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향.진양은 지령.인걸이 뛰어난 고장. 그곳에서의 우리 선조님들은!
관향. 진양(貫鄕. 晋陽)은 |
지령. 인걸(地靈. 人傑)이 뛰어난 고장 |
그곳에서의 우리 선조님들은! 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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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호(號)에 연재(連載)할 내용은 진양(진주)의 성씨(姓氏)를 간략하게 밝히고 진양지와 진양속지에 등재된 선조님들의 행적과 관련 기록을 한분 한분 쓰려고 한다. |
<편집자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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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의 성씨(姓氏)
본주(本主): 강(姜), 하(河), 정(鄭), 류(柳), 소(蘇), 임(任), 강(康), 김(金), 박(朴)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씨족보 서(河氏族譜 序)에 이르기를 진주고을은 웅장한 지리산이 웅거해있고 가깝게는 긴 강을 끼고 있어 영령(英靈)스러운 기운이 내려와 모이니 뛰어난 인재가 배출되고 세상에서 없는 것이 없다고 일컫는다. 옛 타주(陀州: 거타주 居陀州의 별칭)의 역(域)으로 있을때부터 부서(富庶: 풍성하고 물건이 많은 것)하고 광대(廣大)하였는데 신라 신문왕(神文王)때에 청주(淸州)를 나누어 설치하였고 경덕왕(景德王)때에 이름을 강주(康州)라 고쳤으며 고려 현종(顯宗)때에 이 주(州)의 사람 장군 강민첨(將軍 姜民瞻)이 적을 토벌하여 난(亂: 거란의 난)을 마무리지으매 대공(大功)의 상(賞)으로 승격시켜 진주목(晋州牧)으로 삼으니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이름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토성(土姓: 본래부터 있던 성)으로는 삼한시대(三韓)부터 나온 것이 넷이었으며 강(姜)이라 이르고 하(河)라고 이르며 정(鄭)이라하고 소(蘇)라고 일컫고 주(州)를 세운 뒤에 또 삼성(三姓)이 있으니 류(柳), 임(任), 강(康)이라고 일렀다. 우리 집안은 구성(舊姓)의 사가(四哥)에 하나로서 옛 태주 때로부터 원래 사족(士族)이었으나 세계(世系)에 전하는 것이 없고 다만 여사(麗史=고려사)에 하시랑 공진(河侍郞 供辰)이 있다. 근원을 같이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으되 분파(分派)는 밝히지 못했으며 또 강전중내급사(姜殿中內給事, 인문 引文)가 시(詩)로써 선세(先世)에 증정하여 하복야라고 일컬었으되 휘(諱)를 알지 못했으니 비탄스럽다.
하씨 세계변(河氏 世系辨)에 이르기를 옛날 가정(嘉靖:중종때)초에 조단성(趙丹城:단성현감) 응경 씨(應卿 氏)도 또한 하가(河家)의 외예(外裔:외손)인데 정성을 다한 찬집(撰集)으로 진양사대성(晋陽四大姓)의 족보를 만들어 사강(四姜) 삼하(三河) 십정(十鄭:모두 분파의 뜻임)의 구분을 질연(秩然)히 하고 진주 향사당에 비장되어 있다고 밝혔다.
사마(司馬): 과거(科擧)제도로서 생원(生員) 진사시(進士試) 또는 감시(監視)라고도 하며 합격자는 성균관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지고 하급관리로 등용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어 있었다.
