665년 취리산 회맹을 전후한 삼국사기 문무왕대 기사 백제가 璋대 즉 무왕대부터 고구려와 “連和”하여 신라를 침입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는 아마도 회맹을 전후한 신라측의 인식으로 보이는데 바로 이 시기에 대응된다. 이 시기는 백제로서는 무왕 후반기(무왕 19년-동 42년)에 해당한다. 백제는 당이 현안으로 하고 있는 고구려 정토에 대해서는 당에 협조하는 자세를 강변하면서 당과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 시기에 백제는 고구려와 상호간 무력충돌을 자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d이는데, 이것이 상호 連和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확언하기 어렵다. 백제는 당에 대해 고구려의 정토를 계속 주장하는 등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시기 백제는 고구려와 당의 무력충돌을 조용히 주시하면서 사태의 변화를 지켜보는 신중한 자세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이전 수제국시대에 고구려와 수의 대규모 무력충돌 속에서 고구려가 버티어낸 것을 목격한 백제로서는 선뜻 어느 쪽에도 기울거나 어느 쪽을 거스릴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무왕은 당 고조에게 621년 사신을 파견하여 과하마를 바치기도 하였으며, 이어 624년 대신을 파견하여 상표문을 올렸으며 당 고조는 이를 매우 가상하게 여겨 무왕을 대방군왕 백제왕으로 책봉하였다. 이후 무왕은 매년 당에 조공하였으며 고조 역시 이들을 두텁게 대우하였는데, 무왕은 고조에게 고구려가 백제의 당에 대한 조공로를 막는다고 호소하였으며 이에 대해 고조는 朱子奢를 고구려에 보내 강화를 재촉하였다. 한편 백제 역시 신라와 전쟁이 그치지 않았으므로 당태종은 627년에 백제 무왕에게 璽書 즉 황제의 조칙을 내려 백제가 이웃 신라와 옛 원한을 잊고 우호를 닦아 전쟁을 그칠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무왕은 즉시 사신을 파견하여 상표문을 올려 陳謝하였으며, 이어 637년 사신을 보내 鐵甲과 雕斧를 바쳤다. 이에 당 태종은 깊이 위로하고 綵帛 300단과 綿袍를 내렸다. 이처럼 당의 고조와 태종은 백제가 고구려나 신라와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낼 것을 권고하였다. 이 단계에 당은 삼국의 어느 나라를 편든 것이라기 보다는 책봉체제 아래 당의 천하에서 한 지붕 아래 가족인 삼국이 서로 싸우지 말고 평안히 지내야 한다는 관점에서의 권고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무왕 역시 藩臣으로서 예를 갖추었으며 이 시기 양국간의 관계는 대체로 순항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 백제의 군사력은 오로지 신라를 향하였다. 동시에 당이나 고구려에 대해서는 군사적 충돌을 적극 회피하면서 관계를 유지하였다. 小結 수제국시대 및 당제국 초기에 백제의 대 중국 및 대 고구려 정책은 동일한 기조 속에서 추진되었다. 즉 백제는 중국 통일제국과 고구려에 대해 양자와 모두 교통을 갖는 신중한 양면외교를 취하는 북방정책을 썼다.『수서』에서 이른바 백제의 “兩端策”은 이를 이름이다. 한편 신라에 대해서는 대결,공격을 지향하였다. 3. 의자왕 전기 ; 642년에서 650년까지 제1기 -642년부터 644년까지- 흔히 7세기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운위할 때 집중 조명되는 것이 640년대의 삼국 및 왜의 동시 다발적인 마치 닮은 꼴과도 같은 변혁이다. 삼국은 공히 새로이 권력집중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642년 백제에서도 정변은 일어나고 있었다. 정월 王母가 사망하자 의자왕은 동생과 아들, 그리고 내좌평 등 요인 40인을 국외추방하였다. 의자왕은 부왕과 왕모의 사망을 계기로 반대파를 숙청하고 국내세력을 결집하여 국왕중심의 독재체제를 정비하였다. 이어 7월 백제는 신라의 “國西”지역 40여성을 공취하였으며, 8월 고구려와 공모하여 당항성(경기화성 남양만)을 취하여 신라의 당 교섭로를 차단하고 이어 대야성(경남 합천)을 함락시켰다. 당이 신라에 적극적 지지를 보이지 않고 방관하는 자세를 보이자, 백제는 신라에 대한 공세를 높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편 대야성 전투 때 신라 도독 品釋과 그 妻 등이 전사하였는데 이들은 김춘추의 사위자 딸이었다. 신라 조정의 타격과 충격은 실로 큰 것이었다. 삼국사기는 딸과 사위의 죽음을 들은 김춘추의 표정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춘추가 [그 죽음을] 듣고 기둥에 기대어 종일토록 눈을 깜빡이지 않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도 알아보지 못하다가 한참 두에 이르기를 “슬프다. 대장부로서 어찌 백제를 멸하지 아니하랴.”하고 왕에게 나아가 “신이 고구려에 사신가서 그 군사를 요청하여 백제에 대한 원수를 갚고 싶습니다.”라 하였다. 곧바로 김춘추는 고구려에 군사 원조를 청하자, 고구려 보장왕은 죽령은 본래 우리 땅이다. 너희가 만약 죽령서북의 땅을 반환한다면 구원병을 낼 수 있다. 고하여 이에 신라가 의도한 양국간의 군사협조는 성사되지 못하였다. 고구려에서도 같은 642년에 蓋蘇文에 의한 구테타가 일어났다. 大臣 개소문(燕개소문, 혹 泉개소문, 혹 이리카스미)은 국왕인 영류왕 등 정적 등 80여인을 살해하고 왕의 동생의 아들을 왕으로 삼았으며, 왕족을 대신으로 삼았다. 이를 통해 등장한 보장왕과 권신 개소문은 은 권력을 집중시킨 독재체제를 취하였다. 신라 김춘추는 곧 고구려에 가서 군원을 요청하지만 거절당하였다. 이듬해 643년 백제는 고구려와 和親하였으며 왜와의 연계도 강화하였다. 백제는 내적으로는 국왕에게 결집된 강력한 국내기반을 바탕으로 고구려, 왜와 연계 속에서, 과녁을 신라로 조준하고 있었다. 이에 삼국간의 힘의 균형은 깨어지고 신라의 고립이 한층 심화되고 신라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 무렵 신라의 정치체제는 여왕을 중심으로 외교에 김춘추, 군사에 김유신이 결속하여 3김체제 속에 총력을 결집하고 있었다. 643년 신라는 견당사를 파견하여 출병요청하였다. 이에 대한 당 태종은 다음과 같은 3책을 제안하였다. 제1책. 당태종이 변방의 군사를 조금 보내어 거란과 말갈을 거느리고 요동을 처들어간다고 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신라에 대한 포위를 풀게하는 것 제2책. 당나라를 상징하는 붉은 옷과 붉은 기 수천을 주어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를 공격할 때 이를 세워놓으면 고구려와 백제가 당군으로 착각하여 퇴각하게 하는 것 제3책. 해도로 수십백선을 보내 백제를 엄습하는 것. 혹은 신라에 군대를 보내어 방어할 수 있게 하는 것. 이었다. 이 중 제1책과 제2책은 당도 인정한 바와 같이 임시방편책으로 발각되면 도리어 고구려와 백제의 역공을 당할 소지가 짙은 현실성 없는 계책이었다. 당의 본심은 제3책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전제조건은 신라는 부인을 임금으로 삼아 이웃나라의 업신여김을 받는 것이니 (중략) 내가[=당 태종] 친족 한 사람을 보내어 그대 나라[=신라]의 임금을 삼되 (중략) 마땅히 군사를 보내어(하략) 와 같이 신라 국왕을 당 황제의 종실로 교체하는 것이었고 이는 실질적으로 신라가 당의 속국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들 3책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당태종은 신라사신에게 추궁하였으나, 3김체제의 신라에서 쉽게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제3책에 대해서는 당태종이 신라에 대한 지지를 분명히 했다는 시각과 신라의 구원요청에 대한 완곡한 거절이라는 시각이 병존한다. 당태종의 제3책은 신라의 요청에 대한 조건부 역제안 그 자체였다. 당의 요구조건이 충족된다면 이는 신라에 대한 지원확정이요, 그렇지 않다면 거절이 되는 바다. 당장 신라는 당의 요구조건에 답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으므로 당의 신라지원도 즉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는 한편 당이 이같은 신라의 곤경을 완전 방관한 것만은 아니었다. 다음해 644년에 고구려와 백제에 司農丞 相里玄獎을 파견하여 신라 침공을 정지할 것을 명하였고, 특히 고구려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경고하였는데, 고구려가 이에 따르지 않자 실제 다음해인 645년에 이를 구실로 고구려출병을 단행하였다. 즉 고구려와 백제에 대해 이를 대처하는 당과 신라의 인식에는 약간의 차가 있었다. 당은 백제보다는 고구려가 당면과제였고, 신라는 고구려보다는 백제가 우선과제였다. 당의 동아시아 구상에서는 백제나 신라나 모두 고구려포위전략 속에서 균질적 선택지였으며 그런 면에서 백제는 신라가 원하는 바와 같이 당의 정토대상은 아니었다. 실제 645년 당의 고구려원정이 시작되었을 때, 당은 백제에게 고구려출병을 명령하고 있었음이 이를 상징한다. 이에 반해 신라는 당이 백제를 정토하기를 바랬으며 이를 적극 주장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 태종이 제시한 3책 중 실효성있던 유일한 계책이 백제정토였다는 것은 이를 역설한다. 그런데 이같은 당의 백제인식은 다음 단계에 전환을 보이게 된다. 한편 이 시기 백제의 대당관계는 641년에 이어 642년,643년,644년 매년 사신을 파견하여 평균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제2기 -645년에서 650년까지- 이 기간은 백제멸망 원인을 논할 때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대당외교에 있어 백제는 신라와 쌍곡선을 긋게 되었다. 645년 당의 고구려원정이 시작되었으며 당은 신라와 백제 모두에게 출병을 명하였는데 신라는 이에 호응하여 출병하였지만 백제는 호응하지 않았다. 백제는 이에 그치지 않고 도리어 신라의 여러 성을 탈취하였다. 백제는 신라가 고구려에 출병하는 전력의 공백을 노려 백제영토의 확장 혹 구백제영토의 탈환이라는 의지가 강했다. 당의 입장에서는 비록 출병요청이 백제와 신라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지만, 고구려를 위해 출병한 신라를 백제가 공격하는 것이 좋은 이미지를 주었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신라를 공격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을 도와 고구려를 공격하는 신라에 타격을 입힘으로써 당의 고구려전략을 훼손하는 행위로 받아들일 수 있다. 당은 645년 10월 군대를 본국으로 되돌리고 고구려는 이듬해 646년에 당에 조공하여 당의 고구려 원정은 중단되었으며 당과 고구려 간에 소강상태를 맞게 되었다. 당의 고구려원정 중지를 목격한 신라의 상대등 비담 등은 고구려의 위협이 다시 신라를 향할 것에 노심초사하였다. 이에 앞서 당태종이 3책으로서 요구했던 요구조건 즉 여왕의 폐위를 실현에 옮겨 당의 군사원조를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즉 647년에 毗曇을 중심으로 여왕은 통치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거병하였다. 이른바 비담의 난이다. 난은 김춘추,김유신 세력에게 진압되고 친당이면서도 자립적인 정책이 계속 추진되게 되었으며 난중에 사망한 선덕여왕을 대신하여 진덕여왕 金勝曼이 왕으로 추대되어 3김체제가 공고히 유지되게 되었다. 兩派간에 당의 군사원조를 도입하여 신라의 위기를 극복해야한다는 기본인식에는 다름이 없었다. 다만 여왕을 폐위할 것인가 그대로 유지할 것인가를 두고 차이를 보인 것이었다. 이는 어떤 점에서는 대당군사력 도입 촉진을 둘러싼 방법론 혹은 도입속도를 둘러싼 대립를 둘러싼 복합적 권력투쟁이라 할 수도 있다. 난 진압으로 3김세력은 더욱 권력집중을 공고히 해갔을 것이며, 이 후 신라의 내정개혁이 唐化정책의 방향에서 속도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왜왕권은 646년 7월 신라에 高向玄理를 파견하여 人質을 貢上케하고 任那의 調를 폐지하였다. 신라의 김춘추는 648년(진덕왕2)에는 당 태종을 설득하여 백제출병을 약속받기에 이른다. 이것이 백제멸망으로 향한 터닝포인트가 된다. 즉 태종은 신라의 설득을 받아들여 백제정토출병을 신라에 확약하게 되니 비로소 백제는 당의 정토대상에 오르게 된다.
“신의 본국[=신라]은 바다구석에 치우쳐 있으면서 삼가 天朝[=당나라]를 섬겨오기를 수년 하였습니다. 그런데 백제가 강하고 교활하여 자주 침입하였습니다. 하물며 작년에 대거 깊이 침입하여 수십성을 함락시키고 朝宗의 길을 막았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天兵을 빌려주시어 흉악[=백제]을 제거하지 않으신다면 인민은 모두 포로가 될 것이니 배를 타고 와서 직책을 보고하는 일을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라 하니 태종이 깊이 수긍하고 出師를 허락하였다. 김춘추는 또 그 章服을 고쳐 中華를 따를 것을 청하였다. 이에 [당태종은] 안에서 珍服을 꺼내어 김춘추와 그 從者에게 내려주었다. 조칙을 내려 김춘추을 특진시켰으며, 金文王은 좌무위장군으로 삼아 귀국시켰다.(중략) 김춘추가 奏하기를 “신에게 일곱 아들이 있습니다. 원컨대 聖明을 떨어지지 않고 宿衛케 하기를 원합니다.” 하여 이에 그 아들 文에게 명을 내려(하략) 이어 김춘추는 당복채용과 아들의 숙위를 신청하여 허락받았으며, 당의 관작을 제수받았다. 당 태종의 백제정토 약속에 대해 신라 김춘추의 일련의 행보는 이전 643년에 제시받은 바 있는 당태종의 제3책의 전제조건에 대해 수정 화답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649년 정월 신속하게 신라는 당의 의관을 입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신라는 또 백제와의 전투에서 장사 100인과 군졸 8,980인을 목베고 전마 1만필과 수많은 병장기를 포획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650년 4월에 진골 이상에게 牙笏을 잡게하고 6월 김법민을 파견하여 오언태평송을 바치고 이 해에 당의 연호를 시행하기 시작하였다. 이같은 일련의 조치는 신라의 당화정책은 당에 대한 臣屬과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신라가 당에 올린 태평송의 내용은 흥미롭다. 大唐이 큰 업을 개창하니 높고 높은 황제의 계책은 창성하도다. (중략) 幡旗의 번득임은 어찌 그리 빛나고, 鉦鼓의 소리는 어찌 그리 둥둥거리나. 外夷로 帝命을 거역하는 자는 칼날에 엎어져 천벌을 받는도다.(중략) 오제 삼황의 덕을 한덩어리로 하여 우리 唐 황제를 밝게 하도다. 대체로 당 황제를 찬양하는 내용인데, 구체적으로 계책이 창성하고 삼황오제의 덕을 이어받아 밝다는 것인데 황제는 다름 아닌 막 즉위한 고종이다. 또 당의 명령을 거역하는 外夷 정벌을 찬양하는 내용이 보이는 바, 여기서 이르는 바 外夷는 크게는 바로 고구려와 백제를 이르는 것으로 당의 태평은 帝命을 거역하는 外夷에 대한 정토로 이루어짐을 노래하였다. 김법민은 사신가서 전해에 거둔 백제전투의 대승을 당에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태평송의 外夷에 대한 정토 부분은 전해 거둔 신라의 대백제전 대승을 自讚하면서, 금후 당의 백제(혹은 백제․고구려)정토를 부추기고 촉구하는 내용을 隱喩한다. 이를 읽고 당 고종은 매우 흡족해하였으며 사신 김법민에게 大府卿의 벼슬을 주어 돌려보냈다. 여기서 650년 6월 신라의 견당사가 당 태종이 죽은 뒤 새로 당 고종이 즉위한 첫 해인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즉 신라 김춘추와 당 태종 간에 이뤄진 백제정토에 대한 약조를 김춘추는 아들 김법민을 파견하여 재확인한 것이며, 이에 신 고종정권은 부왕 태종의 약조를 계승할 것임을 확약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더군다나 649년 당 태종은 죽으면서 요동의 전쟁을 그만둘 것을 遺詔로 남겼으므로 신라로서는 당의 신정권에 재확인이 필요했을 것이다. 왜왕권은 쿠테타로 수립된 개신정권으로서 속히 신라와의 관계를 수립하고 이를 발판으로 632년 이래 단절되었던 당과의 관계를 복구하고자 하였다. 신라는 647년 박사 高向玄理가 왜로 귀국하는 길에 김춘추가 외교사절로서 왜에 갔다. 한편 이 시기 백제의 대당외교는 전무하였다. 小結 이 시기에 접어들어 의자왕 백제의 대당외교는 파국을 맞이하였다. 645년 당의 고구려정토에 즈음하여 당의 원군 요구에 대하여 의자왕은 응하지 않고 도리어 신라를 공격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후 대당외교는 5년간 공백을 맞이한다. 이는 642년 대야성 상실 이후 신라가 펼친 활발한 대당외교와는 극명하게 대조되는 것이었다. 그 결과 당은 아마도 648년을 경계로 고구려정토의 파트너로서 백제를 버리고 신라를 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나당동맹의 성립된 것은 바로 이 무렵이다. 나아가 당은 신라의 요구를 들어 648년에 백제정토를 약속하였다. 4. 의자왕 후기 ; 651년에서 660년까지 제3기 -651년에서 655년까지- 신정권 당 고종이 백제를 정토하겠다는 신라와의 약속을 신속히 또 충실히 이행해나갔음은 651년 백제사신에 대한 당의 반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644년 견사 이래 7년만에 온 사신에게 당 고종은 신라와 고구려 및 백제 사이에서 일어난 항쟁의 잘못은 고구려 및 백제에 있으며 백제에게 신라로부터 뺏은 성들을 반환할 것을 명령하였다. 아울러 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결전할 것이라고 선전포고하였다. 아울러 백제가 고구려의 지원을 받으려 한다면 거란제국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침공케할 것이라고 하였다. 당이 백제에 요구한 영토반환을 비롯하여 이를 실행하지 않을 경우, 무력침공할 것임과 더불어 고구려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도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다. 이같은 위협에는 신라의 주장이 반영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역으로 생각하면, 백제가 당의 권고를 무시하고 신라를 계속 압박한 것은 고구려와의 연합, 즉 유사시 고구려의 원군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당이 요구한 영토반환은 물론 고구려와의 동맹을 구축하지 말라는 경고 역시 백제로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고구려의 백제 지원시 고구려를 정토할 것이라는 경고는 유사시 고구려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위협임과 동시에 일면 고구려에 대한 간접경고로 받아들여진다. 이같은 두 가지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백제와 신라의 화해가 전제가 되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영토반환을 포함하여 화해가 실현불가능한 것이었다면 당의 백제정토는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 즉 651년 당의 백제에 대한 요구사항이 실질적으로 수용불가한 것이었다면 이는 사실상 일종의 선전포고로 간주된다. 또 당은 이 무렵 왜왕권에게도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을 받는 신라를 원조하라고 하였다. 이와 같다면 당의 백제정토가 결정시점은 늦어도 651년이며 김법민과 당고종의 회견이 있던 649년으로 소급해 볼 수도 있다. 바로 당에 대한 신라외교와 백제외교의 성패가 극명히 갈리는 시점이다. 이는 이어지는 후술할 651년의 사태와도 연계된다. 한편 651년 신라사신등이 당나라 옷을 입고 츠쿠시에 도착한 바, 왜조정이 이를 혐오하여 꾸짖고 돌려보내는 사태가 벌어졌다. 즉 신라로서는 왜왕권에게 신라가 당과 일체화되었음을 과시하려는 것이었으며 당을 대리하여 당의 명을 전하는 역할을 띠고 왔을 것이라는 추측이 설득력있다. 나아가 그 내용은 아마도 같은 해 당이 백제에게 발한 내용과 연계된 내용이었을 공산이 크다. 예를 들면 왜왕권에게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는데 돕지 말라는 내용, 만약 돕는다면 응징하겠다는 내용 등이라든가가 아니었을까. 일시 왜왕권은 신라정토계획을 세우는 등 강경책을 취하는 듯도 하였으나 이는 비현실적인 것이었으며 신라와 왜왕권 간의 외교는 지속되었다. 즉 신라는 주도면밀하게 백제 배후의 왜와도 일정한 외교관계를 유지하였다. 651년에 보이는 두 가지 사실 즉 당의 백제에 대한 경고, 신라의 대왜외교는 당과 신라의 동맹이 확고하게 성립되었음과 신라가 동아시아에서 당의 대리인으로서 역할하였음을 들려준다. 이같은 정황으로 볼 때, 신라는 왜에 대한 신라자신 뿐만 아니라 뒤에 있는 당을 배경으로 대리자 혹 중개자임을 자임하면서 왜와 외교를 추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일본서기』에서는 같은 해인 651년에 백제가 6년만에 왜에 “朝貢”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어 주목된다. 