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무기체계가 도입되고 전력화 되기까지는 분명한 목적과 함께 그 효용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 목적과 효용성이라 함은 적을 제압하고 도발을 억제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볼때 대한민국의 고속정은 소기의 목적과 임무를 훌륭히 수행한 가장 성공한 무기사업의 하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올리면서 여러분과 다시한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자료는 오원철 전 경제수석비서관의 홈페이지에서 발췌하였습니다>
1970년초까지 해군력은 북한이 절대적 우세의 시기 - 70.6.5일 해군 방송선 피납
1970년 6월 22일의 국군묘지 현충문 폭발사건(註: 북한에 의한 두 번째의 朴 대통령 암살기도 사건)이 일어나기 약 반달 전인 6월 5일, 북한 함정은 우리 영토인 연평도(延坪島) 부근 공해상에서 우리 함정을 기습 공격하여 납치해 갔다. 소위 「해군 방송선 피랍사건」이다. 방송선이라고 보도됐지만 어선단을 보호하는 임무를 띠고 있는 어엿한 현역 해군함정(120톤급 포함(砲艦))이었는데, 15분간 교전을 한 후 승무원 20명 중 대부분이 사상된 채 납치 당했다.
당시의 해설을 보면 다음과 같다.「해군 방송선은 120톤급으로 최대 시속은 12노트 정도, 40㎜와 20㎜ 기관포 각 1문으로 무장하였으며, 레이더도 갖고 있으나 매우 노후하여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북괴 고속포함은 북괴 해군의 연안경비용 함정으로 250톤급이다. 최대속력은 25노트, 무장은 75㎜ 포 1문과 기관포, 레이더를 갖고 있다. 북괴는 이런 함정을 수십 척 보유하고 있다」
즉, 우리 함정의 속도는 12노트인데, 북한에서 건조한 함정은 25노트로서 우리 함정보다 2배나 빨랐다는 이야기이다. 우리 함정이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만큼 우리 해군력은 북한에 뒤쳐져 있었던 것이다.
1970년 당시의 남북한 해군력 격차
당시 우리 해군은 구축함 3척, 호위구축함 3척, 프리기트함 4척, 수송호위함 6척을 보유한 것이 전부였다(註: 1970년 통계임).
그것도 미 해군이 쓰다 퇴역시킨 구식 함정을 대여 받은 것들이었다. 심지어 2차대전 당시 일본 해군이 사용하던 함정도 있었는데, 납치 당한 방송선이 바로 그런 함정이었다. 이에 비해 북한 해군은 철저하게 연안방어용 함대로 편성되었다.
공격형 잠수함 4척, 스틱스(STYX)라는 함대함 미사일을 탑재한 미사일 초계정 4척, 고속어뢰정 50척 등을 보유했다
(註: 1970년 통계임). 함정 수로는 한국 해군을 완전히 앞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북한의 조선공업은 남한보다 앞서 있어 선박용 엔진을 포함한 각종 함정을 생산했고, 심지어 잠수함까지 자체 건조하고 있었다.
당시 해군 구축함의 스팀터빈 압력상승엔 무려 40분 소요
소형 함정의 수가 차차 늘어나자 북한 함정은 우리 영해를 침범하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속도도
빨라져서 60년대 후반에 가서는 우리 해군 함정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북한 함정은 남방 한계선을 수시로 넘어
왔는데, 우리 함정이 따라가면 빠른 속도로 유유히 사라지곤 했다. 북한은 우리 해군이 함정보유 수나 속도면에서
약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더욱 대담하게 나왔다. 35노트가 넘는 고속정을 만들어 간첩을 남파하기 시작한 것이다.
35노트라고 하면 우리 해군에서 가장 속도가 빠른 구축함과 같은 속도이다. 그러니 간첩선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함정은 구축함밖에 없는데 여기에도 문제가 많았다. 당시 해군이 보유하고 있던 구축함은 스팀터빈에 의해서
구동되었는데, 스팀의 압력을 최고로 올리는 데는 무려 40분이나 소요되었고, 수심이 얕은 곳은 항해할 수가 없었다.