남행(南行): 과거를 거치지 않고 벼슬길에 천거되는 것. 즉 음직(蔭職)을 뜻한다. 유행(儒行): 유학자(儒學者)로서 선비의 훌륭한 품행과 품성을 지닌 인물 품행(品行): 품성과 행실이 뛰어나고 어짐 충의(忠義): 임금과 나라에 대한 충성과 의리 효행(孝行): 부모를 정성스럽게 섬기는 행실 열행(烈行): 여자로서 지조(志操)가 곧음. 여자의 정열(貞烈)한 행적 열녀(烈女): 남판에 대한 절개와 정조(貞操)가 굳은 여자 총묘(塚墓): 무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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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양지에서 본 선조님 인맥 현황 |
(단위:명) |
구분 |
문과 |
무과 |
사마 |
남행 |
인물 |
목사 |
군수 |
유행 |
품행 |
충의 |
효행 |
열행 |
열녀 |
총묘 |
진양지 |
고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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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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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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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
20 |
27 |
29 |
9 |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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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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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진양속지 |
9 |
12 |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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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4 |
1 |
13 |
10 |
4 |
17 |
15(5) |
8(1) |
7 |
계 |
29 |
39 |
35 |
9 |
21 |
4 |
1 |
13 |
10 |
4 |
22 |
15(5) |
8(1) |
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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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지(晋陽誌)에 나타난 인물(人物)
○고려(高麗) 강민첨(姜民瞻): 목종(穆宗) 때에 등제(登第)하였다. 현종 때에 동여진(東女眞)이 청하(淸河)·연일(延日)·장기현에 입구(入寇)하니 강민첨이 문연(文演)·이인택(李仁澤)·조자기(曺子奇)로 더불어 도부서(都部署)로 삼아 주군(州郡)의 군사를 독려하고 공격하여 달아나게 하였으므로 내사사인(內史舍人)으로 배명(拜命)되었다. 또 대장군(大將軍) 강감찬(姜邯贊)을 부(副)로써 도와 글안의 소손영을 흥화진(興化鎭:義州에 있다.)에서 크게 파하였다. 소손영이 군사를 이끌고 바로 경도(京都:송도)로 달려오니 강민첨이 자주(慈州:지금의 慈山郡)의 내구산(來口山)에 추급(追及)하여 또 크게 파하였다. 이어 응양상장군주국(膺揚上將軍柱國)에 발탁되었다가 우산기(右散騎)에 전임되어 항상 임금을 모셨다. 또 추성치리익대공신(推誠致理翊戴功臣)의 호(號)를 하사받고 이듬해에 지중추사 병부상서(知中樞事 兵部尙書)가 되었다가 12년에 졸(卒)하니 임금은 3일 동안 조회(朝會)를 철폐하고 태자태부(太子太傅)를 추증하였다. 강민첨은 서생(書生)에서부터 일어나서 활쏘기와 말타기는 그의 소장(所長)이 아니었으나 지기(志氣)가 굳세고 과감(果敢)하여 여러번 전공(戰功)을 세우고 드디어 현달(顯達)하였다. 위에서 하교(下敎)하여 공을 기록하고 그 아들 단(旦)에게 녹자(祿資)를 더하였고 문종(文宗)이 즉위하여 제(制:조칙)하여 이르기를, '태중상부(太中祥符:宋의 年號) 11년(1018)에 글안이 침입했을 때에 병부상서 지중추사 강민첨이 분격(奮擊)하여 반령(盤嶺)의 들에서 대첩(大捷)하니 글안이 분패(憤敗)하여 무기를 던지고 갑옷을 버리어 행로(行路)가 애색(隘塞:꽉막힘)되었다. 만급(萬級)을 사로잡고 베었으니 그 공을 추념(追念)하여 포장( 奬)을 행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 얼굴을 그려 공신각(功臣閣)에 걸어 후인에게 권장토록 하라' 하였다.
강창서(姜彰瑞): 어려서는 본주(本州)의 향교(鄕校)에 붙이었더니 힘써 배우고 속문(屬文:글짓는 것)을 잘하여 강남(江南)에 학자로서는 그보다 나은 이가 없었다. 희왕(熙王:熙宗) 8년 봄에 성시(省試:과거)에 가려고 하는 데 그의 아버지 사호(司戶)가 마침 죄에 걸리어 옥에 갇히었으므로 방면(放免)해 줄 것을 청했더니 관원이 즐겨히 허락하지 않고 곧 말하기를 '네가 만약 자원으로 급제(及第)해서 오르면 방면할 수 있다' 라고 하고 옥사를 늦추고 기다렸다. 과연 장원이 되어 금의(錦衣) 환향(還鄕)함에 이르러서는 목백(牧伯)이 막료(幕僚)와 주리(州吏)를 거느리고 성밖에 나가서 맞이하였다. 그리고 그 집으로 나아가서 연석(宴席)을 베풀고 부모에게 술잔을 들어 경축하니 일경(一境)이 영화롭게 여겼다. 여러번 옮아서 한림원(翰林院)에 나아갔다.(승람에 보임)
강인문(姜引文): 박사(博士) 강계용(姜啓庸)의 아들이니 부자(父子)가 모두 유학(儒學)으로 이름이 드러났다. 강계용이 일찍이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日本)에 통신사로 갈 때 인문도 따라갔다. 원조(元朝)가 일본을 정벌하기에 미쳐서는 일찍부터 도리(道理)를 안다는 것으로써 또 서장관으로 천거되었더니 풍도(風濤)가 험간(險艱)하고 또 군사들의 교전으로 인하여 여럽너 죽음에 빠질뻔하였다. 본국에 돌아와서는 다시 벼슬하지 아니하고 자손에게 경계하여 유업(儒業)을 못하게 하였다. 그런 까닭에 아들 감찰어사(監察御史) 강사첨(姜師瞻)과 손자 문하시중(門下侍中) 강창귀(姜昌貴)는 모두 이속(하급관리)을 경유하여 나아갔고 증손 강군보(姜君寶)는 성품이 민첩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다시 유학을 업으로 속문(屬文:글짓기)을 잘하였다.