당과 신라 동맹의 위협, 또 당의 일종의 선전포고에 백제는 그간 소원했던 왜에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다시 전개하게 된 것일 것이다. 백제는 이어 651년,653년,654년에 계속적으로 사신을 파견하고 있다. 특히 653년의 견사에 대해서는『삼국사기』백제본기에서 “倭國과 通好하였다”고 특필하고 있어 이 무렵 백제의 왜에 대한 외교재개를 엿볼 수 있다. 왜국 역시 긴박한 백제의 사정을 인식한 위에 백제와의 관계를 재확인한 것이었다. 이같은 백제의 움직임은 651년 당의 경고 혹 선전포고 이후 백제의 대응을 짐작하는 하나의 안표로 삼을 수 있다. 즉 당의 요구대로 백제는 신라로부터 탈환한 영토를 신라에 반환하지 않았다. 아울러 주변 왜왕권에 외교를 강화하여 배후를 다지고 우군으로 만들었다. 이는 백제가 당=신라 동당맹을 기정사실화하고 기민하게 대처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와 관련된 결정적 국면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백제는 651년 당 조공시 당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652년 정월 조공사를 한 차레 더 파견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당의 반응을 탐색해본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반응은 차가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마지막으로 백제는 대당외교를 완전히 단절되기 때문이다. 대신 앞서와 같이 고구려,왜와의 관계를 강화해나갔다. 655년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신라의 30여성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특히 백제가 고구려와 연합으로 신라를 공격한 655년은 김춘추가 신라왕으로 즉위한 바로 다음해라는 점도 흥미롭다. 백제는 고구려가 경고한 고구려와의 연합을 파기하지도 않았으며, 신라에게서 취한 성들을 반환하기는 커녕 오히려 신라의 성들을 새로 성들을 공취한 것이다. 당의 경고가 있던 651년 이래 655년 신라공격에 이르기까지, 비록 획득한 영토의 반환은 없었지만, 백제도 고구려도 모두 신라를 공격하는 일은 없었던 점에 주목해두고 싶다. 이 기간 중 백제는 숙고 끝에 고구려와의 연합을 재확인하고 당과 신라 동맹에 대한 대결의 길을 확정한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655년 백제의 신라공격은 651년 당의 준 질문에 대한 백제의 대답이었으며, 신라에 대한 응징이기도 하였다. 이로써 당=신라 동맹 대 고구려=백제=왜의 대결구도가 극명하게 되었다. 제4기 -655년에서 660년까지- 655년 고구려와 백제의 신라 공격에 대해 신라는 곧바로 백제에 대한 반격에 나섰으며, 양국의 신라침입사실은 곧바로 신라에 의해 당에게 보고하고 구원을 요청하였다. 당은 즉각 고구려원정을 단행하였으며, 고구려는 천여인을 살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고 전한다. 655년 당의 고구려에 대한 정토가 당=신라 동맹 대 고구려=백제=왜 동맹의 전면대결의 시작이라는 주장도 있다. 바로 그 해 655년에 백제는 150명의 대규모 사신단을 왜국에 파견하였다. 백제나 고구려에게 있어 공격 혹 정토의 대상은 당이 아니라 신라였으며, 당과의 충돌은 가급적 회피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655년 당의 고구려 정토에 대해 고구려가 반격을 하지 않은 것, 이듬해인 656년 고구려가 당의 황태자 책봉을 경하하는 사신을 보낸 것은 이를 시사한다. 이 656년에는 또 고구려가 왜국에 80여인의 사신단을 파견하였다. 이처럼 당의 고구려 정토 이후, 고구려와 백제는 왜에 대해 외교공세를 강화하였다. 이 무렵 문헌에 백제와 고구려 간의 교섭이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당=신라 동맹]에 대해 상호 결속을 다지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하여 대과없을 것이다. 고구려, 백제 양국의 왜에 대한 잇달은 대규모 사신 파견은 신라의 배후 세력인 왜를 구워삶음으로써 결속을 다져 신라를 견제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도 역시 656년에 고구려와 백제에 각각 사신을 파견하였다. 특히 백제의 경우 고래의 군사씨족인 佐伯連栲縄을 파견하고 있어 단순한 정세파악이 아니라 군사적 협의였음을 시사한다. 한편 왜는 656년에 고구려와 백제에 사신을 파견하였지만 신라에게는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 이로 미루어 보면 왜도 확연히 고구려=백제 동맹에 가담한 것으로 보이며, 거기에는 백제의 역할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고구려-백제-왜 동맹이 성립되었다. 『책부원구』에는 656년 백제의 선제공격을 신라가 방어하여 백제군사 3천여인이 죽임을 당하였으며 신라는 이같은 승전보를 당에게 보고하였다고 전한다. 이같은 보고는 사실여부와 무관하게 신라에 의해 당에 대대적으로 선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의해 당은 신라의 군사력을 재평가하고 백제정토에 나서게 되는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백제의 대패가 사실이었다면 백제에게 이 선제공격의 참패에 대한 충격과 후유증은 실로 컸을 것이다. 한편 왜는 이듬해인 657년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신라의 견당사에 붙여 왜왕권의 승려들을 입당시키고자 하였으나 신라는 이를 거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단계에 왜의 입장은 미묘한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으로 당=신라 동맹보다는 고구려=백제 동맹에 가담하고는 있었지만 大唐의 선진문물에도 관심이 있었다. 신라는 657년이래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고 신라가 당과 맞서게 되기까지 왜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한다. 이는 바꿔말하면 왜가 실질적으로 백제=고구려 동맹에 넘어감으로써 신라가 왜에 대한 설득을 단념하고 나아가 적대시하기 시작한 것을 의미한다. 신라가 백제 멸망 나아가 고구려 멸망 때까지도 왜에 대한 외교를 중지한 것은 이를 방증하며 동시에 당=신라 정세 동태파악 등 허용치 않는 효과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백제에 대한 공격에 즈음하여 659년 7월 당은 당에 와있던 왜의 사절을 백제멸망때 이후까지 억류하여 정보유출을 철저히 막은 사실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늦어도 657년 단계에 신라가 대 백제=고구려 동맹에 대한 결전의 의지를 굳힌 것이 아닐까 한다. 즉 이 단계에 당=신라 동맹 대 고구려=백제=왜 동맹 간 대립이 고착화되었으며, 655년 이래 당의 고구려정토 의지는 굳어진 듯 하다. 658년에 당은 다시 고구려를 원정하였으며, 이 전쟁에서 고구려의 赤烽鎭을 뽑고 4백여급을 참수하고 수령이하 백여인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에 고구려는 3만의 군대로 대항하였으나 패하고 2천5백여급이 참수당하는 대패를 당하였다. 659년 당은 또 한 차례 고구려와 전쟁을 벌여 고구려와 백제의 관심을 쏠리게 하였다. 그런 후 이듬해 660년 당은 전격적으로 백제를 급습하였다. 당과 신라의 양방 공격에 백제는 기능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7월 18일 멸망을 고하였다. 동맹인 고구려나 왜의 원군은 멸망하고 난 뒤에야 받을 수 있었다. 小結 651년 당은 백제에게 정벌을 공언하게 되었다. 당과의 관계가 파탄에 이른 백제는 당과의 교섭을 단념하고 대신 고구려와 동맹을 확인하고 왜와도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나아가 백제는 고구려와 합동으로 655년 막 출범한 신라 김춘추 정권을 공격함으로써, 신라 및 당에 대결 자세를 확연히 하였다. 당과 신라도 예정대로 고구려․백제 정토를 개시하였다. 당은 먼저 658년과 659년 잇달은 고구려정토로 고구려와 백제의 관심을 돌리고 동시에 고구려의 발을 묶어둔 뒤, 각본에 따라 660년 신라와의 연합작전을 통해 허를 찔러 백제를 급습하였으며 이에 백제는 일거에 멸망하였다. 5. 외재적 멸망 원인 -백제의 대당외교 파탄- 백제멸망의 외재적 원인은 급변하던 7세기 동아시아 국제정세 속에서 구해야 할 것이다. 먼저 이 시기 동아시아정세를 주도했던 당의 동아시아 외교에서 구해야 할 것이며, 다음에 그 속에서 백제의 대응에서 찾아야 할 듯 하다. 총체적으로 백제는 [당] 혹은 [당=신라]동맹에 접근하지 못한 것을 패인으로 들 수 있다. 첫째 백제의 외교 정책에서 구할 수 있다. 대당외교의 파탄과 대신라외교의 부재를 들 수 있다. 위덕왕에 이어 무왕 대까지 백제의 대당외교는 현상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의자왕대 와서 대당외교에서 신라에게 밀리고 결국 당의 정토리스트에 올라 멸망당하였다. 한편 당이 백제에 요구한 것은 신라와의 和好였으며, 그 전제조건은 최후에는 백제영토의 일부를 신라에 할양하는 일이었다. 의자왕대는 선대와 마찬가지로 성왕패사이래 파기된 신라와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였다. 둘째 당의 동아시아 외교정책의 변화에서 구할 수 있다. 당은 의자왕대 이전까지 백제를 고구려정토를 위한 배후세력으로서 포섭대상으로 삼았으나 의자왕대 들어 고구려와 함께 정복대상으로 변경조정하였다. 고구려 정복 전략에서 고구려를 직접 정복하는 전략에서 배후세력인 백제를 먼저 정복하고 이를 바탕으로 고구려를 협공하는 전략으로 우회하였다. 셋째 신라의 대외관계에서 구할 수 있다. 신라는 642년 대야성 함락을 계기로 적극적 전방위외교에 나서게 되지만 결국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당과의 연계에 모든 것을 걸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것이 추동력이 되어 臣屬 혹은 唐化정책 등을 통해 당을 움직여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넷째 고구려의 대외관계에서 구할 수 있다. 수당제국 성립이후 크게 긴장하게 된 고구려는 배후의 백제와 양호한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신라는 적대관계 속에서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이상 각국의 외교는 국제관계속에서 상호 순환 복합적 관계에 있다. 각국의 외교관계는 독립적으로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복합적으로 상호영향 속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총체적으로는 당=신라 동맹과 고구려=백제=왜 동맹의 형성과 양 동맹의 충돌, 그리고 고구려라인 동맹의 패배 속에 백제의 멸망을 구할 수 있다. 개별적으로는 백제 대 신라의 관계에서 직접적 원인을 찾을 수 있다. 因緣의 양국관계는 대야성전투, 성왕의 패사 등 물고 물리는 관계 속에서 상호공존의 길을 모색하지 못하고 상호극복의 길을 향했다. 이것이 서로를 벼랑끝으로 몰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의자왕정권의 대외외교의 공과문제이다. 기실 의자왕 이전에도 수당제국 및 고구려에 대해 등거리외교이며 신라에 대해서는 적대관계였다. 의자왕대 전반기에 선대 위덕왕이나 무왕대와 같은 외교관계를 기본으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당과의 관계가 파탄을 보게 된다. 이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당의 동아시아 정책상 백제의 위상변화를 꼽을 수 있으며, 그 배경에는 신라의 매우 적극적인 대당정책이 있었다. 다시 그 배경에는 642년 백제의 대야성 공격이 있다. 또 의자왕은 즉위한 641년부터 644년까지 매년 당과 외교교섭을 갖다가 외교가 두절되고 다시 651년과 652년에 다시 조공사를 파견하였지 이후 다시 외교공백을 맞게 된다. 이는 거의 매년 교섭을 전개했던 선왕 무왕대의 그것과 비교하면 후퇴된 것이었다. 특히 645년 이래 650년까지의 대당외교공백은 매우 뼈아픈 것이었다. 이 잃어버린 5년에 세상이 바뀌어버렸기 때문이다. 645년 당은 고구려정토를 단행하면서 백제에게 군사출동을 명령하였지만 백제는 이에 응하지 않았으며 이래 5년 외교교섭을 하지 않았다. 651년 외교교섭을 재개하자마자 당으로부터 점령한 신라땅을 반환하라는 경고를 받게 되고 외교재개 자체가 무위로 그치고 말았다. 이 부분에서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의자왕정권의 대당외교의 결정적 실패는 구할 수 있으며 이는 곧바로 멸망과 직결되었다. 三. 의자왕정권의 내정 1. 멸망의 내재적 원인과 의자왕대정치변동에 관한 시각 백제멸망의 내재적 원인은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대체로 백제말기 즉 의자왕대 정치에서 구하는 것이 대세이며 이들은 다음과 같이 종합할 수 있다. A. 전제정치로 인한 귀족들간의 분열 a. 그로 인해 전쟁에서 방어전략 수립실패, 대응실패 b. 이로 인한 민심이반 c. 소수 귀족에 경제력 집중 B. 재정파탄 : a. 귀족층의 사치와 방탕 b. 빈번한 전쟁 c. 과도한 토목공사 이들은 모두 내적 멸망의 원인으로 주목할 수 있다. 이외에 災異기사나 怪變기사는 당시의 사실로 간주한다면 고도의 심리전에 해당하며, 조미압의 예에서 보이는 이중첩자를 활용한 첩보전 등으로 신라는 전쟁에 대한 자신감을, 백제는 패배의식을 갖게하였으며, 출전에 앞서 패배를 각오한 계백의 가족살해, 출전에 앞선 김유신이 병사의 전의를 불태우게 하는 지휘술 등 전투면에서 세심한 전술의 차이는 백제멸망을 가속시켰을 것이다. 아울러 실제 당신라 연합군과 백제의 전투에 있어서 백제를 교란시키기 위한 우회와 같은 신라의 공격전략, 당의 백제출병을 미리 탐지하지 못한 백제의 정보력, 당 신라군에 대항하기 힘든 턱없이 부족했던 병력 등 전투의 실상이 주목되었다. 이상을 염두에 두면서 의자왕대 내정을 예의 주목해보기로 하자. 먼저 이 방면에 기존 연구는 모두 일본서기 황극기의 大亂기사에 주목하고 또 의자왕15년을 획기로 하고 있다. 무왕대부터 추진된 왕권강화는 의자왕대 지속되어 의자왕2년에 대성팔족 40여인을 귀양보내고 의자왕15년에 한강관련지역을 점령함으로써 확실한 전제왕권을 성립시켰으며 이는 신진세력의 지지속에서 추진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구체적으로 투옥되거나 이반하는 좌평관계기사와 득세하는 달솔관련기사를 대비시켜 주목하고 좌평=대성팔족, 달솔=신진세력으로 인식하였다. 또 의자왕15년의 災異기사나 태자궁 수축, 망해정 건립 등 토목공사에 주목하여 이것이 강력한 전제왕권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나아가 황극기 大亂기사도 이 무렵으로 조정하여 보고는, 의자왕15년을 경계로 왕권이 귀족세력과 타협하는 시기에서 독주하는 시기로 진행되었다고도 하였다. 한편 황극기 大亂기사 중 사택지적기사에 주목하여 이를 655년 즉 의자왕15년으로 설정하고 이 때 의자왕이 정변을 단행하여 왕권강화를 단행하였다고 하였다. 황극기 대란기사가 왕권을 강화하는 정변이라는 데는 이론이 없다. 좌평 및 달솔 대비기사나 災異 및 토목관계 기사를 근거로 하는 논거에 대해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단 황극기를 기년조정한 것이 좀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는 한데, 그 기년은 현재로서는 아래와 같이 보아두고자 한다. 2. 의자왕대 정변 의자왕대 內政을 설명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 의자왕 초기에 일어난 “大亂”이다. 이는『일본서기』 황극기의 다음 기사 정월에 國主의 母가 돌아가셨다. 또 弟王子와 兒인 翹岐와 그 母妹의 女子 4인과 內佐平 岐味와 高名한 사람들 40여인이 섬으로 추방당하였다 를 위시한 일련의 백제관련 기사를 근거로 복원된 역사상인데, 대체로 의자왕 정권 출범 초기에 조정 내에 內訌이 있어 왕족과 고관 등 40여명이 백제로부터 추방당한 것으로 해석되는 것이 통설이다. 몇 가지 작은 異論이 더 있어서 이 기사의 복원에는 많은 변수가 있어 복잡하고 이론이 많다. 단 大亂 즉 무력적 정치행위에는 왕후 恩古의 개입이 있었다는 점은 부동의 사실이다. 필자는 弟王子는 의자왕의 동생을 가리키며 은고가 융의 어머니이며 교기=규해=풍장이며 풍장은 의자왕의 아들이며 대란은 의자왕 초년에 일어난 것으로 보는 것이 정합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즉 642년 이전 아마도 백제의 신라 공격 이전에 백제에서 대란이 일어나고 그 결과 부여풍 등이 왜로 망명오게 되었다. 의자왕에게는 여러 명의 부인과 그 아래 각각의 아들이 있었는데 대란은 그들 부인들 사이, 혹은 이모형제간의 왕자들 사이, 또 의자왕과 그 동생 사이의 권력투쟁이었다. 왜로 간 그룹은 권력투쟁에서 패한 쪽이고 남아 집권하는 隆과 그 親母인 왕후 恩古 그룹은 승리한 쪽이다. “君의 大夫人인 妖女가 無道하여 멋대로 國柄을 빼앗고 賢良을 誅殺한 까닭에 이와 같은 禍를 초래하였다” 고『일본세기』는 전한다. 『일본세기』는 고구려에서 왜로 온 승려 道顯이 남긴 기록이다. 한편 정림사석탑에 660년 당이 새긴 대당평백제비명에도 “밖으로는 直臣을 버리고 안으로 祓婦를 믿어 형벌은 단지 忠良에게만 미치었다”고 기록하였다. 이들에서 일컫는 祓婦나 妖女는 君大夫人 즉 王后 恩古를 일컫는다.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이 宮人과 淫荒 耽樂에만 젖어 좌평 성충이 간언하여도 듣지 않고 투옥하여 죽였다고 한다. 또 나당연합군이 공격해와 멸망위기에 직면했을 때도 유능한 군사전략가인 좌평 흥수가 죄를 얻어 유배당했다는 기록도 있다. 은고 즉 왕후는 이후 백제멸망 때까지 20년간 국왕과 함께 二人三脚으로 국정을 집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660년 백제멸망에 즈음하여 당의 포로가 된 사람들은 의자왕, 처 恩古, 태자 隆 등 여러 왕자 13명, 대좌평 沙宅千福․國弁成, 沙宅孫登 등 37명 모두 50여명이었다. 바로 이들이 大亂을 거쳐 권력의 중추에 선 집권세력이었을 것이다. 3. 권력집중과 대신라 강경 노선의 추구 大亂 뒤 속히 642년 7월과 8월에 옛 가야지역인 대야성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을 점령하였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의자왕이 친히 당항성일대(경기 남양만)를 점령하고, 또 신라의 獼侯城(위치미상) 등 40여개성을 점령하였다. 대야성의 전신은 구가야의 다라국이었다. 신라는 562년 대가야를 접수한 뒤로 다라 즉 대야성에 가야의 경영 중심을 두고 구가야지역을 지배해왔다. 백제로서는 실로 백년만에 구가야지역을 탈환한 것으로 백제조정에 그 의의는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의자왕을 컨트롤할 수 있던 王母가 죽음으로써 의자왕과 은고의 독주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권력의 라이벌인 의자왕의 동생, 의자왕의 아들인 隆의 동모제인 豊등이 축출되어 倭로 추방되면서, 정치는 독재적 경향을 보여 왕후 은고가 독재경향이 농후한 국정에 개입하게 되면서 국왕-왕후 라인으로 권력집중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이같은 변혁에 반대하는 세력은 제거되었다. 의자왕 말기에 보이는 좌평 성충 등 “충신”에 대한 처벌 사건은 이미 의자왕 초기부터 시작된 것임을 의미한다. 반대파 제거 후 의자왕이 대신라 강경정책에 나서는 것과 관련하여 반대파들은 대신라 온건파이자 대당외교파였을 것이며, 대왜외교에 활용되는 것으로 보아 친왜파였을 공산도 있다. 의자왕의 대외정책은 대당 및 대신라 외교가 부재하게 되는 배경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대란”을 통한 권력집중은 당의 거대한 외압에 대한 연쇄적 반응의 一形式으로 볼 수 있으며, 비단 백제에 한정되지않고 신라에서 비담의 난, 고구려에서 연개소문의 쿠데타, 왜왕권에서 임신의 난과 같이 동아시아 여러나라에서 동시기에 나타난 공통적인 현상이었다. 삼국사기나 중국사서에 이와 관련된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백제의 大亂은 고구려와 같이 쿠데타나 또 신라와 같이 내전에 의한 것이 아닌 듯 하며 이들보다는 좀더 유연하게 혹은 의자왕 즉위를 전후하여 전격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4. 왕족정치와 합의제의 균열 -멸망의 원인- 의자왕은 부왕과 왕모의 죽음을 계기로 국내세력을 결집하여 국왕독재 태세를 정비하여 백제타잎의 권력집중을 도모한 것이다. 종래 백제 왕권은 중앙에는 22부사를 통괄하고 좌평을 필두로 한 群臣의 합의제를 취하고 있었다. 국가주요정무를 논의결정하는 이 합의제의 중심에 좌평들이 있었다. 538년 사비천도 이후 이 좌평을 최상위에 설치한 16관등제가 형성되었으며, 6세기 중반부터는 좌평이 신분적 분화를 이루어 大上中下 등으로 분화하였으며 그들이 정책결정에 참여하여 주도하였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점차 정무를 직능적으로 분담하는 6좌평의 설치되면서 왕권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진전하고는 있었지만, 귀족의 이익을 대변하고 왕권의 견제하는 기능도 있었다. 