구축함의 이러한 약점을 이용해서 북한 간첩선은 섬을 은폐물로 삼아 교묘하게 남침해 왔다. 그러니 어쩌다 운이 좋아
북한 간첩선의 퇴로에서 조우했을 때에나 격침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조그마한 배가 간첩선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것도 수월치가 않았으며, 소형 간첩선을 함포로 명중시킨다는 것은 기술상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1970년대 초의 한국 영해는 북괴의 앞마당
1970년에 공식적으로 확인된 남파 간첩선 사건은 9건이었다. 이 중 6건은 상륙 지점에서 발견된 것이고 나머지 3건만 해상에서 격침시켰다. 이 3건 중에도 2건은 공군의 지원을 받아 항공기가 격침시킨 것이니 나머지 한 건(격열비도 사건)
만을 해군에서 단독 처리했다는 결과가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당시 북한 간첩선은 우리나라 영해를 마치 자기 앞마당 드나들 듯, 수시로 침투시키고 있었는데, 우리 해군은 속수무책이었다는 결론이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우리나라 연안은 간첩선에 대해서 무방비 상태나 다름이 없었다.
해군 방송선까지 납치되는 상태
이런 상태에서 방송선 피랍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국민들은 불안해했고 여론은 들끓었다.
「고기잡이배를 끌고 가다 못해 해군 함정까지 끌고 가느냐. 북한이 우리 해군을 깔보고 있기 때문이다.
강력한 보복조치를 취하라. 해군력을 키워라」라고 했다. 국민들은 다투어 방위성금을 내기 시작했고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질타도 빗발쳤다. 「국방을 담당하는 정부나 대통령은 해군 함정이 납치 당한 데 대한 책임을 지라」는 것이고, 「앞으로의 대책을 밝히라」는 것이었다.
박대통령의 해군력 강화를 위한 긴급조치 시행
朴 대통령은 해군 함정 납치사건은 김일성이 전쟁을 도발하는 행위라고 단정하고 우선 두 가지 긴급조치를 취했다.
첫째가 고속정의 확보 문제였다.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는 美 해군으로부터 원조를 받는 것인데, 해군의 보고에 의하면 美 해군은 그들의 전략 및 작전 교리상 원양 함정만 보유하고 소형인 고속정은 갖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방법은 국내에서 건조하는 길뿐이다. 朴 대통령은 "북한이 고속정을 자체 제조하고 있는데, 우리나라가 만들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
설계는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 시키면 되지 않느냐"라고 했다. 이 지시에 따라 해군은 사건 발생 후 20여일 뒤인 6월 28일, 고속포함 건조안에 대해 대통령의 재가를 받고, 7월 29일 KIST와 기본설계 용역을 체결했다.
배의 크기는 120톤급으로 이름을 'KIST보트'라고 했다.
두 번째 조치로,
朴 대통령은 미국에만 의존해 왔던 병기의 일부를 국내에서 생산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김학렬(金鶴烈) 부총리에게 방위산업 육성을 지시했다(註: 이 때 경제기획원 관리차관보(황병태(黃秉泰)), 국방부 군수차관보(신원식(申元植)), 상공부 광공전차관보(筆者), KIST 부소장(심문택(沈汶澤))으로 「4인 위원회」를 구성해서 추진하라고 했다. 우리나라 방위산업의 태동이며 필자가 방위산업에 관여하게 된 연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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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여 생산한 백구 기러기 참수리급의 고속정은 북괴의 간첩선을 휼륭히 막아내고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영해를 굳건히 지켜 왔던 것입니다. 그 후 이어서 추진한 포항급 및 울산급 초계함 건조는 한국의 조선공업 뿐만 아니라 해군의 주축을 이루는 함정을 이루었습니다.
고속정 사업이야말로 자주국방 사업의 가장 큰 결실이었습니다.
이것을 이어받아 KDX3의 한국형 이지스함은 대한민국 해군에게 있어서 제 2의 자주국방 사업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