강시(姜蓍): 나이 19세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고 판도판서(版圖判書)·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역임하였으며 추충보조공신(推忠輔祚功臣)의 호를 내리고 진산군(晉山君)으로 봉했으며 시호는 공목(恭穆)이다. (승람에 보임)
강회백(姜淮伯): 찬성사 강시의 아들이다. 우왕(禑王) 초에 등제(登第)하여 여러번 옮아서 성균제주(成均祭酒)가 되었다가 밀직제학(密直提學)·부사(副使)·첨서사사(簽書司事)가 되고 추충협보공신(推忠協輔功臣)의 호를 받았다. 공양왕(恭讓王)이 즉위하여 강회백·조준(趙浚)·서균형(徐均衡)·이지(李至)로 세자사(世子師)를 삼으니 강회백은 나이가 적고 배운 것이 없다고 하여 고사(固辭)하매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겸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승진시켰다. 임금에게 상소(上疏)하여 조불(造佛:불상을 만듬)·조탑(造塔) 및 한양(漢陽)으로 천도(遷都)하는 등의 일을 간하니 임금이 가람하였다. 나가서 교주(交州)와 강릉(江陵)도 도관찰사(都觀察使)로 출척(黜陟)되었다가 소환(召還)되어 정당문학(政堂文學) 겸 대사헌(大司憲)에 배명되었으며 또 재이(災異)로 인한 것은 정형(政刑)을 밝게 닦아서 천심(天心)에 답할 것을 말하니 임금이 따랐다. 간관(諫官) 김진양(金震陽) 등이 정몽주(鄭夢周)의 지사를 받아 조준과 정도전 등을 탄핵하니 강회백도 또한 대관(臺官)을 거느리고 상소하여 조준 등을 논핵(論劾)하였다. 정몽주가 죽고 김진양 등이 모두 장류(杖流)되었으되 강회백은 임금의 사위 강회계(姜淮季)의 형이었기 때문에 연좌(連坐)되지 아니하였다. 병을 칭탁하고 사직하니 김자수(金自粹) 등이 말하기를 '김진양과 강회백은 죄는 같은데 벌은 다르니 청컨대 강회백 및 류기(柳沂)의 관직을 깎고 원지(遠地)로 유배케 하소서'라 하니 임금이 부득이하여 이에 따라 강회백을 진주에 귀양 보내었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가 되었다가 졸하니 나이 46세였다. 통정집(通亭集)이 있어서 세상에 행하는데 아들은 종덕(宗德)·우덕(友德)·진덕(進德)·석덕(碩德)·순덕(順德)이다. (고려사 및 승람에 보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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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조(本朝·조선) 강석덕(姜碩德): 강회백의 아들이니 벼슬이 돈녕부사(敦寧府事)에 이르렀고 시호를 대민(戴 )이라 하였으며 완역재집(玩易齋集)이 있다. (승람에 보임)
강희안(姜希顔): 강석덕의 아들이니 과거에 올라 벼슬이 인순부윤(仁順府尹)에 이르렀고 문명(文名)이 있는 위에 전(篆)·예(隸)·진초(眞草)와 그림에 모두 절묘(絶妙)하였다. (승람에 보임)
강희맹(姜希孟): 강희안의 아우다. 정묘년(丁卯)의 과거에 장원하고 익대좌리공신(翊戴佐理功臣)으로 진산군(晉山君)으로 봉했으며 벼슬이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시문(詩文)이 정심(精深: 정묘롭고 의미가 심장함)·온자(瑥藉: 포용하는 것이 있음)하였으며 사숙재집(私淑齋集) 17권이 있다. (승람에 보임)
강맹경(姜孟卿): 강회백의 손자이니 과거에 올라 지낸 바 벼슬이 모두 청요(淸要: 깨끗한 벼슬)한 것이었다. 세조(世祖)때에 좌익공신(左翼功臣)으로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으로 봉했고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승람에 보임)
강자평(姜子平): 문과에 장원하여 두 번이나 승지(承旨)가 되고 벼슬이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 이르렀다. 아우 자순(子順)은 옹주(翁主)에게 장가들어 반성위(斑城尉)가 되었다.
강귀손(姜龜孫): 강희맹의 아들이니 과거에 올라 벼슬이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다. 시호는 숙헌(肅憲)이다.