예를 들어 전형적인 합의제도(群臣회의,諸臣회의, 혹 좌평회의)는 다음과 같이 6세기 중엽 자료에서 국왕이 “三佐平․內頭․諸臣”에게 내리묻자, “三佐平等”이 대답함 국왕이 “群臣”에게 널리 보이자, “上佐平․中佐平․下佐平, 德率 4인, 奈率 1인”이 議論함 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처럼 귀족의 대표인 삼좌평과 국왕의 근시직인 내두좌평 및 기타관료 등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의자왕대 합의제 구성에는 왕후,태자,왕자 다수 및 왕족과 외척이 대거 포진하게 되어 그 변질을 보게 되었을 것이다. 특히 657년에 王庶子 41인에게 佐平을 수여하고 食邑을 주게 되어 좌평이 격증하게 되었고 좌평신분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하락되었다. 종래에도 왕족은 근시기구인 內臣佐平을 담당하는 등 정치에 참여하고는 있었지만 이 시기에는 늘어난 좌평직마저도 왕족이 점하여 왕족 등 측근의 정치 참여가 비대해졌다. 백제멸망시 당으로 압송되어간 백제고위자의 서열을 보면 “국왕-태자-왕자 13명-대좌평 이하 700명의 신하”로 되어 있으며,『삼국사기』의자왕조에 사비성을 포위한 당 蘇定方軍을 선무하는 과정에서 “백제 왕자가 또 상좌평을 보내어 … 王庶子가 몸소 좌평6인과 함께 …”라고 보이고 있어, 왕자들이 대좌평 이하 좌평층보다 우위를 점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태자 혹 왕자가 扞率 즉 제6위에 랭크되어 있었던 6세기에 비교하면 큰 변화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의자왕 정권에서는 왕족과 측근 귀족 또는 혼인귀족으로 구성된 친족적 색채가 짙은 편향된 왕족정치가 진행되었다. 이로 인해 국가의 중요의사를 결정하는 합의제가 변질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왕족의 독재적 전제성이 강화되었을 것이다. 내외정책에 큰 변화나 견제없이, 제일성있게 줄곧 추진될 수 있었던 배경도 여기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국왕편중의 권력집중은 왕, 왕족, 측근귀족에 의한 독점적 사적 권력집단 형태를 취하여 공적권력구조로 성장할 수 없었다. 정변 후 견제나 감찰 등 기능이 결여되고 분열이나 개혁이 없었기 때문에 현상이 타파되지 못하였다. 이는 鈴木靖民의 말을 빌자면 동아시아 여러 왕권 중에서 퇴행적인 것이며, 군주의 의지를 받아 정치집행을 행하는 관료제시스템 같은 보다 완성도 높은 국가형태에 가까운 권력구조와 그 운영방식으로 전환하지 못하고 오히려 과거로 회귀하는 반역사적 방향으로 진행된 것이었다. 이는 분명 백제멸망의 원인과 관련될 것이다. 四. 다른 각도에서의 모색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기왕에 제기된 멸망원인론은 모두 타당하다. 왜 멸망했느냐하면 이래 저래 멸망할만 했으니까 멸망했다 할 수 있다. 멸망에 앞선 사실들이 그 원인으로서 모두 부정될 수도 있어 순환논리에 빠질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빈번한 전쟁과 토목공사로 인한 재정파탄이 자주 운위된다. 정확한 재정투여도를 정산해보기는 어렵지만 7세기 전쟁의 빈도나 국가공사의 양상은 망한 백제가 승리한 신라에 비해 압도적이었다고 결론짓기는 어렵다. 또 사람과 영토가 국력의 원천이므로 전쟁과 이를 통한 영토와 인민 획득을 통해 새로운 稅收原이 확보된다고도 생각할 수 있으므로 전쟁자체가 재정압박의 이유라고 단순히 결론짓기 어렵다. 토목공사 역시 유무형 부가가치를 포함해 효용성에 다양성이 있으므로 마찬가지다. 오히려 자연재해로 인한 생산력 감퇴에도 주목할 수 있을지 모른다. 653년과 657년에 백제는 각각 전국과 왕도에 한발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고 초목이 자취를 감춘 일이 있다. 의자왕에게는 여러 왕자가 보이며 더구나 “庶子41인”으로 보아 당연 恩古외에 다른 왕비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657년에는 이들을 좌평으로 삼고 각각 식읍을 주었다. 재정의 결손을 운위할 수는 있어도 이것이 멸망과 직결될 지는 불확실하다. 한편 멸망에 즈음하여『삼국사기』특히 백제본기 마지막 부분과 열전 김유신전에는 백제의 멸망을 예견하는 災異기사가 두드러진다. 이것은 멸망 전야 백제의 모습을 전하는 것인지 几案의 작품인지 판단하기 어려우므로 멸망과 선뜻 연결짓는 데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백제사회의 구조적 문제에서 멸망의 계기를 찾는 것이 방법론적으로는 올바를 것인데, 멸망기 제도,재정,군사,사회나 문화 등의 실태와 모순, 현상을 짚어가기가 현실적으로 용이하지는 않아 보인다. 예를 들면 문화 혹 불교와 관련하여 의자왕대에 호국불교의 모습이 포착되지 않는 점도 지적할 수 있을지 모른다. 삼국시대 불교는 왕권강화와 호국불교로서 역할이 적지않았다. 608년 신라의 원광법사는 수에 보내는 걸사표를 비롯한 문서를 보냈으며 원광의 유학은 개인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추진된 것이며 그 목적도 본디 文翰이었다. 또한 귀국후 그가 세속오계를 만든 것은 유명하다. 또 신라 진골혈통의 자장은 당황실과 신라왕실 사이의 가교가 되기도 하였으며, 귀국 후 통일을 기원하는 황룡사구층탑의 건립, 또 당의 의관제와 연호 도입을 주장하였다. 의자왕대 백제불교에서 자장이나 원광을 찾을 수 없다. 7세기 접어들어서는 660년 이전까지 구법승 수는 신라는 25인임에 비해 백제는 5인에 불과하다. 이들이 7세기 대당외교 및 삼국간의 경쟁에서 국가의 기여도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에 비해 백제는 645년을 끝으로 당에 구법유학승이 전혀 자취를 감추며 전혀 신라의 그것과 같은 기능을 하지 못하였다. 고대사회 불교와 국가외교가 표리관계에 있고 의자왕대 백제와 당 간의 외교가 저조했음을 감안해도 7세기 삼국항쟁기 백제 구법승의 활동은 그 부진이 두드러지며 멸망에 한 배경이나 멸망기 양상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맺음말 백제멸망의 도화선이 된 것은 642년 백제의 대야성 공략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대야성 함락 때 죽은 딸의 복수를 맹세한 김춘추는 20년이 되기 전인 660년에 백제를 타도하였으며, 춘추의 아들 법민이 항복석상의 亡國의 主 의자왕의 얼굴에 침을 뱉음으로써 일단락되었으며, 우연인지 이듬해 춘추는 세상을 떠났다. 돌이켜 보면 백제도 나름대로 신라에 舊怨이 있었다.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위덕은 부왕 聖王을 잃었고 잇달은 전투에서 아들까지 잃었다.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순환논리가 된다. 백제멸망을 논함에 앞서 주목한 645년 이래 650년 사이 백제의 대당외교공백은 매우 중요한데, 그 이유가 당의 거듭되는 고구려원정 실패에서 찾을 수 있다는 지적은 정곡을 찌른 것으로 보인다. 한편 645년 이래 당의 정치적,군사적 지배를 막기 위해 고구려,백제,신라와 일본이 협력하는 외교구상을 구축하였다고도 하는데 이는 과녁을 빗나갔다. 이 무렵 백제와 신라의 적대 관계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관점이다. 642년 대야성 전투이후부터 백제는 문제의 645년에서 650년 사이 거의 매년 신라와 항쟁을 반복하였다. 이 시기 백제의 신라 공격은 당의 고구려정토와 연동되어 전개되었다. 645년 당은 고구려정토에 나섰지만 10월 정토를 중지하고 646년에 고구려가 당에 조공함으로써 일단락된다. 647년에 신라에는 비담의 난이 일어나 귀족 간 내전이 있었다. 즉 645년 당이 고구려정토에 나서자 당에 견사를 중단하고 대신 신라를 공격하였으며 왜에 사신을 보내었다. 당의 고구려정토가 중지되자 646년 사태를 관망한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왜에는 사신을 보내면서 당에는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 647년은 신라에 비담의 난이 있었다. 이 해에도 당은 다시 대규모로 고구려를 정토하였는데 고구려의 사죄로 중지되었다. 648년에도 당은 고구려를 정토하였다. 백제는 647년,648년 빠짐없이 신라를 공격하였다. 한편 649년은 당 태종이 붕어하였고 이에 고구려 정토가 중단되었다. 그러나 백제의 신라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요컨대, “잃어버린 5년”간 백제는 고구려와 당의 충돌을 지켜보면서 그 때마다 신라를 공격하였다. 대당외교보다 신라공격을 통한 영토탈환에 매진했던 것이다. 당과 고구려 사이에서 저울질하며 신라공격에 매진하는 것이 의자왕 정권의 선택이었다. 외교나 정책은 주관적이면서도 상대적 측면, 상호작용의 면이 있을 것인데, 백제와 신라 사이에는 평화적 교류와 신뢰를 기초로 한 共存이 싹트지 않은 듯 하며, 상호극복의 배타적 생존논리만이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부기] 구상과 자료수집에 정재윤 선생님의 도움을 받은 점 감사드린다. 구태를 벗지못하고 납기일을 넘겨 발표문을 제출하여 본의 아니게 학회와 토론자 선생님을 곤혹스럽게 하였다. 말미지만 사죄드린다.(2008.2.10) 「백제의 멸망」에 대한 토론문 김 영 관(서울역사박물관) 일반 국민들이 백제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의자왕과 부여의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삼천궁녀의 전설일 것입니다. 고구려의 마지막 왕이 보장왕이고, 신라의 마지막 왕이 경순왕이라는 것은 몰라도 백제의 마지막 왕이 의자왕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일 정도로 백제에 대해서는 멸망한 나라라는 이미지가 매우 강합니다. 더욱이 의자왕이 정사는 보살피지 않고 궁녀들과 놀아나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했다는 이야기는 낙화암과 삼천궁녀의 전설과 얽혀서 당연한 사실로 회자되고 있는 것 또한 현실입니다. 즉 고구려, 신라, 가야의 멸망 등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으나 유독 백제의 멸망만은 일반인들에게도 흥밋거리가 될 정도로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의자왕의 폭정과 황음무도한 정치가 백제를 멸망시켰다는 인식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용현 선생님께서 “백제의 멸망-멸망기의 양상과 멸망 원인을 중심으로-”라는 주제의 발표 역시 대개 고구려, 신라, 가야, 발해 등의 멸망 원인에 대한 발표보다는 왠지 친숙한 내용일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발표문을 보지 않더라도 의자왕이 이러저러한 잘못을 했기 때문에 백제가 망한 것이 아니냐는 것을 누구든지 이야기 할 수 있을 정도로 친숙한 주제로 여겨질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다 아는 문제를 재론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발표를 들으면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용현 선생님께서는 백제의 멸망 원인에 대한 선학들의 연구와 기존의 연구동향을 일별한 후에 주로 백제 내부의 문제보다는 외적인 문제, 즉 멸망 당시의 국제정세에 초점을 맞춰 백제의 멸망 원인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얻은 결론은 백제의 외교정책이 고구려와 왜와의 친선관계에만 몰입한 나머지 당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적대적인 관계로 돌아선 까닭에 멸망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대당외교의 파탄과 7세기 중반 동아시아의 국제정세 속에서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점을 멸망의 원인으로 보고 있는 점은 기존의 연구 성과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토론자도 역시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까닭에 특별히 이의를 달거나 다른 의견을 낼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본문의 내용중 일부 미심쩍은 부분에 대해 지적하고 언뜻 이해가 어려운 부분에 대해서 몇 가지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머리말에서 백제 멸망을 전후한 일지를 정리하여 놓았는데 문헌 기록과 다른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① 7월 9일 백제가 당군의 퇴병을 애걸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는 부분입니다. 660년 7월 9일은 신라군이 사비로 진군하다가 계백의 5천 결사대와 황산벌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날이기도 하며, 덕물도에서부터 신라 수군의 안내를 받은 당군이 지금의 금강 하구인 기벌포로 상륙하기 위한 전투를 치르고 있는 날이기도 합니다. 『三國史記』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 7월 9일 조에 신라군의 황산벌 전투 승리, 당군이 기벌포 상륙 작전에 성공한 내용과 신라군과 당군이 합군한 내용 등이 일괄 기록되어 있는 기사의 말미에 백제의 좌평 覺伽가 당군에게 글을 가지고 와 퇴병을 애걸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록은 7월 9일에서 11일 사이의 일을 일괄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신라의 육군과 당군은 7월 10일에 사비 남쪽(강경 부근)에서 만나기로 했으나 신라군이 황산벌 전투에서 시간을 지체한 바람에 했으나 기일을 지키지 못하고 7월 11일에서야 당군과 만날 수 있었는데, 백제 좌평 각가가 당군에게 퇴병을 애원하는 글을 가지고 온 것은 신라군과 당군이 합군한 다음의 일이므로 7월 9일에 일어난 일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三國史記』의 뒤에 오는 기록에 백제는 다시 7월 12일 상좌평을 보내 제사에 쓸 희생과 음식을 당군에게 바치었으나 받지 않자 왕의 서자 躬과 좌평 6인을 보내 소정방에게 백제의 죄를 빌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기록 등과 선후관계를 비교해 보면 7월 11일의 일로 보아야 옳을 것 같습니다. 제가 잘못 판단하였다면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② 7월 13일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피신하고 왕자인 융과 대신 사택천복이 당에 항복하였다는 부분입니다. 이용현 선생님께서는 隆이 태자가 아닌 왕자로서 사비성에 남아 있다가 당군에 항복한 것으로 보고 계십니다. 『三國史記』백제본기 의자왕 20년 7월 조의 기록에는 의자왕이 태자 孝와 더불어 웅진성으로 피신하였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나, 『三國遺事』태종춘추공 조에는 당시의 태자를 孝로 보는 것은 오류이고 隆이어야 한다고 하였고,『舊唐書』,『新唐書』,『資治通鑑』,『日本書紀』등에도 백제 멸망 당시의 태자는 隆이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더욱이 백제 멸망 당시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정림사지 5층 석탑에 새겨진 “大唐平百濟國碑銘”과 “唐劉仁願紀功碑”와 “扶餘隆墓誌”에도 마찬가지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의자왕과 함께 웅진성으로 피신한 인물은 태자인 隆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과연 隆이 당시에 태자였는가 아니면 왕자에 지나지 않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 “大唐平百濟國碑銘”과 “唐劉仁願紀功碑”와 “扶餘隆墓誌”에 隆이 태자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으로 생각되며, 역시 『三國史記』백제본기 의자왕 20년 7월 조의 기록에 태자로 되어있는 孝가 “大唐平百濟國碑銘”에는 外王으로, 『舊唐書』와『新唐書』의 百濟傳에는 小王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울러 살펴야 할 것입니다. ③ 또한 사비성에서는 의자왕의 次子인 泰가 自立하여 王이 되어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막으려 했다고 모든 사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隆이 自立하여 왕이 되었다가 항복한 것으로 보고 계십니다. 그것도 패전처리용으로 급조한 왕으로 隆을 지목하셨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기록과는 너무도 많은 차이가 나는데 어떤 근거를 가지고 말씀하시는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④ 7월 18일에 의자왕이 웅진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三國史記』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 7월 18일 조의 기록에 의거한 것인데, 『舊唐書』와『新唐書』의 蘇定方列傳에는 멸망 당시 北方城인 熊津城의 大將인 禰植이 의자왕과 태자를 잡아다가 당군에 바친 것처럼 기록되어 있고, 이 기록에 따라 의자왕과 태자 융이 웅진성의 방령(대장)인 예식이 당군에 투항함에 따라(노중국, 김영관 등의 견해) 백제는 웅진성을 근거로 지속적인 항전을 할 수 없었고 결국 멸망하였다고 볼 수도 있는데, 혹 이에 대한 선생님의 의견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⑤ 백제의 최종 멸망을 백제부흥운동이 종식되는 663년으로 볼 수 있는 여지도 있을 것이라고 한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사실 백제의 멸망을 백제부흥운동이 종식된 것으로 이제까지 보아 온 663년을 백제가 멸망한 해로 보는 견해도 있어 왔습니다. 즉 安鼎福(『東史綱目』圖上 百濟傳世之圖), 權悳奎(『朝鮮留記』上, 尙文館, 1924, 4쪽), 曺秉烈(『朝鮮歷史』권5 百濟, 1948, 54~55쪽), 權相老(『韓國地名沿革考』年表, 1961, 24쪽), 李鉉淙(『東洋年表』, 探究堂, 1971, 49쪽) 등의 주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三國史記』신라본기 문무왕 4년 3월 조에는 “사비산성에서 백제의 잔적을 소탕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664년 3월까지 백제부흥운동이 이어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노중국, 『백제부흥운동사』, 2003 ; 김영관, 『백제부흥운동연구』, 2005), 그렇다면 664년 3월을 백제의 최종 멸망시점으로 볼 여지는 없는지 묻고 싶습니다. 이용현 선생님께서는 7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정세 속에서 백제의 외교는 실패로 끝났고 특히 대당관계의 파탄으로 당의 공격을 받아 멸망에 이르렀다는 기왕의 통설을 이어 받아 외교관계의 변천을 시기를 나누어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기존의 시기구분에 대해 소개하고 선생님께서 나름대로 시기를 구분하여 더 자세히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점은 당시의 국제관계를 이해하는데 유용한 방법의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⑥ 그렇지만 선생님께서는 기존의 시기구분을 살피면서 한국학계의 연구동향이나 시기구분 설정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이 없고 오직 일본학계의 연구 성과를 들어 소개하고 있습니다. 7세기 무렵의 백제의 대외관계에 관한 한국학계의 연구 성과(신형식, 노중국, 김수태, 정효운, 연민수 등)가 없는 것도 아닌데 굳이 일본학계의 연구 성과만을 제시한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⑦ 백제의 대외 외교를 의자왕 이전(589~641)과 이후(641~660)로 크게 시기구분하고, 의자왕 이전은 1기 수제국 시대(589~618), 2기 당제국 시대(618~641)로, 의자왕 이후는 의자왕 전기(642~651)와 후기(651~660)로 먼저 나누고 다시 1기(642~644), 2기(645~647), 3기(647~651), 4기(651~655), 5기(655~660)로 세분해 살펴보고 있는데, 단순히 몇 년 단위로 끊어 살펴본 것인지 아니면 어떤 특별한 기준을 가지고 나누어 본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의자왕 이전과 이후를 나누는 기준은 의자왕이 즉위한 것이 641년 3월 경인데 왜 642년부터 의자왕 전기로 시기를 구분한 것인지 궁금하고, 의자왕 전기와 후기, 그리고 세부 구분에서 1기부터 5기로 구분하면서 의자왕 1기를 제외하고 2기부터 5기까지는 한 해씩 겹치도록 시기를 설정한 이유가 무엇인지도 궁금합니다. 