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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의 단상 |
류 동 민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
늦가을일까 아니면 초겨울일까? 계절의 이름을 붙이기 애매한 주말 아침, 추절추절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네댓 평 남짓한 작은 동네 카페에 앉아 글을 쓴다. 옛 시구에 이르길 "비 갠 긴 둑에 풀빛만 짙어지거늘 님 떠나보내는 슬픈 노래만 들린다(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라고 하였던가. 그저 청승맞은 가을 타기라 하기에는 자존감이 허락하지 않고,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로 짐작되는 카페 주인 겸 종업원의 벌이를 걱정해서라고 하기에는 스스로 위선적이라는 부끄러움을 거두기 어렵다. 카푸치노 한 잔에 아침나절 내내 몇 안 되는 테이블에 무선인터넷까지 독차지하다시피 호사를 누리고 있건만 마음이 헛헛함은 그래서일 것이다. 오랫동안 노동운동 주변에 머물다가 이른바 '좌파'정권에서 무슨 경제자문위원이 되었던 분과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좌파'라 공격받던 그 정부에서조차도 자문위원들의 대부분은 대기업 경영자 출신이거나 그 언저리의 경제 관료나 이코노미스트들이었다는데, 그분의 소회인 즉, "구름 위에서 아래 세상을 바라보는 그들"은 진심으로 "나라 경제"를 걱정하고 있더라는 것. 재야에 있을 때는 그 구름 위의 사람들이란 거짓된 신념으로 위장한 대단한 음모가 쯤일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실상 아래 세상에 대해서는 정말로 아는 것이 없는 "순수한" 사람들이더라는 것. 그 "순수함"이란 다름 아닌 아래 세상의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 일부러 눈을 감는 사악함이 아니라 실제로 무지함으로부터 나오는 "진정성"의 표현이더라는 것. 민생이란 말의 공허함, 그 위험 나이가 들면서 삶의 진정성이란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생각에 문득문득 사로잡히곤 한다. 내 열정의 시작과 끝은 어디였을까? 그 대상은 어떻게 규정되는 무엇이었을까? 아니 무엇이라고 정의라도 할 수 있는 것이었을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면 그 어느 것 하나 분명하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저 확실한 사실은 나는 태어나 먹고 마시며 어떻게든 오늘까지 살아왔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도 많은 날을 이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일 따름이다.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끊고 싶을 만큼 지겨울 밥벌이, 그것들이 모여 삶을 이루고 사회를 이룬다. 그래도 삶은 그 자체가 경건한 것이라거나 먹고사는 문제가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말해주는 것. 그것은 때로는 그 소중한 가치의 기반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일을 외면하고 침묵하도록 만드는 어이없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비록 어제오늘 일은 아닐 테지만, 요즘 들어 부쩍 민생이니 경제니 하는 말들은 내 귓가에서는 공허함을 넘어 가증스럽게까지 들린다. 신성모독의 불경을 무릅쓰고 비유하자면, 구름 위에 있던 분들이 가끔 아래로 내려와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라는 화두를 던져놓고 다시 승천해버리는 듯한 느낌이다. 그리하면 산 밑에 모여든 이들은 그 공허한 화두를 향해 자신들의 구복을 위해 빌며 머리를 조아린다. 당신들의 신은 이미 죽었다고 악에 받쳐 외치려다 문득 내가 외칠 말들도 마치 구름 위의 그들이 던지는 말처럼이나 허무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스스로 소스라친다. 어쩌면 내가 외치고 싶은 말들이란 가끔씩 꿈속에 나타나지만, 끝끝내 뒷모습만 살짝 보여주고 멀어져 가는 사랑, 진리, 그리고 깨달음을 묘사해보려는 헛된 시도일는지도 모른다. 저 푸른 생명의 나무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른 생명의 나무이다." 그저 정신적 허영을 채워주는 멋에 외우고 다니면서 여기저기 쓰는 잡문에도 몇 번이나 우려먹었던 경구, 그 울림이 오늘따라 절실하게 다가온다. 긴 둑은 보이지 않고 고층아파트만 가득 찬 도시, 풀빛 대신 어지러이 떨어진 은행 나뭇잎의 노란 빛깔만 행인의 발길에 이리저리 짓밟히는 그 도시의 뒷골목. 나는 글을 쓰고, 나이 든 아낙네와 젊은 새댁은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며 머핀과 베이글을 가다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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