강혼(姜渾): 일찍 과거에 올랐고 문장(文章)이 능하였다. 연산군 때에 승지가 되었다가 정국(精國)에 참여하여 그 공으로 진천군(晉川君)에 봉하였고 벼슬이 판중추(判中樞)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승람에 보임)
강형: 강자평의 아들이니 과거에 올라 벼슬이 사간(司諫)에 이르렀더니 연산군 때 갑자사화(甲子士禍)에 걸려 죽음을 당하였다. 중종 초에 참판(參判)을 추증하였다. (승람에 보임)
강응규(姜應奎): 자는 규지(奎之)니 가정(嘉靖) 무오년(명종13년 1558)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일찍부터 문명(文名)이 있어 고을 사람 진사 유백온(兪伯溫)·진사 윤녕으로 더불어 이름을 나란히 하고 이름이 반궁(泮宮: 성균관)에서 무거웠다. <가좌촌에 살았다.>
강원(姜源): 자는 계청(季淸)이니 가정 임자년(壬子:명종7년:1552)에 생원에 합격하고 병진년에 문과에 올랐다. 천성이 청간(淸簡)하여 영산(營産)에 뜻을 두지 않았고 여섯 번이나 주군(州郡)을 맡았으되 염근(廉謹)하고 엄명(嚴明)하였다. 그가 청주목사(淸州牧使)가 되었을 때에 사람들이 삼청선생(三淸先生)이라고 일렀으니 대개 덕이 맑고 주의 이름이 청자(淸字)이며 정사를 하는 것이 맑았기 때문이다. <원당(元堂)에 살았다.>
강언평(姜彦平): 자는 군보(君保)요 지평(持平) 강전(姜詮)의 아들이다. 효우(孝友)가 천성에서 나왔으니 그의 형 진사 강여평(姜汝平)이 중병을 얻으매 친히 스스로 약을 대려서 백방으로 조치(調治)하여 그 병이 낫게 되었고 그가 죽기에 이르러서는 기년(期年)이 되는 동안에는 빈소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진성리(晋城里)에 살았다.>
강심(姜深): 자는 태함(太涵)이니 기도(器度:넓은 도량)가 웅위(雄偉)하여 온 고을의 신망과 존경을 받았다. 재예(才藝)가 초범(超凡)한데 여러번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여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시내 곁에 초정(草亭)을 짓고 늙도록 지내다가 세상을 마쳤는데 절구(絶句) 한수를 써서 이르기를, '감암산(紺岩山) 아래 설매(雪梅)의 마을에, 냇가에 모옥(茅屋)이 있어 대숲이 문 되었네. 여러 해에 병이 많고 인적(人跡)도 적었는데, 아침부터 홀로 앉아 황혼(黃昏)에 이르렀네'라 하였다. 경차관(敬差官) 김행(金行)이 그 집을 방문하고 이어 여기에 차운(次韻)하여 이르기를 '산이 물을 에워싸서 우리 마을 안았으니, 여기는 속된 인간(人間)의 화복문(禍福門) 이루었네, 대숲에 앉아보면 맑은 뜻이 넉넉하니, 한바탕 봄날에 단잠을 황혼에 맡겨 두자'라 하였다. 아들 강덕룡(姜德龍)이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이 있었기 때문에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추증하였다. <설매곡에 살았다.>
강의문(姜義文): 자는 의숙(宜叔)이요 생원 강호(姜灝)의 아들이다. 청빙(淸氷: 맑은 얼음)과 같은 지조와 가을 하늘과 같은 기상으로 악한 것을 미워하기를 악취(惡臭)와 같이 하였고 그 의(義)가 아니면 겨자 한 알도 취하지 아니하였다.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나니 사람들이 많이 애석하게 여겼다. <청원리(淸源里)에 살았다.>
강여관(姜汝寬): 자(字)는 군평(君平)이요, 호(號)는 매계(梅溪)니 매촌(梅村) 강덕룡(姜德龍)의 현손(玄孫)이다. 모부인(母夫人)의 명령으로 아우 여완(汝完)으로 더불어 업(業:학업)을 내구(內舅:외삼촌) 조묵재 석규(趙默齋 錫圭)에게서 받더니 동학(同學)들이 모두 추선(推先)하였다. 신사년(辛巳)에 이갈암(李葛菴)을 뵈니 일견(一見)에 기이하게 여겼다. 가례(家禮)하기를 견고(堅固)히 하였다. 일찍이 벽(壁) 왼편에 [경의성신(敬義誠愼)]의 네 글자를 걸어두었는데 묵재가 쓴 것이요, 벽 오른편에는 [국궁진취 사이후이(몸을 굽히고 있는 힘을 다하여 죽은 뒤에 그친다)]라는 여덟 글자를 걸어두었는데 갈암이 쓴 것이다. 유집(遺集)이 있어 간행(刊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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