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⑧ 의자왕 전기의 제1기를 설명하는 도중에 642년 8월 고구려와 공모하여 당항성을 취하여 신라의 당 교섭로를 차단하고 이어 대야성을 함락시켰다고 하였는데, 이는 『舊唐書』백제전의 기사 일부를 근거로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기사에 관해서는 『三國史記』백제본기 의자왕 3년 11월 조에 ‘백제가 고구려와 함께 당항성을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신라가 당에 구원을 요청한 사실을 알고 군사를 철수하였다’는 기사가 있고,『三國史記』고구려본기 보장왕 2년(643) 9월조에 ‘백제가 고구려와 함께 중국으로 들어가는 길을 끊으려고 한다고 하며 신라 사신이 당에게 구원병을 보내줄 것을 청한 기사’가 있고, 『舊唐書』고구려전과 신라전에도 신라의 당에 대한 청병사실과 당 태종이 司農丞 相里玄獎을 고구려에 파견해 백제와 더불어 신라를 치는 것을 중지하도록 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들로 볼 때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하여 신라의 당항성을 공격하려고 한 것은 642년이 아닌 643년의 일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또한 신라의 당항성을 함락하려고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 함락하였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더욱이 『舊唐書』백제전의 기사에도 당항성을 탈취하고자 하였다는 기록만 있을 뿐으로 당항성을 탈취하였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라의 당항성이 고구려와 백제에 의해 함락당하였다고 볼 근거는 없습니다. 이에 대해 이용현 선생님께서는 혹시 제가 모르는 다른 자료를 보고 말씀하신 거라면 어떤 근거를 가지고 계신지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⑨ 의자왕 후기의 제3기를 설명하시는 내용 중에서 백제가 새로 즉위한 당 고종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651년과 652년 연속해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651년 파견한 사신에게 내린 조서에서 당 고종은 백제가 탈취한 신라의 옛 성들과 백성들을 돌려주고 화친할 것을 종용한 것을 두고 백제에 대한 당의 경고이자 선전포고로까지 보고 있습니다. 또한, 당 고종의 조서를 무시하고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해서 행한 655년의 신라 공격은 당에 대한 백제의 선전포고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선생님의 이해는 일면 타당성이 있지만, 651년 당이 백제에게 ‘신라의 영토와 백성들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신라가 백제를 공격하는 것을 말리지 않을 것이며, 고구려가 백제를 돕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조서만을 가지고 당이 백제에 대하여 선전포고한 것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한 해석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마찬가지로 백제가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한 것을 당에 대한 선전포고로 이해하는 것도 너무 지나친 해석이라고 생각됩니다. 결국 백제가 당의 이런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당의 공격을 받아 백제가 멸망했다고 보는 것은 결과론에 입각한 지나친 해석이 아닌가 합니다. 사실 당의 지나친 친신라정책이 백제로 하여금 친고구려정책 일변도로 외교정책을 바꾸게 한 면이 더 강하다고 볼 수도 있고, 백제가 고구려와 당에 대한 등거리 외교를 포기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의 일방적인 요구를 들어주지 않은 것을 백제의 대당외교의 실패 원인으로 보는 것은 적절치 못한 해석이 아니가 합니다. 마지막으로 656년 무렵 ‘왜를 신라의 배후세력’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에 대한 문제입니다. 왜는 전통적으로 백제와 원만한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다만 신라의 김춘추가 즉위 전 왜의 지원을 이끌어내고자 노력한 사실이 있고 다소 신라와 왜와의 관계가 진전되기는 하였으나, 왜가 백제와 고구려를 제쳐두고 신라와 동맹을 맺을 정도로 가깝지는 않았으며, 친백제적인 제명여제(655~661)가 재위하던 시기에는 왜가 ‘신라의 배후세력’으로까지 인식될 정도로 신라와 왜의 관계가 돈독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용현 선생님께서는 어떤 점에서 이 시기의 왜가 ‘신라의 배후세력’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이상 두서없이 궁금한 점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이용현 선생님이 제시하신 백제의 멸망원인은 7세기 무렵의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른 백제의 외교정책의 실패로 귀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대중국 관계에 치우쳐 있다는 것입니다. 7세기 백제의 대외 외교가 수와 당제국에 비중을 두면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일면 타당하지만, 백제의 대수외교와 대당외교는 고구려와 신라와의 관계 속에서 역동적인 양상을 보이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또한 대왜외교도 지나칠 수 만은 없는 부분입니다. 실상 백제의 외교정책은 고구려와 수당제국을 놓고 어디에 더욱 비중을 두느냐 저울질하는 양상이었습니다. 수와 당 모두에게 고구려와의 兩端政策을 통해 슬기롭게 대처하려고 한 것이 백제의 외교정책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용현 선생님께서는 중국과의 관계를 위주로 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의 복잡다단한 국제정세를 설명하는 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백제의 대외정책의 한 축인 고구려와의 관계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뤄진 감이 있습니다. 백제의 대고구려 외교정책에 대한 설명이 어떤 식으로든 구체화되어 이루진다면 보다 충실한 내용의 글이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백제 멸망 원인의 내적인 요인에 대한 검토가 없다는 점은 매우 아쉽습니다. 백제의 멸망 원인에 대한 토론문 김수미(전남대) 이 논문은 백제의 멸망을 660년으로 보고 있다. 특히 7세기 동아시아 국제관계 속에서 당과의 외교관계 실패를 백제 멸망의 중요 원인으로 파악하였다. 그리하여 이를 크게 세 시기(의자왕 이전, 의자왕 전기, 의자왕 후기)로 구분하고, 다시 세부적인 시기구분을 시도하여 시기에 따라 백제의 대당교섭이 어떻게 변하였는지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백제의 멸망 원인을 백제의 대당외교력의 실패에서 찾았다는 점에서는 기존의 연구경향과 비슷하나, 의자왕대의 백제의 대당 외교 변화를 세밀하게 추적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몇 가지 의문점에 대한 질문을 하고자 한다. 1. 의자왕 전기의 제1기(642-644) : 642년 신라는 고구려의 원조 요구를 하지만 실패한 후 643년 견당사를 파견하여 당의 출병을 요구하였다. 이때 당 태종이 3가지 계책을 제안하는데 그 마지막 안이 바로 ‘해도로 수십 수백 척의 전선을 보내 백제를 엄습하는 것’이었다. 이 내용으로 이미 643년 당은 고구려 정벌을 위한 파트너로서 백제보다는 신라를 우위에 두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즉 이와 같은 당 태종의 선택으로 백제는 645년 당 태종의 고구려 정벌 때 출병에 호응하지 않고, 오히려 신라를 공격하지 않았나 한다. 의자왕은 즉위 한 641년부터 644년까지 매년 당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643년 9월 당 태종의 ‘여왕 대신 당 종실인과 군대를 파견하는 조건이 받아들여진다면 백제 정벌을 할 수 있다’라는 발언 이후 백제는 곧바로 11월 고구려와 화친하여 당항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므로 백제의 당항성 공격은 643년 당 태종의 발언과 관련이 있다고 추측된다. 또한 백제는 644년 정월 당에 사신을 보낸 이후 7년 동안 당에 사신을 파견하지 않았다. 644년 정월의 백제 견당사는 643년 당 태종의 발언과 백제의 당항성 공격에 대한 당의 의중을 엿보고자 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렇게 보았을 때 당이 고구려 정벌의 파트너로 신라를 선택하게 된 계기는 643년 당 태종의 발언이며, 신라를 파트너로 확정한 것은 645년 당 태종의 고구려 정벌 이후인 648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의자왕 전기의 1기를 644년이 아닌 643년을 하한으로 삼는 것은 어떨까 한다. 2. 시기구분 문제 : 필자는 의자왕 전기(642-651)를 1기(642-644),2기(645-647),3기(647-651)로 구분하고, 의자왕 후기(651-660)는 4기(651-655),5기(655-660)로 구분하였다. 의자왕 전기 1기를 제외하고는 연도가 겹쳐져 있다. 본문에서 보면, 3기의 내용은 648년부터 서술하였으니, 굳이 3기의 시작을 647년으로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4기와 5기도 마찬가지다. 3기와 4기의 구분이 되는 651년은 백제가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한 내용, 백제가 왜에 사신을 파견하는 기록이다. 두 번의 견당사 파견은 한 해에 일어난 사건으로 원인과 결과로 서로 엮여 있다. 4기와 5기의 구분이 되는 655년의 기사(고구려와 백제의 신라 공격에 대한 당의 고구려 원정)도 서로 원인과 결과이므로 각각 시기를 구분하기보다는 하나의 시기에 함께 넣어 서술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짧은 시기를 세분화 하다 보니 이와 같은 구분을 한 것 같은데 좀더 명확하게 시기를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3. 일본서기 백치 2년조 기사 : 신라 사신이 당의 옷을 입고 도착하니, 왜 조정이 꾸짖어 돌려보낸 사건. 발표자는 신라가 왜 왕권에 당과의 일체화를 과시하려는 것이었고, 당을 대리하여 당의 명을 전하는 역할을 띠고 왔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또한 이것은 아마도 왜 왕권에 백제를 돕지 말라는 내용을 담고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당나라 옷을 입을 신라 사신이 당의 대리인을 자처하고, 당의 명령을 전달하는 역할을 띠고 왔다면, 왜 조정에서 신라 사신을 내쫓고, 더욱이 신라를 정벌하자는 주장이 나올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든다. 오히려 왜 조정에서는 신라 사신이 당복을 입은 것을 당의 권위를 사칭하려 한 것으로 파악하였기 때문에 신라정벌론까지 등장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4. 발표자는 백제의 멸망의 내재적 요인으로 권력집중과 대신라 강경 노선의 추구를 그 하나의 원인으로 들었다. 그리고 의자왕 초년의 정변은 의자왕과 왕후 은고부인이 王母의 죽음 이후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때 제거된 정적으로는 의자왕의 동생, 의자왕의 아들인 융의 동모제인 풍 등이 축출된 견해를 따랐다. 그러나 바로 앞 페이지에서 필자는 은고가 융의 어머니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융과 풍은 모두 은고를 어머니로 둔 동복형제이다. 의자왕 초년의 정변에서 은고의 아들이자 융의 동모제인 풍이 권력의 정점에 있는 부모와 형제에게 라이벌로 지정되어 제거되어야 했는지 의문이다. 풍을 은고의 아들로 설정하면서 융의 라이벌로 설정한 것은 논지 전개상 맞지 않다고 본다. 즉 국왕-왕후라인에 권력이 집중되었고, 그 라인의 정점에 있는 풍이 그들에 의해 제거되었다는 것은 이치에 어긋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또한 의자왕 초년의 정변으로 성충으로 대표되는 의자왕의 반대파 역시 제거되는데 이들을 대신라 온건파, 대당외교파, 친왜파로 구분하였다. 성충 등이 의자왕과 다른 노선을 걸었다고 하여 친왜파로 구분한 이유를 알 수 없다. 의자왕은 왜와의 관계에서 친왜정책을 유지하였다. 발표자도 의자왕 때에 당과의 외교가 단절된 이후 왜와의 외교에 힘을 썼고, 그것은 고구려-백제-왜 라인을 결성했다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의자왕의 반대파인 성충 등을 굳이 친왜파로 보는 견해를 따를 필요가 있을까 한다. 의자왕의 반대파인 성충 등은 대외온건파로 구분하는 정도로 보는 게 적합할 것 같다. 5. 발표자는 머리말에서 백제의 멸망을 660년으로 보고, 그 이후 일어난 백제부흥정권은 백제왕조와 성격을 달리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백제부흥운동의 실패를 백제의 멸망으로 보고자 하는 최근의 견해와는 달리하고 있다. 백제부흥정권의 성격에 대해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 그 견해를 듣고 싶다. 마지막으로 백제의 멸망 원인에 대한 시각. 백제의 멸망 원인을 알아보는 것은 결과론적인 방법이다. 또한 패자는 역사에 그들의 패망 기록을 직접적으로 남길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백제의 멸망 원인을 살피기 위해서는 백제 멸망 관련 기록들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본다. 백제의 멸망을 기록한 기록들로는 신ㆍ구당서를 비롯한 중국측 사료,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우리측 사료, 당대의 금석문, 일본서기 등이 있다. 이들 기록들은 백제의 멸망에 대한 승전국인 당과 신라, 그리고 백제와 긴밀한 관계에 있던 일본측의 기록이다. 이와 같은 기록들을 바탕으로 후대인들의 견해가 첨가되어 백제 멸망의 원인에 대한 기록들이 전승되었다. 따라서 백제 멸망과 관련된 주변국들-당, 신라, 왜-의 백제 멸망에 대한 그들 나름의 시각을 분석하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천재, 재이, 기이 및 흩어져 있는 백제 관련 사료 중 백제인의 기록으로 볼 수 있는 사료 등을 분석하여 백제유민들의 백제멸망에 대한 시각을 찾아보는 것도 백제의 멸망 원인을 접근하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승전국과 패전국의 유민, 그리고 주변국의 그 시각은 분명히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발해의 멸망과정과 원인 김기섭(서울역사박물관) 1. 머리말 한 나라가 혼란에 빠지거나 멸망하는 이유는 간단하지 않다. 거기에는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방면에 걸친 그럴듯한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러한 요소들이 모여 한가지 필연적인 결과를 낳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한 국가의 멸망 과정과 원인에 대한 연구는 역사의 겉으로 드러난 형태 뿐 아니라 이면에 숨겨진 골격과 여러 가지 인자들을 꼼꼼히 분석하고 검토함으로써 역사 이해의 폭과 깊이를 넓고 깊게 하며, 결과적으로 역사 연구․교육의 필요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발해는 서기 698년에 건국해서 서기 926년에 멸망한 나라이다. 228년 동안 15명의 왕이 즉위하였으니, 한국사에서는 단명한 왕조에 속한다. 그런데 짧은 것은 비단 국가의 존속기간만이 아니다. 기록도 매우 적고 짧아서 누가 어떻게 발해를 세웠으며 왜 어떻게 망했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특히, 발해가 망해갈 무렵의 국내정세를 알려주는 기록이 전혀 없어 중국의 몇몇 외교기사와 발해를 멸망시킨 遼나라 기록의 편린을 꿰어 맞춤으로써 간단한 사실을 유추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보니 발해가 海東盛國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얻으며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다가 10세기초에 급성장한 거란과 충돌하면서 갑작스럽게 무너졌다고 보기도 한다. 동서고금에서 국가멸망의 원인으로 흔히 지적하는 부정부패, 기강해이, 내분 등이 발해의 멸망과정에는 적용되지 않으며, 강력한 외세에 맞서다 불행히 무너진 나라가 바로 발해라는 해석이다. 국가의 멸망 원인을 주로 내부에서 찾을 것인지, 아니면 외부에서 찾을 것인지는 보는 이의 입장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한국사의 경우에는 대개 내부의 원인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발해의 멸망에 대해서는 외부 요인을 더욱 중시하는 연구자들이 적지 않으며, 외부 요인의 내용도 다양한 편이다. 이에 발해의 멸망에 관한 기초자료를 분석․검토함으로써 발해의 멸망 과정을 차분히 복원하고 나름대로 멸망 원인을 분석․추출해보고자 한다. 2. 발해의 멸망과정 수백년간 唐의 혹독한 압박과 통제 대상으로서 주변 세력에 뒤처져있던 契丹이 10세기초부터 괄목할만한 성장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선두에는 耶律阿保機가 있었다. 그는 서기 907년부터 916년까지 거란 8部를 대표하는 可汗으로서 인근의 烏丸․吐渾은 물론 북쪽의 室韋, 서북쪽의 于厥, 서남쪽의 奚 등을 모두 복속시켰다. 그런 다음 7부의 추장들을 모두 살해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서기 916년, 야율아보기는 군사를 서쪽으로 향했다. 먼저 突厥․吐渾․黨項․小蕃․沙陀 등을 공격해 평정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군사를 남쪽으로 돌려 朔州․蔚州․新州․武州․媁州․儒州 등을 함락시키며 귀환하였다. 이듬해에는 幽州를 공격해 대승을 거두었으며, 918년에는 皇都를 건설하였다. 이처럼 거란의 기세가 급속히 팽창하자 達旦․晉․吳越․渤海․高麗․回鶻․阻蔔․黨項과 幽州․鎭州․定州․魏州․潞州 등 거란 주위의 세력들이 앞다투어 사신을 보내왔다. 거란이 서․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사이 과연 발해와는 아무런 마찰도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 서기 919년에 거란은 遼陽의 옛 성을 수리한 뒤 중국․발해 사람들을 살게 하였다. 요양은 본래 발해 땅이었던 곳이다. 그러므로 거란이 이곳을 차지하기까지 군사적 충돌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침 遼史에는 야율아보기가 東京 遼陽府일대를 차지하기 위해 발해와 20여년을 싸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 원문인 듯한 내용이 契丹國志에도 적혀 있다. 그리고 遼東行部志에는 거란과 발해가 요동의 패권을 두고 수십년 동안 血戰을 벌였다는 기록도 있다. 따라서 거란이 요양성을 수리하고 중국․발해 사람들을 살게 했다는 遼史의 기록은 거란이 발해의 요양성을 뺏을 때 파괴된 성벽을 수리하고 그동안 중국과 발해에서 포로로 잡아온 사람들을 요양성에 안치시켰다고 볼 수 있다. 당시 거란과 발해의 마찰이 어느 정도였으며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상황을 통해 짐작해보면, 아직 전면전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앞서 보았듯이 918년에 발해가 거란에 사신을 보낼 정도로 외교채널이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당시 거란은 한창 화북지역 진출에 관심이 있었고, 화북에서는 李克用의 아들 李存勖(晉)이 세력을 넓히며 거란에 맞서 한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그래서 거란이 발해를 치는 사이 혹여 李存勖의 군대가 쳐들어올까 거란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서기 923년, 마침내 晉王 李存勖이 後唐을 세우고 황제를 칭하였다. 그리고 곧이어 後梁을 멸망시키며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 무렵 거란의 耶律阿保機와 後唐의 李存勖은 화의를 맺고 애써 군사적 충돌을 피하였다. 그리하여 925년에 이존욱이 죽었을 때에는 야율아보기가 깊은 애도를 표하며 3일이나 조회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거란이 후당과의 우호에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야율아보기가 황제로 즉위하고서 세운 두가지 책략을 먼저 이루려했기 때문이다. 하나는 서쪽의 吐渾․黨項 등을 평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쪽의 발해를 정벌하는 것이었다. 이 두가지를 모두 이룬 뒤 中原을 노린다는 계획이었다. 서기 924년초, 마침내 야율아보기의 계획 실행을 재촉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발해가 遼州를 공격해 刺史 張秀實을 살해하고 백성을 끌고간 것이다. 이로써 거란과 발해 사이에는 돌이킬 수 없는 적대감이 형성되었다. 야율아보기는 서쪽과 동쪽을 차례로 정벌한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먼저 서쪽의 吐渾․黨項 정벌에 나섰다. 거란의 서방원정은 이듬해까지 순탄하게 전개되었다. 그리고 야율아보기가 귀환했을 때 唐․日本․高麗․新羅 등에서 차례로 사신을 보내왔다. 발해의 사신은 오지 않았다. 925년 12월 乙亥(16일) 야율아보기는 조서를 통해 발해에 설욕하겠다고 천명하고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였다. 이후 遼史 本紀에 실린 거란 원정군의 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閏12월 壬辰(4일) 木葉山에서 제사지냈다. 壬寅(14일) 烏山에서 푸른소와 흰말로 하늘과 땅에 제사지냈다. 己酉(21일) 撒葛山(色克山)에 행차하여 鬼箭을 쏘았다. 丁巳(29일) 商嶺에 행차하고 밤에 扶餘府를 에워쌌다. 1월 庚申(3일) 扶餘城을 빼앗고 그곳을 지키던 장군을 죽였다. 丙寅(9일) 惕隱 安端, 前北府宰相 蕭阿古只 등에게 명해 기병 1만을 거느리고 선봉에 서게 하였다. 대인선(발해)의 老相이 이끄는 군대를 만나 격파하였다. 皇太子, 大元帥 堯骨, 南府宰相 蘇, 北院 夷離菫 斜涅赤 南院 夷離菫 迭裡가 忽汗城을 에워쌌다. 己巳(12일) 大諲譔이 항복하겠다고 했다. 庚午(13일) 忽汗城 남쪽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辛未(14일) 대인선이 흰옷을 입고 새끼줄로 양을 끌며 벼슬아치 300여명을 거느리고 나와 항복하였다. 임금이 두터운 예로 대하고 풀어주었다. 甲戌(17일) 渤海의 郡縣에 조칙을 내려 가르쳤다. 丙子(19일) 近待 康末怛 등 13명을 보내 성안으로 들어가 병기를 수색하였는데, 막는 군사에게 해를 입었다. 丁醜(20일) 대인선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니 그 성을 공격해 격파하였다. 수레를 타고 성안으로 들어가니 인선이 말 앞에서 죄를 청하였다. 조서를 내려 인선과 그 족속을 병사로 지키며 내보내게 하였다. 하늘과 땅에 제사지내 알리고 다시 軍中으로 돌아왔다. 2월 庚寅(3일) 安邊․鄚頡․南海․定理 등의 府와 여러 道의 節度․刺史가 와서 조회하니 위로하고 보냈다. 빼앗은 그릇․돈과 여러 물건을 군사들에게 주었다. 壬辰(5일) 푸른소와 흰말로 하늘과 땅에 제사지냈다. 크게 사면하고 연호를 天顯으로 바꿨다. 발해를 평정했다고 사신을 唐에 보내 알렸다. 甲午(7일) 다시 忽汗城으로 가서 府의 창고 물건을 검열하고 따라간 신하에게 서로 다르게 주었다. 奚部의 부장인 勃魯恩(=布倫), 王郁과 回鶻․新羅․吐蕃․黨項․室韋․沙陀․烏古 등은 원정에 따르며 공을 세웠으므로 두텁게 상을 내렸다. 丙午(19일) 渤海國 이름을 東丹, 忽汗城은 天福으로 바꿨다. 皇太子 倍를 人皇王으로 책봉하고 주관케 하였다. 皇弟 迭刺을 左大相으로 삼고, 渤海의 老相을 右大相으로 삼고, 渤海의 司徒 大素賢을 左次相으로 삼고, 耶律羽之를 右次相으로 삼았다. 그 나라 안에서 특별히 죽을 만한 죄가 아니면 용서하였다. 丁未(20일) 高麗․濊貊․鐵驪․靺鞨이 와서 조공하였다. 3월 戊午(2일) 夷離畢 康黙記와 左付射 韓延徽를 보내 長嶺府를 공격하였다. 丁卯(11일) 人皇王宮에 행차하였다. 己巳(13일) 安邊․鄚頡․定理 3府가 반란을 일으키니 安端을 보내 토벌하였다. 丁醜(21일) 3府를 평정하였다. 壬午(26일) 安端이 포로를 바쳤다. 安邊府의 반란 우두머리 2명을 베어죽였다. 癸未(27일) 東丹國의 신료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상금을 서로 다르게 내려주었다. 甲申(28일) 天福城에 행차하였다. 乙酉(29일)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는데, 大諲譔이 일족을 이끌고 따랐다. 4월 辛卯(5일) 人皇王이 東丹國의 신료들을 이끌고 돌아갔다. 5월 辛酉(6일) 南海․定理 2府가 다시 반란을 일으키니 大元帥 堯骨이 토벌하였다. 6월 丁酉(12일) 2府를 평정하였다. 7월 辛未(17일) 大諲譔을 皇都 서쪽으로 호위하여 보내 성을 쌓고 살게 하였다. 대인선에게 烏魯古, 그의 아내에게는 阿裡只라는 이름을 주었다. 遼史 本紀에 따르면 거란 군대가 본격적으로 발해를 향해 출정한 것은 閏12월 己酉(21일)였다. 그리고 불과 8일만에 扶餘府를 포위하였다. 부여부는 대대로 발해와 거란을 잇는 길목으로서 항상 날랜 군사가 지키는 발해의 군사적 거점도시였다. 그런 곳이 3일만에 함락된 것이다. 거란군이 부여성을 빼앗은 뒤 지키던 장군을 죽인 점에 비추어보면 발해 군사들의 저항도 거셌던 모양이다. 그런데도 3일만에 함락될 정도로 거란의 군대가 강력했거나 발해의 방어망이 취약했다. 부여성을 빼앗은 거란은 곧바로 기병 1만명을 앞세워 홀한성으로 질주하였다. 그 사이 발해의 老相이 이끄는 3만명의 군대가 길목을 지켰지만 막지 못하였다. 이때 발해의 3만 대군이 야율아보기가 이끄는 기병 5백명에게 졌다는 대목은 혹여 과장된 표현이라 하더라도 의미심장하다. 그만큼 거란과 발해 사이에는 군사들의 전투능력 차이가 상당했다는 뜻일 수 있기 때문이다. 거란 군대는 부여성을 빼앗은지 6일만에 발해의 도성을 에워쌌다. 당시의 부여성은 지금의 農安에 비정되므로 수도인 上京龍泉府까지는 직선거리로만 350km에 달하며 실제 교통로에 따른 거리는 400km를 넘어선다. 이를 거란 군대가 6일만에 주파한 것이다. 그 사이 발해의 老相이 이끄는 3만 군대와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으니, 군사들의 전진 속도가 매우 빨랐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거란 군대가 3개 부대로 나뉘어 각기 다른 길로 다른 목표를 향해 전진했다고 보는가 하면 부여성을 빼앗은 뒤 두 길로 나누어 상경용천부를 향해 진격했다고 보기도 한다. 거란 군대가 홀한성을 둘러싼지 3일만에 발해의 왕 대인선이 항복을 선언했다. 그리고 이틀간 상황을 정리하며 儀典을 준비한 뒤 1월 14일에 항복의례를 거행하였다. 이후 거란이 발해의 지방세력을 회유하는 포고령을 내리고 발해사람들의 무장을 해제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일어났으며 그것이 대인선의 옹성으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발해 지휘부의 심신은 이미 무너진 상태였기에 거란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대인선이 항복하고 遼의 왕도로 끌려간 뒤에도 발해유민들의 저항은 거셌다. 그리하여 927년 12월에는 홀한성에 있던 거란의 괴뢰정권 東丹國이 遼陽으로 중심을 옮겼으며, 발해의 옛 수도를 되찾은 유민들이 발해왕조를 재건하였다. 이를 흔히 後渤海라고 부른다. 또, 얼마 뒤에는 압록강유역에서 발해유민들이 定安國을 세우고 거란에 대항하였다. 이로써 동북아시아 역사에서 발해가 차지하던 정치․문화적 위상을 재확인하긴 하였으나 이미 흐트러진 왕실과 국가를 되살리지는 못했다. 3. 발해의 멸망원인 발해의 멸망과정에 대한 遼史의 本紀 기사는 매우 간략하지만 분명하다. 그래서인지 발해의 멸망과정과 원인만 따로 떼어내 분석․검토한 논문은 극소수이며, 발해의 정치체제 및 국제정세에 맞춰 멸망 문제를 간단히 다루는 것이 보통이다. 다만, 異論이 거의 없는 멸망과정에 비해 멸망원인에 대해서는 연구자마다 나름대로 조금씩 다른 진단을 하기도 한다. 해동성국이라고 불리던 13대 大玄錫(871~894?)의 시대로부터 불과 30여년만에 속절없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발해는 왜 갑자기 멸망하였을까? 가장 고전적인 해석은 정치적 분열 때문이라는 것이다. 高麗史 등에 발해 지배층이 高麗로 망명한 기사들이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발해의 15대왕 大諲譔의 治世 말미에 왕실 혹은 중앙의 권세가 사이에 맹렬한 내분이 일어나 적지 않은 발해사람들이 고려로 망명했으며 이처럼 발해의 통치능력이 쇠약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란이 발해를 급습함으로써 멸망시켰다는 것이다. 지극히 평범하고 익숙한 추론이기에 당연한 듯하면서도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만 집착한 단순 분석이라는 느낌마저 준다. 이에 조금 더 복잡한 분석 틀을 갖추고 구조적으로 접근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발해는 고구려의 城중심 지배체제에 입각하여 토착부락장인 首領을 통해 군사 및 생산활동을 통솔하였는데, 점차 중앙의 통제가 약해지자 토착세력이 뿔뿔이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멸망을 재촉했다는 것이다. 발해 주민구성의 이원성과 그에 따른 통치체제의 불안정성이 국가멸망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인데, 宣王代이후 수령들의 일부가 중앙귀족화하고 일부는 지방관의 통제하에 놓였다는 해석와는 상치한다. 국제정세 특히 중국과의 관계를 기준으로 발해의 멸망원인을 분석하기도 한다. 발해의 수도인 上京이 中原에서 너무 멀어 정치․경제․문화적 원조를 받기 어려우므로 中原의 원조를 받기 위해선 遼河방면으로 수도를 옮겼어야 하는데 그렇기 않아 점차 쇠락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上京일대가 농업에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춘 군사적 요충지라는 해석과 충돌한다. 그리고 上京보다 遼河방면이 오히려 거란과 가까워서 직접적인 위협을 받는 곳이라는 지적에 더욱 수긍할 수 있다. 발해의 멸망을 唐의 쇠망이 일으킨 파장의 결과로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唐의 冊封體制가 무너짐으로써 주변세력의 균형이 깨진 데다 朝貢을 통한 국제무역에 의존해온 발해의 지배체제에 특히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국제정세가 거란이 발해를 침공하는 원인의 하나일 수는 있어도 멸망의 필연적 원인일 수는 없다는 지적이 있다. 발해의 쇠망 원인을 기발한 관점에서 찾기도 한다. 백두산의 화산이 폭발하여 上京 주변이 황폐해진 뒤 거란이 침략하였으므로 무기력하게 무너졌다는 견해가 그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과학적인 접근과 논리적 추론이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비판이 제기된 상태인데, 너무 극적이고 파격적인 해석이어서 한 시대의 역사상을 설명하는 틀로서는 적당치 않은 듯하다. 이밖에도 각종 토목공사와 노동력 징발로 인한 체제 불안,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종족․문화적 갈등, 黑水靺鞨을 비롯한 주변 세력들과의 관계 악화, 제도 문란과 사상․문화의 퇴폐화 등 다양한 해석이 제기되었다. 저마다 나름의 근거를 갖춘 추론이므로 모두 되새겨볼 여지가 충분하지만, 국가 멸망에 대한 분석은 무엇보다 거시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며 개개의 사실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발해의 멸망은 국가 내부세력의 성장과 분열에 따른 도산이 아니라 외부세력(遼)의 도전과 충격에 의한 파멸이었다. 따라서 같은 무렵 통일신라의 멸망에 비견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발해의 경쟁상대는 中原마저도 수시로 위협하고 유린할 수 있었던 욱일승천의 거란(遼)이었으며, 기습공격이라는 무력충돌에 의해 일거에 무너졌다는 사실이 한층 더 부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강하고 호전적인 세력과 이웃이라고 해서 언제나 나라가 망하는 것은 아니며, 단 한번의 기습공격으로 튼튼한 나라가 파멸에 이르는 것도 아니다. 전쟁이 일어난지 12일만에 즉각 항복했다는 사실은 강적에게 버티지 못한 것이라기보다 버틸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허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발해가 거란의 공세에 맥없이 무너진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먼저 군사적인 측면에서 방어체계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거란의 태조 耶律阿保機가 烏山에서 푸른소와 흰말로 하늘과 땅에 제사지냈을 때(윤12월 14일)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더욱이 鬼箭을 쏘는 의식은 군사들이 출정할 때와 귀환할 때 행한 거란의 전통이었다고 하니 늦어도 윤12월 21일에는 거란이 발해와의 전쟁을 대내외에 선포한 셈이다. 당연히 契丹道를 통한 扶餘府와 발해 上京城에도 소식이 전해졌을 것이다. 그로부터 8일 뒤인 윤12월 29일, 마침내 거란군이 발해 영토를 침입해 扶餘府를 에워쌌다. 그리고 단 3일만에 거란의 침입에 대비해 항상 날랜 군사를 배치해온 요충 부여부가 함락되었다. 그동안 발해 중앙세력의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는다. 부여부와 상경성 사이의 거리는 거란군대가 대규모 전투를 치르면서도 6일만에 도착할 정도였다. 그런데 발해의 중앙세력이 동원한 3만명의 방어군은 부여부와 상경성 사이의 길목에서 거란군을 맞았으며, 그마저도 일거에 격파되었다. 遼史의 본기와 열전은 모두 발해의 老相이 이끈 3만명의 방어군이 격파되었다(破․敗)고 표현하였으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고는 믿기 어렵다. 「列傳」에 의하면 야율아보기가 이끄는 기병 500명에게 老相의 3만 군대가 졌다고 하는데, 수치가 크게 틀리지 않았다면 이미 전의를 상실한 발해군대가 싸움을 포기했다는 표현이 적당할 것이다. 거란이 발해를 멸하고 괴뢰정부인 東丹國을 세울 때 발해의 老相을 右大相이라는 최고위층으로 임명했다는 사실도 발해 군대가 무력 진압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싸움을 포기했을 개연성을 시사한다. 거란의 老相에 대한 대우는 불과 6일전 부여성을 빼앗고서 그곳을 지키던 장군을 죽인 방식과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老相이 이끈 주력군의 항복은 발해의 방어력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었다. 그래서 정작 발해왕이 지키던 상경성에서는 별다른 싸움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발해가 힘없이 무너지는 과정은 언뜻 힘센 적의 기습에 의한 순식간의 파산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의 필연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군사적 정보체계 및 방어체계의 무기력이라고 할 만하다. 군사적 무기력이란 대개의 경우 기강해이의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발해왕조가 2백여년 안정적으로 지속되는 동안 지난날의 굳세고 용맹한 기질은 점차 약해지고 대신 중국의 문물과 풍습을 숭상하면서 배우고 익힌 文藝에 젖어 현저히 文弱해졌기 때문에 새로 일어난 거란을 당해내지 못했다고 보기도 한다. 마침 발해 말기에는 「斬蛇劍賦」, 「御溝水賦」, 「人生幾何賦」 등 사치스런 풍조를 비판하고 인생이 부질없다고 읊은 문학작품들이 유행했다고 하니 발해사회의 기강해이에 미친 영향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발해의 군사들이 제대로 싸워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데에는 분명 內紛이 큰 영향을 미쳤음직하다. 거란의 耶律阿保機(太祖)가 죽고 아들 堯骨(太宗)이 즉위하자 東丹國의 右次相이던 耶律羽之가 다음과 같은 내용의 표문을 올렸다. 태종이 즉위하자 표를 올려 말하였다. 「우리 大聖天皇이 비로소 동쪽 땅을 차지하자 현명하게 보좌할 사람을 뽑아 이 백성을 어루만져 주셨는데, 신을 어리석다 여기지 않고 일을 맡기셨으니 나라의 이익과 해로움에 대해 감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발해는 예부터 南朝를 두려워하여 험한 지형에 의지해 스스로 지키며 忽汗城에서 살았습니다. 지금은 上京에서 거리가 멀어 쓸모가 없지만 또한 지키지 않을 수도 없으니 과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先帝께서는 저들의 마음이 떨어지자 틈을 타 움직였으므로 싸우지 않고 이겼습니다. 하늘이 사람을 일어나게 하는 것은 한때입니다. 남은 종족이 점점 번식해 지금 먼 변경에서 살고 있으니 아마도 후환이 될 것입니다. 梁水지역은 그들의 고향으로서 땅이 넓고 비옥하며 나무, 쇠, 소금, 생선 등의 이로움이 있습니다. 그들이 작고 약할 때 백성을 옮기는 것이 만세에 이를 긴 대책입니다. 저들이 고향 땅에서 나무, 쇠, 소금, 생선 등의 풍요로움을 얻으면 반드시 편안히 살며 생업을 즐길 것입니다. 그런 뒤에 무리를 골라 우리 왼쪽을 돕게 하고 突厥․黨項․室韋로 우리 오른쪽을 돕게 하면 남쪽지방은 앉아서도 통제할 수 있고 천하를 하나로 만들 수 있으니, 성스런 조상이 이루지 못한 일을 이루시어 후세에 끝없는 복을 쌓아주십시오.」 표를 올리자 황제가 기쁘게 받아들였다. 이 해에 조서를 내려 東丹國 백성을 梁水로 옮기니 사람들이 잘했다고 말하였다. 위의 표문 중 밑줄 친 부분은 역시 발해 내부에 離叛이 일어났을 때 거란이 공격했으므로 별다른 전투 없이 발해를 병합할 수 있었다는 뜻으로 읽힌다. 이를 바탕으로 발해인의 고려망명을 이해하는 것이 보통이다. 즉, 高麗史에는 925년 9월부터 12월까지 발해의 將軍 申德, 禮部卿 大和鈞, 司政 大元鈞, 工部卿 大福謨, 左右衛將軍 大審理, 左首衛小將 冒豆干, 檢校 開國男․朴漁 등 상당수의 관료가 백성을 이끌고 고려로 망명한 사실이 적혀 있는데, 거란이 침공하기 전 발해의 문무고관들이 대규모로 고려에 망명했다는 것은 내분이 아주 크게 일어났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지배세력 내부의 분란은 곧 지방에 대한 통제력 상실을 야기하였으며, 결국 멸망으로 이어졌다고 추론할 수도 있다. 당시 발해는 黑水部를 비롯한 海北의 여러 부를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10세기초엽의 어지럽게 전개되던 국제정세를 감안하면 발해의 멸망원인은 외교전략의 실패라는 관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918년 무렵 거란의 기세가 한창 비등하자 開封을 차지한 後梁을 비롯해 많은 나라․세력들이 거란에 사신을 보냈다. 이미 동북아의 강자로 자리잡은 거란과의 친선을 위해서였다. 발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 무렵 거란이 발해의 遼陽지역을 빼앗았다. 그리곤 河北省지역의 주민들을 요양과 그 주변으로 이주시키며 요동지역의 요충으로서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발해는 924년에 遼州를 공격해 거란의 刺史를 죽이고 주민들을 끌고 갔다. 거란의 팽창정책에 정면 대응한 것이다. 이로써 거란과 발해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는데, 그 이면에는 발해가 신라․고려와 맺은 結援이 작용했는지도 알 수 없다. 발해와 신라․고려의 결원은 대략 923~924년에 맺어진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결원의 실효성을 과연 인정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925년 야율아보기가 서방원정에서 돌아왔을 때 後唐․日本․高麗․新羅 등이 모두 사신을 보냈다. 이는 비록 발해와 결원을 맺은 고려와 신라가 강성한 거란과의 관계를 고려해 결원 자체를 공개적으로 표명하기를 꺼렸다 하더라도 발해가 고려․신라와 맺은 결원이 그만큼 형식적인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발해가 욱일승천의 거란을 상대로 정면대응에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일면 피하지 못할 상대였기에 결코 요충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굳건한 결의로 풀이할 수도 있지만, 땅을 빼앗긴지 6년 뒤에야 더욱 강해진 적을 상대로 감행한 전쟁인지라 수긍하기 쉽지 않다. 오히려 당시 발해의 외교전략 내지 외교능력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일 개연성이 있다. 그동안 발해는 동북아의 覇者인 唐을 상대로도 강온 양면의 외교정책을 적절히 구사하며 유연한 실리외교를 펼쳐왔다. 그런데 어느덧 거란과의 끈질긴 외교 노력은 포기하고 짐짓 현실을 무시하며 경직된 외교노선을 채택하였기 때문이다. 內紛 와중에 거란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하는 세력이 주도권을 잡았거나 거란과의 전쟁을 통해 발해 내부의 분란을 잠재우려는 大諲譔 등의 고육지책일 수도 있다. 그만큼 발해의 遼州공격은 한창 상승하던 거란 지배층의 자존심을 자극한 위태로운 모험이었다.
4. 맺음말 「발해의 멸망과정과 원인」을 읽고 김종복(성균관대 박물관) 한 국가의 멸망 원인을 찾는다는 것은 발표자도 말했듯이 "역사의 겉으로 드러난 형태뿐 아니라 이면에 숨겨진 골격과 여러 가지 인자들을 꼼꼼이 분석하고 검토"하는 작업이므로 해당 국가의 전개 과정과 사회 성격에 대한 총체적인 파악 위에서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역사가의 사관이 개입되기 쉽기 때문인지, 역사가는 여러 요인들 가운데 필연적인 또는 주된 원인 하나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내부적 요인과 외부적 요인을 대립적으로 파악하여 한쪽을 강조한 나머지 다른 한쪽을 경시하는 경우가 그렇다. 그렇지만 그 의도와는 무관하게 오히려 역사를 단순화시키는 잘못을 범할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멸망 원인의 추구는 해당 국가의 멸망이라는 결과론적 시각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지배층의 잘못이나 무능, 국가체제의 모순이나 약점 등이 과도하게 부각되는 경향도 있다. 그로 인해 마치 그 국가는 애초부터 망국의 원죄를 내포하고 있었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쉽다. 멸망의 원인으로 간주되는 요소들이 그 국가가 지속 또는 발전할 때는 없었는지, 또 언제부터 생겨났는지 등도 함께 감안할 때, 멸망 원인의 분석이 단죄론적 시각에서 벗어나 오히려 해당 국가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멸망 원인을 언급한 글들을 볼 때면 떠오르는 이런 생각들을 염두에 두고 발표자에게 몇 가지 질문을 드린다. 1. 발해 멸망의 주된 원인으로서 흔히 거론되는 내분에 대해 발표자의 입장이 명확치 않다. ⇒내분을 인정하지 않는 표현이 곳곳에 등장하다가(① "동서고금에서 국가멸망의 원인으로 흔히 지적하는 부정부패, 기강해이, 내분 등이 발해의 멸망과정에는 적용되지 않으며"(1쪽, 머리말) ② "발해는 왜 갑자기 멸망했을까? 가장 고전적인 해석은 정치적 분열 때문이라는 것이다. …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만 집착한 단순 분석이라는 느낌마저 준다"(7쪽) ③ "발해의 멸망은 국가 내부세력의 성장과 분열에 따른 도산이 아니라 외부세력의 도전과 충격에 의한 파멸"(8쪽)), 후반에는 "발해의 군사들이 제대로 싸워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데에는 분명 內紛이 큰 영향을 미쳤음직하다"(9쪽)와 같이 내분을 인정하는 서술이 나오고 있다. 2. "발해의 멸망 과정을 차분히 복원"하겠다고 하지만, 925년 12월 거란의 출정 기사를 중심으로 사료를 소개하였을 뿐, 그 이전 遼陽을 둘러싼 거란과 발해의 관계 등은 상대적으로 소홀하다. ⇒924년 발해의 遼州 공격을 "거란과의 끈질긴 외교 노력은 포기하고 짐짓 현실을 무시하며 경직된 외교노선을 채택"한 "거란 지배층의 자존심을 자극한 위태로운 모험"(10쪽)이라고 하듯이, 발표자는 여기서 발해 멸망의 원인을 찾고 있는 것 같다. 발표자의 독창적인 견해인데, 이에 대한 서술은 소략한 편이다. 1) "요양은 본래 발해의 땅"(2쪽)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발표자는 요동 지역이 발해의 영토였다고 전제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많다. 따라서 선행 연구 성과나 관련 사료에 대한 치밀한 분석이 요구된다. 예컨대 요 태조(야율아보기)가 요동을 차지하기 위해 발해와 20년간 싸웠다는 기록은 遼史 地理志나 遼史 天祚帝 등에 나오고, 정작 太祖 本紀에는 나오지 않는다. 이 점은 요 말기에 요양을 거점으로 발해 유민의 부흥운동을 염두에 둔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 2) "924년 발해의 요주 공격으로 거란과 발해 사이에는 돌이킬 수 없는 적대감이 형성되었다"(3쪽)고 볼 수 있을까? 요 태조가 출정 직전에 내린 조서에서는 "渤海世讐未雪"이라고 한 만큼 발해와 거란의 관계 악화는 그 이전부터이고 924년의 요주 공격은 그 빌미를 제공한 것에 불과하다. 이 점에서 "渤海世讐未雪"의 실체 및 그 의미에 대한 분석이 요구된다. 3) 遼史 太祖本紀에 의하면 908년 10월에 鎭東海口에 長城을 쌓고, 909년 1월에 태조가 遼東을 행차하고, 915년 10월에 압록강에서 낚시하는 기사 등 거란이 요동으로 진출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염두에 둔다면 924년 발해의 요주 공격을 “거란 지배층의 자존심을 자극한 위태로운 모험”으로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3.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발해의 무기력 등이 상대적으로 과장된 느낌이 든다. 먼저 926년 1월 병인(9일) 발해 老相"이 이끄는 3만 군대의 패배를 "스스로 싸움을 포기했을 개연성"(8쪽)이 있고, 거란군이 홀한성을 포위하였을 때, "발해 지휘부의 심신은 이미 무너진 상태"(6쪽)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멸망 이후 발해 유민들의 저항이 거세고 장기적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또 발해가 그토록 무기력했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거란 태조가 925년 윤12월 14일에 烏山에서 제사지냈을 때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고 21일에 撒葛山에서 鬼箭을 쏘는 의식은 거란이 발해와의 전쟁을 대내외에 선포한 셈이다. 당연히 거란도를 통한 부여부와 발해 상경성에도 소식이 전해졌을 것이다."(8쪽)도 발해 지배층의 무기력, 무능력을 강조한 표현으로 보이는데, 이 점과 관련하여 발표자는 거란의 공격이 기습전이라는 측면을 간과한 것은 아닌가? 契丹國志에서 거란 태조가 8부를 병탄하고 奚를 병탄하자 大諲譔이 신라 등 여러 나라와 결원한 사실을 전하고 있는데, 그 시기를 발표자는 “발해와 신라․고려의 결원은 대략 923~924년에 맺어진 것”(10쪽)으로 보고 있다. 이 또한 멸망에 임박한 외교적 행위로서 역시 발해 지배층의 “외교 전략의 실패”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선행 연구에서는 그 시기를 911년(거란이 奚와 霫을 완전히 복속시킨 해)~915년 10월(신라가 거란에 사신을 파견한 해) 사이로 좁히되 911년 직후로 파악하였다(宋基豪, 渤海政治史硏究, 204~205쪽). 이에 따른다면, 결원의 실효성과는 무관하게 발해 지배층의 외교적 노력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발해의 멸망과정과 원인」에 대한 토론문 박진숙(국가기록원) 9세기말에서 10세기초 중원세력이 쇠퇴하고 거란이 흥기하는 세기의 전환기에 발해는 돌연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런데 발해의 멸망원인은 발해말기의 관련사료가 거의 전무하기 때문에, 사실 발해사 연구주제 가운데 검토하기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로 인해 발해의 멸망과 관련한 그간의 논의는 <<요사>>와 <<고려사> 등에 보이는 단편적인 기록에 근거하여 정치적인 내분, 거란의 급습이라는 일반적인 결론을 도출해내는 데에 만족하고 있다. 하지만 한 국가의 흥망성쇠는 어느 특정의 요인만으로 일관할 수 없는 복합적인 면을 지니고 있는만큼, 발해의 멸망원인도 예외없이 10세기초 발해를 둘러싼 동아시아의 정세와 발해내부의 전후사정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수반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더욱이 멸망의 기운이 대인선 전시기가 아닌 최후 10여년의 단시일에 불과하기 때문에 좀더 세밀하게 분석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런 점에서 김기섭 선생님의 오늘 발표는 발해멸망의 원인을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서는 발표자의 논지와 관련한 몇 가지 질문을 중심으로 토론에 임하고자 한다.
1. 발해멸망론에 대한 이해구도 발해멸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발표자의 이해구도가 제한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아닌가 한다. 7쪽에서 거란이 통치능력이 쇠약해진 발해말기의 정세를 틈타 급습하였다는 고전적 해석을 평범하고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만 집착한 단순 분석이라고 지적하고 계시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외부 충격인 거란의 침공이 발해멸망의 결정적인 요인이라는 발표자의 입장에서 비롯된 해석에 불과할 뿐이다. 발표자야말로 발해멸망을 거란 위주의 한정적 사료를 중심으로 현상에 충실한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다. 더군다나 단시일 내에 거란이 발해와의 승부에서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던 직접적인 배경으로 그 당시 발해자체가 안고 있는 정치․외교적인 문제를 배제하고서는 발해멸망론을 논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발해를 둘러싼 정세변동의 유기적인 관계를 면밀히 고찰할 필요가 있다. 2. 지방통치체제의 와해와 말갈과의 관계 수령의 존재는 발해의 정복활동에 따른 이민족에 대한 발해의 일원적인 지배체제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동성국기에 수령의 역할과 기능이 대내적으로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활발했다는 사실은 여러 연구성과에서 이미 밝혀진 바 있다. 그런데 발표자의 지적대로 발해멸망기에 토착세력에 대한 중앙의 통제가 미약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며 그 징후는 언제부터인지, 그리고 이에 대한 말갈전체의 움직임은 어떻게 전개되었을 것이며, 거란에 대한 말갈의 인식과 태도는 어떻게 나타났을 것인가에 발표자의 의견이 듣고 싶다. 말갈의 비중이 절대적인 발해종족의 구성에서 피지배의 입장에 놓인 말갈의 향방은 발해의 멸망을 이해하는 중요한 관건이 된다는 점에서 멸망기 말갈의 정치적 성격은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924년 이후 재개하는 흑수말갈의 독자적인 노선이 발해의 대내정책에 미친 영향 또한 검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이에 대한 발표자의 견해를 듣고 싶다 3. 거란의 요동진출을 둘러싼 발해의 외교적 방침 거란이 발해를 공격할 수 있었던 주요 배경으로 거란이 교두보로서의 요동을 이미 확보하였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지만, 918년 요동이 거란의 통제 하에 놓이기 시작했을 때 발해는 이곳을 탈환하기 위해 전쟁을 시도하기 보다는 오히려 918년 사신을 파견하는 우회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리고 거란의 요동진출에 대한 반격은 이보다 늦은 924년으로 遼州를 공격하여 遼州刺史 張秀實을 살해하는 것에서 비로소 찾아진다. 이러한 사실은 적어도 918년 발해가 대내적으로 거란과 전쟁을 일으킬 수 없는 상황에 처했던 것으로 보여질 수 있으며, 한편 신흥하는 거란에 대한 위협을 느낀 발해가 온건한 입장을 취한 결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이 때에 이미 거란에 대한 발해의 외교노선이 온건과 강경으로 양분 대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과, 발해가 주변국가인 고려․신라․일본․후량 등과 외교관계를 유지하려고 한 것 역시 거란을 견제하는 정치․외교적 의도가 강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10세기초 발해의 대거란정책을 둘러싸고 발해 지도층의 내분이 있었을 경우도 상정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4. 발해의 멸망-외부세력의 도전과 충격에 의한 파멸 발표자께서는 발해의 멸망원인을 거란의 급습에 대한 저급한 방어체계를 지적하고 계신데, 여기에서 말하는 방어체계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고 싶다. 일찍이 수차례의 전쟁을 거쳐 사방 5천리의 영토를 확보하고, 나아가 그것을 오래 동안 유지해 간 발해가 전투와 관련한 군사체계가 미흡하다는 주장은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거란의 발해공격이 윤 12월 겨울에 단행된 것은 오히려 거란이 적적한 시기를 틈타 발해에 일격을 가하는 계산된 공격은 아니었을까 한다. 이것은 거란이 발해의 군사방위체제를 의식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요사>> 耶律羽之傳의 “선제가 이심(離心)을 틈타 군대를 움직여 싸우지 않고 이겼다”는 문구에서 거란이 말하는 이심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5. 老相의 미약한 전투의지와 발해의 멸망 3만의 대군을 이끈 노상이 500명의 거란군을 격파하지 못하고 끝내 패망의 길로 들어섰다는 사실을 근거로 발표자께서는 패배의 원인을 발해군대가 전의를 상실하여 전투를 포기했기 때문으로 이해하였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무엇인지 알고 싶다. 그리고 발해멸망을 이해하는 데에 노상은 매우 흥미로운 인물로, 東丹國이 건국된 후 노상이 右大相의 지위에 오른 것은 주목할 만하다. 거란이 노상에 대해 왜 남다른 대우를 해주었고, 그것이 거란의 발해지배에 미친 영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발표자의 견해를 듣고 싶다. 신라의 멸망원인
신호철(충북대 교수) 1. 머리말 2. 신라멸망사관의 변천 3. 신라멸망의 여러 요인들 4. 신라멸망 원인의 재검토 5. 맺음말 - 신라멸망의 궁극적 원인 1. 머리말 천년왕조 신라는 한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존속된 왕조였다. 신라시대에 형성된 제도나 사상 등 신라문화의 전통은 이후 고려와 조선을 거쳐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컨대 신라의 郡縣制는 -비록 시대를 거치면서 약간의 변화가 있긴 했지만-, 오늘날까지 기본적인 지방 행정단위를 이루고 있으며, 불교 및 유교 또한 한국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고, 그 문화가 현대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신라왕조는 왜 멸망하였을까. 신라의 멸망원인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신라사의 시야를 넓히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멸망원인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는 별로 없는 실정이다. 비록 오래전부터 여러 견해가 제시된 바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 通史나 古代史 혹은 新羅史의 저술에서 그 멸망 요인을 간략하게 언급하는데 그쳤다. 아마도 신라 멸망원인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이는 李基東이 유일하지 않나 한다. 이는 서양사학계에서 로마의 멸망 원인을 다룬 연구가 상당히 많은 것에 비하면 매우 이례적이라 할 수 있으며, 그러한 점에서 고대사학회의 이번 기획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 발표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신라 멸망사관의 변천과정이다. 즉 신라의 멸망원인을 보는 관점이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어떻게 변화되었으며, 그것이 당시의 시대인식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둘째, 연구사를 통하여 지금까지 제시된 모든 신라멸망의 원인들을 검토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원인 목록을 분류 ․ 정리하고자 한다. 셋째, 그 요인들이 합리적인가 혹은 구체적인 실증 작업을 통해 그 타당성이 인정된 것인가 하는 점도 검토해 보고자 한다. 사실 지금까지는 주로 여러 멸망 요인들을 제시하는데 그친 면이 있어, 이러한 작업은 소홀히 하지 않았나한다. 신라의 멸망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며, 어느 하나의 요인에 의한 것도 아니다. 여러 요인들이 상호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지금까지 제시된 여러 원인들의 목록 중에 소위 ‘궁극적인 원인’ 혹은 ‘원인중의 원인’, ‘원인의 원인’을 검토함은 물론, 여러 원인들 간의 상호 관련성을 파악해 신라의 멸망원인을 단순화하고 일반화하는 작업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2. 멸망원인에 대한 인식의 변화 신라의 멸망에 대한 해석은 시대에 따라 커다란 변화를 보인다. 신라 말 당대인들의 인식과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사람들에 인식, 그리고 근대 역사학자들이 보는 신라멸망사관은 서로 차이가 있다. 이처럼 시대에 따라 멸망원인을 다르게 해석하는 것은 당시대의 가치관과 밀접하게 관련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각 시대에 따라 나타나는 신라 멸망사관의 특징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가) 당대인의 인식/ 하늘의 뜻(天命論 혹은 末世論) 신라는 9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이미 붕괴되고 있었다. 신라는 936년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함으로써 멸망되었지만, 이미 그 보다 반세기 전부터 그러한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888년(진성왕 2년)에 일어난 ‘王巨人사건’은 이를 단적으로 입증한다. 즉 진성여왕이 즉위한 다음해에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자 國人이 근심하여 時政을 비방하는 글을 지어 노상에 게시하였는데, 그 내용이 “南無亡國 刹尼那帝 判尼判尼蘇判尼 于于三阿干 鳥伊裟婆詞”라 하였다고 한다. 880년대 후반기의 신라인 스스로가 ‘亡國’을 말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또 897년 최치원은 자신이 지은 진성여왕의 「讓位表」에서 당시의 상황을 ‘어진 나라는 변해서 병든 나라’가 되었다고 하였고, 또 효공왕의「謝嗣位表」에서는 ‘郡邑이 모두 적굴이 되었고 산천이 모두 戰場’되었으니, 하늘의 災殃이 어찌 우리 海東에만 흘러드는 것이랴’라고 한탄하였다. 이어 효공왕 9년(905)에는 궁예가 죽령 동북의 여러 지방을 공략하자, 왕은 여러 성주들에게 명하기를 나아가 싸우지 말고 단지 城을 수비하라고 하였으며, 경명왕 2년(918)에는 어떤 노인이 唐나라 商人 王昌瑾에게 준 古鏡에는 곧 신라가 멸망할 것이라는 讖文이 쓰여 있었다고 한다. 즉 880년대 후반부터 신라 중앙정부의 지배력은 왕경을 중심으로 주변의 경상도 일부에 미치고 있었을 뿐, 대부분의 지방 군현들은 실질적으로 중앙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아울러 전국에 걸쳐 농민의 遊離현상과 반란이 일어나는 등 기층사회의 붕괴가 가속되었으며 특히 불만 농민계층 사이에서는 末世의식이 널리 확산되고 있었다. 따라서 신라는 이미 이때부터 여러 면에서 몰락의 조짐이 일어나고 있었고, 그러한 사실을 당대의 지식인들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까지 충분히 예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당대인들은 신라의 멸망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을까. 앞의 두 사료에서 보듯, 최치원처럼 신라의 멸망을 黑水靺鞨의 침입과 도둑떼가 전국에 걸쳐 벌떼처럼 일어나고 여기에 흉년과 風雨 등 천재지변으로 인해 농사가 망치게 되는 등 비교적 정확하게 현실을 이해하고 있는 경우도 보이지만, 대체로 당대인들은 신라의 멸망을 필연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天命이 있으니 오직 마땅히 충신과 義士로 더불어 민심을 수습하여 스스로 나라를 굳게 하다가 힘이 다한 때에 말 것이니 어찌 천년사직을 一朝에 쉽사리 남에게 내어주겠습니까(『삼국사기』 경순왕 9년) 2) 때는 亂世에 해당하고 運은 千年만에 돌아오는 시기에 해당했습니다. 처음 난을 평정하고 흉적을 물리침에 있어서는 (중략) (태조가) 圖錄을 받고 天命을 받음에 있어서 사람들이 聖德을 알고 마음을 돌렸습니다. 신라는 스스로 멸망할 때를 만났으며 고려는 다시 일어날 운을 타고 있었습니다.(『고려사』 최승로전)
사료 1)은 경순왕 9년에 고려 귀부를 앞두고 열린 군신회의에서 태자가 왕에게 말한 내용이다. 그는 나라의 존망은 ‘天命’에 달렸다고 하였다. 사료 2)는 최승로의 上書文에 보이는 내용이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게 된 것은, ‘時當百六 運恊一千當’ 즉, 亂世를 만나 천년 만에 오는 運이며, 특히 신라가 멸망한 것은 ‘値自滅之期’ 즉, 스스로 때를 만났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당대인들은 신라의 멸망은 스스로 때를 만난 것이고 반면 고려 건국은 天命 또는 千運을 만나 이루어진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당대인의 신라 멸망에 대한 인식은 ‘하늘의 뜻’이며 이는 필연적이고 당위론적 것, 즉 天命論 혹은 末世論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나) 고려 초기의 인식/ ‘奢侈過度 終底滅亡’(王室․貴族․寺刹의 奢侈) 그러나 이러한 당위론적 인식은 신라가 멸망한지 반세기가 지난 성종 대(890년대)에 이르면 변화되었다. 불경을 베끼고 불상을 만드는 것은 다만 오랫동안 전하려는 것입니다. (중략) 신라 말에 불경과 불상은 모두 금과 은을 사용하여 사치함이 정도에 지나쳤으므로 마침내 멸망하기에 이르렀습니다.(『고려사』93, 최승로전) 위의 사료는 최승로가 성종에게 올린 時務28조 중 18조에 보이는 내용이다. 그는 ‘불경과 불상을 모두 금과 은을 사용하는 등 사치함이 지나쳐 마침내 멸망하기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즉 신라의 멸망을 불교와 연결시켜 비판하였다. 신라의 멸망을 불교와 관련하여 언급한 인물은 아마도 최승로가 처음이 아닌가 하며, 그러한 점에서 이 사료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승로의 이러한 지적을, 신라 멸망원인 = 불교라 하여, ‘佛敎 亡國論’으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왜냐하면 그는 불교 자체에 대해 비판했다기보다는, 불상이나 불경을 金銀을 사용하여 만드는 등, 문자 그대로 ‘奢侈過度 終底滅亡’을 강조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즉 그가 지적하고자 한 것은 당시 왕실을 비롯한 귀족들(물론 사찰을 포함한) 사이에 만연하고 있던 사치풍조를 비판한 것이며, 굳이 이야기하자면 불교망국론 보다는 사치망국론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최승로 이후의 김부식이나 특히 정도전을 비롯한 조선 성리학자들의 견해와는 분명히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물론 최승로가 경순왕을 따라 고려에 귀부한 6두품 출신의 유학자이며, 그가 귀족중심의 유교 정치이념을 고려의 통치이념으로 확립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물론, 시무28조를 통해서 불교의 폐해를 강조하고 있었던 점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신라 멸망사관을 곧 ‘불교망국론’으로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승로가 신라의 멸망원인을 불교와 관련시켜 언급한 것은 이후 고려 유학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고려 중기에 오면 신라가 불교의 폐해로 인해 몰락하였다는 점이 더욱 강조되었고 당시의 고려인들에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다) 고려 중기(김부식)의 인식/ 佛敎弊害論 김부식은『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순왕 末尾의 史論을 통해서, 신라멸망사관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불교를 받들어 그 폐해를 알지 못하고 그리하여 閭巷에는 塔廟가 즐비해지고 평민들은 사찰로 도망쳐서 僧尼가 됨에 兵 ․ 農이 점차 줄어들어져서 나라가 날로 衰하여지니 어찌 亂忘치 않으리오. 이때에 景哀王은 더구나 荒淫逸樂을 일삼아 宮人과 좌우 近臣과 함께 포석정에 나가 酒宴을 베풀고 놀다가 견훤의 來襲을 알지 못하고 (중략) 敬順王이 태조에게 귀의함은 비록 마지못해 한 일이지만 또한 가상하다고 하겠다.(『삼국사기』 12, 신라본기 경순왕 말미 史論) 김부식은 신라의 멸망과 관련하여 불교의 폐해를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 최승로가 불상과 불경 등을 금은으로 치장하는 등 지배계층의 사치를 비판한데 그친 반면, 김부식은 불교가 크게 성행하여 전국에 걸쳐 塔廟가 즐비해지고 특히 평민들이 승려가 됨에 兵農이 줄어들어 점차 나라가 쇠해져 마침내 멸망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경애왕의 荒淫逸樂을 비난한 반면 敬順王의 고려 歸依는 가상하다고 하였다. 즉 신라의 멸망원인을 불교의 성행으로 인한 사회 경제적인 폐단 등, 직접적인 불교의 폐해를 지적했다는 점에서 최승로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와 함께 경애왕의 荒淫逸樂으로 포석정에서 酒宴을 즐기다가 견훤의 침략을 받아 멸망에 이르렀다는 유교적 도덕주의 사관이 덧붙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김부식의 신라 멸망원인에 대한 불교인식은 ‘佛敎弊害論’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는 결코 排佛論者는 아니었다. 주지하다시피 자신이 觀瀾寺를 창건하고 대각국사의 비문을 찬술하는 등 불교와는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김부식이 불교의 폐해를 말한 것은 그가 유학자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마도 당시의 대부분의 고려인들의 일반적인 인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一然이 『삼국유사』에서 김부식 史論을 그대로 전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승려인 일연 자신도 신라 멸망의 원인을 불교의 폐단으로 인식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라)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의 인식/ 佛敎亡國論(佛敎=滅倫害國之道) 신라 멸망원인은 곧 불교의 폐해에서 비롯되었다는 ‘불교폐해론’이라는 김부식의 관점은 고려 말기에 이르면 불교 자체를 부정하는 소위 ‘불교망국론’으로 확대 재생산되기에 이르렀다. 주지하다시피 정도전이 1394년(태조 3)에 저술한 『佛氏雜辯』을 통해 불교 자체를 ‘滅倫害國의 道’라 하여 부정하였다. 그는 ‘佛氏輪回說’, ‘因果說’, 그리고 불교와 유교의 다른 점 등을 언급한 다음, 부처를 섬기다가 화를 입은 실례들을 지적하고 결론적으로 불교는 이단이므로 배척해야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排佛의 정당성을 역설하기는 했지만, 직접적으로 신라멸망과 불교와의 관계를 언급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후 1485년(성종 16)에 徐居正 등에 의해 편찬된『동국통감』에 이르면, 신라는 불교로 인해 멸망했다는 ‘불교망국론’이 강조되었다. 즉 신라의 역대 왕들 중에 法興․ 眞興․ 孝成王 등 불교를 숭상한 왕들에 대해 혹평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진흥왕의 경우, 부처에 대한 아첨이 더욱 심하여, 興輪 ․ 黃龍 두 사찰을 창건하고 丈六金身을 만들었으니, 백성의 膏血을 짜낸 것이며, 天乘의 존귀함을 굽혀 佛門의 행자가 되어서 方袍와 園頂으로 일생을 마쳤습니다. 드디어 閭閻에 반은 사찰이 차지하여 일반 백성이 모두 승려가 되게 하였으니 후세에 남겨진 화가 무궁하였습니다.(『동국통감』 12, 신라기 을미년(경순왕 9)조 ) 라고 하였다. 이러한 조선 초기의 排佛的 불교망국론은 18세기 후반의 실학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778년 안정복에 의해 편찬된 『東史綱目』(第 5 下, 을미년 王金傅 9년 11월)에도『삼국사기』와 『동국통감』의 견해를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
마) 근대 역사학자들의 견해 앞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전근대인의 신라 멸망사관은 시대에 따라 점차 변화되었다. 당대인들의 인식은 신라 멸망을 하늘의 뜻(天命論 혹은 末世論)으로 받아들였으나,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는 신라의 멸망원인을 주로 불교와 관련시켜 인식하였다. 고려 초기 최승로에 의해 처음으로 신라 멸망과 불교와의 관계가 언급되었지만, 儒彿混融의 시기인 고려시대에는 신라의 멸망원인이 곧 불교라는 인식을 가지지는 않았다. 崇儒抑佛 시기인 고려 말에 이르러 소위 ‘佛敎亡國論’이 대두되었으며, 그러한 인식은 조선 초기의 『동국통감』에서 더욱 강조되었고 조선후기에까지 이어졌다. 따라서 신라멸망사관은 유교와 불교와의 관계변화에 따른 시대인식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 셈이다. 한편 오늘날의 역사학자들은 종래의 성리학자들의 견해와는 달리, 정치․ 사회․ 경제․ 문화(사상) 및 대외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신라의 멸망원인을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비록 불교망국론으로부터 벗어나 있다고는 하지만, 큰 범주에서 보면 당시의 가치관이나 시대인식과 무관할 수 없다고 본다. 예를 들면 손진태의 경우 民族愛의 결여가 곧 신라의 멸망원인이라고 강조한 반면, 최근 들어 특히 사회경제적인 요인이나 대외적인 측면이 강조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지 않을까한다. 3. 신라 멸망의 여러 요인들 현대의 역사가들에 의해 제시된 신라멸망의 여러 요인들을 시대 순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처음 신라 멸망원인을 검토한 이는 신석호이다. 그는 신라 말기의 상황을 ‘중앙정부의 부패’와 ‘지방정부의 문란’으로 나누어 개괄한 뒤, 멸망 원인을 간단하게 5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① 支那文化에 중독된 중앙정부의 부패. ② 王都의 偏在: 神文王 9년 大邱천도의 실패함. ③ 골품제의 폐해: 六部人만을 중용하고 지방인들을 중용하지 않음. ④ 고구려 백제 遺民들의 신라왕조에 대한 원한. ⑤ 불교의 폐해: 불교가 타락하고 死後 극락정토에 가기만을 기원함, 불교의 세계사상은 후백제 태봉도 국가로 받아들임으로써 승려들이 속속 고려 태조에게 귀의함. 다음으로 손진태는 『조선민족사개론』上에서 역시 5가지의 원인을 들었다. ① 귀족국가의 본질적 毒素: 지배귀족계급의 이기적 사치생활과 권력 확대를 위한 착취. ② 신라의 半封建 ․ 半中央集權的 정치형태: 중앙권력이 강력할 때는 지방에 대한 통제가 가능하지만, 약해지면 지방의 성주들이 배반하여 貢賦不納이 이루어지게 됨. ③ 토지제도의 문란: 지배계급의 土地獨占, 즉 귀족과 사찰의 토지확대로 국력이 빈약해지고 국민단결을 와해시킴. ④ 불교의 墜落: 민족평등사상을 거부하고 숙명설, 윤회설, 극락설, 지옥설 등 지배계급에 유리한 것만을 극력 선전하여 민족사상의 대두를 억압하고 계급반항사상을 말살함. 농민들이 다투어 出家하여 壯丁 수가 감소하고 사찰의 대토지소유 증가로 국가재정의 줄어듬. ⑤ 국제적 평화관계의 지속: 통일 이후 260여 년간 평화가 계속되어 역사를 비판할 지식과 民族愛를 결여함. 다음은 藤田亮策의 견해이다. 그는 비록 신라의 멸망원인을 직접적으로 다룬 것은 아니지만, 「新羅 九州五小京考」에서 3가지의 멸망 원인을 들었다. ① 郡縣의 팽창: 신라를 크게 한 것은 영토의 확장이고 군현의 증가였으나, 이는 동시에 신라를 멸망시킨 원인이 됨. ② 佛敎의 영향: 불교에 의한 일체평등의 교리와 彼岸사상이 신라 국력을 약화시킴. ③ 唐制의 영향: 유학승, 유학생들이 평등주의를 당에서 배워온 까닭에 그 숫자가 증가할수록 골품제에 대신하여 唐의 자유로운 사회조직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음. 한편 이병도는 『한국사』 고대편의 끝부분인 ‘餘言’에서 신라의 멸망원인을 정확하게 몇 가지로 구분하여 제시한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다음 요인들을 들었다. ① 빈부의 차이. ② 귀족의 대토지 사유에 따른 公田의 私田化. ③ 농민의 몰락. ④ 왕위쟁탈전. ⑤ 군사조직의 해이. ⑥ 국고의 고갈. 신라의 멸망원인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이는 이기동이다. 그는 종래의 학설을 소개한 후, 이를 다섯 가지로 총괄하여 검토하였다. ① 귀족 ․ 사찰의 대토지 경영과 이로 인한 생산력의 감퇴라는 문제에 대하여. ② 불교사상의 나쁜 영향이라는 문제에 대하여. ③ 장기간 국제평화가 국민정신을 추락시켰다는 문제에 대하여. ④ 영토의 확장이 멸망의 원인이라는 문제에 대하여. ⑤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변화라는 문제에 대하여 등이다. 한편 신호철은 「신라의 멸망과 견훤」에서 신라의 멸망과정과 견훤의 역할에 대해 검토하였다. 그는 신라말기 농민반란과 지방 호족의 대두는 신라 왕실에 대한 권위의 실추에서 비롯되었으며, 왕실에 대한 권위의 추락은 女王(진성여왕)과 朴氏王(신덕왕, 경명왕, 경애왕)의 등장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아울러 경순왕이 스스로 고려에 귀부하는 데는 그보다 1년 전에 귀부했던 견훤의 역할이 있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한편 조인성은 신라말 농민반란의 배경으로 당시 불만농민층에게 널리 확산되고 있던 末世의식으로 보았으며, 말세의식은 특히 眞表에서 비롯된 彌勒思想의 영향이라고 하였다. 최근영은 신라 멸망원인을 遠因(3가지)과 近因(6가지)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① 首都천도의 좌절과 5소경설치의 후유증. ② 麗濟유민의 차별에 대한 후유증. ③ 五岳 선정의 후유증. ④ 정치적요인: 왕위쟁탈전으로 인한 지도층의 분열과 법질서 붕괴문제. ⑤ 경제적 요인: 토지제도의 문란과 농민의 몰락문제. ⑥ 사회적 요인: 사치와 향락이 끼친 문제. ⑦ 사상적 요인: 하대 6두품출신의 동향과 사상계의 변화. ⑧ 천재지변의 문제. ⑨ 동아세아의 정세변화문제. 이종욱은 『신라의 역사』 2에서 8가지 요인을 제시하였다. ① 왕권의 위축으로 인한 왕정의 붕괴. ② 오랜 평화로 인한 공동 목표 상실과 왕정유지 조직의 약화. ③ 왕정 붕괴로 인한 사회. 정치체제의 붕괴. ④ 난국타개를 위한 개혁 수단의 결여. ⑤ 재정적 궁핍. ⑥ 골품제 운영의 경직성. ⑦ 인적자원의 고갈. ⑧ 사상적 통제의 실패. 한편, 한국사 관련 개설서에서는 신라의 멸망에 대해 직접적으로 그 원인을 언급한 경우는 별로 찾아볼 수 없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신석호, 손진태, 이병도 등 1960년대 이전의 저술에서는 신라의 멸망원인을 하나의 章이나 節로 독립해서 서술하고 있으나, 그 이후에는 개설서는 물론이고 고대사 내지 신라사를 다룬 단행본 등에서도 신라 멸망 원인을 독립된 항목으로 서술한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신라 말 고려 초의 사회변동’이라는 관점에서 이를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기백은『한국사신론』에서 5장 ‘호족의 시대’를 독립 章으로 설정하여 신라 말 고려 초의 사회변동을 서술하였다. 한우근의『한국통사』는 제 3편 제4장 ‘고대왕국의 붕괴’로, 변태섭의 『한국사통론』은 제 3편 제 4장 ‘신라후기의 사회변동’으로 서술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편의『한국사』 11은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이 출간되었다. 한편 신형식은 『新羅通史』에서 제 5장 ‘신라말 사회변동을 극복하는 길’에서 1절 나말의 사회변동과 숙위학생의 역할, 2절 신라의 멸망과 부흥운동 으로 서술하였는데, 특히 2절에서는 주로 신라의 부흥운동을 검토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상 당대인들로부터 오늘날 사가에 이르기까지 신라의 멸망 원인으로 제기된 여러 요인들을 모두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하늘의 뜻(天命論, 末世論) 2) 塔廟와 佛像을 金銀으로 장식하는 등 사치의 과도함(최승로) 3) 불교 숭상으로 일반 농민이 僧尼가 되어 兵農이 감소함(김부식『삼국사기』) 4) 滅倫害國之道 (정도전) 5) 역대 왕들이 불교를 숭상하여 멸망함(『동국통감』) 6)『삼국사기』와『동국통감』의 사론과 대동소이함(『동사강목』) 7) 중국문화의 영향으로 중앙귀족이 부패함(신석호) 8) 王都의 偏在(신석호) 9) 六部人만 중용하고 지방인을 등용하지 않음(신석호) 10) 고구려․ 백제 유민들의 불만(신석호) 11) 불교의 타락, 세계사상으로 후백제 태봉을 국가로 인정하고 승려의 고려귀의(신석호) 12) 지배귀족계급의 이기적 사치생활과 착취(손진태) 13) 半封建的 半中央集權的 정치형태로 지방통제의 불능, 貢賦不納(손진태) 14) 지배계급의 토지독점으로 국력의 쇠퇴, 국민단결의 와해(손진태) 15) 숙명설, 윤회설, 극락설, 지옥설 등이 민족평등사상과 계급반항사상을 말살함(손진태) 16) 장기간 국제적 평화관계의 지속으로 비판의식과 민족애의 결여(손진태) 17) 군현의 팽창(藤田亮策) 18) 불교의 일체평등의 교리와 피안사상이 국력을 약화시킴(藤田亮策) 19) 唐制의 영향으로 유학생․ 유학승들이 골품제도 비판(藤田亮策) 20) 빈부의 차이(이병도) 21) 귀족의 대토지 사유에 따른 공전의 私田化(이병도) 22) 농민층의 몰락(이병도) 23) 왕위쟁탈전으로 인한 왕권의 약화(이병도) 24) 군사조직의 해이(이병도) 25) 국고의 고갈(이병도) 26) 귀족 ․ 사찰의 대토지 경영과 이로 인한 생산력의 감퇴(이기동) 27) 불교사상의 나쁜 영향(이기동) 28) 장기간 국제평화가 국민정신을 추락시킴(이기동) 29) 영토의 확장에 따른 지역적 폐쇄성과 경주중심주의의 극복실패(이기동) 30)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변화(이기동) 31) 여왕과 박씨왕 등장에 대한 지방인의 반발(신호철) 32) 말세사상의 확산이 농민반란의 배경이 됨(조인성) 32) 首都천도의 좌절과 5소경설치의 후유증(최근영) 33) 麗濟유민의 차별에 대한 후유증(최근영) 34) 五岳選定의 후유증(최근영) 35) 왕위쟁탈전으로 인한 지도층의 분열과 법질서 붕괴(최근영) 36) 토지제도의 문란과 농민의 몰락(최근영) 37) 사치와 향락(최근영) 38) 6두품출신의 동향과 사상계의 변화(최근영) 39) 천재지변(최근영) 40) 왕권의 위축으로 인한 왕정의 붕괴(이종욱) 42) 오랜 평화로 인한 공동 목표 상실과 왕정유지 조직의 약화(이종욱) 43) 왕정 붕괴로 인한 사회 정치체제의 붕괴(이종욱) 44) 난국타개를 위한 개혁 수단의 결여(이종욱) 45) 재정적 궁핍(이종욱) 46) 골품제 운영의 경직성(이종욱) 47) 인적자원의 고갈(이종욱) 48) 사상적 통제의 실패(이종욱) 4. 멸망원인의 재검토 이상의 여러 요인들을 살펴보면, 그 내용이 서로 유사하거나 혹은 중복되어 있는 경우도 있고 또 같은 원인을 두고 그 설명하는 논자에 따라 차이가 있거나 심지어는 서로 모순되는 경우도 보인다. 아울러 이 모든 요인들이 신라 멸망원인을 합리적으로 설명해 준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사실관계의 입증이 필요한 경우도 있으며 인과관계의 성립이 불분명한 것도 있어 보인다. 또 여러 요인들 간의 상호 관련성에 대해서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의 원인이 독자적으로 작용을 했다기보다는 서로 복합해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요인들의 목록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요인들이 많을수록 오히려 멸망원인을 설명하는데 장애가 될 수도 있다. 이제 위의 원인들 중 인과관계가 불확실한 경우부터 검토하기로 한다. 우선 王都의 偏在性, 즉 수도인 慶州가 한쪽에 치우쳐 있어 확대된 옛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를 지배하기 곤란하였기 때문에 신라가 멸망했다는 주장이다. 이는 신석호와 최근영의 견해인데, 물론 수도가 중앙에 있으면 지방통치에 효율적일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王都의 偏在’ 자체가 왕조의 멸망원인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동서고금을 통해 수도가 치우쳐 있는 경우는 수없이 많다. 백제의 위례성이나, 중국의 북경도 편재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이며, 오늘날 미국의 워싱턴이나 러시아의 모스코바 등도 결코 중앙에 위치한 것은 아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여 郡縣이 증가된 것이 신라를 멸망시킨 원인이 되었다고 한 등전양책의 견해 또한 왕도의 편재와 비슷한 이유로 받아들이기 곤란하다. 다음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의 불만이 멸망원인이라는 신석호와 최근영의 주장 또한 받아들이기 곤란하다. 고구려 백제 유민들이 멸망 직후에 부흥운동을 일으킨 적은 있지만, 이후 이들의 반란사건이나 저항운동과 관련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신라 하대의 일어난 수많은 정치적 모반사건들은 대부분 진골귀족들 내부에서 일어난 권력쟁탈전의 성격을 지닌 것이다. 혹시 견훤과 궁예가 후백제와 후고구려의 부흥을 표방한 것을 그 근거로 들 수 있을지 모르나,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견훤과 궁예는 고구려 백제 유민과는 무관한 인물이며 그들 정권 안에서 활동한 麗․濟의 유민 또한 찾을 수 없다. 그들이 각각 백제와 고구려를 표방한 것은 단순히 명분에 불과한 것일 뿐, 그 유민들의 불만을 의식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멸망 후 250년이 지난 시점까지 유민의식이랄까 광복정신이 남아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고려 무인정권 기에 신라나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난 것도 같은 경우라고 여겨진다. 그밖에 ‘大邱로의 천도실패’라든가, ‘5소경 설치의 후유증’, ‘五嶽선정의 후유증’ 등과 같은 최근영의 견해도 신라 멸망과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입증된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이들 정책은 모두 통일 직후에 이루어진 것이며, 그 이후에도 두 세기가 넘게 존속하였을 뿐 아니라, 통일 후 100년 이상은 전성기를 이룩하였으며 下代에 이르러 여러 폐단이 나타나고 있다. 다음 ‘난국타개를 위한 개혁 수단의 결여’라든가 ‘인적자원의 고갈’, ‘사상적 통제의 실패’ 와 같은 이종욱의 견해도, 신라멸망의 한 원인으로 설명하기에는 적절치 않다.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신라 멸망원인을 ‘하늘의 뜻’(天命)이라든가, ‘스스로 때를 만났다’든가 하는 당대인의 인식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관념적인 것으로, 구체적인 사실관계의 실증작업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한편 장기적인 국제적 평화관계가 지속된 것이 신라멸망의 원인이 되었다는 견해이다. 이는 비교적 여러 학자들에 의해 지적되었는데, 손진태, 이기동, 최근영, 이종욱 등이 있다. 즉 통일 이후 260년이나 국제적 평화관계가 지속되어 역사를 비판할 지식과 민족애가 결여되었다고 하였고, 혹은 오랜 평화로 인한 공동목표의 상실과 왕정유지 조직의 약화가 신라를 멸망시켰다고도 하였다. 그 밖에 오랜 평화가 귀족의 사치생활과 은일생활이 유행하는 등 도덕적 정신적 해이를 언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두 가지 면에서 문제가 있다. 하나는 국제적인 평화상태의 지속이 곧 신라지배층의 정신적 타락 및 사치생활을 가져오는지 입증되어야 한다. 평화상태의 지속과 정신적 타락 및 사치생활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른 하나는 평화상태가 지속된 것은 中代의 일이며, 신라 말기의 약 1세기 동안에는 오히려 왕위쟁탈전을 비롯한 혼란상이 계속되었다는 점에서도 납득하기 어렵다. 대토지 경영으로 인한 ‘생산력 감퇴’라는 점도 좀 더 실증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신라 말기에 오면 오히려 농법의 개량이나 농지의 개발 등 생산력이 증가되었다는 견해도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변화라는 요인에 대해서도 여러 학자의 견해가 제시되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이기동이 검토한 바 있는데, 그는 특히 한국의 역대왕조가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었던 한 요인으로 중국에 대한 조공제도를 설명하고 있는 전해종의 견해를 받아들여, “당제국의 쇠망은 필연적으로 그 被冊封國으로서 당으로부터 일정한 비호와 보증을 받고 있던 신라 조정의 위치를 크게 동요시키는 작용을 했을 것은 틀림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결론적으로 “어떻든 신라의 멸망원인을 생각할 때 그 국제적인 連帶性, 곧 동아시아세계 붕괴의 同時性을 忽視할 수는 없을 것으로 믿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좀 더 검토가 필요하다고 본다. 이기동의 견해와는 달리, 신라의 멸망이 唐의 멸망, 발해의 멸망, 일본의 天皇親政의 붕괴와 소위 攝關政治의 대두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멸망과 시기적으로 일치하긴 하지만, 서로 아무런 관련성이 없는 우연의 일치라고 한 이병도의 견해도 있거니와, 신라 말 고려초기야말로 중국의 영향이 가장 적었던 시기였으며, 발해와 일본의 경우 신라멸망에 미친 영향 등은 아직 구체적으로 입증된 바 없다. 따라서 신라 멸망은 대외적인 요인보다는 오히려 신라사회 내부의 요인이 더욱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진다. 끝으로 신라 멸망원인과 불교와의 관계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이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고려 초기 최승로에 의해 처음 제기된 이후 가장 많은 학자들에 의해 가장 오랫동안 제기되어 온 요인이다. 아울러 불교 폐해에 대한 내용도 사상이나 교리, 종파와 관련된 것과 사원의 대토지소유와 경영, 불경 ․ 불상 ․ 불탑 ․ 사원의 建造, 사치 등과 관련된 문제 등 매우 다양하다. 따라서 불교 문제는 敎理나 宗派 등 사상적인 측면과 사회경제적인 측면으로 나누어 검토할 필요가 있다. 먼저 사상적인 면에 대해 보기로 하자. 불교 사상의 어떤 면이 신라의 멸망에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점은 학자마다 차이가 있다. 김부식 이후 조선 성리학자들의 排佛的인 포폄위주의 주장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하였거니와, 근대 역사가의 견해로서 신석호는 "불교사상은 국가적 사상이 아니라 세계적 사상이 됨으로써 이를 신봉하는 국민은 반드시 신라왕국만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후백제나 태봉이나 고려도 역시 국가로 인정하였으며 (중략) 승려들은 신라를 버리고 속속 고려 태조의 편으로 기울었기 때문”에 신라가 멸망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한편 손진태는 숙명설, 윤회설, 극락설, 지옥설 등 지배계급에 유리한 것만을 극력 선전하여 민족사상의 대두를 억압하고 계급반항사상을 말살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며, 등전양책은 불교에 의한 일체평등의 교리와 피안사상이 신라의 국력을 약화시켰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 이기백은 윤회사상, 공덕사상 등이 골품귀족의 신분적 특권을 옹호하였기 때문에 6두품 유학자들이 골품체제에 대한 불만으로 불교적 세계관을 비판하고 현세에 있어서 도덕적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고 하였다. 이기동 역시 이기백의 견해를 받아들여 “요컨대 진골 귀족층에 의해 선전된 불교의 윤회설 등 사회적 교의가 6두품이나 그 이하의 평민들에 의해 골품제 사회에 대한 개혁요구와 더불어 비판적인 논의를 초래하게 된 것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며, 이점 사상사적인 측면에서 신라멸망의 주요 요인으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한편 조인성은 신라 말에 이르러 末世意識 혹은 末法思想이 불만 농민들 사이에 확산되었으며, 이러한 말세의식이 곧 농민반란의 배경이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상의 여러 견해들은 불교사상이 신라 멸망에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하지만, 정작 그 사상의 내용에 있어서는 논자마다 차이가 있으며 서로 모순되는 경우도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불교사상이 신라멸망의 주된 원인이라는 주장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도 제기되었다. 김복순은 “불교를 신라의 멸망과 관련시켜 1) 신라멸망 요인의 하나로 지목하거나 2) 신라하대에 퍼진 末世내지 末法思想에 그 배경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에 대해 하나하나 비판하였다. 그는 “신라하대의 유학생들이 골품제사회를 비판한 것은 사실이나 민중의 반항과 같은 것은 아니며 그들은 대개 排佛이 아닌 儒彿仙의 混融的 사상경향을 띠고 있었다”고 하면서 ‘불교를 일체평등이 아닌 특권귀족 옹호의 이데올로기로서 파악’한 손진태, 이기백, 이기동 등의 주장에 대해서 육두품 유학생들이 “불교사상에 대항해서 반항운동을 한 경우는 찾아지지 않는다. 신라하대 반항세력들이 사상적으로 배경을 삼았던 것은 여러 유파의 불교 사상이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그는 또 末世의식 내지 末法사상의 만연이 신라의 멸망원인이라는 설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이점에 대해서는 이미 김영미에 의해서 지적된 바 있다. 즉 신라말기 유교 지식인들 사이에 현실사회에 대한 비판이나 위기의식 같은 것은 있었지만, 그것이 곧 佛法이 멸할 것이라는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사회의 혼란에 기인하는 것이며 따라서 현실사회의 혼란에 따른 말세인식과 불교의 말법시대와는 다르다고 하였다. 한편 신라 말 불교계의 敎宗(華嚴宗)과 禪宗의 종파문제에 대해서도 검토하였다. 김복순은 종래에는 신라 말 禪宗의 성행은 기존 교학불교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으며, 따라서 신라 화엄종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나아가 선종과 교종(화엄종)의 관계가 대립적이고 비판적이라는 기존의 주장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견해를 제시하였다. 즉 하대의 禪師들은 禪敎일치적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화엄교학을 겸수한 인물들이 많아 교학불교를 배척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이론적 근거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학불교가 부패하고 번쇄해서 신라가 망했다고 한 견해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끝으로 불교의 사회경제적인 측면이 신라의 멸망원인이 되었다는 문제이다. 이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최승로가 불경이나 불상을 금은으로 만드는 등 ‘奢侈過度 終底滅亡’이라고 지적한 이래 오늘날까지 많은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즉 사원의 대토지소유로 인해 농민층이 몰락하였다든가, 일반 백성들이 다투어 승려가 되어 兵․農이 줄어들었다든가, 대규모의 사원건립 등 사원경제의 비대라든가 사치 등 그 폐해로 말미암아 국가재정이 줄어드는 주로 경제적인 폐해로 인해 신라가 멸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김복순은 고려 말기의 상황을 비교할 때 이러한 지적에 문제가 있다고 하였다. 즉 그는 “고려 말에는 성리학자들의 공개적인 비판과 정치적인 탄압으로 재산이 몰수되었”으나 신라 말에는 “불교에 맞서서 사원경제의 비대를 저지할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들 세력을 끌어들이려는 후삼국이 지배층으로부터 우대를 받고 있었다.”고 하고, 이어 그는 “이시기의 사원은 사원경제를 사원건립, 불상과 탑의 건조와 같은 것에 사용하면서도 전몰자의 위로 등 민심복귀에 사용하여 고려 말의 세속화된 사원의 기능과는 다른 점을 보였다”고 주장하였다. 5. 맺음말 지금까지 기왕에 제시된 여러 멸망요인들을 재검토하였다. 그 결과 여러 원인들 중에는 신라 멸망과 직접적인 관련이 부족하여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는데 불과했거나, 사실관계에 있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도 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수없이 많은 원인들 중에 어떤 것이 과연 ‘궁극적인 원인’ 혹은 ‘원인중의 원인’이 될 수 있는지 선택하고 아울러 여러 원인들 간의 상호관련성을 통해 멸망원인을 단순화 혹은 일반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발표자의 생각으로는 신라는 ‘중앙과 지방의 대립’이 가장 궁극적인 멸망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중앙과 지방의 대립과 충돌 양상은 정치 ․ 사회경제 ․ 사상적 면에서의 여러 요인들과 상호 관련성을 갖고 설명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즉 정치적 면에서는 중앙에서의 진골귀족들 간의 분열항쟁라든가 육두품 세력의 성장, 군사조직의 해이에 따른 군사력의 약화, 골품제도 운영상의 문제, 왕실의 실정 등을, 이에 대한 지방의 반응으로 城主 將軍 등 지방 세력의 대두와 중앙정부로부터의 독립, 농민층의 불만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사회경제적인 면에서도 중앙의 귀족이나 사찰의 대토지소유와 경영, 국가재정의 파탄, 지배층의 사치와 향락에 대해, 지방인의 불만으로 郡縣의 貢賦不納이라든가 호족세력들의 독자적인 수취, 농민 등 기층민의 몰락과 流民化 현상 등이 연결될 수 있으며, 한편 사상적으로는 중앙에서의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한 교학 불교에 대해 지방에서의 풍수지리설이나 선종의 대두 등이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따라서 앞으로의 문제는 이러한 중앙과 지방과의 관계에 대해 다방면에 걸쳐 좀 더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직까지 중앙정부와 지방 세력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검토해야할 부분이 많이 있다. 중앙과 지방의 관계설정에서 흔히 호족세력의 성격을 막연히 ‘半獨自的’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 중앙과 호족 양자 간의 관계가 시간의 추이에 따라 어떻게 변화되는가 하는 문제도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나아가 중앙정부와 호족과 농민의 3자 간의 역학관계 역시 명확하게 드러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는 호족과 중앙정부, 호족과 농민, 그리고 농민과 중앙정부와의 관계 등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또한 호족의 존재 양태에 대한 이해도 깊어져야 할 것이다. 호족세력의 성장 과정이나 배경 등에 대한 이해는 곧 신라 멸망의 과정과 원인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호족세력들로 하여금 신라왕조에 대한 독립의 명분을 제공해 준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신라 말기 여왕과 박씨왕의 등장도 이해되어야 할 줄 안다. 왜냐하면 여왕과 박씨왕의 등장은 왕실 내부의 문제 뿐 아니라 지방 세력들이 중앙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고 독립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끝으로 중앙과 지방의 대립 항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지방인의 주체가 과연 누구인가 하는 문제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흔히 신라 말 농민 반란이 신라 멸망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고 있지만, 오히려 멸망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 주체는 호족세력이 아닐까 한다. 신라 말기의 농민의 봉기는 자연발생적인 것으로 아직까지 ‘稱制建元’ 혹은 ‘稱王’과 같은 建國意識으로까지 발전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신라의 멸망원인」 토론문
김영미(이화여대 사학과) 신호철 선생님께서는 발표문에서 신라 멸망 원인에 대한 기존의 견해를 정리한 후, ‘중앙과 지방의 대립’이 신라 멸망의 궁극적 원인이라고 제시하고 앞으로 연구가 필요한 문제들을 제안하셨습니다. 선생님의 견해에 특별한 이견은 없습니다만, 몇 가지 의문점을 중심으로 토론을 진행하고자 합니다. 1. 신라 멸망의 원인을 설명할 때, 일반적으로 신라 하대 전체를 대상 시기로 하여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신라 하대의 상황을 살펴보면 일률적이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선생님께서는 신라 하대와 후삼국시기를 꾸준히 연구하고 계시므로, 멸망의 원인을 논의할 때 신라 하대를 시기별로 구분해야 할 필요성은 없다고 여기시는지 궁금합니다. 2. 선생님께서는 중앙과 호족 양자간의 관계, 중앙정부와 호족․농민 3자간의 관계, 호족의 존재 양태, 지방인의 주체 등을 앞으로 연구해야할 문제라고 제시하셨습니다. 그러나 자료의 한계로 인해 논의를 전개하기 쉽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혹시 선생님께서 생각하고 계시는 방안이나 의견이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3.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신라 멸망의 결정적 역할을 한 주체는 호족으로 보시고, “신라 말의 농민 봉기는 자연발생적인 것으로 아직까지 ‘稱帝建元’ 혹은 ‘稱王’과 같은 건국의식으로까지 발전되지는 않았기 때문‘으로 설명하셨습니다. 1) 이러한 설명은 신라가 멸망에 이르는 기간을 어떻게 시기를 구분해 그 멸망 원인을 찾을 것인지의 문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멸망의 원인을 어느 시점에서 찾아야 할지 궁금해집니다. 2) 농민 봉기는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한 왕조를 붕괴시키는 데에는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농민 봉기는 많은 사회경제적 요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복합적으로 파악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실제로 고려시대 승려들 惠永(1228-1294)과 無寄의 저술을 보면 三災劫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즉 사람의 수명이 30세일 때 기근이 계속되는 기근겁이 7년 7개월 7일간 계속되고, 20세일 때에는 역병 곧 전염병이 7개월 7일간 계속되는 疫病劫, 10세가 되면 전쟁으로 7일 밤낮 殺傷이 이어지는 刀兵劫이 이어지는데 이를 三災劫이라고 한다. 이는《瑜伽師地論》, 《阿毘達磨大毘婆沙論》(이상 현장 역) 등에 언급된 내용이지만, 이 세 가지는 지역을 불문하고 사람들의 삶을 가장 위협하는 요소들이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경험으로 미루어 기근은 거의 항시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가장 긴 7년 7개월 7일이라고 하였을 것이고, 전쟁은 전염병 성행 기간보다 짧고 전쟁이 벌어지는 지역에 한정되었기 때문에 7일이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의 고통을 더욱 오랫동안 느껴야 하는 기근은 사람들의 삶을 항시적으로 위협하는 요소였으므로, 국왕 및 관료들은 늘 ‘爲民’政治(民生)를 구호로 내세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왕조는 민심의 이반 나아가서는 봉기로 인해 붕괴의 길을 걷게 됨은 우리가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3) 그리고 농민 봉기의 원인이 되는 기근은 토지제도의 문제 및 토지소유의 불균형 외에도 기후 변화, 천재지변 등의 요인을 감안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천재지변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최근영선생님께서 이미 언급하셨습니다.) 중국의 경우 685년 ~ 822년까지 기온이 상승하다가 그 이후 9세기~11세기에 걸쳐 기온이 낮아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특히 923년 이후에는 거의 매년 가뭄으로 인한 고통을 겪습니다. 《삼국사기》에는 가뭄 및 기후에 대한 기록이 매우 적습니다. 진성여왕 즉위 이후에도 진성여왕 2년(889) 5월, 효공왕 6년 3월과 9년 4월의 서리, 효공왕 11년 봄~여름의 가뭄, 12년 3월의 서리, 4월의 우박, 신덕왕 3년 3월의 서리, 경명왕 5년(921) 8월의 가뭄 정도만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의 상황을 감안하면 연평균 기온의 저하와 가뭄 등은 식량난의 큰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삼국사기》에서는 특히 889년 5월 가뭄 이후 다음해 도적이 봉기한 이유로 중앙 정부의 조세 독촉을 들었지만, 실제로는 이와 관련한 기근이 주요한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농민봉기의 한 원인이 되었을 기근과 관련하여 기후 변화가 주목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특히 9세기후반~10세기 동아시아 3국에서 나타나는 정치 사회적 변동을 연구할 때 동아시아의 기후변화가 동시에 감안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신라의 멸망 원인」에 대한 토론문 박재우(목원대) 이 연구는 2~3장에서 신라의 멸망 원인에 대한 논의를, 역사 사료에 나타나는 관점과 역사학자에 의해 이루어진 견해를 통해 제시하고, 4장에서는 이들 관점과 견해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에 대하여 설명하며, 나아가 맺음말을 통해 신라 멸망의 궁극적인 원인에 대하여 살펴본 것입니다. 이를 통해 그동안 신라 멸망의 원인으로 이해해 왔던 다양한 관점과 견해들의 문제점을 차근차근 되짚어볼 수 있었고, 신라 멸망의 궁극적인 원인에 대한 발표자의 입장을 들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유익하고 좋은 논고로 생각됩니다. 그러면 몇 가지 궁금한 것을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1. 먼저 논문의 구성에 대한 아쉬움입니다. 논문의 구성을 보면, 2장은 신라의 멸망 원인에 대한 전통시대의 관점, 3장은 근현대 학자들의 견해, 4장은 이들에 대한 비판, 그리고 맺음말에는 신라 멸망의 궁극적인 원인에 대한 선생님의 입장을 제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러한 구성 자체가 그리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저는 논문을 받아보기 전에는, 신라 멸망에 대한 연구사 정리도 필요한 것이지만 신라 멸망의 ‘궁극적인’ 원인에 대한 선생님의 입장을 구체적으로 논증하시는 글을 읽게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런 점이 주로 맺음말에 배치되어 있고 또 논증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 듯해서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논문을 이러한 방식으로 구성하신 이유는 무엇인지요? 논문 전반에 선생님의 견해가 좀 더 적극적으로 개진되었으면 합니다. 2. 다음은 본문의 내용에 대한 문제들입니다. 논문의 2장은 ‘신라 멸망 사관의 변천’을 다루면서, 당대인의 인식은 천명론, 고려 초는 사치망국론, 고려 중기는 불교폐해론, 조선 성리학자는 불교망국론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라 멸망 사관의 변천 과정을 이러한 용어로 명명하는 것은, 각 시대의 사관의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는 점에서 매우 좋은 시도로 생각됩니다. 다만 논거로 제시한 자료가 해당 사관에 적합한가 하는 점과 명명한 용어가 적절한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 몇 가지를 질문 드리고자 합니다. ‘가) 당대인의 인식’에서, 당대인은 신라의 멸망을 필연적인 사실로 받아들였다고 하면서 제시하신 근거 중에 최승로의 견해를 제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나 합니다. 왜냐하면 제시한 자료는 고려 성종대에 제출한 최승로의 시무책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나) 고려 초의 인식’에서, 성종대는 당위론적 인식이 변화되었다고 하며 여기서도 최승로의 견해를 근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최승로의 견해를 하나는 당대인의 인식으로, 다른 하나는 고려 초의 인식으로 구분해서 볼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최승로 관련 자료는 둘 다 ‘고려 초의 인식’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나 합니다. ① 선생님께서 그렇게 구분해서 보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② 만약 ‘가)’의 최승로 자료를 고려 초의 사관으로 볼 수 있다면, ‘당대인의 인식’ 뿐만 아니라 ‘고려 초의 사관’도 天命論으로 설명해도 되지 않나 생각됩니다. 선생님의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신라의 멸망을 天命으로 보는 관점은 당대인의 인식일 뿐만 아니라 고려중기에도 나타나는 관념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려사』樂志의 雅樂조의 太廟樂章 항목은 예종 11년에 제정한 음악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곳에 왕건에 대한 노래가 실려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太祖第一室 正聲太定之曲. 受天靈符 寵綏多方 德合三無 功超百王 燕及後昆 承玆積累 於萬斯年 恪修祀事 中聲 應天開基 鴻圖克昌 聖德神功 巍巍堂堂 積厚流光 子孫千億 廟皃蒸嘗 永永無極.’ 여기서 ‘하늘에 응하여 기업을 열었다’[應天開基]는 것은 天命에 응하여 건국했다는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려 중기에도 천명론은 유효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렇게 보면, 천명론을 당대인의 인식으로만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신라 멸망의 원인에 대한 당대인의 인식과 관련해서는, 선생님께서 제시하신 논거 외에도 다음 「훈요십조」의 2조가 참고가 될 듯합니다. 其二曰 諸寺院皆道詵推占山水順逆而開創 道詵云 吾所占定外妄加創造則損薄地德祚業不永 朕念後世國王公候后妃朝臣各稱願堂或增創造則大可憂也 新羅之末 競造浮屠 衰損地德 以底於亡 可不戒哉 즉 당대인은 ‘衰損地德’의 관점에서 신라 멸망의 원인을 이해했습니다. 이 사료는 선생님의 입장에서라면 어떻게 이용하실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라) 조선시대 성리학자의 인식’에서, 본문에 제시된 『동국통감』의 기록은 불교망국론을 보여주는 것일 수는 있어도, 신라 망국의 원인을 말하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신라 망국의 원인을 설명하는 다른 자료를 근거로 제시하시는 것이 논지 전개상 더 나을 듯합니다. 혹시 신라 멸망의 원인에 대해 직접 언급하는 성리학자에 관한 다른 사료가 있으신지요? 3. 신라 멸망의 궁극적인 원인에 관한 선생님의 견해에 대한 질문입니다. 어떤 국가와 사회가 멸망하는 원인은 정치, 경제, 사회, 사상 등 다양한 측면에서 복합적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원인들은 때로는 시대를 초월해서 국가가 멸망할 때에 비슷한 양상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비슷한 양상이 나타나더라도 그들만의 독특한 멸망 원인을 설명해야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밝혀냈다고 평가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신라 멸망의 ‘궁극적인 원인’이라는 표현도, 신라 멸망의 신라적 특성을 찾아내야 한다는 뜻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즉 신라의 특징적인 사회 운영 원리와 그로 인한 근원적인 모순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 신라 멸망의 근본적인 원인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선생님께서는 신라 멸망의 궁극적인 원인을 ‘중앙과 지방의 대립’이라고 설명하면서, 이들의 대립 양상은 정치, 사회경제, 사상적 면에서 여러 요인들과 상호 관련을 갖고 설명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들 문제는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저는 이러한 점들에 대해 선생님의 견해를 논문을 통해 알고 싶었습니다만, 논문에서는 구체적인 답변을 하고 계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중앙과 지방의 대립’이란 무엇을 의미하며, 또 이를 신라 멸망의 궁극적인 원인이라고 보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와 관련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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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눈꽃 원문보기 글쓴이: 북극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